제 2 장

 

3

 

깊은 밤. 해심은 오래간만에 일기장과 마주앉았다.

…사랑하는 나의 일기장아, 참으로 오래간만에 너와 속삭이게 된다. 그동안 너와 이야기를 나눌 짬이 정말 없었어. 리해해주지? 한달전 나는 너에게 우리가 풀섬개척의 대오를 뭇던 이야기를 적었다. 그때 기업소에서는 나에게 열흘이라는 시간을 주면서 바다가양식기술에 대한 초보적인 파악을 하라고 하였다.…

 

열흘. 그 열흘이 해심에게는 전투였다. 어떻게 날이 새고 저물었는지. 바다가양식에 대한 기술도서 여러권을 독파해야 했다. 오랜 양식일군인 오찬우아바이는 물어보는것마다 어떤것이든 막힘없이 설명해주었다. 책보다 경험, 학력보다 년한을 더 내세우는 바다사람들 일반의 관념대로 아바이는 《책에는 뭐라구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건 이런거다.…》 하면서 자기의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양식사업의 공정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주었다.

낮에는 아바이한테서 강의를 받고 밤에는 등잔불밑에서 읽고 또 읽으며 복습과 예습을 하였다. 그렇게 밤새 읽고나면 눈이 막 아프고 아침에 세면할 때엔 눈곱에서까지 그을음이 배여나왔다.

초보적인 기술전습이 끝난 다음 밤잠 한번 제대로 자보지 못하고 해심은 천영과 함께 풀섬으로 건너갔다.

지금 그동안의 사연들을 기억을 더듬어가며 일기장에 옮기는 해심에게는 자기가 풀섬으로 들어가던 날 잔교에 서서 바래워주던 찬우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풀섬으로 들어가던 보름전의 그날 전마선이 뜰 때 잔교끝에서 나를 바래우는 찬우아바이는 어째서인지 괴로움과 추연한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바래웠다. 왜 그랬을가? 아바이는 아버지와 윤철오빠가 희생된 그 섬으로 떠나가는 나를 그 어떤 자격지심으로 바래운것이 아닐가?》…

 

그렇다, 찬우가 해심이를 바래울 때 60을 넘긴 그의 가슴속에서는 말 못할 괴로움과 가슴저미는 추억이 고패치고있었다.

10년전인 1986년. 바다가양식면적을 10만정보로 확대할데 대한 당의 방침을 받들고 풀섬수역에 새 양식장을 개척할 때 온 시가 떨쳐나 지원하였다. 그때 수산사업소의 지원대를 책임지고 선장 진영일이 왔었다.

첫 양식떼를 띄우고 여러날만에 뭍으로 돌아오던 날 저녁 서쪽하늘엔 붉은 노을이 황황 타오르고 바다의 서쪽기슭은 쇠물빛으로 일렁이고있었다.

그때 50대였던 찬우는 첫 양식떼를 띄운 기쁨과 한잔 들이킨 술기운에 얼근해진데다가 열정으로 이글거리는 그 노을, 그 바다를 보니 젊은 날의 감정이 끓어북받쳐 목청껏 시구절을 읊조리였다.

 

일을 해도 일을 해도 더 하고싶고

하루를 십년으로 살고싶은 이 갈망은

 

그러다가 옆에 있는 진영일을 부둥켜안으며 너털웃음을 터쳤다.

《좋구만. 영일이, 생각나나? 벌써 10년전이야. 새로 나온 〈백과사전〉에 류진시를 대표하는 사진으루 〈류진만의 바다가양식〉이 올랐다구 자네가 우리한테루 막 뛰여왔댔지? 그런데 오늘은 이렇게 양식장이 넓어졌어. 이제 10년후엔, 응? 10년후엔!》

기쁨에 취하고 술에 취한 그 넉담에 모두가 가슴그들먹해오는 이름 못할 희열을 안고 그 노을을 환희롭게 바라보았다. 그때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의 첫 자욱을 풀섬에 찍은 열일곱살 단발머리 은향이와 정란이도 가슴에 두손을 꼭 가져다대이고 풀섬을 지나 아득한 수평선너머 서정으로 채색된 하늘에 무지개같은 공상을 그려보았다.

아, 그때 그 바다, 그 노을, 그 랑만! 그토록 가슴벅차게 그려보던 그 10년이 이토록 엄혹한 시련과 보내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잃은 아픔으로 찾아올줄 누가 알았으랴.

멀어져가는 전마선이 수평선저쪽으로 저녁어스름속에 묻혀버릴 때까지 잔교끝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돌아서는 찬우의 주름많은 눈귀가 축축히 젖어들었다.

(쉽지 않은 처녀야. 암, 진영일이 누구라구. 그 아비에 그 딸이지!)

그동안 사업소는 종업원전체가 총동원되여 산에 올라가 칡넌출을 걷어내고 나무를 베여냈으며 벼짚들을 모아들였다. 칡넌출로 바줄을 꼬고 벼짚으로 새끼를 꼬아 닻줄, 모줄을 마련하고 나무토막으로 떼를 만들었다. 양식장에서 쓰는 새끼는 농촌에서 쓰는 새끼와 다르다. 굵기가 10센치이상 되게 여러겹으로 꼬는데 그런 새끼 100메터이면 무게가 40키로 넘는다. 나무토막은 속을 파내고 거기에 마개를 끼워 부력을 크게 한 다음 썩지 말라고 타르칠을 한다.

청년반원들은 섬에 건너가 옛 목조건물을 헐어내고 주변정리를 한 다음 메워진 우물을 다시 파냈다. 그리고 초막을 세개 지어놓았다. 내부에 일손이 딸리기때문에 모아들인 칡넌출과 벼짚들을 배로 섬에 날라오면 밤마다 그것으로 바줄과 새끼를 꼬았는데 누구나 손바닥이 벗겨져서 피가 나오고 그 손이 바다물에 젖으면 참기 힘들게 쓰렸다. 통강냉이를 망돌에 갈아 미역같은것을 섞어서 범벅을 만들어먹는데 보기 험상한 음식이였지만 끼니때면 모두가 맛있게 먹군 했다. 일을 많이 하니 배가 고파서 그랬을것이다.

해심이가 섬에 들어온지 보름이 되는 오늘 아침 지배인 김서경이 식량을 싣고 혼자서 노저으며 섬에 건너왔다. 흰쌀과 밀가루, 거기에 콩기름까지 가져왔다. 점심식사는 흰쌀밥에 조개와 미역으로 소를 넣은 하얀 만두국이였다. 오래간만에 그런 음식을 마주하니 모두들 눈이 막 부시는것만 같았다.

섬기슭에 모두가 둘러앉았는데 은향이가 소담한 들국화꽃묶음을 꽂은 물병을 해심의 앞에 놓아주었다.

《해심아, 생일을 축하해!》

해심은 깜짝 놀랐다.

오늘이 바로 10월 5일, 자기 생일이였던것이다. 너무 힘들고 피곤해서 참고 버티는데 혼신을 기울이다나니 그자신도 생일을 깜빡 잊고있었다. 박수소리가 들리고 모두가 진심으로 축하말을 해주는데 해심은 눈물이 핑 돌고 귀가 멍멍해서 고개를 숙이고말았다.

은향이가 음식그릇들을 당겨놓고 수저를 쥐여주며 속삭였다.

《오늘이 네 생일인걸 생각 못했어. 미안해. 아까 지배인동지 오셔서야 생각했단다. 부끄럽구나, 반장이라는게. 나두 일이 힘들구 고단해서 남생각을 못했어. 욕많이 해라.》

가식없는 그 말이 해심에게는 참으로 정깊게 들려왔다. 솔직하고 소박한 동무…

《해심동무 생일을 기억에 남게 쇠주고싶어한건 비서동지요. 아무래도 와보고 식량도 싣고와야겠기에 겸사해서 나왔소.》 서경이 이렇게 말하며 방수포로 만든 배낭에서 크림곽들을 꺼내서 처녀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귀한 딸들을 섬에 내보내고 집에서들 마음이 좋지 않을거요. 그래서 구해왔는데 좋은거라구 하더구만. 발라들 보오. 녀자들은 뭐니뭐니해두 곱구봐야 돼. 그렇지 않소? 철국동무.》

철국은 은향이를 흘끔 보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크림 안 발라두 우리 처녀들은 다 곱습니다.》

그러자 천영이 능청스러운 웃음이 담긴 눈으로 철국이와 은향이를 번갈아보다가 시까슬렀다.

《처녀 고와서 섬에까지 따라왔지? 어느 처녀가 마음에 들었나?》

그 바람에 가벼운 웃음들이 흘렀다. 해심은 살며시 은향을 돌아보았는데 못 들은척 고개를 숙인 은향의 귀밑이 발갛게 타고있었다.

처녀들은 크림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며 속살거렸다.

《우리 지배인동지 멋쟁이지?》

정말 배가 고팠고 어쩌다 생긴 별식이니 모두들 정신없이 먹었다. 처녀들도 무슨 정신에 먹었는지 밥그릇, 국그릇, 반찬그릇을 말짱 다 내고야 정신이 들어 그만 다들 얼굴을 붉혔다. 작업반총각들가운데서 제일 나이어린 명남이가 《해심누이 생일덕분에 정말 〈사람답게〉먹었는데요. 거 흰쌀밥은 말랑말랑한게 씹지 않아두 저절루 넘어가누만요?》해서 한바탕 웃었다.

사람의 일생에서 잘 먹었던 기억 몇번은 남는 법이라고 하는데 해심은 자기의 스물두번째 생일이 일생 잊혀질것 같지 않았다. 흔하고 넉넉할 때 례사로왔던 음식들이 고난의 시기가 되니 그처럼 별식이 되였던것이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그 자리에서 청년반의 그간 사업을 총화했다. 천영이 말했다.

《그동안 다들 수고했소. 시작에 불과하지만 좋소. 앞이 내다보이거던. 이제 할 일은 뭔가? 여기다 집을 짓는거요, 보금자리부터. 말하자면 둥지를 든든히 틀어놓자는거지. 내 생각엔 가운데다 현관을 두고 량옆에 남자침실, 녀자침실을 휴계실겸으로 짓자는건데 다들 한번 보라구.》

주머니에서 종이접은것을 꺼내서 펴놓자 청년들은 빙 둘러앉아 머리를 맞대고 들여다보았다. 철국이가 대뜸 찬성했다.

《좋습니다. 인민군대 중대병실 비슷한게.》

지배인 서경은 선자리에서 그것을 피끗 내려다보고는 자기 배낭에서 종이말이들을 꺼내서 펼쳤다. 그것을 들여다본 순간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것은 옹근 한개 기업소가 그려진 콤퓨터인쇄도면이였다. 작업반실과 학습실, 식당과 목욕탕, 가공장들, 거기에다 수의실, 먹이조리실, 젖가공실이 달린 염소우리까지 있었다. 마당에는 롱구장, 배구장이 있고 섬기슭에는 어지간히 큰 배들도 댈수 있는 잔교가 쑥 나와있는데 부두가에는 창고도 큼직한것이 있었다.

《류진바다가양식사업소 풀섬양식기지전경도》라는 첫장을 들어내니 그다음엔 서른장정도 되는 대상별설계도면들이였다.

《이거 굉장하구만! 언제 이런걸 다?》

천영이 놀랍게 쳐다보자 서경은 시무룩히 웃었다.

《둘레가 15리나 되는 작지 않은 섬인데 할바엔 크게 합시다. 여긴 우리 섬입니다, 〈령토분쟁〉도 〈리권다툼〉도 없는 우리 섬. 그래서 륜곽적인 안을 만들어 산업설계에 의뢰했더니 이렇게 나도 생각 못한 멋진 설계가 나왔습니다. 부두설계는 이제 현지에 나와서 바다물흐름과 파도세기를 조사하고 하겠답니다. 평양건설건재대학을 갓 졸업한 처녀설계가가 열흘동안 밤을 꼬박 밝히면서 했답니다.》

그 말에 해심이가 깜짝 놀라며 설계도면들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분명 류진시산업설계사업소인데 대상책임, 설계, 계산란에는 모두 《리현숙》이라는 이름이 또렷이 인쇄되여있었다. 매 란의 이름옆에는 너무도 눈에 익은 현숙이의 수표가 있었고.

부지중 해심의 입에서 《현숙아!》하는 부름이 새여나왔다. 현숙이는 도시설계사업소로 파견장을 받았는데 어떻게 산업설계로 갔을가? 해심은 현숙이가 자기옆에 허리를 착 짚고서서 《자, 어때?》 하고 그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는듯싶어 주위를 휘둘러보기까지 했다.

서경은 그러는 해심에게 《옳소. 현숙이라고 했소. 그 동무를 아오?》 하고 물었다.

해심은 《네, 우린 평양제1고등중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대학두 평양에서 같이 다녔구. 제일 친한 동무예요!》 하고 부르짖다싶이 대답했다.

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댔구만. 어제 도면을 찾으면서 수고했다구 하니까 이 도면들이 가면 제일 기뻐할 사람이 지금 풀섬에 있다구 하는게 아니겠소. 그가 보고 마음에 든다면 자긴 더없이 기쁘겠다구,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백번이구 천번이구 다시 설계할 용의가 있노라구 말했소. 누구인가구 물으니 가서 섬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보여주면 안다구 하질 않겠소.

조건이 유리한 도시설계에 배치받았댔는데 기어이 산업설계를 하겠다구 제기해서 옮겨왔다구 그곳 사람들이 말하더구만.》 그리고는 천영을 돌아보았다.

《난 그래서 비서동지가 섬에 나올 때까지 아직 합의보지 못한 이 설계안을 어떻게 미리 알구 산업설계에 앞지른게 아닌가 하구 생각했더랬습니다.》

천영은 그 말에는 대답없이 해심이를 생각깊이 바라보며 혼자말처럼 나직이 말했다.

《그래, 이걸 놓구 제일 기뻐할 사람이야 우리 해심이지.》

그 말이 안고있는 의미가 가슴에 울컥 마쳐와 해심의 큰 눈에 물기가 핑― 해졌다. 그러는 해심의 손을 은향이가 살그머니 잡아주었다.

(현숙아!)

해심은 친하고 또 친한 동무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현숙이의 인생설계도인 환상설계《결심》이 눈앞에 떠올랐다.

현숙이는 혹시 내가 여기 풀섬에 온것을 알고 자기의 배치지를 바꾼것은 아닐가? 나를 위해서, 아버지와 윤철오빠의 사랑이였고 오늘은 내 사랑이 된 우리 바다를 위해서.

해심이가 격해지는 감정을 애써 누르는데 서경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무역회사를 조직하던 초기부터 이 섬과 주변수역을 눈독들였습니다. 이 드넓은 수역에서 2~3년만 잘하면 돈을 물퍼내듯 퍼낼수 있습니다. 양식물들을 가공해서 말입니다. 거기에다 적당한 구릉에 풀판이 무성한 이 처녀지는 리상적인 자연방목지입니다. 방목공도 울타리도 필요없고 맹수와 다른데서 퍼져오는 전염병피해도 걱정이 없는 리상적인 방목지. 사실 우린 이 재산만 가지고도 잘살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껄껄 웃었다.

《내 저 무역회사 사장자리에 그냥 있었다면 래년쯤엔 이 섬만이 아니라 양식사업소까지 통채로 먹어치우는건데. 이젠 여기 왔으니 누구한테도 먹히우지 않는 거물로 만들어야지.》

그 말에 모두는 꼭 잠에서 깨여난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눈으로 풀섬과 주변수역을 둘러보았다.

길이가 서너마일되는 류진만은 남쪽입구에 둘레 40리의 솔섬이 있고 그뒤에 풀섬이 있다. 만의 서쪽기슭에는 굴지의 무역항, 선박공업기지들이 있고 북쪽켠에는 이름난 류진수산사업소와 그들의 양식사업소, 동쪽기슭을 따라 세소어업사업소, 물고기가공공장, 수산협동조합들이 줄지어 들어앉아있다. 큰 무역배들과 어선들이 드나드는 항로에서는 동쪽으로 치우쳐있고 앞에 있는 솔섬이 날바다 파도를 막아주는 이곳이야말로 정말 보배수역이였다. 그리고 이때까지 바다생각만 했지 섬자체를 자연방목장으로 하여 목축기지를 일떠세울 생각은 누구도 못했었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있는데 서경은 빙그레 웃었다.

《자본주의세계와 맞서 살아야 하기때문에 우리 경제일군들은 자본가들보다도 몇배로 머리를 쓰고 타산해야 하오. 류진국제무역지대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나날까지 심혈을 바쳐 구상하신 지대요. 이 무역지대에서 우리는 온 세상 자본가들과 맞서야 하오.》

모두가 감동의 눈길로 서경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제 입이나 건사하고 기껏해서 한개 기업소나 살려내는데 급급했는데 자기네 지배인은 한개 지역경제, 나라경제 전반을 놓고 사색하고 탐구한것이 아닌가. 자기들과 수준이 대비도 안되게 높고 뛰여난 경제일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심은 무엇인가 새로운 지평이 눈앞에 펼쳐지고 지금까지 안아보지 못한 거대한 세계를 안은듯 했다. 바로 여기서 자기들이 세계자본주의와 맞서게 된다는 어마어마한 생각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럴수록 선망의 눈길을 서경에게서 뗄수 없었다.

《자, 이젠 이 설계도를 어떻게 실현시키겠는지 의논들 해보자.》

천영의 말에 다들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갑자기 쌀쌀한 바다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북쪽의 바다는 10월이면 춥다. 벌써 8월말부터 서북풍이 불고 청년반원들은 아침작업때 입었던 솜옷을 이제는 하루종일 벗지 않는다. 설계도는 희한했지만 그 엄청난 일감앞에서 모두가 으스스한 바다바람을 느끼며 옷깃을 세우고 어깨를 옹송그렸다.

은향이가 먼저 물었다.

《이건 언제까지 해야 됩니까?》

서경은 짧게 대답했다.

《올해안으로. 정확히는 40일동안.》

40일?!

천영까지도 놀라서 쳐다보았지만 서경은 자신만만한 눈으로 은향이만 보며 말했다.

《왜? 안될것 같소? 사업소전체 력량을 일시에 투하하자는거요.》

《자재가 문제입니다.》

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소. 그래서 바로 그걸 토론하자는거요. 세멘트는 좀 체결해놨는데 그걸로 미장이나 꽤 하겠는지. 벽체를 쌓을 블로크와 벽돌은 어방도 없소.》

철국이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까짓거 블로크, 벽돌이 없으면 뭐랍니까? 산자를 엮어서 진흙으로 벽을 쌓읍시다!》

서경은 말끝을 홱 잡아채며 날카롭게 물었다.

《산자는 뭘로 엮겠소? 그 많은 각재가 어디 있소?》

《나무를 찍어다 켜야지요!》

철국은 도전적으로 웨쳤다.

《틀렸소, 해병. 사업소가 받은 림지는 이번에 떼감을 마련하느라구 다 베먹었소. 산림경영소에서 이젠 림지를 더 주지 않을거요. 지금 림지사정이 칼끝같다는걸 모르오?》 그리고는 사업소쪽을 향해 돌아서며 멀리 뭍을 바라보았다.

《지금 기업소에 나무를 가득 쌓아놓았으니 많아보이지만 배수리, 잔교보수, 여기 새 잔교, 이렇게 쓰다나면 건물웃설미감도 모자랄 지경이요.》

철국은 대답이 막히고 더는 궁리가 떠오르지 않아 주저앉아버렸다.

은향이가 혼자말처럼 나직이 말했다.

《토피를 찍자요.》

이번에도 서경은 머리를 저었다.

《토피도 얼마간은 찍어야지. 그러나 토피로 한다면 그 많은 토피를 언제 찍어서 언제 말리워 쌓겠소? 40일동안 토피나 찍다가 말겠소. 그리구 가공장들은 물을 많이 쓰기때문에 토피로 쌓은 벽이 견디지 못하오.》

《그런데 왜 꼭 40일입니까? 한 서너달 끈끈하게 하면 안됩니까?》

명남이도 한마디 끼웠다.

서경은 그러는 명남이에게 타이르는듯 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이 10월이지? 립동이면 물이 언다. 그러면 공사를 못해.》

더는 누구도 말이 없었다. 천영도 덤덤히 앉아서 종이말이들을 멀찌감치 건너다볼뿐이였다.

해심은 갑자기 무엇인가 뒤바뀌운듯 한 생각이 들었다. 풀섬을 살리자고 지배인과 함께 불을 걸었던 초급당비서가 이 순간 피동에 빠져있었다. 지배인은 오래동안 구상하고 무르익힌 작전안을 초급당비서에게도 내비치지 않은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천영이 저으기 불쾌해하는것 같았다.

바다바람에 흩어지는 흰머리카락들이 측은하게 안겨오면서 기운차게 솟구치는 청솔과 이제는 옹이박이광솔투성이가 된 늙은 소나무처럼 두 일군이 확연히 대조되였다. 아무런 사전토의도 없이 깜짝 놀랄 설계도를 내놓아 초급당비서를 사람들앞에서 이런 난감한 처지에 빠뜨려놓은 젊은 지배인이 해심에게는 야속하게 생각되였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자 한사람한사람 뜯어보던 서경은 너무도 빤한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상대에게 참지 못하고 답을 대주듯이 그 대답을 내놓았다.

《난 돌로 짓자는거요. 이 섬기슭 어디나 흔한 막돌을 모으고 바위들을 깨고 다듬어서 돌담을 쌓듯이 벽체를 축조하면 얼마든지 될수 있소. 또 견고성도 보장할수 있고.》

사람들이 일시에 머리를 들었다. 천영도 무릎을 쳤다.

《기발한 착상입니다, 지배인동무.》

서경은 싱긋 웃으며 도면말이들을 거두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래일부터 대렬을 편성하고 전투에 진입하겠습니다. 그동안 잠자리도 불편한 이 섬에서 수고한 청년반동무들도 오늘은 일찌감치 사업소로 들어갑시다, 하루밤만이라도 집에서 잠을 자고. 그래야 래일부터 또 일을 하지.》

모두다 일어섰는데 해심에게는 일어서는 그 모양들이 각이하게 안겨왔다. 제일먼저 철국이와 명남이가 《자, 이젠 그만 쉬고 또 해봅시다.》 하듯 벌떡 일어서고 그다음 은향과 천영이 곰곰한 생각과 무거운 사색에 잠겨 천천히 일어섰다. 집으로 보낸다는 바람에 생글생글 웃으며 자기들끼리 속살거리면서 일어서는 처녀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엊그제 중학교를 졸업한 나어린 패들이고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이 근심스러워 섬을 휘둘러보고 공사량을 가늠해보며 움쭉움쭉 일어서는 처녀들은 일에 어지간히 치여난 해심이나이또래들이였다. 그런가 하면 지금까지도 힘들었는데 이제 더 힘든 일이 앞에 있는것이 아찔한듯 맥을 놓고 앉아있다가 나중에야 마지못해 일어서며 바지를 맥없이 툭툭 터는 명남이또래의 나어린 총각들도 있었다.

명남이가 남은 쌀자루와 밀가루포대, 기름통들을 턱짓하며 철국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저것들은 여기다 놔두구 간대요?》

그 말에 대답하듯 서경이 은향을 찾았다.

《반장동무, 오늘 가져온 쌀과 밀가루, 콩기름을 작업반성원들에게 꼭같이 나누어주시오. 다들 한달만에 집으로 들어가는데 그거라두 들고가야지 집들에서 이 지배인, 당비서 욕하느라구 변이겠소.》 그리고는 철국이와 명남이에게로 돌아섰다.

《동무들은 여기 떨어지시오. 이제부턴 이 섬을 하루도 비워놓지 않겠소. 이젠 여기에 우리 재산이 있거던.》

그 말이 이상한 여운을 일으키며 모두가 섬을 다시한번 둘러보게 하였다.

우리 재산!

칡넌출과 벼짚으로 꼰 투박한 바줄과 나무토막에 타르칠을 해서 모양사납게 시커먼 대용떼, 바위돌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놓은 닻아닌 닻들이였지만 그것은 분명히 그들의 재산이였다. 피가 지고 터갈라지는 손으로 마련한 귀중한 재산.

《알았습니다. 그런데 명남인 들여보냅시다. 혼자서두 얼마든지…》

《안되오.》

지배인이 말끝을 잘라치웠는데 말마디사이를 짤막한 그 한마디가 얼마나 날카롭게 베고지나갔는지 철국의 다음말은 미처 꺾이울새 없이 그대로 이어졌다.

《…지킬수 있습니다.》

산들산들하게 날이 선 예리한 칼날이 긴 떡국대를 홱 베고지나갈 때 아마 그럴것이다, 잘리워지지 않고 지나간것처럼.

《경비는 두사람이상 서야 하오. 그리고 동무들은 오늘밤 경비를 서고 래일 하루동안 저런 초막을 몇개 더 지으시오. 개수는 찍지 않겠으니 지을수 있는껏 짓소. 모레부터는 전체 종업원들이 다 여기 들어와서 생활해야 하오.

그럼 모두 떠날 준비들을 하시오.》

명남이가 아쉬운듯 입을 다셨다.

《해해, 오늘 저녁은 〈사람답게〉 자는줄 알았더니.》

서경은 그러는 명남이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미안하다, 명남이. 섬을 부탁한다.》

명남이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마십시오, 노느라구 한 말인데.》

모두가 떠날 준비를 하느라고 초막으로 가고 지배인과 당비서만 천천히 배를 댄 기슭으로 걸어갔다.

《사실 비서동지가 섬에 나올 때까지 작전세부안들이 잘 서지 않아 합의를 보지 못했더랬는데 갑자기 합숙건설안을 내놓으니 사전토의없이 설계문건들을 내놓았습니다. 로동자들이 비서동지가 내놓은 안대로 알고있다가 예상치 않게 큰 일감이 다시 나오면 맥이 나 할가봐 말입니다. 처음부터 큰마음을 먹게 해야지.》

서경의 말에 천영은 웃음을 지었다.

《알만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꼭 40일이요?》

《그건 미역, 다시마 모내기적기까지 이제 남은 날자입니다. 죽으나사나 이 기간에 끝내야 합니다. 만약 중도에서 세웠다가는 우린 올해뿐아니라 다음해까지도 놓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일어서지 못합니다.》

뒤에 떨어져있다가 앞으로 걸어가며 나누는 두 일군의 이야기를 귀동냥해 들은 해심은 생각이 깊어졌다. 비상한 두뇌를 가진 사람, 깊은 속마음도 있고 날카로운 결단력도 있는 일군이라는 생각이 들자 《우리 지배인동지 멋쟁이지?》 하던 처녀들의 속살거림이 다시 새겨졌다. 사고와 작전에서 정말 치밀하고 멋진 사람이다. 이제 전개력, 실천력이 어떻겠는지? 아무래도 풀섬양식기지건설전투의 많은 짐이 초급당비서에게 얹혀질것이라고 해심은 생각했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눈앞에 현숙의 환상설계 《결심》이 자꾸만 떠올랐다. 현숙이는 자기가 지혜와 열정을 다 바쳐 그어가는 선 하나, 찍어가는 점 하나마다에 얼마나 간고한 로동과 땀이 바쳐져야 하는지 알고있을가?…

다른 사람들은 근 한달만에, 해심은 보름만에 뭍으로 나오고있었다. 마치 몇달, 몇해만에 돌아오는것만 같았다. 가까와오는 대지의 기슭이 왜 그런지 눈물이 나도록 유정하게 안겨왔다.

《섬에서 뭍으로 들어오는 감정이 별나지?》

은향이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요. 모든게 별스레 다정하구 친근하구 따스해보여요. 동무도 처음엔 그랬나요?》

은향의 얼굴에 노을처럼 그윽한 미소가 비꼈다.

《지금두 같애. 매번 새롭구 귀중하구 정다워보이군 한단다. 우리만 그런게 아니야. 저 솔섬사람들은 마을도 있고 학교, 병원, 상점두 다 있는 큰섬에서 사는데두 뭍에 나올 땐 언제나 눈물나게 반갑다질 않니. 섬은 암만 커두 자식땅이구 뭍은 어머니땅인가봐. 떨어져있던 자식이 어머니를 찾아가는것 같거던.》

의미깊은 그 말을 곱씹어 새겨보며 해심은 가까와오는 뭍을 다감하게 보고 또 보았다.

집에 들어서니 현숙이가 놓고간 편지와 꽃묶음이 해심이를 기다리고있었다.

《해심아, 생일을 축하해!

섬에서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너에게 이 꽃묶음을 두고 간다. 빨간 꽃송이 그리고 푸른 잎사귀, 깨끗하고 열정적이고 영원한것을 상징해. 진실하고 뜨겁고 변함이 없을 현숙이의 사랑인줄 알아줘.

난 도시설계가 아니라 산업설계로 갔다. 그렇게 하기까지의 긴 사연을 더 말하고싶지 않다.

풀섬엔 양식장이 있어야 한다는 너의 주장이 인생의 리정표를 바다에 세워놓은 내 동무의 결심에서 울려나온 목소리인것을 현숙인 미처 몰랐어. 진심으로 사과해.

그러나 섭섭하구나. 넌 어쩌면 현숙이가 한생의 결심을 말해주는 그 순간에도 자기의 결심을 말해주지 않았니? 난 솔직히 네가 인생의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줄 알았댔다. 너의 고향길이 아버지를 잃고 그토록 다정했던 윤철오빠를 잃은 슬픔에 못이겨 모든것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 인생의 꿈과 과학을 도피하는 나약한 길로 잘못 생각했댔어. 용서해.

장한 결심을 하고 생활의 첫발자국을 용감히 내디딘 나의 동무 해심이! 현숙이는 더 뜨겁게 사랑한다. 그 사랑이 고향에 바치는 나의 첫 설계인 풀섬양식기지설계에 담겨져있는줄 해심이가 알아주었으면 해. 인차 그곳 새 부두설계를 위해서 나도 가겠어. 그때 우리 그립던 정을 나누자.

해심아, 현숙이가 좋아하는 가을이 왔어. 아침출근길에 나서면 파르스름하게 색갈까지도 있는것만 같은 청신한 대기속에 무엇인가 산뜩하고 뾰족한 기운이 따끔히 온몸을 찌르는것을 느낄 때 나는 치밀어오르는 정열과 짜릿한 즐거움을 감촉하고 흐뭇해한다.

단풍이 지기 시작했다. 잎이 떨어져가는 앙상한 가시줄기에 매달려 마지막힘을 모아 빨갛게 타고있는 장미꽃송이. 만약 그 어떤 강렬한 욕망이 형체를 가진다면 그것은 장미꽃일것이다. 그래서 현숙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인줄 너도 알지?

창백하게 웃고있는 코스모스, 황금색 은행나무단풍… 이 독특한 가을정서를 배경으로 찍은 독사진을 너에게 한장 보낸다. 다른 한장은 내가 간수하고있다가 언제인가 현숙이의 사진을 요구할 그 동무가 생기면 주겠어.

우린 어릴적리상에로 다같이 돌진하고있구나. 나는 고향의 건축, 너는 고향의 바다에로.

10년만에 집에서 쇠게 되는 이 생일날이 너에게 기쁨에 앞서 아픔일줄 모르지 않아. 그러면서도 현숙이는 해심이, 네가 바다처럼 억세고 진함이 없을것이라는것을 굳게 믿어!

너의 현숙. 오늘 아침 7시 30분.》

사진속의 현숙이가 해심이를 마주보고있다. 만만한 자신심과 도전적인 조소가 첫눈에 배겨오군 하는 그 인상이 아래로 약간 휘여든 눈꼬리로 해서 부드러움과 따뜻함으로 바뀌우군 하는것은 제일 가까운 동무인 해심이만이 감득하는 현숙이 성격의 본질이다.

관찰력이 뛰여난 윤철도 평양제1고등중학교를 다니는 그들의 초상을 그려줄 때 바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해서 현숙이면서도 현숙이가 아닌 현숙이를 그려놓고 속상해했다.

그때 현숙이는 제 초상을 보며 흡족해했지만 해심이는 《아니야, 너같으면서두 완전히 너는 아니야.》하고는 오빠에게 돌아서서 항변했다.

《이건 현숙이가 아니야요. 이 현숙인 맑고 차거운 겨울날씨같이 그렸지만 사실 현숙인 봄날처럼 따스하구 포근해요.》

그 말에 현숙이가 손벽을 치며 깡충 뛰였다.

《해심아, 넌 현숙이보다 현숙이를 더 잘 아누나?》

해심이 말을 들은 윤철이가 살짝 까부러진 그 눈꼬리에 화필의 력점을 박으니 그제야 완전한 현숙이가 되였다.

현숙이는 너무 좋아 제 초상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이건 정말 나야!》

만약 이 자리에 현숙이도 있고 윤철이도 있었더라면 현숙이가 그리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사진을 놓고 그들은 《심도있는》 분석을 했을것이다.

해심은 목메인 그리움에 잠겨 창밖으로 바다를 점도록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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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 단동 - 로동 - 2021-12-28
안녕하십니까? 제가 조국에서 이 도서를 열람할때 기억에 의하면 1장이 시작되기전 주인공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언약하는 서문이 별도로 존재했던 생각이 듭니다. 그 부분이 루락되였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관리자 - - 관리자 - 2021-12-30
미래선생의 기억이 정확합니다. 빠진 서문내용을 올렸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열람해주시기 바랍니다.
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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