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를 받고도 군영을 떠나지 않은 김응서
 

 

부고를 받고도 군영을 떠나지 않은 김응서 

 

김응서(1564-1624년)는 16세기말~17세기초 리조 14대왕 선조때 남북으로 쳐들어오는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공로를 세운 애국명장이다. 그의 본관은 김해이며 그는 1564년 11월 7일 평안도 룡강에서 출생하였다.

김응서의 부친은 무과에 급제하여 군관으로 복무하였고 모친도 무관가정의 출신이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려서부터 군사부문에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있었다. 전해지는데 의하면 벌써 7~9살때부터 모래와 흙으로 성을 쌓고 나무가지를 꺾어서는 군대를 만들어 공방전을 벌리게 하는 등 군사놀이를 즐겨하였다. 13살때에는 전쟁에 관한 력사서적을 읽다가도 옛날 장군들중에 전쟁에서 패배한 대목에 이르면 문득 일어서서 《이렇게 하면 이겼을텐데.》 하며 군대를 지휘하고 적을 치는 시늉을 하였다고 한다.

후날 명장으로서의 그의 기질의 싹은 이렇게 어린시절부터 움트고있었던것이다.

그는 20살때 무과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되였으며 그해 12월에는 리진권관으로 임명되였다. 이때부터 조국방위를 위한 싸움에 한생을 바친 그의 투쟁의 년대기가 시작되였다.

무과시험과정은 물론 리진권관당시에 벌써 김응서는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이 인정되였으며 엄격한 규률에 복종할줄 알고 청렴한 품성의 소유자라는것도 알려지게 되였다.

그는 두차례나 량반들의 행동을 규찰하는 임무를 받은 사헌부 감찰로 임명되였으나 얼마후 《문벌이 미천》하다는 리유로 두번 다 면직되였다. 이것은 그가 같은 량반중에서도 멸시와 천대를 받던 평안도출신이였기때문이다.

사헌부 감찰의 직책에서 해임된 김응서는 평안도지방에서 녀진인방어의 제일선을 담당한 벽동아이진만호로 임명되였다.

임지에 이른 그는 큰 아이성의 방어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그는 정부관료들이 이 지방의 지형지세도 모르면서 책상머리에서 고안해내여 그려 내려보낸 축성도에 의거하지 않고 이곳의 자연지리적조건에 맞게 성을 쌓았으며 중요한 지점에는 벽돌을 구워 성벽을 더욱 높이 쌓아 그 방어력을 높이였다.

그의 축성기술에 대한 깊은 지식과 창발적인 사업태도는 정부에서 높이 평가되였으며 1590년에는 고산진 병마첨절제사로 등용되였다. 그는 거기에 가서도 북방으로부터의 녀진인의 침입을 성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한 군사실무적조치들을 취하였다.

1592년 임진조국전쟁이 발발하자 김응서는 인민들의 애국적열의에 무한히 고무되여 평양성탈환을 위한 작전에서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당시 그는 아버지의 병환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얼마후 부친이 사망하였다는 부고를 받았으나 군영을 떠나지 않았다. 1594년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부고를 받았을 때에도 그러하였다.

사실 김응서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사회풍습에 따르면 용납될수 없는 일이였다. 유교도덕이 지배적이던 그때 부모가 사망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3년상을 치르어야 하였고 자기가 《효자》라는것을 보여주자면 3년간 묘곁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여야만 하였다. 효자라야만 충신으로 될수 있다는 론리에 따라서 이것이 당시 출세의 기본조건으로 되여있었다. 때문에 이러한 도덕관념대로 한다면 김응서는 응당 싸움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였다.

하지만 김응서는 군영을 떠나지 않았다.

수천수만의 무고한 조선사람들이 왜적들의 칼날밑에 원통하게 숨져가고있었고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이때 어찌 군영을 떠날수 있으랴. 사람들이 시비질을 해도 좋았고 높이 발탁되지 않아도 좋았다. 오직 나라의 안전을 지켜내고 겨레의 복수를 할수만 있다면 더 바랄것이 없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이 량반관료들의 눈에는 거슬리고 시비거리로 되였지만 군중은 그 일로 하여 더욱 그를 따르고 신뢰하게 되였다.

조정에서도 그의 소행을 군주에 대한 충의의 표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였고 임금의 명의로 그에게 3년간의 수제를 중지할것을 명령하고 별장으로 임명하여 평양성탈환작전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조정안에서도 명장인 김응서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는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열렬한 애국심과 원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김응서가 별장으로 임명된데 대하여 몹시 기뻐하면서 그의 휘하에서 싸울것을 탄원하여나섰다. 하여 그는 룡강, 강서, 상화, 증산 등 4개 지역 인민들로 편성된 부대를 거느리고 평양성 서부 20여개소에 군사거점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평양성을 나와서 인민들의 식량과 재물을 략탈하려고 시도하는 적들을 섬멸하면서 성안의 적들을 기갈과 추위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평양에 둥지를 튼 적들은 순안에 지휘부를 둔 체찰사 리원익이 지휘하는 아군주력부대에 의하여 북쪽길이 차단된데다가 김응서부대에 의하여 서부지역이 봉쇄되고 대동강방면에서는 수군장수 김억추의 수군에 의하여, 남부지역에서는 중화방면의 림중량의병부대에 의하여 포위되여 퇴로와 보급로까지 잃고 완전히 고립무원해지게 되였다.

1592년 8월 1일 평양성을 포위하고있던 아군부대들은 적들에 대한 일제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동안 거듭되는 전공으로 방어사로 승급한 김응서는 1만명의 군대를 지휘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명장으로서의 명성을 더욱 떨치게 되였다.

평양성탈환작전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적들은 밤이 아니면 감히 성밖에 나서지도 못하였다.

김응서는 평양성주변에 부대들을 매복시킨 후 의병부대들과의 긴밀한 협동작전밑에 성밖으로 기여나오는 적들을 모조리 잡아죽이는 한편 성안에 대한 정찰을 더욱 강화하게 하였다.

당시 적들은 아군의 포위환이 날로 강화되자 당황망조하여 평양성안의 민가를 털어서는 토굴을 만들고 여러곳에 방어시설들을 구축하고있었다. 때문에 앞으로 평양성탈환을 위해서는 치렬한 시가전을 예견하여야 하였으며 이를 위해 적들이 새로 구축한 토굴들과 참호들을 구체적으로 료해장악하는것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그는 정찰성원들을 성안에 파견하여 인민들과의 련계밑에 적들의 정황을 탐지하게 하는 한편 군사에 밝은 자신이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때때로 함구문, 보통문부근에 와서 적정을 정찰하였다.

한편 그는 적의 우두머리들을 죽이여 적진내부를 와해시키는데도 깊은 관심을 돌렸다. 특히 그는 적의 우두머리들을 죽이는 일을 자기가 직접 수행하기도 하였다. 애국명기 계월향의 도움으로 평양성안에 있던 한 악질적장놈을 처단한 이야기는 오늘도 사람들속에 전해지고있다. 계월향은 천한 기생의 몸이였지만 그의 가슴속에서는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원쑤에 대한 불타는 증오가 용암처럼 끓어번지고있었다. 그는 적장을 죽임으로써 부모형제의 원쑤를 갚을 굳은 결심을 품고 후퇴를 하지 않고 성안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연약한 자기 혼자의 힘으로써는 수많은 호위병을 거느리고있는 적장을 처단하고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하여 그는 김응서와 련계를 맺고 오빠로 속이여 그를 적장놈과 만나게 하였다.

계월향의 도움으로 김응서는 간악한 적장놈을 처단하였다. 탈출도중에 계월향은 애국의 더운 피를 뿌리며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김응서와 계월향에 의하여 단행된 적장놈처단에 대한 이야기는 수백년을 전해내려오며 우리 인민들의 가슴속에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과 원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심어주면서 원쑤격멸의 한길로 고무하였다.

적장이 뒈지자 적진에는 커다란 공포가 만연되였다. 성안이라고 안전한것도 못되였다. 언제 누가 또 죽겠는지 놈들은 제 그림자를 보고도 놀랄 지경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게다가 놈들은 식량과 소금의 부족, 추위속에 1592년의 엄혹한 겨울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러한 때 아군은 적에 대한 총공격준비를 갖추고있었다.

1593년 1월 7일 아군은 김응서가 거느린 부대를 선봉군으로 하여 평양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김응서는 부대를 거느리고 서쪽과 남쪽에서 공격하였다.

적들이 성에 의지하여 악착하게 저항하는 조건에서 그는 적들을 성밖으로 끌어내여 족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소부대를 거느리고 고지에 올라 성벽의 적들을 맹렬히 공격하다가 마치 견디지 못하여 약간씩 후퇴하는 기미를 보이였다. 적들은 아군이 진짜 퇴각하는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고리문으로 나와 공격해왔다. 아군은 계속 지는척 하면서 적들을 더 많이, 더 멀리 끌어내였다.

적들이 성에서 멀리 나왔다는것을 확인한 후 김응서는 말머리를 돌리여 반격명령을 내리고 앞장에서 돌진하였다. 그리고 좌우측에 매복시켰던 주력부대가 일제히 반격을 가하였다. 그제서야 속았다는것을 안 적들이 성으로 도망쳐갔으나 급해맞은 성안의 적들이 성문을 닫는 바람에 성벽밑에서 몰살당하고말았다.

첫날 전투에서 김응서부대가 거둔 전과는 조선과 명나라군사를 크게 고무하였다.

이튿날 이른새벽부터 평양성탈환을 위한 전면공격이 개시되였다.

김응서와 리일이 거느린 아군부대들은 함구문으로부터 진공하여 성안의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주었다. 적들은 성안의 좁은 지역에 압착되여 건축물들과 성벽에 의거하여 저항하다가 밤이 되자 무수한 시체, 무기, 말들을 내버린채 대동강의 얼음을 타고 황급히 패주하였다.

평양성탈환전투는 임진조국전쟁에 떨쳐나선 장병들과 의병들, 애국적인민들을 크게 고무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하여 김응서는 첨지중추부사 겸 평안방어사로 등용되였다.

그후 패주하는 적들을 계속 추격하여 경상도지역에까지 이르자 8월에는 가선대부(종2품)의 품계로 올리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벼슬을 주었다.

문벌이 미천하다고 하여 사헌부 감찰의 직위도 안 주던 김응서에게 종2품의 품계를 주고 또 적이 몰켜있던 경상도 동남부에 대한 공격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역할을 담당할 경상우도의 병사로 등용한것은 그가 장병들속에서 신망이 높았고 용감하고 능숙한 지휘관이며 전술가였다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평안도의 한미한 무관출신으로서 30살에 이와 같은 높은 지위와 중책을 맡은 일은 왕조교체시를 제외하고는 리조 전기간을 통하여 찾아보기 힘들었다.

1597년 12월말부터 1월초까지 진행된 아군련합군의 울산 도산성포위공격전에서도 만일 김응서가 제기한 작전안대로 하였더라면 적을 소멸할수 있었을것이다. 이것은 후세저술가들 및 력사가들이 일치하게 인정하고있는것이다.

울산 도산성은 일본침략군의 가장 우익에 있는 거점이며 가또 기요마사의 관할이였다. 총 연장길이 1km 남짓한 이 성은 남쪽은 태화강에 림하여 배를 직접 성아래에 댈수도 있었다.

1597년 12월 22일 조선과 명나라련합군은 울산 도산성을 포위하였다.

일본침략군은 이날부터 다음해 1월 4일까지 비가 내리면 그것으로 입을 적시고 종이를 먹고, 말을 잡아먹고 추위로 얼어죽으면서도 저항하였다. 이때 가또는 너무 급하여 자살할 생각까지 하였다고 한다. 일본지원군이 오는 바람에 성안의 적들은 겨우 구원될수 있었다.

이때 김응서는 궁한 적들이 발악하는 조건에서 한 모퉁이를 열어주고 도중에 매복하였다가 빠져나가는 적들을 들이치면 모두 섬멸할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안되면 적진와해공작을 강화하고 그것을 유일적으로 지도하여 도산성안의 적병사들을 모조리 투항시키고 적들이 분렬된 기회에 괴수들을 섬멸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제의는 하나도 접수되지 않았다.

발악하는 적들에게 길을 틔워주어 살길을 열어주어야 저항을 줄일수 있다는것은 병서에도 있는것으로서 당시 적들의 발악이 악착한 조건에서 충분히 실현가능성이 있는것이였다. 그리고 적진와해공작을 강화하여 적내부를 분렬시키고 그다음에 적괴수들을 소멸하자는 제안도 타당한것이였다.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의 장수들은 수적우세만 믿고 성을 완전히 포위해놓고 무모하게 공격만 하려고 하였으므로 의외로 적들의 강력한 저항을 초래하고 나중에는 원군의 도움으로 살아날수 있게 한것이다.

7년간의 임진조국전쟁과정에 무훈을 떨친 장수들을 론할 때 사람들은 흔히 해전에서는 리순신, 륙전에서는 곽재우와 권률, 김응서를 꼽고있다.

나라와 겨레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감정을 지니고있던 그는 전후에도 왜적의 재침위험이 가시지 않았을 때 경상, 전라, 충청도의 병사를 력임하면서 국방력을 강화하고 일본침략자들의 침략야욕을 분쇄하는데 기여하였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북방에서 녀진족의 침략위험이 증대되자 그는 1614년에 함남도병마절도사로, 그다음해에는 함북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였다.

그후 녀진족이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료양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우리 나라에도 침략의 마수를 뻗치자 1618년 조정에서는 김응서를 숭정대부의 품계로 올리고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 겸 녕변대도호부사로 임명하여 그에 대처하게 하였다.

1619년 명나라를 도와 신흥녀진족(후금)을 진압하기 위한 심하전역에 김응서는 조선군 부원수로 참전하였다가 포로되여 1624년 4월 18일 그곳에서 61살을 일기로 최후를 마쳤다.

김응서는 미천한 문벌과 통치배들의 훼방과 박해, 침략자들과의 간고한 투쟁속에서 순탄치 않은 인생행로를 걸어왔다. 하지만 그는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으로 온넋을 불태우며 파란만장의 인생을 애국의 자욱자욱으로 수놓아왔다. 나라를 배반하는 역적들을 증오하고 원쑤를 미워한 그였기에 1613년에 박응서라는 자가 반란죄로 처단되자 이름을 김경서로 고치였다. 그자의 이름이 자기 이름자와 같다고 해서였다고 전해온다.

그도 인간인 이상 사업상에서는 일련의 결함들도 발로시켰다. 시시한 좌석순차를 놓고 명장인 고언백과 다툰것은 그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가 범한 결함들은 세운 공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기에 사람들은 수백년간 그를 잊지 못해하며 명장으로서의 그의 무훈담을 전해오는것이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아래 - 아래 - - 2016-07-09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서 이해하기 좋습니다. 제가 원하던 국사책이네요.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근데 어째 이미지는 안보이네요. 당시 영토가 표시된 지도그림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관리자 - - - - 2016-07-09
이미지문제가 해결되였습니다.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다음편은 언제 올리나요.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력사이야기들을 많이 올려주세요. 명인전, 무술명인전, 감사합니다.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