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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전을 지휘한 배중손과 김통정
배중손과 김통정은 13세기 몽골침략자들에 대하여 투항주의적립장을 취하던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인민들과 군인들의 투쟁기세에 편승하여 삼별초군을 거느리고 투쟁에 나섰던 고려의 장수들이다. 배중손(?-1271년)은 고려 24대왕 원종(1260-1274년)때에 장군벼슬을 지내던 장수이다. 그는 국왕과 봉건정부가 반몽립장을 견결하게 취하던 무신집권자 림유무를 제거한 후 1270년 5월 23일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다시 옮길것을 공포하자 삼별초를 불러일으켜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5월 29일, 원종왕은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창고를 털며 기세를 올리는 삼별초군인들의 굳은 결심을 움직일수 없게 되자 장군 김지저를 보내여 삼별초를 해산하고 그 명부를 빼앗아오게 하였다. 삼별초는 3개의 별초부대인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가리킨 말로써 별초란 특별히 선발한 군대라는 뜻이였다. 삼별초는 주로 피압박인민의 출신으로 이루어진 봉건국가의 무력으로서 여기에는 몽골침략자들을 반대하는 립장에 서있었던 무신들의 세력이 강하게 침투되여있었다. 또한 삼별초는 30여년간 몽골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격렬한 싸움을 통하여 단련된 군대였다. 해산명령을 받은 삼별초는 굴하지 않고 폭동으로 대답하였다. 6월 1일,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 야별초 지유 로영희의 지휘밑에 폭동을 일으켰다. 배중손 등은 사람들을 거리로 파견하여 《몽골의 대병이 이르러 인민들을 살륙하고있는데 나라를 도우려는 자들은 모두 격구장으로 모이라!》고 웨치게 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금강고라는 무기고를 헤치고 무기를 꺼내여 무장하고 성에 의거하여 수비를 강화했다. 삼별초항전군은 개경에로 도망치려는 량반관료들의 탈출기도를 누르고 항전참가를 거부한 관료들과 몽골침략자들이 파견한 중들을 거리에서 처단함으로써 외래침략자와 그와 결탁한 자들을 용서치 않으려는 단호한 립장을 보여주었다. 배중손과 로영희는 항전군을 데리고 기세를 올리면서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내세우고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조직적인 항전을 벌리려는 그들의 전략적의도를 보여준것이였다. 배중손은 투쟁기지를 진도에로 옮길것을 결심하였다. 그것은 지난 시기의 경험으로 보아 강화도가 바다싸움에 무능한 몽골침략군과 싸우는데는 유리하였지만 원종을 비롯한 강화도의 비밀을 잘 알고있는 개경정부가 적들과 결탁한 조건에서 군사전략상의 의의가 적어졌기때문이였다. 또한 강화도가 개경과 불과 40리밖에 안되므로 항전지휘부에 들어앉은 관료들의 불안과 동요를 막아내기 곤난하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진도는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수도인 개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고 물살이 급한 울돌목(명량해협)을 사이에 두고있으므로 개경정부의 군대와 몽골침략군의 공격을 막는데 유리하였다. 또 진도는 남해와 서해의 여러 섬들을 장악하고 륙지인민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키며 해상전을 틀어쥐고 봉건정부의 조세운반로를 봉쇄하는 등 륙지와 바다를 활무대로 하여 적극적인 항전을 벌리는데서도 매우 유리하였다. 항전군은 1,000여척의 배에 나누어타고 기세드높이 강화도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개경정부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황급히 《추격부대》를 편성하였다. 6월 13일에 김방경이 거느리는 60여명의 개경정부군과 1,000여명의 몽골침략군은 경기도 남양앞바다의 령흥도에 항전군이 머물러있는것을 보고 그 위력에 겁을 먹고 싸워보지도 못한채 도망쳤다. 1270년 8월 19일 항전군은 무사히 진도에 도착하여 새로운 항전기지를 꾸리였다. 그들은 곧 룡장성을 새로 쌓고 궁궐을 크게 지어 하나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다. 한편으로 전라도일대를 제압하기 위한 눈부신 활동을 벌리였다.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여 싸움에 일떠설것을 호소하였으며 각 지방관리들에게 삼별초의 활동을 방해하는 자는 처단당하리라는것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전라도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여 수탈한 곡식을 진도에 가져올것을 요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진도로 모여들었다. 지어 어떤 관리들은 찾아와 인사를 올리였다. 항전군의 세력은 매우 커졌다. 《전라도 토적사》가 되여 삼별초와 싸우려고 라주까지 기여들었던 신사전은 싸워보지도 않고 개경으로 도망쳤다. 금주(경상남도 김해)고을원인 리주 역시 달아뺐다. 이것은 항전군의 세력이 경상도일대까지 미치고있었음을 보여주는것이였다. 배중손은 9월초부터 서남해연안의 여러 고을들에 대한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벌리였다. 뭍에 오른 항전군은 먼저 장흥부를 공격하여 20여명의 정부군을 소멸하고 많은 무기와 식량을 로획하였다. 이어 라주를 공격하면서 일부 군사로 전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라주부사 박부는 항복할 생각까지 하였다고 한다. 고려정부군의 지휘관인 추토사 김방경은 몽골침략군 우두머리 아해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삼견원에 주둔하여 진도를 건너다보면서 진을 치게 되였다. 이때 정부군이나 몽골침략군은 거듭되는 패배로 하여 심히 위축되여있었다. 배중손은 적들의 이러한 심리를 리용하여 심리적공세를 가하기로 하였다. 그는 바다가에 선박들과 군함들을 쭉 늘여세우고 배우에 무서운 짐승그림을 그려 덮게 하였다. 그러한 배들이 바다를 덮을듯 많고 그 무서운 짐승그림들은 물우에 비치여 얼른거리며 마치 살아움직이는듯 싶었다. 배가 움직일 때에는 그 그림들이 어찌나 날아다니는것 같이 빨리 움직이는지 공포를 더해주었다. 정부군과 몽골침략군은 항전군이 맹수부대까지 가지고있다고 벌벌 떨었다. 그들과 힘으로 겨룬다는것은 어리석은 일이였다. 배중손은 적들이 겁에 질려있는것을 포착하고 주동적으로 먼저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면서 돌격하게 하였다. 정부군측은 매번 패하면서도 《명장》 김방경의 통솔밑에 근근히 견디여내고있었다. 배중손은 적들사이에 쐐기를 박아 리간시키는 작전을 설계하였다. 병법에도 친하면 리간시키라 하였으니 지금 적들은 한때 적수가 되여 맞서 싸우던 고려군과 몽골침략군의 련합이므로 능히 리간이 가능하다고 타산하였다. 더구나 몽골측 적장들은 힘내기밖에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라 능히 성사될수 있었다. 배중손은 반남현(라주)사람인 홍찬과 홍기에게 임무를 주어 적들에게 파견하였다. 그들은 곧바로 몽골침략군 우두머리 아해를 찾아가 《김방경과 공유 등은 비밀리에 반적(삼별초항전군을 모욕하여 부르던 말)과 서로 내통하고있다 하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아해는 깜짝 놀랐다. 그러지 않아도 고려사람들이 저들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또 이번 변란도 저들에게 끝까지 항전할 목적으로 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들이 모두 고려의 유명한 장수들로서 서로 함께 복무한 전적이 있으니 몽골을 반대하여 내통할수 있는것이다. 아해는 김방경과 공유 등 고려정부군의 장수들을 붙잡아다 가두고 다로가치에게 공문을 띄웠다. 다로가치는 그들을 호송하게 하고 참지정사 채정을 김방경의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아해는 김방경을 철쇄로 얽어매게 하고 50명의 병졸로 하여금 개경까지 압송해가게 하였다. 후에 김방경은 사건이 해명되여 다시 임명되여 내려왔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두 나라 군대들사이는 더욱 벌어지게 되였고 고려군장병들은 몽골침략군을 질시하고 그들의 무지를 비웃게 되였다. 한편 항전군은 시간을 얻어 싸움준비를 갖추고 목적한 사업들을 추진시키게 되였다. 11월에 배중손은 남해상의 중요한 군사기지인 제주도(탐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만약 제주도를 점령하지 않으면 앞뒤로 공격받을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있으므로 불리하면 인차 옮겨가 항전을 계속할수 있었다. 고려 개경정부측도 제주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안찰사 권단으로 하여금 대책을 취하게 하였다. 권단은 령암부사 김수에게 군사 200명을 주어 제주도를 지키게 하고 장군 고여림에게 70명을 주어 그뒤를 따르게 하였다. 배중손이 파견한 항전군은 정부군을 격파하고 제주도를 차지하였다. 개경정부에서는 급해맞아 원외랑 박천주를 진도에 사신으로 보내여 항복할것을 권고하였다. 하지만 배중손은 단호히 거부하였다. 1270년 12월 22일 정부군측은 진도항전군에 대한 모험적인 공격을 단행하였다. 진도항전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 높았고 진세는 매우 정연하였다. 배중손은 모든 배들에 기치들을 수많이 매달게 하였고 바다가 끓어번지듯 징소리와 북소리를 요란하게 울려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그리고 성우에서도 북을 울리고 소리를 웨치도록 하였다. 몽골침략군 장수 아해는 겁에 질려 배에서 내려 라주로 퇴각하려고 하였다. 단독으로 공격에 나섰던 김방경은 죽을 고비에서 겨우 구원되였다. 싸움은 항전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듬해 고려정부에서는 안세정과 공유가 김방경을 돕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시켰으며 원나라정부도 아해를 파직시키고 흔도를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고려정부에서는 다시 박천주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투항을 권고하였다. 배중손은 그에게 벽파정에서 연회를 차려주게 하고 위로하면서 의심을 풀고 마음놓고 즐기게 하였다. 그사이에 몰래 병선 20척을 보내여 관군을 습격하여 배 한척을 빼앗고 90여명을 살상하였다. 그리고 박천주만 돌려보내고 함께 갔던 객사 두원외는 억류하였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왔던 《조서》는 돌려보내였다. 항전군의 투쟁소식은 곳곳에 전해져 사람들이 투쟁에 궐기하였다. 1271년 1월 밀성군사람들인 방보, 계련, 박공, 박경순, 박경기 등이 군내 사람들을 모아 장차 진도와 호응하려고 하면서 부사 리이를 죽이고 군, 현들에 통첩을 보내며 기세를 올렸다. 그로부터 한주일후에는 개경의 관노들인 숭겸, 공덕 등이 동료들을 모아 몽골침략자인 다로가치와 봉건통치배들을 죽이고 진도로 가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2월 7일에는 대부도인민들이 숭겸 등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폭동을 일으켜 성에 들어와 략탈을 일삼던 몽골침략군 6명을 쳐죽이였다. 폭동들은 모두 실패하였지만 각지의 인민들에게 고무적힘을 주었다. 1271년 2월에 몽골침략군은 또다시 사람을 보내여 항복할것을 요구하였다. 배중손은 몽골침략군이 철수하면 적들이 요구하는 교섭에 응하겠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면서 오히려 적장 흔도가 진도를 《방문》할것을 요구하면서 놈들의 간교한 술책을 야유하였다. 배중손의 지휘밑에 항전군은 1271년 2월 장흥부(전라남도 장흥)와 조양현(전라남도 보성군)을 습격하여 여러척의 전함을 불사르고 수많은 물자를 로획하였다. 3월에는 합포(경상남도 마산시)를 습격하여 감무를 포로하였다. 이어 동래, 금주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대하여 기록에는 《지금 역적(항전군을 모역하여 부른 말)들이 날로 성하여 그 피해가 경상도의 금주, 밀성에까지 미치였고 게다가 또 남해, 창선, 거제, 합포, 진도 등 해변부락에서는 모두다 습격략탈을 당하였기때문에 일체 곡물징발사업은 보장하기 힘들게 되였다. 경상도, 전라도의 공물과 부세는 다 륙상운수로 나르지 못하고 반드시 바다로 운반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역적들이 거점으로 삼고있는 진도는 해상수로의 목구멍과 같은 요충지인 까닭에 래왕하는 선박들은 그곳으로 통과시킬수 없다.》고 원종왕이 개탄한 사실이 전해지고있다. 항전군은 남해, 창선 등 30여개 섬들을 장악하고 전라도, 경상도연안의 여러곳을 드나들면서 남해안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몽골의 일본침략계획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해상교통로를 봉쇄하고 고려정부의 조세운반에 엄중한 장애를 조성하였던것이다. 개경정부군과 몽골침략군은 1271년 5월 수천명의 병력과 100여척의 함선을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김방경과 흔도는 중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벽파정으로 진입하였다. 좌군은 장항(노루목)으로부터, 우군은 동면으로부터 공격하였다. 배중손은 이에 대처하여 적군의 우두머리들이 있는 중군을 집중공격하게 하였다. 적의 좌군이 먼저 섬에 올라 불을 지르며 협공하였다. 배중손은 적을 견제하면서 적의 우군을 공격하였다. 우군은 격파되여 중군이 있는 곳으로 밀려갔다. 항전군은 적군의 배 2척을 로획하고 배에 탔던 적들을 모조리 섬멸하였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항전군은 패하였으며 배중손도 자기의 생을 마쳤다. 배중손의 실책은 방비를 소홀히 한것이였다. 그는 여러차례 관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자 자만도취하여 관군을 경시하고 방비를 하지 않고있었던것이다. 그리고 항전군지휘부안에 있을수 있는 동요와 간첩활동을 제때에 적발하지 못하였다. 항전군에는 리보, 안방열, 지계방, 강위보, 김지숙, 송숙, 임굉 등 상장군, 대장군, 장군 등의 장수들이 잡혀와있었다. 김지숙이라는 자는 장군으로서 강화도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게 되자 물에 몸을 던진것을 항전군이 구원해준 자였다. 진도에서 배중손과 항전지휘자들은 그를 죽이려 하였지만 왕으로 앉힌 승화후 왕온이 놓아주게 하고 임무를 맡겼었다. 그는 몸을 항전군에 담그고있으면서도 몰래 항전군의 정황을 두차례나 정부군측에 알려주었다. 정부군측은 그의 자료에 기초하여 항전군의 적지 않은 력량과 함선들이 남해연안 여러 지역에 나가 싸우고있는 기회를 타서 우세한 력량으로 불의의 공격을 가해왔던것이다. 항전군은 끝까지 싸울 결의를 가다듬으며 김통정의 지휘밑에 제2의 투쟁기지로 꾸려놓았던 제주도로 들어갔다. 남해현일대에서 활동하던 류존혁은 80여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그뒤를 따랐다. 김통정(?-1273년)은 제주도(탐라)에 내성과 외성을 쌓고 험준한 지세를 리용하여 방비를 강화하게 하였다. 그리고 개경정부의 앞잡이노릇을 하던 왕자 등을 내쫓고 제주도인민들을 투쟁에 적극 인입시켰다. 김통정은 먼저 남해의 추자도, 거제도, 서해의 흑산도를 비롯한 여러 섬들을 장악하여 그곳을 해상에서 기동작전을 벌릴수 있는 전초기지로 삼았다. 새로운 투쟁기지를 확보한 후 김통정은 1272년 봄부터 또다시 투쟁을 조직하였다. 3월부터 6월사이에 회령현(전라남도 장흥군), 대포(전라북도 정읍군), 탐진(전라남도 강진군)을 습격하여 적들을 살상포로하고 조세운반선 수십척을 나포하였다. 그들의 줄기찬 활동으로 바다가지역은 쓸쓸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통정은 한편으로 사람들을 파견하여 적들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다. 개경정부는 합문부사 금훈을 초유사로 임명하고 산원 리정과 함께 항복을 권고하는 문서를 가지고 제주도로 가게 하였다. 4월 15일에 떠난 금훈일행은 역풍에 밀려 보마도에 정박하였다가 김희취, 오인봉, 전우 등 항전군장수들이 탄 배 4척을 만나 모두 잡혔다. 김희취 등은 제주도에 가서 김통정에게 보고하고 금훈일행을 끌고 추자도에 와서 구류하고 감시하면서 회답이 오기를 기다렸다. 통정에게서 회보가 오자 김희취 등은 《너희들이 일찌기 사람을 진도에 보내여 우리를 꾀여 우리의 마음을 해이하게 하고는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여 패전케 하였다. 생각컨대 부모처자라는것은 인정상 가장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인데 이미 모두다 랍치하여 몰고갔으니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원한이 골수에 사무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제 또 우리들을 전멸시키려고 여기에 와서 꾀임수를 쓰려 하는것이다. 너희들은 원래 응당 모두 죽여야 할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번의 이 일에 대한 우리의 뜻을 누가 가서 전달하겠는가. 그러므로 너희들을 놓아보내니 그리 알라!》라고 꾸짖었다. 그리고 썩고 파괴된 작은 배 한척과 늙은 배군 한사람을 주면서 항복권고문을 되돌려주었다 이것은 제주도에 집결해있던 항전군모두의 심정을 대변한 말로써 그들이 끝까지 싸울 결의를 피력한것이였다. 고려정부에서는 항전군이 조금도 항복하려는 생각이 없다는것을 알고 원나라에 지원을 애걸하였다. 김통정은 11척의 싸움배에 군사 390명을 나누어 싣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조세운반선을 빼앗으며 바다가 주, 현들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다. 김통정은 항전군으로 하여금 바다에서 적극적인 해상기동작전을 벌리게 하였다. 하여 항전군은 중부조선의 서해안까지 진출하여 개경의 통치배들을 전률하게 하였다. 9월에 항전군은 고란도를 공격하여 병선 6척을 불사르고 조선관(배만드는것을 감독하는 관리)인 흥주부사 리행검과 결성, 람포의 감무를 사로잡아갔다. 11월에 김통정은 대담한 해상기동작전으로 적들의 면전인 안남도호부(경기도 부천시)를 기습하여 공유를 사로잡게 하였으며 몽골침략군의 일본침략거점인 합포를 다시 습격하여 전함 20척을 불사르고 몽골침략군 4명을 사로잡았다. 항전군의 한 부대는 거제현을 공격하여 병선 3척을 불사르고 현령을 사로잡아갔다. 김통정이 파견한 한 선대는 북상하여 경기앞바다에 있는 령흥도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들은 그 일대를 돌면서 통치배들에게 위협을 주었다. 1273년 1월 10척으로 이루어진 한 부대는 락안군을 공격하였다. 항전군은 다시 합포를 공격하여 병선 32척을 불사르고 몽골침략군 병졸 10여명을 살상하였다. 항전군 소부대의 해상기동작전으로 바다가지방은 들끓게 되였으며 기습범위는 경기에까지 확대되였고 도로가 제대로 통하지 못하게 되였다. 적들은 할수없이 다시 회유책에 매달렸다. 1272년 8월 김통정의 조카 김찬, 리소와 장군 오인절의 친족인 오환, 오문, 오백 등 5명을 보내여 투항을 권고하게 하였다. 김통정은 김찬은 남기고 나머지는 다 죽여버림으로써 끝까지 항거할 굳은 결심을 표명하였다. 고려정부는 이것을 매우 우려하면서 1273년 2월에 김방경에게 《토벌》을 명령하였다. 김방경은 흔도, 홍다구 등이 인솔한 몽골침략군과 련합하여 1만여명의 병력을 160척의 병선에 나누어싣고 제주도를 공격하였다. 김통정은 바위들사이에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함성을 올리면서 일제히 내달아 중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공방전이 계속되던 끝에 정부군은 제주도에 상륙하였다. 항전군은 최후의 거점인 내성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형세가 불리해졌으므로 다른 곳으로 옮길 계획을 하였다. 그런데 한 변절자가 비밀을 넘겨주었다. 김통정은 최후까지 싸울 결의를 가다듬으며 70여명을 거느리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적들이 포위환을 좁히자 김통정은 자결하였다. 끝까지 항거하던 장수 김혁정, 리기 등 70여명은 모두 체포되여 죽었다. 삼별초항전군의 투쟁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안팎의 원쑤들을 다같이 반대하여 3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조직적인 투쟁으로서 고려력사에서 일찌기 류례를 볼수 없는 높은 형태의 투쟁이였다. 삼별초항전군의 투쟁은 외래침략자들과는 끝까지 맞서 싸우려는 우리 인민의 불굴의 기개를 과시하고 몽골침략자들의 일본원정준비 및 송나라침략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삼별초항전을 지휘한 배중손과 김통정은 견결한 투쟁정신과 불타는 애국심을 지니고 최후의 순간까지 원쑤들과 맞서 싸웠다. 고려왕자신도 제주도의 항전군은 실로 《토벌》하기 어려웠기때문에 몽골에까지 응원부대를 청하지 않으면 안되였다고 자인하였던것이다. 심리전과 맹공격의 배합, 리간책, 령활한 해상기동작전 등 여러가지 군사전법들에 의거하여 3년간 치렬하게 벌어진 삼별초항전군의 투쟁사실은 그 지휘자들인 배중손, 김통정의 이름과 나란히 력사에 길이 남아 전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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