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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제왕 리순신
임진조국전쟁(1592-1598년)의 승리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능숙한 지휘와 뛰여난 전략전술로 군사적공적을 세운 많은 애국명장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되는것은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왜적의 함대를 쥐락펴락한 바다의 제왕 리순신일것이다. 리순신은 훌륭한 군사적지략과 능숙한 지휘로 군민의 애국적열의를 불러일으켜 약한 수군병력을 가지고도 전라도 물목을 지키고 한산도에서 일본수군을 전멸시킴으로써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나아가서 적들의 《수륙병진》계획을 파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 애국으로 수놓아진 한생
리순신(1545-1598년)의 자는 여해이고 본관은 덕수이다. 그는 1545년 3월 8일 한성(서울) 건천동에서 리정의 셋째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임신중에 있을 때 하루는 시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귀한 아이를 낳을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지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리순신은 철이 들면서부터 두 형과 함께 서당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재주가 있어 글공부로 성공할수 있을것이라고 기대되였다. 하지만 그는 항상 무예를 배우고싶어하였다. 그는 아이적부터 영특하고 잘게 놀지 않아서 여러 아이들과 놀 때에는 반드시 군대놀음을 하고 그 군대놀음에서 반드시 대장으로 추천되였다. 동네간에 불공평한 일이 생기면 약한 편을 돕기때문에 동네사람들이 어려워하였다. 나무를 다듬어 활과 화살을 만들어가지고 놀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그의 눈을 쏘려고 하기때문에 어른들가운데서도 겁이 나서 그의 집문앞을 지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리순신은 좀 커서는 성격을 죽이고 례절을 지키면서 글공부를 하였으나 대의만을 짐작하는데 그치고 전문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1566년 22살 나던 때부터 무술을 익히기 시작하였는데 힘으로 보나 말타고 활쏘는 재주로 보나 누구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성격이 엄숙하고 강직하여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저들끼리는 종일 서로 롱담을 하면서도 순신에게만은 너나들이를 못하고 항상 존경하였다. 1572년 8월 훈련원 별과시험을 보던중 말을 달리다가 미끄러져서 왼쪽다리뼈를 분질렀다. 그는 한다리로 일어서서 버드나무를 꺾고 껍질을 벗기여 상처를 동여매였다. 과거시험 보는 마당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기였다. 1576년 2월 식년과거시험(4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보이는 과거) 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임명되였다. 그때 리후백이 함경감사가 되여 각지를 순회하면서 주둔부대의 장수들에게 활을 쏘게 해보고 잘못 쏘는 사람들에게 곤장을 안기였다. 그 곤장을 면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는데 동구비에 이르러서는 본래부터 리순신의 이름을 들어 알고있었던지라 매우 친절하게 대하였다고 한다. 리순신은 1579년 2월에 훈련원 봉사로, 10월에는 충청도 절도사의 막하 군관으로, 1580년 7월에는 발포수군만호로 임명되였다. 1583년 7월에 함남도절도사 리용이 임금에게 청하여 리순신을 자기 막하에 데려다 두었다. 10월에 건원보의 권관으로 임명되였다. 그때 녀진족 을지내가 국경을 소란스럽게 굴었지만 조정에서는 걱정만 하고 토벌하지 못하였다. 그러던것을 리순신이 계책을 써서 유인하여 사로잡아죽였다. 1586년 1월 사복시 주부로 임명되였던 리순신은 녀진족의 침입이 빈번하므로 다시 조산병마만호로 전임되였다. 8월에 녀진족이 록둔도를 침범하는것을 물리치고 그 괴수를 쏘아죽였으며 잡혀가던 둔전군 60여명을 되찾아왔다. 원래 리순신은 록둔도의 둔전관을 겸하고있으면서 이 섬이 멀리 외따로 있다고 증원을 요청하였었다. 그런데 병사 리일은 그 청을 듣지 않았으며 일이 터지자 자기의 죄를 면해보려고 모든 책임을 리순신에게 들씌워 처형하려고 하였다. 리순신은 리일의 거짓보고로 하여 백의종군명령을 받았다. 1589년 2월 전라도순찰사 리광이 리순신을 천거하여 자기 막하의 조방장으로 두었다. 그해 7월에는 선전관으로, 12월에는 정읍현감으로 임명되였으며 정치를 잘하여 신망을 얻었다. 그때 잠시 태인현감을 겸임하게 되였다. 그가 태인현에 가보니 원이 오래동안 없었기때문에 서류가 잔뜩 밀리여있었다. 리순신이 하나하나 처리하는데 마치 물흘러가듯 하여 백성들이 기뻐하면서 어사에게 그를 태인으로 옮겨달라고 청원했다고 한다. 나라방비와 관련하여 군사인재를 천거할 때 리순신과 한고향내기이고 그의 재능을 잘 알고있는 류성룡이 그를 천거하였다. 1590년 7월에 리순신은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로 임명되였으나 대간들이 원을 자주 바꾸는것은 좋지 않다고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다시 8월에 직품을 당상으로 올리고 절충장군으로 임명하였으며 만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전임되였으나 또 대간들이 너무 갑자기 벼슬을 올린다고 반대하여 그대로 눌러앉고말았다. 1591년 2월에 진도군수로 임명되였다가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전임되고 또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급되였다. 사간원에서 순서를 뛰여넘어 수사로 임명한것은 잘못되였다고 제의하였으나 선조는 리순신이 넉넉히 그 임무를 감당해낼수 있다고 하면서 사간원의 제의를 부결하였다. 리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후 왜적이 반드시 쳐들어올것이라고 예견하고 장병들과 인민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창발성에 의거하여 함대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각종 전선들과 무기, 군사시설들을 부단히 점검하고 정비보강하도록 하였으며 군률을 엄격히 세우고 병사들의 훈련에 깊은 주의를 돌렸다. 그가 지은 《란중일기》에 의하면 그는 1592년 1월부터 4월 15일까지 103일 기간에(리순신이 왜적의 침입통보를 처음으로 받은것은 4월 15일이였다.) 사정이 있어 12일간 쉰것을 제외하고는 26회의 현지순찰과 28회의 활쏘기연습 등 싸움준비로 날과 달을 보내였다. 리순신은 적아를 깊이 연구하고 그에 맞는 군사적대책들을 강구하였다. 그는 조선수군의 장점은 화포를 가진것이고 약점은 훈련되지 못하고 조직적인 행동이 부족한 점이라는것, 일본사무라이들은 도창에 의한 돌격전법과 불의타격전법을 쓰는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무기고에서 녹쓸고있던 화포를 꺼내여 수리정비하거나 새로 개조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병사들이 화포와 화살을 능숙히 다룰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총통들의 사정거리가 대체로 1~4km정도로서 사거리가 100m정도인 왜적의 조총보다는 우수하지만 당시는 조준경이 없는 유치한것이고 또 흔들리는 배우에서 쏘아야 하므로 숙련되지 못하면 막대기보다도 못할수 있었다. 또 접현전이나 함상전에서 조총은 한발 재우는데 20초가 걸리므로 그사이에 여러발 쏠수 있는 활이 유리하였지만 역시 잘 쏠줄 아는것이 중요하였다. 때문에 리순신은 장병들의 활쏘기연습과 화포쏘는 훈련에 관심을 돌렸던것이다. 리순신은 왜놈들의 돌격전법을 좌절시키고 공격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리조초기 왜구와의 싸움을 위해 창안제작되였던 거북선을 더욱 훌륭하게 개조할 구상을 하고 라대용과 그의 사촌동생 치용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등에 2~3mm 두께의 장갑을 해씌운 거북선은 세계최초의 철갑선으로서 전쟁이 일기 이틀전인 4월 11일에 제작이 완료되였다. 전쟁초기 우리 수군에는 2척의 거북선이 있었고 전쟁 전기간 3척이 전투에 리용되였던것으로 보인다. 리순신은 쇠바줄을 엮어 좌수영 앞바다에 늘이는 조치도 취하였다. 리순신의 옳은 군사적조치와 장병들의 헌신적노력에 의하여 전라좌수영함대는 무적의 함대로 준비될수 있었다. 1592년 4월 리순신은 왜적이 끝내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놈들의 《수륙병진》계획을 파탄시킬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때 경상도수군은 좌수사 박홍과 우수사 원균의 무능과 비겁성으로 하여 큰 싸움 한번 변변히 못해보고 붕괴되였다. 수하의 전함 70여척(100여척이라고도 한다.)과 화포, 병기들을 모두 바다속에 처넣고 비장 리영남, 리운룡 등과 함께 4척의 배를 타고 곤양포구에 이르러 도망치려던 원균은 전라도에 원병을 청하여 한바탕 싸워보고 이기지 못하면 그때에 도망쳐도 늦지 않을것이라는 리영남의 의견을 좇았다. 리순신은 영남에게 《서로 맡은 계선이 다르거니 조정으로부터 명령이 없으니 어찌 마음대로 지경을 넘겠느냐.》고 하였다. 영남은 5~6차례 원병을 청하였다. 리순신은 마음속으로는 당장 달려가서 한바탕 싸우고싶었으나 조정에서 트집을 잡을수도 있고 또 전쟁형편도 채 료해하지 못한 형편이여서 주춤거렸던것이다. 숱한 배와 장비를 물속에 처넣고 1만여명의 수군까지 다 분산시켜놓은 원균은 리영남이 헛탕치고 돌아올 때마다 배머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였다. 전라도수군의 도움으로 명예를 회복해보려던 꿈이 깨여지고 패전장수로 목이 잘려야 할 처지가 눈물겨워서였으리라. 나라와 겨레가 당하는 치욕을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하던 리순신은 적을 맞받아나가 칠 결심을 다졌다. 그런데 관하의 여러 장수들은 모두 자기가 책임진 지방을 떠나 다른 도로 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군관 송희립과 록도만호 정운만이 리순신과 의견을 같이하였다. 리순신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이렇게 웨쳤다. 《오늘의 형편으로서는 오직 적을 공격하다가 죽어야 할것이다. 감히 이를 반대하는 자는 목을 칠것이다.》 드디여 5월 1일 본영 앞바다에 여러 장수들을 집합시켰는데 판옥선이 24척, 협선이 15척, 포작선 46척이였다. 리순신은 전라우도수사 리억기와 련계를 가지고 함께 진격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무렵 적들이 벌써 수도로 다가가고있다는 소식을 받자 5월 4일 새벽 2시경 리억기의 수군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출항하였다. 이것이 조선수군의 제1차 출전이였다. 6일 아침 9시경 원균이 판옥선 1척을 타고 희색이 만면하여 당도하였고 이어 경상우수영의 판옥선 3척과 협선 2척이 당도하였다. 아군함대는 90여척으로 늘어나게 되였다. 여기서 포작선은 함대의 위용을 시위하기 위해 리순신이 징발한 민간어선들이였다. 7일 우리 수군함대는 옥포항구에서 략탈한 물건들을 배에 싣던 적선 50여척(30여척이라고도 한다.)을 포위공격하였다. 이날 싸움에서 아군함대는 적장 도또 다까도라와 호리우찌 우지요시의 휘하 수군을 격파하고 26척을 격침시켰다. 바다에서 우리 수군이 거둔 첫 승리는 륙지에서 싸우던 우리 인민들에게 신심을 안겨주었다. 조정에서는 이때 매우 기뻐하면서 리순신의 직품을 가선으로 올려주었다. 오후 5시쯤 되여 영등포(거제도 북단) 앞바다에서 지나가던 왜적의 대선 5척을 또다시 격침, 격파하였다. 8일 우리 수군함대는 고성 적진포(통영군 광도면 적덕리)에서 왜의 대선, 중선 13척을 공격하여 격파, 소각해버리였다. 우리 수군은 이 해전들에서 총 44척의 적함선들을 격침, 격파하고 9일 일단 전라좌수영의 기지로 돌아왔다. 5월 29일 리순신은 전선 23척을 거느리고 두번째로 출전하여 로량 앞바다에 이르러 원균이 거느린 경상우수영의 함선 3척과 합세하였다. 아군함대는 리순신의 지휘밑에 사천에 정박하여 략탈행위를 하고있던 왜적의 함대를 공격하여 12척을 침몰시켰다. 겨우 살아남은 놈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발을 구르고 소리를 내며 징징 울어댔다. 리순신은 이 싸움에서 왼편어깨에 탄환을 맞고 부상당하였으나 태연하게 싸움을 지휘하였다. 6월 2일 우리 수군함대는 당포선창에 배를 대고 뭍에 올라 로략질을 하던 적들을 공격하였다. 21척으로 이루어진 적선단은 적장 가메이 고레노리의 부대와 구루시마 미찌유끼부대의 련합함대로서 《수륙병진》기도의 실현을 위해 서해로 가던중이였다. 아군함대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공격하여 적선 21척을 격침격파하고 적장 구루시마를 죽였으며 1582년 6월 8일에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가메이에게 준 금부채를 로획하였다. 배를 잃은 가메이는 후에 뭍에서 돌아쳤다. 아군함대는 6월 4일에 리억기의 전라우수영의 전선 25척과 합세하여 충천한 기세로 진격하여 다음날 당항포에서 왜선 26척을 수장해버렸다. 이때 적선 1척은 남겨두었었는데 그것은 륙지로 기여올랐던 놈들이 다시 배를 타고 도망치려고 할 때 몽땅 잡아치우기 위해서였다. 리순신의 계책에 빠진 적들은 밤을 리용하여 륙지에 올랐던 놈들을 걷어싣고 도망치다가 당항포어구에서 대기하고있던 조선수군에 의하여 격파되였다. 적병 100여명이 물고기밥이 되였다. 당항포 앞바다싸움의 승전보고에 접한 조정에서는 리순신의 직품을 자헌대부(정2품의 아래급)로 올리였다. 그후에도 률포 등지에서 여러척의 적선을 격침격파하고 6월 10일 기지로 개선하였다. 우리 수군함대에 의하여 일본수군이 계속 녹아나자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하루속히 조선함대를 격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6월하순에 적의 수군장수들인 구끼 요시다까, 가또 요시아끼, 와끼자까 야스하루는 지시에 따라 조선수군함대를 격파하기 위한 선단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구끼와 가또의 함선준비가 채 완료되지 않은것으로 하여 와끼자까는 7월 8일 단독으로 김해포구를 출발하였다. 한편 적정을 보고받은 리순신은 조선수군을 어째보려고 달려드는 적수군을 맞받아 공격하기 위하여 7월 5일에 전투대렬을 다시 편성하고 6일에 려수를 떠났다. 이것이 조선수군의 제3차 출전이였다. 로량에서 경상우수영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월 8일 조선수군함대는 고성 견내량으로 진격하였다. 리순신은 와끼자까가 거느린 70여척의 적함을 유인하여 한산도 앞바다로 끌고가 59척을 수장하였다. 이 해전이 바로 전쟁국면에 결정적영향을 준 《한산도대첩(한산도대승리)》이였다. 조정에서는 리순신의 공로를 평가하여 정헌대부(정2품의 웃등급)로 승격시켰다. 7월 10일 아군함대는 안골포에 정박해있던 구끼와 가또의 함선 42척과 접전하였다. 이 싸움에서 아군함대는 구끼의 배를 포함하여 수십척의 적선을 격침격파하였다. 아군함대는 3차출전을 통하여 조선수군을 제압하고 해상권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급파된 와끼자까, 구끼, 가또의 적함선집단을 여지없이 격파하였다. 한산도해전의 승리로 제해권은 우리 수군의 수중에 장악되였고 적들의 《수륙병진》계획은 파탄되였다. 적들의 함대는 싸우기를 포기하고 부산포안에 숨어서 출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리순신함대는 8월 24일 부산포를 향하여 출전하였다. 25일 사량 앞바다에 이르러 경상우수영의 수군과 합치였는데 170여척에 달하였다. 항행도중 조선수군은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등지에서 모두 34척의 적선을 격침시켰다. 9월 1일 아침 아군함대는 사나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적선 470여척이 정박해있는 부산포 앞바다로 진격해들어갔다. 조선수군은 이 싸움에서 적선 100여척을 격침시키고 수많은 적을 살상하였다. 부산포앞바다싸움의 승리로 적들의 《수륙병진》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되였으며 남해에서의 조선수군의 제해권이 더욱 확대됨으로써 적들의 생명선인 부산과 일본사이의 바다길은 끊어질 위험에 처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적들의 침략계획수행에 치명적인 위기가 조성되였다. 적들은 이후 우리 수군함선만 보아도 겁에 질려 륙지로 도망치고 감히 접어들지 못하였다. 한편으로 적들은 부산으로부터 웅천에 이르는 해안선의 방어를 강화하는데만 급급하였다. 리순신의 지휘밑에 조선수군은 4개월동안에 적선 400여척을 격침시키고 42척을 크게 격파하였다. 1593년 2월 8일 우리 수군은 부산까지 적을 추격하여 왜장을 쏘아죽이고 적선을 모조리 불살라버리였다. 22일에 또다시 적을 크게 격파하였는데 급해맞은 적들은 발을 구르며 징징 울어댔다고 한다. 8월에 조정에서는 리순신이 본직을 그대로 가지고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리순신이 거느린 우리 수군함대는 1594년 3월 4일과 5일사이에 진해 당항포앞바다싸움에서 적선 31척을 소멸하였다. 그해 9월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 의병장들과 손잡고 적을 공격하였다. 리순신은 원균의 모함과 우리 수군을 해치려는 왜적들의 간계로 하여 1597년 2월 통제사직에서 철직되고 체포되여 압송되였다. 원균은 왜놈간첩들의 모략에 넘어가 1597년 7월 16일 칠천량으로 진격하였다가 왜적선의 기습을 받고 강력한 우리 수군을 졸지에 괴멸시켰다. 전라수사 리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전사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지휘하는 12척의 함선만이 전장을 리탈하여 보존되였다. 원균은 도망치다가 왜병의 칼에 맞아 너절한 운명을 마치였다. 바빠맞은 조정에서는 리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남은 배가 12척밖에 안되였고 그마저 불비하였지만 리순신은 신심을 잃지 않고 함대재건에 달라붙었다. 그는 수군을 지휘하여 8월 28일에는 적선 8척이, 9월 7일에는 적선 13척이 습격하여온것을 격파하였다. 9월 16일 리순신은 명량(울돌)해협에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도또, 구루시마 등이 지휘하는 적선 330여척과 맞서 싸웠다. 12 대 330, 너무도 엄청난 력량상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선수군은 리순신의 지휘밑에 결사적으로 싸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선 30여척이 격파되고 적장 마다시 등 수많은 적들이 몰살되였으며 살아남은 적선들은 황급히 도주하였다. 이 전투를 력사에서는 《명량대첩(울돌대승리)》이라고 일러왔다. 이 전투가 있은 후 해남현 각지에 상륙했던 적들은 모조리 도망쳤다. 하여 적들의 2차침공시 서해에로의 진출은 다시 좌절되였으며 《수륙병진》기도도 파탄되였다. 울돌해전후 5개월사이에 수군병력수는 8,000명으로 장성하였다. 리순신의 지휘밑에 조선수군은 1598년 8월초 고금도에 침입해오는 적함대를 맞받아나가 포위공격을 들이대여 50여척을 소각, 침몰시켰다. 1598년 11월 19일 리순신의 지휘밑에 조선함대와 명나라함대는 련합하여 로량 앞바다에서 임진조국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결전을 벌리였다. 이 싸움에서 우리 수군은 적의 함선 200여척을 격침, 격파하고 근 2만명의 적을 소멸하였다. 하여 포위된 고니시부대를 구원하기 위하여 가던 시마즈의 함선집단은 섬멸적타격을 당하였다. 이때 로량바다는 적의 시체와 파손된 배쪼각, 병기,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어 바다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였고 왜적의 더러운 피가 온 바다를 물들였다고 한다. 리순신은 이 싸움에서 직접 선두에 서서 북채를 쥐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우의정을 증직하고 사당을 세우는것을 허락하였으며 임금은 《충민》이라는 사당이름까지 주었다. 1604년 10월 군공을 평정할 때 리순신은 첫자리에 올랐다. 그리하여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이라는 공신칭호와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령 경연사 덕풍부원군》이라는 증직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선대들에게도 벼슬이 내려지고 집앞에 정문(봉건시대에 특별한 공이나 덕을 국가적으로 표창하기 위하여 세우는 문)을 세우게 되였다. 리순신은 통치계급의 한사람으로서 계급적제한성도 가지고있었지만 애국명장으로서의 그의 일생은 오랜 세월을 내려오며 사람들속에 전해지고있다.
2. 명장의 기묘한 책략
리순신은 수십차례의 해전을 조직지휘하는 과정에 새로운 해상전법들을 마련하였으며 중세해상전법들을 종합적으로 적용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선봉으로 한 공격 및 방어전법, 화약무기와 포를 장비한 함선들에 의거한 해상기동전술의 완성, 수군에 의한 륙전대의 조직과 그와 협동하여 항만에 집결한 적에 대한 공격전법의 창조와 그 적용, 화공작전, 학익진, 일선형, 제대형 등 다양한 전투서렬의 편성과 같은 풍부한 전법들은 력대 해상전법을 종합적으로 받아들이고 새롭게 더욱 발전시킨것이였다. 리순신은 거북선을 선봉으로 한 공격 및 방어전법을 창조하였다. 거북선은 돌격선이였다. 이것은 비유하면 륙전에서 전차라고도 할수 있었다. 세계전쟁사를 보면 처음에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전차는 그후 군진의 맨 앞장에서 돌파구를 내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군사상의 새로운 기적을 이룩하였다. 거북선은 바로 이러한 전차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거북선은 전투때 항상 맨 앞장에서 돌입하여 적함대의 전투서렬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적의 기함에 접근하여 포나 충격으로 파괴함으로써 적들의 지휘체계를 혼란에 빠뜨리였다. 1592년 6월 2일 적장 가메이, 구루시마 등이 지휘하는 적 선단을 격파하는 당포싸움때 거북선은 선봉에서 돌격하면서 적의 기함을 들이받아 파괴하고 현자, 천자, 지자총통, 대장군전으로 그것을 짓부셔버리였다. 뒤따르던 함선들에서는 편전, 승자총통 등으로 일제사격을 들이대여 적의 기함을 격침시키고 적장도 수장해버렸다. 그다음에 혼란에 빠진 적선들을 좌충우돌하면서 공격하여 모두 침몰시켜버렸다. 사천앞바다싸움이나 당항포해전, 한산도해전 등 여러 전투들에서도 거북선을 선봉으로 한 전법이 널리 적용되였다. 거북선이 선봉에 설수 있었던것은 그의 특수한 구조와 관련되여있었다. 거북선은 등에 철로 장갑을 해씌웠고 그우에 칼과 송곳 등 예리한 날을 꽂아 적이 기여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거북선을 탄 사람들은 장갑안에서 피해를 입을 념려가 없었다. 거북선의 총통구배치와 관련하여 옛 기록에서는 《좌우쪽 패에는 각각 22개의 총통구멍을 뚫고 12개의 문을 내였다. 거북의 대가리에는 우로 2개의 총통구멍을 뚫고 아래로 2개의 문을 내였으며 그 문옆으로 각각 1개의 총통구멍을 뚫었다. 좌우쪽으로 판을 덮은데도 각각 12개의 총통구멍을 뚫었고 <구(龜)>자를 쓴 기발을 꽂았다.》라고 전하고있다. 거북선선수의 룡대가리가 입을 벌리면 류황과 염초를 태운 연기가 적들에게 뿜어져 적들로 하여금 눈을 뜨지 못하게 하고 호흡도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거북선이 화약무기에 의한 《연막전법》을 세계전쟁사에서 처음으로 창조하고 적용한것으로 된다. 거북선은 또한 적선을 충격하여 파괴할수 있었고 거기에 탄 군사들이 적선우에 뛰여올라가 적을 죽일수도 있었다. 거북선의 이러한 성능은 왜적의 장끼인 단병접전에 대처할수 있었고 적들의 조총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할수 있었다. 거북선의 위력에 대하여 옛 문헌들에서는 《적을 만나면 새풀을 엮어 우를 덮어서 송곳과 칼을 가린 후 선봉으로 삼는다. 적이 기여오르려다가는 칼과 송곳에 걸리고 가까이 대여들다가는 한꺼번에 총이 쏟아져서 향하는 곳에 적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는것이다. 크고작은 전투들에서 이로써 전과를 올린것이 아주 많다.》고 전하고있다. 명나라사람 화옥은 《해방의》에서 《조선의 거북선은 배돛을 세우고 눕히고 마음대로 하며 바람이 거슬러불거나 밀물이 빠지거나 어떻거나 다닐수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참으로 리순신은 거북선을 더욱 발전완성시키고 그에 의거한 위력한 전법을 창조함으로써 세계해전사의 한페지를 빛나게 장식하고 중세수군조사예술발전에 기여하였다. 리순신은 화약무기와 포를 장비한 함선들에 의거한 해상기동전술을 적용하고 완성시켰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 함선에 화포를 싣고 해상에서 기동전을 한것은 그 이전에도 있었으나 리순신은 그것을 더욱 발전완성시켰던것이다. 리순신은 배우에 화포로서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호준포와 각종 완구, 질려포밖에 승자총통과 신포, 이러한 화포(대포)에서 발사되는 탄환들을 싣게 하였다. 그리고 대장군전, 장군전, 차대전, 피령전, 수철연의환, 단석, 철환, 조란탄, 화전, 대발화 등 무기들도 싣도록 하였다. 그때 왜적들에게는 조총밖에 볼것이 없었다. 그것은 갑판우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살상할수 있을뿐 해전에서는 크게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 화포들은 적의 유생력량을 대량 소멸할수 있었고 함선도 파괴할수 있었다. 지자총통과 같은 경우 수철연의환이나 둥근 돌을 재워 발사하면 그 사거리가 10리나 되였다. 이러한 능력은 능히 적의 대선을 뚫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지자총통으로는 조란탄 200개를 동시에 발사할수 있었는데 조란탄은 말그대로 새알만 한 철알들로서 이것은 적의 배우에 밀집한 적들을 대량 살상할수 있었다. 리순신은 이러한 우리 화포의 위력으로 기동전을 조직지휘하여 해전들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둘수 있었다. 그는 자기 본영에 머물러있으면서 기여드는 적과 맞선것이 아니라 대담한 기동작전으로 적을 찾아다니면서 주동적으로 공격하였다. 바다지형과 기상기후에 능통하고있던 리순신은 유인매복전과 기만전술을 많이 적용하였다. 리순신이 유인매복전을 많이 하게 된것은 적들이 대체로 포구에 정박하여있으면서 불리한 경우에는 뭍으로 내빼기때문에 유생력량을 충분히 소멸할수 없었던 사정과 관련된다. 또한 우리 거북선, 판옥선과 같은 배들은 커서 암초가 많고 좁은 포구에서 싸우기에는 불리하였다. 그리고 우리 수군의 전과가 확대됨에 따라 적선들은 우리 함선들만 만나면 도망치려고 하였으므로 어차피 기만전술을 쓰지 않으면 안되였다. 유인매복전술의 대표적인 싸움은 세계중세해전사에서 이름을 떨친 한산도해전이였다. 1592년 7월 8일 아침 우리 수군함대는 적들이 정박하고있는 견내량으로 진격하였다. 그런데 견내량은 해협의 너비가 500m밖에 안되였고 암초가 많아서 우리의 큰 전선들이 싸우기에 불리하였고 기동도 제한되였다. 그리고 적들은 정황이 불리해지면 륙지로 달아날수 있었다. 리순신은 《이곳은 바다가 좁고 물이 얕아서 배를 돌리기 어려우니 거짓 물러서는체 함으로써 적을 유도하여 넓은 바다로 나가서 싸움을 시작하느니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무능한 원균이 흥분된 기세로 곧장 내달아 싸우려고 하였다. 리순신은 《공은 병법을 알지 못하고 이와 같이 한다면 패한다.》고 하면서 자기 배들에 지시하여 뒤로 물러서게 하였다. 적들은 크게 기뻐하며 《패주》하는 아군유인선인 5~6척의 판옥선을 바싹 뒤쫓아왔다. 적들이 좁은 물목을 나온 뒤에 순신이 북을 한번 울리자 배들이 배머리를 돌려 늘어서며 대기하던 배들과 합세하였다. 적들과의 거리는 수십보에 불과하였다. 리순신의 지시에 따라 아군함대는 3척의 거북선을 선두로 학익진을 치고 총공격하면서 적함들을 포위망에 잡아넣었다. 그리고 화약무기로 일제사격을 퍼부었는데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을 지경이였다고 한다. 이 싸움에서 적장들인 와끼자까 사요에, 마나베 사마노조, 와따나베 시찌우에몬을 비롯하여 수많은 적장졸들이 물귀신이 되고 적선 59척이 격파되였다. 약 1만명의 적병가운데 살아남은 놈은 1,000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특징적인것은 적함을 불태워 소멸하는데만 치중하던 종전의 전법과 달리 적함선에 바싹 다가가 갈구리로 끌어당겨 연방 총포, 화살을 쏘면서 적함에 뛰여올라 적장이하 왜놈군사들의 목을 많이 자른것이였다. 물론 당항포, 률포앞바다싸움에서도 그러한 전례는 더러 있었으나 이번처럼 9척이상이나 접현전, 함상전을 겸하여 소멸한적은 없었다. 이것은 우리 수군병사들이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고 직접 적들을 요정내려고 하는 투지로 충만되여있었고 전투들을 통하여 육박전을 할수 있을만큼 전투능력도 높아졌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통치배들이 전공평가에서 적의 목을 얼마나 잘랐는가 하는것을 중요한 기준의 하나로 삼고 수군들에게도 그렇게 할것을 요구하였던 사정도 작용하였던것으로 보인다. 그후 안골포해전때 리순신은 역시 그곳 지형이 좁고 수심이 얕기때문에 유인작전을 하려고 두세번씩이나 시도하였다. 하지만 한산도해전에서 혼쌀이 난 적들은 유인전에 말려들지 않았다. 리순신은 림기응변의 전법으로 전술을 바꾸어 여러 지휘관들에게 제대식공격(엇바꾸어가면서 공격하는것)을 가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수십척의 적선을 격침, 격파하였다. 리순신은 집중공격의 전법도 썼다. 이 전법은 1592년 9월 1일에 있은 부산앞바다싸움에서 적용되였다. 이 싸움에 대하여 정부에 보고하면서 리순신은 《이번에는 큰 적의 소굴에 400여척의 적선이 늘어선 가운데로 위풍당당하게 뚫고들어가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기가 꺾임이 없이 온종일 공격하여 적선 100여척을 격파함으로써 적들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겁에 질려 목을 움츠리게 하였다.》고 자부심에 넘쳐 말했다. 사실 그때 일기조건으로 보나 력량상 대비로 보나 아군에 불리하였지만 리순신은 적들의 약점 즉 조선수군을 두려워하고 일기조건이 나빠 공격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고 경계를 소홀히 한 틈을 리용하여 대담한 공격을 조직하였던것이다. 이처럼 리순신은 유인, 포위, 총공격전의 빛나는 모범인 한산도해전과 부산앞바다싸움과 같은 집중공격전 등 위력한 함선에 의한 해상기동작전으로 큰 전과를 올리였다. 리순신은 수군에 의한 륙전대의 조직과 그와 협동하여 항만에 집결한 적에 대한 공격전법을 발전시켰다. 1593년초에 들어서면서 아군은 각 전선에서 전면적인 반공격에로 이행하였다. 리순신이 거느린 조선수군함대의 해상기동작전으로 적들은 기를 못 펴고 포구안에 들어박혀 유인기만전을 해도 걸려들지 않았다. 이런 형세에서 리순신은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에게 수군과 륙군이 협동하여 적을 칠것을 여러번 촉구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하여 리순신은 수군함대의 력량만으로 상륙전과 해상전을 배합할것을 결심하였다. 이미 의병부대들이 배를 타고 바다싸움을 할수 있도록 준비시켰던 리순신은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고 2월 22일에 10여척의 배에 륙전대를 태워가지고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의병부대들은 웅포 서쪽 냉이포해안에 상륙하고 전라우도와 삼도의 용감한 사수들은 웅포의 동쪽 안골포에 상륙하여 각각 진을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삼도함대에서 각각 경완선(가볍고 빠르며 완전히 전투준비를 한 함선) 5척씩 내여 적선이 줄지어 정박한 곳으로 접근하여 지자, 현자총통을 쏘아 적선들을 한절반 깨뜨리도록 하였다. 바다와 륙지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은 적들은 갈팡질팡하다가 숱한 시체를 남기였다. 궁지에 몰린 적장 12명은 물에 빠져 죽을 생각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웅천포앞바다싸움에서 륙전대를 상륙시키고 그와 협동하여 적을 공격한것은 우리 나라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작전으로서 리순신의 군사적재능을 잘 보여주고있다. 리순신은 1594년 9월말, 10월초 장문포, 명등포전들에서도 륙군과의 협동작전으로 성과를 거두었다. 이밖에도 리순신이 해전에서 적용한 기묘한 책략들은 화공법, 밀물과 썰물의 리용, 쇠줄로 포구를 막는 방어전법, 여러가지 전투서렬의 편성 등 수없이 많다. 이상의 모든 책략들은 바다의 제왕으로서의 리순신의 출중한 군사적지략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있다. 17세기에 활동한 리식은 시장(죽은 사람의 시호결정때 참고로 하기 위해 시호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봉상시에 제출되는 문건)에서 《장군(리순신을 가리킴)과 같은분은 국방력이 쇠약해서 군대란 말조차 듣기 어려운 때 천하에서 그보다 더 강할수 없는 적을 상대로 하여 크고작은 수십차례 전투에서 언제나 승리하였으며 서해바다를 막고 앉아 적으로 하여금 물과 륙지로 함께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국토를 회복한것도 이로써 토대를 이루는것이다. 그때 여러 공신들중에서도 장군의 공을 뛰여넘을 사람은 없다. …옛날의 유명한 장수라 해도 그보다 나을수는 없는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3. 승리의 비결
그러면 세계해전사에 특기할만 한 공적을 쌓은 리순신의 성공의 열쇠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은 나라와 겨레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였다. 언제나 나라를 생각하는 그였기에 앞으로 왜적이 쳐들어올것이라고 예견하고 싸움준비를 빈틈없이 갖추었으며 왜적들에 의하여 여러 지역이 함락되였을 때 경상도지역으로 출전하여 원쑤를 칠것을 주장하면서 《적의 형세가 맹렬해서 국가가 위급한 이때 다른 도의 장수들에게 책임을 미루고 제 구역만 지키고 앉아있겠다니 말이 되는가… 오늘의 형편으로서는 오직 적을 공격하다가 죽어야 할것》이라고 소리높이 웨쳤던것이다. 원균의 무지로 하여 삼도수군이 패하고 사람들이 모두 신심을 잃고있을 때 리순신은 《우리들이 다같이 나라일을 맡아서 의리상 같이 죽어야 한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한번 죽어서 나라에 공헌하는것이 무엇이 아까우냐. 오직 죽기까지 싸우는것뿐이다.》라고 고무해주었다. 바로 이러한 그였기에 칼에다 자기의 마음속결의를 담아 그는 이렇게 새기였다.
바다 두고 맹세하니 어룡도 움직이고 산 두고 맹세하니 초목도 아노나
겨레를 남달리 사랑하였던 그는 언제나 겨레의 운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임진조국전쟁의 마지막시기에 있었던 이야기의 한토막을 보기로 하자. 명나라의 수군제독 진린은 적의 뢰물을 많이 받아먹고 도망갈 길을 열어주려고 리순신에게 《유끼나가를 아직 내버려두고 먼저 남해에 있는 적을 토벌합시다.》라고 제의하였다. 리순신은 《남해에 있는것은 모두 포로된 우리 사람이지 적이 아니요.》라고 하였다. 진린이 다시 《적에게 붙은 이상 모두 적이요. 별로 수고하지 않고 적의 머리를 많이 베는것이 좋지 않소?》라고 하자 순신은 격하여 《명나라조정에서 적을 토벌하라고 보낸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목숨을 구원하자고 해서이다. 이제 포로된 사람을 찾아오지는 않고 함부로 살륙한다는것은 구원의 본뜻이 아니요.》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진린이 마지막에는 화를 내면서 《우리 임금이 내게 장검을 주신것이 있소.》 하며 위협하자 순신은 《한번 죽는것은 아까운 일이 아니다. 내가 대장으로 앉아서 적을 놓아보내고 우리 사람을 죽이는것과 같은 일은 할수 없다.》고 주저없이 맞섰다. 그는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조건에서도 둔전을 설치하고 소금구이, 질그릇제조 등을 하게 하여 생업을 열어주었다. 하기에 그가 원균의 모해로 삼도 수군통제사직에서 철직되고 붙잡혀갈적에 사람들은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길가에 떨쳐나와 울면서 《사또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들은 이제는 죽었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렸던것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여갈 때에 길에서 만난 피난민들중의 젊은 사람들은 처자들에게 《우리 장군이 오시니까 인젠 너희도 죽지는 않을것이다. 천천히 나를 찾아오라. 나는 먼저 우리 장군을 따라서 가겠다.》고 말하였다. 바로 이것이 그가 성공하게 된 비결의 하나였다. 리순신은 장병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여 그들모두의 운명에 대해서도 항상 책임지는 립장을 견지하였다. 리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집 한채를 지어놓고 운주당이라고 하였다. 그는 밤낮 거기에 있으면서 모든 장수들과 전투에 대한 일을 상의하였으며 아무리 낮은 병졸이라도 군무에 대한 말을 하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와서 보고할수 있게 하여 군사들의 실정에 통달하였다. 싸움을 하려고 할 때마다 막하장수들을 모두 불러 계책을 의논하고 의견이 결정된 다음에 싸웠기때문에 싸움에서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던것이다. 그는 광양현감 어영담이 억울한 루명을 쓰고 파직당하게 되였을 때 그를 적극 비호해주고 부산포해전에서 죽은 록도만호 정운의 죽음을 통분해하면서 직접 제문을 짓고 복수를 다짐하기도 하였다. 그는 군대를 지휘함에 있어서도 간단명료하게 하고 법을 세워서 한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그래서 전체 군사가 한마음으로 뭉치여 누구도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장병들을 믿고 사랑하며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책임져주는 그의 고상한 의리심이야말로 그에게 백승을 가져다준 승리의 비결이였다. 리순신은 원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지니고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조국강토를 짓밟은 원쑤 왜적을 끝없이 증오하면서 《한놈의 목을 자를 동안에 여러 놈을 쏘아죽이 라. 모가지를 벤것이 적은것을 걱정하지 말고 쏘아서 맞히는데 노력하라.》고 지시하였다. 임진조국전쟁의 마지막시기 순천 왜교(예다리, 왜다리)에 포위되여있던 고니시 유끼나가의 부대는 사천, 고성방면의 저들의 수군부대에 구원을 청하는 한편 퇴로를 열어보려고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에게 뢰물을 보내여 리순신에게 압력을 가하도록 하였다. 리순신은 《국가의 원쑤는 놓아보낼것이 못된다.》고 하여 진린을 무색하게 하였다. 왜놈들이 이번에는 리순신에게 총, 칼 등 물건들을 바치면서 퇴로를 열어달라고 애걸하자 《내가 임진년이래 적을 잡은것이 무수하고 로획한 총과 칼은 산더미 같다. 이제 원쑤와 사사로운 교섭을 해서는 무엇하느냐?》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출전에 앞서서는 하늘을 향해서 《이 원쑤놈들만 없애치우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고 빌었다고 한다. 원쑤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바로 이것이 그가 성공할수 있게 한 비결의 하나였다. 헌신적인 투쟁정신, 이것 역시 그의 승리의 요인이였다. 그와 관련해서는 많은 일화들이 있지만 운명을 건 싸움이라고도 할수 있었던 명량(울돌)해전만을 들어보자. 원균의 패전으로 리순신이 넘겨받은 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조정에서도 우리 수군이 너무 미약해서 적을 방어하기 불가능하다고 여기여 리순신에게 륙지에 올라와서 싸우라고 명령하였다. 리순신은 수군을 페지하는것은 적이 바라는것이라고 하면서 전선이 비록 적더라도 끝까지 싸워볼 자기의 결의를 피력하였다. 리순신은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자연기후조건을 리용하여 결사전을 벌리기로 하였다. 그는 함선수가 적은것을 고려하여 물고기잡이배들을 싸움배로 위장시켜 함대의 뒤에 배치하고 여러가지 방어조치들도 취하였다. 1597년 9월 16일 이른아침 330여척의 적선이 바다를 메우며 밀려왔다. 이에 비하면 우리 함선은 겨우 12척, 세계해전사에 일찌기 있어본적이 없는 싸움이 시작되였다. 여러 장수들이 도망칠 잡도리를 하였다. 리순신은 죽을 때까지 싸우기로 결심하고 한복판에다가 닻을 내리였다. 적들의 배가 리순신의 배를 포위하였다. 뭍에서 광경을 목격하던 피난민들은 우리들은 통제사를 믿고 왔는데 이제는 어디로 가야 사느냐고 하면서 통곡하였다. 리순신은 장검을 비껴들고 군사들을 고무하면서 도망치려는 거제현령 안위와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를 부르며 《정말 군률로 죽고싶으냐. 뒤로 물러가면 살데가 있느냐.》고 꾸짖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안위가 적선을 향해 맹렬히 공격하였다. 리순신은 그의 배가 포위에 들자 즉시 그를 구원해주었다. 적장 마다시가 뒈지고 적선 세척이 격파되자 적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때마침 썰물이 시작되여 적선은 더 전진하지 못하고 바다물에 밀려 퇴각하게 되였다. 아군은 이때를 리용하여 일제히 북을 치면서 전진하여 총포와 활을 쏘았는데 그 소리는 천지를 진감하였다. 우리 수군은 이 싸움에서 적함선 30척을 깨뜨리였다. 근 30배나 되는 적과 맞서 싸워 이긴 리순신을 사람들은 더욱 신뢰하게 되였고 명나라원군의 장수들도 찬탄을 마지 않았다. 임진조국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로량해전때에도 리순신은 직접 북을 메고 전투지휘를 하다가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매일 밤 직접 활과 화살을 수리하였으며 전투때에는 앞장에 나서서 활을 쏘군 하였다. 장병들이 왜 국가를 위해서 자중하지 않는가고 걱정하면 어떻게 자네들더러만 적과 싸우라고 하겠는가고 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던것이다.
이러한 헌신적인 투쟁정신이야말로 그가 성공할수 있게 한 또 하나의 요인이였다. 리순신은 뛰여난 군사적재능을 가진 선견지명있는 전략가, 림기응변할줄 아는 작전가였다. 그가 전쟁전이나 휴전기간에 항상 싸움준비에 힘을 넣은것은 그가 멀리 앞을 내다볼줄 알았다는것을 말해준다. 휴전기간에 있은 일이다. 리순신은 놈들의 재침책동을 예리하게 주시하면서 략탈행위에 대해서는 제때에 응징하였다. 그는 명나라 선위도사부의 담종인이라는 자가 일본의 장수들이 다 명나라에 귀순할 생각이 있고 무기를 걷어가지고 제 나라로 가겠다고 하니 조선수군은 각각 일본인들의 영채에 가까이 오지 말고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가서 충돌을 피하라고 한데 대하여 이렇게 준렬히 규탄하였다. 《왜인들이 웅거하고있는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지가 모두 우리 국토인데 우리더러 일본군대의 진영에 접근하지 말라는것은 무엇이며 우리더러 속히 본래 있던 지방으로 돌아가라니 돌아갈 지방이 어데 있단 말인가. 싸움을 일으킨것이 우리가 아니라 왜놈이다. 일본놈은 가지가지로 간사하고 변하기를 잘하여 옛날로부터 신의를 지키였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저 흉악한 무리들이 아직도 죄악을 겁내지 않고 연안지방에 웅거해서 여러해째 물러가지 않으며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백성을 살해하는것이 전보다 더하다. 군기를 걷어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이 과연 어디서 나타나는가. 지금 화친하자고 하는것도 실상 사기와 허위의 행동 같다.》 이것은 리순신이 적들의 간교한 계책을 꿰뚫어보고있었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리순신은 적정을 정확히 판단한 기초우에서 정황에 맞게 전투계획을 작성하였다. 항상 척후를 파견하여 적들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으며 적들의 전투방법과 우리 나라의 바다지형, 자연기후적조건을 타산하고 또 정황이 달라지는데 맞게 새로운 전법을 적용하여 싸움을 승리에로 이끌었다. 그는 항상 경계를 엄밀히 하여 평소에는 물론 잠자리에서도 지휘기구인 북을 베고 선잠을 잤다. 더우기 융복(군복)을 벗어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전투구상을 하였다. 어느 날 밤 잠 못들어 설레던 그가 지은 한시 《한산섬》은 오늘도 그의 뜨거운 애국의 마음을 전해주며 불리워지고있다.
물나라 가을빛이 어느덧 저물어라 높이 뜬 기러기떼 추위에 놀랐고나 밤새워 속태우며 이리저리 뒤척일제 지새는 저 달만이 활과 칼 비치여라
사람들은 그가 적들이 야습해오리라는것을 미리 알고 방비대책을 세워 물리친 사실을 놓고 《귀신》같은 사람이라고 존경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마련된 전과인가를 아는 사람은 당시 그리 많지 못하였다. 척후를 멀리 내보내여 적의 움직임을 살피게 하고 밤새워 전투구상을 하며 항상 경계를 엄밀히 하여 적이 오는것을 먼저 안 까닭에 이룩된 성과들이였다. 리순신의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성격은 그가 군중의 신망을 얻게 하고 군사가로서 성공할수 있게 한 요인의 하나였다. 그의 이러한 성격과 관련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오는데 그가운데 일부를 보기로 하자. 일찌기 리순신이 옥에 갇히웠을 때의 일이다. 한 옥사쟁이가 그의 조카 분에게 은밀히 뢰물만 먹이면 죽음을 면할수 있다고 귀띔하였다. 그 말을 들은 순신은 분을 꾸짖으면서 《죽으면 죽을지언정 어찌 원칙을 굽혀가면서 삶을 구할수 있으랴.》고 말했다. 하여 당시 사람들은 순신이 말이 적고 별로 웃지도 않으며 얼굴이 단아하고 근신하는 선비 같지만 심중에는 담력이 있었다고 감탄하였다. 리률곡(리이)이 리조판서로 있을 때였다. 그때 률곡은 리순신의 이름을 듣고 또 일가간인것을 알고 서애 류성룡을 통하여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성룡 역시 가보라고 하였다. 하지만 리순신은 률곡과는 일가간이니까 만나보아도 좋지만 벼슬을 내고 들이고 하는 그런 자리에 있을 때 가보는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끝내 가보지 않았다. 리순신이 발포만호로 있을 때 좌수사 성박이 관청 뜰앞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여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리순신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공적물건이나이다. 심은지 여러해 된것을 하루아침에 베여버리면서 그것도 공용이 아니요 개인용이라면 말이 되옵니까.》 수사가 성을 내였으나 결국 오동나무를 베여가지 못하였다. 그가 얼마나 청렴결백하게 살았는가는 1579년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임명되였을 때의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알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때 리순신이 거처하는 방에는 아무것도 없고 있는것이라고는 옷과 이불뿐이였다. 자기 집에 갈 때에는 반드시 식량맡은 사람을 불러서 나머지의 식량을 돌려주었다. 충청병사도 이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는 특별히 사랑하고 존경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을 따른다. 그가 비록 높은 관리들에게 아부하지 못하여 그처럼 뛰여난 재능을 가지고도 출세하지 못하였지만 군중은 오히려 그의 고결한 넋을 크게 샀으며 그의 명령에 충실하였던것이다. 승리는 평소에 쌓아둔다고 한 말은 아마도 이 경우를 두고 한 말일것이다.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 장병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고상한 풍모, 원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헌신적인 투쟁정신, 선견지명있는 지략과 림기응변의 전술,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품성, 이 모든것은 바로 리순신이 군사가로서, 명장으로서 성공할수 있게 한 비결이였다.
4. 명장에 대한 찬탄
《통제사(리순신)는 천지를 품속에 넣을수 있는 재주와 하늘을 꿰여매고 해를 씻은 공로가 있소이다.》 이 말은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리순신을 높이 평가하여 한 말이다. 1598년 7월 16일에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수군과 협력하기 위하여 왔다. 그런데 진린의 성격이 사납고 까다로와 남들과 흔히 틀리기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꺼리였다. 류성룡을 비롯한 관리들은 리순신부대가 진린의 전횡때문에 패하지 않겠는가고 우려하였다. 리순신은 진린이 오게 된다는 말을 듣고 군사들로 하여금 천렵과 사냥을 하여 사슴, 메돼지, 생선들을 굉장히 많이 잡아서 술과 안주를 푸짐히 준비하여놓고 그를 영접하였다. 명나라의 여러 장병들은 기뻐하면서 《리순신은 과연 훌륭한 장수이다.》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진린도 내심으로 기뻐하였다. 며칠후 적의 배가 부근섬에 침범해오므로 순신이 군사를 보내여 쳐부시고 수십명의 적병의 목을 잘랐는데 그것을 전부 진린의 공로로 해주었다. 록도만호 송여종이 어처구니없어하자 순신은 《적의 썩은 모가지야 명나라사람들에게 준들 그 무엇이 아까우랴. 너의 공은 내 장계에 있다.》고 하였다. 진린은 리순신을 더욱 존경하면서 일체 문제를 그와 의논하였고 나갈 때에는 그와 가마를 나란히 하여 앞서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명나라군사들속에서 우리 백성들을 략탈하는 행위가 나타나자 리순신은 진린에게서 그들에 대한 처벌권한까지 넘겨받아 우리 군사들과 다름없이 백성들의 실 한오리라도 빼앗는 자가 있으면 잡아다가 곤장을 안겼다. 진린은 리순신의 군사를 다루고 전투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감탄하여 그를 보통때도 리야(중국말로 친근감을 담고있는 존칭어)라고 부르며 존경하였다. 그리고 전투때에는 우리 판옥선에 옮겨타고 리순신의 밑에 서기를 좋아하였으며 자기 군대의 지휘권까지도 넘겨주었다. 로량해전때 리순신이 전사하자 그의 큰아들 회와 조카 완은 그것을 비밀에 붙이고 전투를 지휘하여 포위에 든 진린의 배를 구원해주었다. 전투가 끝난 후 크게 사례하려던 진린은 그가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세번 거퍼 넘어지더니 크게 울면서 《죽은 후에까지 나를 구해주었구려.》 하고 말하고 또다시 가슴을 치며 슬퍼하였다. 명나라의 수군들은 모두 고기를 내던지고 먹지 않았다. 후에도 진린은 리순신을 잊지 못해하였다. 이처럼 리순신의 뛰여난 군사적재능과 다정다감한 인간미, 능란한 외교술은 제노라던 진린을 머리숙이게 하고 진심으로 존경하게 하였다. 리순신의 군사적명성은 오래도록 국내외사람들속에 전해져내려왔다. 외국의 어느 한 학자는 자기의 저서에서 한산도해전을 평하면서 《조선의 제독 리순신은 적이 도주할것을 념려하여 직접 공격작전을 포기하고 노를 저어 후퇴하는것 같이 기만전술을 썼다. 이 전략은 완전히 성공하였다. 일본제독은 도주한다고 생각되는 적을 잡기에 바빠 전투함선들을 진격시켰다. 리순신제독은 너무 빨리 후퇴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적선들이 나란히 서도록까지 유도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이 제독은 쾌속정으로도 적선에 접근하기 힘들었을지 모를 일이였다. 그때 위기에 처한 순간에 큰 노를 저어서 함선들이 모두 16점의 침로를 취하게 하여 일본추격선에 공격을 가하였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이 기동이 지상에서는 간단한것으로 생각될지 모르나 해군전문가만이 이 기동은 훈련을 쌓은 숙련된 함대의 표준이라는 판단을 내릴수 있을것이다. 이때 조선전함들은 충각으로 적선을 쳐서 격파하는것으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리순신은 또 무적의 기함에 직접 승선하여 일본함대를 꼼짝 못하게 쳐부시며 짓쳐들어갔다. 다른 함선들도 역시 그렇게 하였고 적의 선봉선은 힘이 모자라 저들 함선이 후원하기 전에 침몰되고말았다. 이 선회작전에 있어서 많은 적선들이 침몰되였고 전진해오는 조선군 배머리에 그들의 배전은 로출되여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 승리는 위대한 조선제독의 더이상 있을수 없는 공훈이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로일전쟁(1904-1905년)당시 짜리로씨야의 발찍함대를 조선남해에서 격파한것으로 하여 일본에서 군신(군사를 《귀신》처럼 잘 알고 적용하는 인물이라는 뜻)으로 떠받들리운 도고라는 자가 있었다. 어느 한 모임에서 그는 1805년 트라팔가르해전에서 프랑스-에스빠냐련합함대를 격파하여 명장으로 알려진 영국의 해군제독 넬슨에 대비할만 한 인물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칭찬을 받아서 고마우나 나로서 말한다면 넬슨이란 그리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 진짜 군신이란 칭호를 받을만 한 제독이 있다면 그것은 리순신쯤으로 될것이다. 리순신에 비한다면 나는 하사관축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였다. 1905년 5월에 일본의 련합함대가 짜리로씨야의 원정함대를 크게 격파하고 승리한 해전은 세계해전사에서 유명한 해전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쌍방의 력량이 비슷한데다가 로씨야함선들의 흘수선이하부분이 높은 염도로 하여 수면으로 드러나 좋은 사격목표로 되였던 불리한 조건에서 진행된 전투였다. 따라서 리순신에 대한 도고의 찬사는 진정으로부터 우러나온것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참으로 리순신은 나라에 준엄한 시련이 닥쳐온 시기에 자기의 지혜와 생명까지도 서슴없이 바쳐 조국과 겨레를 보위하고 후세에 길이 남을 공적을 쌓은 애국명장이며 자랑스러운 민족의 아들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