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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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는 숨가쁜 정적이 흐르고있었다. 무엇인가 큰 기대를 안고 만수를 초급당사무실로 데리고 들어왔던 국림은 그만 맥이 탁 풀렸다. 이 설날아침 종업원들과 함께 텔레비죤으로 새해공동사설을 듣고나서 고난의 행군을 승리적으로 결속하자는 당의 호소대로 공장을 살릴 방도가 무엇이겠는가를 진지하게 의논해보려고 할 때 불쑥 만수가 나타나니 국림은 너무 반가와 무작정 손을 잡아끌고 사무실로 들어왔던것이다. 아무렴 그래도 책임기사라는 본분이야 어딜 가겠는가.

《좀 앉아있소. 내 제꺽 난로에 불을 살리구 우리 새해작전을 멋들어지게 세워봅시다.》

만수는 그러는 국림을 어줍게 바라보다가 《아, 불은 내가…》 하며 서둘러 일어섰다.

《아, 아, 그러지 말고 앉아있소. 이 방의 주인이야 난데. 가만 앉아서 좋은 궁리나 더 무르익히오.》

그리고 마주앉았는데 웬걸, 방도는 무슨 방도.

《나야 뭘, 그저 비서동무가 하자는대루… 》

《무슨 소릴 하는거요?

공장의 참모장이야 책임기사지. 좋은 작전을 세우면 불러일으키는건 내가 맡겠소. 공동사설대루 화선식선동으로 말이요, 어떻소?》

전에 없이 들떠있는 초급당비서를 만수는 의문스럽다는듯 쳐다보기만 할뿐이였다. 그리고는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글쎄 새해엔 어떻게 할지, 비서동무가…》

국림은 그만 맥이 탁 풀렸다. 새해에는 어떻게 하나 공장을 살릴 결정적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러자면 책임기사가 움직여야 하겠는데 어떻게 돼먹었는지 아직도 이 모양이 아닌가. 그래도 공동사설이 나오자마자 공장에 달려나온걸 보면 무슨 생각이 있어 그런줄 알았는데 아직도?

그럼 설휴식도 하지 않고 공장에 나온것은 그저 타성과 관습이란 말인가? 방안에는 숨가쁜 정적이 흐르고있었다.

만수는 지금까지 국림이 이것저것 벌려놓은 일감들을 맡아서 수걱수걱 집행할뿐 도무지 제 의견과 발기란 내놓은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맡겨진 일에 성수나 하는것 같지도 않았다. 하늘소 연자방아 돌리기. 그래도 새 지배인이 올것이라는 기다림이 있을 때에는 그까짓 하고 내버려두었지만 며칠전 시당비서의 책망을 들은 다음부터 국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인을 주인구실하게 만들지 못하고 어디서 보내주겠거니 하고 기다리고있은것이 생각할수록 한심한 일이였다.

당사업… 사람과의 사업… 하다면 이 사람과의 사업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엇나가거나 대들기라도 했으면.

운호도 마찬가지다. 식료가공기계는 모른다고 딱 나눕더니 못기계를 만들어보라니까 아이들 나무권총깎듯 어렵지 않게 만들어놓고는 또 무슨 재미나는 일감이 없겠는가 며칠동안 지꿎게 쳐다보다가 신통한 일감이 더 없으니 류진항팀과 그 무슨 선수권방위전이라는것을 들고와서는 축구팀을 훈련장으로 휘동해가버렸다. 뭐? 기계공장은 기계공장답게 돌아가야 한다구? 그렇게 잘 아는 녀석이 뭐든 방도를 내놓을 궁리는 하지 않고.

로동자들은 또 어떤가. 용접해버렸던 창고문이 열리고 기계설비들을 다시 설치할 때엔 무엇인가 기대를 안고 활기를 띠였댔으나 부업농사, 식료가공, 기껏해서 못생산… 이러루한 일감들밖에 더 차례지지 않으니 달아올랐던 열기가 점차 식어져갔다. 초급당비서 새로 와서 뭔가 하는것은 좋은데 부업이 본업이 돼버렸다고 뒤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전탕! 밸이 울컥 올리밀 때마다 류인석비서의 엄엄한 눈길이 떠오르군 했다.

《당일군은 어떤 경우에도 군중을 타발해서는 안되오. 사람들이 발동되지 않는 책임은 자기자신에게 있다는걸 알아야 하오. 종주먹을 부르쥐고 뛰여다니면서 구호만 웨치고. 아니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요. 책임기사와의 사업을 짜고드시오. 열쇠는 거기에 있소.》

《그 사람이야 공장이 더는 전망이 없다고 했다는 사람이 아닙니까.》

《바로 그래서 그와 사업하라는거요. 그는 공장이 창설될 때 거기서 로동생활을 시작했고 공장대학을 거쳐서 현장기사로, 책임기사로 된 동무요. 자기 공장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강할거고 공장의 래일에 대해서 누구보다 깊이 생각했을거요. 그런 사람의 견해와 주장을 덮어놓고 패배주의로 몰아붙인건 잘못된 일이요. 사람과의 사업, 기술자, 지식인들과의 사업에서 심중하지 못했던 결함이지. 우리가 거기서 교훈을 찾고 바로잡지 못한다면 30년나마 한공장에서 기술로 성실히 복무해온 그 동무를 진짜 패배주의자, 락오자로 만들어버릴수 있소. 그건 공장 하나를 잃는것보다 더 큰 손실이라는것을 명심하시오.》

국림은 시당비서의 말을 되새기며 마주앉은 만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지켜보다가 마침내 제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책임기사동무, 그럼 내 다른걸 좀 물어봅시다. 솔직히 말해주겠소?》

만수는 책상만 멀거니 내려다보던 눈길을 들었다.

《예? 나야 언제 거짓말을…》

국림은 싱긋 웃으며 의자등받이에 몸을 제꼈다.

《책임기사동무가 우리 공장이 더는 전망이 없다는 말을 했다가 되게 욕을 먹었다던데?》

만수의 어깨가 좁아들었다. 불안한 기색이 그 조심스러운 눈길에 확연히 비꼈다. 국림은 지나간 일을 들춰내서 어쩌자는것은 아니니 마음놓으라는듯 다시한번 씩 웃고 그 무슨 유쾌한 일이라도 상기시키는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말이요, 공장이 전망없다는 리유가 무엇인가 하는건 누구도 모르더란 말이요. 내 그동안 동무를 비판했던 사람들도 다 만나봤소.》

그 말에 만수는 꿈쩍 놀라며 초급당비서를 쳐다보았다.

《걱정마오. 난 책임기사동무 뒤나 캐자고 그런건 아니요. 공장을 살릴 방도를 찾자면 그것부터 알아야겠기때문에 그랬던거요.》

사실이였다. 류인석비서의 충고에서 정신이 번쩍 든 국림은 다음날로 년로보장을 받으며 병석에 누워있는 공장의 옛 지배인을 찾아갔었다. 손탁이 드세고 고집이 완고하기로 소문났던 로인은 만수의 이야기가 나오자 손을 홱 내그었다.

《들어보구말구 있소? 물어보나마나 뻔하지. 또 무슨 기술타령에 조건타발이겠지. 그 사람 머리에 병이 단단히 든 사람이요. 이전엔 암만 어려운 기술과제, 생산과제두 척척 제끼던 사람인데 믿는 도끼 발등 찍는다구 어려운 때가 되니까 신심을 잃었거던. 공장이 전망없다는게 말이 되오? 그건 우리 경제가 전망없다는 수작이나 같소. 거 아직두 정신을 못차리구 새 당비서 속을 썩이는 모양인데 교양이구 뭐구 쌩쌩한 사람으루 아예 교체해버리구마오!》

국림은 아연해져서 70고개를 넘긴 늙은이를 쳐다보았다. 안만수라는 인간이 그렇게까지 병들었단 말인가?

국림의 섭섭한 말에 옛 지배인은 버럭 소리까지 질렀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이발은 암만해두 못살리는 법이요. 뽑아버려야지. 내 조금만 몸이 말을 들어두 공장에 나가앉아서 닥달질을 하는건데. 그 만수라는 사람 껴안구 속태우지 말구 내게 보내오. 주리를 틀든가 매질을 하든가 정신을 좀 차리게 하겠소.》

육신은 병석에 누웠어도 범같은 그 기상만은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 로인의 노성에 국림은 어이없이 웃으며 돌아서고말았다. 저렇게 드센 지배인밑에 어쩌면 그리도 온순한 책임기사가 있었는지. 20년동안 그 밑에 있었으면 불같은 저 령감성미를 절반만이라도 닮을것이지.…

다음순간 국림은 아래사람들의 의견을 마구 묵살해치우는 일부 일군들의 관료주의에 대해서 심각히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관료주의, 관료주의… 바로 그것이 공장은 물론 한 기술일군의 건전한 발전까지도 이지러뜨린것이 아닐가? 국림은 바로잡아주어야 할것이 많은 당일군의 무거운 사명에 대하여 새삼스레 느꼈다.

학교에 가있는 이전 초급당비서는 전 지배인과 전혀 딴판이였다. 찾아온 국림의 이야기를 듣자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안만수책임기사의 일은 나한테 결함이 더 많습니다. 그때 나는 나타난 현상만 보고 문제를 경솔하게 처리했습니다. 책임기사동무가 공장의 전망에서 실지로 무엇을 우려했고 출로는 무엇이라고 보았는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동무가 기술자적량심에서 무엇인가 진실을 말하려고 했던것 같은데 그건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경제사업에서 패배주의라고 속단해버렸습니다.

내가 일을 잘하지 못하고 떠나다보니 비서동무가 이렇게 어려운 길을 걸었는데 정말 안됐습니다.》…

드디여 만수가 입을 여는 바람에 국림은 생각에서 깨여났다.

《공장이 전망이 없다는건…》

국림은 저도 모르게 책상에 바싹 다가앉았다. 만수는 그냥 책상만 내려다보면서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그건… 그건 제가 그때 잘못 생각하구 아니, 신심을 잃구 패배주의에…》

국림은 눈을 흡떴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사람인가?

속에 없는 자기반성. 안된다, 절대로 안된다. 당조직과 속에 없는 소리를 하는 당원을 절대로 어루만져서는 안된다.

국림은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책상을 지그시 눌렀다.

《아니요, 책임기사동무. 동문 지금 거짓말을 하고있소.》

만수가 뜨끔 놀라며 국림을 쳐다보았다.

《공장이 더는 전망이 없다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동무는 무엇인가 진실을 말하려고 했소. 그러나 지금은 아니요. 신심을 잃구 패배주의에 빠졌다구?

동무는 지금 거짓반성을 하고있소. 나쁘오. 위험하오. 개별적일군 한두명의 부당한 처사로 비판을 몇번 받았다구 당조직에 등을 돌려대는가? 난 그래도 앓고있던 동무가 새해공동사설을 받아안구 이 설날 아침에 공장에 나왔기때문에 동무의 당적량심이, 일군의 자각과 기술자의 본분이 다시 살아난것으로 믿었소. 그래서 마주앉았는데 아니구만. 나가시오. 동무처럼 주대가 없구 신념이 약한 인간은 이 고난의 행군길을 못 가!》

엉거주춤 일어선 만수는 앉은자리에서 자기를 노려보는 국림을 멍멍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비서동무, 사실 전…》

국림은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

《나가라고 하지 않소! 가서 잘 생각해보오. 진심으로 반성할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찾아오시오. 그 넉두리같은 거짓소리는 듣고싶지 않소.》

고개를 푹 떨구고 서있던 만수는 끄떡없이 서있는 국림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고나서 어깨를 축 늘어뜨린채 허청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가슴에 꽉 차있던 그 무엇인가가 일시에 새여나가버리는것 같은 허탈감을 느끼며 국림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만수, 사람이 어쩌면!

어느새 밖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치고있었다. 날씨두, 금방 푸근하더니 또 바람질이다. 도무지 종잡을수 없는 이 겨울날씨, 그리고 안만수…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이발은 뽑아버려야지 암만해도 살리지 못한다는 전 지배인의 말에 움직일수 없는 생활의 교훈이 담겨져있는것이 아닐가?

국림은 소스라치며 일어섰다. 아니, 무슨 생각을? 흔들리기 시작한 이발은 종당에는 뽑아버린다지만 일시 흔들렸던 인간은 다시 굳세여질수도 있는것이다. 흔들리기 전보다 더 억세게, 그래서 당일군이 있고 당사업, 사람과의 사업이 있는것이 아닌가!

진심으로 반성할 준비가 되면 찾아오라고 했지. 언제? 아니다. 당일군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릴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찾아가야 한다. 어떻게? 어디로? 당세포를 발동시켜야 한다. 당원대중에게 의거해야…

《옳소, 비서동무. 이제야 제곬을 타는것 같구만.》 느닷없이 류인석비서가 사색적인 눈에 미소를 짓고 자기를 바라보는것 같은 환각이 들었다.

운호도 만나보아야 한다. 청년들과의 사업, 놓치지 말아야 한다. 래일이 오기를 기다리며 공장의 설비들을 지켜낸 그 청년들을.

참, 그 친구들 오늘 선수권방위전을 한다고 했는데 날씨가 이렇게 돌변하니 경기도 다 했군. 날씨두 참, 겨울날씨 장담할수 없다더니…

 

《경기는 날씨에 관계없이 진행한다!》

축구선수들은 이 말을 자랑스럽게 외우며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경기장에 나서군 한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게 쌓인 이 설날에 운호네 축구팀 역시 이렇게 소리치며 호기있게 류진항축구팀과 선수권방위전에 나섰다.

간밤에 시작하여 새벽까지 푸짐하게 내린 설밥이 시경기장의 바닥이며 계단식관람석에 소복이 쌓여있었다. 관객이라고는 경기장관리소의 직일성원 몇명이 불을 뜨뜻이 땐 경비실에 앉아 창문으로 내다보고있을뿐 1만 2천명의 수용능력을 가진 관람석은 텅텅 비여있었다.

경기에 앞서 운호는 하얀 눈이불을 두툼히 쓴 관람석을 씽 둘러보았다. 밤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 집에까지 태워다주었던 그 처녀설계원이 운호의 마음을 이상하게도 사로잡고있었다. 짱하니 맑은 겨울하늘의 깔끔한 초생달같던 그 처녀.

…《정말이요. 월드컵경기에 못지 않는 멋진 장면들을 보여줄테요. 일생 잊혀지지 않게.》

헤여질 때 운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곱씹어 초청했다.

《눈이 오든가 눈보라치든가 하면요?》

그 말에 운호는 호기있게 소리쳤다.

《상관없소. 〈경기는 날씨에 관계없이 진행된다〉 이거요!》

처녀는 우쭐해진 총각을 저으기 귀엽다는듯 쳐다보다가 어딘가 비양대는 어조로 말했다.

《생각해보지요. 자, 그럼!》…

웬걸, 하면서도 은근히 이날을 기다렸으나 텅 빈 경기장의 관람석은 순간 운호를 서운하게 했다. 하긴 오다가다 우연히 만난 그 처녀가 경기장에 찾아오기를 바란것이 어리석은 생각인지도 모른다. 운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경기는 시작부터 치렬했다. 지난 여름 6년간이나 보유했던 류진시 축구선수권을 운호네한테 떼운 류진항팀의 잡도리가 만만치 않았다. 팀을 보강하고 맹훈련을 했던것이다. 이 경기가 치렬한 대결전으로 될것을 예견한 운호네 역시 실전의 분위기속에서 맹렬한 훈련을 해왔다.

눈덮인 경기장에서 뽈은 제대로 튀지도 굴지도 않았다. 내찰 때마다 선수들의 발부리에서 눈가루가 팍팍 일었다. 량측에 다같이 불리한 조건에서 주도권을 누가 쥐는가 하는것은 훈련을 어떻게 했는가에 따른다. 류진항팀이 구내에 있는 넓은 운동장에서 눈을 말끔히 쳐놓고 훈련을 했다면 자기의 운동장이 공장에 없는 운호네는 매일 눈덮인 바다가모래불에서 훈련을 하군 했다.

《여, 운호, 세상에 모래터축구라는게 있다는데 우리가 거기 나가는건 아니겠지?》

과중한 육체적부담에 헉헉대며 누구인가 볼부은 소리를 할 때 운호는 고집스레 머리를 저었다.

《이렇게 해야 돼. 이제부터 설날까지 시경기장바닥에 눈쌓인걸 쳐줄 사람이 없어. 경기는 날씨에 관계없이 진행되거던.》

그렇게 훈련한것이 오늘 은을 내고있었다. 거기에다 숫눈이 하얗게 덮여 눈부신 경기장에서 경기를 벌리는것이 운호네한테는 이상할 정도로 신비로움과 환희감을 안겨주었다.

경기는 특별히 잘되는 날이 따로 있는 법이다. 운호네한테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였다. 신기할 정도로 발이 착착 맞아돌아갔다.

운호네팀의 고유한 파도식공격. 세번째 파도가 들이칠 때 벌써 상대측의 방어진이 무너졌다. 뽈을 반대쪽측면으로 길게 갈라주고 상대방방어진의 짬을 빠져 정면돌입한 운호에게 다시 뽈이 넘어왔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운호는 잽싼 머리받기를 하였다. 눈판을 굴러다니며 하얗게 눈을 묻힌 뽈이 운호의 이마빡에 납작하게 다져진 눈덩이 하나를 턱 붙여놓고 90도로 꺾이워 문대로 날아들어갔다.

경기시작 10분만에 첫 득점을 한 운호네 팀은 기세가 부쩍 올라 더욱 맵짠 공격을 들이댔다. 오고가던 사람들이 이 류다른 경기를 구경하려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참 서서 구경하다가 《눈온 날 좋아하는건 강아지하구 아이들뿐이라더니.》 하면서 제갈길을 가버리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시려드는 발을 탕탕 구르며 그냥 서서 생각지 않게 차례진 류진시 최강팀경기를 구경하는 사람들도 퍼그나 되였다.

익숙되지 못한 경기장조건에서 시작부터 한꼴 먹고 맥이 빠진 류진항팀은 전술체계가 흐트러지고말았다. 전반전마감을 앞두고 운호가 뒤로 자빠지면서 넘겨차기한 뽈이 또다시 득점되였다. 어지간히 모여든 관객들이 이 멋진 득점장면에 환성을 지르고 박수를 보내주었다.

자기팀 선수들과 부둥켜안고 눈판을 딩굴다 일어선 운호는 갑자기 가슴이 후두두하는 예감에 머리를 홱 돌려 관람석쪽을 쳐다보았다. 구경군들은 모두 관람석이 아니라 경기장바닥의 축구장 테두리에 듬성듬성 서서 구경하고있는데 계단식관람석에는 유독 까만 외투에 흰 목수건을 쓴 처녀 한명만이 서서 경기를 내려다보고있었다. 현숙이였다. 운호는 벌씬 웃으며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저쪽에서도 알릴듯말듯 손을 흔들어주었다.

전반전끝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러자 운호는 기다렸던듯 관람석으로 뛰여갔다. 선수들과 구경군들의 의아한 시선이 운호를 따랐다. 현숙은 그 넓은 관람석계단들을 닁큼닁큼 뛰여올라 자기가 선 계단의 아래단에 멈춰서서 천진스레 웃는 운호가 경기장바닥의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한데 모아가지고 와서는 자기한테 철썩 붙여놓은것 같아 당황해졌다.

《언제 왔소? 첫꼴도 내가 넣었는데 그건 못 봤겠지? 제길, 그것두 멋들어진 꼴이였는데.》

숨이 차서 헐떡거리면서도 반가움과 자랑으로 붕 떠있는 운호의 이마에 젖은 머리카락들이 차분히 붙어있고 땀이 내밴 운동복의 가슴과 잔등에서는 김이 피여오르고있었다.

《새해를 축하해요. 뽈을 참 잘 차는데요?》

운호는 히쭉 웃으며 손을 올려밀었다.

《말순서가 바뀌였는데? 나두 새해를 축하하오. 어서 내려가기요. 우리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겠소. 류진시 일등축구팀이요.》

현숙은 장한 일을 한 어린애처럼 득의양양해진 운호의 천진스러운 모습을 미소를 머금고 내려다보았다. 주위에 하얗게 덮인 깨끗한 눈과 동심의 세계가 아직도 남아있는 총각의 순진한 웃음이 하나로 조화되여 처녀에게 까닭모를 즐거움을 자아냈다. 씩씩하고 싱싱한 활력과 때묻지 않은 순결이 처녀에게 친근감을 불러일으켰다.

문득 이상한 예감에 현숙은 눈길을 돌려 경기장바닥에 군데군데 서있는 구경군들을 홱 일별했다. 처녀의 눈길이 순간 싸늘해졌다. 구경군들속에서 두툼한 오리털솜옷을 입고 값비싼 수달피털모자를 쓴 유민수가 자기를 놀랍게 올려다보는것을 발견하였던것이다.

순간 강한 반발심이 현숙의 가슴속에 치밀어올랐다. 흰눈덮인 경기장, 그지없이 순결한 이 세계에 유민수가? 흥!

현숙은 운호가 올려민 손을 보란듯이 잡으며 계단을 내려 운호네 팀이 모여앉은 곳으로 도고하게 걸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운호와 현숙이한테 집중되여 그들의 걸음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있는데 숫눈판을 밟는 축구화의 빠드득소리와 토끼털목구두의 뽀드득소리가 박자를 맞추며 울렸다.

형타수리공장축구팀이 우르르 일어섰다. 신이 난 운호가 자기의 축구동료들에게 현숙이를 소개했다.

《시산업설계사업소 설계원 리현숙동무를 우리 팀에 모셔왔습니다. 자, 환영!》

박수소리가 터지고 매 선수들의 익살스러운 자기 소개가 시작되였다. 누구는 공격수 몇번입니다, 아무개라고 불러주십시오 하고 정중히 허리를 접는가 하면 또 누구는 군대식으로 차렷자세를 하고 공격수 몇번, 아무개! 하고 찌렁찌렁 소리쳤다. 한 친구가 짐짓 어리광스럽게 《동생처럼 사랑해주십시오.》 하자 다음 친구는 의젓하게 허리를 쭉 펴고 《오빠처럼 존경해주십시오.》 하고 익살을 부렸다. 맨 나중에 키가 꺽두룩한 문지기가 가로등처럼 고개를 구부정하고 내려다보며 《〈야쉰 더하기 다싸예브 곱하기 백 같기 나!〉 문지기입니다. 애인은 지난해까지 0. 5명이였는데 새해 1. 4분기안으로 0. 7명, 상반년안으로 무조건 옹근수 1명이 될것입니다.》 하고 자기를 길게 소개했다. 그러자 《동생처럼 사랑해달라》고 노죽부리던 키작고 박달몽치처럼 단단한 친구가 제꺽 나서며 그 말을 통역했다.

《이 친구는 수학을 좋아해서 뭐나 이렇게 수학적으로 말한답니다. 자기가 세계적인 문지기 야쉰과 다싸예브를 합친것보다 백배나 되는 문지기라는데 허풍이 좀 섞인걸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처녀와의 사랑은 작년까지는 절반 익었고 새해 1. 4분기안으로 70프로 익히겠으며 상반년안으로 완전히 익히겠다는건데 마음에 드는 처녀하나 단번에 휘여잡지 못하는 〈수학자〉의 소심성도 함께 용서해주십시오.》

현숙이가 까르르 웃자 모두가 따라웃었다. 현숙은 히물히물하며 서있는 문지기에게 까박을 붙였다.

《사칙규정두 채 모르면서 수학자로군요? 〈야쉰 더하기 다싸예브〉는 괄호안에 넣구 백을 곱해야 식이 맞아떨어지지 않는가요?》

무슨 말인지 얼른 리해가 안가 다들 현숙이와 운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재빨리 눈을 굴리며 입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려보던 운호가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겼다.

《옳아, 넉셈에선 곱하기, 나누기를 먼저 하게 됐으니까 더하기를 먼저 하구 곱하자면 괄호를 쳐야지!》

그래도 다른 친구들은 리해가 안되는지 그냥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운호는 눈판에다 《(야+다)×100=!》라고 식을 휘갈겨썼다. 그것을 보고난 문지기가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난 지금까지 받아야 할 평가를 절반밖에 못 받구있었다는건데 운호, 팀에 하나밖에 없는 기사가 뭘 그래?》

다른 친구들이 서둘러 문지기의 말을 밀쳐버렸다.

《기계기사가 아무렴 넉셈계산식도 모르겠는가? 설계원동무, 잘못 세운 첫번째 식두 이 친구가 세운겁니다. 절대루 우리 운호기사가 세운게 아니지요.》

처녀앞에서 운호의 실책을 막아주려고 급급해하는 이들을 재미있게 둘러보던 현숙은 또 한마디 톡 내던졌다.

《대학을 졸업해야 기사지 공장대학두 채 졸업 못했는데 기산가요?》

그러자 운호의 친구들은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대학을 졸업 못하다니? 이 친군 청진광산금속대학 최우등졸업생이요.》

《공장대학은 재벌루 다닌단 말이요. 쪼꼬말 땐 7. 15상두 탔소. 그렇지? 요만할 때.》

《아니야. 7. 15는 좀 큰담에 타구 요만할 때 탄거야 〈우리 교실〉 이지.》

《대학땐 과학상두 탔다지 않아!》

《대학생과학탐구상이지!》

겨끔내기로 떠드는 항변에 사실이냐는듯 운호를 놀랍게 쳐다보는 현숙에게 박달몽치같은 통역원이 또 한발자국 나서며 두손으로 자기 팀 주장을 정중히 가리켰다.

《좌우간 우리 팀 주장 리운호동지로 말하면 강아지만 할 때부터 송아지만 할 때까지 무슨 상, 무슨 상, 상이란 상은 다 탔습니다.》

말을 듣고보니 지금이 꼭 송아지무리같은 이 축구팀이 어렸을적엔 정말 강아지무리같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현숙은 또 까르르 웃었다. 그런줄도 모르고 처녀를 둘러싼 축구팀은 덩달아 떠들썩 웃어댔다.

운호가 짐짓 정색해서 말했다.

《현재 2:0으로 전반전이 끝났는데 고견 한마디 준다면 후반전엔 그보다 더 넣을수 있소.》

현숙은 그 말을 톡 잡아챘다.

《득점차이가 너무 많은 경기는 볼 재미가 없지요!》

순간 폭소와 박수소리가 터졌다. 처녀의 재치있는 칭찬에 기고만장해진 운호네는 관중의 재미를 위해서 후반전에는 실력을 조절하겠노라고 흰소리쳤다. 한 친구가 어느결에 날쌔게 달려가 경기장관리소의 어느 사무실에서인가 팔걸이의자를 메여내왔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눈가루를 말아올리는 바람은 공교롭게도 운호네 팀의 문대를 향해 불고있었다. 그 바람을 타고 저쪽에서 내지르는 뽈은 어방없이 운호네 종심으로 깊숙이 날아넘어오고 운호네는 아무리 힘껏 내몰아도 뽈이 발앞에서 얼마 못가서 떨어지군 했다. 한치한치 몰고나가던 뽈이 상대방 방어수의 발에 슬쩍 걸치기만 해도 자기 팀방어선을 휙 날아넘었다.

경기는 자주 중단되였다. 밖으로 굴러나가는 뽈을 주어주느라고 대기선수들도 언제 서있을 사이가 없었다. 세계적인 문지기 둘을 합친것보다 백배나 된다는 문지기는 련속 날아드는 뽈을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팀의 전체 인원이 문대앞에 몰려들어와 밀집방어진을 쳤다. 이런 정황에서 공격이란 있을수도 없는 일이였다. 그러자 류진항팀도 전체 인원이 운호네 문대앞에 밀려들어 사정없이 쏘아댔다. 역습을 당할 걱정이란 도저히 있을수 없기때문이였다.

날씨에 관계없이 경기를 한다고 큰소리친 운호네로서는 이제 경기를 중단하고 물러설수 없었고 류진항팀은 극도로 불리한 조건에서도 경기중단을 거부하는 형타팀에 꼴소나기를 퍼붓지 못한다면 더는 도전할 체면이 없게 되였다. 운호네가 끝내 한꼴을 내주었는데 바람은 점점 더 기승을 부렸다. 언제 흰소리치고 웃고 떠들었는가싶게 운호네는 누구나 긴장해지고 숨이 차서 헉헉댔다. 눈보라속에서 량팀이 다 자기 팀의 명예를 걸고 필사적인 결투에 나섰다.

관객들은 태반이 가버리고 그래도 끈질긴 구경군들은 눈바람을 피해 경기장건물현관에 몰켜서서 구경했다. 경기장바닥에 관중이란 백병전을 벌리는 운호네 출전팀이 벗어놓은 솜옷무지를 한아름안고 팔걸이의자에 고집스레 앉아있는 현숙이뿐이였다. 민수에 대한 반발심으로 운호네 응원자가 되여 팔걸이의자에까지 척 앉아준 현숙이였지만 이제는 자리를 뜰수가 없었다. 눈가루가 사정없이 덮씌웠지만 훌쩍 일어서서 가버리기에는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있는 운호네한테 미안스러운 일이였다. 대기선수들이 현관에 들어가라고 권고했지만 도전적인 쾌감에 사로잡힌 현숙은 머리를 저었다. 눈가루를 하얗게 뒤집어쓰면서도 여전히 자기들이 마련해준 자리에 앉아 까딱없이 경기를 보아주는 처녀의 모습은 운호네 팀에 참으로 커다란 힘이 되였다.

모두가 문대에 몰려들어 눈보라에 휘말려돌아가는 판에 주심은 경기장밖에 물러나와 시간이나 재는수밖에 없었다. 이런 판에 공정한 심판이란 말도 되지 않았던것이다.

후반전 마감을 얼마 안남기고 운호네는 또 한꼴을 먹고야말았다. 결국 경기는 2:2동점으로 끝났다. 그러나 만약 축구에도 판정승이라는것이 있다면 운호네가 분명히 이긴 경기일것이다. 이 유별난 경기를 마지막까지 다 구경하고서야 흩어져가는 구경군들속에서는 경기도 경기지만 눈보라를 들써서 눈사람처럼 되여가지고도 《좋아하는 총각》의 팀을 끝까지 앉아 지켜준 간단치 않은 처녀가 더 큰 화제거리로 되였다.

승부를 통쾌하게 가르지 못한 아쉬움과 빌어먹을 날씨에 대한 원망이 한데 어울린 선수들에게 한아름안은 솜옷들을 내밀며 현숙은 상냥스레 웃어주었다.

《수고들 했어요, 승리자들!》

맥을 뽑을대로 뽑은 선수들이 그 말에 다시금 활기를 띠며 떠들기 시작했다.

《고맙소, 설계원동무.》

《우리 팀의 고문으로 모시자구.》

《아니, 녀왕으로!》

떠들썩대며 점심식사에 초청하는 축구팀의 청을 현숙은 가까스로 뿌리쳤다.

그렇게도 기승을 부리던 바람이 언제 그랬냐싶게 딱 멎었다. 류진바람은 언제나 이랬다. 갑자기 시작되여 광란할 때 같아서는 며칠이고 멎을것 같지 않다가도 내가 언제? 하고 시치미를 떼듯 뚝 그치군 하는 바람. 그래도 이렇게 짧게 불고 그치는것은 드물었다.

경기장밖에서 헤여지면서 운호는 무척 아쉬워하였다.

《다음번 경기할 때 또 초청하겠소. 그땐 정말 멋진 광경을 보여줄테요. 아 참, 우리 친구들하구 같이 이제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지 않겠소? 기념으로 한장 남겨야지?》

(송아지무리하고?)

별안간 떠오른 생각에 현숙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무슨 기념으로요? 비긴 기념?》

《아니요. 새해 1997년을 맞이하는 기념이지. 멋진 사진이 될거요. 그 생각이 왜 이제야 났을가? 내 우리 친구들을 부르겠소.》

운호가 왁작 떠들며 자기와 현숙이를 슬그머니 떨구어놓고 앞서가는 친구들을 소리쳐부르려고 하자 현숙은 서둘러 막았다.

《후에 찍자요. 진짜 멋들어지게 이긴 다음에.》

그러자 운호는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튀겼다.

《좋소! 약속했소! 다음번 경기는 동무가 하자는 날에 조직하겠소. 찍소, 어느날이요? 우린 아무때나 준비돼있소.》

《생각해봐야지요. 우리 사업소하구 동무네 공장은 휴식일이 서로 다르겠으니. 생산기업소들은…》

현숙의 말을 운호가 제꺽 잘라버렸다.

《그건 걱정마오. 우리 공장은.》 그러다가 운호는 떡 굳어지고말았다. 금시까지 활기를 띠였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생산이 없는 공장, 열댓명의 청년들이 우르르 빠져나와도 지장이 없을 정도로 일손이 딸리지 않는 공장, 그런 한심한 공장이 무슨 자랑거리라고…

속마음을 조금도 감출줄 모르는 순진한 소년같은데가 있는 운호가 갑자기 시무룩해지는것을 보자 현숙은 은근히 동정심이 생겨났다.

《그 공장도… 돌아가지 못하는게지요?》

한숨을 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운호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아니! 돌아갈거요. 어떻게 하나 공장을 살려내겠소. 정말이요!》

총각의 눈에 비끼는 단호한 빛을 보며 현숙은 지난해 결사의 개척전투가 벌어졌던 풀섬을 생각했다. 죽어가는 한 공장을 살려낸다는것이 어떤 전투인지 과연 알고나 있는지?

현숙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힘들거예요. 만약 … 》

잔교설계를 위해 풀섬의 찬바다물속에 뛰여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온몸이 오싹해오는것과 함께 짜릿한 흥분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전류처럼 관통했다. 그때처럼 모든것을 깡그리 쏟아붓고싶은 충동이 치밀어올랐다.

《현숙이 도움이 필요하면 아무때나 찾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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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 단동 - 로동 - 2021-12-28
안녕하십니까? 제가 조국에서 이 도서를 열람할때 기억에 의하면 1장이 시작되기전 주인공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언약하는 서문이 별도로 존재했던 생각이 듭니다. 그 부분이 루락되였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관리자 - - 관리자 - 2021-12-30
미래선생의 기억이 정확합니다. 빠진 서문내용을 올렸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열람해주시기 바랍니다.
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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