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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세민간극문학에 대한 해설
문예도서 《조선중세민간극문학》에는 8편의 탈극작품, 2편의 인형극작품, 2편의 화극작품, 각각 1편씩의 독연극작품과 소리극작품 모두 14편의 중세극문학관계 유산을 실었다. 물론 이 14편의 작품이 우리 나라 중세극문학유산의 전부일수는 없다. 그러나 이 유산들은 중세기의 우리 나라 극예술과 극문학의 민족적특성, 고유한 면모 그리고 발전과정을 비교적 명확히 파악할수 있게 한다. 우리 나라 중세극예술은 사실상 민간극이였다고 볼수 있다. 16세기에까지 이르는 우리 나라 중세민간극대본들은 기록되지 못하였던 관계로 대부분이 없어지고 극히 일부분의 탈극과 인형극, 독연극대본들만이 후세에 구전되였다. 이 대본들에 의하여 17∼19세기의 중세극예술의 민간극적본성이 견지되였다. 그러다가 18∼19세기에 이르러서 중세극문학은 민간극대본으로서의 면모에서 일련의 변화가 생기게 되였다. 그것은 우선 구전되여오던 대본들을 다듬어서 글자로 고착시키는것이였고 다음으로 일부 문필가들에 의하여 서사화된 극문학작품들이 창작된것이였다. 신재효의 《3창춘향가》와 윤달선의 《광한루악부》는 전자의 대표적실례이고 리덕무의 《동상기》와 작가 미상의 《만강홍》은 후자의 전형적실례로 된다. 이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봉건사회말기의 력사적흐름을 반영한것이였다. 봉건사회말기에도 민간극인 탈극, 인형극, 독연극 등이 연극에서 주를 이루었는데 이때에는 이 극형식들에서 구전되여오는 대본을 글자로 기록하려는 지향이 대두하였는바 그것이 두가지 형태로 표현되였다. 하나는 구전되는 대본을 그대로 글자로 적어두는것이였는데 《소리 12마당》 또는 《소리 5마당》이라고 하는 독연극작품과 《봉산탈극》대본을 기록하려는 현상이였고 다른 하나는 구전되는 독연극작품인 《춘향전》의 소리대본에 기초하여 《3창춘향가》를 만들고 《광한루악부》로 각색한것과 같은 경향이였다. 봉건사회말기에는 중세문학에 의거하여 근대문학의 출현이 준비되였다. 그리하여 민간극대본의 창작가들뿐아니라 일부 문인들이 극문학창작에 참여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였다. 그 대표적인물들이 리덕무, 윤달선 등이였다. 특히 리덕무가 화극작품 《동상기》를 집필한것은 의의가 크다고 볼수 있다. 화극이란 말극 즉 대사의 극예술이라는 뜻이다. 화극은 대사와 연기행동이 기본형상수단인 까닭에 중세기의 여러 극형식들가운데서 근대극형식에 그중 가까운 극형식이라고 할수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이 화극형식은 세나라시기부터 시작하여 고려시기와 15∼16세기에 이르는 력사적기간 계속 창작공연되여왔다. 그런데 이 기간의 화극대본은 하나도 남아있는것이 없는 까닭에 그 형식의 자세한 표상을 명백히 가지기 힘들었다. 그뿐아니라 15∼16세기에는 화극이 상대적으로 왕성하게 창작공연되였다는 자료가 남아있는 반면에 17∼19세기에는 화극이 창작공연되였다는 자료가 거의 발견되지 않고있다. 이로부터 근대극의 발생이 준비되던 단계인 17∼19세기에 근대극에 그중 가까운 화극형식이 더 왕성해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한것이 무슨 까닭이였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것은 당연하다. 실지는 많이 창조되였는데 기록된 자료가 없는가, 아니면 창작공연된것이 없는 까닭에 기록된 자료도 없는것인가. 반드시 해명되여야 할 이 연극사적인 의문을 푸는데서 17∼19세기에 창작된 《만강홍》과 특히 《동상기》는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된다. 《만강홍》은 작가도 창작년도도 아직은 확증되지 못하고 다만 여러가지 론거에 의해서 봉건말기의 작품으로 판단되고있지만 《동상기》는 작가와 창작년월일이 명백하다. 따라서 《동상기》를 기준으로 삼고 우로는 그전 세기들의 화극의 특징들을 보다 근거있게 고찰할수 있고 아래로는 근대극문학의 출현이 준비되는 단계에서 화극문학이 어떤 위치와 역할을 차지하였던가를 분석할수 있다. 신재효의 《3창춘향가》가 앞으로 발생하게 될 근대극에서 성별, 년령별 배역을 가능하게 하는 준비사업에 기여한것은 명백하다. 20세기초에 원각사극장에서 신극 즉 근대극이 창작공연되던 첫 시기에는 중세독연극의 소리배우들이 기본출연자들이였고 이들의 중세독연극대본들인 《소리 5마당》중의 일부 작품을 근대극문학대본으로 각색한것이 근대극의 초기공연작품의 하나였다. 이에 비해서 《동상기》는 근대극의 출현이 준비되여야 하는 시대적요구를 민감하게 반영하여 창작되였지만 실지로 근대극의 발생을 준비하는데서는 《3창춘향가》만큼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는 《만강홍》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된 리유는 여러가지로 설명될수 있으나 이 작품들이 무대에서 상연되지 못하고 《읽는 극작품》으로만 남아있는 사실도 원인으로 된것은 확실하다. 《읽는 극작품》이였으니 배우집단과의 창조적련계가 끊어지고 관중이 알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3창춘향가》만큼 역할을 할수 없게 되였던것이다. 바로 여기에 《동상기》와 함께 《만강홍》, 《광한루악부》 등 무대에서 상연되지 못하고 읽히우기만 한 극문학들의 제한성이 있었다. 중세극예술이 본질에 있어서 민간극이였던 사실은 민간극작품들의 사상예술성을 담보한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되였다. 중세기의 민간극배우들은 어느때나 《하호》였고 봉건사회의 최하층신분인 《광대》이거나 극상해야 농촌의 빈민 또는 도시주민의 하층인물이였다. 16세기의 유명한 화극배우이며 대본창작가인 귀석은 봉건귀족의 말을 모는 노예였고 리조 전반기의 배우 통윤은 하층 중이였다. 인형극배우들은 뜨내기생활을 하는 빈궁한 예술인들이였고 독연극의 대부분 출연자들도 역시 천한 《광대》들이였다. 탈극출연자들가운데는 《봉산탈극》의 출연자들과 같이 빈한한 농사군들이거나 도시의 빈곤층도 있었고 《산대극》출연자들과 같이 봉건통치배들의 구속밑에서 그들이 강요하는 의식이나 놀이에 강제로 내몰리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자기들의 피눈물나는 체험을 가지고있는 동시에 기본관중인 인민들과의 련계를 통하여 그들의 생활과 지향을 속속들이 다 알고있었다. 그런 까닭에 중세민간극문학의 출연자인 동시에 창작가인 그들은 자기들이 출연하는 작품들에 인민들의 생활과 사상감정을 민감하게 반영하면서 창작가로서의 체험과 울분도 뜨겁게 토로하였다. 중세기의 탈극, 인형극 그리고 최하층신분의 창작가가 만든 화극의 작품들에는 중세기의 어느 소설, 어느 시가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종을 비롯한 최하층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애국적인 사상감정이 비교적 강하고 량반, 관료 그리고 타락한 중에 대한 비난과 조소가 신랄하다. 다음으로 우리가 명확하게 인식할수 있는 사실은 우리 나라 중세극예술과 극문학형식이 결코 단순하지 않고 다양하며 거기에 우리 나라 중세극예술형식의 민족적특성이 구현되여있다는것이다. 인류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발생발전하여온 극예술이 고대와 중세단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배우가 신적인 성격이나 정령이든가 마귀, 동식물, 달이나 별 등을 의인화한 성격을 가면으로 그려서 얼굴에 쓰고 출연하는 탈극, 배우가 인형을 조종하는 방식으로 연기하는 인형극, 배우가 자기의 얼굴을 화장으로 성격화하고 무대에 나와서 대사를 구사하면서 연기하는 화극, 노래에 대사를 결합시킨 소리극과 가극 그리고 1인다역의 독연극 등이 류행되였다. 우리 나라 중세극예술에 대한 발굴사업을 진행하던 초시기에는 주로 탈극, 인형극에 관심이 집중되였고 근대연극의 발생기에 생겨난 창극과 그것에 선행하였던 소리배우들의 독연극까지를 포함하여 구극이라는 명목으로 연극형식에 첨부해서 조사하게 되였다. 이것이 하나의 기성관례로 되여 내려오면서 다른 극형식과 관련된 유산들의 발굴이 오래동안 관심밖에 놓여있었다. 그러다가 화극형식에 대한 자료들이 발굴되면서 이 화극이 중세기에 있었다는 사실이 론의되게 되였다. 이 론의는 《만강홍》과 《동상기》가 발굴되여 소개되면서 비로소 확고한 정설로 될수 있었다. 중세독연극도 그 연원은 다른 중세극형식들의 발생시기에로 멀리 소급될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지금 독연극의 작품들로서 알려진 대표적인것들은 평안도지방에서 이루어진 《배뱅이굿》과 전라도일대에서 많이 창작공연되면서 널리 퍼진 《춘향전》을 비롯한 《소리 12마당》작품들이다. 이 독연극은 한사람의 소리배우가 한손에 부채같은것을 들고 서서 노래와 대사, 무용, 연기행동으로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극적인 내용의 장중편작품을 한사람의 반주자가 쳐주는 장단에 맞추어서 혼자 형상하는 형식으로서 배우가 1인다역을 하는것이 특징이였다. 《광한루악부》는 공연되지 못한것으로 하여 우리 나라 중세기에 가극형식이 있었다는 자료를 아직 찾아볼수 없다. 따라서 무대예술로서는 가극형식의 기능에 가까운것이 《배뱅이굿》이나 《춘향가》 등 1인다역의 극형식에 의해 대체되였다. 하지만 《광한루악부》와 《춘향가》의 문학형식은 엄연히 다르다고 볼수 있다. 신재효의 《3창춘향가》는 그 시기에 녀성배우들이 드물었던 실정에서 배우들을 성별, 년령별특성에 맞게 육성하고 기량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춘향전》의 소리대본을 각각 《남창춘향가》, 《녀창춘향가》, 《동창춘향가》로 나누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색갈이 다르게 다듬은것으로서 문학적으로도 세련된 점이 적지 않으며 예술사에 기여한 점도 큰 작품들이지만 독연극문학으로서의 양상이 본질에 있어서 《배뱅이굿》과 같았다. 이 책에서는 《춘향전》을 각색한 윤달선의 《광한루악부》를 올리는 조건에서 《3창춘향가》를 빼놓게 되였다. 그런 까닭에 극문학형식으로서는 《광한루악부》가 우리 나라 중세가극문학형식의 작품으로 이채를 띠고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중세기의 탈극, 인형극, 화극, 독연극, 가극형인 소리극들은 각기 고유한 예술형식적특징을 가지고있지만 그 모든 형식들에 민족적특징을 구현하고있다. 그것은 공통적으로 노래와 대사, 춤과 연기행동이 각이한 모양새로 결합되여있는것을 봐도 잘 알수 있다. 탈극과 인형극에서는 이 결합들이 아주 공고하고 명백하다면 독연극에서는 소리를 기본으로 하면서 사설(대사와 서술적인 말)이 결합되고 너름새(률동적인 연기와 동작)에 춤이 가해졌다. 그런가 하면 소리극문학에서는 등장인물의 창(소리)을 기본으로 하면서 내용을 가사식의 시로 표현하였으며 소리가운데서 행동과 춤도 소개되여있다. 화극문학의 두 작품, 《동상기》와 《만강홍》은 《읽는 희곡》식으로 된 작품으로서 춤대목은 제시된것이 거의 없고 대사를 위주로 하면서 노래와 시가 적절하게 결합되여있다. 이와 같은 각종 형상수단이 각이한 모양새로 결합되여있으면서도 그 모든 결합이 극적인 인간성격과 생활을 펼쳐보이는데 복종되고있다. 대사와 노래, 가사와 시, 연기행동과 춤, 률동 등 다양한 형상수단을 적절하게 결합시키는것은 극예술일반에서 사상예술성을 돋구는 효과적인 방도로서 보편적의의를 가진다. 이러한 효과적인 방도를 탐구적용한것은 우리 나라 중세극문학이 가지고있는 우수한 민족적특성의 하나이다. 14개의 중세극문학관계 유산작품들을 종합하면서 우리가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는 다른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우리 나라 연극의 발생발전의 중심지와 그 의의에 대한 문제이다. 조선중세민간극문학을 집필편찬하면서 8개의 탈극작품을 종합하였는데 그속에는 서해안일대에서 《봉산탈극》과 《산대탈극》, 동해안지대에서 《북청사자탈극》과 《통천탈극》, 남해안지대에서 《수영야류》와 《통영오광대》, 내륙지방에서 《양주소놀이굿》과 《하회별신굿》이 들어있다. 거의 전국적범위에서 종합한 탈극작품들은 개개가 다 특색이 있으나 그가운데서도 사상예술적으로 가장 우수하고 력사가 오래며 광범히 알려진 작품으로는 《봉산탈극》이 공인되여왔다. 황해북도 봉산을 본거지로 하고 주변일대에 널리 전파된 《봉산탈극》은 대동강하류에 린접한 고장의 탈극이다. 봉산과 대동강을 련결하는 중간지대인 안악지방에는 고구려시기 왕릉인 3호고분이 있다. 벽화로 유명한 이 안악3호고분에는 탈춤을 추는 그림이 있다. 이것은 대동강하류일대가 고구려시기부터 탈놀이가 왕성한 고장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동강류역은 인류의 가장 앞선 문화의 하나인 대동강문화의 발상지이다. 이러한 사실은 《봉산탈극》이 대동강문화의 발상지에 줄기를 잇고 고구려탈놀이가 왕성했던 지역부근에서 일찍부터 형성발전되였다는것을 시사해준다. 《봉산탈극》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도지방에 전파된 《산대탈극》과 일련의 사상예술적공통점들을 가지고있다. 그런데 《산대탈극》은 그 연원을 개성지방에서 고려시기에 성행한 《산대잡희》에 두고 리왕조의 도읍지인 서울(한성)에서 15∼16세기경에 형성된 탈극이다. 따라서 《봉산탈극》의 영향을 받아서 량자사이의 공통점이 생긴것이라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인형극으로는 《장연꼭두각시극》과 《서울꼭두각시극》이 알려지고있는데 인형놀이는 탈극놀이와 함께 창작공연되면서 발생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장연꼭두각시극》이 사상예술적으로 우수하다고 인정되여왔다. 이러한 여러가지 사실들은 우리 나라의 탈극과 인형극의 본고장이 대동강문화의 발상지와 넓은 의미에서 일치한다고 판단할수 있는 근거로 된다. 독연극형식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을 찾아보게 된다. 《배뱅이굿》은 평안남도 룡강일대가 본고장이다. 봉산, 안악 등지가 대동강하류의 황해도쪽에 위치한다면 룡강일대는 대동강하류의 평안도쪽에 놓여있다. 이 일대를 본고장으로 하는 《배뱅이굿》은 연산군때인 16세기에 당시로서는 이미 사상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고 수도에까지 널리 류포된 상태에 있었다. 그것은 연산군이 《배뱅이굿》에 자신이 직접 출연했다는 자료가 증명해준다. 《배뱅이굿》에 비해서 전라도지방의 독연극은 늦은 17세기에 태동하여 18세기에 이루어진것이였다. 이 사실은 곧 중세독연극형식도 대동강하류를 발원지로 삼고있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탈극, 인형극, 독연극의 력사를 놓고 대동강문화의 발상지대에서 우리 나라 연극이 태여나고 발전의 중심지대가 형성되였다는 근거가 뚜렷한 사실은 조선의 고대중세연극, 나아가서 조선연극전반의 커다란 자랑으로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