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발해국을 세운 고영창
 

 

대발해국을 세운 고영창 

 

해동성국의 위용을 자랑하던 발해는 926년 국내의 통치위기가 심각해진 기회를 틈타 40만의 대군으로 쳐들어온 거란침략자들에 의하여 자기 존재를 끝마치게 되였다.

그러나 발해유민들은 불타는 애국심을 안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그 투쟁은 근 200년간 줄기차게 벌어졌다. 그 과정에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 흥료국 등 발해의 계승국들이 련이어 세워져 굽히지 않는 민족의 기개를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여기서 이야기하게 되는 대발해국도 그가운데 하나이다. 발해가 멸망한 때로부터 근 200년만에 발해의 계승국으로 세워져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더욱 억세여지는 우리 민족의 기개를 만천하에 시위한 대발해국의 수립은 발해유민들의 고국수복투쟁의 마지막총화였고 귀감이였다.

이 대발해국의 창시자가 바로 고영창(?-1116년)이다.

고영창의 고씨는 고구려의 왕족성씨이며 옛 발해국안에서는 왕족인 대씨 다음가는 귀족성씨로서 발해우성(큰 귀족성씨 고, 장, 양, 두, 오, 리)가운데서 첫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옛 기록에는 료나라(거란)의 정치가 날로 부패해져 금나라(녀진)의 아골타가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였으나 그것을 막을수 없었다고 한다. 이때 발해유민출신인 고영창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전하고있다.

고영창이 폭동을 일으키기 전야에 료나라의 정치정세에서는 급격한 변화들이 일어나고있었다.

거란의 봉건통치질서가 문란해지고 통치배들이 부패타락해가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거란인들과 주변종족들사이의 모순이 극도로 첨예화되였다. 거란임금 천조는 사냥에만 미쳐돌아가고 관료배들은 저들의 안일사치를 위해 백성들과 여러 주변 종족들에게 무거운 부담과 고역을 들씌우고있었다. 곳곳에서 백성들이 폭동에 궐기하고 여러 종족들내부에서 독립기운이 날로 높아가고있었다.

료나라의 파국을 앞당겨온것은 녀진인들의 침입과 거란안의 다른 민족, 종족들의 반거란항전이였다.

녀진족은 옛 발해국에 복속되였던 흑수말갈에서 갈라져나온 종족으로서 옛 문헌들에서는 그 시조가 고려사람이였다고 전하고있다.

녀진인들은 세력이 커지자 고려의 동북부지역에서도 고려인민들의 생명재산을 침해하며 략탈과 파괴를 자행하고있었다. 그리하여 고려봉건정부는 1107년에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17만의 대병력으로 녀진을 정벌하였다.

녀진족들은 강력한 타격을 받고도 계속 자기의 력량을 확대해나갔다.

1102년에 자기 형의 뒤를 이어 녀진족의 우두머리로 된 아골타(후에 민으로 고침. 세조의 둘째 아들이며 녀진 완안부사람)는 23살때 내란을 평정하고 녀진족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113년에 녀진족의 최고통솔자인 도발극렬이 되였으며 린근의 부락들을 통일하고 점차 료나라에로 진공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때 녀진이 동원할수 있는 병력이란 겨우 수천명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골타는 거란의 취약성을 간파하고 1114년에 당시 아직 백수십만명의 대군을 가지고있던 거란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해나섰다.

금나라군은 여러 전투들에서 전과를 올리였다.

아골타는 다른 민족, 종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전투후에 도망치는 자들을 쫓지 않도록 하고 투항해왔거나 포로되였다가 다시 달아나는 자들에 대해서도 죄를 주지 말며 추장들은 종전대로 추장을 시키고 일반백성들도 저들이 편리한대로 거처를 정하고 살게 해주도록 하였다. 특히 발해유민들에 대해서는 더 《점잖게》 대해주며 포로된 량복, 압달라 등 그들의 상층으로 하여금 여러 지방 발해유민들에게 아골타의 《관대성》을 선전하게 하였다.

군사적성과에 병행하여 실시된 이러한 회유책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녀진에 투항하게 만들었으며 거란군의 사기를 저락시키고 료나라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무너져가는 거란의 운명을 지켜보고있던 발해유민들은 바로 지금이야말로 고국회복을 위한 성전에 떨쳐나설 때임을 간파하였다.

1115년 2월 발해인장군 고욕은 요주(오늘의 내몽골 적봉)에서 거란강점자들을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요주는 거란의 상경도에 속하는 한개 주로서 옛 발해국의 멸망당시 거란강점자들에 의하여 강제이주당한 발해유민들로 구성된 주였으며 거란의 여러 주들가운데서 발해유민들이 가장 많이 살고있는 주들의 하나였다. 이 주의 군대는 광의군이라고 하였고 행정적으로는 장락, 림하, 안민 등   3개 현을 관할하고있었는데 그 군대와 주민의 대부분은 발해유민들이였다.

고욕의 원래 지위가 무엇이였으며 그때 요주사람들이 고욕을 왕으로 내세우면서 나라이름을 무엇이라고 하였는지 다 기록에서 빠져 알수 없다. 그러나 고욕이 일정한 벼슬을 가지고 짧은 시일안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수 있는 지위에 있었던 사람으로 보인다.

요주 발해유민들의 투쟁에는 요주뿐아니라 거란 상경도관하에 포함되여있는 16개의 두하군주가운데 일부 두하군주의 발해유민들도 참가하여 그 총수는 보병, 기병 합하여 3만여명에 달하였다.

당황해난 거란왕정에서는 소사불류에게 많은 병력을 주어 발해유민들의 폭동부터 진압하게 하였다. 자기들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폭동이여서 어지간히 공포를 느꼈던것이다. 그러나 요주 발해유민들의 영용한 항전에 부딪쳐 소사불류는 4월에 진행된 전투에서 대참패를 당하였다. 이렇게 되자 거란통치배들은 남면부부서 소도소알을 도통(총사령관)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다.

소도소알 역시 5월에 진행된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교활한 소도소알은 악랄한 술책을 써서 6월에 대왕 고욕과 그 주요부하들을 불러들여 모두 붙잡아죽이고 전면적공세를 취하였다. 지휘관을 잃은 발해유민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일단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지휘관들의 경각성이 무딘탓으로 하여 폭동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요주 발해유민들의 투쟁은 계속되였다.

요주폭동군을 일시적으로 진압한 거란군은 12월에 서진하는 금나라군대에 맞섰으나 호보답강의 전투에서 또다시 대참패를 당하였다.

이러한 속에 발해유민들의 애국전통이 빛나게 과시된 자랑스러운 해 1116년의 새날이 푸름푸름 밝아오고있었다.

1116년 정월 초하루.

어둠속을 누비며 10여명의 젊은이들이 동경류수부로 접근해가고있었다.

두 젊은이가 극에 기대여서서 끄덕끄덕 졸고있는 파수병에게 비호같이 달려들어 해제꼈다.

그들을 지켜보고있던 다른 젊은이들이 가볍게 몸을 날려 담을 넘었다. 모든것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였다.

젊은이들가운데 가장 나이들어보이는 다부진 사나이가 대청아래서 졸고있는 수직아전에게 다가갔다. 그가 바로 이번 폭동을 조직하고 류수 소보선을 처단하는것으로 폭동의 봉화를 지필 계획밑에 직접 10명의 날파람있는 젊은이들을 데리고 류수부의 담을 넘은 무용마군의 비장(지휘관)이며 발해승봉관인 고영창이였다.

그는 수직아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깨웠다.

몸을 흠칫 떨며 잠에서 깨여난 아전의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날이 선 비수를 본 아전은 턱을 덜덜 떨며 찍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무서워 말아. 그래, 안에 류수가 있는가?》

《이-있소이다.》

《그에게 말해. 밖에 군변이 일었으니 속히 나와 조처해주십사고 말이야.》

온몸을 사시나무떨듯 하며 일어난 아전이 안에 대고 영창이 가르쳐준대로 일렀다.

그때 방에서 설을 즐기러 찾아온 발해인들인 호부사 대공정, 부류수 고청명(고청신이라고도 한다.)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던 소보선은 군변이란 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취한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 동헌으로 나온 그는 자기앞에 서있는 고영창을 보자 골살을 찌프리며 역증을 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밖에 군변이 일어 류수를 모셔가려고 왔소.》

《뭣이?!》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것을 눈치챈 소보선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에 좌우켠에서 젊은이들이 달려들며 그를 결박지워 꿇어앉혔다.

《이 무슨 짓들인고?》

《닥쳐라. 천하에 악귀같은 놈! 네놈이 저지른 악행을 아직 모른단 말이냐. 이 땅의 주인은 우리 발해사람들이다. 네놈이 발해사람들에게 조세를 과중하게 들씌우고 쩍하면 악형을 가하였으니 그 대가가 어떤것인지 알게 하자는것이다. 다른 종족들과 불화를 조성시켜 또 얼마나 많은 발해사람들을 죽게 하였느냐. 그래도 네 정녕 살기를 바란단 말이냐? 너의 학정으로, 너의 간교한 술책으로 쓰러져간 발해사람들의 원한을 담아 너를 극형에 처한다.》

고영창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한 젊은이가 비수를 놈의 가슴에 깊숙이 박았다.

《안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쳐죽여라!》

영창의 명령에 따라 젊은이들은 내실로 뛰여들었다.

하지만 일이 글러진것을 눈치챈 대공정과 고청명은 들었던 잔을 내던지고 뒤문으로 뺑소니를 쳤다.

방에는 그들이 데리고 놀던 기생들과 악공들만이 사색이 되여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하고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고영창은 대공정과 고청명의 도망으로 조용히 해제끼려던 당초의 계획이 틀려졌음을 느꼈다.

아닐세라 온 성안이 들끓기 시작하였다.

고영창을 비롯한 습격조원들은 다음 행동계획을 약정하고 헤여졌다.

대공정은 사건이 발생하자 즉시 류수의 사업을 림시로 맡고 부류수 고청명과 함께 군사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발해유민들이 응하지 않자 한족, 해족들을 불러모았는데 한 1,000여명가량 되였다.

오래동안 거란통치배들에게 붙어 관료생활을 해온 대공정은 동족을 해치는 짓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 대공정은 류수를 죽인 악당들을 잡는다는 미명하에 발해유민들의 집을 몽땅 수색하였으며 젊은 사람들, 좀 의심스럽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죽이였다. 잠간사이에 숱한 발해유민들이 희생되였다.

료양성의 발해유민들은 이자의 만행에 극도로 분개하였으며 온 성이 복수의 일념으로 불탔다. 이날 밤으로 성안의 여러 병영들과 관청, 주택지구들에 화재가 일어났고 거란인 악질관리들에 대한 처단이 시작되였다.

1월 3일, 고영창이 이끄는 백초곡 발해무용마군의 부대가 수산문(성의 서남문)쪽으로 육박하여와서 성안의 해족, 한족으로 무어진 군대와 대치하여 일대 결전의 태세를 취하였다. 대공정은 성문루에 올라가 돌아설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폭동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더욱 기세를 올리면서 함화로써 오히려 적들에게 투항을 권고하였다.

1월 5일 밤, 성안의 발해유민들은 여러곳에서 불을 지피고 성밖의 군대와 호응하면서 수비군을 제끼고 성문을 활짝 열어 발해무용마군이 쳐들어오도록 하였다. 발해무용마군의 기병들이 공격해들어와 거리들에 진을 치고 적들과 격렬한 시가전을 벌렸다. 결국 해족, 한족으로 무어진 부대는 괴멸되였고 대공정, 고청명 등은 휘하의 잔병 100여명만을 거느리고 서문을 탈출하였다.

동경료양성이 적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후 짧은 기간에 료동지방 50여개 주의 발해유민들이 폭동군에 적극 호응해나섰다.

이러한 성과에 토대하여 고영창은 발해유민들의 세기적숙원을 담아 대발해국(대원이라고도 전해짐.)을 선포하고 년호를 륭기(응순으로도 전해짐.)로 정하였다. 발해유민들은 이번 폭동을 조직지휘한 고영창을 대발해국의 《황제》로 내세웠다.

고영창은 기병소부대들을 여러 주, 현에 나누어보내여 그곳 인민들과 힘을 합쳐 악질통치배들과 부자놈들을 처단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나누어주게 하였다. 이때 거란, 해족악질관리들과 일부 다른 족속들은 저들이 발해유민들에게 못되게 놀았던 전날의 죄과가 두려워 가족을 거느리고 도망쳐버렸다.

일부 거란인관리들가운데는 거란의 장래에 기대를 걸지 않으면서 료나라를 배반하고 자진하여 대발해국편에 와붙는자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대발해국의 국력은 급속히 장성되여갔다. 그의 수하에 집결된 군대는 잠간사이에 8,000명으로 늘어났다.

고려에서 안북도호부 《아전》의 명목으로 토산물과 공문서를 가지고 동경에 가서 윤언순, 서방, 리덕윤 등 여러 사신들이 오래 체류하고있는 리유를 탐지하도록 파견한 교서랑 정량직은 대발해국의 위세가 대단한것을 보고 고영창에게 고려를 대표하는 사신으로서의 례절을 차리였다. 그리고 고려국을 대표하여 대발해국의 황제에게 국가의 공문서와 토산물을 드린다고 하면서 료나라 동경류수에게 보낸것을 고영창에게 바쳤다. 정량직이 자신을 《신 아무개》라고 하면서 이러한 거짓말을 한것은 동족의 나라인 발해의 계승국이 다시 선것이 기뻐서 국가를 대표하여 인정해주고싶었기때문이였을것이다.

고영창은 동족의 나라인 고려가 자기를 인정해준데 대하여 매우 기뻐하면서 보수를 톡톡하게 주었다.

고영창은 인재들을 더 많이 쟁취하는데도 힘을 넣었다. 그는 발해유민으로서 당시 인재로 알려져있던 로극충, 왕정, 고정 등 거란의 지배하에서 벼슬을 한 자들에게 대발해국의 벼슬을 주며 불렀다. 그러나 로극충은 비겁하게도 달아나 금나라 원군왕 알로에게 투항하였다.

선조들이 옛 발해국과 료나라에서 벼슬한 배신자가문의 왕정은 그 전통을 이으려는듯 여러가지 구실을 붙여가며 응하지 않았고 고정은 마지 못해 응하였다.

고영창은 광주의 후개와 련계를 가지고 그들의 력량을 인입하기 위한 사업도 벌렸다.

한편 이족들을 쟁취하기 위하여 갈소관에 사람을 보내여 설복하였다. 갈소관의 녀진인들은 고영창의 군사가 강한것을 두려워하여 응하려고 하였으나 금나라시조의 혈통인 호십문이라는 자는 이를 거절하고 자기 족속들을 불러 도망칠것을 모의하였다.

고영창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타격을 가하게 하였다. 타희산아래에서 대발해국군의 맹공격을 받은 호십문은 겨우 제 목숨만 건져가지고 금나라 장수 철개에게로 달아나 투항하였다.

고영창의 봉기소식을 들은 거란통치배들은 금나라의 공격으로 전전긍긍해있는 판에 발해유민들의 폭동까지 일어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다가 소을설, 고흥순 등을 보내여 투항을 권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영창과 그의 대발해국은 이를 일축해버리고 항전기세를 더욱 높이였다.

거란통치배들은 윤1월 4일에 소한가노, 장림에게 대발해국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대답이런듯 윤1월 23일에 광주의 발해군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영창의 대발해국에 편승하였다. 결국 심주만을 내놓고 동경도의 모든 주, 현들이 고영창의 대발해국에 합류해나섰다.

장림은 료동지역에 이르러 직업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자들과 해족, 한족 전호(대부분은 포로로 잡혀와서 거란인 관료 및 기타 주민들의 노복으로 되여있던 자)들가운데서 씩씩한 자들을 골라 《토벌》군을 보충하였다. 그리하여 그 수는 짧은 시일안에 2만명으로 늘어났다.

대발해국군은 교활한 수법으로 심주로 들어간 거란 《토벌》군과 심주와 그 일대에서 10여일동안에 30여차례의 싸움을 벌려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일단 료양성으로 돌아온 대발해국군은 태자하를 사이에 두고 적들과 대치하였다.

적장 장림은 수적우세를 믿고 사람을 보내여 투항을 설교하였다.

고영창은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달불야, 표합 등을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여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예기병을 선발하여 잘 무장시켜 적의 익측을 타격하게 하였다.

대발해국군은 먼저 도하해온 안덕주의군이라는 적의 《정예》부대를 물리쳤으며 철기 500명은 상류쪽에서 도하하여 적주력의 익측을 엄습하였다. 된타격을 받은 적들은 뒤로 물러섰다.

수세에 빠진 적들은 3일동안이나 악착스레 강을 건느려고 시도했으나 대발해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적병들은 사기가 저락되고 대부대의 식량을 보충할수 없게 되자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밤마다 몰래 심주성을 향해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마지막대오가 퇴각하려던 밤에 발해기병이 용감한 추격전을 벌려 수천명을 소멸하였는데 이때 건장하고 걸음이 빠른 자들만 겨우 살아 심주성으로 도망쳐갔다고 한다.

한편 달불야, 표합이 가지고간 고영창의 국서를 본 아골타는 못마땅해하면서 동경은 자기네 금나라와 가까운 곳인데 고영창이 이에 웅거해서 참람되게 황제를 칭했으니 옳지 않다, 자기에게 귀속되면 왕으로 책봉하여줄수 있다, 금나라사람 호돌고가 모반하여 료나라에 들어갔다가 지금 동경에 의탁했다고 하니 돌려보내주면 좋겠다는 내용의 국서를 보내도록 하였다.

녀진사신 호사보와 함께 돌아온 달불야에게서 아골타의 국서를 받아본 고영창은 몹시 분개하였다.

《어찌 이렇듯 무례할수 있단 말이냐. 그도 황제요, 짐도 황제이다. 원래 녀진은 옛 발해국의 속민이였다. 지금 힘이 커졌다 해서 옛 정리를 잊을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 발해사람들을 많이 략취하여 저들의 수하에 부리고있는데 참으로 분개할 일이다. 옛날 발해와 녀진이 힘을 합쳐 거란태조 아보기와 싸웠던것처럼 지금도 우리는 공동의 적 거란을 반대하여 합쳐야 한다.》

고영창은 열변을 토하며 금나라사신 호사보앞에서 그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을 발해사람들의 기개를 시위하였다.

고영창의 강의한 의지를 알게 된 호사보는 지금은 공동의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그의 제의에 리해를 표시하였다.

그런데 금나라를 하대하면서 모든 발해인들을 돌려보내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다시 받아본 아골타는 극도로 분개하였다.

저들에게 투항한 발해인 대약사노를 고영창의 사신 달불야와 함께 보내여 고영창을 달래게 하는 한편 대부대의 《토벌》군을 편성하였다.

1116년 4월 2일, 알로를 총대장으로 하고 도모를 부대장으로 하는 정예부대는 거란의 동방성들을 공격하면서 심주로 육박하였다.

금나라군은 익퇴하(오늘의 이통하)연안의 소산성에서 거란군을 격파하고 심주성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대발해국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있던 장림의 거란《토벌》군을 소멸하였다.

심주성을 함락시킨 후 금나라군 대장 알로는 포찰, 적고내의 부대, 함주군도통 알로고의 부대와 련합하여 고영창의 대발해국을 칠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대발해국은 시련을 겪고있었다.

광주의 후개가 거느린 발해폭동군은 고영창의 지시로 1115년 6월에 고욕이 피살된 후 계속 저항해오던 요주 발해군과 련계를 맺었다.

거란통치배들을 반대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벌리던 그들은 장가노의 거란인 반란세력과 련계를 가지고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 전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사태가 돌변하여 후개는 3월에 천주에서 잡히였고 4월 10일에는 거란인 반란두목 장가노가 패하였으며 11일에는 요주 발해군이 진압당하였다.

여러 종족들이 망해가는 거란에 등을 돌려대고 금나라에 가붙음으로써 외부의 동맹군을 잃은 고영창의 대발해국은 점점 더 고립무원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그리고 장림의 《토벌》군과의 여러차례 전투에서 일정한 손실을 보았다.

고영창은 적들의 세력을 일단 저지시켜놓고 준비를 갖추기 위해 자기가 가장 신임하는 가노탁자를 시켜 금도장  1개, 은패 50개 그리고 거짓번국이 되겠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주어 알로에게 갖다주게 하였다. 알로는 이것을 믿고 호사보, 철팔을 답례사신으로 보냈다.

적들의 공격이 늦춰진 기회를 타서 고영창은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수성기재들을 보강하며 활과 화살, 창검들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등 일련의 수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장현소, 고정, 달불야 등 비겁한 배신자들이 고영창을 잡아가지고 금나라에 항복할 흉계를 꾸미고있었다.

금나라군이 강점한 심주성에는 고정의 늙은 에미가 있었다. 고정은 배신자들의 도움으로 밤에 몰래 성을 넘어 심주성으로 달아나 금나라군에 투항하였다. 배신자 고정은 곧바로 알로를 찾아가 《고영창이 항복하겠다고 한것은 진짜가 아니라 거짓입니다. 왕사(금나라군대를 가리킴.)가 쳐들어오는것을 지연시키고 그동안 준비를 갖추려고 하는 술책일뿐입니다.》라고 고해바쳤다.

비로소 깨달은 알로는 금나라군에 료양성을 향해 총공격할것을 명령하였다.

고영창은 이에 격분하여 답례사신으로 와있던 호사보와 철팔을 처형하여 조리돌리며 굽히지 않을 의지를 표명하였다.

노예로 사느냐, 아니면 영웅으로 죽느냐 하는 생사를 판가리하는 싸움에 전체 대발해국군민이 떨쳐나섰다.

두 나라군대는 옥리활수(태자하의 딴 이름)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대발해국군의 저항으로 금나라군은 쉽게 도하를 실현할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 로극충을 비롯한 배신자들이 길잡이가 되여 옥리활수를 건늘수 있는 곳으로 적군을 안내하였다. 정녕 한명의 배신자는 천명의 원쑤보다 더 위험하였다.

그런데 그곳은 감탕이여서 적들은 무서워 주춤거렸다. 적장 도모(아골타의 배다른 동생)가 자기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앞장에 서서 진펄을 건넜다. 그제서야 적의 전군이 일제히 진펄을 건느게 되였다.

위급한 정황속에서 고영창은 성안의 전체 군민을 항전에 불러일으켰다.

대발해국군은 수산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적들에게 된타격을 안기였다.

휴식을 위해 성으로 돌아오던 고영창과 대발해국군은 뜻밖의 정황에 부딪치게 되였다. 성문은 굳게 닫겨져있고 성우에서는 화살이 비발치듯 쏟아져내리고있었던것이다.

순간 아연해졌던 고영창은 정신을 가다듬고 성우에 대고 소리쳤다.

《어느 놈이 이따위짓을 하느냐. 어서 성문을 열지 못할가?!》

얼마후 문루에 장현소와 륙가 등 배신자들이 나타났다.

《고영창, 네가 참람되게 <황제>를 칭하고 우리를 헛되이 죽이려들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이놈, 내 너를 박대하지 않았거늘 어이하여 오늘 이같이 분수없이 노는고?》

《여러말 말아. 난 이미 금국에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네가 아무리 날구뛰여도 금국은 당해내지 못한다.》

《너는 발해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나는 고구려사람이 될수도 있고 발해사람이 될수도 있으며 료나라사람이 될수도 있고 대발해국사람이 될수도 있다. 필요하다면 금나라사람도 되는거지.》

《너절한 배신자, 저놈을 쳐라!》

대발해국군인들은 격분하여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성우에는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결박된채로 나타났다.

대발해국군인들은 순간 그 자리에 굳어졌다.

《자, 어서 공격하라. 성안의 너희 처자들을 우리가 이렇게 잘 보호해주고있다. 그러나 공격하는 경우에 그들을 모두 죽여버릴것이다. 고영창, 너의 처자도 은승과 노선가가 붙잡아다 여기에 세웠으니 어서 올려다보아라. 흐흐…》

장현소의 징그러운 웃음소리에 이어 《금나라군대다-》라는 후군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할수없이 고영창은 앞으로 다시 일떠설 결의를 가다듬으며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장송도(비자와동쪽의 장산도)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고 금나라에 투항한 달불야를 비롯한 배신자들의 모략에 걸려 가노 탁자와 함께 적들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서 처형되였다. 이렇게 되여 고영창의 대발해국은 다섯달만에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게 되였다.

고영창은 비록 배신자들에 의해 비참한 운명을 마쳤으나 그의 부하들은 앞으로의 투쟁을 위하여 장송도로 들어갔다.

단군의 옛 땅에 대발해국을 다시 일떠세우고 민족의 존엄과 기개를 떨치려던 고영창은 자기의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최후를 마쳤으나 천만년세월이 흘러도 굽히지 않는 우리 민족의 애국의 넋을 만천하에 과시한것으로 하여 청사에 길이 그 이름을 남기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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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아래 - - 2016-07-09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서 이해하기 좋습니다. 제가 원하던 국사책이네요.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근데 어째 이미지는 안보이네요. 당시 영토가 표시된 지도그림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관리자 - - - - 2016-07-09
이미지문제가 해결되였습니다.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다음편은 언제 올리나요.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력사이야기들을 많이 올려주세요. 명인전, 무술명인전, 감사합니다.
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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