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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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양식사업소 자재부원 석용하에게서 세멘트를 사들인 사람은 도시설계사업소 청부설계실장 유민수였다. 풀섬양식기지 준공검사를 나갔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숙은 격분했다. 인간의 의리와 량심우에 일신의 명예와 출세를 올려세운 그 인간이 오늘은 풀섬에 스며있는 애국적희생의 뜻까지 모독하고있다는 생각이 현숙이를 참을수없이 격분시켰다. 그래서 그는 늦은 퇴근길의 발걸음을 도시설계사업소로 돌렸다. 민수가 요즘 부지런히 실적을 올리느라고 사무실에서 침식한다는것을 알고있었던것이다.
정전이 된 거리에 살림집들은 어느 집이나 할것없이 한두개의 창문에서만 등잔불, 초불빛들이 흘러나오다나니 불빛이 어설픈데 달빛은 유난히도 밝아 거리는 우중충해보였다. 차디찬 겨울하늘에서 휘영청 둥근 보름달도 추위에 질렸는지 창백하게 웃고있었다.
발전발동기를 돌려 불빛이 환하게 쏟아져나오는 도시설계사업소의 정문에서 스무나문명가량의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몰려나오고있었다.
《수고들 했소. 래일 또 잘해봅시다.》
불빛이 환한 접수실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이 사람들을 바래우는 그 목소리는 분명 너무도 귀에 익은 민수의 목소리였다.
《어― 잘 먹구 갑니다.》
《실장동무, 편히 쉬오. 매일 밤 직장에서 자면서 고생많구만.》
보매 사업소대보수작업에 동원된 로동자들 같았다. 그속에 설계사업소 사람들도 섞였는지 어깨를 두드리는 거나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동무네 실장 괜찮아, 손이 크거던.》
기분좋은 미소를 짓고 돌아서던 민수는 불빛과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정문가에 서서 자기를 까딱없이 지켜보고있는 처녀를 보고 멈춰섰다.
《누구요?》
대답이 없었다. 그쪽으로 몇걸음 내짚던 민수는 등뒤로 제 그림자를 표표하게 홱 내그은 처녀를 알아보고 흠칫 놀라며 멈춰섰다.
《현숙이? 날 만나러 왔소?》
《그래요.》
처녀의 목소리는 차거웠다.
민수는 접수실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젠 발동기를 끄고 바떼리등을 켜오. 내 방에도.》 그리고는 다시 현숙이에게 돌아섰다.
《들어가기요. 무슨 일인지 추운데 서있지 말고. 오래 기다렸소? 저녁식사는 못했겠지?》
처녀는 랭소했다.
《고맙군요.》
새파란 태도에 비해서 목소리는 너무도 조용하고 담담했다.
《말하오, 뭐요?》
민수의 심드렁하고 태연자약한 태도에 현숙은 약이 올랐다.
《뭔가구요? 풀섬사람들을, 풀섬에 바친 희생을 모독하고서도 뭔가구요? 섬에 가는 자재를 빼냈지요? 양식사업소 자재부원을 돈으로 꼬여가지고.》
민수는 알만 하다는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것때문이요? 그렇다면 현숙인 뭔가 잘못 알구 왔구만. 난 법기관에 해당한 설명을 다 했소. 석용하라는 사람의 부정과 난 아무 상관도 없소. 법기관에서 필요한 조사를 충분히 다했고.》
주위를 환하게 비치던 불빛이 툭 어두워졌다. 발전발동기가 멎으며 공사현장의 외등이 꺼지고 접수실에서는 축전지등의 불빛만 한가닥 흘러나왔다. 사위는 갑자기 고요해졌다. 쌀쌀한 바람이 홱 불어치며 세멘트가루가 섞인 먼지가 흩날렸다. 민수는 털내의깃을 올리고 두손을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그것때문이라면 난 더 말할게 없소. 따질게 있으면 법기관에 가서 따져보오.》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쳐다보는 민수의 눈에 창백하게 떨고있는 둥근달이 비껴왔다. 민수는 시려드는 두손으로 얼굴을 힘껏 문지르고나서 천천히 현숙이를 지켜보았다. 자기라는 인간을 낱낱이 투시하고있는 저 눈길에 이 유민수는 지금 어떻게 비끼고있을것인가.
《현숙이.》 민수의 목소리는 한풀 꺾이며 수그러들었다.
《내 이전에는 현숙이한테 잘못한게 있소. 우리사이엔 사죄할 기회도 없었구만. 그러나 알아두오. 이번에 석용하라는 사람의 부정행위에 난 관련없소. 내가 팔아달라구 한것두 아니구 그 사람이 세멘트를 사지 않겠는가구 찾아왔기때문에 샀을뿐이요.》
그래도 현숙이의 날카로운 눈길은 민수의 얼굴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헌데 그 자재부원이 하루아침 허겁지겁 달려왔더구만. 후에 다시 해결해주든가 아니면 그만큼 돈을 돌려주겠으니 5백키로만 당장 돌려달라구.》 여기까지 말한 민수는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현숙의 어깨너머 어딘가에 단호한 눈길을 박았다.
《난 거절했소. 내가 내 호주머니의 돈으로 산 세멘트가 아니기때문에. 그건 우리 기업소자금이요. 당장 공장에서는 세멘트생산이 멎었는데 그 세멘트를 내주면 우리 공사는 어떻게 된단 말이요? 그리구 그 사람이 급해맞아하는 꼴이 무슨 롱간이 있구나 했소. 그런 장난을 했으면 불두 좀 맞아봐야지. 안 그렇소?》
현숙은 코웃음을 쳤다.
《흥, 결백하군요. 사들일 때는 그런 롱간이 있은줄 몰랐는가요?》
《여유가 있어서 파는줄 알았지.》
현숙은 말이 막혔다. 민수에게 더 따질것이란 없지 않는가. 그러면 이 사람은 아무 죄도 없는것으로 되고만다. 아무리 쌔근거리며 꼬집고 뜯어봐도 타매할 건덕지란 없었다.
《잘 알았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청렴결백하길 바래요.》
말마디들을 침뱉듯 내던지고 현숙은 돌아서버렸다. 처녀의 구두발소리가 차거운 달밤의 고요속에 몇걸음 또깍또깍 울리다가 딱 멎었다. 민수가 달려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것이다.
《현숙이.》
《뭐예요? 비키라요.》
옆으로 한걸음 비켜섰던 민수는 쌀쌀하게 걸음을 다시 내짚는 현숙의 옆에서 따라걸으며 두서없이 말을 시작했다.
《현숙이가 날 피한다는걸 알아. 그래서 배치지도 바꾸었구.》
《아니요, 난 피하지 않아요.》
《그러나 어차피 우린 같이 일하게 되오.》
현숙이가 멈춰섰다. 고개를 돌려 민수를 쓰겁게 쳐다보았다.
《산업설계가 없어진다는 그것 말인가요? 도시설계에 먹히운다는거지요?》
그 말에 민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말새질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요. 시에서는 전망적인 무역지대건설을 위해서 산업설계와 도시설계를 발전적으로 통합해서 건축설계사업소를 내오기로 했소. 먹고 먹히우는 관계가 아니요.》
《그래서요?》
말은 여전히 쌀쌀하지만 표정은 어느 정도 달라졌다. 현숙은 무엇인가를 찾듯 민수의 얼굴을 유심히 마주보며 다음말을 기다렸다.
《우린 이젠 류진국제무역지대건축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놓고 같이 일하게 됐소. 우리들의 귀중했던 시절에 바라던것이지만 양상이라고 할가, 색갈이라고 할가 너무도 판이하지. 다 내 잘못이요. 난 현숙이가 아니, 우리가 사람들앞에서만은 최소한 동업자로서의 관계를 유지했으면 하오.》
현숙은 눈길을 돌려 하늘중천의 둥근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지금 제자리에 딱 멈춰서서 자기들을 긴장하게 내려다보고있었다.
현숙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체면을 봐달라는건데 그러지요. 그 일은 입에 올리기도 싫고 더 생각하고싶지도 않으니까요. 마음놓으세요. 그러나 하나의 목표? 아니, 일감은 같아도 추구하는 목적은 같지 않다는걸 난 알아요. 우리의 인생은 양상인지 색갈인지가 아니라 본질이 서로 달라요, 본질이. 알겠어요?》
그리고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아까처럼 도고하게 달밤의 고요에 도전하던 또깍걸음이 아니였다. 깊은 생각에 잠긴듯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옮기는 그 걸음에 민수는 더 따라설념을 못하고 멍하니 서있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눈길을 들어 쳐다보니 아까는 없었던 엷은 구름이 어디선가 밀려와 달은 서서히 구름장을 헤가르며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현숙이를 따라가는것만 같았다. 하다면 저 달도 현숙이처럼 민수 자기를 경멸한다는것인가?
《현숙이를 잊지 않겠소.》
《아니, 잊으세요. 깨끗이!》
용서와 리해를 바라는 민수를 뒤에 남기고 걸어가는 현숙에게는 자기의 마음속에서 민수를 그어버리기까지의 나날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한장한장 눈앞에 밟혀왔다. 흘러간 과거에로 헤집고 들어가는 걸음일가? 발걸음을 옮길수록 과거의 모습은 새록새록 다가왔다.
…민수의 학위론문이 《건축과학》잡지에 발표된것은 현숙이가 대학졸업반에 진급한 재작년 가을이였다. 그때까지도 현숙은 어째서인지 민수를 리해해주고싶었고 일시 길을 바꾼 민수가 다시 자기가 걸을 그 길로 돌아와줄것만 같았다. 과연 어떤 론문을 내놓았을가?
《류진시건축에 대한 구조력학적분석과 새 과제》
류진! 그러니 민수는 중앙설계기관에 가서도 고향도시 류진의 건축구조를 연구한것이 아닌가. 서둘러 페지를 번지는 현숙의 손가락들이 떨려났다. 눈길은 잡지의 글줄들과 각종 력학계산자료들을 빨아들이듯 읽어나갔다.
겨울이면 사납게 터지군 하는 서북풍에 대항하여 안전하고 견고한 건축구조를 도출해내고 그 시점에서 지난 시기 류진시의 건축구조상부족점들을 날카롭게 지적한것도 놀라왔지만 도시의 현존건축구조를 허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퇴치하고 전망성있게 형성할수 있는 구조력학적과제를 새롭게 제기한 그 실력은 정말 놀라운 높이였다.
다음순간 현숙의 눈길은 굳어졌다.
론문의 중요한 체계로 따로 설정된 《새 력학적과제에 따르는 지붕구조!》
두해전 자기가 고심을 들여 착상하고 계산해냈던 새로운 지붕구조가 아닌가. 민수가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현숙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창조물로 간직되여있으며 앞으로 대학졸업론문에서도 핵심부분이 될 그것을 민수가 자기 론문의 한부분으로 발표해버린것이다. 현숙은 믿어지지 않아 다시, 또다시 읽고 또 읽었다. 더 전개하고 완성하기는 했으나 착상과 계산방식은 분명 현숙의것이였다. 이럴수가?… 가슴속에서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쑥 뽑히운것 같기도 하고 와르르 무너져내리는것 같기도 했다.
《건축과학》잡지에 발표된 민수의 학위론문은 전문가들속에서 화제거리로 되였다. 특히 그 론문에서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구조를 도출해낸 그 착상과 새로운 계산방식이 중요한 관심을 끌었다. 민수를 배워준 대학의 스승들은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쟁쟁한 건축구조공학가를 배출한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류진의 로설계가 오근성도 그 잡지를 보고 감탄하며 민수를 칭찬하는 편지를 현숙에게 보냈는데 그날밤 현숙은 남모르는 눈물을 씹어삼켰다. 두해전 민수에게만 보여주었던 그것이 이제는 세상에 민수의것으로 알려지게 되였다. 어쩌면, 사람이 어쩌면…
현숙이가 민수를 다시 만난것은 그가 결혼했다는 소식이 전해진지 얼마 안돼서 인민대학습당에서였다. 그곳이 몇층 홀이였던지.
뜻밖에 현숙이와 마주친 민수는 굳어졌다. 현숙은 태연하고도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결혼했다지요? 축하해요.》
현숙의 흔연한 태도에 민수는 당황해졌다.
《고맙소.》
그다음 둘사이에는 더 말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더 할 말이 없었던것이다. 따분한 침묵이 흘렀다.
입을 꼭 다물고 아래로 내리떨군 현숙의 눈길은 연록색주단우에 유난히도 새까맣고 윤기나는 민수의 구두앞코숭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앞에 서있는 현숙이 자기의 구두. 민수의 구두보다 색이 좀 뿌예보이는 처녀의 구두. 이 두 신발들이 이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을것이다. 자기의 신발이 고향 류진의 거리와 건설장들을 부지런히 밟을 때 저 까맣고 윤기나는 멋쟁이구두는 어떤 길을 밟을것인가, 어떤 길을.
민수는 가슴을 조이며 현숙을 이윽히 지켜보았다. 중앙설계기관에 들어간지 얼마 안되여 민수는 류진국제무역지대가 곧 창설된다는것을 알고 자기가 선택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록있는 설계가들이 많은 중앙설계기관에서는 자기같은 햇내기들에게 언제가야 독자적인 대상이 맡겨질지 알수 없는 일이였지만 만약 류진에 간다면 국제적인 무역도시의 건축에서 일약 명성을 떨칠수 있다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래서 대학때부터 연구해오다가 졸업을 앞두고 인생길의 행선지를 바꿀 때 덮어버렸던 류진시건축에 대한 구조력학적분석론문을 다시 꺼냈다. 몇해동안 품을 들인것이여서 그 방대한 자료작업은 인정받을수 있었으나 무엇인가 독특한 개성이 없었다. 그때 문득 현숙이의 소론문이 떠올랐다. 그 착상과 계산방식을 출발점으로 해서 다시 들여다보니 지금까지 찾지 못하여 모대기던 모든것이 일목료연하게 묶이워나갔다. 론문은 일사천리로 훌륭하게 완성되여갔다. 만약 현숙이와 공동연구로 한다면?
민수는 조용히 머리를 저었다. 현숙이한텐 미안한 일이였지만 그것이 현숙이의 전공분야가 아니고 박사론문과 같은 큰 론문들에 조수들의 연구성과가 포함되는것과 같이 생각하면 되는 일이다. 다만 현숙이가 이것을 까밝히며 들고다니지 말아야 하겠는데. 현숙이는 론문이 발표된지 몇달이 지나도록 자기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어쩐지 더 불안했다. 찾아와서 따지기라도 했다면 뭔가 설명하고 량해도 구할수 있겠는데. 그런 판에 멀리 류진에서 오근성이 그 론문을 읽어보고 아낌없는 찬사를 담아 편지를 보내왔다. 거기에다 론문이 전문가들을 놀래우고 화제거리가 되니 민수는 꼭 바늘방석을 깔고앉은 심정이였다.
그러나 이렇게 현숙이를 만나 그의 거동을 보니 그 문제를 놓고 자기와 어떤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것 같기도 했다.
《현숙이를 잊지 않겠소.》
잊지 않겠다고? 무엇을? 현숙은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잊으라요. 깨끗이!》
눈물이 쿡 솟구쳤다. 그 눈물을 민수에게 보이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약간 숙이고 돌아서는데 민수의 그 멋진 구두가 다시 눈길에 홱 비껴왔다. 현숙은 무작정 웃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짚었다. 내려가는 계단이 아니라 올라가는 계단을. 명예, 출세… 그런 길을 내짚을 그 까만 구두앞에서 절대로 자기를 낮추지 않으려는 반발심이였는지.
유민수, 부디 안녕히. 앞서 걸은 길을 안내해주고 사색과 꿈을 같이하던 그 시절이 고마왔던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가 세워놓은 인생길의 리정표가 다르니 추억은 해도 다시 만날 꿈은 꾸지 않는다. 아니, 추억도 없을것이다.
처녀는 오연히 머리를 쳐들고 웃층으로, 웃층으로 올라갔다. …
과거에로 헤집고 들어가던 현숙의 걸음이 여기서 급기야 멈춰졌다. 자전거가 급제동하는 아츠러운 《삐익―》소리와 함께 현숙은 그자리에 다리를 꺾고 주저앉았다. 자전거가 옆으로 넘어졌다. 생각에 옴해서 걷다나니 그만 옆을 살펴보지 않고 건늠길에 들어섰던것이다. 얻어맞은 다리가 시큰하여 꼼짝할수 없었다. 그보다 더 난감한것은 이제 자전거와 함께 넘어졌던 사람이 일어서면서 줄욕을 퍼부을 일이였다. 그래서 현숙은 아픈 다리를 부둥켜쥐고 엄살을 부리며 아예 일어서질 않았다.
《안됐습니다. 많이 다쳤습니까? 좀 봅시다.》
자전거를 일으켜세우고 황황히 현숙에게 다가온 그 목소리는 뜻밖에도 젊은 청년의 목소리였다. 어딘가 애티가 느껴지는 총각의 목소리. 무지막지하게 험한 욕을 퍼부을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에 현숙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얼어서 미끄러운 길에 자전거와 함께 넘어졌으니 저도 어딘가 아플텐데.
《이거 그만 내 생각만 하다나니 미처… 많이 상했는가요?》
상대가 처녀이다나니 안아일으켜세우지도 못하고 어쩔바를 몰라하는 그 거동에 현숙은 웃음이 나왔다. 미처? 생각하느라고? 그러니 내탓이 아니라 제탓이란 말이지? 흥, 욕은 내가 해야 될걸.
현숙은 웃음을 싹 지우며 천천히 일어섰다. 둔중한 아픔이 뻗치여 몸이 약간 비칠거렸다. 그러자 상대방은 서둘러 처녀의 팔을 잡으며 부축해주려 했다. 현숙은 그것을 가볍게 뿌리치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건늠길인데 사람을 보고 다녀야지요.》
휘영청 밝은 달빛에 환히 보이는 상대방은 소년의 천진성이 어딘가 남아있는 젊은 총각이였다.
《이거 정말 안됐습니다.》
현숙은 저도 모르게 또 웃음이 나갔다.
(여보세요, 동무. 사실은 옆을 보지 않구 건늠길에 들어선 내탓이예요. 말은 왜 먼저 해가지구 까꾸루 욕먹나요?)
얄궂은 웃음이 살짝 비껴가는것을 놓치지 않았는지 총각이 벌씬 웃었다.
《제길, 이렇게 밝은 달밤에 서로 보지 못하다니. 사실은 동무가 딱 옆에 자전거가 왔는데두 그냥 길에 들어서니 피할새두, 세울새두 없었소.》
현숙은 장난기짙은 웃음을 짓고있는 총각을 새침하게 쏘아보았다.
《그러니 내탓이라는건가요?》
《그럼 내탓이요?》
총각도 지지 않고 대꾸하며 재미있다는듯 쟁글쟁글 웃었다.
《동문 양보할줄 모르는구만. 자전거가 지나간 다음에 길에 들어서면 못쓰오?》
현숙은 말문이 딱 막혔다. 뭐라고 쏘아주고싶은데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맙군요, 가르쳐줘서. 그럼 어서 가보세요. 양보할테니.》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서있었다.
《헹, 성났소? 휘발유성격이구만. 옥탄가가 너무 높은것 같애. 어서 가오. 난 자전거를 좀 봐야겠소.》
휘발유성격? 옥탄가? 현숙은 어이없어 총각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총각은 쭈그리고앉아 손으로 발디디개를 빙글빙글 돌리면서도 자전거를 살피고있는것이 아니라 처녀를 올려다보고있었다. 눈길이 마주치자 그 쟁글쟁글 하는 웃음이 또 피여났다. 무슨 남자가 얄밉기란.
현숙은 깔끔한 눈길을 던지고나서 도고하게 머리를 쳐들며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자전거에 얻어맞은 다리가 시큰하여 걸음을 바로 옮길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총각이 황황히 일어섰다. 장난기가 담뿍 담겨졌던 웃음이 싹 사라지고 가식없는 근심이 온 얼굴에 어렸다.
《정말 다쳤구만. 이거…》
현숙은 눈을 착 내리깔았다.
《괜찮아요. 비켜요.》
《집이 어디요? 내 태워다줄게.》
《흥, 동무탓은 아니니 어서 가기나 해요. 방해하지 말구.》
총각은 자전거를 끌고왔다.
이때 승용차 한대가 천천히 지나가면서 전조등빛이 그들에게 확 비쳐왔다.
승용차안에는 시당비서 류인석과 형타수리공장 초급당비서 지국림이 타고있었다.
늦은 저녁에 인석은 형타수리공장에 들렸다. 그동안 공장은 영구보존했던 설비들을 다시 전개하고 안팎을 꾸리느라고 해서 한심하고 퇴색했던 자취가 얼마간 사라지고 무엇인가 하고있다는감이 들었다.
국림은 시당비서를 못생산공정으로 안내했다.
《이건 두타기라는건데 못대가리를 만드는 기계입니다.》
식료가공장을 돌아볼 때와 달리 인석은 두타기에 몹시 흥미가 가는지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70미리, 100미리메터의 각이한 길이로 잘리운 철사의 한쪽끝을 때려서 못대가리가 형성되게 하는 두타기를 자세히 살펴보던 인석은 허리를 쭉 펴며 물었다.
《맵시있게 만들었구만. 원래 있던 설비는 아닌것 같은데?》
국림은 손을 맞비비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운호가 도면을 뜨고 제작도 맡아서 했습니다. 그 친구 뽈만 잘 차는줄 알았더니 아주 재간둥입니다. 식료가공기계들을 제작할 땐 모른다구 하더니 이런걸 할수 있는가구 하자 맡아놓구 나섰습니다. 식료가공은 몰라두 금속가공은 아무거나 다 자신있다면서.》
인석은 생각깊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책임기사동무가 몹시 앓소?》
《아닙니다. 감기가 온것 같습니다. 하늘소기침을 컹컹하면서두 계속 출근하는걸 보다 못해 오늘 아침엔 쫓아들여보냈습니다.》
《음.》 머리를 끄덕이는 시당비서의 기색이 잘했다는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지 알수 없어 국림은 고개를 기웃했다.
인석은 늦도록 공장을 구석구석까지 다 돌아보고 국림과 마주앉아 로동자들의 출근정형과 생활형편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고나서야 공장을 나섰다.
《타오. 동무도 퇴근해야지?》
《전 자전거가 있습니다.》
《그래두 같이 가기요. 늦었는데.》
승용차는 달빛이 환한 거리를 소리없이 달렸다. 국림은 깊은 사색에 잠겨 앞쪽만 주시하고있는 인석에게 물었다.
《비서동지, 왜 우리 공장에 새 지배인을 임명하지 않습니까? 결원된지도 오랜데.》
인석은 앞쪽을 내다보는 눈길을 떼지 않은채 대답했다.
《그 문제는 해당 부서와 따로 토론이 있었소. 공장당사업을 해보니 어떻소? 힘들지?》
그 말에 국림은 지친 기색으로 좌석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솔직히 힘듭니다. 이건 지배인이 할 일까지 대신하자니 하나부터 열까지…》
인석이 그 말을 날카롭게 잘라버렸다.
《동무에게 지배인사업까지 대신하라는 과업은 주지 않았소.》
국림은 의아해서 인석을 쳐다보았다. 인석은 여전히 앞차창을 통하여 전조등빛과 달빛에 환히 안겨오는 거리를 주시하고있었다.
《행정사업대행, 아니요. 당일군은 당사업, 정치사업을 해야 하오. 사람과의 사업이지. 공장에서 지배인의 1대리인은 책임기사라는걸 명심하오.》 그리고는 사색적인 그 눈길을 국림에게 돌렸다.
《아까 본 두타기 말이요, 그 기계는 사실 설계가 여간 까다로운 기계가 아니요. 기계기술자들은 그걸 보고도 도면을 뜨라면 영 힘들어하지. 그렇지만 가공자들은 노기스를 가지구 요리조리 재보면서 만들어내거던. 기계제작에서 기술이 먼저냐, 기능이 먼저냐 하는걸 가지구 기사들과 기능공들이 서로 다투게 하는 묘한 기계라고 하오.》
국림의 입이 벙글서 해졌다.
《옳습니다. 운호가 그걸 제꺽 도면으로 떠내니까 책임기사까지두 운호는 확실히 재간둥이라구 감탄했습니다.》
인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국림의 얼굴을 유심히 돌아보았다.
《그런 재간둥이가 어째서 식료가공설비들은 모른다구 잡아뗀것 같소?》
국림은 얼떠름해졌다.
《그건… 운호는 금속가공을 배웠지 식료가공은…》
인석은 다시 눈길을 돌려 앞차창을 내다보았다.
《무엇을 가공하든 기계의 원리는 다 같소. 책임기사, 운호… 공장의 운명은 이런 두뇌들을 어떻게 발동시키는가 하는데 달려있소. 책임기사동무의 생활에 관심하시오. 그 사람도 한때는 한다하는 기술자였소. 자기의 견해와 주장이 있는 사람이라는걸 명심하시오. 가만, 저게 운호가 아니요?》
국림은 인석이 가리키는대로 앞차창을 내다보았다. 운전사는 차의 속도를 늦추었다.
달이 밝은데다가 확 내비치는 전조등빛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처녀와 이야기하는 운호의 모습이 안겨왔다.
《옳습니다. 공부하러 간다구 하더니 저런 멋쟁이하구…》
천천히 지나가는 차창으로 그들의 모습을 돌아보고난 인석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옳소, 멋쟁이지. 산업설계의 리현숙이구만. 쟁쟁한 처녀설계가요.》
인석은 풀섬양식기지건설장에 나갔을 때 인상깊이 보아두었던 처녀설계가를 다시 돌아보았다. …
운호의 자전거는 달빛 고요한 거리에 발전자 돌아가는 소리를 고르롭게 울리고있었다.
《졸업론문이라구요? 흥, 그러니 아직 기사가 아니군요. 대학을 졸업해야 기사지 채 졸업 못하구두 기산가요?》
《그건 응― 후에 알게 될거요. 어쨌든 난 형타수리공장 기사란 말이요, 금속가공기계기사.》
《후엔 알고싶지도 않아요. 이 자전거하구 또 충돌할줄 아나요?》
《그럼 담번엔 쫓아가서 들이받을테요.》
둘은 즐겁게 웃었다.
쌀쌀한 겨울밤의 랭기가 스며들자 현숙은 목도리를 벗어준 총각에게 미안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춥지 않아요?》
《춥소. 그렇지만 훈훈해.》
《그건 무슨 말이예요?》
《오늘밤 날씨는 꼭 동무같소. 짱하게 맑으면서두 콕콕 찌르는것처럼 쌀쌀하거던. 그러면서두 부드럽고 포근한 달빛이 있구.》
《놀리는가요?》
《아니요. 난 묘사를 했소.》
《동무가 무슨 작가라구.》
《헹, 난 동요, 동시 아홉편이나 발표했소. 〈우리 교실〉 문학상두 탔거던. 그건 메달까지 있소.》
《대단한데요.》
《동무가 나하구 친하면 보여주겠소. 친하겠소?》
《메달이나 구경하자구요? 흥!》
《헹!》
또다시 웃음들이 터졌다.
《이렇게 서로 알게 됐는데 현숙동무, 새해 설날에 동무를 시경기장에 초청하겠소. 류진항친구들이 우리한테 류진시 축구선수권을 떼우구서 도전을 걸었단 말이요. 난 우리 팀의 주장이거던. 그래서 좋아, 그럼 1997년 1월 1일 오전 아홉시에 시경기장에서 하자고 했지. 오겠소?》
《동무가 축구선수? 믿어지지 않아요.》
《그럼 무슨 선수 같소?》
《선수는 무슨 선수? 장난꾸러기같은데.》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