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5

 

국림은 어이없는 눈길로 만수를 마주보았다. 고개를 푹 떨구고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측은해보였다. 하루이틀사이에 만수는 눈에 뜨이게 축갔다. 밤잠을 자지 못하고 모대긴 흔적이 쑥 들어간 눈확이며 훌쭉해진 볼에 너무도 력력했다.

그런데 그토록 무서운 고민거리란 털어놓고보니 별것이 아니지 않는가. 공장이 더는 전망이 없다는 만수의 말을 다 듣고보니 그것은 너무도 응당한 일이였다.

류진형타수리공장은 1960년대초 우리 나라의 도처에 지방산업공장들이 일떠서던 시기 시안의 지방산업공장들에 필요한 형타제작과 기계수리를 위해서 생겨난 공장이였다. 그러나 그 이후 나라의 기계제작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더우기는 이렇다 할 산업시설이 없이 식민지략탈항만 있던 이곳에 대규모 공장, 기업소들이 련이어 일떠서면서 공장은 점차 빛을 잃기 시작했다. 모든 지방산업공장들에 웬간한 기계설비의 제작과 수리는 자체로 얼마든지 할수 있는 기술자, 기능공집단이 자라나고 장비수준도 놀라운 속도로 높아졌다. 거기에다 조선소, 배수리공장, 화학련합기업소, 류진항, 류진수산과 같은 대규모 공장, 기업소들의 공무직장들 능력에 자그마한 형타수리공장같은것은 대비도 안되게 되였다. 공장은 벌써 10년전부터 할 일이 없는 공장으로 되고말았다.

《동무두 참, 그럼 그런거지 어쨌다는거요? 공장이 시대와 더불어 자기 사명을 영예롭게 수행했으면 좋은거지 거기 말 못할게 뭐가 있소? 군대에서는 명령을 다 수행하면 <명령집행 끝!> 하구 새 명령을 받아서 또 수행한단 말이요. 여긴…》

국림은 말끝을 꿀꺽 삼켜버렸다. 만수는 숙였던 고개를 쳐들며 아연한 눈길로 국림을 건너다보았다. 새 명령? 군대에서는 그렇게 단순하겠지만 경제에서 새 명령은 새로운 생산지표문제이며 경제정책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공장의 생산지표를 우에다 제기하여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을 만수는 몇해전에 벌써 전 지배인에게 말한적이 있었다.

《생산지표를 바꾼다구? 왜? 무얼루?》 지배인은 대뜸 눈을 부라렸다.

《제가 이걸 하구싶으면 이걸 하구 저걸 하구싶으면 저걸 하는 그따윈 사회주의경제가 아니야. 이 사람 책임기사라는게 사회주의계획경제하구 자본주의시장경제를 막 삭갈리는게 아니요? 하긴 공장대학에서 기계나 배웠으니 그럴수 있는데 그래두 사회주의공업경영학이야 배웠겠지? 어디가서 그런 말 절대로 하지 마오. 우에서 알았단 경제의 초보에 초보두 모르는 사람 공장참모장자리에 올려놨다구 당장 떼라구 하겠소. 그러지 않아두 요새 시장경제바람에 각성을 높이는데.》

만수는 그 말에 뜨끔해서 기가 눌리우고말았다.

국림은 일어서서 책상을 빙 돌아와 생각에 잠겨있는 만수의 어깨를 툭 쳤다.

《책임기사동무, 이 어깨를 좀 쭉 펴우. 그걸 알았으면 자기 주장을 내세우구 제꺽 새 일감을 찾으면 되는거지 그렇게 쭈그리구 앉아서 한숨만 분단 말이요? 경제라는게 별건가? 하나 하구서 또 다른걸 찾아하구 그걸 끝내면 또 다른 일감을 찾아하구. 그저 주인다운 립장만 있으면 되겠구만.》

주인? 그러니 이 안만수가 주인다운 립장에 서지 못했단 말인가? 바로 3년전 지배인령감이 그렇게 소리쳤었다.

그때 지배인은 지방공업관리국 계획과 책임부원인 운식이를 찾아가 8. 3인민소비품계획을 더 받아다 공장의 액상계획이라도 해야겠다고 했다.
《내 몸이 좀 말째서 그러는데 책임기사가 걸음을 좀 해주. 우리 공장의 첫 책임기사 아들이 공장사정을 모른다고 안할거야. 책임기사야 그 사람 아버지하구두 막역한 사이였다지?》

만수는 내키지 않았다.

《지배인동지, 8. 3이라는건 기본지표생산의 부산물로 생필제품들을 만드는건데 기본지표가 똑똑치 않은 우리 공장에서 8. 3계획을 더 받아선 어쩌자는겁니까?》

《계획만 받아오라구. 자재는 내가 물어들이지 않으리.》

지배인은 증을 냈다.

《그럼 생자재로 8. 3을 한단 말입니까? 그건 안됩니다. 책임부원이 암만 누구 아들이라구 해두 그것만은 승인하지 않을겁니다.》

지배인이 벌떡 일어섰다.

《누가 생자재 8. 3에다 밀어넣는대? 엉? 고철더미를 뒤져서라두 하겠다는거야. 됐소, 싫으면 그만두라구. 내가 가지.》

만수는 그러는 지배인이 답답해서 설복했다.

《그렇게 부업으로는 공장을 더이상 끌구 못 갑니다. 전에두 말했지만 수요가 있는 새 지표를…》 말을 채 끝맺을수 없었다. 지배인이 길길이 뛰며 책상을 내리쳤던것이다.

《수요? 무슨 수요? 그래 공장의 기본생산지표가 무슨 상품인줄 알아? 엉? 우리 공장이 상품을 생산하는 경공업공장인가? 생산수단을 만들구 수리하는 공장이야. 사회주의사회에서 생산수단은 상품적형태를 가지지 상품이 아니란 말이야! 국가가 다 생각있구 필요하기때문에 만들어놓은 공장인데 네따위 쪼꼬만게 뭐? 수요? 전망? 무슨 시비질이야? 돼먹지 않게!》

네벽이 터져나갈 지경으로 소리지르는 바람에 옆방에서 초급당비서가 뛰여들어왔다. 지배인은 초급당비서에게 만수를 가리키며 그냥 욕설을 퍼부었다.

《비서동무, 저 사람 안되겠소. 보자보자하니까 변질돼가거던. 잔뜩 패배주의에 빠져서 물건너것들 시장경제만 넘겨다보는것 같애. 이러단 별의별따위가 다 나오겠소.

똑바루 알아두라.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줄 알아.

나라에서 세운 공장 전망이 뭐 어째? 국가가 찍어준 생산지표에 무슨 타발질이야?》

그리고는 문을 깨여져나가게 후려닫고 관리국으로 떠났다. 어마어마하게 닦아세우는 그 욕설에 만수는 가슴이 다 써늘해지고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런데 일은 만수한테 더 불리하게 번져갔다. 어려워지는 연유사정, 전력사정으로 농촌들에서 농기계들이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는것과 관련하여 축력과 인력을 쓰는 농기구들을 많이 만들어보내주어야 할 긴급과제가 바로 그날에 떨어졌던것이다. 농업경영위원회산하 농기계공장, 수리소들만으로는 기일을 보장할수 없었기때문에 시안의 큰 공장, 기업소들은 물론 지방산업공장들까지 동원돼야 했다.

지방공업관리국 계획과에서는 책임부원 운식의 제의대로 관리국에 할당된 과제를 산하공장들에 나누어 풍기는것이 아니라 자재와 전력을 형타수리공장에 집중시켜 생산하는것으로 계획을 세우고 공장지배인을 부르려던 참이였다. 여기저기서 각각으로 만들면 성능을 담보하기도 힘들고 형타수리공장은 중소기계설비들의 제작과 수리가 전문이기때문이였다.

이렇게 되여 시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속에 공장은 밤낮이 따로없는 전투에 들어갔고 제품의 성능도 좋아서 농장들에서 호평이 대단했다. 지어 큰 공장 공무단위들에서 만든것들도 성능이 따라서지 못하는것은 형타수리공장에 보내여 결함을 퇴치하게 했다. 제일 긴박하고 필요한 때에 한몫 단단히 하는 공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였다. 만수의 견해가 잘못되였다는것이 여지없이 증명된 일이였다.

《지배인동지가 한 말을 심각히 새겨야 하겠습니다. 교훈으로 삼으시오.》

만수를 비판하며 초급당비서가 한 말이였다. 만수는 초급당비서앞에서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차라리 혁명성이 부족한 패배주의로 비판받는것이 낫지 생산지표문제, 공장의 사명문제를 계속 내들다가 사업에서 어떤 오점을 남기겠는지 알수 없기때문이였다.

두달가까이 벌어진 이 농기계제작전투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운호는 뛰여난 재능을 발휘했다. 농촌경리의 종합적기계화가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던 우리 나라 농촌들에서 축력과 인력으로 탈곡을 하는것과 같은 농기계들은 사라져버린지 오래되여 농촌늙은이들의 말을 들으며 속사하고 도면을 떠서 만들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높은 기계리론과 풍부한 환상력, 재치있고 맵시나는 제작술을 가진 운호를 누구도 따를수 없었던것이다. 지금도 운호는 현장에서 침식을 하며 콩튀듯 뛰여다니던 그때를 그리워하고있다. 그러나 만수는 그때부터 주눅이 들어버리고말았다.…

전화종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만수는 생각에서 깨여났다. 국림이 전화를 받았다. 어디서 오는 전화인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나서 심중히 듣는것 같더니 인차 화색을 띠며 즉석에서 대답했다.

《아, 하구말구요. 들어보니 별루 어려운것 같지는 않습니다. 합시다. 잘해주겠습니다.》

저렇다. 저 사람한테는 뭐나 다 저렇게 수월하고 손쉽게 생각되는 모양이다. 어디서 누가 걸어온 전화인지. 저렇게 뭐나 단순하니까 생산지표를 바꾸는 문제도 별것이 아닌것으로 생각될테지. 제대군관 당비서. 아직 경제실무를 모르니 이 문제가 분석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한 인간의 정치적생명까지도 론하게 되는 심각한 문제라는것을 모르고있다.

경제라는게 별것이 아니라구?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기술실무적문제. 그러나 아니다. 경제문제는 정치적문제이다. 정책적문제인 동시에 그 경제를 맡아 운영하는 사람들의 정치적운명문제이다. 만약 이 문제가 또다시 심각하게 번져간다면 저 당비서가 나를 보증해나서겠는가?

만수는 설날아침 국림의 호된 질책을 받고 이틀밤을 꼬박 잠들지 못하며 공장의 첫 책임기사였고 자기의 입당보증인이였던 운호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가 스물여섯해전 림종의 시각에 자기 손을 꼭 잡고 간절하게 당부하던것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가슴을 쥐여뜯을 때 세포비서가 찾아왔다. 당조직을 믿고 대담하게 말하라고.

《책임기사동무, 보오. 사람들이 우리 공장을 어떻게 보고있는가. 이자 온게 무슨 전환지 아오?》

만수는 착잡하게 서려드는 생각에서 깨여나며 우멍한 눈으로 국림의 화색어린 얼굴을 쳐다보았다.

《바다가양식사업소 초급당에서 중요한 기술문제를 협의해달라고 자기네 기사 한사람을 우리 공장에 보냈다오.》

만수는 얼떠름해졌다.

《무슨 문제랍니까?》

《용접과 관련한 문제라는데 어쨌든 새해 바다농사의 운명과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라오. 어서 나가봅시다. 귀한 손님인데 나가서 맞이해야지.》

국림은 꺼꺼부정해 서있는 만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리 공장과의 기술협의라면 양식사업소 공무반의 누구겠는데? 만수는 다시 물었다.

《공무반장이 아니랍니까?》

《모르겠소. 그건 물어보지 않았소. 기사라고 했는데 좌우간 오면 알겠지.

보오. 소리치며 일떠서는 바다가양식에서두 우리 공장 도움이 필요하다구 용접기사를 보내는걸. 이건 우리 공장이 필요한 공장이라는걸 말해주고있소.》

만수는 3년전의 일이 다시 재현되는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일이 공교롭기란. 공장이 전망없다는 말을 꺼낼 때마다 그걸 부정하는 일이 이렇게 따라서군 하니. 국림에게 팔이 잡혀 어정어정 따라서는 만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운호가 괜찮소. 대학을 두개나 다닌 금속기계기사가 우리한테 있다는 말을 듣구 찾아온다누만.》

그 말에 만수는 스르르 긴장이 풀리며 국림의 손에 잡힌 팔을 슬며시 뽑았다.

《그럼 운호만…》

그러자 국림은 제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만수의 팔을 툭 잡아챘다.

《무슨 소릴 하는거요? 잊었소? 커도 한덩어리, 작아도 한덩어리. 운호의 일이자 공장일이요.

책임기사동문 운호를 찾소. 그리구 용접반장두. 난 먼저 정문에 나가서…》 그러다가 둘은 우뚝 서버렸다. 운호가 웬 처녀 둘을 데리고 우쭐해서 정문에서 이쪽으로 오고있었던것이다.

국림은 의아해졌다. 어디서 저런 멋쟁이들을 둘이나? 한명은 분명 시당비서가 대줘서 찬찬히 새겨두었던 그날밤의 맵시쟁이처녀다. 산업설계사업소 설계원 리현숙이라고 했던가? 그옆에 초원의 줄말처럼 키가 늘씬하고 두눈이 시원스러운 처녀는 또 누구인가? 현숙이 동무인가? 저녀석이 이젠 제법인걸. 처녀들을 공장에까지 척 데리구 다니구? 당장 중요한 기술협의를 조직해야겠는데 그 주인공이 저런 멋쟁이들을 달고 돌아치고있으니.

그러는 사이에 운호는 그 처녀들을 데리고 국림과 만수가 어정쩡해서 서있는 곳으로 꺼리낌없이 다가오고있었다. 국림은 난감해서 눈살을 찌프렸다. 분명 저 처녀들을 거들면서 또 어데 뽈차러 가겠으니 승인해달라고 할것이다.…

(해심의 일기)

모두 내 말을 주의깊게 들었다. 그런데 말이 끝나자 책임기사와 운호기사 그리고 용접반장은 서로 마주보다가 자기네 당비서동지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맹랑한 기색들이였다.

《자, 다 들었으면 말을 해야지. 어떻소?》

비서동지의 말에 운호기사는 입을 다시고 용접반장은 어처구니없는 기색을 지었으며 책임기사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나는 가슴이 활랑거렸다. 내가 동화처럼 공상적인 문제를 들고나온것이 아닐가? 례컨대 금이 몹시 필요해서 그러는데 화학적방법으로 만들수 없나요? 하는.

만약 내 제안이 련금술처럼 허황한것이라면 이 진해심이의 공상을 믿고 새해작전에 벌써 진입한 우리 사업소와 또 우리 지배인동지는 어떻게 되겠는가?…

 

해심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힘들게 물었다.

《불가능… 하나요?》

운호가 제깍 대답했다.

《가능성이야 백이지요. 아니, 그 이상도 되겠소.》

해심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니 된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왜?

운호가 볼부은 소리를 했다.

《이건 중요한 기술문제가 아니라 초보적인 기술문제란 말이요. 적분이나 도함수를 푸는줄 알구 모였는데 산수문제를 내다니?》

해심은 그만 어정쩡해졌다.

《네?》

운호가 그러는 해심을 쳐다보며 자못 불만스러워했다.

《용접부위를 의심하던 시대가 언제 지나갔는지 아오? 2차대전시기 대양을 순항하는 함선들도 벌써 장갑판을 리베트친것이 아니라 용접으로 련결했소, 용접으로.》

해심은 긴장해졌다. 이들이 리해를 잘못한것 같아 서둘러 다시 설명했다.

《이건 견고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용접밀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관이 붙어있겠는가가 아니라 용접부위에서 가스가 새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란 말입니다. 미크로단위의 짬도 없어야 합니다.》

운호는 코웃음을 쳤다.

《헹, 미크로가 아니라 나노급이라도 문제가 아니요. 연곡화학을 건설할 때 용접기술자들이 모자라 우리 아버지랑 여기 책임기사동지랑 같이 동원됐더랬는데 관이요, 탕크요 다 용접해서 붙였소. 30년이 지나간 오늘도 정밀용접부위에서의 사고는 아직 없소.

화학공업은 고도정밀공업이요. 동무네 양식탕크에 대겠소? 30년전이라는건 우리가 세상에 태여나기두 전이거던.》

해심은 그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부끄러움, 문명세계의 인간들앞에 원시인들 모양으로 나선것 같은 수치감이 온몸을 휩쌌다.

현숙이가 참지 못하고 쏘아주었다.

《그만하라요. 해심인 분석화학을 전공했어요. 동문 분석화학의 크로마토그라프법을 아나요? 그건 30년의 세배인 90년전에 나온거예요. 우쭐대긴!》

해심은 현숙이가 고마왔다. 대학때 실험에 몰두해있는 자기를 찾아왔을 때 설명해주었던것을 잊지 않고있다가 이처럼 두둔해주는것이다. 그러나 운호는 지지 않고 맞받아 내쏘았다.

《그럼 거기 사람들이 한심하지. 공무반이야 있겠지? 기능급수들은 어느 뒤구멍으로들 따냈다오? 나보구 그러지 말구 가서 그 사람들이나 콱 욕해주오. 국가밥 먹구 뭘 하면서 남 망신시키는가구. 그런것두 안하고있었으니까 우리가 이 고난의 행군을 하는거라구 말이요.》

현숙이는 말이 막혀 운호를 쏘아보기만 했다. 만수가 무척 진중한 눈길로 해심을 쳐다보았다.

《거기 공무반장은 어디 갔소? 그 사람이 못할리 없겠는데.》 그리고는 운호와 국림을 번갈아보며 계속했다.

《그때 연곡화학건설에 운호 아버지가 책임지구 나하구 그 사람까지 우리 셋이 갔댔는데 그후에 양식사업소에 공무반이 나오면서 반장으로 갔고. 기술이 높은 사람인데.》

그 말을 들으니 해심은 자신이 없다고 나눕던 공무반장의 벗어진 이마가 더없이 밉고 야속하게 안겨왔으나 자기네 기업소 망
신이니 사실대로 말할수 없었다.

《반장동진 사정이 있어서…어딜 좀…》 어쩐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만수는 그제야 리해되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왔구만. 바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언제 오겠는지 오면 하겠는데. 큰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두 책임적인 문제는 책임적인 문젠데.》

그러자 운호가 벌쭉 웃으며 일어섰다.

《내가 가서 제꺽 해주구 오겠습니다. 그까짓건 맹물 한사발 안마시구두 자신있습니다.

그대신 해심동무, 동무네 풀섬을 좀 구경시켜주겠소? 방송에 나오는걸 듣구 얼마나 가보고싶었는지 모르오. 현숙동무도 구경 못했지? 풀섬을 방송에 낸 기자는 우리 학교때 솜씨있는 기파…》

《흥, 안돼요.》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그 말을 현숙이가 딱 잘라버렸다. 운호는 아연해서 바라보다가 침을 꼴깍 삼켰다.

《누가 동무보구 구경시켜달랬소? 헹, 주인이 누군데?》

현숙이가 조소를 담고 내쏘았다.

《내가 풀섬양식기지 설계자예요. 알겠어요?》

운호는 눈이 둥그래지며 사실이냐는듯 해심을 돌아보았다. 해심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가며 마음이 따스해졌다.

공장을 떠나는 해심이와 현숙이를 바래우러 정문밖에까지 따라나온 운호를 현숙이가 잡아세우고 따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다시 말해보라요. 리베트가 어쨌구 나노가 어쨌다구요? 동무한테서 그런 말이나 듣자구 해심일 여기까지 데리구 온줄 알아요? 물어보는 말에 대답이나 할게지. 다시는 현숙일 찾지 말라요. 이기지두 못하는 축구 생각해서 끝까지 봐줬더니 흥!》

《왜 그러오? 내가 해심동무보구 어쨌소? 거기 사람들보구 말한거지.》 그리고나서 운호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벌씬 웃었다.

《우리 셋이 다같이 풀섬에 나가보기요. 해심동무는 주인으로서 안내하구 현숙동문 설계자니까 설명해주구.》 톡톡거리는 현숙이의 말을 조금도 타내지 않고 자기나름의 공상에 잠겨 운호는 재그시 실눈까지 지었다.

《난 거기 가면 멋진 동요, 동시를 써낼지도 몰라. 아니, 꼭 써낼거요.》

현숙은 그만 어처구니없어 머리를 들며 먼산을 쳐다보았다. 그 고운 코구멍으로 흰 코김이 콕 불려나왔다.

《흥! 서사시를 써도 모르겠는데 기껏 동요, 동시?》

해심이 역시 그랬다. 풀섬개척전투는 자기들의 가슴속에 영웅서사시처럼 간직되여 때없이 심장을 울려주고있는데 동요, 동시라니?

《모르는 소리하지 마오. 이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구 솔직한건 동심이요. 꾸밈과 과장, 외곡이 없는 순결한 동심이 감탄할 때 그이상 값높은 평가가 어디 있겠소?》

해심은 아이들처럼 천진하게 웃는 운호를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았다.

참 재미있는 동무였다.

《아무때나 오세요. 우리 풀섬은…》 순간 뜨끈한것이 치밀어오르며 말을 맺을수 없었다. 눈굽이 확 달아올랐다.

《우리 풀섬은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해심은 힘주어 말하고서 현숙이를 돌아보았다.

《함께 오렴.》

운호와 헤여진 다음 현숙이는 그를 알게 되던 일과 설날에 해심이네 집에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던 길에 어쩐지 허전한 마음도 달래고 또 호기심도 없지 않아 경기장에 들려 그들이 뽈차는것을 보아주던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돼서 대학을 두개나 나왔니?》

현숙은 머리를 저었다.

《대학은 청진광산금속대학 하나만 나왔어. 지금 공장대학에 다니는건 정식 편입한게 아니래. 공장이 돌아못가고 크게 할일도 없는데 가만있다가는 자기가 락후해질것 같아서 그런다질 않니.

이런 말을 하더라. 〈시간은 자연계의 법칙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동물들에게는 진화를 가져다주지만 그런 지식인에게는 도태를 가져다준다.〉 제법이지?》

아까 톡톡거리던것과는 달리 무척 호감을 가지고있는것 같았다. 해심은 미소를 지으며 현숙이를 찬찬히 마주보다가 물었다.

《친했니?》

현숙은 걸음을 멈추고 해심을 빤히 쳐다보다가 까르르 웃었다.

《넌 별나게 물어보는구나. 웃기지 말어.》 그러다가 살짝 까부러든 눈귀에 웃음을 찰랑찰랑 담아가지고 물었다.

《친할가, 말가?》

현숙이의 얼굴에 그렇게 장난기가 가득 담길 때면 해심이도 마음이 사뭇 즐거워지군 한다.

《손가락으로 맞추어보렴.》

《좋아! 그럼 어디 불러봐.》

해심이가 불러주는대로 현숙은 엄지손가락으로 다른 네손가락을 하나씩 맞추기 시작했다.

《리현숙이가 리운호동무와 친할가 말가? 알아맞혀라, 딱!》

원래 새끼손가락 하나가 남았댔는데 마지막에 《딱!》 하는 말을 넣으니 그야말로 딱 맞아떨어졌다.

《딱 떨어지누나!》

해심은 손벽을 치며 발까지 동동 굴렀다. 둘은 서로 손을 맞잡고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빙빙 돌아갔다.

그렇게 한참 웃고나니 한껏 상기된 현숙의 얼굴이 얼마나 고와보였는지 해심은 또 놀려주었다.

《현숙아, 너 얼굴이 빨개졌구나?》

현숙은 당황해서 주먹을 쳐들었다.

《너 정말 현숙일 놀리겠니?》

해심은 즐거운 웃음을 뿌려주며 하얀 눈이불을 포근히 쓰고있는 길옆의 밭으로 달아났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판을 쫓고쫓기우며 한참 달리고난 처녀들은 맥이 진해 눈판에 둘이 다 벌렁 드러누웠다.

순결한 백설의 세계. 가장 깨끗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즐거운 감정, 사랑의 정서가 가슴에 한껏 스며들게 하는 하얀 눈판! 해심은 마음이 막 부풀어올라 자기곁에 나란히 누워서 하늘을 정겹게 바라보고있는 현숙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현숙아, 난 그 동무가 이 흰눈처럼 깨끗한 동무라는 생각이 들어. 꾸밈과 과장, 외곡이 없는 순결한 마음으로 우리 풀섬을, 우리 사람들을 귀중히 여겨준다면 난 정말 기쁘겠어.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친하고 또 친한 내 동무 현숙일 사랑해준다면.》

현숙이는 누운채로 머리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직은 몰라. 사람은 지내봐야 돼.》

해심은 일어나앉으며 깍지낀 두손을 베고 반듯이 누워있는 현숙을 내려다보았다. 맑고 깔끔한 두눈에는 깊은 사색과 까닭모를 애수가 비껴있고 봉긋한 가슴은 가락맞게 오르내리고있었다. 예지로운 눈동자뒤에 얼마나 비상한 포부가 숨쉬고 이 부드럽고 순결한 가슴속에 얼마나 뜨겁고 헌신적인 사랑이 불타고있는지 운호라는 동무는 아직 모르고있을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뛰여난 처녀와 사귀였는지를…

해심은 장갑을 벗고 따스한 손으로 사랑하는 동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눈동자가 그렇게 맑고 웃음이 그렇게 깨끗한 사람은 좋은 사람일거야.》

말을 하고나니 심장이 갑자기 아려났다. 윤철오빠. 유순하게 쌍까풀진 그의 눈이 그렇게 맑고 그의 웃음이 그렇게 밝고 깨끗하지 않았던가!

북받쳐오르는 그리움으로 목이 꽉 메고 눈물이 핑 돌았다. 해심은 현숙이가 볼가봐 슬며시 돌아앉아 먼 산발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현숙은 조용히 일어나앉으며 해심의 어깨에 자기의 볼을 꼭 가져다대였다.

《해심아, 잊지는 말아야 하지만 너무 돌아보기만 하는건 좋지 않아.》

해심은 현숙의 머리를 천천히 밀어내며 손수건을 꺼냈다. 눈굽을 꼼꼼히 닦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나니 어쩐지 현숙이에게 미안스러웠다. 해심은 일어서서 침착하게 옷에 묻은 눈을 털고나서 현숙의 팔을 다정히 끼였다.

《현숙아, 아까 그 동무가 문광기자가 자기하구 한학교를 다녔다구 했지?》

《누구?》

《우리 섬을 방송에 소개한 그 기자 말이야. 네가 말을 꺾지 않았니.》

《응. 그랬던것 같애.》

《그 문광기자가 우리 윤철오빠 친구래. 오빠의 마지막그림도 그 기자가 간수했다질 않니.》

둘은 서로 팔을 꼭 끼고 눈내리기 시작하는 거리에 들어섰다. 해심은 현숙에게 오빠의 친구라는 그 기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소리없이 내려 땅우의 거칠고 모난것들을 부드럽게 덮어주며 함박눈은 펑펑 내리는데 그들은 그 눈속에 파묻히듯 회억깊은 이야기의 세계에 파묻혔다. 해심은 말하고 현숙은 말없이 듣기만 하면서. 기자가 윤철의 그림을 가져간 이야기, 풀섬에 취재나온 기자와 첫 대면을 하던 이야기, 함께 막돌을 나르던 섬기슭의 그밤, 밤파도소리에 섞여 울리던 돌부리우는 소리, 가로등처럼 주런이 꽂혀 고요히 타오르던 홰불들과 너울거리는 그 불빛에 비치여 우쭐우쭐 춤추던것 같던 돌투성이 길들, 모내기전투장에서 작업선에 함께 올랐던 눈에 익은 록음기가방…

왜 그랬는지 해심은 그의 일거일동에 대해서 구체적인 세부까지 다 말했다. 밝고 명쾌하게 짓던 웃음이며 여무진 메질소리, 솜씨있게 귀를 맞추어쌓던 돌벽, 지금도 귀전에 쟁쟁히 울리는 두번의 방송기사와 나중엔 그저께 자기와 그를 맞세워놓고 정량원이 그러던 일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처럼 하염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소복이 들쓰며 처녀들은 오래도록 걸었다. 현숙은 깊은 생각에 잠겨 해심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어주었고 다 듣고나서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머리만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곰곰히 했는지? 무슨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는지?…

함박눈이 무덕무덕 생각깊이도 내리던 그날저녁 바다가양식사업소 초급일군사업총화에서 해심은 형타수리공장에 갔다온 정형을 보고했다. 처녀는 운호가 한 말들까지 눈물을 머금어가며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모두가 심각한 사색에 잠겨 해심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서경은 침통한 안색으로 무겁게 일어서며 말했다.

《해심동무, 수고했소. 동무가 큰것을 깨우쳐주었습니다.

우리모두 분발합시다. 분발하지 못하면 오늘은 우리가 다른 공장앞에서 망신했지만 래일은 나라가 세계앞에 망신합니다. 내 책임이 큽니다.》

묵묵히 앉아있던 공무반장이 일어섰다.

《랭각기개조는 우리 공무반이 다 맡아하겠습니다.》

서경은 공무반장을 이윽히 쳐다보다가 초급당비서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천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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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 단동 - 로동 - 2021-12-28
안녕하십니까? 제가 조국에서 이 도서를 열람할때 기억에 의하면 1장이 시작되기전 주인공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언약하는 서문이 별도로 존재했던 생각이 듭니다. 그 부분이 루락되였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관리자 - - 관리자 - 2021-12-30
미래선생의 기억이 정확합니다. 빠진 서문내용을 올렸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열람해주시기 바랍니다.
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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