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장수 남이
 

 

청년장수 남이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다 말리리

  사나이 스물에 나라평정 못한다면

  뉘라서 뒤세상에 대장부라 하리오

 

구절구절에서 장수의 기개와 용맹이 맥박치는 이 시는 청년장수 남이가 지은것이다.

남이는 조선을 천하에 우뚝 내세울 웅대한 포부를 지니고 외래침략세력과의 싸움에서 용맹을 떨치고 20대에 나라의 중신이 된 청년장수였다.

남이(1441-1468년)의 본관은 의령이고, 리조 3대왕인 태종의 외손이며 의산군 남휘의 아들, 좌의정 권람의 사위이다.

뜨르르한 문벌을 가진 남이는 어렸을 때부터 용모가 기걸차고 구애됨이 없었다고 한다.

아이적에 그는 《귀신》도 알아보는 재주로 좌의정 권람의 넷째딸을 구원해주고 그의 사위가 되였다고 한다.

무예에 대한 깊은 지식과 만사람을 압도하는 기개를 지니였으며 어릴적부터 날래고 억센 기질로 하여 1457년 16살에 무과에 합격하였고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대궐을 호위하는 반렬에 참가하였다.

그는 1463년 건주위녀진을 정벌하는데서 공을 세워  행-부호군, 행-호군,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출세의 일로를 걸었으며 적개공신 1등으로, 27살에는 병조판서로 임명되였다.

그가 장수로서 성공할수 있게 된 비결은 용감성, 언제나 돌격전의 앞장에 서는 희생적인 투쟁정신이였다.

세조왕(1455-1468년)은 남이를 표창하면서 《군사의 앞장에서 곧장 달려갔고 오직 싸우다 죽는것을 영광으로 여겼으며 싸움판에서 뒤떨어질가봐 늘 걱정하였다.

팔을 걷고 앞장서는 용맹을 발휘하였으며 한몸바쳐 감당하겠다는 마음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였다.

화살과 돌이 비발치는 속을 뚫고 용감하게 돌진하는 남이의 용맹에 대한 칭찬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였다는것은 그가 참가한 전투과정들이 잘 보여주고있다.

특히 1467년 9월말부터 10월초사이에 단행된 리조봉건정부의 파저강 건주위녀진정벌과정에 남이의 용감성은 남김없이 과시되였다.

원래 그해 1467년 4월 29일에 모련위올량합녀진 1,000여명이 의주 조모정에 침입하여 목책을 포위한 사건이 있었다. 싸움과정에 아군의 손실이 있었다. 의주목사 우공이 량신과 린산군수 리규 등과 함께 3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대창산밑에까지 추격하였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패하여 달아났다.

아군의 패전소식을 들은 세조왕은 노하여 가만히 앉아 치욕을 당할수 없다고 하면서 적들의 죄를 공포하고 들이칠것을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릉성군 구치관을 도체찰사로 하고 강순, 오자경, 어유소, 최적, 리극균 등을 비장으로 하여 정예군사 1만 5,000명을 거느리고 5개 방면으로 나누어 쳐들어갈데 대한 계획이 세워졌었다.

그러나 인차 터진 함경도농민전쟁이 8월까지 계속되면서 원정계획은 뒤로 미루어졌다.

농민전쟁이 진압되자 9월에 리조정부는 다시 중추부 지사 강순을 주장으로 하고 중추부 동지남이와 중추부 지사 어유소를 대장으로 삼아 1만여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원정을 단행할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원정은 서북쪽으로부터 명나라군대와 협동하기로 되여있었다. 명나라 역시 녀진인들의 《교만》한 행위와 로략질로 하여 골머리를 앓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 명나라군대가 시간을 질질 끄는 바람에 원정은 조선군사의 단독행동으로 진행되였다.

세조는 《이번 싸움은 그림자를 잡는것 같아서 명나라에서 아무리 오래 시일을 끌어도 결국은 저희들이나 피로를 가져올뿐이다. 싸움의 방법은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왔다갔다 하며 번개처럼 변화하여 정황이 일정하지 않은바 다만 허실을 잘 타산하고 기회를 옳게 리용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기어이 건주위녀진을 쳐없애라고 하였다.

원정군은 좌군, 중군, 우군으로 편성되였는데 중군대장은 주장 강순, 좌군대장은 어유소, 우군대장은 남이였다.

강순, 남이의 부대는 이미 9월 24일에 압록강을 건느고 25일에 어유소의 부대와 황서평(집안현성)에서 만났다. 원정군은 불의성을 기하기 위하여 예정했던 27일(명나라측은 29일에 하자고 제기했었다.)보다 하루 당겨 26일에 단독으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조선원정군은 두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원정군의 작전계획은 적의 두개의 기본소굴을 동시에 타격하여 리만주와 조삼파를 처단하는것이였다. 이 계획에 따라 강순과 남이의 부대는 리만주의 소국인 올라산성의 옹촌을, 어유소의 부대는 조삼파와 건주우위추장 보하토의 소굴인 오미부를 공격하였다.

원정군은 건주위녀진에 대한 정벌을 성과적으로 끝마치고 10월초에 개선하였다. 이번 원정에서 남이의 부대는 강순의 부대와 협동작전을 벌려 침략의 괴수 리만주와 그의 아들 고납합, 타비랄 등 근 200명을 죽이고 만주와 고납합의 처자권속 24(23?)명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한인남자 1명과 녀자 5명을 사로잡고 무기와 기재, 말과 소들을 로획하였다. 원정군은 집과 쌓아둔 곡식을 불살라버린 다음 철수하여 명나라군대를 기다렸으나 여러 날 소식이 없으므로 10월 2일에 부대를 돌려 3일에 강을 건넜다.

좌군대장 어유소의 부대는 적 71명을 죽이고 한인녀자 1명을 붙잡았으며 무기와 기재, 말과 소들을 로획하고 집 97채를 불살랐다. 그들도 명나라군사를 기다리다가 소식이 없자 철수하였다.

총적인 전과를 보면 286명을 죽이고 24명을 포로하였으며 말 17마리, 소 10마리를 로획하고 229마리를 죽이였다. 그리고 집 195채와 낟가리 217개소를 불사르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동시에 이전에 잡혀갔던 료동 동녕위의 남자 1명과 녀자 6명을 구원하였다.

원정에서 가장 큰 성과는 건주 중위의 도지휘사인 리만주와 그의 아들 고납합을 죽인것이다. 이미 세종집권시기 최윤덕이 리만주를 정벌하였을 때 이자는 부상을 당하고 도망쳤었다.

리만주는 교훈을 찾지 못하고 빈번히 수하졸개들을 보내여 략탈과 살인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번 원정에서 침략의 괴수들을 소멸함으로써 건주위녀진에게 타격을 주고 변경을 소란시키던 적들이 한동안 기가 질려있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도 남이는 역시 날래고 용맹이 남보다 뛰여난 청년장수로서의 명성에 어울리게 잘 싸웠다.

그는 항상 먼저 적을 공격하고 먼저 성에 올랐으며 힘껏 싸워 공을 세웠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라는 시는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지대를 두루 돌며 회군하는 길에 백두산의 웅건한 자태를 감회속에 바라보며 청춘의 열정과 기상을 담아지은것이다. 이 시는 나라 위한 싸움에 한몸 다 바치려는 애국적기상이 맥맥이 흘러넘치는것으로 하여 당대 사람들은 물론 후시기까지도 사람들속에 널리 불리워지고 있다.

하지만 청년장수의 최후는 매우 비참하였다.

일부 문인관료들은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그의 용맹하고 호방한 기상을 은근히 두려워하며 제거할 음모까지 꾸미였다.

남이는 자기에게 미구에 닥쳐올 화를 의식하지 못한듯 서슬푸른 장검을 비껴들고 나라를 위한 길에 전공을 수놓아갈 꿈만 꾸고있었다.

 

  장검을 비껴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일엽제잠이 호월에 잠겼어라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볼가 하노라

 

1468년 9월 7일 세조가 갑자기 병이 심하여 세자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1468년 9월 8일 남이를 사랑해주던 세조가 죽고 그뒤를 이어 예종이 즉위하였다.

그는 세자로 있을 때부터 5촌숙이여서 자기보다 한 항렬 우인 남이가 자기를 업수이 여기지 않는가 하여 몹시 신경을 썼다.

집권후에는 혹시 어린 자기를 병권으로 내리누르지 않겠는가 하여 몹시 저어하면서 겸사복장으로 좌천시켰다.

하루는 세조의 시신이 아직 빈전에 있을 때 남이가 궁안에 들어와 일을 보던중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혜성을 두고 이런저런 말을 하던중 남이는 《혜성은 옛것이 없어지고 새것을 펴는 징조요.》라고 말하였다.

승정원 옆방에서 이 말을 엿들은 류자광은 손벽을 쳤다. 그 역시 용맹이 뛰여난 자인데 단번에 여러층의 섬돌을 뛰여오르고 큰 기둥을 잡고 우로 기여올라가기를 마치 원숭이가 나무를 타듯 하는 자였다.

그는 세운 공이 적지 않지만 단지 애비 류규의 첩의 소생인 서자라고 하여 수모와 멸시를 받는데 대하여 늘 앙앙불락이였다.

세조왕의 특별지시로 그가 병조정랑이 되였을 때 서자로 병조의 정랑자리를 차지한것은 안될 일이라고 대간에서 얼마나 떠들어댔는지 모른다.

그러나 류자광은 이 기회에 가문을 믿고 우쭐렁대는 자들에게 혼쌀을 내주고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류자광은 10월 24일에 어전에 들어가 역적고변을 하였다. 그는 남이의 옛것을 멸하고 새것을 편다는 말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여 반역의 뜻을 로골적으로 드러낸것이라고 하였다. 지어 이자는 남이가 지은 시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에서 《…나라평정 못한다면》(《미평국》)을 《나라를 얻지 못한다면》(《미득국》)으로 고치여 읊어보였다.

지어 남이가 공주를 강간하려고 했다는 터무니없는 말까지 하였다.

평시에 용맹한 남이를 꺼리던 예종왕은 이때라고 생각하고 류자광의 모함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잡아가두게 하였다.

남이는 애젊은 나이에 큰뜻을 펴보지 못하고 죽는것이 원통하였다. 그가 옥에 갇혀있을 때 큰칼과 족쇄를 벗어던지고 몸을 솟구쳐 천정에 올라가 도망치려는데 누군가 그의 옷소매를 꽉 붙잡았다.

남이가 누구냐고 물으니 그는 《나는 옥졸이다. 그대가 힘이 보잘것 없으면서도 높은 벼슬을 하고 나는 그대의 몇백배 되는 용력이 있는데도 신분이 낮아서 옥졸노릇을 하니 어찌 그대가 벌을 받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남달리 뛰여난 힘과 무예를 지닌 남이였지만 그의 손에서 도저히 빠져나가지 못하리라는것을 알고 다시 옥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남이의 뛰여난 용력과 함께 당시 많은 사람들이 힘과 재능을 가지고있으면서도 단지 신분이 낮은것으로 하여 등용되지 못하는것을 원망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원망이 당시 청년장수로서 명성을 떨치고   20대에 대신이 된 남이에게 옮겨졌는지 어쨌든 남이에게 운명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남이는 령의정이라는 최고관직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무고함을 변호해주지 않는 강순이 아니꼬왔다.

80객으로 죽을 나이가 다가왔는데도 아직 30도 안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인재를 구해주지 않는 강순이야말로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물건, 국록만 없애는 산 송장이였다.

남이는 자기가 강순과 함께 모반하려 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결국 강순도 남이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갔다. 남이의 소행을 누구도 그르게 여기지 않았다.

남이는 때를 잘못 만나 청춘의 기개를 펴보지 못하고 억울하게 최후를 마쳤다. 그러나 나라의 안전을 지켜 언제나 돌격전의 앞장에서 헌신적으로 투쟁한 그의 공적은 그의 넋과 기개가 어린 훌륭한 시들과 더불어 길이 전해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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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아래 - - 2016-07-09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서 이해하기 좋습니다. 제가 원하던 국사책이네요.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근데 어째 이미지는 안보이네요. 당시 영토가 표시된 지도그림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관리자 - - - - 2016-07-09
이미지문제가 해결되였습니다.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다음편은 언제 올리나요.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력사이야기들을 많이 올려주세요. 명인전, 무술명인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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