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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어로 강적을 물러가게 한 을두지
아마도 사람들은 잉어 몇마리로 강적을 물리쳤다면 쉽게 믿으려 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너무도 믿어지지 않는 이 묘한 계책을 내놓은 사람은 고구려 8대임금인 대무신왕(18-44년)때의 재상 을두지이다. 그는 25년에 고구려에서 두번째 재상인 우보가 되였고 2년후인 27년에 첫째가는 재상인 좌보가 되였다. 을두지는 28년 7월에 한(후한)나라 침략군이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훌륭한 계책들을 내놓아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하고 《출장입상》의 재능을 보여주어 후세에 그 이름을 남겼다. 28년 7월에 있은 고구려와 한(후한)나라사이의 전쟁은 자기 겨레의 옛 강토를 되찾으려고 시종일관 투쟁해오던 고구려와 어떻게 하나 그것을 저지시켜보려는 한나라사이에 벌어진 정의와 부정의, 침략과 반침략전쟁이였다. 28년 7월 한나라통치배들은 빼앗긴 동족의 땅을 되찾기 위한 고구려인민들의 정당한 투쟁을 《죄》로 몰아붙이면서 그에 대하여 《추궁》하려 한다는것을 침략의 구실로 삼았다. 한(후한)의 《100만 대병(적들이 지나치게 과장하여 선전하였던것으로 보인다.)》은 일거에 변방의 여러 성들을 점령하고 전과를 확대해가고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령역을 부단히 확장하고 겨레의 옛땅을 모두 되찾으며 이에 따라 정연한 통치체제를 확립하는데 주력하고있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고구려측으로서는 한(후한)나라의 불의의 침공에 대처할 준비를 잘하지 못하고있은것으로 보인다. 적의 침입소식에 접한 대무신왕은 어전회의를 열고 대신들에게 맞받아 공격하는것이 옳은지, 아니면 지키는것이 유리한지에 대하여 의논에 붙였다. 우보 송옥구는 적들이 하늘리치에 거슬리고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짓을 하고있으니 반드시 성과가 없을것이라고 하면서 험한 지세에 의거하여 불의의 습격으로 적을 물리칠것을 제기하였다. 물론 타당성은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은 자연지리적조건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험한 지형은 혼자서 길을 막고도 만명을 당해낼수 있는 천험의 요새라고 할수 있었다. 하지만 좌보 을두지의 생각은 달랐다. 《페하, 소수인 군대는 강하더라도 대군에게 포로되는것이옵니다. 신이 대왕의 군사와 한나라군사가 어느쪽이 많은가를 헤아려보았는데 꾀로써 칠수는 있을망정 힘으로 이길수는 없소이다.》 대무신왕은 그의 계책에 흥미를 보이였다. 물론 송옥구의 의견가운데 적정에 대한 판단은 비교적 정확하고 험한 지세를 리용하고 불의의 기습전을 조직하면서 맞받아 공격할데 대한 계책도 영 그른것은 아니였지만 만전의 계책은 못되였다. 비록 한(후한)나라 한개 변방군의 군력이라고 하더라도 당시의 력량대비로 보아 고구려군보다 강대하였던것만큼 이를 힘으로 이기기보다는 꾀로써 치는편이 더 나았던것이다. 《꾀로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무신왕의 물음에 을두지는 자신심을 가지고 대답하였다. 《지금 한나라군사가 멀리 나와 싸우고있으니 그들의 서슬을 당해낼수 없소이다. 페하께서는 성문을 닫고 우리 군사를 튼튼히 하여 적들의 군사가 피로하여지기를 기다려서 나가 치는것이 옳을줄로 아뢰옵니다.》 이것은 청야수성전술로 적의 예봉을 꺾어놓고 그들이 피로하고 지치기를 기다려 반격하자는 책략이였다. 대무신왕은 을두지의 계책을 쓰기로 하였다. 임금은 모든 관료들과 수도안의 백성들, 군사들을 거느리고 수도방위성인 위나암성(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산성자산성)에 들어갔다. 적들은 기를 쓰고 성을 공격하였으나 수십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적들은 많은 손실을 입으면서도 성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았다. 대무신왕은 몹시 초조해하였다. 고구려군도 적들의 맹공격을 막아 싸우면서 어지간히 지쳤던것이다. 대무신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을두지에게 물었다. 《형세가 더는 지킬수 없게 되였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페하, 한나라사람들은 우리의 암석지대에 물나는 샘이 없다 하여 오래동안 포위함으로써 우리들이 곤난해지기를 기다리는것이옵니다.》 《그래, 무슨 계책이 없는가?》 을두지는 일단 꾀로 시작한 싸움인것만큼 끝까지 꾀로 싸워 승리할것을 결심하였다. 《련못속에 있는 잉어를 좀 잡아서 물풀로 싸고 또한 맛좋은 술을 약간 구하여 한나라군사를 먹이는것이 좋겠소이다.》 적들은 고구려의 산성이 암석지대에 자리잡고있는것으로 하여 물원천이 없을것이며 설사 있다 해도 한여름에는 물소비량이 더욱 많을것이므로 이제는 다 말라버렸을것으로 생각하고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였다. 재능있는 고구려사람들은 산성을 쌓으면서 언제나 물원천을 확보하는데 깊은 주의를 돌리였다. 그것을 증명해주듯 옛성터에는 《음마지》, 《양어지》라는 저수지자리들도 남아있고 지금도 물이 솟아나오는 샘이 두곳에나 있다. 이 샘물들을 적당한 곳에 끌어가서 성안사람들의 물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여러개의 못을 만들었으리라는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오판하고있는 적들에게 성안에 물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걸고있던 일루의 희망마저 허물어버리는것은 일종의 심리적공세라고 할수 있었다. 보통 깊고 큰못이나 강에서 서식하는 잉어를 성안에 있는 늪에서 잡은것임을 확인시켜주려는듯 물풀로 싸서 맛좋은 술까지 보냈으니 행여나 해서 가까스로 포위를 유지하고있던 적들이 어찌 놀라지 않을수 있으랴. 보급로가 절단되여 식량난을 겪고 한여름이라 땡볕아래서 기갈들고 지쳐있던 적들인지라 이러한 심리적공세의 효과는 더욱 큰것이였다. 모든것은 을두지가 예견한대로 되여갔다. 을두지는 다른 한편으로 우호적인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이것은 물러가고싶으나 《100만대병》을 끌고왔다가 패하여 물러가는 적들에게 퇴각의 구실을 만들어주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병법에도 한쪽 길을 틔워주어 퇴각할수 있게 해주어야 저항을 줄일수 있다고 하였으니 을두지의 계책은 도리에 맞는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적장은 《성안에 물이 있으니 졸연히 함락시킬수 없다.》 하여 고구려가 우호적인 태도로 나왔다는것을 퇴각의 구실로 삼아 군사를 끌고 황급히 물러가고말았다. 그리하여 28년에 고구려와 한(후한)침략자들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고구려인민들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침략군은 아무것도 얻어낼수 없었으며 고구려가 되찾은 지역들에 대해서는 더 시비를 걸수 없게 되였다. 여기에 이 전쟁의 승리가 가지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참으로 명장 을두지는 청야수성전술과 심리적공세를 능숙하게 배합하여 대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낸 재능있는 정치군사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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