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조직자 김옥균
 

 

《갑신정변》의 조직자 김옥균 

 

우리 나라에서의 첫 부르죠아개혁운동가이며 1882년 《갑신정변》의 조직자인 김옥균, 오래동안 봉건제도의 암흑속에 신음하던 조선을 문명개화의 길로 이끌고저 애국의 더운 심장을 끓이던 그를 단군의 자랑스러운 후손으로 돌이켜보는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김옥균(1851-1894년)은 충청남도 공주에서 몰락한 량반인 김병태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자는 백온, 호는 고우, 고균이며 본은 안동이다.

김옥균은 어려서부터 학식과 재주가 뛰여났고 아량이 있고 붙임성도 좋아서 마을사람들속에서 장차 반드시 큰일을 할 인재로 평가되였다. 그는 시문에 능하였고 글씨와 그림에도 재주가 비상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룡룡(龍)》자를 쓰면 룡이 하늘로 올라가는것 같고 《범호(虎)》자를 쓰면 범이 산중 수림속에서 뛰는것 같았다고 말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6살때인 1856년 가을에 오촌인 김병기의 양아들이 되여 서울로 올라와 10살때까지 글공부를 하였다. 11~15살사이에 강릉부사로 임명된 오촌을 따라 강릉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김옥균이 나서자라던 19세기후반기는 우리 나라 봉건사회가 바야흐로 붕괴되여가던 시기로서 봉건통치자들의 부패상이 날로 강화되고 인민들의 생활이 더욱 령락되였으며 일본침략자들을 비롯한 유미자본주의침략세력들이 우리 나라를 먹어보려고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있던 시기였다.

뛰여난 재능과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김옥균은 서울장안에서 세도정치의 페해와 량반관료들의 부패상을 체험하고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목격하면서 부패무능한 통치배들을 몰아내고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구원할 굳은 결의를 가다듬게 되였다. 특히 1866년 미제침략선 《셔먼》호의 침입과 그후 프랑스군함의 침공사건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김옥균의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준것은 실학사상과 박규수, 류홍기를 비롯한 당시 선진인사들의 사상이였다.

김옥균은 뛰여난 실학사상가였던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며 리조정부의 고관으로서 젊은 량반들속에서 인망이 높던 박규수(1807-1876년)를 통하여 실학자들의 저서들을 비밀리에 얻어보고 큰 사상적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집에 문객으로 드나들던 청년들과도 교제하면서 자신의 식견을 높여나가게 되였다.

김옥균은 20살 전후한 시기부터는 당시 개화사상의 주창자였던 중인출신 지식인 류홍기와 교제하면서 그의 사상적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였다. 류홍기는 《문명개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던중 서울 북촌에서 김옥균을 처음 알게 되고 그와 담화하면서 그의 재능을 인정하였으며 세계각국의 력사와 지리서적들 기타 신서적들을 읽게 하면서 자주 만나 세계의 대세를 설명해주고 국정개혁의 필요성을 력설하였다.

김옥균은 외교관으로서 중국에 왕래하며 근대서양문물과 세계정세에 밝은 오경석과 친우인 류대치의 영향을 받으면서 실학사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점차 새로운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새로운 사상인 개화사상에로 나아가게 되였다.

김옥균은 개화사상을 품게 되면서 집권자들의 반동적보수정책을 반대하여 적극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개화사상을 품고 대원군의 보수적인 쇄국정책을 적극 반대한 리유로 강릉부사로 있던 오촌 김병기는 파면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김옥균은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고 더욱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그는 1872년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원, 승정원 우부승지 등의 벼슬을 력임하면서 관료로 있던 동료들속에서 자기와 뜻을 같이할 사람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자기와 뜻을 같이할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그 신분여하에 구애되지 않았다. 어느 절간에서 심부름하던 아이가 총명한것을 보고 일본까지 데리고 간것은 그 대표적실례의 하나이다. 그는 홍영식, 박영교를 비롯한 혁신관료들과 봉건유생들, 군인들, 상업자본가들, 《천민》들, 왕의 측근자들인 환관과 궁녀 등 각계층을 망라하여 1870년대초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개화파는 자기의 비밀조직인 《충의계》를 뭇고 나라의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국정개혁활동을 힘있게 벌려나갔다. 그 준비사업으로서 자기의 세력을 확대하여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사업을 적극 벌리는 한편 계몽서적인 《기화근사》를 써서 개화사상을 보급선전하였다. 그리고 국왕과 정부안의 혁신관료들을 추동하는 방법으로 국가기구도 점차 개조해나갔다. 1880년 12월 국내외의 정치와 군사관계사무를 총체적으로 관할할 권한을 가진 통리기무아문을 창설하게 하였으며 1881년에는 5영을 2영으로 개편하고 별기군을 내오게 하였다. 또한 개화파계렬의 청년들로 외국에 류학과 실습을 보내여 근대적지식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김옥균은 이미 근대적개혁을 수행한 나라들의 정형을 료해하기 위하여 1870년대말에 자기의 벗인 리동인을 일본에 보내여 여러해에 걸쳐 그 나라의 형편을 조사연구하게 하였다. 그리고 1881년 12월에는 자기가 직접 일본에 파견되는 조선사신을 따라가서 그 나라의 국가기구와 경제문화형편을 자세히 살피였고 당시 일본의 이름난 정치활동가들과 만나 세계정세와 동방정세에 대하여 토론도 하였고 조선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은근히 타진해보기도 하였다. 일본에 대한 현지료해이후 김옥균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반드시 우리 나라에서도 근대적인 개혁을 실시해야 하겠다는것을 더욱 굳게 결심하게 되였다. 동시에 조선에서의 부르죠아개혁의 실현을 위하여 일본세력을 리용할수 있다는 생각도 가지게 되였다.

김옥균은 일본에 머물러있는 기간 한주에 한번씩 그곳에 배우러 와있던 우리 사관학생들을 만나 그들앞에서 조선에서의 부르죠아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들을 애국주의사상으로 교양하였다. 그는 천하의 만국이 다 독립하였는데 우리 나라만이 청나라의 혹심한 간섭하에 놓여있으니 하루바삐 청나라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것과 그를 몰아내지 않고는 독립이란 있을수도 없으며 생각할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라의 자주독립과 부강발전을 위하여서는 시급히 국정개혁을 단행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1882년 군인폭동이후 김옥균은 부르죠아개혁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려나갔다. 이무렵 그는 통상교섭사무아문 참의, 리조참의, 호조참판 등의 직책에 있으면서 개화파성원들을 이끌었다.

김옥균은 수구파들이 아직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있는 조건에서 국왕을 설복하여 움직이게 하는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별입시의 자격을 얻어 국왕을 자주 만나 밖으로는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배격하고 안으로는 시급히 국정을 개혁하여 부강발전을 도모하여야만 오늘의 복잡한 세계정세에 대처하여 나라의 자주적지위를 확고히 보장할수 있다는것을 해설하였다.

김옥균은 1883년 봄에 국왕을 설복하여 량반, 중인, 상인출신의 유능한 청년 61명을 선발해서 일본에 파견하여 새 문물제도를 배우게 하였다. 1882년 7월에 나라의 모든 문제를 토의결정하는 협의제기관인 동시에 사실상의 최고권력기관이였던 기무처가 조직된데 이어 새로운 신문, 서적출판사업을 맡아보는 박문국이 설치되였다. 1883년 10월부터는 박문국에서 처음으로 되는 근대적신문 《한성순보》가 발간되였는데 이것은 당시 인민들이 세계의 정세를 알고 국내의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데서 큰 역할을 하였다.

김옥균은 동료들이 차지하고있는 관직을 리용하여 우선 서울에서부터 경순국, 치도국 등을 설치하여 경찰제도와 도로, 토목사업에 대한 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개화파의 개혁활동은 수구파들의 방해책동으로 난관에 봉착하게 되였다. 수구파들은 개화파들이 수도에 있는것이 위험하다고 인정하고 1883년 여름에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의 요인들을 지방과 국외로 내보내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때 김옥균은 동남제도 개척사 겸관 포경사로 임명되였다.

김옥균은 락심하지 않고 오히려 이 지위를 리용하여 동남 여러 섬들의 개척사업과 동해안의 포경사업을 발전시키며 이 리권을 리용하여 개혁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개화파들에 대한 수구파들의 박해는 1883년말경부터 더욱 로골적으로 감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성원들은 자기들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수구파를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하는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 국내외정세는 개화파들에게 유리하게 전변되여갔다. 1884년 봄에 청나라정부내에서 정변이 일어난것과 관련하여 민씨일파의 정치적적수인 대원군의 귀국설이 나돌아 수구파를 불안속에 몰아넣었다. 또한 청나라와 프랑스간의 전쟁에서 청나라군이 계속되는 패전을 당하고 이로 말미암아 수구파정권에 대한 청나라의 《지원》도 약화되게 되였다.

김옥균과 개화파성원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때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성원들은 좋은 기회를 리용하여 사전준비를 철저히 갖추고 특히 우리 나라의 기본 로력대중이였던 농민들을 수구파반동세력을 반대하는 싸움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갖추어야 하였었다. 그런데 개화파들이 우로부터의 정변을 서두른것은 그들의 계급적제한성의 발로로서 큰 실수가 아닐수 없었다.

김옥균은 우선 각지에 분산되여있던 동료들과 일본에 류학중인 사관학교 학생들을 모두 서울에 집결시켜 정변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도록 준비시켰다. 한편으로는 국왕을 자주 만나 국정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국왕을 움직이려고 하였다.

김옥균은 또한 청나라가 수구파를 적극 지지하고있는 조건에서 청나라와 일본간의 모순을 리용하여 일본군대를 정변에 인입시킬 공작을 하여 성공하였다. 이것은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지만 조선에서의 부르죠아개혁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일본이 배신적립장을 취할수 있으리라는것을 예견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것은 커다란 실책이였다.

김옥균은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세운 후 1884년 10월 17일 홍영식이 총판이 되여 신축된 우정국준공축하연을 계기로 동료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켰다. 이날 밤 김옥균은 홍영식 등 동료들과 함께 국왕 고종을 자기들에게 빼돌리고 민태호, 민영목, 조녕하 등 수구파대신들을 처단함으로써 수구파정권을 뒤집어엎었다. 이것이 바로 력사에 유명한 《갑신정변》이였다.

개화파는 곧 새 정부를 구성하고 10월 18일에 전국에 공포하였다. 이어 그들은 새 정부의 정강토의사업에 착수하였다. 김옥균이 구상하여온 부르죠아개혁방침에 기초하여 정강초안이 작성되였으며 국왕의 승인을 받아 10월 19일 아침에 공포되고 서울시내 각곳에 나붙었다.

새 정부가 채택한 14개 조로 된 정강은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근대적인 국가 및 사회경제제도를 창설할것을 목적한것으로서 부르죠아적 및 애국적성격을 가진 정부강령이였다. 정강의 부르죠아적성격은 봉건사회를 점차 자본주의사회로 변혁시킬 사명을 담당할 국가권력과 그 기관들의 창설을 예견한것, 봉건사회태내에서 장성한 생산력발전을 봉건적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국가권력을 공간으로 그것을 급속히 장성시킬 방책들을 예견한것, 자본주의생산과 관련된 상품류통의 실현에 적응하는 소유관계와 법률적, 정신적 및 사회적질서를 수립할것을 예견한데서 명백히 찾아보게 된다.

정강의 반침략적인 애국적성격은 독립국가로서의 존엄과 체면을 손상시키는 과거의 외교관계의 모든 관례들을 청산하고 평등과 호혜의 원칙에서 국가관계를 맺을것을 예견한것, 나라의 국방력을 강화하며 근대적군대를 건설하여 민족적자주권을 무력으로 담보할것을 예견한것 등에서 표현되였다.

그러나 정강은 개화파성원들의 계급적제한성으로부터 부르죠아개혁의 기본내용으로 되여야 할 토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등의 제약성도 드러내였다.

이러한 제약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력사발전의 합법칙적요구를 반영하여 근대 우리 나라 발전의 방향을 밝혀주었다는데 새 정부정강의 중요한 력사적의의가 있다.

하지만 새 정부는 수구파잔당들의 준동과 청나라침략군대의 간섭, 일본군대의 배신행위로 인하여 10월 19일에 붕괴되고말았다. 김옥균을 비롯한 일부 개화파성원들은 앞날을 기약하고 인천방향으로 몸을 피하였으며 홍영식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적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였다.

우리 나라에서의 첫 부르죠아개혁운동이였던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나고말았으나 김옥균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 지도사상으로 된 개화사상은 이후 부르죠아개혁운동을 추동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김옥균은 일본의 배신행위에 격분을 금치 못하면서도 앞으로의 투쟁을 위하여 일시 일본으로 몸을 피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 일본에서 그의 활동은 순탄치 않았다.

수구파일당은 김옥균을 해치려고 갖은 모략을 다하였고 일본반동정부는 망명한 그가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활동을 벌리지 못하도록 각방으로 악랄한 책동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속에서도 김옥균은 조금도 주저하거나 물러섬이 없이 자기의 초지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갑신정변》을 총화한 《갑신일록》을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았고 국내와 비밀리에 련계를 가지고 부르죠아개혁기운을 조성하기 위한 투쟁을 벌리였다.

김옥균은 조선과 일본, 청나라의 반동통치배들이 공모결탁하여 망명중의 개화파들을 살해하려고 내아문 주사 지운영을 자객으로 일본에 침투시킨 사건이 드러나게 되자 이 사건을 세상에 폭로하고 적들의 책동을 제압하기 위하여 1888년 6월 조선국왕과 청나라의 리홍장에게 편지를 보내였다. 한편으로 그는 부르죠아개혁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도 벌리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활동은 걸음걸음 내외반동들의 방해책동이 뒤따르는 속에서 진행되였다. 그는 1886년 7월까지 일본의 도꾜에 있다가 일본반동지배층의 책동으로 그해 8월부터 1888년초까지 태평양의 절해고도인 오가사하라섬에, 그후 1893년까지는 혹가이도에 강제추방되여 사실상 연금생활을 강요당하였다.

김옥균은 원쑤들의 집요한 방해책동이 계속되는 일본땅에서는 도저히 자기의 정치활동을 계속해나갈수 없다고 생각하고 1894년 2월 상해로 갔다.

허나 그는 거기서 원쑤들의 검은 마수가 자기를 기다리고있을줄은 미처 다 몰랐다. 김옥균이 활동무대를 청나라로 옮긴다는 정보를 입수한 리조 수구파반동정부는 개혁운동의 중심인물이며 갑신정변의 조직자인 김옥균을 제거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자객을 상해로 파견하였던것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옥균은 상해에 도착한 다음날인 2월 22일 일본인려관인 《동화향행》에 려장을 풀고 새로운 투쟁의지를 가다듬고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리조정부가 파견한 자객 홍종우가 나타났다. 이 비렬한은 김옥균의 가슴에 총탄을 쏘아박았다.

44살, 애국의 더운 피로 심장을 불태우며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부르죠아개혁활동에 심혼을 바쳐온 김옥균은 내외반동들의 비렬한 책동에 의하여 한창나이에 아까운 인생을 끝맺게 되였다.

리조봉건통치배들은 그를 살해한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시체를 청나라정부로부터 넘겨받아 양화진에서 3월 14일에 참형을 가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갔지만 그의 일생은 결코 헛된것이 아니였다. 그의 뜻은 그후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사상적영향을 주었고 혁신관료들인 김홍집, 어윤중에 의하여 계승되여 1894년 부르죠아개혁을 통하여 일시 빛을 보게 되였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바친 생이 의의깊기에 그의 이름은 오늘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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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아래 - - 2016-07-09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서 이해하기 좋습니다. 제가 원하던 국사책이네요.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근데 어째 이미지는 안보이네요. 당시 영토가 표시된 지도그림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관리자 - - - - 2016-07-09
이미지문제가 해결되였습니다.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다음편은 언제 올리나요.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력사이야기들을 많이 올려주세요. 명인전, 무술명인전, 감사합니다.
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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