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싸움을 승리에로 이끈 도원수 권률
 

 

행주산성싸움을 승리에로 이끈 도원수 권률 

 

권률은 임진조국전쟁시기 오래동안 도원수(전시에 임명하던 수륙군의 총지휘관)의 중임을 맡아가지고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한 명장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곽재우, 김응서와 함께 륙전에서 명성을 떨친 장수의 한사람으로 전해져왔다. 특히 그는 리치싸움과 행주산성싸움을 승리적으로 조직지휘함으로써 명장으로 력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권률(1537-1599년)은 안동사람으로서 선조초에 령의정을 지낸 권철(1503-1578년)의 아들이다. 그의 자는 언신이며 호는 만취당, 시호는 충장이다.

그는 재상가문의 출신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부귀와 권세를 부리는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공부를 좋아하였으나 나이 40살이 넘도록 과거를 보려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음사(과거를 보지 않고 문벌로 벼슬하는것)로써 벼슬을 구해보라고 귀띔하였으나 웃기만 할뿐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중 1582년 나이가 46살이 되였을 때에야 명경과(유교경전의 뜻을 밝히게 하는 과거시험)에 합격되여 승문원 정자로 임명되여 벼슬길에 나서게 되였다. 그후 전적랑서로 승급하였고 1587년에는 전라도사, 그 다음해에는 례조좌랑, 호조 좌랑을 거쳐 경성부 판관으로 임명되였으며 1년후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1591년 그의 나이 55살 되던 해에 조정에서는 그의 자질과 재능이 뛰여난것을 고려하여 의주목사로 임명하였다.

그후 1592년 4월 13일 임진조국전쟁이 일어나자 선조왕은 《내 일찌기 권률은 쓸만 한 인재라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에게 량남(호남 즉 전라도와 령남 즉 경상도)의 거진을 맡겨 적을 막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권률은 광주목사로 임명되였다.

권률은 임명을 받자 그날로 임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이때 그의 사위인 리항복(1556-1618년)이 승정원에서 일직을 서다가 장인에게 물었다.

《어째서 그다지 빨리 떠나려 하시오이까?》

그러자 권률은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라일이 이같이 급박하여 신하된 도리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때이다. 어찌 감히 한시각인들 지체하여 연약한 아녀자의 비겁한 태도를 취하겠는가.》

마디마디에 애국의 열의가 넘쳐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사람들은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권률은 즉시 말에 올라 임지로 떠났다.

그가 전쟁형편을 료해하기도 전에 선조가 서울을 떠나며 각 도에 《속히 군사를 모아 와서 숙위하라!》고 내린 령이 이르렀다. 남도의 지방군들이 자기 지역을 수비하도록 하지 않고 국왕 한사람을 위해 서도로 오게 한것은 봉건정부의 반인민성, 부패무능을 그대로 보여주는것이였다.

선조왕의 령에 호응하여 전라도순찰사 리광과 방어사 곽영은 북상할것을 계획하고 곧 군사 4만명을 모았다. 리광은 그가운데서 2만명을 거느리고 라주목사 리경록을 중위장, 조방장 리지시를 선봉으로 삼았으며 곽영도 2만명을 거느리고 권률을 중위장, 조방장 백광언을 선봉으로 삼아 길을 나누어 진군하였다. 리광은 룡안에서 강을 건너 림천, 온양 등지를 거치고 곽영은 전주로부터 려산, 공주 등지를 지나 직산에서 만났다. 이때 경상도순찰사 김수와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니 그 수는 5만명(6만명이라고도 한다.)이고 군사의 위용이 볼만 하였다. 이들은 함께 진군하여 수원에 진을 쳤다.

리광은 곽영에게 룡인의 유리한 지형에 먼저 진을 치고있는 적을 치게 하였다.

권률은 지형지물과 전국을 료해한데 기초하여 이렇게 제의하였다.

《적들은 이미 험한 곳에 의거하여 진을 쳤으므로 이를 올려다보며 치기는 어려운 형세이나이다. 지금 공은 경내를 소탕하고 들어가 도울 책임을 맡았으니 나라의 존망이 이번 출정에 달려있다고 할수 있소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신중하게 하여 만전을 도모해야 할것이니 지금 적과 싸우는것은 불가하옵니다. 마땅히 대군을 이끌고 바로 한강을 건너 림진강에서 적을 막으면 서쪽길은 저절로 견고해질것이고 군량길도 또한 통할것이라 그 형편에 따라 날랜 군사를 기르고 틈을 엿보며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 움직이는것이 옳을것이옵니다.》

그의 제의는 당시의 형편에서 일정하게 타당성이 있는것이였다. 하지만 리광은 권률의 제의를 외면하였다. 그는 이미 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가다가 벌써 함락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싸워보지도 않고 전주로 물러간것으로 하여 비난을 받고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조급해져 그때 어떻게 하나 대군을 거느린 기회에 《공》을 세워 명예를 회복해보려고 하였던것이다.

리광은 백광언이 지세를 살피고 돌아와 길이 좁고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서 쉽사리 진격할수 없다고 하였지만 성을 내며 진격하게 하였다. 곽영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갔다.

권률은 1592년 5월 5일 적을 깔보며 일을 서두르는 백광언과 리지시에게 《적들의 형세를 잘 모르니 가볍게 전진하지 말고 중위군이 오는것을 기다려 함께 싸우는것이 좋을것이다.》라고 권고하였다.

권률의 충고를 듣지 않은것으로 하여 그들은 적의 보루 10여보쯤 되는 곳에까지 갔다가 패하여 물러섰다. 다음날 아침 적들은 증강된 력량으로 불의에 3도군사를 들이쳤다. 결국 3도군사들은 패하여 리광은 전라도로, 윤국형은 공주로, 김수는 경상우도로 뿔뿔이 흩어져 돌아갔다.

싸움이 실패한것은 전적으로 무능한 지휘관들때문이였다. 3도순찰사들은 모두 문관출신들이라 군무에 밝지 못하였으며 게다가 비겁쟁이들이였다. 결국 많은 군사를 가지고도 명령체계가 정연하지 못하고 적을 경시하였으며 요새에 의거하지 않고 무모하게 공격을 하려 한것으로 하여 패한것이다. 류성룡은 《이야말로 옛사람의 이른바 군대행군을 봄놀이하듯 한다는 격이였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수 있으랴.》고 개탄하였다. 만일 그때 권률의 권고를 받아들였다면 이런 비참한 패배를 맛보지는 않았을것이다.

룡인싸움의 쓰라린 상처를 가슴에 새기고 권률은 광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앉아 짓밟힌 강토, 쓰러진 겨레의 원한에 찬 울부짖음을 외면할수 없었다. 그는 분연히 팔을 걷고 나서며 이렇게 자기 심정을 토로하였다.

《종묘와 사직이 불타 재가 되여버리고 상감께옵서는 파천하였는데 신하된 도리로서 어찌 가만히 앉아 나라가 망하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있으랴!》

그는 곧 관내에서 장정 500명을 모으고 린접한 군에 격문을 보내여 1,000여명의 군사를 얻었다. 그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경상도와의 경계지점에 진을 쳤다.

이때 리광은 권률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이전에 자기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아 패한데 대하여 뉘우친바가 있었는지 그에게 곧 도절제사의 직책을 맡기고 여러 고을의 군사를 통솔하여 힘껏 싸우도록 하였다.

권률은 7월에 동복현감 황진의 부대와 련합하여 전략적요충지의 하나인 리치에 진을 쳤다.

조선분할통치계획에 따라 전라도를 담당하게 된 고바야까와 다까가게의 왜군 제6번대가 전라도로 침공하려면 로령산줄기의 웅치와 리치, 소백산줄기의 팔량치를 넘어야 하였다. 팔량치를 넘어 남원으로 가려던 적들은 의령 솥나루에서 곽재우의병대에 의하여 격퇴당하였고 륙십령을 넘어 진안으로 들어가려던 적의 한 부대는 거창, 안의로 가는 길목인 우척현에서 김면의병대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6번대놈들은 할수없이 추풍령으로 해서 소백산줄기를 넘어 충청도 영동을 돌아 전라도 무주, 금산으로 쳐들어갔다. 고바야까와놈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안고꾸지 에께이에게 맡겨 룡담, 진안을 거쳐 웅치(곰치재)를 넘어 동쪽에서 전주를 공격하게 하고 제놈은 다른 한 부대를 거느리고 진산을 거쳐 리치(배티재)를 넘어 전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금산을 떠난 적의 대군이 리치에 당도하자 권률은 황진 등과 힘을 합쳐 종일 적들과 격전을 벌렸다. 권률은 진지를 종횡으로 누비며 비겁한 병사들의 전립에 칼로 표식을 해두었다. 그리고 전투가 좀 즘해지면 이들을 불러내여 처벌함으로써 군률을 엄격하게 세웠다.

황진이 부상을 입고 물러서자 권률은 칼을 비껴들고 큰소리로 호령하며 진두에서 싸움을 지휘하였다. 그의 용맹한 모습에서 힘을 얻은 군사들은 분발하여 싸웠다.

적들은 크게 패하여 많은 시체와 병장기들을 내버린채 황급히 뺑소니를 쳤다. 이날 싸움에서 죽은 놈들의 시체에서 흐르는 피로 하여 초목들에서는 피비린내가 풍겼다고 한다. 왜적들도 《조선에서 세번 큰 싸움을 하였는데 리치싸움이 가장 컸다.》고 하였다.

이 리치싸움은 행주싸움, 한산도싸움, 진주싸움과 더불어 임진조국전쟁의 4대첩(4개의 큰 승리)중의 하나로서 력사에 유명하다.

적들은 리치싸움이후 더는 전라도지방으로 침범해들어갈수 없게 되였고 아군의 군량공급은 잠시도 중단되지 않게 되였다. 이러한 성과를 이룩함에 있어서 권률의 공로는 적지 않았던것이다.

리치싸움이후 권률은 라주목사로 되였다가 곧 전라도순찰사로 임명되였다. 그는 방어사에게 리치령을 대신 지키게 하고 곧 전주에 이르러 도안의 군사 1만여명을 모집하여 절반을 방어사에게 주고 절반을 거느리고 정부가 피난간 서도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수도인 한성부근과 그 이북지역에는 일본침략군이 득실거리고있어 더 전진할수가 없었다. 이때 일본 고니시부대는 평양을, 구로다부대는 황해도를, 고바야까와는 개성을, 우게다는 한성(서울)을, 가또는 함경도를 차지하고있었다.

임금을 호위하기 위해 북상하던 여러 부대들도 모두 강화에 들어가 굳게 지키며 적의 예봉을 피하고있었다.

임진년도 다 저물어가던 섣달 어느 날 권률은 임금이 의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자기 계책을 말하였다.

《지금 평양 이남은 모두 적들이 점거하고있으므로 뚫고나가기가 어렵다. 한성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이를 회복하여 고니시로 하여금 서쪽으로 진출할 뜻을 버리게 하면 모든 적들은 무기력하게 될것이다.》

이 계획은 적들의 배후에 끊임없는 위협을 조성하고 퇴로와 군량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적들의 북상을 저지시키고 퇴각을 촉진시키며 정부의 위험을 막아낼수 있게 하는 전략이였다.

권률은 자기의 작전계획에 따라 수원 독성으로 진격하였다.

권률의 작전안에 대하여 선조왕은 적극 지지하면서 보검까지 보내주었다. 그리고 《모든 장수들가운데 명령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처결하라.》고 하였다.

이때 서울에 주둔하고있던 적장 우게다는 권률의 군세가 매우 정예한것을 꺼리여 군사 수만명을 오산을 비롯한 독성부근의 세곳에 배치하고 권률의 부대를 성밖으로 끌어내여 격파하려고 자주 도전을 걸어왔다.

권률은 적들의 약은 수를 꿰뚫어보고 적들을 최대한 피로케 하기 위한 소모전술을 썼다. 적들의 대군이 밀려들면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였고 적들이 물러가면 뒤따라가서 놈들의 약한 모퉁이를 치군 하였으며 날랜 군사들을 선발하여 적들이 향해가는 곳을 앞질러가서 그 선봉을 치고 돌아오게 하였다. 얼마후 기진맥진해진 적들은 밤에 병영을 불살라버리고 도망쳤다. 그리하여 경기도내에 퍼졌던 왜적들은 차례로 서울로 들어가버렸다. 이로부터 서쪽의 의주로 가는 길이 열리고 여러 고을들에서 의병이 떨쳐일어나 일시에 호응하게 되였다.

준엄하였던 시련의 해 1592년은 저물어가고 새해 1593년에 들어섰다. 새해에 들어서면서 전쟁형편에서는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년초부터 아군의 드세찬 반격전이 개시되여 1월초 평양에서 쫓겨난 고니시도, 1월말과 2월초 림명과 백탑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가또도 얼어드는 발들을 질질 끌며 서울로 밀려들었다. 고바야까와와 구로다 등 대장들도 서울에 몰켜들었다.

북으로부터는 아군이 파죽지세로 공격해오고있었다.

1593년 2월 권률은 수하 정병 4,000명을 나누어 전라병사 선거이에게 주어 병영을 금천에 두고 적을 누르게 하였으며 자신은 정예군사 2,300명을 거느리고 양천강을 건너 고양의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그리고 조방장 조경에게 성을 수리하게 하고 서쪽길을 굳게 막아 한성을 수복하려고 하였다.

권률이 행주산성에 웅거하여 서울을 수복하려 한다는것을 알게 된 적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적들에게는 이것이 저들의 잔등에 박히는 비수같이 여겨졌다.

하지만 그의 군사수가 적다는것을 알게 되자 의기양양해져서 북에서 밀고 내려오는 조선군사들이 당도하기 전에 먼저 행주산성의 권률의 부대부터 치려고 하였다. 하여 우게다(4대)는 고니시 유끼나가(1대), 이시다 미쯔나리(2대), 구로다 나가마사(3대), 깃까와 히로이에(5대), 모리 모또야스(6대), 고바야까와 다까가게(7대) 등 제노라던 적장들을 거느리고 3만명의 침략군을 긁어모아가지고 행주산성으로 공격해왔다.

행주성산은 한강변에 솟은 야산으로서 그리 높지 않았지만 동, 서, 북 세면은 경사가 급하고 남쪽 한면은 강에 닿아있었다. 자그마한 산성은 남북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먼 옛날부터 군사적으로 중시되고있었다. 둘레 1km의 외성과 고지주변에는 내성이 축조되여있어 2중방어벽으로 되여있었다.

권률은 조방장 조경에게 성을 보수하고 목책을 둘러치게 하였다. 변이중은 자기의 재산을 내여 300대의 화차를 새로 창안제작하여 권률에게 넘겨주었다. 이 화차는 차체는 철판으로 쌌으며 수레에는 승자총통 40개가 설치되여있어 련발로 600발을 쏠수 있는 위력한 무기였다. 이밖에 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와 화약도 충분히 마련해주었다.

2월 12일 적의 대군은 한성을 출발하여 홍제원으로부터 두패로 나뉘여 공격하여왔다.

권률은 군중에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령을 내리고 상대에 올라 바라보았다. 적들은 벌써 5리쯤 되는 언덕우에 가득 밀려와있었다. 이윽고 기병 1만여명이 들을 덮으며 와서는 일시에 포위하여 덤벼들었다. 뒤미처 당도한 적의 보병도 악악대며 기여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군사들은 크고작은 승자총통과 진천뢰, 지신포, 대발화, 중발화 등 각종 화약무기들을 연방 쏘았다. 우리 군사들이 날리는 화살과 돌들이 놈들을 쓸어눕히였다.

첫 전투에서 패한 적들은 세개 편대로 나뉘여 엇바꾸어가면서 공격해왔다. 성을 지키는 우리 군사들을 피로케 한 다음에 점령해보자는 심산에서였다.

성안의 부녀자들도 싸움에 떨쳐나서 치마폭에 돌을 담아 날라다 줌으로써 싸우는 군인들을 적극 도와주고 크게 고무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행주치마》라고 부르는 녀성들의 앞치마이름도 이 행주산성싸움에서 생긴것이라고 전한다.

악착한 적들은 죽는 자가 꼬리를 물었으나 시체를 끌어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적들은 이번에는 섶을 묶어 불을 달아 바람세를 타서 성책을 불태웠다. 우리 군사들은 물을 부어 불을 껐다. 이때 서북쪽을 지키던 승군이 조금 물러섰다. 권률은 검을 빼들고 싸움을 지휘하였다. 힘을 얻은 장수들이 결사적으로 싸워 적들을 내몰았다.

이렇게 되자 적들은 긴 나무로 높은 루차를 만들고 그속에 수십명의 조총수를 넣어 수백명이 메고 성가까이에 와서 총을 쏘아댔다.

권률은 포를 내다놓고 포전(포로 쏘는 화살)에 큰 칼을 달아매여 적의 루차를 쏘게 하였다. 칼 달린 화살들은 벽력같은 소리를 내며 날아가 루차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그우의 적들은 사지와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기여 날아떨어졌다.

화살이 떨어져갈무렵 경기수사 리빈이 강화도로부터 수만개의 화살을 배에 싣고 오자 장병들의 사기는 한층 고조되였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어두워질 때까지 적들은 8~9차례나 공격해왔으나 많은 주검만을 냈을뿐 성을 점령할수 없었다. 서울부근에 대기하고있던 아군부대들에 의하여 역포위에 빠질수 있다고 생각한 적들은 죽은 놈들의 시체를 네곳에 모아놓고 불태우고 황급히 도망쳤다. 이때 송장타는 냄새가 10리밖에까지 퍼졌다고 한다. 이 싸움에서 적의 총대장 우끼다 히데이에를 비롯하여 깃까와 히로이에, 이시다 미쯔나리, 마에노 나가야스 등 적장들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조방장 조경은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타격을 주었다.

다음날 아침 행주산성의 장병들은 전장을 수색하여 간밤에 적들이 미처 거두지 못한 시체 130여구를 거두어 목을 자르고 적이 버리고 간 수많은 군사장비를 로획하였다.

적들은 줄곧 행주싸움의 실패를 만회해보려고 대병을 이끌고 왔으나 성벽이 높고 군사들의 사기가 높은것을 보고는 한숨을 짓고 물러서군 하였다.

이 싸움이 바로 임진조국전쟁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전투들중의 하나로서 《행주대첩(행주큰승리)》으로 력사에 기록되여있다.

이 싸움을 승리적으로 결속하는데서 도순찰사 권률의 역할은 참으로 컸다. 이 전투에 참가하였던 고산현감 신경희는 임금에게 승전보고를 하면서 《권률이 직접 싸움을 독려하여 군사들을 진정시켰기때문에 군사들이 모두 죽기를 한하고 싸웠소이다. 장수가 만약 먼저 동요하였더라면 군사들이 모두 물에 빠져죽었을것이옵니다.》라고 말하였다.

행주산성전투후 명나라장수들은 《권률장군은 다른 장수와는 달리 조선에도 참된 장수가 있음을 외국인에게 믿게 하였다.》, 《왕국의 사직을 지탱한 충신》, 《중흥의 명장》이라고 칭찬을 마지 않았다.

누구든 권률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가 행주대첩을 거둔 장수가 아니냐?》고 할 정도로 그의 이름은 행주대첩의 대명사로 되였다.

행주산성싸움의 대승리는 비록 적은 병력이라 하더라도 군민이 한덩어리가 되여 유리한 지형을 잘 리용하여 림기응변의 전술로 싸운다면 그 어떤 강적도 능히 쳐부실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서울에 몰켜든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놈들의 퇴각을 촉진시켰으며 아군의 서울탈환을 위한 진격에 유리한 환경을 마련하였다.

그후 권률은 모래자루를 량식으로 가장하여 왜적을 유인해다가 섬멸하였다. 이것은 식량난에 허덕이는 적들의 심리를 리용한 전술로서 크게 성공하였고 명나라장수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파주산성으로 진을 옮기여 세차례에 걸치는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성을 사수하였다.

4월 18일에 적들이 한성에서 퇴각을 시작한 후 권률은 20일에 군사를 이끌고 제일먼저 수도로 진입하였다. 이어 그는 적을 추격하여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한강을 건너 추격전을 벌리려는데 뒤따라온 명나라군 유격장 척금이 가로막아나섰다. 명나라제독 리여송의 명령없이는 추격하지 말라는것이였다. 도대체 도망치는 적을 추격소멸하지 말라니 어떻게 된 일인가. 군사들의 불만과 의혹은 커갔다.

궁지에 몰린 적들은 명나라제독 리여송에게 화의를 청하며 추격을 모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군국사무를 총괄하던 도체찰사 류성룡은 명나라군제독 리여송에게 추격을 강하게 요구하며 한편으로 전라도순찰사 권률, 순변사 리빈, 경기도방어사 고언백 등 여러 장수들을 불러 추격을 명령하였다.

그런데 왜놈들과 강화담판을 벌려놓고 퇴로까지 열어준 명나라군 경략 송응창과 제독 리여송은 우리 군대의 추격까지 가로막아나섰다. 리여송은 《권률은 잘 싸우는 장수다. 만약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한다면 결국 큰 싸움이 벌어져 우리가 도모하는 화의는 와해되고말것이니 이를 막아야 하겠다.》고 하면서 밤에 가만히 척금을 시켜 한강의 나루배를 다 거두어 군사들이 건늘수 없게 만들고 또 제 마음대로 추격을 조직하였다고 지어 나무람까지 한것이다.

권률은 몹시 분개하였으나 두 나라사이의 관계를 고려하여 참고 군사를 돌리였다.

6월에 권률은 무능한 김명원대신 전선을 총 책임진 도원수로 임명되였다.

전쟁이 일시적으로 휴전기에 들어간 후 권률은 1595년 7월에 해임되였다가 다시 한성판윤, 호조판서, 충청도관찰사 등을 력임하였으며 1596년 1월에 도원수로 다시 임명되였다.

권률은 앞으로 적이 다시 침범할것이라고 예견하고 경계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후 권률은 1597년 2월 강화담판의 막뒤에서 침략준비를 해오던 왜적들이 다시 수십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쳐들어오자 도체찰사 류성룡과 협동하여 조선군사를 지휘하여 최후의 승리를 이룩하는데 기여하였다.

임진조국전쟁이 우리 인민의 승리로 끝난 다음해인 1599년 7월 그는 병으로 죽었다. 그때 나이는 63살이였다. 봉건정부에서는 그의 군공을 평가하여 공신칭호와 함께 령의정벼슬을 증직(죽은 후에 명예벼슬을 주는것)하였다.

임진조국전쟁을 승리적으로 결속하는데 기여한 장수의 한사람으로서 그는 후세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될만 한 투쟁경험들을 남겼다.

그는 언제나 앞장에서 대오를 지휘하였으며 조금도 주저하거나 동요하는 빛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장병들이 신심을 가지고 전투에 림하도록 하였다.

그는 적과의 싸움에서 지형지물을 잘 리용하는것이 중요하다는것을 잘 알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써먹는데 깊은 관심을 돌렸다. 리치싸움이나 행주산성싸움 등은 다 유리한 지형조건을 리용하여 적을 물리친 대표적인 전투들이였다.

권률은 군사를 적용하는데서 언제나 사사를 두지 않고 엄격히 법대로만 하였다. 이것은 군사들이 호령에 따라 일치하게 움직이게 하는데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무관이 싸움터에 나가기를 꺼려하면서 전주에 숨어서 명나라장수 송대빈에게 의지하고있었다. 권률은 전주에 와서 이 사실을 알고 당장 끌어내도록 하였다. 송대빈은 그를 살려주자고 애걸했다. 여느 장수 같으면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살려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률은 그 청을 뿌리치고 군률에 따라 처형하였다.

그후 처형된 자의 가족들이 정부의 요직을 지내던 윤두수에게 그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고 고소하였다. 권률의 공로를 시기하던 자들이 이를 좋은 기회로 여기고 그를 헐뜯기 시작했다. 그가 한때 도원수직에서 물러나게 된데는 이런 사정도 깔려있었다.

권률은 인재를 중시하고 잘 쓴 군사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군사적공적에서 가장 큰것의 하나로 일러주는 행주대승리와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가 군사 2,300명을 거느리고 양천강변에 이르렀을 때 인천 어느 한 촌에 산다는 서생이 그를 만나자고 하여 이런 의견을 제기하였다. 《용병하는 방도는 반드시 지리를 얻어야만 할줄 아나이다. 군대를 주둔할만 한 높은 언덕이 한곳 있으니 그야말로 병법에서 말하는 구지(적이 모를 깊은 곳)에 군대를 감추고 구천(가장 높은 곳)에서 행동할수 있는 곳이오이다. 부디 장군께서 몸소 살피시와 그 가부를 결정하소서.》

그리하여 권률은 그가 소개한 곳을 가보았다. 권률은 지리를 중시하고 또 어지간히 지형을 볼줄 아는 사람이였던지라 그곳이 진지로서 적합하다고 보고 그곳을 진지로 정하였다. 그곳이 바로 행주였다.

그 서생은 권률이 대적과 대결하였는데 적을 방어할 시설이 없는것을 우려하자 자신이 책임지고 훌륭한 방어시설을 꾸려놓았다.

적들과의 가렬처절한 싸움때 림기응변한 전법들도 많은 경우 그 서생이 고안해낸것이다.

패배하고 돌아간 적들이 성안의 장수들을 죽이려고 꾸민 모략도 서생에 의하여 적발되여 엄중한 위험이 미연에 방지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권률의 군사적성공이 그가 인재를 중시하고 군중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의 슬기와 재능을 남김없이 발양시킨데 있었다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권률은 통치계급의 한 성원으로서 계급적제한성을 가지고있었고 또 군사가로서도 일련의 결함들을 범하였다.

행주산성싸움에서 크게 승리하여 명성을 얻게 된 권률은 자만자족하면서 독선적이며 주관적인 행동들도 하게 되였다.

비록 일련의 결함들을 범하였지만 헌신적인 전투지휘로 명성을 떨친 그의 공적은 가리울수 없다. 일개 서생에 불과한 그가 의기를 떨쳐 리치와 행주성에서 거둔 대승리는 전쟁국면을 역전시키고 적의 배후를 견제하며 승리를 앞당기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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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아래 - - 2016-07-09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서 이해하기 좋습니다. 제가 원하던 국사책이네요.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근데 어째 이미지는 안보이네요. 당시 영토가 표시된 지도그림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관리자 - - - - 2016-07-09
이미지문제가 해결되였습니다.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다음편은 언제 올리나요.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력사이야기들을 많이 올려주세요. 명인전, 무술명인전, 감사합니다.
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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