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도 큰 사람 강감찬
 

 

작고도 큰 사람 강감찬 

 

강감찬(948-1031년)의 처음 이름은 은천이며 금주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궁진은 태조를 도와 건국에 공을 세웠으므로 삼한벽상공신으로 되였다.

강감찬의 출생과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외국의 어느 한 사신이 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올무렵에 큰 별이 어떤 집에 떨어지는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여 찾아본즉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었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마음속으로 신기하게 여기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양육했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이였다고 한다. 강감찬이 재상이 된 후에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래자리로 물러나서 절하며 《문곡성(별이름)이 오래동안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서 있고나.》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강감찬은 작고 용모도 보잘것 없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신통한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강감찬은 성종때에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이 여러번 올라 례부시랑, 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 중추사, 리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강감찬은 1010년과 1018년 거란의 2차, 3차 침입때 거란의 수십만 침략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수호하는데 결정적역할을 한 애국명장이다.

강감찬이 상대로 한 적은 강한 기동력을 가진 기병이였다. 적들은 빠른 기동력을 리용하여 속전속결을 노리였다. 때문에 타격력이 강하였다. 이러한 적과의 싸움에서는 예봉을 꺾어놓음으로써 적들이 의거하는 수단을 무력하게 만들어놓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1010년과 1018년 두차례의 반거란전쟁은 예봉을 꺾어 적의 기병을 소멸한 강감찬의 신묘한 전법들을 잘 보여주고있다.

1010년 11월 16일 거란임금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던 끝에 직접 40만의 침략군을 끌고 고려로 쳐들어왔다.

고려군은 적들의 침략기도에 대처하여 적의 압록강도하장을 틀어쥐고 배후를 위협하면서 통주계선에서 결정적타격을 주어 청천강이북지대에서 최종적으로 소멸하기로 계획하였다.

첫 전투는 고려의 관문요새인 흥화진에서 벌어졌다. 흥화진방어자들은 도순검사 양규의 지휘밑에 용감히 싸워 성을 지켜냈다. 적들은 할수없이 성을 견제하여 퇴로를 보장할 목적으로 린주(의주군) 남쪽 무로대에 20만의 병력을 떨구지 않으면 안되였다.

계속 남하하는 적의 예봉을 꺾어놓기 위하여 고려군 총 지휘자 강조는 창칼을 꽂아 만든 검차라는 장애물을 일선에 배치해놓았다. 그런데 강조는 첫 승리에 만족하여 전투지휘를 태공함으로써 돌이킬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적들은 통주계선방어진을 돌파하고 계속 남하하였다. 일부 대신들속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강감찬만은 투항을 반대하였다.

《오늘의 사변을 발생시킨 죄는 강조에게 있으니 걱정할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힘에 부친 전쟁이니 마땅히 적의 예봉을 피하였다가 천천히 회복할 방도를 강구합시다.》

이렇게 자기의 립장을 밝힌 강감찬은 왕에게 계책을 제기하였다. 우선 적들이 노리는것은 임금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내자는것이므로 국왕과 고려정부는 일시 피난하며 그 시간을 얻기 위하여 거짓으로 항복을 제의한다, 한편 청야전술로 적들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적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한다, 요긴한 길목들을 막고 험한 지형에 의거하여 보루를 더 높이 쌓아 굳게 지킴으로써 적들의 예봉을 꺾고 퇴각하기를 기다려 추격전을 조직하여 섬멸한다. 강감찬의 제의는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

고려정부의 거짓 강화제안에 접한 거란군은 어리둥절해져 주춤거렸다. 이미 적지 않은 손실을 당하였던지라 거의 모든 장수들속에서는 그에 만족하여 퇴군하자는 제의까지 나왔다. 이때 통주에서 고려군 주력을 격파하는데 《큰 기여》를 한 야률오질만은 고려왕이 《한번 싸움에 패하여 강화를 요구하니 이것은 계교가 아닌지 의심스러울뿐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였다가 그들의 간계에 빠질가봐 두려우니 그 세력이 힘이 다하기를 기다려 굴복시켜 받아들이는것도 늦지는 않을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힘으로 굴복시킬것을 주장하였다.

적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고려정부는 개경을 떠나 일단 광주로 피난하였다.

거란침략군은 1011년 1월 1일 고려의 수도 개경을 점령하여 대묘, 궁궐, 민가들을 모조리 소각하며 략탈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적들은 고려군의 청야전술에 걸려들어 굶주림에 시달리고 추위에 허덕이게 되였다. 그리고 곳곳에서 고려군이 적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한편 적의 병영에 사신으로 간 하공진일행은 임금이 간 곳을 묻는 거란추격부대에 강남으로 갔는데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강남은 대단히 먼 곳이라 몇만리나 되는지 모르겠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적들은 고려왕의 행적을 찾을길 없는데다가 피해상황은 더욱 커져 할수없이 추격을 단념하고 돌아섰다.

개경에 침입하였던 적들은 11일만에 총 퇴각을 개시하였다. 적들이 패주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사정에 대하여 적측 기록에서는 《순(고려 현종왕)은 과연 달아나고 청야전술로 얻는것이 없는데다가 그 군사들이 요지를 막고 험한데 의거하고 보루를 지키니 공격하였으나 항복시키지 못하였》기때문이라고 전하고있다.

고려의 군민들은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강력한 타격을 주었다. 고려군은 구주, 무로대, 리수, 여리참, 애전 등 싸움들에서 적 수만명을 섬멸하였다. 거란군은 고려군의 여러 장수들의 강한 반격에 봉착하고 또 말과 락타는 피로하고 병들었으며 군복과 병기를 다 잃어버리였으므로 압록강을 건너 퇴각하게 되였다. 이때 고려군은 적이 강을 반쯤 건늘 때 후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수많은 적을 물속에 처넣었다.

이처럼 강감찬이 내놓은 정확한 전술은 전쟁의 최후승리를 이룩하는데서 결정적작용을 하였다.

만일 비겁하고 무능한 대신들의 주장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투항하였다면 나라의 자주권을 고수하지 못하는것은 물론 력사에 영원한 수치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당시 형편에서 강감찬이 내놓은 방책은 전쟁을 고려의 승리로 결속지을수 있게 하였다.

강감찬은 1018년 거란의 제3차 침략을 물리치는 싸움도 직접 책임지고 승리에로 이끌었다.

거란장수 소배압(자 한은)이 10만의 정예기병을 끌고 고려를 침략한다는 소식에 접한 고려정부는 1018년 12월에 급히 방어대책을 강구하였다. 이미 거란의 침략위협에 대처하여 10월에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파견되여가있던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하여 방어군이 편성되였다. 그들이 거느린 고려방어군의 수는 20만 8,300명이였다.

강감찬은 녕주에 지휘부를 두고 관문요새인 흥화진에까지 방어진을 폈다. 강감찬의 계획은 적의 정예기병의 예봉을 애초에 꺾어놓는것이였다.

강감찬은 지세를 살펴보고나서 흥화진창고에 있는 소가죽을 있는대로 다 가져오게 하여 긴 바줄로 련결시키였다. 그리고 삼교천상류의 한복판에 말뚝을 박고 그에 의지해 꿰맨 소가죽으로 물이 흐르지 못하게 막아놓았다.

《소가죽제방》에 의하여 물이 불어나기 시작했고 소가죽제방우에는 큰 저수지가 생겨났다.

한편 강을 따라 골짜기와 나무숲에 1만 2,000명의 기병을 매복시키였다.

1018년 12월 10일 드디여 거란장수 소배압의 지휘밑에 10만명의 거란기병이 흥화진을 공격하여왔다.

소배압이라는 자는 993년 거란군의 제1차 침략전쟁당시 침략군대장이였던 소손녕의 형이였다. 소배압은 1010년 거란군의 제2차 침략때에 북부재상으로서 임금 성종을 따라 고려를 침략하였었다. 개경을 점령하고 크게 략탈하도록 한 자가 바로 이자였다. 제법 지략이 많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다고 자부하던 이자는 자기의 적수가 어떤 사람들인지 아직 모르고있었다.

놈들은 2차 침입때 당한 수치를 어떻게 하나 만회하고 기어코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어리석은 망상을 하고있었다. 전번 침입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흥화진에서의 싸움을 피하고 곧바로 고려수도를 향하여 진격할 예정이였다. 거란군은 흥화진에 이르자 일시에 성을 공격하는척 하면서 삼교천을 건너 앞으로 진격하여나아갔다. 전투를 회피하려는 적들에게 전투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것도 중요한 전법에 속한다.

삼교천하류는 거란군사들의 웨침소리, 말울음소리로 들끓었다. 강감찬은 적의 군사가 강 한복판에 들어섰을 때 일제히 소가죽제방을 터뜨리게 하였다. 저수지처럼 고여있던 큰물이 일시에 밀려내려오자 키를 넘는 물사태가 강복판에 들어섰던 거란군사들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강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 죽음을 면한 적들이 기슭에 올라 대오도 정비하기 전에 매복했던 1만 2,000명의 고려기병이 놈들을 덮쳤다. 일제히 활을 쏜 다음 맹렬한 기세로 접근한 고려기병의 칼날이 번뜩이는 곳마다에 거란기병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이 뚝뚝 떨어졌다.

거란기병은 혼비백산하여 병장기들을 버린채 도망치기에 급급하였다.

첫 전투에서의 승리는 거란기병의 예봉을 꺾어놓고 고려군이 싸움의 주도권을 쥐게 하는데 큰 작용을 하였다.

적장 소배압은 첫 전투에서 고려군의 수공전과 매복공격에 걸려 패하자 자기들의 전통적인 전투방법인 벌판에서의 결전을 회피하고 속전속결을 꾀하면서 태천-녕변-개천 등 서북면 산간지대를 통과하여 곧바로 개경을 향해 쳐들어갔다.

돌변한 정세하에서 강감찬은 곧 그에 맞는 전술을 세웠다. 그는 부원수 강민첨으로 하여금 1만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의 뒤를 엄습하도록 하였다.

보통 진격하는 군대의 후위는 전위보다 약한것이 특징이다. 앞에 전투력이 강한 부대를 배치하여야 적의 저항을 분쇄하고 진격의 속도를 보장할수 있기때문이다. 반대로 퇴각하는 군대의 후위에는 전위보다 강한 부대를 배치하는데 그래야 적의 추격을 막고 퇴각을 성과적으로 실현할수 있기때문이다.

강감찬은 이러한 점을 노리고 추격을 조직하였는데 그의 예측은 면바로 들어가 맞았다. 부원수 강민첨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적군을 추격하다가 자주 래구산(평안남도 평성시)에서 적군의 뒤를 습격하여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다. 시랑 조원이 거느리는 고려군도 평양을 에돌아 강동을 거쳐 개경에 가려는 거란침략자들을 마탄(평양시 승호구역 봉도리)에서 맞받아 싸워 1만명이나 살상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련속되는 타격에 소배압은 몹시 초조해났다.

최후의 한판에 운명을 걸고 밑천을 깡그리 내대듯이 소배압은 상원, 수안을 거쳐 개경을 향하여 진격하는 최후의 발악을 감행하였다. 이때 적들의 기도를 미리 간파하고 세운 시기적절한 대책에 의하여 개경의 방비는 철통같이 강화되였다. 강감찬은 병마판관 김종현으로 하여금 1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행군하여 개경에 들어가 지키도록 하였으며 동북면병마사도 3,000여명의 정병을 개경에 보내였다. 그리고 철저한 청야수성전술을 써서 개경주위의 100리안팎의 주민들을 성안에 옮기고 한알의 낟알도 남겨두지 않게 하였으며 우물을 모조리 메워버렸다.

물 한방울, 낟알 한알, 마초 한단 얻을수 없게 된 적들은 극도로 피로하였으며 적장 소배압은 그만 공포에 떨었다. 소배압은 마지막시도로 300명의 척후병을 금교역(황해북도 개풍군)에 파견하였으나 고려군의 야습에 의하여 전멸되였다. 그이상 더 견딜수 없게 된 거란침략군은 마침내 총 퇴각을 개시하였다.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개경방어를 지원하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부대는 곧 추격으로 넘어가 적들에게 쉴 짬을 주지 않고 놈들의 행군서렬을 위협하면서 뒤꼬리를 바싹 물었다. 퇴각하는 거란군에 대한 첫 타격전은 련주(개천)와 위주(녕변)사이에서 벌어졌다. 적들이 쫓겨가는 길목을 지키고있던 강감찬은 1월 23일 침략군을 불의에 기습하여 500여명을 순식간에 소멸하였다.

강감찬은 방어군주력을 구주(평안북도 구성)계선에 집결시키고 철통같은 포위진을 쳤다. 적들은 고려군의 주력과 전투한적이 아직 없었으므로 일정한 력량은 유지하고있었다. 하지만 여러차례의 전투에서 패하여 사기가 없어지고 고려군의 청야전술에 걸려들어 전투력이 심히 떨어진 상태였다.

1019년 2월 1일 구주벌판에서 거란침략군을 물리치는 대포위전이 벌어졌다. 싸움은 처음부터 치렬하였다. 적들은 어떻게 하나 포위를 뚫으려고 그중 전투력이 강한 부대를 북쪽에 집중하였다. 막바지에 이른 적들도 기를 쓰며 출로를 열려고 하였다.

이때 김종현의 부대가 도착하여 합세하였다. 게다가 갑자기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고려군의 사기는 더욱 고조되였다. 고려군이 이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자 된타격을 받은 거란군은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강감찬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들을 추격하게 하였다.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는 길우에 적들의 시체가 널리였고 생포한 인원과 로획한 말, 락타, 갑옷과 투구, 병기 등은 이루 다 헤아릴수 없을 정도였다. 풍부한 지략과 용맹을 뽐내던 소배압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엎드려 기여 달아났다.

적병으로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명에 불과하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거란군은 지금까지 이렇게 비참한 패배를 당해본 례가 없었다.》고 한다.

거란왕은 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하면서 사람을 보내여 소배압을 책망하였다.

《네가 적을 얕잡아보고 경솔하게 깊이 들어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낯으로 나를 대하려는가? 내 너의 얼굴가죽을 벗긴 후에 죽이겠노라.》

소배압은 패전책임을 지고 파멸되였다.

70살의 백전로장 강감찬은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하였다.

고려임금 현종은 너무 기뻐 영파역에까지 마중나가 개선대오를 맞이하였다.

강감찬은 임금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우대》를 받았다. 그는 사망하기 전까지 여러차례 높은 관작과 공신칭호를 받으며 임금들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그는 총애가 커지고 관작이 높아갈수록 더욱 자신을 다잡고 나라일에 힘썼다. 그는 평상시에는 해지고 때묻은 의복을 입고있어서 누구나 그를 보통사람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일단 엄숙한 태도로 조정에 나아가서 국사를 처리하며 국책을 결정하는 마당에서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당시에 풍년이 계속되고 백성들이 생활에 안착하여 나라가 평온한것을 사람들은 강감찬의 공덕으로 이루어진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강감찬은 벼슬을 내놓고 들어와서도 나라방비를 근심하면서 수도에 성곽이 없으니 큰 외성을 축조하자고 건의하였다. 임금은 그 건의를 접수하여 왕가도로 하여금 축조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벼슬을 내놓고 성 남쪽의 별장에서 살면서 《락도교거집》과 《구선집》을 저술하였다.

체모로 보면 자그마하고 볼품이 없었으나 나라와 겨레를 위해 후세에 길이 남을 큰 공적을 쌓은 강감찬, 강대한 적기병의 전략전술적특성과 약점을 옳게 파악한데 기초하여 수공과 매복습격, 추격, 청야전술 등 적의 예봉을 꺾어 격파하는 전략전술로 두차례의 전쟁을 승리적으로 결속짓게 함으로써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지켜낸 그의 공적은 민족사에 자랑스럽게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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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아래 - - 2016-07-09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서 이해하기 좋습니다. 제가 원하던 국사책이네요.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근데 어째 이미지는 안보이네요. 당시 영토가 표시된 지도그림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관리자 - - - - 2016-07-09
이미지문제가 해결되였습니다.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다음편은 언제 올리나요.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력사이야기들을 많이 올려주세요. 명인전, 무술명인전, 감사합니다.
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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