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5
현숙은 해심이가 생각한것과는 달리 배치지인 도시설계사업소로 가지 않고 산업설계사업소로 파견지를 옮겨버렸다.
고향 류진에 도착한 그날로 자기의 리상과 포부를 실현할 무대인 도시설계사업소로 찾아갔던 현숙은 거기에서 천만뜻밖에도 유민수를 만났다. 현숙은 깜짝 놀랐으나 민수는 그렇게 만날것을 예견하고있은듯 천연스레 인사를 건넸다.
《왔구만. 이렇게 만날줄 생각 못했겠지? 난 우리가 여기서 다시 만나리라고 생각했소.》
첫 순간의 놀라움은 사라지고 처녀의 눈빛이 차거워지기 시작했다.
《왜 왔나요? 여긴 성공의 무대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민수는 빙긋 웃었다.
《무대는 바뀌여질수도 있소. 난 여기에다 대외청부설계실을 내왔소. 그걸 내오느라구 고생은 좀 했지만. 그리구 현숙동무가 오면 우리 실에 보내달라구 이미 제기했소.》
낯이 새파래지는 현숙이의 모습을 지그시 마주보던 민수는 저으기 정색해서 말했다.
《난 동무가 속이 좁지 않다구 생각하오. 어쩌겠소. 지나간 일은 그것으로 종결짓고 우리 모든걸 새롭게…》 민수는 말을 채 끝맺을수가 없었다. 현숙이가 듣지도 않고 그의 곁을 홱 지나가버렸던것이다. 오연히 머리를 쳐들고 가버리는 현숙의 뒤모습을 뻥해서 바라보던 민수는 어설프게 웃으며 돌아섰다.
칠순을 눈앞에 둔 도시설계사업소 소장 오근성은 현숙이가 들어서자 너무 반가와 두손을 잡아끌고 어깨를 쓸었다.
《왔구나, 현숙이가 왔어!》
현숙이에게 유년시절부터 건축가의 꿈과 포부를 심어주고 재능의 싹을 키워준 로설계가였다. 5년전 1중학교를 졸업한 현숙이가 지망대로 평양건설건재대학에 추천되였을 때에는 대학교단에 서있는 자기의 옛지기들에게 소개편지를 여러통이나 써서 쥐여보냈었다. 대학에 꼭 입학할수 있게 도와달라는 곡진한 부탁이 담긴 편지들이였다.
그런데 자존심이 당돌하기란 이를데 없는 현숙이는 입학시험에 높은 성적으로 합격한 다음에야 그 편지들을 전해주었다. 절대로 그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제 실력으로 대학에 입학한다는것이였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근성은 《그게 바로 우리 현숙이야.》 하고 오히려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랑했다. 《이런 애들이 이제 한몫하지!》
현숙이도 철부지소녀시절부터 사연많은 고향땅의 력사를 가르쳐주고 선 하나, 점 한점도 깊은 애정과 높은 책임을 담아 긋고 찍어가는 설계의 세계를 알게 해준 이 평범한 건축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따랐으며 건축계의 그 어느 명망높은 건축가들보다 더 존경해왔다.
《민수가 현숙이는 꼭 여기로 올거라면서 자기와 함께 일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 말에 현숙은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았다가 저으기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대외청부설계라는건 도대체 뭘하는뎁니까?》
근성은 그런 현숙이를 덤덤하게 바라보다가 흥심없이 대답했다.
《글쎄? 무역지대에 들어오는 국내무역회사들과 외국회사들에 설계를 상품처럼 주문받아서 팔아먹는다는지. 말하자면 설계사업비를 건설주와 설계자가 합의가격으로 한다는거다. 그러다나니 그 설계실은 시건설계획과는 상관없이 흥정이 맞아서 계약된 설계만 한다. 그런걸 거래하구 흥정하느라구 민수 그 사람은 도면에 마주앉을새가 없다. 줄창 대외사업만 하지. 그래서 자기네 실에 현숙이같은 실력자가 있어야 한다는거다.》 어쩐지 탐탁치 않아하는 기색이였다.
《난 민수가 대학을 졸업하구 중앙설계기관에 가서 학위까지 받아가지고 여기로 자진해서 왔길래 뭘 좀 해보겠거니 했더랬는데…》
《어쨌든 선생님도 동의하셨길래 그런 설계실이 사업소에 생긴거겠지요?》
그 말에 근성은 움쭉 일어서서 자기의 설계탁앞에 가앉았다.
《나두 모르겠다. 우리같은건 이젠 낡았다구 은근히 몰아대지, 웃기관들을 찾아다니면서 쑤셔대지, 좌우간 시험적으로 해보라는 지시가 있긴 있었다. 그 시험이라는데서 통과되자니까 너처럼 수준높은 설계가가 있어야겠지.》
앉아서 창밖을 응시하는 로설계가를 현숙은 계속 지켜만 보았다.
《거기에다 돈을 많이 내겠다고만 하면 건설부지도 좋은데로 명시를 떼줘야 한다고 요구한단다.》
현숙은 아연해졌다.
《건설이야 도시전망계획에 복종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근성은 어떤 의분이 치밀어오르는지 저으기 어성을 높였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무역지대가 새로 창설되기때문에 본래의 전망계획은 의의가 없다구 무시해버리는데 그럴수록 력량을 집중해서 총계획설계를 빨리 앞세워야지. 그런건 뒤전에 밀어놓구 돈주머니를 흔드는대루 저마다 좋은 자리를 골라서 망탕 건설해서 되겠니? 일이라는거야 선후차가 있는 법이지. 앞세워야 할게 떨어지구 뒤선에서 따라와야 할게 앞질러나가니.
내 생각다못해 어제 시에 제기했다. 곧 료해하겠다고는 하더라만.》
현숙은 더 말이 없이 한동안 앉아있다가 결심이 생긴듯 일어섰다.
《선생님, 절 산업설계에 보내주십시오.》
근성은 의아히 쳐다보았다.
《그건 왜? 넌 우리 도시설계루 파견장을 받아왔다면서?》
《산업설계를 하고싶어서 그럽니다.》
로인은 시무룩이 웃었다.
《너두 시답지 않은게로구나. 그래두 산업설계보단 우리가 낫다. 바루 가는건지 외루 가는건지는 몰라두 청부설계라는걸 하면서 종업원생활문제두 좀 풀리구. 그리구 민수야 네 상급생이니까 잘 아는 사람들끼리는 마음맞추기두 쉽지.》
《저에겐 산업설계가 낫습니다. 먹을알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건 아니니까 문제될것두 없겠지요? 그렇게 제기해주십시오. 저도 제기하겠습니다.》 할 말을 다 했다는듯 돌아서던 현숙은 머리를 숙이며 퍽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선생님. 전 선생님과 함께 일하고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는 같이 일하고싶지 않습니다. 함께 있으면 우리때문에 선생님한테도 딱한 일이 많을겁니다. 현숙인 그걸 바라지 않아요.》
근성은 그러는 현숙이를 이윽히 응시하다가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현숙인 민수하구 다르지.》 그리고는 천천히 다가와 현숙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산업설계두 중요하다. 이 류진에 훌륭한 산업시설들도 일어서야 한다. 이미 있던 공장들도 현대화해야 되구. 지금형편에선 그게 더 힘든 일이다. 더 힘든 일이야.》
그날밤 현숙은 잠을 이룰수 없었다.
유민수. 건축공학부의 세해 상급생. 류진도시건설사업소에서 일하다가 건설전문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에 편입한 그는 총명하고 정열적인 청년이였다. 학부가 다르지만 한고향출신이고 한스승에게서 꿈을 키운 현숙이에게 깊은 관심을 돌리고 학업을 사심없이 도와주었다. 전문학교시절에 건축학을 전공한 그는 유능한 건축가가 되려면 공학을 잘 알아야 한다고 대학에 편입할 때 공학부를 선택했다. 현숙은 그런 유민수를 존경했다.
성공. 꿈은 같았으나 그 성공이 어떤것인가에 대한 견해가 아득히 차이나는것을 느꼈을 때 처녀는 전률했다. 졸업을 앞둔 민수가 인생의 목적지를 바꾸려는 결심을 터놓았을 때 현숙은 잘 믿어지지 않았다.
인민대학습당에서 함께 돌아오던 그날 저녁은 별로 구름이 무겁게 하늘을 덮고있었다.
《현숙동무, 성공하려면 중앙설계기관에 있어야 돼. 고기두 큰물에서 놀아야 마음껏 큰다지 않아?》
《우리의 성공은 류진의 새 모습이라구 하지 않았나요, 현대적인 도시.》
민수는 웃음을 지었다.
《그랬지. 그러나 난 지금 생각을 달리하오. 우리 류진도시설계사업소 소장아바이만 봐두 그렇지. 인생말년에 뭐가 남았소? 중앙설계기관에 있는 그 아바이 동료들은 온 나라가 다 알구 존경하는 사람들이지.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람들도 있고. 그러나 설계가 오근성이다 하면 누가 아오?》
현숙은 그 말에 아연해지며 민수를 쳐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함께 존경하던 사람에 대해서 너무도 판이한 견해를 가지고있는것이 놀라왔다. 자기 고장 사람들도 다 모르는 건축가. 그 말도 옳긴 옳다. 그러나…
현숙은 뭔가 세차게 반발하고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곧추 내뻗군 하는 자기의 발끝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보도블로크의 줄에 맞추어 정확히 발을 짚으려고 애썼다.
《류진에 가야 뭘하겠소? 5~6층, 기껏해서 10층짜리 아빠트 몇개, 봉사망 몇개, 공원 몇개, 그러다나면 인생은 끝이요. 동무의 재능과 열정이면 얼마든지 공훈설계가도 되고 인민설계가도 될거요. 그러나 지방에 내려가면 그렇게 못돼, 그 지방도시가 언제? 지금 경제형편이 어떤지 현숙동문 아직 모르지?》
《난 류진을 떠난 다른 포부에 대해서 생각해본적이 없어요.》
현숙이가 내짚는 보도블로크의 그 칸에 민수의 발이 짚어졌다. 그리고 그의 한쪽어깨가 현숙의 어깨에 닿았다. 그러자 현숙은 자기가 맞추어짚던 그 줄에서 옆으로 한칸 비켜섰다.
《그 리상은 물론 훌륭하지. 내 그래서 동무를 더 귀중하게 생각해.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지? 그까짓 지방도시건축물이나 설계하는건 3점짜리들이 가서두 얼마든지 할수 있거던. 우린…》
현숙의 발이 딱 멈춰섰다. 고개를 번쩍 드는 처녀의 눈에서 순간 불꽃이 탁 튀였다.
《3점짜리라구요? 우리 류진에 3점짜리건축물들이 서도 일없다는건가요?》
민수는 그만 당황해졌다.
《아, 내 말은 그런게 아니구…》
현숙은 먼저 걸음을 옮기며 자기가 본래 걷던 보도블로크의 그 줄에 다시 들어섰다. 그러자 민수의 발은 옆으로 비켜졌다.
《믿어지지 않아요. 난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갑자기 눈물이 쿡 솟았다. 보도블로크의 네모칸줄칸들이 물밑에서 보이는것처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현숙은 출렁거리는 그 줄에 고집스레 맞추며 발을 앞으로 내짚었다.
《현숙동무, 현숙이…》
처녀의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단호하게 고개를 쳐든 현숙은 수십개의 주로처럼 곧추 뻗어간 보도블로크의 줄들에서 자기의 주로를 헛갈릴세라 온 신경을 눈과 발에 모아 걸음걸음을 정확히 박고있었다. 격분? 아니다, 아직은 격분이 아니다. 다만 놀라움과 야속함, 허무감이 있을뿐이다.
부지런히 따라서며 민수는 설복하듯 중얼거렸다.
《지금은 리해가 안될거야. 그러나 동무도 졸업반이 되면 그땐 내 선택을 리해하구…》
아니! 현숙은 마음속으로 세차게 도리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내 꿈, 내 결심, 내 포부는 절대로 변할수 없다. 이걸 알아야 한다, 이런 현숙이를!
마음속 그 웨침을 발자국소리로 울리는듯 처녀의 구두는 보도블로크바닥을 야멸차게 딱딱 울렸다. 대학기숙사에 도착하여 서로 헤여질 때까지 그들사이에는 더 말이 오가지 않았다.
밤, 교정의 밤. 그날밤 소나기가 내렸다. 강의실에 나와 책을 펼쳐들었으나 도저히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던 현숙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무더운 여름밤 소나기가 내리건만 도무지 시원하지 않고 답답하기만 했다. 아래층 강의실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꽃밭의 꽃송이들이 소나기속에서 몸을 옹송그리며 뒤채이는것이 눈에 밟혀왔다. 꽃송이들을 받들고있는 연약한 꽃대들이 사정없이 퍼붓는 비발속에서 몸부림치고있었다. 현숙은 민수의 그 결심이 믿어지지 않았다.
《멋있어! 현숙이, 무서운데. 내가 류진시 1등가는 건축가가 되자구 했는데 이러단 현숙이한테 그 자리를 떼우겠는걸.》
《류진바람에 견디는 지붕구조》. 건축학부 학생인 현숙이가 건축공학부의 최우수생이라는 유민수에게서 건축구조공학에 대한 지식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착상하고 만들어본 구조설계를 놓고 민수가 깜짝 놀라던것이 불과 몇달전 일이다.
《이런건 우리 류진출신 건축가들만이 생각하구 만들어낼수 있는거야. 하긴 류진출신이라구 다 만들수 있는것두 아니지. 전공과인 나두 생각 못했던거니까. 그리구 이런 계산방식은 발견이야.》
구조설계도면과 계산서들을 보고 또 보면서 민수가 한 말이다. 류진시의 건축. 그들사이는 그 하나의 주제를 놓고 더 가까와졌다.
억수로 퍼붓는 소나기속에서 몸부림치는 꽃밭. 번개의 섬광이 번쩍했다. 현숙은 민수를 다시 만나보려고 결심했다. 그래, 일시적인 충동이고 현혹이야. 명예, 다만 그것뿐이라면 그 사람이 그런 불타는 정열을 발휘할수 없고 높은 지식도 쌓을수 없어. 그리고 한생을 류진의 도시건축에 바치고있는 오근성선생을 우리는 다같이 존경해오지 않았던가.
문가로 다가가던 현숙은 잡았던 문손잡이를 스르르 놓아버렸다. 만난다면, 이밤에 찾아가서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무슨 말을.
벙긋거리는 번개섬광속에, 요란한 천둥소리속에, 쏟아지는 비발속에 생각은 착잡해졌다. 《…동무도 졸업반이 되면 그땐 내 선택을 리해하구…》 중언부언하던 민수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졸업반이 되면, 졸업할 때가 되면… 그땐 정말 나도 어린날의 꿈, 지금의 리상과 결심을 그 사람처럼 바꿀수도 있단 말인가? 지금은 철이 없어서? 뭔가 아직은 다 몰라서?
…《동무의 재능과 열정이면 얼마든지 공훈설계가도 되고 인민설계가도 될거요. 그러나 지방에 내려가면 그렇게 못돼.》…
다시 섬광. 그러자 사정없이 쏟아지는 비발에 떨어져 흐트러진 꽃잎들이 확 안겨왔다. 땅바닥에 흐트러져 흙탕물에 얼룩지고 묻혀버리는 꽃잎들이
처녀에게 서러움을 자아냈다. 정말 철없는 꿈이고 리상일가? 저렇게 묻혀버리는 꿈, 언제 피였던가싶게 비발에 떨어져 흩어지는 꽃송이… 현숙은
창문을 닫아버리고 책상에 엎드려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번거로운 상념에 지쳐 책상에 엎드린채로 쪽잠에 들었던 현숙은 소란스러운 새소리에 깨여났다. 하늘은 씻은듯 맑게 개이고 새벽잠이라고는 통 없는 온갖 새들이 무성한 교재림의 숲속에서 저저마다 목청을 뽐내고있었다.
현숙은 지난밤 비발속에 몸부림치던 그 꽃밭부터 내려다보았다. 더러 꺾이우고 꽃잎이 떨어진것들도 있었으나 꺾이우지 않은 꽃들은 그 소나기를 맞아 더욱 생기있고 발랄하게 피여있었다. 교정의 뽀뿌라나무들도 더욱 싱싱하게 설레이는데 그 잎새들사이에서 새들은 생의 억센 활력을 찬미하며 아름답게 지저귀고있었다.
수도의 거리들이 보다 활력있고 싱싱해진 이 아침 현숙에게는 간밤의 모든 고민과 모대김이 어처구니없는것으로 여겨졌다. 무엇때문에? 무엇때문에 내가 고민하고 울기까지 했단 말인가? 그 누가 함께 나누던 꿈을 버렸다고 해서? 땅바닥에 흐트러지고 묻혀버리는 꽃잎? 아니다, 나는 결코 맥없이 꺾이워 흩어지는 연약한 꽃이 아니다. 비발속에서도 더욱 생기있고 더욱 싱싱해지는 저 꽃, 저 뽀뿌라!
아득히 흘러간 유치원시절 귀밑머리가 희슥해지기 시작한 설계가 오근성이 자기를 무릎에 앉혀놓고 들려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먼 옛날 이 땅은 남이 사는 땅이였단다. 척박하구 바람사나워서 사람 못살 땅이라구 다들 떠나구 누구도 돌아보지 않다나니 이 땅에는
남들이 들어와서 주인처럼 틀고앉았지. 그래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할아버지때 사람들이 이 땅을 다시 찾
느라구 장검을 비껴들구 말을 몰아 달렸단다. 애국무사들을 많이도 낳았지.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데
만리변역에 일장검 짚고서니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것이 없어라
이렇게 훌륭한 시조도 읊었다. 얼마나 싸우고싸웠으면 진탕속에서 쌈하는 개같다구까지 했겠니.》
《해해, 진탕속에서 쌈하는 개?》
《그래, 그렇게 피투성이가 돼서 딩굴면서두 물러서지 않구 영악스레 싸웠다는거다. 한마을, 한마을 다시 뺏아서는 성을 쌓구 큰 요새를 여섯개나 만들어서 륙진이라구 불렀단다. 여기두 그 륙진에 속했지. 그런데 찾아놓은 담엔 꾸리구 가꾸는게 아니라 정배살이고장으루 만들었구나.》
《정배살이고장이라는건 뭐나요?》
《량반놈들이 자기네가 미운 사람들을 쫓아보내는 고장이라는거다. 고생을 하구 못살라구. 결국 이 땅은 내버린 사람들이 사는 내버린 땅이였지.》
《?…》
《그러다가 왜놈들에게 나라까지 통채루 빼앗겼던것을 수령님께서 다시 찾아주셨다. 나라가 해방되구 미국놈들두 이긴 다음에 우리 수령님께서는 항일무장투쟁시기 투사들이 두만강을 넘나들면서 피도 많이 흘리고 희생도 많이 된 땅인데 제일 잘사는 고장으로 되게 해야 한다구 진펄에 빠진 승용차를 몸소 어깨로 밀면서 찾아오시였단다.
설한풍이 휩쓰는 험한 산중에
결심품고 싸워가는 우리 혁명군
…
이렇게 빨찌산군가까지 부르시면서 그 험한 진펄과 갈밭을 다 헤치시고나서 이 땅의 새 설계도를 그려주셨지. 너네 아버지랑 너만 할 때였단다.
그후엔
우리 현숙이 이담에 크면 뭘 할가?》
《나도 설계가가 될래요!》…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 고향, 류진시의 건축. 절대로 버릴수 없는 나의 꿈이고 리상이고 결심이다. 절대로 바꿀수 없는 나의 길이다!
현숙은 품속에서 속사수첩을 꺼냈다. 처녀의 마음속울림이 시구절로 적히기 시작했다.
나 … 고향 … 조국!
만약 나에게
밝은 두눈이 없다면
내 생은 앞길을 잃고
암흑의 광야를 헤매이리
만약 나에게
높뛰는 심장이 없다면
나의 삶은 활력과 박동이 없으리
나에게 만약
불타는 사랑이 없다면
내 생은 목적도 가치도 잃으리라
고향아, 너는 나에게
밝은 눈동자를 주었고
높뛰는 심장을 주었고
불타는 사랑을 주었거니
그 눈으로 미래를 보고
그 심장으로 생을 고동치며
그 사랑으로 온넋을 불태우리
내 한생을 바쳐
웅장화려하게 일떠세울
아, 사랑하는 나의 고향아
너는 내 가슴속에 간직된
소중한 나의 조국!
교재원의 설렁거리는 뽀뿌라숲너머로 아름답고 화려한 고향도시 류진의 새 모습이 가슴가득 안겨왔다. 현숙은 미소를 지으며 그 황홀한 미래를 바라보았다.…
민수는 끝끝내 중앙설계기관으로 갔다. 세상만물은 세월을 두고 변하기마련이다. 좋게 변화되는것이 발전이라면 나쁘게 변화되는것은 변질이다. 민수의 변화는 후자에 속했다. 후날 민수는 현숙에게 참을수 없는 격분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으로 해서 현숙은 자기의 파견지도 바꾸어버리는 충동적인 결심까지 했던것이다.
산업설계. 류진시의 건축에서 그것 역시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청부설계? 흥,
어디 한번 겨루어보자. 사랑과 헌신이 없는 그의 재치품에 나는 불타는 사랑과 뜨거운 헌신으로 충만된 기념비를 맞세우리라!
본인의 제기와 도시설계사업소 소장 오근성의 동의로 오늘 산업설계사업소로 파견장을 받은 현숙은 해심의 집에 찾아갔다가 해심이가 바다가양식사업소로 갔고 양식장을 복구하는 청년작업반원이 되여 풀섬으로 들어갔다는것을 비로소 알게 되였다. 현숙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풀섬엔 양식장이 있어야 돼.》 자기의 환상도를 보며 하던 해심의 그 말이 생각났다. 그러면 해심이가 바로 그것을 위해서 모든것을 밀어놓고 고향에 내려왔단 말인가? 그러니 해심이는 지금 자기보다 더 앞서나가고있는것이 아닌가.
풀섬!
현숙은 류진만입구의 그 자그마한 섬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문득 파견장을 가지고 산업설계사업소에 찾아갔을 때 설계원들이 자기들끼리 주고받던 말이 생각났다. 바다가양식사업소 지배인이 풀섬양식기지건설계획안을 가지고 찾아와 설계를 주문했다고 했다.
풀섬양식기지. 유능한 설계원을 붙여달라고 지배인이 부탁했다지. 그걸 내가 맡자. 첫 과제로 맡겨달라고 제기할테다. 아니, 무조건 내가 맡아할테다.
현숙은 단호한 눈길을 멀리 풀섬에 힘있게 내박았다.
(해심아, 이 현숙이를 용서해. 친한 동무라면서 네 가슴속에 붙는 불을 보지 못했구나. 내 이제 너의 그 섬에 훌륭한 양식기지가 일떠서도록 도와주겠어! 그땐 해심이 너도 나에게 용서를 빌어야 해. 그 장한 생각을 숨기다니. 어머니봉양? 그러고도 동무니?)
현숙은 자기가 산업설계로 옮겨간것이 해심이를 위해서, 둘사이의 우정을 위해서 참 잘된 일로 여겨졌다. 그러고보면 유민수와 도시설계에서 맞다든것은 화가 복이 된셈이다.
현숙은 의기양양해서 자기 사업소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