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3
…즐겁고 생각이 깊어지던 분위기가 뜻밖에 깨여져나간것은 음식상을 물린 다음이였다.
서경이 철국에게 물었다.
《새해 바다농사 자재타산이 다 섰소? 마침 기업소 관리성원들이 다 모였는데 어디 들어봅시다.》
철국이 당황하여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아직 다 못 세웠습니다.》
《너무 늦지 않소? 과업을 준지 벌써 보름짼데. 그럼 먼저 세우라고 한 수입자재타산안이야 다 섰겠지?》
철국은 황급히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수입자재비중이 너무 높은것 같습니다. 닻줄이나 모줄, 떼줄같은건 지난해처럼 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럼 새해에두 온 종업원들이 떨쳐나 산발을 훑자는거요?》
《품이 좀 먹어두 그렇게 해야지 아까운 돈을…》
서경의 눈빛이 날카로와졌다.
《동문 진짜 아까운게 뭔지 모르는구만. 사람들의 로력, 그건 아깝지 않다는거요? 자재가격 비싼건 알면서 그보다 더 비싼 사람들의 고생값은 모르고있소. 지난해엔 너무도 조건이 어려우니 그렇게 했지만 새해엔 우리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고생 못 시키겠소. 그게 아니라두 할 일이 많소.》
철국은 꺼내들었던 수첩을 펼치지 못하고 굳어졌다. 은향은 마치도 자기가 욕을 먹는것처럼 얼굴을 들지 못하고 한쪽으로 포개여앉은 두발의 양말자락만 쥐여뜯고있었다.
《물론 다시한번 그렇게 하자고 호소하면 다들 떨쳐나서겠지. 그러나 자재부원, 동문 이젠 병사가 아니라 지휘관이요. 희생을 두려워안하는건 병사의 미덕이지만 그런 병사들을 아낄줄 모르는건 지휘관의 악덕중의 악덕이요.
생산성을 높이자면 가능한껏 좋은 자재를 써야 하오. 그시그시 둘러맞추고 땜때기나 하는건 기업이 아니요. 적어도 3~4년은 내다보면서 타산안을 세우시오. 그리고 해심동무,》
해심은 가슴이 후두두 뛰였다.
《양식에 드는 원가가 너무 비싸오. 그리구 조개류양식같은건 지금처럼 저절로 까나고 자란걸 잡아서 드레에 넣고 갈라주기나 해가지고서는 어느 천년에 리윤이 날지 모르겠소. 양식인지 보호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가거던. 뭘 좀 생각한게 없소? 기사동무.》
양식기사라는 자기의 직무에 특별히 력점을 찍으며 물었지만 해심은 대답할수 없었다. 말이 양식기사이지 아직은 양식에 대해서 초보적인 눈도 뜨지 못한 자기가 무슨 말을 할수 있겠는가.
《전 아직…》
해심은 한마디도 대답할수 없었다. 입직해서 첫 열흘간 무엇인가 부지런히 배우고 읽었던것 같은데 어려운 건설, 모내기… 볶이우다나니 더 습득하고 익히기는커녕 겨우 가졌던 표상마저도 잊혀지고말았던것이다.
《동문 자기 직무를 잊은게 아니요? 우리가 그저 양식로력이나 한명 더 받자구 동물 데려온건 아니요.》
정말 힘든걸 참으면서 따라섰는데 설날 아침에 이런 말을 들으니 해심은 그만 눈물이 쿡 솟았다. 자기에게 공부할 시간이 있었던가. 잠이 모자라 돌을 지고나르면서도 깜빡깜빡 졸았고 남들이 신발도 벗지 못한채 그자리에 쓰러져 잠들던 야간작업뒤끝에도 은향이와 같이 사람들의 작업복과 양말, 장갑들을 빨아주고 기워주었는데 그속에서도 공부를 안했다고 욕을 하지 않는가. 해심은 아직도 손등에 푸릿하게 남아있는 그 이발자리를 막 보여주고싶었다. 사람이 저러니 정량원도 울면서 뛰쳐나갔댔겠지?
《지배인동무, 그만하세요. 오늘은 설날인데.》
천영의 안해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천영은 깊은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없었다.
《설날 아침에 지금까지 고생한 동무들을 욕해서 안됐소. 그러나 여기 모인 우리는 지휘관들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린 신년축배를 들면서도 새해의 전투를 구상해야 합니다.
미안합니다, 비서동지. 손님으로 왔다는게 주인 옹색하게 만들어서. 난 이제 섬에 건너가겠습니다.》
서경은 움쭉 일어서서 벗어놓았던 외투를 입었다. 그때까지 말없이 앉아있던 천영이 묵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섬에는 내가 나가겠소.》
《아닙니다. 제가 먼저 건너가서 풀판조성방안을 타산해봐야 하겠습니다.》
천영은 끄떡없이 앉아서 그루를 박았다.
《지배인동문 있어야 하오. 저녁에 아주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온다는데.》
그 말에 가방을 들고 일어섰던 서경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 그는 다시 힘을 주어 문을 열면서 나직이 대답했다. 혼자말처럼.
《래일 만나지요. 그는 리해… 합니다.》
서경이 나가자 따라나가서 바래준것은 천영의 안해뿐이였다. 모두가 가슴이 찌르르해져서 말없이 앉아있었다.
이윽고 찬우가 지배인이 놓고간 담배갑에서 한대 꺼내물며 중얼거렸다.
《범같은 사람이야. 범두 그저 범인가? 불범 한가지라니까.》
천영이 따뜻한 눈으로 해심을 바라보았다.
《해심아, 지배인동무 마음을 알아야 한다. 그 힘든 건설전투를 지휘하면서도 지배인동무는 밤에는 등잔불연기로 초막을 그슬려가면서 책을 읽은 사람이다. 자기에 대한 요구성이 높은 사람이기때문에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요구하는거지. 지배인이 지금 양식에서 원가가 너무 높은걸 두구 고심하는데 네가 기술적으로 도와야지?》
해심은 손수건으로 눈귀를 닦았다. 오래간만에 만나게 될 안해와 귀여운 자식과의 상봉도 뒤로 미루고 새해전투의 작전구역으로 떠나가는 지배인의 모습을 보니 방금전까지 야속하던 생각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응당 먹어야 할 욕을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등의 푸릿한 허물자리가 또렷이 안겨오면서 등잔불연기에 새까맣게 그슬렸다는 개척전투지휘부의 모습이 상상되였다. 힘겨운 전투를 지휘하면서도 그때 벌써 다음단계의 작전을 사색하고있은줄 알고나 있었던가. 만약 자기 손등의 허물자리에도 그처럼 피타는 사색과 탐구의 추억이 더 새겨졌더라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것인가.
찬우가 천영의 손을 움켜잡았다.
《비서동무, 내 당원이구 전쟁참가자라는게 부끄럽네. 아까 년로보장 넘겨달라구 했던건 취소야. 난 그런 말 한적이 없네. 혁명의 리익의 견지에서두 난 일을 더 해야 돼.
자, 얘들아, 가자! 저런 지배인밑에서라면야 죽두룩 일할만두 하지.》
찬우는 서경이 놓고간 담배갑에서 한대를 더 뽑아 귀등에 끼우며 일어섰다. 그러는 찬우에게 천영은 웃으며 담배갑을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밖으로 나오자 정란이가 해심의 팔을 다정히 끼며 물었다.
《해심아, 우리 지배인동지 성격이 심하지?》
성격이 심하다? 꼭 맞는 말은 아니였지만 적중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해심은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설날 아침에 우리 집에 찾아올줄은 몰랐다. 나같으면 〈야! 아이 도제 며칠 떼두구 섬에 들어왔던게 무슨 재세야? 나한텐 이발이 오이씨같은거 장 떼놓구 나가서 연구사업하는 색시가 있어!〉 하구 욕을 콱 했겠다. 그런데두 오히려 우리 사업소엔 정란이가 있어야 한다구 할 땐 정말이지 눈물이 나더라. 우린 지배인 잘 만났어. 일군이구 남자야. 눈물이 나두 지배인 요구수준에 따라서야 돼.》
해심은 빠드득빠드득 눈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바다가로 나갔다. 바람이 터졌다. 그러나 바다는 아직 물멀기를 솟구지 않았다. 묵직하게 처절썩대며 노도로 격랑칠 시각을 기다리는지. 해심은 그 바다처럼 속대가 세고 묵직하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리고 만약 아버지가 살아있었대도 오늘 지배인처럼 자기를 꾸중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즐겁게 웃고 떠들 이 설날 해심은 제 박동이 없이 껴떨기나 하면서 살아온줄도 모르고 시대의 부름에 부끄럽지 않게 고동쳤다고 자부해온 자기 심장을 아프게 자책하며 눈보라 내부는 인적없는 바다기슭에 오래오래 서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현숙이가 와서 한참이나 기다리다가 갔다는것이였다. 무슨 축구경기하는걸 같이 가서 구경하자고 했다는지. 누구보다 친한 동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생일날도 잊지 않고 찾아왔던 현숙이. 설날 아침에 가고싶은데도 많았겠지만 그래도 해심이 자기와 같이 설을 쇠고싶어 찾아왔겠는데.
오후에 해심은 현숙이를 찾아가 해종일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지내려고 했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기업소로 나갔다. 지배인이 지금 미역, 다시마농사에서 원가가 너무 높은것을 두고 고심하고있다는 초급당비서의 말이 가슴을 찔렀던것이다. 그 문제를 풀 기술적가능성을 자기가 찾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아직도 생둥이인 자기가 어떤 기술적방도를 찾을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사업소에 나가 미역, 다시마농사의 전과정을 시작부터 다시 살펴보고싶었다.
사업소에 나가니 천영과 찬우, 철국, 은향은 물론 정량원까지도 나와있었다. 해심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사업소로 나오지 않고 현숙이와 함께 설을 쇠고있었다면 사람들은 자기를 철이 없다고 했을것이다. 그렇게 욕을 먹고도 채심을 못한다고.
《음, 해심이두 나왔냐?》
찬우가 대견하게 해심이를 맞이했는데 아침에 푹 젖어있던 취기는 씻은듯 없어졌다. 해심은 찬우를 보는 순간 지난해 자기들이 풀섬개척전투를 할 때 아바이는 미역, 다시마모들을 사오느라고 천리바다길을 헤치며 인간고생을 다 했다던 말이 생각났다. 돌아오는 길에 때없는 태풍까지 만나 대피해있기도 했고 그러다나니 모들이 병들어 거의 다 왔던 길을 되돌려 갔다오고. 하다면 미역, 다시마농사에 원가가 너무 많이 들었다는 지배인의 말이 그것을 념두에 둔것이 아닐가?
해심은 물었다.
《만약 모를 우리가 기른다면 원가를 줄일수 있나요?》
찬우는 해심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게 그거야. 실어오는 품이나 기르는 품이나.》
《왜요? 우리가 기른다면 그 먼데 가서 실어오는것보다 낫겠지요? 연유값만 해두 얼마나 비싸나요.》
《여름모장랭각기를 운영하재두 그만큼은 든다. 숱한 소금을 써야 되는데 지금은 소금두 바르거던. 그나저나간에 해보재두 이젠 못해. 여름모장랭각기 고장난걸 몇해째 내버려두고있었으니 이젠 살릴수도 없는 형편이다.》
해심은 더 말을 하지 않고 구내의 한켠구석에 쓸쓸히 서있는 여름모장탕크로 향했다. 바다가양식사업소라면 기본생산시설의 하나이지만 이제는 사람의 손길이 가닿은지 퍼그나 오래되여 낡을대로 낡아빠진 건물과 그 바깥에 도색이 벗겨지고 벌겋게 녹이 쓴 소금물탑.
바다농사는 땅우의 농사와 계절이 서로 반대된다. 땅우에서는 알곡을 다 거두어들여 탈곡을 마감할 때인 초겨울에 바다에서는 모내기를 하고 땅우에서 모내기를 할 때 바다에서는 가을걷이를 한다. 그러다나니 미역, 다시마 같은것들은 여름철에 모기르기를 하는데 이 어린 모들은 18도정도의 물온도에서 자라야 한다. 섭, 조개류들의 어린 새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여름철에는 연안의 바다물온도가 30도까지 높아진다. 그래서 바다가양식사업소들에서는 바다물을 퍼올려 랭각시켜가지고 미역, 다시마의 어린 모들과 섭조개 어린 새끼들을 키우는 여름모장을 가지고있다. 이 여름모장랭각기는 암모니아가스를 응축, 증발시켜 열전도성이 높은 40프로농도의 소금물을 5~10도로 랭각시키는 1차랭각계통과 랭각된 그 소금물이 모장탕크를 순환하며 탕크안의 바다물을 18도까지 랭각시키는 2차랭각계통으로 이루어져있다.
다 삭아버린 소금물탑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는데 어느새 따라왔는지 찬우가 등뒤에서 말했다.
《여기서 쓸건 1차계통 압축기하구 2차계통 양수기밖에 없다. 그것두 고장은 났지만 기업소에서 밀어주면 공무반장이 꽤 해낼거야. 기계엔 귀신이니까. 나머진 다 못써. 저 숱한 관들을 다 어쩌겠나? 1차랭각관들은 또 별문제다. 2차계통은 소금물이 돌았기때문에 부식이 더 심한데다가 탕크에 두층으로나 들어가있으니 숱한 관이지. 소금물탑은 삭아빠진 저 철판대기들을…》 말을 잇지 못하고 찬우는 한숨을 푹 내쉬였다.
《새 사람들 볼 면목이 없게 됐지.》
해심은 무엇인가 피끗 떠오르는것이 있어 물었다.
《2차랭각계통이 없이 1차계통만 가지구 탕크물을 직접 랭각하면 안되나요?》
찬우는 느슨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야 오죽 좋겠나? 숱한 관들이 없어지구 숱한 소금을 쓰지 않구. 헌데 1차관을 직접 모장에 넣어봐라. 만약 바늘끝만 한 구멍이라두 생겨서 관안에 흐르는 가스가 새면 모들을 몽땅 죽인다. 알겠냐? 용접부위에서 가스가 새는 날엔 한해 바다농사 망쳐. 소금물두 1차탕크에서 오염됐을가봐 두번밖에 순환 안시키구 내버리는데.》
해심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쨌든 1차관에서 가스가 새지 않으면 되겠지요?》
찬우는 손을 내저었다.
《용접을 그렇게 해내나? 그러지 않아두 철국이가 금방 제대돼왔을 때 너처럼 말했지. 너무 우기니까 나중엔 전 지배인이 뭐랬는지 아나?
〈누군 좋은줄 몰라서 40년동안 저런 설비를 써오는줄 알아? 말은 쉽지. 모를 몽땅 죽이면 머리깎을건 해병, 동무가 아니라 이 지배인이야!〉 이랬어.
그 말두 옳긴 옳지. 가만있으면 회의때 욕이나 먹지만 괜히 모험하다가 안되면 법앞에 나서야 되거던.》
해심은 그것도 아니로구나 하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지었다. 쓰지도 버리지도 못할 저 덩지큰 설비… 허리를 구부정하고 정문쪽으로 걸어가는 아바이의 뒤를 따라걸으며 다른 방도가 없겠는가 이것저것 곰곰히 생각해보았지만 더 떠오르는것이 없었다. 하긴 이제야 뭔가 생각해보느라고 급급해하는 자기에게 무슨 신통한 착상이 떠오르랴.
불을 뜨뜻이 땐 접수실에 둘러앉아 공동사설이 실린 신문을 하나씩 들고 제가끔 생각에 잠겨있는데 문득 창구를 똑똑 두드리며 시방송의 낯익은 기자가 늘 보던 그 록음기가방을 메고 들어섰다.
《새해를 축하합니다! 이거 정말 멋있군요. 기업소핵심들이 새해 첫날에 이렇게 모여 공동사설을 학습하고있으니. 새해에 류진양식이 더 높이 비약하리라고 믿어집니다.》
문광은 확 몰고들어온 신선한 바깥공기처럼 활기있게 말을 건네며 천영과 찬우, 철국이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정란의 차례가 되자 유쾌하게 소리쳤다.
《정란동문 왜 여기 있나? 기업소에서 나가서 이젠 가두 되구 안 가두 되는 가두에 들어갔다구?》
정란의 눈이 올롱해졌다.
《뭐라구요? 누굴 어떻게 알구? 내가 왜 가두가두 끝이 없는 가두에 가요? 흥, 엎어진김에 쉬여간다구 낡은 해를 마저 틀어막구 새해부터 나온거지. 설비보수기간이였단 말이예요!》
다들 즐겁게 웃는데 정란은 문광을 아니꼽게 흘겨보았다.
《형수님한테 말버릇 좀 보라.》
문광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형수는 무슨 형수, 제수지. 일호가 나보다 생일이 이틀 늦었단 말이요. 한날에 난 쌍둥이두 나온 순서에 따라 형, 동생 하는데 이틀이 어디요?》
정란은 깔깔 웃었다.
《기자라구 돌아다니면서 얻어는 잘 들었는데 이봐요, 동생! 그래두 남자구실은 우리 서일호동무가 먼저 했단 말이예요. 묘주를 둘이나 세워놨는데. 그리구 셋째도 벌써 주문했어요.》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재담같은 그 말다툼에 찬우가 끼여들었다.
《금항이 아랜 뭐냐? 은항이냐?》
정란은 코웃음을 쳤다.
《은항인 넷째예요. 셋째는 어항이거던요!》
《어항?》
《그래요. 금붕어기르는 어항이 아니구요, 물고기잡이하는 수산기지 어항이란 말이예요. 이름은 뜻이 기본이거던요. 맏이는 조국의 바다를 지키는 군항, 둘째는 황금의 무역항 금항, 셋째는 만선기날리며 돌아오는 어항, 막냉인 나처럼 양식사업소의 고운 처녀가 되라구 은항. 이렇게 쭈―욱 순서가 다 돼있어요.》
천영이 놀랍게 정량원을 쳐다보았다.
《꿈이 있소! 바다를 안고 사는 꿈이. 해군함장, 무역선장, 어로선단장, 녀성양식지배인, 이거겠지?》
정란은 손벽까지 찰싹 쳤다.
《역시 비서동진 당일군이예요. 문광동무, 방송으루 꽝꽝 내불어두 좋아요. 아직은 앞날의 간부사업이지만 틀림없이 될거던요!》
철국이가 간참했다.
《그래두 방송으로 부는건 좀 있다 해야지 온 시에다 공포해놓구 아들딸순서가 바뀌면 어쩌자구?》
그러자 정란은 발을 탕 굴렀다.
《총각이 주제넘게 참견하면서! 난 마음만 먹으면 뭐나 다 하는걸 알지요? 이것두 마음먹은
문제거던요! 세쌍둥이두
마음만 먹으면 한꺼번에
낳겠는걸 다섯째이름 지어줄거 생각 안나서 참았는데.》
또 웃음이 요란스레 터지는데 문광이 동을 달았다.
《이름이 생각 안나서 그 좋은 세쌍둥이 물리다니? 다섯째이름을 내가 지어주면 안되겠소? 모항이라구 지으라구. 바다의 자식들을 품에 안아주는 어머니항!》
신통한 그 말에 정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항? 뜻은 아주 좋은데. 그럼 나두 삼태자 낳아서 비행기 띄워봐?》 그러다가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음― 안되겠어. 순서가 안맞는다. 그건 막냉이이름이 아니라 맏이이름 돼야겠구나. 다 지어논 이름 이제 와서 무슨 기계라구 와락와락 뜯어서 다시 맞추겠나.
얘, 은향아, 그 좋은 이름을 너네나 가지렴. 너넨 이제부터 시작해야겠으니.》
《얜, 별말을.》 은향이가 정란을 탁 치며 눈을 흘겼다. 그런데 철국이가 볼이 부어 소리쳤다.
《싫소! 내 성이 조가인데 조모항이면 어머니항이 아니라 할머니항이 된단 말이요!》
폭소가 온 방안을 들었다놓고 은향은 정란과 철국을 번갈아 콩당콩당 두드렸다. 그러거나말거나 정란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은향이가 조모항일 낳을지 김모항일 낳을지 어떻게 알아요? 3년째나 졸졸 따라다니면서 아직 잔치두 못한 주제에 누굴 제거라구. 흥! 그러구두 뭐 할머니항? 바다가 웃어요, 바다가!》
배를 그러쥐고 웃고난 문광은 웃음을 채 거두지도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천영에게 물었다.
《지배인동진 왜 보이지 않습니까? 새해공동사설을 받아안은 일군들과 근로자들의 반향을 방송으로 내보내는데 첫 마이크를 여기 지배인 김서경동지에게 드리자구 합니다. 의견없겠습니까?》
천영은 눈물이 찔끔찔끔 나오게 웃은 눈귀를 닦으며 웃음발이 채 사라지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의견은 무슨 의견이 있겠습니까. 높이 내세워주는 방송집단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는 난감한 기색을 지었다.
《헌데 어쩐다? 지배인동문 지금 저 풀섬에 건너가있는데 래일 하면 안되겠습니까? 래일은 건너옵니다.》
문광은 창밖으로 풀섬을 바라보며 머리를 저었다.
《새해 첫날을 지배인동지하구 같이 보냈으면 했는데. 전마선 한척만 빌려주십시오. 건너가보고싶습니다.》
《이거 기자동무가 우리 지배인한테 단단히 반한 모양이다?》
천영의 말을 정란이가 냉큼 잡아당겼다.
《이봐요, 동생. 풀섬을 건너다보지 말구 처녀나 넘겨다보라요. 시동생 빨리 장가보내야 이 형수두 마음놓겠는데.》
문광은 씨물씨물 웃으며 정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걱정스러우면 처녀소개나 해줄게지.》
《정말?》
그말 나오기를 기다렸던듯 정란은 반색하며 해심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 우리 해심이가 어때요? 인물, 마음씨 다 곱지, 키 쭉 빠졌지, 수재학교 졸업했지. 해심아, 넌 어떻니? 이 사람.》
해심은 그만 기겁했다. 날바다같이 제멋대로 마구 파도치는 녀자, 생각나면 나는대로, 보면 본대로 내뱉는 녀자. 해심은 그 손을 뿌리치며 문밖으로 뛰쳐나오고말았다. 그냥 있다가는 그 입에서 무슨 말이 쏟아질지 몰랐다. 그렇게 뛰쳐나오다가 해심은 문가에서 어린애를 안은 젊은 녀인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여기가 류진바다가양식사업소 맞지요?》
해심은 화끈 단채로 식지 않은 얼굴로 처음 보는 그 녀인을 마주보며 겨우 대답했다.
《그래요.》
리지적이고 다감해보이는 녀성인데 얼굴은 몹시 얼어있었다.
《애아버지를 찾아왔어요. 김서경이라구…》
해심은 깜짝 놀라며 뒤로 홱 돌아서서 문을 활짝 열고 소리쳤다.
《비서동지! 여기, 여기 왔습니다. 지배인동지의…》
천영도 벌써 허둥지둥 달려나오며 소리쳤다.
《누구? 누구? 지배인동무 아주머니가 아니요?》
녀인은 미소를 짓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새해를 축하합니다. 전옥심이라구 불러주세요.》
천영은 무작정 옥심을 방안으로 잡아끌었다.
《반갑습니다. 내 여기 초급당비서요. 어디 봅시다. 이 애가 호영이요?》
천영이 아이를 받아안으며 푹 눌러씌운 고깔모자를 벗기자 고 어린것이 이 사람, 저 사람 또릿또릿 둘러보는데 매서운 그 눈매가 어쩌면 아버지를 꼭 찍어 닮았는지 금방 까나온 갈매기새끼같았다.
아이는 이 사람손에서 저 사람손으로 넘어가다가 겁이 났는지 제 엄마쪽을 쳐다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찬우가 안으니 울음을 딱 그치고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허! 이녀석, 내가 그중 마음에 든게지?》
옥심은 수집게 웃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손에서 자라 그런지 늙은이들을 따른답니다.》
찬우의 목소리가 갈리고 두눈이 슴벅거렸다.
《할아버지 손자로구나! 어디 보자. 그 눈은 그저 제 아비를 먹구 게웠군. 요런걸 떼놓구 보구싶어서 어쩔려구. 네 아버지, 엄마란 사람들은 독한 사람들이다. 호랑이두 새끼 떼놓으면 사흘을 먹지 않구 운다는데.》
정란이도 은향이도 아이를 들여다보다가 그말에 돌아서서 눈굽들을 닦았다.
《옥심선생은 강한 녀자요.》
천영은 가밋가밋하게 타고 주근깨까지 다문다문 박힌데다가 퍼렇게 얼어있는 옥심의 얼굴을 후더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옥심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찬우에게서 아이를 받아안았는데 제 엄마의 목을 그러쥐고 사람들을 돌아보던 호영이가 갑자기 깨드득 웃으며 엄마품에 얼굴을 비벼댔다. 어린애의 웃음에 모두가 미소를 지었으나 눈굽들은 달아있었다.
《그런데 무슨 차가 있었소? 지배인동문 오늘 저녁이나 래일 아침에 올거라구 했는데.》
《마침 여기까지 들어오는 화물자동차가 있었습니다.》
그 말에 모두는 옥심의 얼굴이 왜 그렇게 얼어있는지 알아차렸다.
천영이 천둥같은 노성을 질렀다.
《어떤 녀석들의 차요? 이 엄동설한에 애기어머니를 적재함에 태우다니? 금방석도 아깝지 않을 연구사를! 차번호 아오?》
옥심은 깜짝 놀라 엄마품에 파고드는 어린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차라도 만났으니 빨리 왔습니다. 기차는 아직 멀었고. 그런데 어디 갔나요?》
찬우가 뜨직이 말했다.
《빈집에 들렸다 왔겠구만. 지배인 불이나 때놨습데?》
《곧장 여기로 왔습니다. 그이야 오늘이라구 집에 있겠나요?》
《옳소. 지배인동문 지금 저 섬에 건너가있소.》
천영이 이렇게 말하고나서 묵묵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섬이 풀섬인가요? 편지에 썼더군요. 좋은 사람들 고생을 많이 시켰다구.》
정란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고생은 지배인동지가 더 했어요. 나같이 못난 녀자가 이런 아이 멀리 두고 사는 사람인줄두 모르구 인정머리없는 사람이라구 뛰쳐나가기까지 했으니…》
그 말에 옥심은 따뜻이 웃으며 정란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 로동정량원동무군요. 애아버진 우리 호영이또래 애기를 떼놓구 섬에 들어왔던 동무 가슴에 못을 박은게 제일 가슴아프다구 썼어요. 무섭게 욕하지요? 화약같답니다. 그러나 뒤는 없어요. 화약이 확 타오른 다음에 불찌를 안남기는것처럼. 그러니 잘 도와주세요.》
그리고는 천영을 향해 돌아섰다.
《섬에 가는 배가 없습니까? 전 래일 떠나야 한답니다. 청진에 갔다가 애를 맡기고 평양에 가야 해요.》
《그렇게 빨리 갑니까? 며칠 쉬구 가야지요. 여기서 몸을 좀
녹이시오. 내가 가서
지배인동물 건네보내겠습니다. 그리구 래
일 저녁엔 꼭 우리 집에서 식사도 한끼 하구 떠나도 떠나야 합니다.》
《고맙습니다만 어쩌겠나요. 육종은 한 시험이 한해랍니다. 늦잡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겠나요? 사실 여기 올 시간두 없었지만 전 여러분들의 피타는 노력이 깃든 풀섬을 꼭 보고싶었습니다. 힘이 될것 같더군요.
비서동지, 배를 띄워줄수 없나요? 좀 도와주세요.》
설날에도 바쁜 연구사! 배를 대라고 당당히 요구할 권리가 있는 녀성이지만 도와달라고 몹시 미안해하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참되고 억센 사람들은 이렇게 소박하다.
천영은 울컥해서 소리쳤다.
《철국이! 2백마력 발동걸라! 옥심선생을 모시고 〈우리 섬〉에 가자!》
천영과 철국, 문광이 옥심과 함께 배에 올랐다. 잔교에서 배에 오르던 옥심이 문득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참, 해심동무가 누군가요?》
해심은 놀랐다. 어떻게 나까지 알고? 그러니 지배인동지는 안해에게 보내는 편지에 내 이야기도 썼단 말인가?
사람들의 눈길을 좇아 옥심의 눈길이 해심의 얼굴을 다정히 어루쓸었다.
《동무였군요. 장한 뜻을 품고 찾아온 동무라는데 꼭 성공하길 바라요.》 그러면서 가방에서 두툼한 세권의 책을 꺼냈다.
《이건 과학의 길을 먼저 걸은 선배로서 동무한테 도움이 될가해서 준비했어요. 애아버지 부탁을 받고 분석실험조작에서 경험과 교훈이 될것들을 따로 묶었어요.
난 김일성종합대학 학보에서 동무의 론문을 본적이 있어요. 〈미생물들의 반응에 따르는 몇가지 분석실험조작〉 맞지요? 대학졸업론문이겠는데 수준이 정말 놀랍더군요. 졸업하구 어딜 갔겠는지 기회가 있으면 꼭 알구지내고싶었는데 이렇게 인연이 맺어져서 정말 기뻐요.
땅농사나 바다농사나 농사이긴 마찬가지이니 우린 서로 동업자들이예요.》
사람들은 옥심의 말을 들으며 해심을 새로운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부피두터운 세권의 기록장들을 쓸어만지는 해심은 눈물이 피여올랐다. 분초를 쪼개가는 연구사업속에서도 자기를 위해 수십년간의 연구일지를 번지며 하나하나 골라적었을 뜨거운 그 마음이 처녀를 울렸던것이다.
《세대를 이어온 우리 연구조의 20년력사가 담겼다구 생각해줘요.》
몇시간전에 호되게 꾸짖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번엔 차근차근하고 친근한 목소리가 되여 해심의 심장을 찔렀다.
《선생님!》
말을 잇지 못하는 해심에게 《언니라고 해요. 녀자들끼리는 그게 더 좋지요?》하면서 옥심은 밝게 웃었다.
잠시후 배가 떠나고 해심이, 은향이, 정란이와 찬우는 잔교에 서서 그 배가 아물아물한 점이 되여 풀섬에 다가들 때까지 오래도록 바래웠다. 해짧은 겨울의 저녁노을이 비낀 하늘과 바다는 그지없이 아름다왔다. 옥심언니의 그윽한 미소가 고운 물감처럼 하늘에, 바다에 풀린거라고 해심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