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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엄으로 변방을 안정시킨 김종서
우리 나라 력사에는 위엄과 명성으로 변경의 안전을 지켜낸 장수들이 적지 않다. 그가운데는 리조시기의 김종서도 있다. 김종서(1390-1453년)는 도총제 김후의 아들로서 자는 국경, 호는 절재이며 본관은 순천이다. 그는 1405년에 문과에 합격한 후 여러 벼슬을 력임하여 나중에는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발탁되기 시작한것과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있다. 태종이 직접 인사이동을 집행하던 날 최흥효가 리조의 아래관리로 들어가 사령장을 쓰게 되였다. 그는 글씨를 잘 쓴다고 소문이 났는데 진나라 유익이라는 사람의 글씨체를 모방하였을뿐이다. 붓대를 움직이는것은 익숙하나 루추한 꼴을 면치 못하였다. 그는 사령장을 쓰면서 붓을 가지고 획만 만드느라고 오래도록 한장도 다 쓰지 못하였다. 그때 김종서는 병조의 아래관리로 곁에 있으면서 수십장의 사령장을 한꺼번에 쭉 내려써서 임금의 도장인 옥새까지 찍었다. 그 글자획이나 옥새찍은 자국이나 모두 반듯하였다. 태종은 좌우의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이야말로 쓸모가 있는 인재로다.》라고 말하였다. 김종서는 이로부터 발탁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총명과 재능을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라고 할수 있다. 그가 수십년간의 정치생활에 쌓은 가장 큰 공적은 1433년부터 1440년사이에 함길도관찰사, 도절제사로 있으면서 두만강류역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것이다. 동북지방에서의 륙진개척 하면 사람들이 먼저 생각하게 되는것은 김종서라는 이름이며 김종서 하면 륙진개척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김종서의 생애에서 륙진개척은 당시는 물론 오늘까지도 사람들이 값높이 쳐주는 거창한 사업이였다고 할수 있다. 새로운 진과 고을의 설치, 남쪽지방인민들의 이주와 안착, 녀진인들의 저항… 헐치 않은 이 륙진의 개척은 강의한 성격과 날카로운 기질을 가진 김종서만이 끝까지 내밀어 완성을 볼수 있은 력사적인 사업이였다. 그처럼 어려운 사업을 기어이 수행한것으로 하여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 이름을 외우는것이다. 고려때 윤관이 조종의 뜻을 받들어 동북을 개척하여 9성을 설치하였으나 녀진의 저항으로 그들을 완전히 구축하지 못하였으며 후에는 그들에게 양보하였다. 허나 이 원정으로 국경선은 확정되여 동북지방은 고려의 령역이라는 인식이 누구에게나 자리잡고있었다. 김종서는 동북지방에서 녀진세력을 구축하고 오늘의 조선 동북국경을 확정해놓은것이다. 고려 윤관때도 그러하였거니와 이때도 이 동북방개척사업은 고난을 동반하였다. 녀진인들은 계속 변경을 위협하며 략탈과 살인을 일삼았고 일부 우리 사람들속에서는 빈번한 부역을 부담시하며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였다. 일부 관료들속에서는 페지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어떤 관료들은 김종서를 혹독하게 비난하였다. 세종왕도 몹시 안타까운 기색이였다. 당시 리조봉건정부는 서북쪽에서 리만주의 파저강 건주위녀진을 제압하고 응징을 가하는 한편 함길도쪽에서는 공격보다 방어를 강화할것을 주장하였다. 때문에 김종서가 여러차례 원정계획을 올렸으나 승인하지 않았다. 세종은 진을 설치하여 무력으로 소란을 피우는 녀진인들을 위압하도록 하였다. 김종서는 임금의 의도대로 진을 꾸리기 위한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벌렸다. 일부 사람들이 불평을 부렸지만 김종서는 나라의 만년대계를 위한 사업이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완강하게 일을 내밀었다. 그는 1434년 봄부터 1436년 가을까지 4진을 설치한 이후 홍원이남은 편안하게 지냈다고 하면서 4진의 설치는 정당한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늘 네 고을을 설치한것은 전적으로 북방을 보위하자는것이고 오늘 성곽을 쌓는것은 전적으로 변방을 공고히 하자는것이며 오늘 변방을 방비하는것은 역시 적들을 막고 우리 백성들을 편하게 하자는것이옵니다. 그런것만큼 오늘의 일은 그만둘수 있는것을 그만두지 않고 경솔하게 백성들의 힘을 쓰자는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좀 힘들더라도 끝까지 밀고나가자고 하였다. 한번은 그가 밤에도 초불을 돋구고 앉아 사업을 생각하고있을 때 적수들이 쏜 화살이 날아와 벽을 뚫었으나 그는 조금도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 강의한 의지력을 발휘하였다. 끼니때마다 그의 음식에는 그를 없애치우려고 꾀하는 자들이 충독(벌레의 독)을 섞어 들여왔다. 이것을 알게 된 종서는 먼저 소주 서너되를 마신 후에 식사를 하였더니 벌레의 독이 작용을 못하였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은 김종서가 한정된 인력을 가지고 성공하지 못할 큰일을 벌려놓았으니 그 죄는 죽어마땅하다고 독설을 내뱉기까지 하였다. 이에 대해 세종은 《비록 과인이 있더라도 종서가 없다면 이 일을 처리할수 없을것이요, 종서가 있더라도 과인이 없다면 이 일을 주장할수 없었을것이다.》라고 하면서 김종서를 변호해주고 그의 사업을 떠밀어주었다. 이런 믿음속에 김종서는 온갖 곤난을 강의한 의지로 이겨내며 동북방개척에 투신하였다. 하기에 옛 사람들이 평한것처럼 김종서는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한몸으로 이 일을 담당하였던것이다. 4개 진의 설치의의에 대하여 세종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번에 네 진을 설치하여 무력으로 위압하는것이 그들(회령의 범찰, 경원의 올량합족)에게는 마치 등에다가 가시를 지고 다니는것 같아서 깊숙한 곳에 피해가서 있고싶지만 올적합족의 여러 족속들이 반드시 종처럼 부려먹을것이였다. 그대로 살자니 마음이 편치 않고 깊이 들어가자니 자신들이 욕을 당하게 될것이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것만큼 그들이 우리의 네 진의 무력을 꺼려하는것은 명백한것이다. 영구히 네 고을을 꾸려가지고 야인들을 움쩍 못하게 눌러놓는다면 우리 백성의 마음은 동요하지 않고 야인들의 마음도 자연 안정될것이며 변경에 적들이 아무리 침입하려고 해도 길잡이를 설 사람이 없게 될것이다.》 후에 김종서는 북변의 정황과 방어대책과 관련한 장문의 글을 올리였는데 이것을 본 세종은 몹시 기뻐하며 그를 더 중히 여기게 되였다. 리조정부는 곧 남도의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온성, 부령 두 진을 더 설치하여 6진을 완성한 후 강변에 장성을 쌓아 방어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렇게 북변의 6진이 설치되였다. 강의한 의지를 지니고 위엄으로 야인들의 방해책동과 소요를 짓누르고 일부 백성들의 불평불만을 억제하며 변방의 안전을 위한 김종서의 헌신적투쟁은 계속되였다. 그 길에 바쳐진 그의 애국의 일념은 그가 지은 한편의 시조에도 반영되여있다.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데 만리 변역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바람 큰 한소리에 거칠것이 없어라
사람들은 륙진이 개척되고 국경이 안정되게 되자 비로소 김종서의 공을 알게 되고 그의 성과를 누리게 되였다고 한다. 김종서는 6진지방에서 활동한 경험에 기초하여 《제승방략》이라는 군사서적을 집필하였다. 2권 1책으로 되여있는 이 책은 처음에 김종서가 쓴것을 후에 리일이 함경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보충정리하여 1588년에 출판하였다. 그리고 1670년에 함경도 북평사 리선이 재판하였다. 김종서는 글씨도 잘 쓰고 선대왕조실록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집필에도 참가하였다. 재능있는 김종서는 위엄과 명성으로 변방의 안전을 지켜냈으나 어린 임금 단종을 잘 받들데 대한 세종과 문종의 유언은 지켜내지 못하였다. 그의 최대의 약점은 자기 과신이였다. 황보인이 도승지로, 김종서가 좌승지로, 안숭선이 동부승지로 있을 때였다. 김종서만이 아니라 안숭선도 호협하고 큰 재주와 학식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였다. 이 두사람은 도승지를 우습게 여기면서 턱아래수염을 뽑는것쯤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후에 황보인이 딴데로 옮긴 후 동부승지로 있던 안숭선이 도승지가 되였다. 안숭선은 명령을 받자 곧바로 승정원에 이르러 중문을 들어서서 도승지가 앉는 자리에 척 나가앉으면서 말하였다. 《이 자리가 앉을만 하군.》 김종서의 얼굴이 질리여 재빛이 되였다. 이로부터 두사람사이는 그만 좋지 않게 되였다. 후에 병조판서로 되였던 안숭선은 죄를 당해서 멀리 귀양을 갔는데 김종서가 얽어넣은것이라고 한다. 자기 과신은 결국 시기를 낳았던것이다. 여러차례 과오를 범하여 황희로부터 된욕을 당하면서도 김종서는 자기의 버릇을 끝내 털어버리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의 재능과 용력을 과신한 나머지 옆사람들로부터 수양대군이 정변음모를 꾸미고있다는 암시를 받았으나 코웃음을 쳤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제끼고 제가 왕좌에 오르자면 범같은 재상으로 명성이 자자한 좌의정 김종서를 먼저 제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힘장사들을 데리고 돈의문(서대문)밖에 사는 김종서를 찾아갔다. 결국 김종서는 궁노 임운이 소매속에 감추어가지고 왔던 철여의에 맞아 운명했다. 그는 《역적》으로 취급되여 《고려사》집필자명단에서도 삭제되였다. 위엄으로 변방을 안정시킨 김종서는 그 《위엄》으로 단종은 물론 자기자신과 지어 자기 가족도 지켜내지 못하였다. 일련의 과실이 있기는 하지만 《북변 6진》을 개척하여 변경의 안전을 보장하고 겨레의 무궁한 복록의 토대를 축성한 김종서의 공적은 력사에 길이 전해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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