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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한 왕자 을불
세상에는 왕자가 거지와 옷을 바꿔 입고 하바닥인생을 체험했다는 유명한 책도 있다. 하지만 우리 력사에는 왕자가 때국물이 흐르는 옷을 입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고행의 한 시절을 보낸 실재한 사실이 있다. 그 주인공은 고구려의 20대왕이였던 미천왕(300-331년) 을불이다. 력사에 폭군의 한사람으로 기록된 봉상왕(292-300년)은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시기가 많았다. 그는 왕이 되자 삼촌인 안국군 달가가 공적이 있어 백성들속에 인망이 있다고 하여 의심하면서 당치않은 음모를 꾸며 살해하였다. 그리고 동생인 돌고가 딴마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아무 죄도 없는 그를 자살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돌고의 아들 을불은 왕이 자기도 해칠수 있다고 생각하고 도망쳐 몸을 숨기였다.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던 왕자 을불의 고행의 시절은 이렇게 왕의 의심과 폭행으로 강요되였던것이다. 을불이 도망쳐 처음 몸을 맡긴 곳은 수실촌사람 음모의 집이였다. 을불은 그의 집에서 한쪼각 밥덩이를 얻어먹으며 머슴으로 눈물겨운 고역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음모는 고약하고 혹독한 부자였다. 을불의 정체를 모르는 그는 온종일 마당을 쓸어라, 밭일을 해라, 나무를 해라, 부채질을 해라, 다리를 주물러라 하며 숨쉴 틈을 주지 않았다. 지어 집옆에 있는 늪에서 밤마다 개구리가 소란스럽게 울어 잠을 잘수가 없다면서 밤새껏 돌멩이를 던져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였다. 고역의 날과 달은 흘러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고행속에서 연약하였던 을불은 얼굴이 검실검실하고 가슴이 쩍 버그러지고 팔과 다리가 억세여진 름름한 장부로 성장하였다. 그의 이런 성장의 모습을 보는지 못 보는지 음모의 학대는 여전하였다. (더는 참을수 없다!) 을불은 단호히 악마의 소굴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동촌사람인 재모를 알게 되고 그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였다. 한번은 을불이 배를 타고 압록에 이르러 소금을 가지고 내려와 강 동쪽 사수촌사람의 집에 들린적이 있었다. 그 집의 로파가 소금을 청하여 한말가량 주었다. 로파가 더 달라고 하자 을불은 거절하였다. 로파를 불쌍히 여겨 한말을 그저 퍼줬는데 또 달라니 거기에 명줄을 건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인가. 을불이 로파의 청을 거절하자 그 로파는 앙심을 품고 몰래 소금짐속에 자기의 신발을 묻어두었다. 이것을 알리 없는 을불은 싸구려를 웨치며 마을을 돌았다. 그런데 얼마후에 로파가 따라와 다짜고짜로 그에게 매달려 행패를 부렸다. 《이 도적놈아, 내 신발을 내놓아라.》 《신발이라니, 무슨 신발말이요.》 아닌밤중에 홍두깨 내미는 격이라 을불은 아연해졌다. 《이놈, 아닌보살할테냐? 어서 그 짐을 보자!》 로파는 을불의 소금짐을 잡아벗겨 헤쳐보았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닐세라 신발이 나타났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로파는 기고만장하여 을불을 끌고 압록성주에게로 갔다. 《허, 그놈 참 고약하다. 얘들아, 저 도적놈의 볼기를 매우 쳐라.》 이리하여 미천한 왕자는 도적 아닌 도적이 되여 형틀에 묶이게 되였다. 곤장이 떨어질 때마다 살점을 뜯어내고 피를 뿌렸다. 을불은 입술을 깨물며 피눈물을 삼켰다. 압록성주는 신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로파에게 주고 운신을 제대로 못하는 을불을 알몸으로 내쫓았다. 을불은 또다시 빌어먹는 거러지신세가 되였다. 얼굴은 초췌해지고 옷은 람루해져 살이 다 드러났다. 한편 봉상왕은 사람을 여기저기에 파견하여 을불을 찾아 죽이게 하였다. 시시각각으로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속에서도 을불은 어린시절부터 품어온 뜻을 버리지 않았다. 단군조선의 땅을 모두 되찾고 고구려를 강대국으로 천하에 우뚝 세우리라. 전설에 의하면 그는 류랑걸식의 나날 료동지역 산천의 요충지들과 도로의 멀고 가까움을 알기 위해 풀씨를 가지고 다니며 길가에 뿌리여 자기가 경과한 길들을 기억해두었다. 지금도 료동각지의 길가에는 을불의 이름과 음이 비슷한 《우글로》란 풀이 많다고 한다. 여러해의 류랑걸식은 을불에게 참으로 많은것을 알게 하여준 나날이기도 하였다. 그는 천대받고 억압받는 근로대중은 비록 먹을것도 입을것도 풍족치 않아도 서로 의좋게 살며 고난을 함께 나누는 한형제와 같음을 페부로 느끼였다. 그가 주린 창자를 부여잡고 길거리에 쓰러져있을 때 그를 업고 집으로 가 먹을것을 준것은 못 볼것을 봤다고 골살을 찌프리며 피해간 귀족들과 부호나부랭이들이 아니라 선량한 백성들이였다. 그가 찬비를 맞고 병에 걸렸을 때 밤을 새워가며 약을 구하여 달여준것도 백성들이였다. 백성들은 한말의 곡식도 한자의 베천도 나누면서도 어서빨리 선조의 옛땅을 모두 되찾고 고구려를 천하의 대국으로 만들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봉상왕을 비롯한 통치배들은 어떠하였던가. 흉년으로 백성들이 죽어가도 자주 궁실이나 화려하게 증축하는데 인력과 재력을 마구 퍼붓고 반항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지어는 이에 대하여 충고하는 국상 창조리 등 관료들에게도 위협을 가하며 전횡을 부렸다. 봉상왕9년(300년)의 어느 날 을불은 장에 내갈 가죽신을 만들고있었다. 그동안 그는 한 장공인에게서 가죽신 만드는 법을 배웠다. 눈썰미가 있는 그는 인차 그 법을 체득하였는데 그가 만든 신은 인기가 대단하였다. 지금도 을불이 류랑걸식하던 옛 고구려의 령역이 있던 만주지방에서는 가죽신을 가리켜 우불(을불의 딴 이름)의 이름자와 거의 비슷한 《우글로》라고 부른다고 한다. 마지막신발을 마무리하고 가죽부대에 넣어 등에 진 을불은 강건너편의 성시에 내다 팔기 위해 비류하기슭으로 나왔다. 그가 나루배에 올라앉아 떠날 시각을 기다리는데 한무리의 관리들이 밀려왔다. 그가운데 풍채좋은 한 관리가 을불을 주시해보았다. 얼굴은 비록 여위고 옷은 람루하지만 몸가짐은 여느 사람과 달랐다. 그 관리는 배우의 사람들을 내리우고 반색을 하며 을불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왕손께 문안드리오.》 을불은 당황하여 뒤걸음쳤다. 《아, 아니요, 왕손이라니. 난 왕손이란 사람이 아니요.》 《아니옵니다. 신은 왕궁에서 저하(왕자에 대한 존칭)를 몇번 뵈온적이 있소이다. 신은 동부사람 소우라고 하나이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므로 국상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페할 일을 몰래 꾸미고있소이다. 그러면서 왕손이 절조가 있고 행동이 검박하고 인자하며 사람을 사랑하기때문에 조상의 유업을 능히 이을수 있다하여 일부러 북부사람 조불과 신 등을 보내여 받들어오게 하였소이다.》 을불은 의심을 가실수 없었다. 《나는 평민이요, 왕손이 아니니 다시 알아보소이다.》 소우는 진중한 낯빛으로 다시 간곡히 말하였다. 《지금 임금이 인심을 잃은지 오래여 진실로 나라의 주인이 될수 없기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몹시 간절하게 기다리고있으니 의심하지 말기를 바라나이다.》 소우 등의 이야기를 듣고 을불은 의심을 가시게 되였다. 그는 자기가 고추가였던 돌고의 아들 을불임을 털어놓았다. 소우일행은 몹시 기뻐하며 을불을 조맥 남쪽 어딘가에 숨겨놓았다. 그해 9월 국상 창조리는 후산 북쪽에서 사냥을 하는 왕을 따라갔다가 반정을 일으키고 봉상왕을 페위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여 을불을 맞아다가 왕좌에 앉히고 옥새를 바쳤다. 봉상왕은 스스로 목을 매여 자결함으로써 죄많은 생을 마쳤다. 이렇게 되여 8년간 류랑걸식하며 고행의 시절을 보낸 미천한 왕자 을불은 고구려 20대 왕위에 오르게 되였다. 그는 자신이 백성들속에서 살며 그들의 생활을 많이 체험하여 느낀바가 있으므로 과중한 봉건적억압과 착취를 일부 늦춰주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국내에 조성되였던 사회계급적모순을 어느 정도 완화시켰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조상의 땅을 모두 되찾고 나라의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킨것이다. 313~314년기간에 락랑군, 대방군의 침략세력을 구축하여 력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세력의 음모책동의 한 소굴을 청산하였으며 315년에는 현도군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한나라군이 B. C.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하였던 소위 《한4군》지역을 되찾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료동지역에 남은 침략세력의 마지막아성인 료동군을 소멸하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군사를 지휘하거나 혹은 장수를 파견하기도 하면서 《자주 군사를 보내여 료동을 공격》하였다. 그의 집권 30여년기간에 한나라에 강점되였던 고조선의 옛땅, 그의 선대 임금들이 그토록 찾으려고 애쓰던 조상의 땅이 많이 회복되게 되였다. 이것은 어려운 날에도 초지를 굽히지 않았던 그의 의지의 결실이였고 백성들과 험난한 생활을 함께 하며 난관을 맞받아나가는 억센 힘을 키운 결과이기도 하였다. 비록 그는 인민의 우에 군림한 봉건군주의 한사람이였지만 나라와 민족의 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것으로 하여 《미천한 왕자》의 일화와 더불어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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