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전쟁의 지휘자 전봉준
 

 

갑오농민전쟁의 지휘자 전봉준 

 

19세기말엽에 이르러 우리 나라는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의 사대매국행위와 일본을 비롯한 유미자본주의렬강들의 계속되는 침략과 간섭으로 하여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바로 이러한 때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구원하고저 정의의 기발을 높이 추켜들고 력사의 부름앞에 한몸 서슴없이 내세운 단군의 장한 후손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지휘자 전봉준이였다. 전라도 고부에서 지펴진 한점의 불꽃은 그의 지휘밑에 료원의 불길처럼 타번져 우리 나라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대규모적이고 가장 견결하였던 반침략반봉건투쟁으로 력사에 기록되게 되였다.

원쑤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던 전봉준(1854-1895년), 그의 자는 명숙, 호는 해몽이다.

그의 출생지와 관련하여서는 세가지 설이 전해지고있다. 그가 전라도 전주태생으로서 어려서 태인현 감산면으로 이주하였다는 설과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부락에서 출생하였다는 설, 정읍군 리평면 조소리(옛 고부군 궁동면)에서 태여났다는 설이다.

이 세가지 설가운데서 전주출생설은 후기 전주인사들이 만들어낸 설로 생각된다. 그리고 고창읍 죽림리 당촌출생설은 옛날 당촌에 20여호의 전씨마을이 있었고 갑오농민전쟁때 동학농민군의 두목들이 많이 배출되였다는 옛날 늙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봉준과 밀접한 연고가 있는 곳인것만은 틀림없다. 또 리평면 조소리설은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또는 전승록)이 고부군 향교의 장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의 선대로부터 대대로 살아온 곳이라는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전봉준의 출생지와 관련하여서는 아직 확정된것이 없고 앞으로의 연구성과를 기다릴수밖에 없다.

전봉준의 본관은 천안 전씨로서 그 시조는 전악이다. 그는 고려 개국공신으로서 삼사좌복야를 지냈으며 천안군으로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을 천안 전씨라고 한다. 그 후손가운데 대표적인물로서는 전신, 전상의, 전동흘 등이 유명하다. 또 근대에 들어와서는 전봉준이 이름을 떨치였다.

전신은 고려 충숙왕(1314-1330;1332-1339년)때 진현관 대제학, 동지밀직사사를 지냈으며 전상의는 1603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때 구성부사로 평안도병마절도사 남이흥, 안주목사 김준과 함께 안주성을 지키다가 순절했다. 그리고 전동흘은 효종(1650-1659년)때 무과에 급제하고 특히 용병에 능하여 리상진, 소두산과 함께 《3걸》이라고 불리웠으며 현종(1660-1674년)때 7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숙종(1675-1720년)때에는 총융사 훈련대장을 력임하였다. 이밖에도 천안 전씨후손가운데는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전몽성(현감)이 있다.

이처럼 대대로 무로써 많은 공을 세운 가문에서 태여난 전봉준이였기에 농민군의 재능있는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떨칠수 있은것이다.

전봉준은 체구가 자그마하였기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이 붙었고 후날에는 녹두장군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이 녹두장군이 바로 가문의 전통을 이어 군사적재능으로 세상을 들었다 놓았으니 그 일대기를 여기에 펼쳐보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의협심이 강한 사람으로서 고부군수의 탐오한 행위에 격분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가 잡혀 피살되였다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백성들의 소송대표가 되여 군수에게 항소하다가 붙잡혀 죽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런 애국적가문의 전통과 의로운 인사인 아버지의 영향하에서 전봉준은 애국에 살고 불의에 항거하는 정의의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였다.

비범한 재능과 학구적인 정열을 지녔던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동년배들가운데서 뛰여났다. 그는 벌써 1859년 6살때 서당에 들어가 글공부를 하였으며 13살때에는 《백구시》라는 한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래웠다.

 

  모래불을 고향삼아 마음껏 노닐고

  눈같이 흰나래 가는 다리로 맑은 가을날 홀로 섰구나

  부슬부슬 찬비속에 홀로 꿈꾸고

  때때로 고기잡이 가고나면 언덕에 노니네

  많고많은 물가의 바위 낯이 익었고

  얼마나 많이 풍상을 겪었던지 머리도 희였구나

  마시고 좋으며 쉴새없으나 지내하지 않으리니

  강호의 어족들아 깊이 근심 말아라

 

전봉준은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고 그후 곧 고부접주가 되였다. 그는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정읍군 리평면 장내리 조소리)에 거처를 정하고 훈장노릇을 하면서 동료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생활을 검박하게 하였고 집은 가난하여 6명가족이 조반석죽의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893년에 들어서며 고부군 농민들의 원성은 높아갔다. 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더는 견딜수 없었기때문이였다.

전봉준은 후에 폭동을 일으키게 된 동기를 묻는 법정진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 고부군수가 지나치게 거두어들인것이 몇만냥이여서 백성들의 원한이 컸기때문에 일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조병갑의 착취행위를 낱낱이 까밝히고 《백성들이 원망하는고로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려고 기병하였다.》고 자기의 기병동기를 명백히 밝혔다.

1893년 11월과 12월 전봉준은 두차례에 걸쳐 농민들을 대표하여 군청에 찾아가 항의문을 제출하려다가 쫓겨나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한편으로 봉건적학정을 반대하여 거사할 준비를 착실히 갖추어나갔다. 그 준비사업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발통문》이 최근에 발견되였다. 이 《사발통문》은 1893년 11월로 날자가 기록되여있고 사발식으로 둥글게 그린 원형안에 전봉준, 송대화, 최경선 등 20명의 서명이 있다. 그에 의하면 백성들은 곳곳에 모여 《났네 났어, 란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였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사람이나 어디 남아있겠나.》 하며 기회가 오기만 기다렸다. 이때 도인(동학교도)들은 선후책을 토의결정하기 위하여 고부서부 죽산리 송두호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모여 행동방향을 결정하였다. 토의결정된 내용을 보면 첫째로,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하며 둘째로,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며 셋째로, 군수에게 아첨하며 인민을 침탈한 탐욕스런 아전들을 징계하며 전주영을 함락하고 수도로 곧바로 진격한다는것이였다. 마지막에 군사적재능이 있는 령도자를 추천한다고 되여있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것처럼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은 인민들의 항거분위기에 편승하여 봉건정부를 공격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농민전쟁을 기병직전에 벌써 설계하고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인 전봉준. 그는 이 썩어빠진 사회를 그대로 두고서는 고부군안의 농민들만이 아니라 전체 조선민족을 살릴수 없고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원할수 없다는것을 절감하고있었다.

1894년, 제 명을 다 산 봉건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어놓고 우리 조국을 감히 넘보는 침략의 무리들에게 조선민족의 애국적기개를 시위한 갑오농민전쟁이 벌어지고 그 영향하에 갑오개혁이 실시된 거창한 해, 근대 민족운동사에 피의 교훈을 남긴 그 의의깊은 해가 계명산천에 서서히 밝아왔다.

새해초부터 전봉준의 거처로는 두세명의 낯선 방문자들이 때없이 찾아들었다. 전봉준은 동학교도이며 벗들인 정익서, 김도삼 등과 의논하여 민페를 바로잡는 의로운 기치를 들고 고부군청을 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포, 접조직망을 통하여 많은 동료들을 규합해갔다. 당시 농민들의 련대를 실현하기 위하여 의거할수 있는것은 동학조직망뿐이였던것이다.

폭동준비가 완료되자 전봉준은 비장한 결심을 가다듬고 부모의 묘를 찾아가 고별의 인사를 올리였다.

1894년 1월 10일 새벽 첫 닭이 울자 때를 기다리고있던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이고 괭이나 죽창을 들고 마항시장으로 모여들었다.

전봉준은 그 전날 밤 태인 주산리에 사는 접주 최경선의 집에서 동학교도인 장정 300명을 모아가지고 그밤으로 30리 되는 마항시장으로 달려와 그곳 감나무밑에서 대기하고있었다.

전봉준은 총을 가진 부하들을 사방에 세워 망을 보도록 하고 큰소리로 《어린아이, 녀자, 로약자들은 물러가라!》고 명령한 다음 조병갑의 불법탐학을 일일이 까밝히고 그의  죄를 다스리자고 호소하였다. 조병갑의 폭정에 시달리던 군중들은 열렬한 박수로 여기에 호응하였다.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시에 따라 두길로 나뉘여 고부읍을 향하여 노도와 같이 진격하였다. 그들은 도중에 있는 대밭에서 많은 죽창을 만들어 기세를 올렸다.

농민군은 3문으로 쳐들어가 고부읍성을 점령하고 전봉준의 지시에 따라 감옥을 파괴하여 갇혀있던 인민들을 석방하고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강화한 후 관리와 아전들을 모두 잡아다 문초하였다. 그리고 비법적으로 략탈해간 수세미를 농민들에게 반환하게 하고 백성들의 원망의 대상이 되여온 만석보도 파괴해버렸다.

전봉준은 고부읍안팎에 군영을 설치하였는데 농민군의 《진영이 정숙하고 호령이 명백하여 다른 민란군과는 달랐다.》고 한다.

전봉준은 폭동의 성과를 확대하기 위한 조직사업을 면밀하게 짜고들었다. 그리하여 이 폭동은 갑오농민전쟁으로의 확대발전을 위한 도약대가 되였다. 이무렵 인민들속에서는 이런 노래가 나돌았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보리

 

여기서 《가보세》는 《갑오세》 즉 《갑오년(1894년)》을, 《을미적》은 《을미년(1895년)》을, 《병신》은 《병신년(1896년)》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이 투쟁을 꾸물거리며 병신년까지 끌지 말고 갑오년에 끝장을 내야 한다는것, 이를 위해 국민이 총 궐기를 해야 한다는 사상이 담겨져있다.

폭동의 성과는 확대되여 1월 14일현재 농민군에 가담한 촌락은 15개 촌에 달하고 봉기군수는 1만여명으로 늘어나게 되였다.

1월 17일, 전봉준은 농민군의 주력부대를 마항시장으로 이동시키고 일부를 고부읍에 남겼다. 같은 날 무장의 접주인 농민군의 부장 손화중은 수천명을 거느리고 태인, 부안 등지를 공격하여 페정을 철페하고 관리들이 비법적으로 략탈한 재산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농민들의 지지환영속에 폭동의 불길은 각지로 퍼져갔다.

전봉준은 마항시장에서 농민군을 개편하고 서울에까지 올라가 임금에게 사태의 진상을 말하고 병력으로 대항하면 맞서싸우자고 하면서 이런 기개없이 거사했다면 무익한것이라고 하는 강경파에게 아직은 정부의 태도를 지켜보면서 전국각지에서 동료를 규합하여 힘을 합친 후 여유있게 대처하자고 달래였다.

전봉준은 전라감영에서 은밀히 파견한 50명의 군사를 모조리 체포처형하고 1월 25일 백산으로 진지를 옮겼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비결에 의하면 《고부 백산은 가히 만민을 살릴수 있다.》고 전해내려오는 곳이였다고 한다.

급보를 받은 리조정부는 2월 15일 고부군수 조병갑과 전라도감사 김문현을 처벌한 후 장흥부사 리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이 폭동을 진압하게 하였다.

그후 새로 고부군수로 부임한 박원명의 효유로 고부에 남아있던 잔존부대는 흩어져돌아갔으나 백산의 주력부대는 정부의 태도를 관망하면서 군세를 유지하고있었다.

그런데 후에 내려온 리용태는 군졸들을 여러 마을에 나누어보내여 모든 죄를 농민들에게 들씌우며 남자들은 닥치는대로 구타하고 물고기꿰듯 묶어 끌어갔으며 남자들이 없을 때에는 부녀자들을 죽이고 가옥들을 불태워버리는 등 갖은 악행을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제놈은 전주 한벽당에서 기생들을 끼고 향락에 취해있었다.

농민들의 분노는 나날이 고조되였다.

사태를 지켜보고있던 전봉준은 썩어빠진 이 제도를 개혁하지 않으면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동학리념은 물론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원하고 백성들을 잘살게 해보려던 자기의 초지를 실현시킬수 없음을 절감하게 되였다.

그는 이웃고을의 동학접주들과 련계를 취하면서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위해 다시 총 궐기할것을 호소하  였다.

한편 3월 1일, 농민군은 줄포의 세곡창고를 습격하고 2개월분의 군량을 확보하였다. 고부를 다시 점령한 농민군은 안핵사 리용태를 추방하였고 태인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현감 리면주를 체포한 후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고 고부 백산으로 향하였다.

3월 21일, 전봉준은 호남창의 대장소의 명의로 투쟁의 목적을 밝히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우리가 정의를 위하여 여기에 이른것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않고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우에다 두려고 하는것이다. 안으로는 악질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려고 한다. 량반과 부자들앞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고을원의 밑에 굴욕을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들이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에 일떠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킬수 없을것이다.》

이 격문은 농민을 비롯한 피압박피착취근로대중은 물론 지방의 하층관리인 아전들까지도 투쟁에 합류할것을 호소함으로써 극소수 반동적인 량반관료배들을 고립시킬것을 목적하고있다. 격문은 인민대중의 반침략반봉건적투쟁의지를 반영하고있는것으로 하여 광범한 인민대중을 농민전쟁에 참가시키는데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3월 25일, 군중의 추천에 의하여 전봉준이 총대장이 되고 손화중, 김개남이 부대장격인 총관령으로, 김덕명, 오시영이 총참모로, 최경선이 령솔장으로, 송희옥, 정백현이 비서로 되였다.

전봉준은 부대를 편성하고 네가지로 된 행동방침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죽이지 말며, 둘째로, 효성과 충성을 다하여 세상을 구원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것이며, 셋째로, 왜놈과 서양오랑캐를 내몰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으며, 넷째로, 군사를 몰아 서울에 쳐들어가 특권량반들을 없애치운다는것이였다.

백산에서 발표된 격문과 농민군의 행동방침은 농민군이 봉건통치배들과 외래침략세력을 격멸하고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며 인민들을 도탄에서 구원하기 위한 정의의 애국전쟁을 선포한 엄숙한 선언이였다.

이 투쟁에 호응하여 전국각지에서 각계각층 인민들이 농민군의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모여들었다. 그들가운데는 장흥의 80여살 난 늙은이도 순천의 14살 난 소년도 있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하여 기록에서는 《촌마다 포가 설치되고 기발을 들고 서로 호응하였다.》고 전하고있다.

농민군의 봉기소식과 함께 그 지휘자 전봉준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들도 널리 전해졌다.

《전대장은 참말로 영웅이요. 이인으로서 신출귀몰의 재주가 있고 바람을 타고 구름을 휘여잡는 묘술이 있으며 천하의 장사요 세상에 없는 영웅이라 총검에 맞아도 죽지 않으며 총구멍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법술이 있어 조화가 비상하더라.》

당시 백산은 흰옷을 입은 농민군천지였는데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이것은 서면 모두가 흰옷을 입었기때문에 백산이 되고 앉으면 모두 참대창을 들었기때문에 죽산이 된다는 소리이다. 이처럼 농민군의 기세는 대단하였다.

한편 농민군이 궐기하여 부안, 금구를 점령하였다는 급보를 받은 전라감사 김문현은 영장 리경호, 김달관, 리광양, 리재섭, 송봉수 등에게 지시하여 전주영군사와 보부상의 혼성부대(전주영 제1대대 500명, 제2대대 300명, 보부상 별동부대 800명)를 거느리고 농민군을 치게 하였다. 리광양 등은 정읍을 거쳐 백산에서 부안으로 통하는 도로로 진출하였으나 4월 6일 도교산에 집결한 농민군의 반격에 의하여 황토현(고부에서 20리)에서 격멸되였다. 이 싸움은 전봉준의 군사적재능을 과시한 대표적전투들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이때 관군은 수적으로 농민군보다 적었지만 잘 훈련되고 무장장비도 좋았다. 적의 장점과 약점, 농민군의 장점과 약점을 타산한 전봉준은 유인전술로 적을 소멸하기로 결심하고 주력부대를 두승산계곡 시목리로 이동시켰다. 그는 이곳의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두승산 동쪽계곡에서 관군을 격멸하기로 계획한것이다.

농민군은 황토현으로 관군을 유인하고 거짓 패하여 시목리로 철수하면서 매복하였다. 4월 6일 관군은 황토현에 도착하였다. 농민군은 곧 관군을 습격하려고 하였으나 전봉준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황토현을 사자봉(獅子峰)이라고도 하였는데 농민군은 사자(死者)와 통하니 여기는 관군의 시체를 묻을 곳이라고 하여 만만한 투지에 넘쳐있었다.

이날 밤, 보부상으로 가장한 농민군은 관군의 진중에 깊숙이 들어가 동태를 살펴 본부에 보고하였다. 관군은 보부상으로 보초를 세워놓고 술과 고기를 진탕치듯 먹어대고 밤이 깊어서는 모두 곯아떨어졌다.

전봉준은 바로 이때야말로 승패를 결정할 좋은 시각으로 간주하고 농민군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7일 새벽 농민군은 어둠을 타서 조용히 두개 대로 나뉘여 관군의 영을 습격하였다. 불의의 습격으로 관군은 대참패를 당하고 780명의 병력과 많은 군사장비를 잃었다.

이 싸움에는 농민군만이 아니라 관군의 무자비한 재물략탈과 부녀겁탈, 살인행위에 불만을 품은 촌민들까지 적극 호응하였다.

이 싸움을 통하여 리조정부는 당황망조해지고 농민군의 사기는 부쩍 오르게 되였다. 황토현싸움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전국각지로 퍼져가고 앞으로 조선은 전봉준의 손에 달렸고 세상은 농민군의 세상으로 될것이라는 풍설도 돌았다.

승리의 개가높이 농민군은 곧바로 정읍으로 쳐들어갔다. 이것은 전봉준이 곧 전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취한 작전적조치였다. 그런데 4월 5일 군산에 상륙한 리조정부가 파견한 량호초토사 홍계훈이 4월 7일에 전주로 입성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화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라도 서해안지방의 여러 군, 현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였다.

4월 8일 흥덕읍을, 4월 9일에는 무장현으로 진입하면서 농민군대오는 1만여명으로 장성하고 무장장비는 《혹 갑주를 갖추고 각자 총과 창 가졌다.》고 할 정도로 강화되였다.

전봉준은 무장읍밖의 30리 되는 곳에 있는 호산봉에 진을 치고 직접 창의문을 지어 《의로운 기발을 쳐들고 보국안민을 위해 생사를 판가리》할 맹세를 굳게 다지며 인민들에게 투쟁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였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거느리고 4월 13일 령광군을, 17일에는 함평현을 점령하였다.

농민군의 맹렬한 진격으로 전라도 남부지방의 여러 고을이 농민군의 수중에 장악되자 호남지방은 순식간에 농민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였다.

농민전쟁의 불길은 충청도지방에도 급속히 파급되여 공주, 청산, 옥천, 문의, 보은, 목천, 토성 등 군, 현을 휩쓸었다. 봉건정부의 지방통치는 마비상태에 빠졌다.

전주감영에 둥지를 틀고있던 홍계훈은 증원병을 요구하면서 외국군대를 청해오자고 계속 애걸하는 매국배족행위를 감행하였다.

농민전쟁의 확대에 당황망조한 봉건정부는 군사적대책과 함께 일련의 회유기만조치들도 취하였다.

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군 월평장 황룡촌에서 대포와 기관포까지 갖춘 잘 무장된 관군의 불의습격을 저지시키고 반공격으로 섬멸적타격을 가하였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관 리학승을 비롯한 수많은 정부군을 살상하고 대포 2문과 각종 무기, 탄약을 대량적으로 로획하였다.

농민군은 기세충천하여 4월말 호남지방에서의 봉건통치의 아성인 전주를 공격하였다. 이때 전주성은 거의나 무방비상태에 있었다. 전주감영군대는 이미 궤멸된 상태였고 홍계훈이 거느린 정부군은 장성전투에서 섬멸적타격을 받고 패잔병들은 금구계선에 주저앉아있었다. 그리고 정부가 급파한 증원군은 미처 도착하지 못한 상태이고 전라감사 김문현이 철직된 후 신임감사 김학진은 아직 부임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전주감영의 통치기능은 혼란상태에 있었다.

농민군이 노린것은 바로 적들의 이러한 약점이였다.

4월 27일, 농민군은 로획한 포를 발사하는것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단숨에 성을 점령하였다.

전봉준은 지휘처를 선화당에 정하고 성의 방비대책을 취하는 한편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악질관리들과 부호들을 징벌하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민들을 구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전주점령은 농민전쟁이 개시된 이후 농민군이 거둔 가장 큰 성과로서 농민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봉건정부에 심대한 정치군사적타격을 주었다.

전봉준은 전주성밖의 완산에 진지를 차지한 정부군이 무차별적인 총포사격으로 가옥과 력사적인 건물들을 파괴하자 이에 항의하면서 5월 1일과 3일 두차례에 걸쳐 반돌격전을 벌리게 하였다. 대담한 두차례의 출격으로 적들에게 준 타격은 심대하였으나 농민군도 500여명이라는 손실을 보게 되였다. 그러나 농민군의 투쟁의지는 더욱 굳세여졌다. 할수없이 홍계훈은 국왕의 명령인 《륜음》이나 《효유문》 같은것을 내돌리며 투항을 설교하고 농민군내부를 와해시켜보려고 하였다.

전주점령직후인 4월 30일 국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친청사대주의자들은 일부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세개에게 청나라군의 출병을 공식요청하는 매국배족행위를 감행하였다.

한편 조선침략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때를 기다리던 일본침략자들은 일본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밑에 우리 나라에 침략무력을 대대적으로 들이밀었다.

전봉준은 나라와 민족앞에 조성된 엄중한 정세와 농민군자체의 형편을 고려하여 전주성을 주동적으로 내놓아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외국군대의 간섭으로 망국의 위험을 조성한 범죄의 장본인은 매국배족적인 봉건통치배들이였지만 놈들을 반대하는 전쟁을 계속한다면 외래침략세력에 어부지리를 줄수 있었다. 그리고 농민군은 두차례의 출격과 놈들의 계속되는 총포사격으로 일정한 손실을 당하였다.

한편 전봉준이 이러한 결심을 내리게 된것은 봉건정부가 페정개혁을 실시할것이며 농민군에 대한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한것과 관련되여있었다.

민족적위기를 하루빨리 타개하려는 농민군의 정당한 립장과 일시적양보로써 숨돌릴 시간을 얻으려는 봉건통치배들의 교활한 책동은 그 목적과 의도에서 상반되는것이였지만 화의는 급속히 성사되였다.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지휘부는 홍계훈에게 앞으로 시행할 14개 조로 된 개혁안을 제기하고 접수시켰다. 이 개혁안에는 환곡, 전세착취를 규정대로 하고 악질관리들을 철직시키고 지방관리들의 비법행위를 제거하고 협잡으로 농민들을 착취하던 상인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등 당시 인민들이 생활상 절박한 요구로 제기하던 내용들이 들어있었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전주에서 철수시킨 후 봉건정부와 협의된 페정개혁안의 실시를 통제하고 감독할 사명을 지닌 농민대표기관으로서의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렸다.

전라감사 김학진은 전봉준에게 감사가 정무를 보는 《선화당》을 내주고 자기는 그 부속건물인 《등청각》을 쓰는것과 같은 호의도 베풀었다.

전주화의후 전라도 53개 군, 현에는 집강소가 설치되였으나 라주, 남원, 운봉에는 처음에 고을원들의 반대로 설치되지 못하였었다. 전봉준은 최경선에게 군사 3,000명을 주어 라주를 공격점령하게 하였으나 성과가 없자 부하 몇명만 거느리고 찾아갔다. 그는 주저함이 없이 동문으로 들어가 목사의 관사에 이르렀다. 관속들이 크게 놀라고 목사는 당황하여 일어서며 《손님은 어떤 사람이요?》 하고 물었다.

전봉준은 《나는 동학군 대장 전봉준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목사가 당황하여 말을 못하자 전봉준은 《주관은 괴이하게 생각지 말라. 군도 조선사람이요, 나도 또한 조선사람이다. 조선사람으로 조선사람 대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섭섭하게 하는가! 지금 우리 나라는 외세가 독한 손을 내밀어 침략을 꾀하고있고 국정은 나날이 그릇되여가니 나라의 존망이 목전에 다달으고있는데 군은 아오, 모르오. 어서 빨리 꿈에서 깨여나오!》고 큰소리로 추상같이 웨쳤다.

목사는 전봉준의 름름한 기상과 담력에 기가 질려 머리를 떨구고 그의 말을 듣기만 하였다. 그는 전봉준의 집강소설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에 수긍하였다.

이처럼 전봉준의 대담한 유세로 견고한 라주성은 한사람의 사상자도 내지 않고 농민군의 수중에 장악되게 되였다. 이것은 라주와 남원, 운봉을 장악하던 때에 있은 한가지 사실에 불과하다.

전봉준은 이렇게 페정개혁의 철저한 실시를 위해 한몸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던것이다.

집강소는 단결과 신분적차별의 페지, 수탈자들의 처벌, 각종 잡세와 채무의 제거, 관리등용에서 지방과 문벌의 차별페지, 대토지소유의 제한 등의 내용이 담긴 이전의 14개 조를 정리한 12개 조의 개혁강령을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해 투쟁하였다. 집강소가 제기한 페정개혁안은 반침략반봉건적내용으로 일관되였으나 아직 그것은 부르죠아적사회정치제도를 세울데 대한 문제는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강령은 이후 혁신관료들이 진행한 1894년 부르죠아개혁을 추동하는 강력한 원동력으로 되였다.

집강소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묵은 채무관계를 없앴으며 지방관청과 민간에 남아있던 무기를 회수하여 농민군의 장비를 보강하고 반동관료들과 악질지주, 부호들의 반항으로부터 집강소를 보위하기 위한 수성군을 조직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일련의 제한성은 있으나 집강소의 활동과 그의 개혁강령은 반침략반봉건투쟁이 종전보다 한단계 심화되였다는것을 보여주었다. 사회발전의 질곡으로부터 봉건제도를 무너뜨리는 투쟁이 농민대중에 의해서 줄기차게 심화될수 있은것은 그들이 투쟁과정에 각성되고 김옥균의 개화파의 사상적영향을 받게 된 사정과 관련되여있었다. 당시 《희생된 김옥균의 혼이 폭동자들가운데 나타났고 또한 지금까지 무적의 대군을 지휘하고있다.》는 말이 국외에까지 퍼지고있었던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농민군이 바라던것과는 달리 사태는 더욱 엄중해졌다. 간악한 일제는 농민군의 정화로 출병구실이 없어지자 무력을 동원하여 왕궁을 습격하고 리조봉건정부를 가로타고앉아 조선군대의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국토를 황페화시켰으며 전쟁수행에 필요한 인적 및 물적자원들을 마구 략탈하였다.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일제의 만행에 항거할 대신 그에 투항굴종하였다.

전봉준은 사태의 엄중성을 절감하고 또다시 거족적인 투쟁을 벌릴것을 결심하였다.

9월 12∼13일 전주북쪽 삼계(전라북도 완주군)에서는 동학의 남접(호남의 동학)과 북접(호중<충청북도>이북의 동학)사이에 회의가 열렸다. 남접의 주전론과 북접 상층부의 화평론이 대립되기는 하였으나 회의에서는 농민군의 재궐기가 결정되고 전주로부터 공주-서울에로의 진격로가 결정되였다.

전봉준은 최시형의 영향하에 있는 북접과의 화해를 이룩하는 한편 무기를 장만하고 각계각층 민중을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묶어세우기 위한 활동을 벌리였다.

충청도 청산에는 각지에서 모여온 10만의 군중이 집결하였다.

농민군은 10월중순 론산에서 《경병(중앙군-인용자)과 영병(지방군-인용자)에게 고하고 인민들에게 알리노라》라는 호소문을 발표하여 동족끼리 싸울것이 아니라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기여든 일제침략자를 내몰기 위해 싸울것을 호소하였다. 이와 함께 《일인에게 보내는 경고문》을 발표하여 일제의 죄행을 폭로규탄하고 조선에서 당장 침략의 마수를 떼고 제 소굴로 돌아갈것을 엄숙히 경고하였다. 그리고 《박제순에게 보내는 경고문》도 발표하여 박제순을 비롯한 매국역적들의 죄행을 폭로규탄하면서 그들이 민족반역행위를 걷어치우지 않으면 엄벌을 면치 못할것이라고 선포하였다.

농민군에는 농민들만이 아니라 애국적인 량반, 유생들, 아전들, 관군의 병사들도 참가하였다.

전투준비를 끝낸 농민군주력부대는 전봉준의 지휘밑에 10월 21일 론산을 출발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10월 23일, 농민군은 리인전투에서 일제침략군과 관군을 격파하고 이어 공주를 완전포위에 넣었다.

농민군은 공주에 몰려든 일본침략군 주력부대와 관군의 선봉부대에 대한 주동적인 공격으로 넘어갔다. 농민군은 공주의 산과 들을 덮으며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대포와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일제침략군의 저항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출발지점인 경천점으로 되돌아왔다.

11월 8일, 농민군은 무너미와 리인에 도사리고있던 관군을 격파하고 11월 9일 공주를 공격하였다. 이후 농민군의 공주공격전에 대하여 당시 《관보》에서는 농민군이 《산마루에 주런이 서서 일시에 총을 쏘고 또 등으로 올라 총을 쏘는데 이렇게 하기를 40∼50차 하니 시체가 본산에 찼다.》라고 전하고있다.

농민군의 이러한 투쟁은 안팎의 계급적 및 민족적원쑤들에 대한 증오의 표시였고 나라와 겨레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애국심의 발현이였다.

그러나 사태는 점점 농민군에 불리해져갔다. 적들의 발악적인 공세로 많은 손실을 당한 농민군은 차후의 투쟁을 계획하며 전면적인 후퇴를 하였다.

전봉준은 싸움에서 비록 패하였으나 뜻을 꺾지 않고 다시 일떠설 준비를 갖추면서 서울의 형편을 알기 위해 상경하려고 하였다. 그는 11월 28일 몇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정읍 립암산성을 거쳐 갈재를 넘어 순창 흥복산속의 피로리(쌍치면 금성리)에 있는 이전 부하 김경천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자는 길가주막으로 안내하여 저녁밥을 시킨 후 기다리게 해놓고 전주퇴교 한신현에게 밀고하였다.

갑자기 포위된 속에서 그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놈들에게 붙잡히게 되였다. 그날은 12월 2일 밤이였다.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자 리조정부는 농민군이 서울로 침입하여 구출할 우려가 있다고 두려워하면서 그를 일본공사관에 구금시켰다. 이때 일본공사는 그의 재능을 아껴 저들의 심복인물로 만들려고 꾀하며 각방으로 달랬으나 그는 놈들을 상대하지도 않았고 놈들에게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전봉준은 5차의 심문을 받았다. 체포될 때 다리를 상하여 법정으로 출입할 때는 가마를 타고 다녔다.

법관은 갖은 악형과 달콤한 유혹으로 그를 굴복시키려 하였으나 그의 의지를 꺾을수 없었다.

《너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다. 내가 너희를 쳐없애고 나라일을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여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말라. 내 적의 손에 죽을지언정 적의 법의 적용은 받지 않을것이다.》

전봉준은 이렇게 근엄하게 웨치고 아예 입을 닫아버리고말았다.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김방서 등 농민군의 다른 두령들도 모두 나라일을 바로잡으려는것이 전쟁을 일으킨 본의였다고 진술할뿐이였다.

전봉준이 일본인병원에서 상한 다리를 치료받고있을 때 일본인들은 그에게 이렇게 권유하였다.

《그대의 죄상은 일본법률로 말하면 상당한 국사범이기는 하지만 사형에까지는 미치지 않게 할수도 있으니 일본인 변호사에게 위탁하여 재판해보는것이 좋을것이다. 또 일본정부의 량해를 얻어 살길을 구하는것이 어떤가?》

전봉준은 이에 대해 《구구한 생명을 위하여 살길을 구함은 나의 본의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들의 제의를 일축하였다.

그는 1895년 3월 29일 동료들인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교수대앞에서 법관이 《가족에게 할말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전봉준은 《나는 다른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네거리에서 나의 목을 베여 오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것이 옳거늘 어찌하여 컴컴한 적굴에서 조용히 죽이느냐.》고 꾸짖었다.

그는 교수대앞에서 《나라 위한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리오.》라는 마지막시를 남기고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41살이였다.

이처럼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의 뜻을 꺾지 않고 애국의 일편단심을 나라에 바쳤다. 하기에 사람들은 애국에 바쳐진 그의 길지 않은 생을 뜨겁게 회억하며 그에 대한 가지가지 전설과 이야기, 노래를 엮어 청사에 그의 업적을 길이 전하였다. 그가운데 파랑새민요는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던 노래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말아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여기서 파랑새는 청나라군사를, 녹두는 전봉준을 가리키며 청포장사는 대중을 의미하는것으로 해석되고있다. 노래의 뜻은 새떼처럼 밀려드는 청나라군사들은 참다못해 일어난 농민군을 진압하려 말라, 농민군의 지휘자 전봉준이 쓰러지면 또다시 착취와 빈궁속에 헤매여야 한다는것이다.

이 노래를 통하여 알수 있는것은 당시 인민들이 전봉준을 희망의 상징으로 떠받들고있었다는것이다. 전국각지의 인민들이 그를 신뢰하고있었다는것은 다른 지방에서 얼마간씩 변형되기는 하였지만 파랑새노래가 널리 불리워진 사실을 통하여 알수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깝죽깝죽 잘 논다만

  녹두꽃을 떨구고서

  청포장수 부지깽이

  맛이 좋다 어서 가라

  (원주지방)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잎에 앉은 새야

  녹두잎이 까딱하면

  너 죽을줄 왜 모르니

  (평양지방)

 

《인내천》,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기치를 들고 투쟁에 용약 나섰던 녹두장군 전봉준은 가슴에 품었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지 못하고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단군민족의 슬기와 용맹을 빛내인 그의 애국적장거는 그가 최후의 순간에남긴 유언시와 더불어 력사에 길이 전해질것이다.

 

  때가 오니 천지도 모두 힘을 합쳐주더니

  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수 없고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함이 허물될리 없거늘

  나라 위한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리오

 

-> 이 도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적보호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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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아래 - - 2016-07-09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서 이해하기 좋습니다. 제가 원하던 국사책이네요.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근데 어째 이미지는 안보이네요. 당시 영토가 표시된 지도그림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관리자 - - - - 2016-07-09
이미지문제가 해결되였습니다.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다음편은 언제 올리나요.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력사이야기들을 많이 올려주세요. 명인전, 무술명인전, 감사합니다.
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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