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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선구자인 류형원
리조봉건사회 전기간 지배적인 통치리념으로 되여있던 유교, 주자학의 교조주의를 반대하여 《실사구시의 학문》의 구호를 들고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학문연구를 주장한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17세기에 새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낸 이들을 실학파라고 하였다. 그들은 고전연구와 사회개혁을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로 진행하려고 하였고 우리 나라에서의 사회정책, 농학, 자연과학, 력사학, 지리학, 문학 등의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이들의 선두에는 류형원(호는 반계)이 서있었다. 류형원(1622-1673년)은 한성(서울)의 이름있는 한 량반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강의하고 정의를 사랑하는 훌륭한 품성으로 교양되였고 책읽기를 좋아하고 경전을 비롯한 수많은 서적들을 탐독하였다. 특히 그는 불의를 미워하고 그와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가 15살 나던 해인 1636년에 있은 일이였다. 그때 류형원은 청나라의 침입을 당하여 조부모와 어머니, 고모를 모시고 피난가던 길에 산속에서 불의에 강도들과 맞다들게 되였다. 강도들은 류형원을 위협하면서 그의 부모들을 해치려고 하였다. 이때 그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강도들을 막아나서면서 이렇게 꾸짖었다. 《이 세상에 부모가 없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자기 부모를 존경할줄 안다면 남의 부모도 존경하여야 할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 부모를 놀라게 하지 말라. 만약에 물건이 탐나면 우리가 가지고가는 물건만은 다 가져가도 좋다.》 어린 소년의 담찬 기상과 사리정연한 말에 감동된 강도들은 머리를 떨구고 흩어져가버렸다고 한다. 이후 류형원의 사상과 리념은 이 이야기에 보이는 그의 행동과 맥락을 같이하고있다. 남의 물건을 빼앗으려던 강도들에 대한 그의 비판은 나라의 운명과 인민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추악한 당파싸움과 파렴치한 수탈로 날과 달을 보내던 봉건통치배들에 대한 증오로 이어졌다. 그는 학식으로 보나 인격으로 보나 명성이 자자하여 그 당시의 량반관료배들이 그와 사귀기를 원하였으나 애당초 대상하려고 하지 않았다. 류형원은 량반출신으로서 얼마든지 출세할수도 있었으나 이 길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당시 왕실의 외척들과 대신들이 류형원에게 벼슬을 주려고 추천하였으나 그는 모두 거절하고 32살때 마침내 서울을 떠나 전라북도 부안군 우반동이라는 해변가마을에 내려갔다. 서울에서 살기보다는 벽촌에서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생활을 체험하며 나라의 장래발전을 도모할수 있는 학문연구에 한생을 바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그의 가슴속깊이에 자리잡고있었던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골에로의 길, 이것은 결코 현실도피가 아니라 새로운 진리탐구에로의 길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는 자기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학문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그는 일본사무라이들이 강요한 임진전쟁의 후과로 생산력이 극도로 떨어지고 그자신이 1636년 청나라의 침략을 직접 체험하면서 공리공담적인 학문의 불필요함을 뼈저리게 느끼고있었다. 또 그가 두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당쟁에 관계되여 28살의 젊은 나이로 옥사한 비극을 체험한것도 그에게 부패한 정계와 인연을 끊고 새로운 진리를 탐구하는 길에 일생을 바치게 한 계기로 되였다. 그는 침식을 잊고 독서를 하였고 말을 타고 다닐 때에도 깊은 생각에 잠겨 말이 다른 길로 가는것조차 모르는 일까지도 종종 있군 하였다. 그는 밤에도 쉬지 않고 공부를 하였으며 매일 날이 저물면 《오늘도 헛되이 보냈구나. 학문은 무한한데 세월은 한정이 있으니 걱정이로다.》라고 하면서 늘 분초를 아껴 학문을 탐구하였다. 이 과정에 그는 천문, 지리, 수학, 음악, 언어, 력사, 철학, 정치, 경제, 군사, 의학, 문예, 도덕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 걸치는 자기의 사상과 리론을 집대성한 백과전서적인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그는 관념론적인 주자학을 비판하여 《리기총론》, 《론학》, 《물리》, 《경설문답》, 《인심도심》, 《사단칠정》 등 철학적인 저작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종래에 사대주의자, 교조주의자들에 의하여 도외시되여온 조국의 력사와 언어를 해명한 《동사강목조례》, 《력사동국가고》, 《정음지남》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외래침략자들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국방대책과 군사학에 관한 《기효신서절요》, 《무경사서초》 등을 저술하고 국방상에 절실히 필요한 군사관계 서적들도 집필하였다. 그는 국내 각 지방들을 직접 답사하고 연구한데 기초하여 《기행일기》를 서술하였고 또 《여지지》, 《지리군서》 등도 집필하였다. 그의 글들은 뜨거운 애국심과 함께 우리 나라 사회정치, 경제제도 및 문화 등에 대한 그의 높은 식견과 판단에 기초한것으로서 상당히 애국적이며 과학적인것이였다. 또한 그가 벽촌에서 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체험하면서 저술한것이기에 진보성도 가지고있었다. 그는 매 저서들에서 국가통치제도와 인민생활의 밑뿌리를 파헤치며 개혁을 주장하였다. 류형원의 철학사상은 비교적 유물론적인 립장에 서있었다. 그의 주요 저서인 《반계수록》은 그의 이러한 립장을 증명해주는 문헌이기도 하였다. 류형원은 당시 철학사상에서 론의되였던 리와 기의 문제에 대한 자기의 유물론적인 견해를 이렇게 밝혔다. 《천하의 리는 만물을 통하여 나타나며 물이 없이는 그 리는 나타날바가 없다.》 이것은 동시에 물질과 법칙과의 관계가 서로 분리할수 없는것이라는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철학의 기본문제에 대한 이러한 진보적립장과 견해로부터 출발하여 그는 철학상의 제반 문제들을 기본적으로 정당하게 해명하였다. 즉 그의 인심, 도심, 사단, 칠정 등의 학설들은 리, 기에 대한 유물론적견해로부터 출발하고있다. 때문에 《반계수록》의 서문을 쓴 오광운은 《그의 리론은 순수하고 정밀하며 심오하여 근세의 속된 선비들은 따를바가 아니였다. 여기에서 나는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여서는 안된다는것을 더욱 굳게 믿게 되였다.》고 그 과학성과 진보성에 대하여 밝히였다. 이처럼 그는 사물과 법칙은 호상 불가분리한것이라고 인정하였다. 류형원은 또한 사물의 부단한 운동과 변화발전, 그의 객관성을 주장하였으며 유물론적견해로부터 출발하여 공리공담과 비실재적인것, 체험하지 않은것에 대하여서는 어떠한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미신과 종교 등을 인정하지 않았을뿐아니라 그의 허황성과 나아가서는 사회발전의 기초로서의 생산력발전에 주는 막대한 해독성을 신랄하게 폭로비판하였으며 사주, 관상, 무당 등의 허위성도 폭로비판하였다. 이것은 다 그의 실학사상으로부터 나온것이였다. 류형원은 애국심과 인도주의로 일관된 사상에 기초하여 당시 봉건제도의 모순과 봉건적착취를 전면적으로 비판하였으며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인민들이 잘살수 있도록 통치제도를 개혁할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개혁사상에서 기본은 전제개혁안이였다. 그는 당시 봉건제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이 토지를 봉건지주들이 소유하고있는데 있다고 보고 전면적인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토지가 봉건지주들의 독점적인 사적소유로 되여있기때문에 농민들은 토지를 가지지 못하고 그 결과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에 얽매여 각종 착취를 당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토지에 대한 지주들의 사적소유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농민들의 농노적상태를 폭로하고 깊은 동정을 보내였으며 인민들을 이러한 처지로부터 벗어나게 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이다.》라고 비난하고 농사짓는 자가 땅을 가진다는 원칙에 기초하여 토지개혁안을 제출하였다. 그는 농민들이 모두 능력에 맞게 토지를 리용할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공전제(봉건적국유제)》를 실시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사적소유와 매매가 없고 능력과 필요에 따라서만 자유롭고 균등하게 리용할수 있는 공전제의 실시만이 정치경제상의 모든 모순을 제거할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류형원은 토지를 공전으로 한 다음에는 일정한 제도와 절차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 경작하도록 할것을 제기하면서 분배안을 내놓았다. 여기서 봉건관료배들에게 토지를 주자고 한 약점이 있으나 그의 기본사상은 토지는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자는것이였다. 류형원은 또 농업, 수공업 등 생산력을 발전시킬데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고 합리적인 방도들도 내놓았다. 수리관개시설을 정비확장할데 대한 문제, 경작방법을 개선할데 대한 문제, 산과 하천을 합리적으로 리용할데 대한 문제, 농기구를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개량하여 적용할데 대한 문제, 그밖에 농사절기, 비료, 제초, 목축, 과수 등 문제, 수륙교통을 발전시킬데 대한 문제, 금속화페의 류통문제 등 여러 분야에 걸치는 다방면적인 제안들을 제기하였다. 토지제도의 개혁, 경제관계의 개혁에 토대하여 류형원은 정치, 법률, 교육, 국가제도와 기구, 군대제도 등을 모두 대대적으로 개혁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류형원은 우리 나라 사상발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실학사상의 선구자적역할을 한 학자의 한사람으로서 그 이후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류형원은 우리 나라의 력대 사상가들가운데서 경제문제에 가장 조예가 깊었고 또 합리적인 견해들을 많이 제기한 학자의 한사람이였다. 류형원의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개혁사상은 당시 통치계급에게는 접수되지 못하였다. 때문에 그의 저작은 즉시로 발표되지 못하였고 그의 사상자체도 묵살당하였다. 그의 사상은 그가 죽은 후 18세기에 와서 실학사상가들에 의하여 소생되여 계승발전되였으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박지원(1737-1805년)은 《허생전》에서 《류형원은 한나라의 경제를 능히 운영할수 있는 대인재인데 지금 속절없이 바다가에서 늙는다.》고 하였고 리익(1681-1763년)은 《리조건국이래 수백년간에 시무를 아는 사람은 오직 리률곡과 류반계뿐인데 리률곡의 제안은 그 대부분을 실행할수 있는것이였으나 반계의 경우에는 근본적으로 개혁하려 하였으며 참으로 그 뜻이 크다.》고 하였다. 참으로 정당한 평가라고 할수 있다. 류형원은 일생 겸손하고 소박하게 생활하였다. 원래 그는 상당한 토지와 재산을 가지고있었으나 생활에서 몹시 검박하여 고기로 만든 음식이나 비단옷을 사양하였다. 그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진심으로 대하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류형원은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기가 직접 그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벽촌에 살면서 깊은 연구를 거듭하여 구조가 견고하고 편리한 큰 배를 네댓척 만들어 자기 집 앞바다에 띄우고 그 성능을 시험하였다. 그는 하루에 수백리 달릴수 있는 준마를 기르고 좋은 활과 총 수십자루를 장만하여 동리사람들과 같이 기마훈련을 하고 그들에게 사격술을 가르쳐주었다. 결과 그가 살던 우반동포수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류형원자신의 계급적출신과 당시 력사발전의 제한성, 도달된 과학과 지식발전수준 등의 제한성으로 하여 그의 사상에는 적지 않은 결함들이 있었으나 그 시기 리조봉건사회발전의 요구, 인민의 지향과 리익을 어느 정도 정당하게 반영한것으로 하여, 또 봉건제도에 대한 비판과 폭로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모순을 깨닫고 계몽각성되게 한것으로 하여 그의 사상과 리념은 진보적이며 애국적인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후세 실학사상가들은 류형원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그것을 발전시킴으로써 실학을 풍부히 전개해나갔으며 이런 의미에서 그는 실학파의 선구자의 한사람이라고 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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