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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양병》을 주장한 리이
리이에 대하여 평가할 때 정치가들은 그를 충의롭고 능력있는 정치가로, 군사가들은 선견지명있는 군사전략가로, 철학가들은 리기이원론을 제창한 철학자로 내세우고있다. 력사에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긴 리이, 그의 생에서 가장 의의깊었던 일들의 일부를 펼쳐보기로 하자. 리이(1536-1584년)는 본관이 덕수로서 고향은 강릉부 북평촌이며 자는 숙헌, 호는 률곡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의 낮은 벼슬을 지낸 리원수이다. 리이의 아버지쪽은 명문거족이 못되였고 한미한 시골선비가문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어머니 신사임당의 평산신씨가문은 매우 유명하였다. 리이의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중종때에 윤상공, 은보, 남공, 효의 등이 현량으로 천거하였지만 굳이 사양하고 진사로 생을 마쳤다. 강릉에서 신명화와 리씨의 다섯 딸(아들은 없다)가운데 둘째딸로 태여난 신사임당은 어린 나이에 경서를 통독하고 글을 지을줄 알았으며 그림을 잘 그리고 수를 잘 놓고 바느질을 잘하였는데 그 모든것이 극히 정교하였다. 그리고 타고난 자질은 순박하고 효성스러우며 지조가 있고 말이 적으며 행동을 삼가하였으니 부녀의 덕을 다 갖추었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의 슬하에서 나서자라서인가 리이는 어려서부터 총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신사임당은 셋째아들인 리이를 임신하였을 때 꿈에 룡을 보았으므로 처음 이름을 현룡(몌龍 꿈에 룡을 보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리이의 생가는 《몽룡집》(꿈에 룡을 본 집이라는 뜻)이라고 전해 온다. 리이가 세살 나던 해 외할머니 리씨가 석류를 따주면서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고 물은적이 있었다. 리이는 《석류피리쇄홍주》(石榴皮裡碎紅珠 석류껍질안에 부서진 붉은 구슬)이라는 한시를 지어 대답하였다. 4살 나던 해에는 《사략》 첫권을 배우다가 마을선생이 잘못 가르친 구독을 지적하여 바로잡아주었다. 그리고 7살에는 경서를 통달하고 글을 지었으며 10살때에는 《서리바람 땅을 흔들매 일만군마의 칼휘두르는 소리울리듯, 눈꽃이 하늘에 흩뿌릴제 천섬의 구슬알 흩어지는듯》이라는 유명한 《경포대부》를 지었는데 오늘도 사람들이 즐겨 읊고있다. 그의 문장은 열네댓살때 크게 성취되였다고 한다. 앞날이 촉망되는 수재로 소문을 자자하게 내며 재능있는 어머니의 품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리이에게 생각지 못했던, 생각하고싶지도 않았던 커다란 불행이 닥쳐왔다. 그토록 남편에게는 현숙한 안해로, 자식들에게는 자애론 어머니로 사랑받고 공경받던 신사임당이 병사한것이다. 12살때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자기 팔을 찔러 피를 내여 대접했다는 효자 리이,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죽음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아직은 열여섯살, 어머니의 사랑이 한껏 그리운 그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그의 슬픔이 얼마나 컸으랴. 밤낮으로 통곡하며 슬퍼하던 그는 19살이 되던 해 어느날 봉은사에 들어가 불교서적을 보고 사생의 설에 깊이 느끼고 그 학문이 간편하고 정교로운것을 기뻐하며 거기서 진리를 찾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의 계률을 지키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러자 산속에는 산부처가 나타났다고 떠들썩하였다. 여러해 불단에 몸을 던져 진리를 탐구하던 리이는 그것이 허무한것임을 깨닫고 유교학문을 닦는데로 돌아섰다. 그는 금강산을 내려 성혼, 송익필과 막역지우의 정을 맺고 22살에 성주목사 로경린의 딸과 결혼하고 다음해 강릉외가로 가는 길에 퇴계 리황을 만나게 되였다. 두사람은 이틀간 이야기를 나누며 현격한 나이차이에 구애되지 않고 서로의 재능과 인간됨에 탄복하며 찬사를 마지 않았다. 이로부터 리이는 유학에 깊이 발을 잠그게 되였고 또 그의 학설에는 리황의 영향이 다분히 미치게 되였다. 리이는 29살때 진사시와 명경과에 급제한 후 뛰여난 재능과 인격으로 하여 빠른 승급의 일로를 걷게 되였다. 좌랑, 정랑, 정언, 지평, 직강, 교리, 검상, 사인, 청주목사, 응교, 사간, 승지, 직제학, 대사간, 황해관찰사 등 중앙과 지방의 벼슬을 력임하였다. 리이는 능력있는 정치가였다. 그는 강직한 성격과 언제나 멀리 내다보는 정견으로 대바른 상소문을 자주 올려 당시의 페단을 강하게 지적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오래동안 큰 전쟁이 없이 평화가 지속되자 봉건통치배들속에서는 안일사치한 풍조가 만연되고 저들의 부화타락한 생활을 위해 인민들에 대한 착취와 압박도 증대하였으며 그에 반항하는 인민들의 반봉건적진출도 강화되였다. 리이는 1569년에 당시의 사회경제적형편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이 형편대로 간다면 불과 수년내에 백성들이 반드시 폭동을 일으켜 토붕와해를 면치 못할것이다. 백성들이 거의다 죽어가는 사람과 같이 허덕이고있으니 그냥 살아가기도 어려운데 만일 남, 북으로부터 외적이 침입한다면 마치 질풍이 락엽을 휩쓰는것과 같이 될것이다.》 리이가 여러차례 개혁안을 제기하였으나 간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던 13대왕 명종(1546-1567년)과 옛 관습에 물젖어있던 대신들은 그의 제의를 청년의 호기에서 나온 망상으로 몰아붙이고 크게 신임도 하지 않았다. 14대왕인 선조(1568-1608년)집권후 그는 자기의 개혁대책을 완강히 제기하였다. 리이는 임금이 왕도정치를 실현하느냐 못하느냐는 말공부가 아니라 실지행동에 달려있는것이라고 하면서 권력잡은 간신들 특히 외척들이 날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리이는 사람들이 인종(12대 재위 1545년)의 외삼촌인 윤임일파에 가담하였다가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일파에 의해 탄압당한 1545년의 《을사사화》에 대한 재평가문제를 강하게 제기하여 당시 대신이고 원로인 령의정 리준경과 대립되기도 하였다. 1574년 리이가 왕에게 올린 1만자에 달하는 장문의 건의서는 당시의 환경에서 매우 적절한 대책안으로서 그의 정치적재능을 잘 보여주고있다. 그는 당시의 정사를 보면 공물대장은 연산군이 백성들을 못살게 굴던 법을 그대로 그러쥐고있고 관리임명은 권세잡은 간신들이 청탁하던 관례를 따르고있으며 문학을 앞세우고 덕행을 부차시한 결과 덕행이 높은 사람이 결국 낮은 벼슬에 파묻혀있고 문벌을 중히 여기고 어진 인재를 천대한 결과 집안이 보잘것 없는 사람은 자기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나쁜 풍습과 잘못된 관례는 이루 다 진술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뜯어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리이는 정사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것은 실지공력을 들이지 않기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원인을 일곱가지로 밝히였다. 그것은 첫째로, 웃사람과 아래사람사이에 서로 믿어주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고 둘째로, 신하들에게 일을 맡겨주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며 셋째로, 경연에서 임금의 덕망을 길러주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고 넷째로, 어진 사람을 불러들여 등용하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며 다섯째로, 재변을 당하고도 하늘에 보답하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며 여섯째로, 여러 신하들이 올린 대책에는 백성을 구원하는 실속이 없는것이며 일곱째로, 사람들의 마음이 착한데로 지향하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내용을 하나하나 밝히였다. 리이는 건의서에서 임금에게 덕을 고수하는 면이 부족하고 의심하는 결함이 있다고 하면서 임금이 자신을 수양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데서 지켜야 할 점들을 지적하였다. 그는 임금이 자신을 수양하는데서 옛날 《성인》들의 훌륭한 시기를 회복하는것을 목표로 하고 《성인》의 학문에 힘을 넣으며 공정한 도량을 가지고 어진 선비를 가까이 하는 등 네가지 항목을 대강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백성을 편안케 하는데서는 성의를 보여 아래실정을 알아내고 공물대장을 고쳐 함부로 걷어들이는 페단을 제거하며 절약과 검박한것을 숭상하여 사치한 풍속을 없애고 노비를 뽑아올리는 제도를 변경하여 관청노비들의 고통을 덜어주며 군사에 관한 정사를 바로잡아서 안팎의 방비를 굳건히 다지는것 등의 다섯가지 항목을 대강으로 제기하였다. 선조는 아주 좋은 말들이나 뜯어고칠것이 많아서 갑자기 모두다 변경할수는 없다고 하였다. 당시 부패한 봉건사회에서 리이의 주장들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여도 성사될리 만무하였다. 1574년 10월 황해도관찰사로 임명되여 내려간 리이는 도안의 페단들을 전부 개혁할것을 진술한 상소문을 올렸다. 학교를 대대적으로 개선하고 학교규범을 거듭 강조하며 탐오하는 자를 단속하고 착한 사람을 표창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돌봐주고 군사에 관한 정사를 개선할데 대한 그의 제의는 선비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의 제의를 많은 경우 들어주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유감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리이는 후날 명재상으로 이름날린 리원익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일을 맡기며 내세워주었다. 리이는 정계에 있을 때나 은퇴하였을 때나 언제나 나라일을 걱정하며 많은 대책안들을 제기하였다. 옛사람들은 리이의 정치적재능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였다. 《조정에 나와서 임금을 섬길 때에는 충성과 힘을 다하였으며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시골에 들어가있으면서도 늘 생각이 끌리여 잊지 않았다. 전후에 걸쳐 밀봉해올린 글들과 직접 만나서 제의한 말들은 정직하고 간절하였다. 정사의 원칙을 론할 때에는 그 범위가 높고 원대하였는데 <3대>때(성인들이 통치하던 시대를 의미함)의 정사를 회복하는것을 목표로 삼았다. 나라형편이 쇠퇴해지는것을 보고는 어지러워질 기미를 환히 알았기때문에 언제나 임금의 그릇된 생각을 고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조정을 화합시키는것을 기본으로 삼았고 나쁜 정사를 뜯어고치고 백성들을 구제하며 군사와 관련한 준비를 마련하는것을 앞세웠다. 곱씹어 조항별로 렬거하여 론의한것은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한결같은 의견이였는데 그때마다 소인과 속된 무리들의 저해를 받았으나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리이는 사람들사이의 화목을 보장하는데 깊은 주의를 돌렸다. 그는 무엇보다도 집안의 화목을 도모하는데서 사람들이 본받을만 한 본보기를 보였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한집에서 아홉세대가 동거한 옛사람을 공경하였으며 자기도 그처럼 하리라고 마음다졌다. 그는 맏형수에게 신주를 받들고 와서 함께 살것을 청하였으며 삼촌과 둘째형, 아들, 조카들을 전부 모아서 먹고 입는것을 같이하였다. 설날과 초하루, 보름의 이른새벽이면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였으며 드나들 때에도 모두 례절을 갖추었다. 그는 별도로 훈계하는 글을 짓고 우리 글로 해석하여 가르치군 하였는데 집안이 꼭 관청과 같았다고 한다. 한 대청에 죽 모여앉아서 밥을 먹으며 글을 읽거나 노는 장소에도 모두 례절이 있으니 당시 례법을 강론하고 상례와 제례를 잘 지키노라고 하는 사람들도 집에서 가르치는 례절은 모두 따를수 없다고 하였다. 리이는 늘 아버지를 일찌기 여읜것을 비통하게 여기여 둘째형을 엄한 아버지 모시듯 하면서 부지런히 시중들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섬겨서 여름이나 겨울에는 덥고 서늘한 정도를 맞추며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피고 새벽문안을 하였으며 록봉마저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이 례절이 아니라고 나무라면 리이는 《나 개인의 의견이 이러할뿐이지 별로 본받을것까지는 못된다.》라고 하였다. 리이는 가정을 화목하게 만든 그 방법으로 정치가들사이의 화합도 이룩해보려고 노력하였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동인과 서인의 당쟁조정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였다. 리왕조의 통치질서를 문란시키고 나라를 파국에로 몰아넣은 당파싸움은 리조전랑임명문제를 둘러싸고 시작되였다. 전랑은 홍문관의 정3품 직제학이하의 관리들을 제 마음대로 임명하고 철직시킬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있었다. 리조의 장관인 판서와 그아래 참판, 참의 세 당상은 전랑들이 제기하는데 응하기만 할뿐이였다. 이전의 여러 사화들도 많은 경우 여기서 출발하였다. 1565년에 리조참의 심의겸이 전랑후보자 김효원을 권신 윤원형의 망나니사위와 가깝게 지냈다고 하여 임명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후 전랑이 된 김효원은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전랑후보로 추천되였을 때 왕가의 외척이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심의겸과 김효원이 서로 엇나가게 되고 당파가 갈라지게 되였다. 김효원의 집은 동쪽성에 가까왔으므로 그에게 붙은 젊은 신진들을 동인이라고 하였고 심의겸의 집은 도성 서쪽에 있어 그에게 붙은 오랜 신하들을 서인이라고 하였다. 리이는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되도록 화해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조정에서 두파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지방관으로 내보낼데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당파싸움이 격화되기 시작한 해인 1575년에 김효원은 부령부사로, 심의겸은 개성류수로 임명되였다. 리이는 서인으로 지목받던 이름있는 관료인 정철에게 젊은 선비축들과 친근하게 지내면서 동인, 서인에 대한 말을 깨뜨려버리라고 하기도 하였고 여러차례 글을 올려 동인, 서인을 화합시킬것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리이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1581년 대사간으로 있던 리이는 사직시켜줄것을 청하면서 《오늘의 급선무는 동인, 서인의 관계를 깨뜨려버리고 선비들을 단합하는것인데 신이 진정시켜내지 못하였으니 차라리 일반 관리로 있으면서 하찮은 정성이나마 다할것을 원합니다.》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호소하였다. 동, 서 두 글자는 나라를 망칠수 있는 화근으로 간주하며 어떻게 하나 화합시키려고 하던 리이는 나중에 《하나의 승려》에 불과하며, 《임금도 부모도 버리고 륜리에 어긋나는 죄를 지었다.》느니 하는 비난도 받았다. 그가 한때 승려로 되였던 사실을 트집잡은것이였다. 그러거나말거나 리이는 《당면한 난국을 수습하는것을 앞세우면서 일단 벼슬길에서 물러났다가도 다시 나왔으며 선비들을 보호하고 화합시키는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기면서 사사로운 생각이 없이 할말을 다하였다.》고 한다. 리이는 군사에도 밝은 군사전략가였다. 1583년 리이는 병조판서로 임명되여 군사관계사무를 맡아보게 되였다. 당시는 북쪽변경에서 녀진인들의 준동이 우심해져 리조정부로서는 매우 골머리를 앓고있을 때였다. 리이는 《지난날의 사실로 보아도 대제학으로 있던 신하가 군사에 관한 직무를 맡아본 일은 드뭅니다. 그것은 문과 무의 중요한 자리이므로 결코 한사람이 겸임할수 없기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교체하여줄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리이의 재능을 인정하고있던 선조는 그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경은 이전부터 제도를 뜯어고치자고 계속 간절히 말하여왔는바 이것이 경의 소원이였다. 경이 정말로 신기한 계책을 내여 이때까지 내려오는 페단들을 깡그리 씻어버리고 군사를 양성하는 규정을 마련한다면 나라의 다행으로 될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조는 사무가 복잡하고 바빠서 민첩하고 로련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도 미처 처리해내지 못할가봐 늘쌍 걱정하는 판이였다. 리이는 선비출신의 관리로서 갑자기 군사와 관련된 중대한 임무를 맡은데다가 때마침 변방일이 소란한 때였지만 문서가 잔뜩 쌓여있어도 거침없이 처리해내였다. 이에 대하여 옛 기록에서는 《그물줄을 추켜들면 그물코가 일어서듯이 크고 작은것을 놓치지 않으니 병조의 늙은 서리들이 말하기를 이때까지 판서를 보아오던중 이처럼 일을 잘 처리하는분은 없었다고 하였다.》고 전하고있다. 리이는 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할데 대한 여러가지 대책안들을 제기하였으며 그가운데 일부는 실시되여 일정하게 효과도 거두었다. 리이는 서자들과 공노비, 사노비들가운데 무예가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자기 주둔지에 가서 일정한 기간 복역하면 서자에 한해서는 벼슬길을 틔워주고 노비들에 한해서는 량인신분으로 고쳐주도록 할것을 제의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는 또한 병조의 군사들이 자기의 번을 빼먹은 속죄값으로 바친 베가 다락창고에 쌓여있는것을 관리들이 자기 개인물건처럼 여기고 망탕 써버리는데 이것을 변방에 보내여 군사장비를 갖추는데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군자감에 쌓아둔 베를 싸움터에 나간 군사들의 옷감으로 보충하며 모든 관리들의 록봉을 줄여서 주둔지에 나간 군사들의 처자에게 돌려줄것을 청하였다. 이렇게 되여 주둔지 군사가 넉넉해져서 안쪽지대에서 징발하는 군사가 많지 않았으며 변방의 량식을 넉넉하게 당겨쓰면서도 변경에 저축하여둔 곡식은 줄어들지 않았고 군사들은 모두다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면서 자기 집 걱정을 잊게 되였다고 한다. 그리고 표창과 형벌이 공평하고 진영과 보의장수와 군사들이 점차로 적을 맞받아나가 적을 잡을수 있게 되였고 6진이 다시 안정되여 변방야인들이 더는 배반하지 않는지가 20여년이나 되였으니 이것은 대체로 리이의 한때 조치가 옳게 취해진 성과였다고 하였다. 리이가 군사전략가로서의 안목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사실을 들수 있다. 언제인가 리이는 경연석상에서 의견을 올리면서 10만의 군사를 미리 양성하여가지고 앞날에 있을수 있는 뜻밖의 변란에 대처할데 대하여 요청하였다. 그런데 류성룡은 《군사를 기르는것은 재난을 기르는것이다.》라고 하면서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전에도 류성룡은 인재를 찾아들여 정사를 맡기고 규률을 추세우며 묵은 페단들을 뜯어고치며 반대의견들에 귀를 기울이지 말것을 제의한 리이의 대책안에 반대립장을 표명한적이 있었다. 리이는 인재로, 앞날이 기대되는 재상감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던 류성룡이 자기 의견을 반박하는데 대해 한탄하면서 이렇게 말하군 하였다. 《류성룡은 재주와 기개가 정말 대단하지만 나와 함께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죽은 다음에야 자기의 재주를 실현할 날이 있을것이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서야 류성룡은 그때 자기가 리이의 《10만 양병》주장을 반박한데 대해 몹시 후회하였다. 그는 이 전쟁에서 나라일을 맡아가지고 군무를 처리하게 되면서 언제나 리이가 앞일을 내다보는 안목과 충성스럽게 일한 절개가 있었다고 칭찬하였으며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오늘에 꼭 도움이 되였을것이라고 하였다. 리이는 재능있는 철학자로서도 명성을 남겼다. 그의 철학사상은 리기이원론에 기초한 객관적관념론이였다. 그의 리기이원론은 리의 기에 대한 선차성, 지배와 통제를 인정하는 관념론적립장에 서있으면서도 리의 작용을 일면적으로 내세운 리황에 비하여 기의 작용을 강조한 점에서 진보성을 가지였다. 그의 사상은 중소토지소유자계층의 리익을 대변한것인 동시에 통치계급전체의 리익을 고려한것이였다. 그의 제자들은 후에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리황의 제자들로 꾸려진 령남학파와 대립하였다. 정치가로서, 군사전략가로서 리조봉건국가의 통치제도가 가장 문란해졌던 시기에 국력의 강화를 위해 고심분투한 리이. 그가 제기한 개혁제안들과 전망적인 건의안들이 당시 부패한 봉건통치배들에게 모두 접수될리는 만무하였다. 그러나 그가운데 일부는 채용되여 실지로 덕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후에 임진전쟁이 일고 리왕조의 형편이 기울어지게 된 때에 가서 사람들은 리이의 예견성에 감탄하고 그가 시행하여야 할 대책을 건의한것들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채택한 문제가 많았다고 하니 리이의 정치적재능, 군사가로서의 안목을 이로써 알수 있다.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고 갈수록 수양이 더욱 깊어졌으며 맑고 화기로우며 소탈하고 과단성이 있었다고 하는 리이. 그가 나라를 위해 바친 공적은 력사에 남았고 후세에 전해졌다. 리이가 죽던 날 임금이 놀라며 슬퍼서 소리내여 울었으며 3일동안 고기없는 음식을 들고 부의를 전례없이 후하게 주었다. 모든 관리들과 친우, 동료들, 성균관의 여러 유생들과 호위하는 군사, 저자사람들, 품계에 드는 모든 관리들과 서리들, 하인들까지 다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 제물을 올리고 소리내여 울었다. 외진 항간의 백성들도 간혹 서로 조문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백성들이 복이 없구나.》라고 말하였다. 발인하던 날 밤에는 먼데 가까운데 할것없이 모여와서 상여를 호송하였는데 수십리에 련달려 홰불이 하늘을 환히 밝히였다. 수도안의 리이가 거처하던 집에는 여유량곡마저 없었으며 친우들이 옷을 갈아입히고 부의를 주어 렴하고 장례를 지내주었다. 그리고 집식솔들에게 자그마한 집을 사주었으나 식솔들은 여전히 살아나갈수가 없었다고 한다. 리이는 비록 통치계급의 일원으로서 그가 바란것은 봉건국가의 강화발전이였지만 나라의 형편이 어지러운 때 국력의 강화와 겨레의 안녕을 위해 바친 공적은 단군민족사에 길이 전해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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