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강역을 최대로 넓힌 대인수
 

 

발해의 강역을 최대로 넓힌 대인수 

 

793년 3월 4일 3대 문왕 대흠무가 죽은 후에 계승자문제를 둘러싸고 복잡해졌던 정국은 794년 6대 강왕 대숭린(대흠무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손자라고도 한다.)의 통치기간에 약간 안정되였다. 그러나 808년에 강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인 원유, 언의, 명충이 줄지어 왕위에 오르며 복잡한 정국을 또다시 연출하였다.

통치배들은 정권쟁탈에만 광분하면서 나라의 안정과 발전에는 거의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이를 틈타 발해에 복속되였던 북쪽의 여러 족속들이 발해에서 떨어져나가려고 시도하였다.

쏠라닥거리는 이족들을 진압하고 령토완정과 번영을 이룩하는가 아니면 이대로 주저앉고마는가, 진보와 쇠퇴의 갈림길에서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걸머지고 한 사나이가 나섰다.

옛 기록에는 그가 타고난 모습이 총명하고 덕은 신과 같으며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곧 태조(대조영)의 풍채를 소유했다고 전해지고있다.

그의 이름은 대인수(817-830년), 죽은 후에 받은 시호는 선왕이였다.

그의 증조부는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의 동생이였던 반안군왕 대야발이다.

대야발은 뛰여난 문인, 력사가로서 옛 조선의 사기를 적은 《단기고사》를 재편찬하는데 공적을 세웠다. 그는 후손들에게 그 책을 남기며 조상의 땅을 모두 되찾을것을 부탁하였었다.

그의 뜻대로 력대 발해임금들은 동, 서, 남, 북으로 조상의 땅을 수복하며 령토를 넓혀나갔다.

그런데 그 땅에 이주하여와서 살던 이족들이 발해의 통치층내부가 평온치 못한 기회를 타서 그의 통제하에서 벗어나보려고 하였던것이다.

이러한 때 발해국의 운명을 맡아안고 대인수가 열번째로 왕위에 오르게 되였다.

《짐은 기필코 대발해를 천하에 우뚝 솟게 하리로다.》

정양궁에서 등극하는 날에 대인수는 이와 같이 자기의 굳은 결심을 표명하고 년호를 《건흥》으로 정하였다.

그는 첫 사업으로 군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중앙군 및 지방군부대들을 강화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부들에는 절도사들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호전적인 거란과 대치한 부여부와 같이 특별히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요충지들에는 정예부대들을 배치하였다.

곳곳에서 성들을 신축, 수축하는 사업들이 벌어지고 장성을 쌓는 역사들도 진행되였다.

수군무력도 증대되였다. 파손된 배들과 벌레먹어 못쓰게 된 배들에 대한 수선작업이 벌어지는 동시에 한번에 100여명씩 승선하고 많은 군사장비들을 적재할수 있는 대형전선들도 건조되였다.

대인수는 유학의 침습으로 점차 사라져가는 고구려이래의 상무의 기풍을 되살리는데도 힘을 넣었다.

그는 온 나라 백성들이 군사를 중시하도록 하는데서 무술체육에 특별한 관심을 돌렸다.

발해에서 장려된 무술체육의 하나는 격구였다.

격구는 말을 타고 달리며 공을 치는 놀이로서 말타기능력이 반드시 보통말을 타는것보다 더 능하여야 할수 있는것으로 되여있었다. 그러므로 무술을 련마하는데는 격구보다 더 좋은것이 없다고 하였다. 후세사람들도 격구야말로 유희를 통하여 전투를 연습하는것이라고 여기며 격구를 즐기였다.

격구가 온 나라에 퍼지자 너도나도 거기에 몸을 잠그게 되였고 큰 규모의 《구마지회》(격구대회)도 성황리에 열리군 하였다.

한편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술체육도 적극 장려하였다.

무술체육의 장려는 세사람이 모이면 범 한마리를 능히 당해낸다고 하던 발해사람들의 용맹과 담력에 만부부당지용의 나래를 달아주었다.

대인수는 토지제도도 변혁하였다. 어지러운 국내형편과 이족들의 빈번한 침입략탈행위, 관리들의 수탈행위로 말미암아 토지와 류리되여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농민들에게 일정하게 안정된 생활을 약속해줌으로써 그들을 돌아오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불충분한 토지제도나마 농민들에게 환상을 조성함으로써 그들을 토지에 얽어매여놓게 하였으며 생산의 발전을 추동하고 국가적축적을 늘이고 군량미도 충분히 확보할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준비에 기초하여 대인수는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발해에 복종하지 않고 또 눈치를 보아가며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북방 여러 종족들에 대한 토벌을 단행하였다.

대인수의 지략과 담력, 발해군의 용맹에 기가 질린 북방의 제 종족들은 모두 무릎걸음으로 기여들어와 항복서를 바쳤다. 그리하여 흑수말갈부족들은 모두 발해에 완전귀속되게 되였다.

력사기록에는 대인수가 《해북의 제부를 토벌하고 령토를 크게 넓히는데 공이 있었다.》고 기록되여있다.

대인수는 참으로 광활한 령토를 개척하였다. 서쪽은 료하계선까지, 동쪽은 동해, 북쪽은 제야강 상류로부터 오호쯔크해를 련결한 계선까지 차지하였다.

이제 남은것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여 조상전래의 옛땅을 전부 합쳐 하나로 하는 일뿐이다.

옛 문헌에는 대인수가 《남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령토를 넓히고 새로 군, 읍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여있다. 또한 신라가 발해의 맹공격에 대처하기 위하여 826년에 한산주이북의 백성 1만명을 동원하여 패강장성 300리를 쌓았다고 전하고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발해가 조상전래의 땅을 하나로 합치기 위하여 신라에 대한 부단한 공격을 진행하여 그 북변의 적지 않은 지역을 차지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대인수는 발해의 령토가 넓어지고 각이한 지리대와 기후대에 속하는 지역들이 생겨남에 따라 해당 지역의 특성에 맞는 생업을 장려하게 하였다. 이것은 한편으로 지역간의 상업거래를 촉진시켰다.

주변의 당나라나 거란 등 나라와 족속들은 말할것도 없고 멀리 아라비아의 상인들까지 발해에 들어와 교역활동을 벌리였다.

대인수는 특히 발해의 상인들이 사신왕래의 명목으로 일본에 적극 진출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경제발전을 자극하고 문화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823년 고정태를 사두로 하는 발해사신단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 우대신 후지와라노 오쯔구는 발해사람들이 손님이 아니라 상인들이라고 하면서 아우성을 쳤고 825년에 고승조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에도 그들은 발해사람들을 수도에 들어가게 하는 경우 나라재정을 고갈시킨다고 우는소리를 하였다.

발해사신단의 교역활동은 그 규모에 있어서 대단히 방대한것이였다. 그러한 속에서 미개하였던 일본의 경제는 눈을 뜨게 되였으며 문화적으로도 개명하게 되였다.

대인수가 821년에 파견한 왕문구를 사두로 하는 발해사절단은 훌륭한 시편들을 창작하여 일본문단을 놀래웠으며 특히 격구를 보급함으로써 깊은 감명을 남기였다. 왕문구 등이 출연한 격구를 보고 일본임금 차아는 《이른 봄 타구(격구)를 보며》라는 시까지 지어가며 감탄하였다.

또한 격구동작을 하면서 4~6명으로 이루어진 무용수들이 춤을 출 때 연주하는 악곡이 《타구악》으로 명명되여 궁중에서 경마, 말타고 활쏘기 등의 행사가 진행될 때마다 연주되였다. 그후에 말을 타지 않고 공을 치는 아이들의 유희로 되였는데 그 경우에는 구장, 구타(깃쬬)라고 불리우며 정월놀음으로 널리 보급되였다.

대인수는 어디까지나 통치계급의 리익의 대변자로서 그의 궁극적목적은 왕의 전제권을 더욱 강화하고 자기의 통치지반을 공고히 하며 착취계급의 권익을 옹호하자는데 있었다.

하지만 대인수는 10여년간의 통치기간에 발해의 국력을 강화함으로써 령토완정을 이룩하고 나라의 대외적권위를 높이는데 이바지한 재능있는 정치가, 군사통수이며 민족사에 자기의 자취를 뚜렷이 남긴 단군의 자랑스러운 후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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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아래 - - 2016-07-09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서 이해하기 좋습니다. 제가 원하던 국사책이네요.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근데 어째 이미지는 안보이네요. 당시 영토가 표시된 지도그림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관리자 - - - - 2016-07-09
이미지문제가 해결되였습니다.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다음편은 언제 올리나요.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력사이야기들을 많이 올려주세요. 명인전, 무술명인전, 감사합니다.
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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