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을 천거한 류성룡
 

 

명장을 천거한 류성룡 

 

류성룡(1542-1607년)의 자는 이현이고 호는 서애이며 본관은 풍산이다. 그의 아버지는 관찰사 중영이였고 강직하다는 평을 받았다.

류성룡은 1542년 10월 2일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6살때 벌써 《대학》을 배웠으며 젊은 시절에 경상도 도산에 가서 퇴계 리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류성룡은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 부정자, 홍문관 부수찬, 부제학, 상주목사, 경상감사, 례조판서, 대제학, 리조판서, 우의정, 령의정 등 중앙과 지방의 벼슬을 력임하면서 선조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강관으로 있을 때 임금의 물음에 응대하는것이 명백하고 론리적이며 의리가 분명한것으로 하여 당시 첫째가는 강관으로 임명되였다.

1585년 5월에 의주목사 서익이 류성룡을 큰 간신이라고 비난하였을 때 선조왕은 《류성룡도 군자이다. 내 생각에는 오늘날의 큰 현인이라고 말하여도 일없다고 본다. 그 사람을 보건대 함께 이야기해보게 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으로 탄복하는 때가 많다. 학식과 기상이 이와 같은데 큰 간신일리가 어디 있는가. 어떤 담이 큰 사람이 감히 이런 말을 하는가.》고 하였다. 류성룡이 선조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는것은 1589년 12월에 전라도의 유생 정암수 등이 그를 역적 정여립일당의 죄행을 제때에 바로잡지 못했다고 비난하였을 때 그를 옹호하고 다음다음날에는 특별지시로 리조판서로 임명한 사실로써도 잘 알수 있다. 선조왕은 1590년 11월에 류성룡을 우의정으로 임명하고 다음해 1월에는 특별지시를 내려 관리임명을 맡아보는 리조판서직을 겸임하게 하였다.

그는 임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명장 리순신을 천거하고 임진조국전쟁기간에는 전쟁전반을 돌보면서 일본침략자들을 몰아내고 전쟁의 승리를 이룩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1. 군사상의 공적 

 

류성룡이 군사상에 이룩한 가장 큰 공적은 무엇보다도 명장들을 천거한것이다.

전투에서 지휘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리조시기에 들어와서 문존무비를 국책으로 내세우며 문관들을 우대하고 지방의 군무를 보는 장수들조차 문관으로 임명하다나니 군력은 많이 쇠퇴하였다.

왜놈들의 해외침략위험이 날로 증대되고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이 거의 기정사실화되여가던 그때 군사에 밝은 훌륭한 인재를 천거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앞으로의 사태에 대처하는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류성룡은 선견지명의 안목을 지닌 정치가로서 이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통절히 느끼고있었으며 미룰수 없는 과제로 여기고있었다.

당시 그에게는 자기의 결심을 실현할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져있었다.

그무렵 통치층내에서는 당파싸움이 열기를 띠고있었다. 서인과 동인의 싸움이 치렬한 속에 서로 자파세력확장에 혈안이 되여있다나니 무능한 자도 큰놈만 업으면 인재가 되여 좋은 자리를 얻을수 있었다.

퇴계 리황의 문하에서 배운자들속에서 동인이 많았는데 이것으로 하여 류성룡도 자연히 동인의 대렬에 끼우게 되였다.

1591년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정철이 류배를 간 후 동인의 한사람인 리산해가 령의정이 되고 류성룡이 우의정으로서 리조판서를 겸하게 됨으로써 조정의 요직은 동인이 쥐게 되였다.

류성룡은 일본에 갔던 통신사로부터 정세보고를 듣고 방비문제를 위하여 밤낮 걱정을 하였으며 령의정과 한자리에서 일본의 침략이 있겠는가 없겠는가를 론의할 때 《내 생각에는 왜병이 반드시 침략할터이니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류성룡은 방비대책의 일환으로 진관제도를 다시 복구할것을 제의하는 한편 임금에게 유능한 장수를 요충지에 배치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임금이 동의하자 그는 장수감으로서 리순신을 추천하였다.

정읍현감으로 있던 리순신은 진도군수로 전임되였다가 부임하기 전에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로, 미처 부임도 하기전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였다.

사간원의 관리들이 리순신의 《순서를 뛰여넘는》 임명을 놓고 취소할것을 제의하였지만 선조왕은 류성룡을 믿었고 리순신의 재능도 어느 정도 알고있었던지라 고쳐 임명할수 없다고 딱 잘라 대답해주었다.

리순신이 바다의 제왕으로서 한산도 앞바다, 부산포, 명량해협, 로량해전들에서 크게 승리하고 나라에 닥쳐온 엄중한 위기를 가시는데 기여한것은 명장을 추천한 류성룡의 공적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류성룡은 리순신의 운명도 극력 지켜주었다.

리순신의 공을 시기한 자들이 임금에게 계속 모함하는 말을 하여 선조왕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였다. 한번은 선조왕이 류성룡에게 이렇게 물은적이 있었다.

《도대체 리순신은 어떤 사람인가. 근신들이 모두 그가 싸움을 잘하지 못하고 일본수군을 무서워한다니 어찌된 일인고?》

이에 대하여 류성룡은 《순신은 제 동네사람이옵니다. 신은 어릴 때부터 그를 잘 알고있사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꼭 대장이 되겠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는 글도 잘할뿐아니라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있사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조선수군을 해치려는 왜놈들의 간계와 권력욕에 환장한 원균의 모함, 그와 결탁한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의 참소에 의하여 리순신이 삼도 수군통제사자리를 내놓고 사형까지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적이 있었다.

당시 전쟁상황에서도 통치배들사이에는 당파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지고있었다. 류성룡은 그때 동인에서 갈라진 남인의 령수라는 혐의를 받고있었던지라 자기가 개입하면 당파의 립장을 대변하는것으로 될가봐 주저하였다. 더구나 그의 성격이 원래 근신하고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는것이였던지라 나서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미 우의정인 리원익이 리순신을 비호하는 립장을 취하였으므로 류성룡은 판중추부사 정탁(1526-1605년)을 내세웠다.

정탁은 《리순신은 명장이라 죽여서는 안되옵니다. 군사상의 리해관계는 멀리서 생각하기 어려운것인바 그가 진격하지 않은것은 필시 짐작이 있었을것이니 관대하게 용서하여 뒤날 공을 세우도록 하기 바라옵니다.》라고 제의하였다. 결국 리순신에 대한 사형은 철회되고 백의종군하게 되였다.

류성룡은 리순신만이 아니라 권률도 천거하였다.

권률은 임진조국전쟁시기 리치와 행주에서 큰 승리를 이룩함으로써 명장으로서의 명성을 떨치고 후에는 오래도록 도원수직을 맡아보면서 전쟁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이밖에도 류성룡은 전쟁중에 리일, 신립, 고언백, 김응서, 정문부 등 장수들을 천거함으로써 전쟁승리에 결정적역할을 하였다.

류성룡의 군사적공적은 다음으로 왜놈의 간첩들을 잡아없앤것이다.

왜놈들은 전쟁초기 아군의 여러 진영들에 간첩들을 묻어놓고 군사기밀을 렴탐하고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592년 11월 18일 류성룡이 안주에서 군관 성남을 시켜 전령을 가지고 수군장 김억추에게로 가서 어떤 일을 처리할데 대한 밀약을 하려고 하였다. 그때 성룡은 성남에게 《엿새안으로 회답을 보내게 하라.》고 당부하였는데 기일이 지나도 회답이 오지 않았다.

류성룡은 몹시 의심스러워하면서 다시 지시를 내려 문책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미 22일에 우방어사가 있는 곳에서 공문을 작성하여 보냈다는것이였다. 결국 중간에서 행처불명이 된것이였다.

류성룡은 그러지 않아도 적들이 최근에 우리 나라의 모든 정형을 미리 알고있고 지어는 산천의 형세와 도로형편, 행군날자까지 모르는것이 없으므로 어떤 간악한 자들이 적의 앞잡이로 되지 않았는가 하여 의심하던터였다.

그는 연줄을 따라 조사하여보았다. 공문을 가지고 나온 자는 삼화수군 김순량이라는 자였다. 그자는 《공문과 전령은 숙천에 있는 원수에게 바쳤고 또 거기에서 비밀공문을 받아가지고 가다가 도중에서 한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평양성안으로 들어갔더니 적장이 공문을 보고 찢어버렸으며 저는 이틀동안 그곳에서 묵은 다음 소를 끌고 성밖에 가서 풀을 베다가 그 기회에 도망쳐왔소이다.》 하고 횡설수설하였다.

그의 말이 너무 황당하여 류성룡은 자기가 직접 끌어다놓고 곤장을 치게 하며 사실을 자백하게 하였다. 그제서야 그자는 《제가 7월에 포로로 잡혀 평양으로 끌려갔는데 성안에 왕래하다가 삼화고을의 관노 막동이와 평양 사노 서한룡 그리고 잇복 등과 함께 동류 40여명과 결탁하였소이다. 모두 적의 앞잡이가 되여 처음부터 드나들면서 우리 나라의 사정을 렴탐하기 위하여 어떤 진영에든지 안 가는데가 없이 싸다니였는바 그가운데서도 순안지방을 더욱 많이 왕래하였고 안주와 의주 등지에도 왕래하는 자가 있소이다. 저는 처음 우방어사에게서 전령과 공문을 받아가지고 곧바로 평양으로 들어갔더니 적장이 공문을 보고는 찢어버리고 전령을 자기가 받아둔 다음 이어 서한룡 등에게는 명주 5필을, 저에게는 소 한마리를 상으로 주어 다시 들어오도록 하였소이다. 서한룡은 대략 초열흘께 나와서 정탐을 하게 될것이옵니다.》라고 자백하였다.

깜짝 놀란 류성룡은 간첩들이 이렇게 여러곳에 싸다니도록 모르고있은 자기를 질책하며 간첩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비밀대책을 세웠다.

잇복이라는 자가 우방어사의 매복군사에게 잡혔다. 류성룡은 각 진지들에 비밀통지를 보내여 감시사업을 더욱 철저히 하도록 하며 간첩들을 모두 체포하게 하였다. 하여 적지 않은 간첩들이 체포되였다.

안주성밖에서 순량의 목을 베였다는 소문을 듣고 살아남은 놈들도 모두 얼혼이 나가 흩어져 몸을 숨기였다.

간첩들을 체포하고 모두 숨어버리게 한 군사적의의에 대하여 류성룡은 이렇게 보고하였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명나라군대가 청천강을 건넜지만 적들은 대군이 이르는것을 알지 못하고… 이튿날 평양을 진격포위하여 성공할수 있었다. 만일 적의 간첩이 그때까지 있어서 미리 준비를 하였다면 일이 어떻게 되였을는지 알수 없었을것이니 간첩이 군사기밀에 주는 영향은 이러한것이옵니다.》

이처럼 류성룡은 간첩의 위험성을 제때에 인식하고 미리 대책을 세워놓음으로써 아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이후 전과를 확대해나가는데 기여하였다.

류성룡의 군사적공적의 다른 하나는 훈련도감의 창설을 발기하고 지도함으로써 우리 군사의 질적수준을 높이고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울수 있도록 준비시킨것이다.

류성룡이 전쟁과정을 통하여 통절하게 느낀것은 왜놈들이 우수한 조총으로 무장하였고 또 단병접전을 잘하는 조건에서 적들의 이러한 장끼에 대처하자면 잘 훈련된 군사를 준비시켜야 한다는것이였다.

류성룡은 1593년 4월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군사를 훈련시킬데 대하여 제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서울안에서 모집한 70여명에게 밤낮으로 무기쓰는 기술을 익히게 하였다.

선조왕은 비변사에 명령하여 도감을 설치하고 윤두수로 하여금 그 일을 맡아보도록 하였다가 1593년 10월에 류성룡을 도감의 도제조로 임명하였다.

류성룡은 큰돌을 들고 담장을 뛰여넘을수 있는 자들을 도감에 받아들이게 하였다고 한다.

도감이 제도적으로 완비된것은 1594년이였다고 보인다. 도감에 입대한 장정들로서는 유생, 한량, 량인, 아전, 공노비, 사노비 등 각계각층이였는데 다수를 차지한것은 량인과 노비신분의 장정들이였다.

류성룡은 필요한 포수와 살수의 수를 채우기 위해 도감에 소속된 화포군으로서 재주가 뛰여난 자들가운데서 관노, 사노는 량인으로 만들고 량인인 경우에는 금군으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선조왕의 허락을 받아 하달하였다. 이 제의를 귀띔한것은 류성룡이 데리고 다니던 반당(시중군)이였다고 한다. 그러자 량인으로 되려는 노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미 훈련도감에 속해있던 노비들의 훈련열의도 높아졌다.

훈련도감이 창설된지 1년도 못되여 그 수는 몇천명에 달하였다.

류성룡은 조총사격연습에 깊은 주의를 돌리고 필요한 화약을 해결하기 위해 적들에게 복무하였던 군기시의 대풍손이라는 자를 특별히 용서해주는 조치도 취하였다. 그자는 감격하여 열성껏 일하였다. 하여 하루에 몇십근씩 생산되는 화약을 각 부대에 분배하여 밤낮 사격연습을 시켜 우수하고 락후한 순서로 상벌제도를 수립하였는데 한달쯤 지나서는 날아가는 새도 맞히였다. 1594년 8월 항복한 왜병 38명을 데려다 조총사격을 시켰는데 과녁을 맞힌 자가 2명이고 나머지는 다 맞히지 못하였다. 명중시킨 자도 우리 나라 포수들보다 훨씬 못하였다.

류성룡은 선조왕에게 글을 올려 군량대책을 세우고 군대를 더 모집하여 1만명을 채워 병영 다섯을 두고 한영에 2,000명씩 소속시키고 해마다 반수는 서울에 남아 훈련하며 반수는 시외에 나가 공지를 골라 둔전을 운영하고 곡식을 저장하여 번갈아 몇해만 계속하면 군대와 군량의 원천이 풍부해지고 나라가 튼튼해질것이라고 제기하였다. 선조왕은 그럴듯이 여겨 병조에 내려보냈으나 질질 끌며 즉시 집행하지 않아 결국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류성룡의 노력과 도감에 소속된 군인대중의 열의에 의하여 훈련도감의 군사는 질적으로나 량적으로 강화되였다. 국왕자신도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일찌기 있어보지 못한 군사이다.》라고 하면서 몹시 기뻐하였다.

훈련도감의 창설은 중세군사제도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무엇보다도 봉건국가의 급료에 의해 유지되는 직업적상비군이 출현했다는것이다.

훈련도감의 군사는 또한 파총, 초관과 같은 고정된 지휘관들의 일상적인 지휘를 받음으로써 전투력이 더욱 강화되였다. 이러한 군대를 속오군(고정된 군인들이 대오에 배속되여있는 군대)이라고 불렀다. 지방들에서도 속오법에 의하여 부대들이 편성되였다.

그리고 훈련도감의 군대에서는 검과 창으로 무장한 살수와 활을 가진 사수, 총으로 무장한 포수 등으로 명백히 구분되여있었으며 해당 병종의 부대들에서는 전문적인 훈련이 실시되도록 되여있었다.

중앙군과 지방군에서 속오법이 적용되면서 병종이 구분되고 화력무기의 의의가 강화됨에 따라 전투서렬편성과 전법에서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였다. 이전에는 전투서렬에서 병사들이 어깨가 맞닿게 대렬을 짓는 방진밀집서렬을 적용하였다면 새로 편성된 속오법에서는 아직 밀집대형의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병사들사이의 간격을 넓게 두는 소산대형(오늘날의 산개대형과 비슷한것)으로 점차 넘어가게 되였다.

이것은 화력무기가 출현한 조건에서 피해를 덜 받도록 전투대형이 고쳐진것이다. 또한 전투방법에서도 무장장비에 따라 병종이 구분되여있었으므로 공격해오는 적이 먼 거리에 있을 때에는 먼저 조총을 쏘고 그다음에는 활을 쏘며 가까운 거리에 오면 창과 칼로 무장한 살수들이 주로 적과 맞붙어 싸우게 되여있었다.

훈련도감이 설치되고 조총, 칼, 창 등의 무기를 익힐데 대한 여러가지 장려조치가 취하여지자 전국의 인민들속에서는 그 무기에 정통하려는 열의가 급속히 높아졌다.

1597년 12월말부터 1598년 1월초사이에 벌어진 아군련합군의 울산성공격시에 훈련도감군의 투쟁모습을 목격한 명나라장수들은 훈련도감의 군사 1,000명은 명나라군사 5,000명보다 낫다, 포를 쏘는 절강군사들보다 뛰여나게 우수하다고 평가하였다. 포를 쏠줄밖에 모르는 절강군사들에 비하여 훈련도감의 군사들은 말달리기, 활쏘기, 포쏘기 등 여러 무술에 모두 능했기때문이였다.

이처럼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우리 나라 군대를 량적으로 장성시키고 질적으로 강화하여 그 전투력을 높인것은 류성룡의 군사적공적이라고 할수 있었다.

이밖에도 류성룡이 전쟁전반을 맡아본 수석대신으로서 임진조국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기여한 군사적공적들은 적지 않다.

그는 대중이 전쟁에서 노는 역할을 깊이 인식하고 대중의 힘을 불러일으킬것을 주장하였으며 적아간의 력량관계와 준비정도를 고려한데 기초하여 《적과 싸우는데는 구름처럼 모였다가 새처럼 헤여져서 경쾌한것이 제일이다.》고 하면서 우리 나라의 지형을 잘 리용하여 싸울데 대한 전술적인 방안들도 제시하였다.

그는 또한 강한 인내력으로 외교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조선과 명나라군이 합심하여 공동의 적인 왜적을 쳐물리치도록 하였다. 그는 명나라군이 단독으로 일본침략군과 강화담판을 벌려놓으면서 조선군대는 꼼짝 말고 있으라고 하자 그것을 견결히 반대하면서 거만한 명나라장수들과 맞섰다.

령남사람들은 매사에 꼼꼼한 그를 두고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속일수 없었다.》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도안의 백성들은 모두 달려와 통곡하면서 《류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것이다.》고 하였던것이다.

류성룡은 통치계급의 한사람으로서 계급적제한성을 가지고있었지만 임진조국전쟁시기 군국지사를 도맡아안고 불타는 적개심으로 군대와 인민을 이끌어 강토를 수호하고 나아가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타고앉으려던 왜놈들의 어리석은 망상을 짓부셔버리는데 기여한 정치군사가였다.

그는 1598년 12월 강화문제와 관련하여 북인들의 공격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 1599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는 전쟁과정에 겪은 성공과 실패의 자취를 더듬어보면서 반성하고 교훈을 찾으려는 의미에서 《징비록》을 편찬하였다.

1604년에 그는 다시 복직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였으며 1607년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하지 않고 그해 5월 6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공로를 평가하여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저서로 《징비록》과 《신종록》, 《영모록》 등이 전해진다. 

 

2. 《징비록》에 반영된 군사사상 

 

군사정치가로서의 류성룡의 면모는 그의 저서 《징비록》에 반영되여있다.

《징비록》은 임진조국전쟁시기 중앙정부의 수석대신이였던 류성룡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체험한 사실들을 중심으로 서술한 전쟁기록이다.

그는 이 책머리에 붙인 자기의 서문에서 《지난 일을 경계삼아 닥쳐올 일을 조심한다.》고 한 유교경전의 격언을 따서 자기의 집필목적을 표명하였다. 동시에 이 뜻으로 책이름까지 삼았으니 한마디로 이 전쟁으로부터 경험과 교훈을 찾아야 된다는것이였다.

《징비록》은 류성룡이 죽은 후 30여년이 지난 1643년경에 그의 후손들에 의하여 경상북도 안동에서 목판본으로 출판되였고 그후에도 여러차례 출판되였다.

《징비록》의 판본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 체계에 따라 두가지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16권으로 된 간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 16권으로 된 책에서 《근폭집》, 《진사록》, 《군문등록》 등 문서집을 뽑아버리고 본문부분인 1~2권과 책의 마지막부분인 《록후잡기》 한편을 첨가하여 발간한 간략본이다.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운 임진조국전쟁은 당시 나라의 운명과 관련된 큰 전쟁이였고 이 전쟁에 관한 사료로서는 《징비록》에 비길만 한 책이 없으므로 이 책은 류성룡의 문집인 《서애집》과 함께 국내외의 주목을 끌게 되였다. 하여 1695년 일본에서도 출판되였다. 한편 1930년대에 저자가 쓴 이 책의 초본이 발견되여 주체25(1936)년에 《초본징비록》이라는 이름으로 영인발간된 일이 있다.

《징비록》에는 그의 군사리론이 잘 반영되여있다.

그는 전쟁에서 장수의 역할을 중시하였다.

《군사란 일정한 정세가 없으며 전술이란 고정된 법이 없고 시기에 맞추어 사변에 대응하고 진공, 퇴각, 집합, 분산 등 한없이 기묘한 전술이 오직 장수 한사람에게 달렸을뿐인것이다. 그렇다면 천가지 만가지의 말과 계책은 다 쓸데없고 오직 장수로서의 자격자를 만나는데 있는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대체로 국가에서는 평화시기에 장수를 선택하고 전쟁시에 장수를 임명할것이요, 선택은 엄격하게, 임명은 책임제로 하는것이 중요한 문제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류성룡은 군사에서 명령지휘체계를 통일시키는 문제에 각별한 주의를 돌렸다.

그는 당시 명령지휘체계가 혼란된 사실에 대하여 《여러 도에는 순찰사가 있는데다가 또 감사가 있고 거기에 또 소모관이 있어서 명령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어디에 복종해야 될지 알수 없게 되여있다.》고 개탄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군무를 처리하는데는 원칙이 있는바 첫째는 명령계통이 단일해야 하며 둘째는 상하부의 편제가 분명해야 하며 셋째는 상과 벌을 반드시 실시하는 문제》라고 하였다.

류성룡이 제승방략대신 진관제도를 다시 받아들이자고 한것이나 훈련도감을 창설하고 군대편제를 개선한것 등은 그의 이러한 견해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진관제는 지방군을 주진-거진-제진의 명령체계에 따라 동원하게 되여있는 제도였다. 진관제는 일정한 정도의 상비군을 확보하는 조건에서만 움직일수 있었다. 그리고 16세기중엽에 이르러 군적이 장부상으로만 있었지 실지 군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진관제를 운영할수 없었다.

이리하여 림시방편으로 고안해낸것이 제승방략제였다. 이것은 진관제와 군적에 구애되지 않고 사변이 발생하면 긁어모을수 있는 모든 장정들을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그 고을의 원이 통솔하는것이 아니라 일부는 그 지방의 병마절도사에게 속하게 하고 일부는 서울에서 림시로 임명되여 파견되여가는 순변사, 방어사 등에게 소속되게 하는것이였다.

이 제도는 상비적인 전투대오와 고정된 지휘관이 통솔하는 경우와 같은 충분한 전투준비와 원만한 전투지휘를 보장할수 없었고 중앙에서 파견되여가는 지휘관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하였으므로 제때에 전투를 전개할수도 없는 본질적인 약점들을 가지고있었다.

정연한 통수체계와 명령체계가 없어진 지방군의 이러한 동원방법이 16세기후반기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였다.

류성룡은 제승방략제는 《일단 긴급한 일이 생기면 원근이 모두 함께 움직이며 장수없는 군대를 들판가운데 모아놓고 천리밖에서 오는 장수를 기다리게 하니 장수는 때에 맞추어 오지 않고 원쑤의 칼끝은 이미 림박하여 군사의 마음이 동요하니 패배하지 않을수 없는 동원체계》라고 비판하고 진관제를 복구할것을 주장하였다.

류성룡은 훈련도감을 창설함으로써 직업적인 상비군을 조직하고 고정된 장수에게 고정된 부하를 거느리게 하는 제도를 세워 군대의 전투력을 강화할수 있게 하였다.

류성룡은 적을 알고 자기를 알아야만 싸움에서 승리할수 있다는 립장을 견지하고있었다.

그는 적들의 우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이며 그에 비한 아군의 약점과 우점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데 기초하여 전술적인 방안들을 제기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오래동안 평화롭게 지내다가 불의에 전란을 당하여 갈팡질팡하는 사이를 리용하여 적들이 파죽지세로 공격한것은 군사가들의 훌륭한 전술이고 적들의 교묘한 술책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적들이 늘 승리한 위력만 믿고서 뒤일을 생각지 않고 여러곳으로 갈라져서 침공한것은 잘못된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사방에서 일어나는 우리 인민들의 의병활동에 의하여 적들은 앞뒤가 서로 돕지 못하여 필경은 도망치지 않을수 없었다고 하였다.

적아간의 전투경험과 책략을 총화하면서 그는 장수다운 사람이 하나 있어 길게 뻗친 놈들의 전선을 토막내여 허리를 자르는 전술을 평양에서 실행했더라면 대병력을 앉아서 소멸할수 있었고 서울에서 썼다면 적들의 수레바퀴 한쪽도 남겨보내지 않았을것이라고 개탄하였다.

류성룡은 왜놈들의 전투방식을 연구한데 기초하여 놈들이 공격전에 능숙하고 무기가 우수하므로 아군이 넓은 들판에서 량군이 마주 대치하여 싸우는 법대로 한다면 대항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는 지리조건을 타산하여 험악한 산굽이든가 밀림이 우거진 지대를 차지하고 사수들을 군데군데 매복시켜 적들에게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량쪽에서 집중적으로 사격하면 놈들이 아무리 조총과 창, 칼을 가졌더라도 다 소용이 없게 되고 대승리를 거둘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실례를 들어가며 지형조건을 잘 리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데 승패가 달려있다는것을 강조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왜적을 막는데서 성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여러차례 강조하면서 특히 산성을 잘 꾸리고 청야전술을 잘 쓸데 대하여 제기하였다. 그리고 민심이 전쟁승패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하고 농사를 장려하고 부역을 덜어주며 상벌제도를 공정하게 할데 대하여 제의하였다.

《징비록》에 반영된 그의 군사리론을 종합해보면 첫째는 인재를 중시해야 한다는것, 둘째는 명령지휘체계를 정연하게 세워야 한다는것, 셋째는 적아간의 력량관계, 전투방식을 잘 파악한데 기초하여 구체적인 전략전술을 세워야 한다는것, 넷째는 요해지를 장악해야 한다는것, 다섯째는 민심을 얻어야 한다는것이다.

이처럼 《징비록》은 저명한 군사정치가로서의 류성룡의 군사리론을 잘 보여주고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그러나 그 역시 량반지주이며 봉건관료의 한사람이였던것만큼 철저히 통치계급의 립장에서 또 봉건유교사상에 립각하여 인민대중의 애국투쟁을 왜소화하고 국왕이나 량반통치계급의 역할을 중시하는 등의 결함들도 발로시켰다. 그리고 자기의 힘보다도 외부의 원조에 큰 기대를 거는 사대사상에 혹심하게 물젖어있었다. 한편 그자신이 동인(남인)에 속해있었으므로 당파적편견에서 사물을 고찰하고 평가하는 결함도 범하였다.

비록 일련의 결함들도 범하였지만 전쟁의 운명을 걸머지고 정치, 군사, 외교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적지 않은 공적을 세운 류성룡은 단군민족사에 한페지를 차지할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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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아래 - - 2016-07-09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서 이해하기 좋습니다. 제가 원하던 국사책이네요.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근데 어째 이미지는 안보이네요. 당시 영토가 표시된 지도그림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관리자 - - - - 2016-07-09
이미지문제가 해결되였습니다.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다음편은 언제 올리나요.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력사이야기들을 많이 올려주세요. 명인전, 무술명인전, 감사합니다.
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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