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입상의 재능을 보여준 최윤덕
 

 

출장입상의 재능을 보여준 최윤덕 

 

세종시대에 배출된 수많은 명사들가운데는 나가서는 장수요, 들어와서는 명재상의 재능을 보여준 최윤덕도 있다. 그는 세종을 위하여 특출한 공을 세운것으로 하여 세종릉에  배향된 다섯 신하가운데 한 사람이였다.

최윤덕(1376-1445년)의 자는 백수 또는 여화이며 호는 림곡이고 본관은 통천이다. 그는 1410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후에는 우찬성, 평안도 도절제사와 안주목사를 력임하고 나중에는 우의정,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1419년에 3군 도절도사로서 리종무를 도와 쯔시마원정을 승리적으로 진행되게 하였으며 1433년 4월에는 파저강 건주위녀진정벌을 성공적으로 조직지휘하였다.

최윤덕은 15세기전반기 리조봉건정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외적의 거듭되는 침입을 막고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에 어느 정도 관심을 돌림으로써 출장입상의 재능을 보여준 군사정치가이다.

그는 태여나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였다. 그의 아버지 최운해는 변방을 지킬 중임을 띠고있는 무관으로서 그를 키울수 없어 이웃에 사는 양수척(버들고리 만드는 자, 가죽신 만드는 자, 백정노릇 하는 자 등 천인들을 가리키는 말)의 집에 키워달라고 부탁하였다. 이것은 최윤덕이 최하층 사람들의 생활을 리해하고 그에 동정심을 품을수 있게 한 계기로 되였다.

최윤덕은 성장하면서 힘이 남보다 곱절이나 셌다. 그는 센 활로 굳은 물체도 잘 쏘아뚫었다. 그는 가끔 양수척을 따라 사냥을 나가군 하였는데 그가 잡은것이 오히려 더 많았다.

하루는 그가 혼자 가축을 몰고 산속에 가서 풀을 먹이고있었는데 숲속에서 별안간 범이 내달아 가축들이 모두 흩어졌다. 윤덕은 얼른 말을 타고 이를 쏘아 한살에 죽여넘어뜨리고 돌아와 양수척에게 《얼룩얼룩한것이 그 크기가 보통이 아닌데 도대체 이것이 무슨 짐승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이미 쏘아죽였소.》라고 하였다. 양수척이 곧 산으로 올라가보니 커다란 범이 쓰러져있었다. 양수척은 윤덕의 무예가 뛰여난데 경탄하면서 합포에 있던 그의 부친을 일부러 찾아가 칭찬하였다.

윤덕의 부친은 아들을 사냥을 통해 시험해보고 수법이 민첩은 하지만 아직 무예의 규범을 알지 못하니 그의 동작은 한낱 산지기의 기능에 불과하다, 그쯤한것을 무슨 장끼라 하겠는가고 하면서 그에게 쏘는 기술과 방어하는 방법, 병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하여 윤덕은 명장으로 될수 있었다고 한다.

최윤덕의 명장으로서의 면모가 가장 잘 나타난것은 1433년 4월의 파저강 건주위녀진정벌이였다.

1432년 11월 29일 녀진족의 기병 400여명이 려연군(자성군)에 쳐들어와 주민 53명을 살해하고 77명을 랍치해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강계절제사 박초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사로잡혀가던 우리 나라 사람 26명과 말 30마리, 소 50마리를 탈환해왔다. 하지만 이 과정에 우리측에서도 전사자 13명, 부상자 25명이 났다.

평안감사 박규로부터 장계를 받은 세종은 몹시 노하였다. 그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격으로 이번 사건을 당하고서야 초소마다에 돌성이나 목책을 세워야 하겠다고 의견을 내였다.

최윤덕은 그러는 임금에게 자기가 이미 생각하고 제기해온것이라고 하면서 빨리 지대를 선택하여 성을 쌓고 방비를 잘하여 백성들이 야인들에게 잡혀가지 않게 하는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세종은 명나라사신들때문에 서북지방의 백성들이 더욱 지쳤기에 여직껏 쌓지 못하고있다고 변명하였다.

최윤덕은 《먼 후대에 가서 혹시 훌륭하지 못한 임금이 나게 되면 반드시 오랑캐들의 침입을 받아서 변방에 대한 걱정이 커질것이옵니다. 또 명나라사신은 오지 않는 해가 없는데 어떻게 사신이 오지 않는 때에 가서 쌓을수 있겠소이까.》 하며 안타까이 말하였다. 이것은 그가 변경에 성과 목책을 쌓는것을 당면한 문제로만이 아니라 먼 후날까지도 내다보고 제기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최윤덕은 성을 쌓는것과 함께 려연과 강계는 요해지인것만큼 무술에 능한 사람을 임명할것을 제의하였다.

한편 건주위녀진의 우두머리 리만주는 부하들을 시켜 붙잡아갔던 우리 사람 7명을 데리고 와서는 모든 죄행을 자기들과 적대관계에 있던 홀랄온 올적합에게 넘겨씌우고 저들은 오히려 조선을 위하여 노력하고있는듯이 요설을 피우게 하였다.

리조정부는 파저강 건주위녀진의 검은 속심을 꿰뚫어보고 이번 침입사건의 진범인이 바로 그놈들이라는것을 알아차렸다.

세종은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파견하고 각 도의 수군과 륙군이 무예를 익히는 훈련을 강화할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 이것은 최윤덕의 제의를 따른것이였다.

세종은 최윤덕에게 목책을 새로 만들고 군사를 초모하며 움직이는 일을 먼저 처리하고 후에 보고하게 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한것이였다.

세종은 파저강 건주위녀진을 정벌할 계획을 무르익히면서 한편으로는 사람을 보내여 놈들의 움직임을 엿보게 하였다.

전 소윤 박호문은 1433년 2~3월사이에 두차례에 걸쳐 건주위녀진에 파견되여가서 녀진인들의 전쟁준비상태, 력량, 지형과 도로 등을 탐지하였다. 1433년 3월 21일 그를 만나본 세종은 최종적으로 토벌결심을 내렸다. 그리고 최윤덕에게 죄악을 징벌하기 위해 군사를 출동시킨다고 하면서 장수의 직권은 이미 명령한것이니 그대로 행사하라고 비밀지시를 보냈다. 또한 중군절제사 리순몽, 좌군절제사 최해산 등 장수들과 군관, 군사, 백성들에게도 지시문을 내리여 장수의 명령을 성실히 받들도록 하였다. 겸하여 구체적인 사업세칙도 하달하였다.

리조정부에서는 원정군수를 처음에 기병과 보병 3,000명정도로 정하였다.

최윤덕은 정벌임무를 맡고 내려갈 때 정예한 군사 1,000명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정세를 료해하면서 그의 초기의 결심은 달라졌다. 마천에서 올랄 등지까지는 야인들이 개짖는 소리나 닭우는 소리까지도 서로 들리는 거리의 산골짜기에 널려살고있으므로 한두마을만 친다면 반드시 서로 구원해줄것이므로 승패를 예측하기 어려울것이였다.

최윤덕은 큰 군사란 다시 출동시키기 어려운 일이므로 한번 동원된 기회에 최상의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대병을 동원하여 한두 마을마다 한개 부대씩 보내여 치게 한다면 야인들이 제 코도 씻기 바쁜 형편에서 언제 남까지 도와줄 겨를이 없게 될것이라고 하였다.

최윤덕의 이 각개격파전술은 조정의 승낙을 받았다.

최윤덕은 자기의 각개격파전술의 구체적인 안을 이렇게 제기하였다.

한 방면으로는 만포에서 떠나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벽동에서 떠나서 모두 올랄 등지로 향하고 또 다른 방면으로는 감동에서 떠나 마천목책 등지로 향하여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들이대게 하며 자기는 소보리에서 떠나 타납노할랄이 사는 곳을 향해간다는것이였다.

그는 이를 위해서는 군사가 최소한 1만명은 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더우기 야인의 땅은 험한데가 많으므로 수비하는 군사를 나누어 배치해야 하고 또 군수물자를 호송하는 군사들도 두어야 하였기때문이였다.

세종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최윤덕은 다시 적들에게 사람을 보내여 정세를 탐지해보고 4월 20일이후 놈들이 농사를 지으러 집으로 내려오는 기회에 몰래 습격하겠다고 하였다.

1433년 3월 27일 세종은 정벌명령을 내렸다.

보병과 기병 1만 5,000명이 1433년 4월 10일에 강계부에 집결되였다.

최윤덕은 원정대오를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중군절제사 리순몽은 2,515명을 거느리고 괴수 리만주의 목책을 향해가며 좌군절제사 최해산은 군사 2,070명을 거느리고 거여 등지로 향해가며 우군절제사 리각은 군사 1,770명을 거느리고 마천 등지로 향해간다. 그리고 조전절제사 리징석은 군사 3,010명을 거느리고 올랄 등지로, 김효성은 군사 1,888명을 거느리고 림합랄의 부모가 있는 목책으로, 홍사적은 군사 1,110명을 거느리고 팔리수 등지로 각각 향해가게 한다. 최윤덕자신은 2,599명을 거느리고 주되는 적인 림합랄 등의 목책을 향하여 곧바로 공격하기로 하였다.

최윤덕은 임금의 지시문과 규정을 보여주고는 《주관하는 장수의 명령을 어기는 경우에는 전하의 지시에 의하여 군법으로 처리할것이니 자기 죄를 변명하지 말것이다.》라고 다짐을 받았다.

그가 내린 군사명령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주관하는 장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고 군사비밀을 엄수하며 자기 대오에서 떨어지지 말고 병사, 관병 호상간 협력하며 사람을 마구 죽이지 말고 투항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는것이다. 그리고 재물을 망탕 거두지 말고 지어 가축도 죽이지 말며 가옥도 불태우지 말아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는 정벌하는 원칙은 의로운것으로 불의를 치는것이며 그들의 나쁜 마음을 쳐서 의로움을 원만하게 하는것이라고 하면서 만약 늙은이와 어린것들을 죽이거나 한인을 죽여서 군공을 낚아보려고 명령을 위반하는 자는 다 군법에 의하여 처리한다고 강조하였다.

1433년 4월 19일 동틀무렵 최윤덕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최윤덕은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4월 19일 심타납노목책을 공격할 때 함화공작을 배합하게 하였다. 강변에서 저항하는 자들에게 군사를 출동한것이 너희들때문이 아니라 단지 홀랄온때문이다, 그래서 너희들의 목책은 공격하지 말게 하였다고 함으로써 적들의 투항을 받아냈다.

최윤덕은 어하하강변에 도착하였을 때 600명의 군사를 떨구어 앞으로 원정군의 철수를 보장할수 있도록 목책을 세우고 기다리게 하였다.

4월 20일 최윤덕의 부대는 조전절제사 홍사석의 부대와 련합하여 적군의 저항을 분쇄하면서 전진하였다.

원정군은 산릉선과 산기슭, 강변을 따라 세 부대로 나뉘여 수색작전을 폈다. 가물던 하늘에서 갑자기 대줄기같은 비가 쏟아지고 마초가 떨어진 불리한 조건에서도 녀진촌락에 대한 소탕전은 계속되였다.

침략의 괴수 리만주는 아군의 창칼에 찔리워 아홉곳이나 상처를 입고 겨우 포위망을 벗어나 도망쳤다.

원정군은 근 500명의 적을 살상포로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로획해가지고 개선하였다.

건주위녀진에 대한 조선군대의 원정은 최윤덕을 비롯한 장수들과 평안도(1만명), 황해도(5,000명)병사들의 애국적이며 희생적인 투쟁에 의하여 승리적으로 결속되였다.

최윤덕은 그후에도 변경의 안전을 위한 많은 군사적대책안들을 제기하고 직접 변경에서 활동하면서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지켜내는데 이바지하였다.

최윤덕은 재능있는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에서 민심을 얻는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하여 그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신망을 얻고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깊은 주의를 돌렸다.

그는 공무여가에 청사 뒤뜰의 공지를 일구고 오이를 심었는데 직접 김을 매주군 하였다. 하루는 소송하러 온  사람이 김매고있는 그를 보았으나 사또인줄을 모르고 《상공께서 지금 어데 계시는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지금 아무데 있을거요.》라고 대답해주고는 슬그머니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송사를 처결해주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어떤 촌녀인이 와서 《범이 제 남편을 물어갔사오니 원쑤를 갚아주옵소서.》 하고 하소연하였다.

윤덕은 《내 그대를 위하여 원쑤를 갚아주리다.》 하고는 활을 둘러메고 범의 종적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 그 범을 쏘아잡아놓고 배를 갈라 그 남편의 골육을 꺼내여 렴습을 시키고 관을 갖추어주어 매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오래도록 그 고을사람들은 그의 어진 정치와 덕행을 치하하면서 부모같이 여기였다고 한다. 사실 그가 군사가로서, 정치가로서 성공할수 있었던 비결의 하나도 대중의 지지를 받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할수 있다.

용맹과 지략을 갖추고 대중의 신뢰를 얻어 군사정치가로서의 명성을 남긴 최윤덕이야말로 단군민족의 슬기를 빛내인 후손이라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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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아래 - - 2016-07-09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서 이해하기 좋습니다. 제가 원하던 국사책이네요.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근데 어째 이미지는 안보이네요. 당시 영토가 표시된 지도그림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관리자 - - - - 2016-07-09
이미지문제가 해결되였습니다.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다음편은 언제 올리나요.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력사이야기들을 많이 올려주세요. 명인전, 무술명인전, 감사합니다.
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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