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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홍의장군 곽재우
16세기말엽 일본침략자들에 의하여 강요된 7년간의 임진조국전쟁은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실로 그 류례를 찾아보기 힘든 어려운 싸움이였다. 봉건통치배들의 부패무능과 학정으로 하여 국력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졌다. 비겁하고 무능한 통치배들은 전쟁이 터지자 남먼저 보따리를 싸들고 줄행랑을 놓았다. 이러한 때 나라와 겨레의 존엄과 운명을 지켜 항전에 일떠선것은 우리의 애국적인민들이였다. 그들의 투쟁열의에서 힘을 얻고 일부 애국적인 량반관료들도 정의의 창검을 들고나섰으니 그들가운데는 천강홍의장군(하늘이 내려보낸 붉은 옷 입은 장군이라는 뜻) 곽재우도 있었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령남지방에서 제일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왜적을 격멸소탕하여 전쟁의 승리에 이바지하였다. 곽재우(1552-1617년)는 의병을 일으킨 후 곧 돌격장으로 임명되고 1592년 10월에는 형조 정장, 1593년에는 성주목사, 경상우도 조방장으로, 1597년에는 경상좌도 방어사로서 적들의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지켜내는데 크게 기여한 애국명장이다. 전쟁에 이바지한 명장으로서 해전에서 리순신을 꼽는다면 륙전에서는 곽재우를 첫 손가락에 꼽고있다. 그는 뛰여난 지략과 용맹을 지니고 의병부대를 능숙하게 지휘통솔함으로써 여러차례의 싸움을 승리에로 이끌고 락동강 서쪽에로의 적들의 침입을 저지파탄시키는데서 큰 역할을 하였다. 1592년 4월중순 어느 날, 마을의 널직한 공지에 수십명의 군중이 모여있었다. 그들의 앞에 주먹을 불끈 쥐고 수레우에 우뚝 서서 열변을 토하는 사나이. 《지금 적들이 접근해오고있으니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우리의 부모처자들은 모두 적들의 먹이감으로 되여버리고 말것이다. 이 마을에는 젊은이가 수백명이나 있다. 만약 모두가 단합하여 남강의 솥나루에서 적을 막는다면 마을을 지켜낼수 있을것이다. 어째서 싸움도 해보지 않고 죽음을 기다릴수 있으랴!》 그의 말은 마디마디 모여선 군중의 흉벽을 세차게 두드렸다. 《왜적을 치고 나라를 구원하자!》 사람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농쟁기를 번쩍 추켜들며 적극 호응해나섰다. 그 모습을 둘러보며 승리의 신심을 가다듬는 사나이, 그가 바로 의주목사, 황해도 감사 등을 지낸 곽월의 아들인 곽재우였다. 그의 자는 계수, 호는 망우당이라고 불렀다. 그는 젊어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기고 여러 병서들도 읽었다고 한다. 34살때 과거시험에서 떨어진 후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인 의령의 외진 마을에서 40이 넘도록 글을 읽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고향에 내려온 후 아무것도 하는 일없이 밀려다니며 술놀이만 하기때문에 그의 안해가 앞으로 전란이 있을것이니 지금부터 좋은 사람들과 사귀면서 무술도 익히여 싸움준비를 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부지깽이도 뛴다는 농번기라 농사일에 바쁜 나날을 보내던 곽재우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침략군 수십만이 불시에 우리 나라에 쳐들어왔다는것이였다. 적들은 벌써 여러 성들을 함락시키고 의령을 가까이하고있다는것이다. 전투준비가 부족하였던 관군은 별로 저항도 못해보고 무너졌으며 지방관리들은 전선으로 나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모두 도망쳐버리였다. 의령은 무방비상태로 되여버렸다. 곽재우는 참을수 없었다. 그는 곧 자기 집 종 10여명으로 의병대를 뭇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피난길에 오르려던 동리 장정들을 불러모으고 자기가 지은 격서를 랑독하여 그들의 심장에 의분의 불을 질렀던것이다. 60여명(70여명이라고도 한다.)이 곽재우를 따라나섰다. 그는 자기 집재산을 다 내여 무기와 군량을 조달하였고 그의 안해는 미리 준비하고있었던듯 곁에서 남편의 일을 적극 도와주었다. 곽재우는 크게 일판을 벌려보고싶었으나 병력이 너무도 부족하였다. 곽재우는 비슬산에 있는 농민군을 찾아갔다. 량반가문의 출신인 그에게 있어서 《초적》(통치배들이 농민군을 모독하여 부른 말)들과 손잡는것은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후에 그것때문에 초적의 한무리라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곽재우는 부패무능한 통치배들이 아니라 천대받고 억압받던 그들의 심장에 애국의 더운 피가 흐르고있다고 믿고있었으며 꼭 손을 잡을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길에 올랐던것이다. 애국의 심장은 언제나 하나의 숨결로 이어지기마련이다. 농민군은 곽재우의 합동제의에 선뜻 응하였다. 곽재우의병대의 빠른 기동과 견결성 등은 그 대오에 농민군이 참가하였다는 사실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곽재우는 초계고을의 빈 성안에 들어가 무기와 군량을 가져다 력량을 강화하였다. 곽재우는 의병투쟁에 나서며 붉은 철직(무관복)을 입고 검은 투구를 썼으며 허리에는 긴 칼을 찼다. 이렇게 차리고 나서니 평시에는 호인답던 그 모습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사랑과 증오로 가슴불태우는 엄엄한 장군의 기상으로 부각되였다. 그가 의병을 일으킨 날은 1592년 4월 21일(20일, 24일 설도 있다.)로서 전쟁이 일어난지 아흐레만이였다. 관군이 계속 퇴각만 하고있을 때 처음으로 되는 그의 의병대의 궐기에 대한 소식은 삽시에 전국 방방곡곡에로 퍼져가 인민들을 원쑤격멸에로 추동하였다. 곽재우는 의병대를 거느리고 먼저 솥나루와 함안으로 첫 출격을 하여 왜병 50여명을 죽이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청장년들이 곽재우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곽재우의병대는 락동강류역에 출몰하면서 부산포에서 한성으로 날라가는 적 군수물자수송선들을 습격하였다. 6월 어느 날, 왜군 6번대의 적장 안고꾸지 에께이가 거느린 2,000여명의 왜적들이 전라도로 침입하기 위하여 가던중 길목인 솥나루에 이르렀다. 적장놈은 우선 척후를 내보내여 지형을 정찰하고 기본대오가 건늘수 있게 말뚝을 박아 표식해놓게 하였다. 적들의 흉책을 간파한 곽재우는 밤중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가서 말뚝들을 전부 깊은 진창에다 옮겨 꽂아놓게 하였다. 그리고 매복진을 치고 적군이 도하하기를 기다렸다. 이튿날 새벽 적들은 멋모르고 기여들었다가 모조리 진탕에 빠져 허우적거리였다. 곽재우의 사격신호에 따라 의병들은 화살을 날렸는데 거의다가 백발백중하여 적들을 놀래웠다. 얼마후 적들이 보복을 한다고 하면서 대부대로 쳐들어왔다. 곽재우는 주력을 강 동쪽에 매복시키고 10여명의 날랜 장사를 선발하여 붉은 옷을 입고 흰말을 타게 하였다. 당시 곽재우는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다니였으므로 《홍의장군》으로 불리웠다. 《홍의장군》들은 적의 대군이 이르자 적진으로 육박하여 순식간에 여러명의 적을 찍어넘기고 바람같이 사라지군 하였다. 그때마다 적장놈은 《홍의장군》들의 자취를 따라 추격병을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기본부대의 력량은 많이 줄어들었고 추격병들은 모조리 소멸되였다. 유인기만전술에 속아넘어간 적들이 당황망조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있을 때 의병들이 곽재우의 지휘밑에 일제히 북을 치며 돌격전을 벌리였다. 의병들은 적들을 강에 몰아넣고 무리죽음을 안겼다. 이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적들이 뒈졌던지 너저분한 시체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고 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하여 이곳을 지나 전라도지방에 침입하려던 적들의 기도는 좌절되였다. 7월에 곽재우의병대는 현풍성을 공격하였다. 그때 하시바 히데가쯔의 9번대 11,300명이 락동강 동쪽 현풍, 창녕, 령산 등지에 나누어 주둔하여 락동강을 오르내리는 수송선단의 호위임무를 수행하고있었다. 현풍성의 적들은 곽재우의병대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지라 성문을 굳게 닫고 저항하였다. 곽재우는 낮에는 북소리, 징소리, 나팔소리로, 밤에는 일제히 홰불을 올리는 방법으로 심리적공세를 가하였다. 마침내 적들은 성을 버리고 밤중에 창녕성으로 도망쳤으며 이어 그 성마저 버리고 령산성으로 달아뺐다. 하여 현풍, 창녕 두 읍성이 수복되였다. 곽재우의병대는 승리한 기세로 령산성을 공격하였다. 곽재우의 요청에 의하여 의령, 초계, 고령 등지의 의병들과 관군도 합세하였다. 아군의 3일간의 불같은 공격에 견딜수 없게 된 적들은 어둠을 타서 성주성으로 퇴각했다. 곽재우의병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의병부대들의 투쟁에 의하여 락동강좌안의 여러 고을들이 수복되고 적의 종심 주요교통로로 리용되던 우로 즉 김해-령산-창녕-현풍도로가 아군의 수중에 장악되였으며 락동강 서쪽에로의 적의 침입기도도 파탄되였다. 투쟁과정에 곽재우의병대는 2,000명의 큰 부대로 장성하였다. 곽재우의병대는 이후 마수원(창녕 서남 약 25리 지점의 포구)에서 매복습격작전을 벌려 략탈한 량곡과 재물을 싣고 강을 따라 내려오던 적선 40여척을 격파하고 많은 왜적들을 격멸하였다. 곽재우의병대는 1597년 7월 왜적들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에도 잘 싸웠다. 이때 경상도지방에 있던 관군과 의병들은 제각기 성을 맡아 지키였다. 도원수 권률의 부대는 공산성을, 곽재우의병대는 화왕성을 지키였다. 적의 륙군은 1차 침입때와는 다른 전략으로 나왔다. 수군과 협동하여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강점할 목적으로 락동강 서쪽으로 밀려왔다. 력량상 차이로 하여 여러 성들이 일시 적들의 손에 넘어갔다. 부대들의 군사행동을 감독하는 체찰사 리원익은 화왕성도 적의 포위속에서 유지하기 어려울것이니 철수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곽재우는 그 권고를 거절하면서 《당나라군사가 100만이였으나 고구려의 안시성군민들은 능히 막아냈다. 지금 여러 군들이 무너져 홀로 남았다고 하여 지켜내지 못하겠는가.》라고 장병들을 고무하며 성을 끝까지 지켜싸울 확고한 결심을 보이였다. 적들의 대군이 성밑까지 쳐들어왔을 때도 그는 평시와 같이 웃으며 《적들도 군사를 안다면 어찌 감히 덤벼들겠는가.》고 하면서 성을 굳게 지키라고만 하였다. 적의 괴수 가또 기요마사의 선봉군은 절벽우에 있는 조용한 성을 바라만 보며 감히 공격할념을 못하였다. 한주일만에 적들은 성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그리하여 곽재우는 적은 력량을 가지고도 몇배나 되는 우세한 적과 맞서 화왕성을 지켜낼수 있었다. 그의 공적을 치하하여 당시 리호민이라는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저 사람 홍의장군 왜적 쫓기를 노루 쫓듯 하네 나라 위해 목숨바치니 그 어떤 충신인들 그보다 더할손가
7년간의 임진조국전쟁과정에 곽재우가 진행한 군사정치활동들은 그가 병법에 밝고 뛰여난 지략과 무비의 용감성, 능숙한 조직자적수완과 고상한 풍모, 비겁한 통치배들에 대한 저주와 혐오감을 지닌 군사지휘관이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곽재우는 선견지명의 안목을 지닌 군사전략가였다. 일본침략군과의 강화문제를 둘러싸고 론의가 분분할 때 곽재우가 취한 태도는 그에 대하여 잘 보여주고있다. 《대체로 강화라는것은 말은 다 같은 강화이지만 각기 다른 뜻을 가진 두가지 종류가 있소이다. 강화를 무조건 신뢰하고 준비를 안하는 자는 결국 망하고말것이고 강화를 하면서도 전력을 다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처하는 자는 존속할수 있소이다. 적국을 견제하며 그의 감정을 늦추어주고 화근을 완화하는것도 강화이고 적을 방심하게 하고 침략을 못하게 하여 군사를 쉬게 하고 인민을 안정시키는것도 강화이옵니다. 그러므로 강화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것은 고집불통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나이다. 적에 대한 경각성을 견지하면서 강화를 말하는것은 아무런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하옵니다.》 이것은 그가 당시의 전국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내린 결론으로서 앞날을 내다본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사실 여러해 계속된 전쟁으로 우리 나라와 인민이 입은 피해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교활한 적들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강화담판을 하면서 군대와 인민을 쉬우고 그 기간을 리용하여 군대를 재정비하고 무너진 성과 보루를 보수하며 군수물자를 저축하고 인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것이 중요하였다. 그러나 선조왕은 《한번 죽는것은 내 정녕 참을지라도 화의를 요구하는 말 듣고싶지 않노라. 어찌하여 간사한 말을 퍼뜨려 정의를 해치고 전군을 현혹시키는가》라는 시까지 지으며 강화를 결사반대하였다. 물론 이것은 당시 우리 인민들의 원쑤 왜적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그대로 반영한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형편에서 당장 왜적들과 싸움판을 벌려놓는것도 바람직한 일이 못되였다. 때문에 교활한 적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 강화담판을 하고 그뒤에서 싸움준비를 갖출데 대한 곽재우의 강화에 대한 견해는 그가 전략적안목이 있는 군사가였다는것을 실증해주고있다. 곽재우는 변화무쌍한 전술과 능숙한 지휘로 적들을 제압한 책략가이며 작전가였다. 그가 쓴 전술에서 많이 찾아보게 되는것은 유인전과 매복전, 심리전으로 적을 분산마비시키고 소멸하는것이였다. 이것은 의병대가 적에 비하여 수적으로나 훈련정도에서 그리고 군사장비수준에서 매우 뒤떨어진 조건에서 정확한 전술적조치였다. 아군을 요해지에 배치하고 력량과 배치정형을 알지 못하게 하며 유인기만으로 적을 분산와해시키고 혼란에 빠지게 한 후에 공격하여 소멸하는 전법은 그야말로 성공적이였다. 호각을 부는 사람들을 부근 산중에 많이 배치해놓고 적이 나타나면 사방에서 그것을 불어대게 하여 적의 얼혼을 빼고 밤에는 사방에서 홰불을 올리고 함성을 질러 얼마 되지 않은 군사를 가지고도 천만의 대군이 있는것 같이 보여 적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든 심리전은 당시 전쟁에서 찾아보기 힘든것이다. 이밖에도 곽재우는 기병에 의한 맹렬한 공격과 기동, 각개격파전술 등 림기응변적이며 변화무쌍한 전술로 련전련승을 이룩하였다. 곽재우는 지형지물에 밝고 그것을 잘 리용할줄 아는 군사가였다. 솥나루전투나 마수원전투 등 적지 않은 전투들이 다 그가 지형지물을 교묘하게 리용하여 벌린 싸움들이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593년 7월이후 전쟁은 일시 휴전기에 들어갔다. 이 기간 체찰사 리원익이 명나라군사들을 데리고 령남지방으로 이동하여올것을 곽재우에게 요구하였다. 이때 곽재우는 《지금 명나라군사들이 충청도지방에 주둔하고있는것은 범이 산에 있고 룡이 못속에 있는 격이옵니다. 그들이 만일 경상도지방으로 다 온다면 그것은 범이 산에서 내려온 격이고 룡이 물에서 나온것과 같은것》이라고 써보냈다. 지리도 적정도 모르는 명나라군사들이 경상도로 나오는것은 산속에 있어야 할 범이 산에서 내려오고 물속에 있어야 할 룡이 뭍으로 나오는것과 같이 어리석은짓이 아닐수 없었다. 하기에 리원익은 서한을 보고 《지금 나는 서한을 받아보고 저절로 무릎을 꿇었소. 우리 나라에 이와 같은 장수가 있을진대 무슨 걱정이 있겠소.》라고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곽재우는 군사가에게 있어서 필수불가결인 용감성과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전투에서는 항상 대오의 앞장에 서서 호랑이와 같이 용맹하게 싸웠으며 부하들에 대해서도 극진히 돌봐주었다. 그는 자기 의복을 벗어 부하장병들에게 입혀주었고 처자의 의복을 벗겨서는 부하들의 처자들에게 입혀주었다. 그리고 의병들이 적의 포위속에 들거나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는 언제나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들을 구원해내고야 말았다. 장병들은 일심동체가 되여 싸웠고 곽재우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였다. 인민들은 곽재우의병대에 큰 기대를 걸고 때를 놓치지 않고 적정을 알려주고 물심량면으로 지원해주었다. 그는 또한 장병들에게 원쑤 왜적을 치는것이 그 어떤 명예나 보수를 바라서가 아니라 부모처자를 지키고 고향산천을 지키며 나라에 충성다하기 위해서라는것을 늘 강조하였고 실천적모범을 보였다. 당시 적지 않은 봉건관료배들은 자기들이 벤 적의 머리수를 가지고 공명과 출세의 길을 마련해보려고 하였다. 지어 원균이나 우복룡같은 자는 무고한 자기 겨레를 해치고 《공로》를 평가받으려 하였다. 하지만 곽재우는 애국의 일념으로 가슴불태우며 한놈의 적이라도 더 소멸하는데 주력하였고 그것을 자랑하거나 보고하는데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조정의 관료들조차도 곽재우는 《조정의 지시 하나 받지 않았지만 정예로운 군사를 모아가지고 그동안 적을 무찔러 죽인 수를 이루 다 적어낼수 없소이다. 심지어 목을 벤 왜적의 머리를 모조리 강물속에 처넣고 보고하지도 않았소이다. 그가 하는 일을 보면 옛 사람에 비겨봐도 부끄럽지 않으니 크게 표창하는것이 좋을것 같소이다.》라고 제의하였던것이다. 특히 곽재우는 나라를 배반한 반역자들은 물론 나라와 겨레의 운명은 안중에도 없이 일신의 안일과 영달을 위해 추악한 행위를 일삼는 비겁한 관료배들과도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렸다. 그는 령산에 사는 반역자 공위겸이라는 자를 체포하여 단호히 처단해버림으로써 배신자들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 경상도관찰사 김수와의 견결한 투쟁은 불의를 증오한 그의 억센 기개를 잘 보여주었다. 이자는 왜적이 침입하여오자 질겁하여 산으로 도망쳤으며 합천군수 전형룡의 모해하는 말만 믿고 의병투쟁에 궐기한 곽재우에게 반역자의 혐의가 있다고 중상모해하였다. 곽재우도 이에 대하여 《애국과 반역은 세인이 판단할것이요, 옳고 그름은 공론이 결정할것이다.》라고 하면서 단호한 립장을 취하였다. 곽재우는 김수의 죄목을 10가지로 작성하여 꾸짖으면서 그의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겁에 질린 김수가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에게 곽재우를 불러다 타이르라고 하였다. 곽재우는 김성일의 앞에서도 자기의 처음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곽재우는 임금에게 아비도, 임금도 모르며 충성스럽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하며 패하기 좋아하면서 적을 맞아들이는 자, 금관자를 잃고 도망친 대가리없는 송장귀신이라고 김수를 욕질하였다. 후에 김수가 산음현에 있다가 재우의 선봉대가 이미 가까이 왔다는것을 듣고는 함양으로 도망칠 때 말을 거꾸로 타고 달아나기까지 하였으므로 온 도안의 사람들이 죄다 비웃었다. 곽재우는 김수의 비장에게 《네가 김수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죽이겠다.》고 위협하였고 김수는 임금에게 글을 올려 변명하면서 《신이 죽고 사는것은 달포사이에 달려있소이다.》라고 살려주기를 애걸하였다. 불의와 타협할줄 모르는 곽재우의 견결한 투쟁정신에 김수는 끝내 무릎을 꿇고말았다. 후에 조정에 소환되여 올라간 김수는 임금에게 《대체로 그 사람됨이 평범하지 않사옵니다.… 의병을 일으키는것도 남보다 제일먼저 하였나이다.… 의령과 삼가가 온전한것은 재우의 공적이나이다.》라고 정당한 평가를 하였다. 곽재우는 김수만이 아니라 고을원이나 변방장수가 도망쳤다는 말을 들으면 한사코 머리를 베려고 하였고 심지어 감사나 병사에게까지 불손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곽재우가 인민들의 지지와 옹호를 받을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가 바로 이런 비타협적인 투쟁정신이 있었기때문이다. 매 손가락으로 두드리느니 주먹으로 한번 치는것이 낫다는 말도 있다. 곽재우는 각지 의병들의 련합에 깊은 관심을 돌렸다. 김수는 《령남의 의병들은 각각 그 고을을 지킬뿐인가?》고 묻는 임금에게 《령남은 그렇지 않사옵니다. 통솔자가 있어서 때로는 적과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요해지에서 길목을 차단하기도 하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경상도의병들이 련합하여 한사람의 지휘를 받으며 적을 공격하거나 중요한 길목을 막고 싸우며 부단한 기동전을 벌린 사실을 말해주고있다. 참으로 경상도백성들이 피해가 많지 않은것도, 전라도에로 적들이 쳐들어가지 못하고 리순신의 수군이 바다에서 마음놓고 싸울수 있은것도 곽재우의 역할을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그때 정부군에는 수군의 리순신장군이 있고 의병부대에는 륙지의 곽재우장군이 있다는 말이 많이 류포되였다. 전후에 그는 국사는 안중에 없이 당파싸움에만 혈안이 되여 날뛰는 비렬한 통치배들을 극도로 증오하면서 임금에게 이렇게 제기하였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분발하여 착한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간신들을 멀리하며 나라의 부흥을 꾀해야 한다는것을 깨달아야 하옵니다. 신도 역시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중흥을 도울가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 조정에서는 동서남북으로 당파가 있어 벼슬하는 자들은 자기의 패거리를 끌어당기고 다른 패거리들을 배척하면서 당파들이 서로 엉키여 시비하는것으로 날을 보내고있소이다. 이들은 나라의 형편이 위급한것도 백성들의 리해와 국가의 존망에 대하여서는 하등의 관심도 없나이다. 짐작컨대 이자들은 나라를 망하게 한 후에야 그칠것이 아닌가고 생각하오이다.》 그는 자기가 건의한 군사정치문제들이 하나도 실천되지 않자 나중에는 더러운 당파싸움에 침을 뱉고 벼슬을 그만 두고말았다. 그후 조정에서 여러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모두 사퇴하고 비슬산에 들어가 곡식을 전페하고 솔잎을 먹으며 지내다가 취산 창암에서 66살을 일기로 생을 마치였다. 리순신과 함께 임진조국전쟁의 승리의 서막을 열어놓은 곽재우. 참으로 그는 뛰여난 전략가, 전술가, 능숙한 조직지휘자, 출중한 무예와 용맹을 갖춘 용장이고 뚜렷한 전투공적을 세운 명장이며 단군민족의 슬기를 빛내인 애국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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