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의 기록만을 남긴 최영
 

 

전승의 기록만을 남긴 최영 

 

고려말에 들어와 봉건통치배들의 부패타락과 악랄한  착취행위로 하여 사회계급적모순이 첨예화되고 국가질서는 극도로 문란해진 속에 북쪽과 남쪽에서 계속된 외래침략자들의 침범과 략탈로 인하여 전쟁의 불길은 가실줄 몰랐다.

바로 이러한 때에 나라가 처한 위기를 가시고 겨레의 운명을 지키기 위하여 삼척검을 비껴들고 일생을 전장에 바친 한 대장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력사에 애국명장으로 그 이름을 남긴 최영이였다.

최영은 료동원정을 조직하고 계속되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쳐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수호하는데 기여한 애국명장이였다.

최영(1316-1389년)은 고려의 이름있는 가문의 출신이였다. 11대 조상인 최준옹은 왕건을 도운 공신이였으며 5대조인 최유청은 1170년 정중부의 란에 문관들이 모두 살해당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에 그의 덕망에 감복하고있었던지라 군사들에게 그의 집은 다치지 말라고 한 까닭에 친척들까지도 모두 화를 면하게 해준 재능과 덕망이 뛰여난 사람이였다.

최영의 아버지 최원식은 사헌부의 관리로서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가문에서 나서자라난 최영이였기에 애국의 억센 의지를 지니고 한생을 싸움판에서 보내고 청렴결백한 마음과 강직한 성격을 지니고 기울어져가던 나라를 지켜 억센 기둥이 될수 있었던것이다

 

1. 《공은 이 나라를 덮었다》 

 

최영은 어릴 때부터 얼굴에 영채가 돌고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양광도(경기도)의 도순문사휘하에 있으면서 여러차례 왜적을 잡아 용맹을 떨치였으며 그것이 조정에 알려져 달치(왕의 호위대원)로 등용되였다.

1352년에 최영은 안우, 최원 등과 협력하여 친원파관료인 조일신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그 공로로 장군이 되였으며 2년후에는 대장군이 되였다.

당시 북쪽대륙에서 강대함을 자랑하던 원(몽골)제국은 급속한 내리막길을 걷고있었다. 몽골의 지배를 반대하여 한족농민폭동군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급해맞은 원나라에서는 고려에 장수와 군대를 보내여 도와줄것을 청해왔다. 그들이 청한 명망이 있는 장수와 재상들가운데 최영도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미 해외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였음을 말해준다.

이 원정과정에 최영은 원나라가 추설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으며 그 나라 통치배들이 부패무능하고 고려의 군대는 그들의 군대보다 월등하게 강하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이것은 최영이 원나라에 강경립장을 취하면서 나라의 권위를 높이는것을 무력으로 뒤받침할수 있게 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인민들속에서 고려의 일부 지역을 강점한 원나라침략세력을 몰아낼데 대한 열의가 높아가고 실제로 원나라의 취약상을 목격한 관료들의 적극적인 주장에 발맞추어 고려정부는 친원정책으로부터 반원정책으로 방향전환을 하였다.

1356년 한해동안에만도 원나라정부의 비호밑에 반란을 꾀하던 기씨일족을 우두머리로 한 친원파두목들을 처단체포하며 우리 땅을 전부 수복하기 위한 군사적조치를 취하였다.

5월에는 고려내정에 대한 간섭의 도구이며 인민들의 증오의 대상이였던 《정동 행 중서성리문소》를 철페하였다.

고려왕정에서는 평리 인당과 전 대장군 최영 등을 파견하여 압록강너머의 8개 참을 공격하게 하였다. 인당과 최영 등은 6월 16일에 압록강을 건너 파파부 등 3개 참을 공격하여 격파함으로써 교통의 요충지들을 장악하였다.

1357년 8월 16일 최영은 동북면 체복사로 임명되여 수복한 땅들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358년 4월 13일 최영은 왜구의 침입에 대처하여 양광도와 전라도의 왜적체복사로 임명되였다. 최영은 복병전술로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의 병선 400여척을 물리쳤다.

최영은 1359년 11월부터 1361년 3월까지 계속된 홍두적의 1차 침입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서북면 병마사로서 안우, 김득배, 리방실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용감히 싸웠다. 홍두적은 원래 1350년대초에 황하류역에서 머리에 뻘건 수건을 쓰고 봉건적억압과 착취를 반대하여 싸움에 일떠선 농민폭동군으로서 홍건적이라고도 불리웠다. 여러 부대로 나뉘여 활동하던 수십만의 농민군가운데서 관선생, 사유의가 지휘한 부대는 1357년 만리장성을 넘어 원나라 제2수도인 상도(개평부)를 점령하고있다가 료동땅을 휩쓸면서 1359년에는 고려땅으로 기여들게 되였다. 이때부터는 그 진보적성격을 상실하고 략탈과 파괴를 일삼는 침략군, 살인마집단으로 변질되였다.

최영 등 장수들의 지휘밑에 고려군은 홍두적에 결정적타격을 주었다.

1361년 1월 16일 최영은 평양윤 겸 서북면 도순찰사가 되였다가 인차 좌산기상시로 옮기였다. 그해 10월 20일 반성, 관선생, 주원수 등이 거느리는 홍두적이 두번째로 우리 나라에 쳐들어왔다. 적들은 고려군의 반격으로 많은 손실을 당하면서도 계속 남하하여 11월 24일에는 수도 개경까지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다.

복주로 옮겨간 고려정부는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하여 20만의 방어군을 편성하였다.

고려군장병들은 포위된 성안에서 살인과 략탈행위를 자행하는 적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를 안고 적들에 대한 공격전을 개시하였다.

1362년 1월 17일 최영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개경 동쪽교외 천수사앞에 집결하였다가 진군하여 성을 포위하고 다음날 새벽부터 일제히 진공하였다. 고려군은 눈비가 내려 적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불의에 공격하여 해질무렵에 벌써 적장 관선생을 비롯한 10여만의 적을 섬멸하였다.

최영 등 장수들은 포위환을 좁히면 적들이 최후발악을 하고 피해가 커질수 있으므로 숭인, 탄현 두 문을 열어주어 적들이 도망치게 해주며 매복습격전과 추격전으로 소멸할 방책을 제기하였다.

홍두적의 잔당들은 고려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많은 인적 및 물적손실을 당하고 싸워볼념을 못하고 도망쳐 압록강을 건너갔다.

이때 세운 공로로 최영은 벽상에 초상을 그려붙이게 되는 영광을 지니고 전리판서로 임명되였다. 그는 다시 양광도 진변사로 임명되였다가 인차 밀직사로 옮기였다.

1363년 윤3월 1일에 간신 김용 일당이 일으킨 반란소식을 듣고 여러 장수들과 군대를 거느리고 진압하였으며 공이 1등으로 되였다. 윤3월 23일에는 진충분의좌명공신 판밀직사사로 되였다.

1363년 5월 원나라는 자기 나라에 가있던 덕흥군(원나라에 가있던 충선왕의 서자)을 《고려왕》으로 삼고 반역자인 최유를 《좌정승》으로 하는 하나의 가짜 《고려정부》를 조작하고 침략군대를 주어 고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1364년 1월 1일 최유가 이끈 원나라군사 1만명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다. 도지휘사 안우경이 7번 싸워 승리하였다. 다시 나가 싸우다가 도병마사 홍선이 포로되고 아군은 패배하였다. 아군은 퇴각하여 안주로 들어가고 적들은 선주(평안북도 선천)에 들어가 거점으로 삼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녀진의 삼선삼개가 대군을 끌고 오늘의 홍원, 북청일대에 기여들었다.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 역시 침략군을 끌고 연주(평안북도 운산군)일대에 침입하였다. 그리하여 고려군민은 세 방면에서 거의 동시에 쳐들어오는 적의 대군과 싸워야 하였다.

고려정부에서는 최영을 도순위사로 임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급히 안주로 가서 모든 군사를 지휘통제하게 하였다.

최영은 명령을 받고 곧 출발하였으며 장수들과 군사들을 격려하여 기어이 적을 섬멸할것을 맹세하였다. 그때 조정과 민간에서는 다 그를 신뢰하여 공포가 사라졌다고 한다.

1월 18일, 정주에 이르렀을 때 적들이 벌써 수주의 달천에 주둔하고있었다. 최영은 여러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주어 여러 방면에서 적을 공격하여 달천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적들은 병영에 불을 놓고 압록강을 건너 도망쳤다.

1월 24일, 최영은 곧 군사를 돌리여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를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서북면에서 승리를 거둔 고려군은 동북면으로 이동하여 이곳의 방어군과 협동하여 1364년 2월 총공격으로 넘어가 화주(금야)이북을 차지하였던 삼선삼개를 내쫓고 그 지역을 회복하였다.

공민왕은 너무 기뻐 관리들을 파견하여 교외에서 회군하는 그들을 왕의 행차를 맞이하는것과 같이하도록 지시하였다.

원나라는 고려의 위력에 겁을 먹고 1364년 10월 저들의 앞잡이 최유를 붙잡아 보내면서 관계를 개선할것을 제기하였다.

1364년 12월 1일 찬성사 최영은 조강에 침입한 왜적을 쳐물리쳤다.

1365년 3월 2일 왜적이 교동과 강화를 침범하였다. 공민왕은 동서강 도지휘사이며 찬성사인 최영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동강에 나가 주둔하면서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최영은 그때 한창 왕의 총애를 받던 신돈에게 미움을 사서 그의 모함을 당하고 계림윤으로 좌천되였다가 귀양을 가게 되였다.

1371년 신돈일파가 제거된 후 다시 소환되여 찬성사로 임명되였다.

1373년 10월 7일 최영은 6도 도순찰사로 임명되였다. 왕은 그에게 장수들과 고을관리들을 처벌하고 군적을 정리하며 병선을 제작보수하고 죄가 있는 자는 즉결처형할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1374년 최영은 경상도, 전라도, 양광도의 도순문사로 임명되였다. 이때 헌사에서 왕에게 전해에 최영이 6도 도순찰사로 되여 《소동》시켰다고 하면서 다시 파견해서는 안된다고 제의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소동》이란 최영이 법을 어긴 자들을 엄격히 처벌하고 그가 누구든 등급에 따라 곡식을 징발하여 군량을 보충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였다. 최영은 후에 《내가 이전에 6도 도통사로 있으면서 800척의 병선을 건조하여 해적을 깨끗이 소탕하려고 하였다.》고 회상하였다. 결국 그의 《소동》이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사업이였던것이다.

공민왕은 최영을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짐짓 대간과 도당에 대신할만 한 자를 추천하라고 명령하였으며 얼마 안 가서 최영의 파면을 제기하였다는 리유로 대사헌 김속명을 파면시키고 지평 최원유를 연안부사로 좌천시켰으며 최영에게는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칭호를 주었다.

1374년 7월 고려정부는 제주도원정을 결정하고 그 준비를 본격적으로 다그쳤다. 7월 26일 왕은 문하찬성사 최영을 양광, 전라, 경상도 도통사로 임명하고 큰 병선 314척과 정예군사 2만 5,605명을 보내여 제주도에 남아있던 몽골강점자들을 쳐몰아내게 하였다.

8월 28일에 원정군은 제주도(탐라)에 도착하여 최영의 능숙한 지휘밑에 용감하게 싸워 강점자들을 소멸하였다.

1375년 9월에 왜선이 덕적도와 자연도에 침입하자 왕은 판삼사사 최영에게 양광, 전라, 경상 등 여러 도의 군사와 초모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막게 하였다.

1376년 7월 홍산전투는 최영의 장수다운 기개와 무비의 용감성이 남김없이 과시된 전투였다.

7월 왜구의 대부대가 충청도앞바다로 올라와 금강을  거슬러와서 백마강에 닻을 내리고 부여일대를 략탈하고 련산의 개태사에까지 침입하였다. 수천명의 왜적들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략탈하였으며 무고한 주민들을 살륙하면서 마침내는 공주를 점령하였다.

고려정부에서 파견한 원수 박인계는 왜적들과 용감히 싸우다가 실수하여 말에서 떨어져 적들에게 살해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최영은 분연히 왜적토벌을 자청하였다. 우왕이 늙었다 하여 만류하자 그는 《비록 몸은 늙었으나 뜻은 꺾이지 않아 종묘와 국가를 편히 하고 왕실을 보위하려는 일념뿐이옵니다. 곧 휘하를 인솔하고 나가 싸우게 하여주기 바라옵니다.》라고 재삼 요청하였다.

임금의 승낙을 얻자 최영은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홍산(방면)으로 행군하였다.

최영은 양광도 도순문사 최공철, 조전원수 강영, 병마사 박수년 등과 함께 급히 홍산으로 가서 먼저 요충지를 차지하였다. 그곳은 삼면이 절벽이고 오직 길 하나가 통할뿐이였다.

여러 장수들은 머뭇거리며 전진하지 못하였다.

최영은 정예부대를 모두 동원하여 공격하게 하고 자신이 그 앞장에 섰다. 적들은 바람앞에 풀잎 쓰러지듯 너부러졌다.

이때 한 적병이 숲속에 숨어 최영을 쏘아서 입술을 맞혔다. 그는 류혈이 랑자하였으나 당황한 기색이 없이 태연자약하였으며 단살에 그 적병놈을 쏘아죽이였다. 그후에야 맞은 화살을 뽑았다. 그리고 더욱 용감히 돌진하였다.

최영의 영용한 전투모습을 본 장병들은 기세가 올라 원쑤들을 무자비하게 족치여 거의 전부를 살상하였다.

이 싸움후에 적들은 《언제나 제일 무서운 자는 백발의 최만호뿐인데 홍산전투에서 최만호가 오니 그 사졸들이 앞을 다투어 말을 달려 우리를 짓밟아댔으므로 몹시 무서웠다.》고 늘 말하였다고 한다.

홍산전투에서 세운 공로를 표창하여 우왕은 최영을 철원부원군으로 책봉하였다.

1377년 3월 최영은 6도 도통사로 임명되여 착량과 강화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1378년 4월 최영은 고려군을 지휘하여 승천부(개풍군)에 침입하여 수도 개경을 엿보는 왜적들을 해풍(개풍군)에서 전멸시켰다. 이 공로로 그는 안사공신(사직을 안정시킨 공신)칭호를 받았다.

이후에도 최영은 왜적의 침입소식을 들으면 솔선 전장에 나갈것을 제기하였다.

1380년 최영은 령삼사사 겸 해도도통사로 임명되여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동강, 서강으로 출동하여 주둔하면서 왜적을 방비하였다.

1381년에 최영은 수 시중으로 임명되였으며 1384년에는 판 문하부사로 되였다. 그가 사직하려고 제기하자 왕은 9월에 문하시중으로 임명하였다.

1387년 1월 왜적이 강화에 침입하자 도통사 최영은 다시 해풍으로 나가 주둔하여 적을 방비하였다.

1388년 정초에 최영은 권세를 등대고 조정을 쥐락펴락하고 백성들의 원망의 대상으로 되고있던 렴흥방, 림견미, 리인임일당을 제거하였다. 그해에 최영은 다시 문하시중으로 임명되였다.

1388년 2월 최영은 우왕과 료동공격을 비밀리에 의논하였다. 그들은 료동공격을 조정의 론의에 붙였다. 처음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였다. 그 앞장에는 왕좌를 엿보던 역적 리성계가 서있었다.

명나라의 침략책동이 로골화되자 우왕은 《군신이 짐의 료동공격계책을 듣지 않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하면서 다시 의논에 붙였다. 후에 정변을 일으킨 여러 장수들을 설유한 우왕의 지시문의 한토막을 통하여 당시 우왕과 최영의 뜻을 짐작할수 있다.

《하물며 강토를 회복하는것은 조종의 유지이다. 어찌 쉽게 남에게 줄수 있단 말이냐. 군사를 일으켜 지키는것만 같지 못하여 내가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였는데 그들이 모두 옳다고 하고는 지금에 와서는 어째서 감히 어기느냐?》

이것은 그때 우왕과 최영이 선조의 유언대로 옛 강토를 모두 회복할것을 계획하고있었으며 여러 장수들도 그들의 큰 뜻에 찬동을 표시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최영은 료동원정을 견결히 반대하던 리자송을 죽이고 8도의 군대를 징발하였으며 새로 서북지역에 성들을 수축하면서 원정준비를 완강히 밀고나갔다.

이미 1360년대말부터 1370년대초까지 여러차례 료동원정이 있었지만 그것은 원침략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반원투쟁의 연장이였다. 그러나 이번의 원정은 그곳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고려에 압력을 가하고 고려의 땅을 빼앗으려던 명나라의 침략기도를 분쇄하기 위한 투쟁이였으며 고구려의 옛 강토를 되찾기 위한 투쟁이였다.

1388년 4월초 우왕은 봉주(황해북도 봉산)에 이르러 료동공격을 정식 선포하였다.

최영은 당시 원정의 승리를 확신하고있었다. 그것은 료동의 명나라군사들이 대부분 북원과의 싸움에 나가있었기때문이다. 그때 료동의 형편을 알고있던 사람들은 고려군의 원정이 승산이 있다는것을 믿고있었다. 어떤 사람이 니성(창성)으로부터 와서 《료동군은 모조리 호인(봉건몽골)토벌에 나가고 성안에는 단지 지휘 한사람만이 있을뿐이므로 대군이 가면 교전하지 않고도 함락될것이다.》라고 보고하였다.

최영을 8도 도통사로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리성계를 우군도통사로 하여 원정군은 3만 8, 830명으로 이루어졌으며 4월 18일에 평양을 출발하면서 10만대군이라고 공포하였다.

최영은 전체 부대가 출발하자 우왕에게 이제 대군이 행군도중에서 열흘이나 한달을 끌게 되면 큰일을 성취할수 없으니 자기가 가서 단속하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는 이번 원정에서 속전속결을 노렸던것이다.

5월 11일, 니성원수 홍인계와 강계원수 리의가 선참으로 료동지역에 돌입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속에 흉심을 품은 리성계는 위화도에 머물러있으면서 질질 시간을 끌어 군량이 부족하게 하고 그것을 이번 원정을 조직한 최영의 책임으로 전가시켰으며 《목자(木子)》 즉 리씨성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얻는다.》는 요언을 퍼뜨리면서 뜻을 같이하는 자들과 반변음모를 꾸미고있었다.

6월초,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에 돌아온 리성계일파는 최영을 귀양보내였다가 후에 료동공격을 주장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죽이였다.

하지만 진실은 가리울수 없었다. 력사는 과연 누가 진짜 애국자이고 누가 진짜 반역자인가 하는것을 정확히 평가해주고있다.

이전에 리인임이 최영에게 《리판삼사사(리성계)가 나라의 주인이 되려고 하니 주의하라》고 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최영은 리성계의 용맹을 아끼여 리인임이 허튼소리를 한다고 꾸짖으며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가 리성계가 속에 딴 꿈을 묻어두고있던 너절한 역적이라는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최영은 지난 일을 회상하여 《전날 리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다.》고 개탄하였다.

적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백발의 최만호가 제일 무섭다.》고 비명을 지르던 최영, 거의 한생을 싸움터에서 보낸 그의 이름은 원쑤들에게는 공포의 대명사로, 고려의 군대와 인민들에게는 승리의 대명사로 불리웠다.

최영에 대하여 옛 사가들은 이렇게 평하였다.

《전선에서 적과 대치하여 태연하였으며 화살이 비발같이 지나가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군대를 지휘함에 있어서는 규률을 엄격히 하여 필승을 기하였으며 전사가 한걸음만 물러서도 곧 목을 베였다. 그러기에 크고작은 수많은 전투에서 어디서나 승리를 쟁취하였고 일찌기 패한적이 없었다.》

참으로 정당한 평가라고 할수 있다.

최영은 비록 억울하게 최후를 마쳤지만 100여차의 전투에 출전하여 모두 승리함으로써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지켜낸 그의 한생은 력사에 길이 남아있으며 두고두고 사람들의 추억속에 전해내려오고있다.

하기에 간대부 윤소종은 최영의 《공은 이 나라를 덮었다》고 평하였던것이다.

 

2. 황금은 돌이다 

 

적들을 전률케 하는 위엄과 명성을 지닌 최영은 장병들과 인민들을 감동시키는 인정미와 청렴결백한 마음씨를 지닌 눈물많은 보통사람들중의 한 사람이였다.

자기자신의 명예나 사리사욕보다도 나라와 겨레를 먼저 생각하는 그 마음이 그를 성공에로 떠밀어준 요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성질이 강직하고 충실하며 또 청렴하였다.》, 이것이 최영에 대한 옛 사람들의 총적평가였다.

최영을 칼밖에 모르는 엄하고 몰인정한 사람으로 치부하는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는 눈물많은 장수였다.

한번은 왜구들이 병선 50여척을 끌고 착량에 침입하고 이어 강화부와 수안, 통진, 동성현들을 침공하였던적이 있다. 이때 놈들이 가는 곳마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도통사 최영은 경천에 가서 왜적방어대책을 토의할 때 《왜적의 횡포 잔악함이 이러하니 원수로서 어찌 낯을 들수 있는가.》고 하면서 주르르 눈물을 흘리였다. 이때 원수 석문성은 기생이 오는가 안 오는가 하는데만 관심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최영과 석문성은 근심하고 즐기는바가 서로 같지 않다고 하였다.

최영은 우왕이 주색과 사냥에만 미쳐돌아가자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하며 극력 간하여 제지시켰다.

언젠가 우왕이 유람을 가려 하였다. 최영은 《지금 기근이 자주 들어 백성들이 살수 없는 형편이며 또 방금 농사철인데 분별없이 유람을 즐기여 백성을 괴롭히는것은 옳지 않소이다.》라고 간하였다. 우왕이 계속 고집하자 최영은 눈물을 떨구면서 《재상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대하겠는가》고 하였다. 하여 끝내 우왕이 《이제부터 고치겠다.》고 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그후에도 최영은 《왜적이 우리 나라를 좀먹고있고 토지제도가 날로 문란해졌으며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져서 국가운명이 절박》할 때이니 대신들과 국가사업을 의논하고 사냥을 지나치게 즐기지 말라고 눈물이 랑자하여 우왕을 타이르군 하였다.

이처럼 최영의 눈물은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였다.

이러한 그였기에 그는 백발을 머리에 이고도 언제 한번 싸움을 피한적 없으며 항상 자진하여 군사임무를 맡군 하였다. 지어 왜적을 격멸한 공로로 시중벼슬을 주려 하자 《시중으로 되면 제때에 전선으로 나갈수 없을것이니 왜적을 평정한 후라면 좋을것이다.》라고 사양하였던것이다.

최영이 임금이 옳바르게 행동할것을 자주 간한것은 《온 백성의 운명이 모두 전하의 마음여하에 달려있기때문》이라고 여긴데 있었다.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있던 최영은 서북면 도순찰사로 있을 때 홍두적의 침입으로 전쟁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못하여 아사자가 속출하자 여러곳에 구제소를 많이 설치하고 량식과 종곡을 주어 농사를 장려하고 전사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주게 하였다.

최영 역시 통치계급의 한사람이였지만 일정하게나마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느끼고있었으며 하여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관료들과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들을 몹시 증오하였다.

리인임이 시중이 되여 임금의 총애를 믿고 사리사욕만 채우며 돌아가자 그에게 《나라가 매우 곤난한데 당신은 재상으로서 어찌 이것을 우려하지 않고 다만 가정살림에만 관심하는가.》고 면박을 주었다.

1384년 리인임, 렴흥방, 림견미 등 일파가 권력을 독차지하고 토지략탈에 광분할 때 최영은 도당에 나가서 모든 재상들에게 백성의 재산을 강탈하고 토지를 겸병하는 해독을 력설하였으며 마침내 다같이 금지할것을 약속한 서약서를 작성하여 일제히 서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여러 재상들을 돌아보며 《이제 또다시 전날과 같이할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은근히 위협하였다. 그후에도 고치지 않자 1388년에 리인임, 림견미, 렴흥방일당을 처형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였다.

한때 경성에서 물가가 폭등하여 장사군들이 털끝만 한 리해를 놓고도 다툰적이 있었다. 최영은 이것을 증오하면서 일체 매매하는 물품은 우선 경성시서에서 가격을 사정하여 세를 받은 표식이 있은 후에야 매매할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 법을 어기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공포하였다.

최영은 항상 법을 존중하고 법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함으로써 장병들과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한번은 최영의 조카사위 판사 안덕린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으므로 양광도 안렴 양이시가 구속하여 헌사에 압송한적이 있었다. 이때 최영은 판순위부사로 있었는데 도당(재상들이 일을 보는 곳)에서는 최영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안덕린의 죄를 경하게 하려고 순위부로 넘기였다. 최영은 노하여 《안덕린이 무고한 사람을 죽였은즉 응당 헌사에서 판결할것이다. 하물며 내가 순위부에 있으면서 어찌 문초를 추진시킬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헌사로 돌려보내였다.

최영은 우왕의 유모 장씨가 정사에 관여하여 페해를 끼치자 우왕의 간절한 청에도 불구하고 엄형에 처하였다. 최영은 생의 전기간 그가 높은 관리거나 그 후원을 받는 자라고 해도 법을 어기면 용서치 않았다.

최영은 청렴결백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어긴적이 없었다.

최영의 나이 16살때 아버지가 죽었는데 그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너는 황금을 돌같이 여기거라.》

최영은 한생 아버지의 이 훈계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살았다. 그는 아버지의 훈계를 늘 띠에 써가지고 다니면서 재물에 관심하지 않았으며 거처하는 집이 초라하였으나 이에 만족하고 살았으며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하여 간혹 식량이 모자랄 때도 있었다. 남이 좋은 말을 타거나 좋은 의복을 입은것을 보면 개나 돼지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지위는 비록 재상과 장군을 겸하고 오래동안 병권을 장악하였으나 뢰물과 청탁을 받지 않았으므로 세상이 그 청백함에 탄복하였다. 항상 큰것을 견지하는데 힘쓰고 조그마한것에 구애되지 않았다. 종신토록 장군으로서 군대를 통솔하였으나 그가운데서 얼굴을 아는 자는 수십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최영은 공로를 표창하여 토지를 주면 국고가 빈약한것을 고려하여 받지 않고 도리여 자기의 량곡 200석을 내여 군량에 보충하게 하였다. 그는 자주 자기의 량곡을 내여 군량미에 보태게 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최영의 집에 재상들이 모여왔다. 그때 재상들이 서로 집을 돌아가면서 청해다 바둑으로 심심풀이를 하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여 자기 사치를 과시하는 호화스러운 습관이 류행되고있었다. 그런데 최영만은 손님들을 청해다놓고 한낮이 지나도록 음식대접을 하지 않았다. 거의 저녁때가 되여서야 기장밥에 나물 몇가지를 내놓으니 손님들이 시장한 판이라 그나마 먹을수밖에 없었다.

《철성댁(최영을 말함)음식은 특별히 맛이 있거든.》

《이 역시 용병지술(군사를 쓰는 전술)이야.》 하고 대꾸하며 최영은 웃었다.

청렴결백, 참으로 이것이야말로 최영의 용병술, 최대의 성공적인 작전이라고 할수 있었다. 바로 그는 이것으로 전투의 담당자인 대중을 얻었던것이다.

최영을 죽이고 역신 리성계를 내세워 리씨조선을 세운 자들은 그에게 너무 혹독하였다느니 무식하다느니 하며 비난도 퍼부었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영이 지나치게 혹독한 일을 했다면 그자신이 말한것처럼 단 한번이였다. 그것은 사치를 일삼고 세도를 부리며 백성들을 억압착취한 림견미, 렴흥방일당을 가혹하게 처리한것이였다.

그는 처형되기 전에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인지 이렇게 마지막말을 남겼다. 《내 평생에 고약한 일이라고는 해본적이 없다. 오직 림가, 렴가의 일족을 과도하게 죽였을뿐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탐욕한 마음이 있었다면 나의 무덤우에 풀이 날것이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으리라.》 정말 그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최영은 다정다감하고 글도 잘 알며 시문에도 밝은 사람이였다.

어느 날 저녁 여러 재상들과 련구를 지었는데 경복흥이 《하늘은 옛 하늘이지만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로다.》고 하자 최영은 《달은 명월이로되 재상들은 밝지 못하구나.》 하고 대구를 놓아 여러 관료들을 경악케 하였다. 또 한번은 리성계가 수 시중이 되였을 때 《석자되는 환도로 나라를 안정하고》라고 하자 당대 문인이노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모두 그 대구를 채우지 못하였다. 최영이 제꺽 《한가닥 채찍끝에 천하가 평정되리》라고 대구를 놓았다. 그의 시들에는 불의를 증오하고 천하에 고려를 우뚝 내세우려는 웅건한 뜻이 집약되여있었다.

허나 세상은 너무도 그의 뜻을 알아주지 않았다. 언제나 도당에 나가서는 정색하여 바른말을 기탄없이 하였는데 좌중에 공명하는 자가 없어 혼자서 탄식하군 하였다. 언젠가 한사람에게 《내가 국가정치에 관하여 밤중에 생각하고 날이 새여서 그것을 동료들에게 말하면 여러 재상들중에서 나와 의견이 같은 자가 없으니 사직하고 은거하는것만 같지 못하다.》고 말하면서 가슴을 쳤다.

어지러운 세상에 홀로 안타까이 나라와 겨레를 근심하며 몸부림친 사나이, 황금을 돌같이 여긴 최영은 오직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깡그리 바쳤다. 사람들은 바로 그의 이러한 강직하고 고결한 마음을 크게 샀고 그가 싸움터마다에서 승전고를 높이 울릴수 있게 해주었던것이다.

 

3. 그 공적 청사에 드리우리 

 

명장 최영은 과연 어떤 공을 세웠던가.

우왕이 최영의 공을 평가하여 철권을 주면서 내린 지시문가운데 일부를 보면 그 대체적인것을 알수 있다.

《… 그대는 실로 우리 왕조 력대 공신의 후손으로서 그대의 선조들은 우리의 력대 선왕들에게 복무하여 문교와 정사에서 모두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대의 고매한 소질과 강의한 기개는 일세에 탁월하며 전대 력사들에 못지 않으며 특히 군사상 공훈은 그 류례가 없다. 경인년(1350년)부터 륙지와 해상에서 적을 막아 비로소 그 지혜와 용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으며 우리 부왕이 선발하여 시위로 임명하였다.… 지금 장수들중에서 많은 전투를 한것과 그 공로가 큰것으로는 오직 그대 한사람만이 뚜렷이 나타난다. 또 더우기 충성이 지극하고 의리를 중히 여겨 임금을 존중하며 백성을 보호함에 있어서 재상중의 참된 재상이다. 토지와 노비를 주어 표창하는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그대는 천성이 결백하여 반드시 굳이 사양할것이므로 다만 철권을 주고 옥으로 족자를 만들어 특별히 우대하는 뜻을 표시한다. 아, 공은 크고 상은 박한것을 짐은 게면쩍게 여기노라. 그대가 혹 죄를 범하더라도 아홉번까지는 묻지 않을것이며 열번에 이르러도 응당 최종의 형을 감할것이다. 자손에 대해서도 고려할것이다. 후대의 임금과 신하는 내 뜻을 체득하기 바라노라.》

철권이란 옛날에 공이 있는 신하에게 주는것으로서 기와같이 생겼는데 공과 죄를 막아줄 《은혜》의 조치를 안팎에 금으로 새겨넣었다. 좌우로 나누어 왼쪽것은 공신에게 주고 오른쪽것은 내부에 건사하여 후에 맞추어보고 믿게 하였다.

고려봉건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최영의 공로를 정당하게 평가한것이라 할수 있었다.

조종의 땅을 되찾고저 하여 료동원정을 계획하고 추진시킨것이 《죄》가 되여 찬탈음모를 꾸미던 역적 리성계일파에게 피해를 입은 최영, 하지만 가해자들조차도 최영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고 하면서 실로 국가의 흥망을 걸머진 신하였다고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최영의 한생은 떳떳하였다. 하기에 그는 처형될 때 언사와 안색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자기가 걸어온 떳떳하고도 자랑스러운 생애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였을것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그의 억울한 죽음을 두고 비통해마지 않았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온 그의 한생을 돌이켜보며 사람들은 그를 추모하였다. 그가 《죽던 날 경성사람들은 저자를 중지하였으며 어디서나 이 소문을 듣고는 거리의 어린이들이나 시골부녀자나 할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체가 길가에 놓여있었는데 오고가는 사람들이 말에서 내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해하며 오래도록 추억하였다.

후세에까지 전해진 최영을 노래한 가요의 한구절은 이러하다.

 

  공개일국(공이 온 나라에 가득차다)

  정말이오

  죄만천하(죄가 천하에 가득차다)

  무고로다

  최영장군 죽고나니

  고려왕실 끝이 났네

  충신을 몰라보는

  네가 무슨 왕일소냐

  신돈의 피를 받은

  거짓왕이 분명하다

 

노래에서는 공이 온 나라에 가득찼다는 말은 옳지만 죄가 천하에 가득찼다는 말은 모함이라고 하면서 최영을 죽이게 한 우왕을 저주하고있다. 당시 리성계일파는 리씨조선의 성립을 합리화하기 위해 우왕이 신돈의 피를 받은 왕이라는 말을 돌렸는데 사실상 최영을 죽이게 한것도 우왕의 본의가 아니라 리성계를 비롯한 정권찬탈자들의 강요에 못이겨서였다.

최영은 우리 나라 민간신앙에 있어서 가장 인기있는 영웅신으로 되였다.

경기도 파주군 덕물산 산정에는 20세기중엽까지도 우리 나라에서 드물게 보이는 무당부락이 있었다. 이 덕물산의 꼭대기에 있는 장군당의 본존이 곧 최영장군인것이다.

서울이북 황해도일대의 민간신앙에서는 이 장군당이 신앙의 본거지이며 무당들은 덕물산우에서 기도함으로써 무력을 얻는다고 믿고있었다. 덕물산에서는 2년에 한번 음력 3월에 도당굿을 하는데 이때에는 각처의 무당들이 모여 일대 성황을 이루므로 전국의 제일가는 굿으로 쳤다. 굿이 끝난후에는 잔치가 베풀어지고 이때의 명물은 국내의 진미로 알려진 돼지고기인데 이 고기를 성계육이라고 하였다. 성계육은 두말할것도 없이 충신 최영을 죽인 찬탈자 리성계에 대한 끝없는 증오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민간신앙에는 우리 나라 민간에 퍼져있는 고유한 일반대중의 감정이 반영되여있다. 최영이 봉건사회에 이처럼 숭배되고있은것은 그가 나라와 겨레를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였기때문이다.

최영은 통치계급의 일원으로서 계급적제한성도 가지고있지만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고 그를 지켜 안일사치와 명예를 바람이 없이 한생을 전장에 바쳐 헌신분투한 군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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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아래 - - 2016-07-09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서 이해하기 좋습니다. 제가 원하던 국사책이네요.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근데 어째 이미지는 안보이네요. 당시 영토가 표시된 지도그림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관리자 - - - - 2016-07-09
이미지문제가 해결되였습니다.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다음편은 언제 올리나요.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력사이야기들을 많이 올려주세요. 명인전, 무술명인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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