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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대사 장보고
반만년 우리 민족사에 자기의 흔적을 뚜렷이 남긴 인물들가운데는 장보고도 있다. 그는 신라사람으로서 서해와 남해를 이어주는 요충지인 조음도(오늘의 전라남도 완도)에 강력한 수군기지-청해진을 꾸려 제해권을 장악하고 당나라해적들의 략탈행위로부터 겨레의 안전을 지켜내였다. 장보고(?-841년)의 이름은 궁복, 궁파라고도 하였는데 아마도 그것은 아이적 이름이였던것 같다. 그는 고향과 가계를 잘 알수 없는 사람이였다고 하니 수수한 평민출신이였던것 같다. 신라에서 살던 그의 부모는 일찌기 살길을 찾아 바다건너 산설고 물선 당나라로 갔다. 당나라에서 성장한 장보고는 조선반도와의 해상교통의 요충지이고 당시 신라사람들이 많이 거류한 등주에 살면서 많은 돈을 모았다. 그는 그 돈으로 문등현 청녕향 적산촌(산동반도 동남 석성만부근)에 적산법화원(적산원 또는 신라원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절간을 세웠다. 이 절간에는 기본재산으로서 년수확 500석의 전장이 있었고 약 30명정도의 승니(신라인)가 상주하고있었다. 법화원은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사람들의 정신적안식처이자 집합장소, 신라본국과의 련락장소로 되였다. 30살때 장보고는 서주(강소성)로 가서 무령군절도사군영의 소장이 되였다. 무령군은 805년 3월에 서주절도사관하 부대의 이름을 고친것이며 소장은 중견급무관벼슬이였다. 당나라의 동남방에 위치한 서주에서는 당시 왕지흥이 무령군의 병권을 장악하고 만만치 않은 번진(봉건군벌)세력으로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있었다. 때는 820년대였다. 장보고에게는 10살 아래인 정년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정년은 장보고를 형으로 부르면서 따랐다. 장보고와 정년은 다같이 수영을 잘하였고 말타고 창을 쓰는데서는 당시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쌍벽을 이룬 두사람의 용맹을 비교해보면 나이가 아래인 정년이 우세하였다. 하지만 장보고는 그대로 나이가 많다는 리유로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록 무예에서는 서로 양보하려 하지 않았지만 이역에서 같은 겨레라는 혈연적친근감으로 하여 심한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막역한 벗이 되였다. 810년대후반기부터 신라의 서해안에서는 당나라해적들이 출몰하면서 상선들을 습격하고 략탈하였을뿐아니라 지어 백성들을 붙잡아다가 당나라의 등주와 래주를 비롯한 바다가고을들에 노비로 팔아먹었다. 당나라해적들의 이러한 행위는 82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우심해졌다. 해적들의 만행은 당나라 동부지역에 살던 신라이주민들의 불만을 야기시켰으며 이 일대의 당나라관리들로 하여금 일정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신라통치배들도 서해안에 출몰하는 당나라해적들의 준동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822년에 김주필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해적들에게 잡혀갔던 신라사람들의 귀향을 보장해줄데 대한 신라사신의 요구를 당나라임금 목종은 마지 못해 접수하였으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못하였다. 바다가고을들을 돌아보는 과정에 동포들의 비참한 정상을 목격한 장보고의 가슴은 쓰리였다. 한편 그의 가슴속에서는 하루빨리 이러한 비극을 끝장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불같이 타올랐다. 귀국한 장보고는 828년 4월(흥덕왕 3년)에 왕궁에 들어가 국왕에게 이렇게 제기하였다. 《소신이 당나라땅을 돌아다녀보니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부려먹고있었소이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신에게 조음도에 진을 꾸리도록 하여주신다면 소신은 해적들이 우리 백성들을 붙잡아서 서쪽으로 끌어가지 못하게 하겠소이다.》 조음도(완도)는 조선서해와 남해의 경계선에 있는 섬으로서 두 바다를 련결하는 기본통로에 위치하고있는 군사요충지였다. 여기에 수군기지를 꾸리면 서해와 남해에 출몰하는 당나라의 해적들과 일본해적들을 제압하고 제해권을 장악할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곳을 중심기지로 하여 수군활동을 벌리는것은 당시로서는 가장 적당한 군사적조치라고 할수 있었다. 하기에 옛 문헌인 《삼국사기》에도 조음도는 신라해로의 요충이라고 하였던것이다. 이러한 요충지에 수군기지를 꾸리겠다고 한것은 장보고가 지형지물에 밝고 바다실정을 잘 아는 장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그의 제의는 그대로 접수되였다. 신라 흥덕왕은 장보고에게 군사 1만명을 주고 조음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며 그를 대사(장관벼슬)로 임명하였다. 장보고는 리창진, 최훈 등 여러명의 무관들과 함께 조음도의 백성들을 불러일으켜 짧은 시일안에 이 섬에 튼튼한 해군기지를 꾸리였다. 그는 우선 크고 견고한 싸움배를 많이 무어내고 수군병정들을 키워냈다. 장보고는 강력한 수군함대에 의거하여 서해와 남해해상에서 맹렬한 군사활동을 벌림으로써 인차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였다. 청해진설치후 해상에서 우리 사람들을 노비로 매매하는 일이 없어지게 되였고 835년부터는 서남해안에서 당나라해적들의 략탈행위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대외적권위는 더욱 높아지고 대외무역도 활발히 전개되였다. 그의 활동에 의하여 신라선박뿐아니라 당나라, 일본상선들의 항행상 안전도 보장되게 하였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꾸리고 그에 의거하여 활동을 벌려나가는 과정에 방대한 군사력을 키우고 840년부터는 청해진의 배들을 리용하여 당나라 및 일본과의 중개무역도 진행하여 많은 재부를 축적하였다. 장보고는 일약 서해와 남해의 제해권과 무역권을 다 틀어쥔 수군장수, 대무역상인으로 동방 각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청해진의 세력이 커지자 장보고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왕실내부의 권력다툼에까지 끼여들었다. 836년 왕위쟁탈전에서 패한 왕족 김우징이 이듬해 8월 청해진으로 도망쳐와서 지원을 요청하자 장보고는 자기에게 와서 의탁하고있던 정년에게 5,000명의 군사를 주면서 도와주게 하였다.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신무왕)을 왕으로 올려세우는데서 세운 《공로》로 하여 장보고는 839년초 국왕으로부터 《감의군사》칭호와 2,000호의 《식실봉》을 받았으며 그해 8월에는 새로 즉위한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으로부터 또다시 《진해장군》칭호를 받았다. 장보고는 나아가서 신라왕실의 외척이 되여 부귀영화를 누려보려고 꾀하면서 자기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바다사람이라고 멸시하는 신라귀족관료들의 완강한 반대로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왕조는 장보고의 세력이 매우 강대한데 겁을 먹고 토벌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841년 11월 신라왕실은 장보고와 이미 안면이 있던 무주별가 염장을 파견하여 그를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동원하여 그 부하들의 반항을 진압하였다. 신라통치배들은 반란진압후에도 장보고의 부하들과 청해진백성들이 신라왕정의 탄압을 반대하여 계속 여러가지 형태로 저항하자 851년 2월 청해진을 페지하였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벽골군(전라북도 김제)으로 이주시켰다. 신라봉건통치배들의 권력다툼과 배타적인 골품제도의 후과로 청해진이 해산됨으로써 신라의 수군은 또다시 쇠퇴되고 나라의 해상방어는 약화되였다. 청해진은 거의 24년간 강대한 수군기지로서 당나라해적들의 략탈행위를 종식시킴으로써 신라의 수군력을 강화하고 나라의 대외적권위를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청해진대사 장보고는 비록 권력욕에 사로잡혀 비참한 운명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으나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라수군을 강화하고 해적들의 행위를 근절시킴으로써 겨레의 안전을 보장하고 민족사에 자기의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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