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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국의 창건자 대조영
우리 나라 중세력사에는 《발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도 있었다. 발해는 고구려유민들에 의하여 옛 고구려땅에 세워진 강력한 주권국가로서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30여년간 존재하면서 해동성국(동방의 륭성한 나라라는 뜻)으로 이름떨치였다. 대조영은 바로 이 발해국의 창건자이다. 대조영(?-719년)은 고구려의 봉건귀족가문출신으로서 그의 아버지는 고구려말기 나라를 지키는 싸움에서 공을 세운 장수였다. 대조영의 생애와 군사적활동과 관련한 자료는 옛 문헌에 얼마 남아있지 않으므로 병법에 밝고 무술에 뛰여나며 인품이 출중한 창업군주로서의 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대조영이 군사가로서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한것은 천문령전투이다. 이 전투는 발해의 건국과 직접적으로 련관되여있는것으로 하여 력사에 널리 알려져있다. 대중상은 젊은 나이에 고구려의 장수로서 당나라침략자들을 쳐부시는 싸움에서 용맹을 떨쳤다. 서압록수일대에서 부친 중상을 도와 당나라침략자들과 결사전을 벌리던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그들을 놀래웠다. 보장왕이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셋째아들 연남산이 그뒤를 따랐으며 둘째아들 남건이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붙잡혔다는것이다. 668년 9월 고구려는 이렇게 자기 존재를 끝마쳤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아픈 상처를 씻어낼수는 없었다. 《복수하리라!》 대중상과 대조영 부자는 국토회복을 위한 싸움에 결연히 나섰다. 대중상은 유민들의 투쟁성과를 공고히 하고 더욱 확대발전시키기 위하여 태백산일대에로 거점을 옮기였다. 이 땅의 시원이 열리고 민족의 넋이 뿌리내린 조종의 산 태백산(백두산)은 대중상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곳이기도 하였다. 대조영은 18살이 되던 해 힘과 지혜를 훌륭히 갖춘 영웅이 될 결심을 품고 부모의 슬하를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한 녀자스승을 만나 그에게서 병법과 무예를 익히고 그 누구도 견줄수 없는 힘을 소유하게 되였다. 태여날 때부터 자태가 남달랐던 대조영은 몸과 마음이 더욱 성장하여 키는 구척이나 되고 군사에 막히는데가 없었으며 뛰여난 문장술을 소유하고 무술에도 능하게 되였다. 대중상과 대조영부자는 고국회복을 위한 투쟁과정에 이룩한 첫 성과로서 앞으로의 더 큰 승리를 위한 투쟁거점으로서의 소국-진국을 세웠다. 대조영은 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를 증오하면서 기어이 복수하려고 하였으나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하여 속을 썩이였다고 한다. 이제나저제나 그날을 기다리던 대조영에게 그 뜻을 이룩할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690년대에 들어서면서 당나라의 내부는 썩고 병들어있었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고종왕의 처인 무측천이 실권을 잡고있었는데 그의 독단으로 왕권은 크게 뒤흔들리고 무씨일족들과 간신들이 그의 치마폭에 매달려 부화타락한 생활을 일삼고있었다. 북방의 돌궐과 서쪽의 토번의 부단한 침입과 살인략탈은 변경정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봉건통치배들의 학정에 불만을 품은 인민들과 기미주에 속한 여러 소수 종족들의 소요도 증대되였다. 특히 영주에는 다치면 터질듯 한 팽팽한 분위기가 떠돌고있었다. 당시 영주에는 고구려멸망후 당나라군에 의해 끌려간 적지 않은 고구려유민들과 그 후손들이 살고있었다. 또한 거란인, 말갈인, 해인, 실위인 등 이족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당나라의 가혹한 폭정에 대해 커다란 불만을 품고있었다. 특히 영주도독 조문홰의 횡포한 행위는 그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해주었다. 고구려와 같은 강대국을 다시 일떠세울 포부를 안고 때를 기다리던 대조영은 영주에서 투쟁의 불꽃을 지펴올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당나라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하여 《귀순》형식으로 일가식솔까지 거느리고 영주로 들어갔다. 대조영은 고구려유민들과 말갈인들을 결속시키는 한편 영주도독 조문홰가 흉년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거란인들을 구제하지 않고 또 그 추장들을 마치 노복과 같이 대해주는것으로 하여 그들에게 조성된 불만을 포착하고 그들을 폭동에로 추동하였다. 696년 5월 12일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유민들은 리진충, 손만영이 거느린 거란인, 걸사비우가 거느린 말갈인들과 함께 폭동에 궐기하였다. 영주성을 점령하고 도독 조문홰를 처단하는것으로 시작된 폭동은 당나라땅을 뒤흔들어놓았다. 대조영은 고구려유민폭동군을 거느리고 말갈인들과 련합하여 주변의 여러 성읍들을 점령하면서 동쪽에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어나갔다. 그들의 성과에 발 맞추어 서쪽에로 전과를 확대해나가던 거란인들은 뜻밖의 난관에 봉착하게 되였다. 당나라로부터 막대한 보상을 받기로 한 돌궐군이 배후를 엄습해왔던것이다. 폭동이 일어나서 1년만에 거란인들은 돌궐군의 간섭으로 격파당하였으며 당나라통치배들은 이 기회에 동쪽으로 진군하여 고구려인들의 폭동까지 진압하려고 하였다. 폭동대오에 엄중한 시련이 닥쳐온 이무렵 고국회복을 위해 심혼을 바쳐온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동맹자 걸사비우의 말갈인부대도 패하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대조영은 준엄한 시각에 불굴의 의지를 가다듬으며 최후결전에 일떠섰다. 고구려유민들은 물론 패하여 흩어졌던 말갈인들도 복수를 다짐하며 모여들었다. 수십만군중이 대조영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대조영은 승리의 신심을 굳히며 당나라《토벌》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대조영은 적들의 심리상태와 적장들의 준비정도를 타산한데 기초하여 유인매복전을 벌리기로 하였다. 적들은 걸사비우의 말갈인폭동군을 격파한 승리에 도취하여 기고만장해있었다. 이런 적에게는 더 큰 《승리》를 주어 완전히 분별을 잃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전국을 판별할 능력도 잃게 해야 하였다. 적 《토벌》군 대장인 리해고는 원래 거란폭동군의 장수로서 당나라에 투항한 자였다. 그는 옹노쓰기, 말타고 활쏘기, 창다루기에 매우 능하지만 용병에는 어두웠다. 대조영은 정예기병 3,000명으로 유인대를 편성하였다. 그들의 임무는 적들과 대전하여 패하는척 하여 적들이 더욱 기고만장하여 따라오게 함으로써 천문령골짜기까지 깊숙이 끌어들이는것이였다. 기본주력부대는 골짜기가 깊은 천문령의 좌우켠 릉선에 매복하였다가 적들이 함정에 기여들면 퇴로를 차단하고 공격을 들이대게 하였다. 대조영은 자신이 직접 유인대를 거느렸다. 유인대의 전술에 말려든 적들은 천문령까지 기세등등하여 추격해왔다. 허나 그곳이 함정이라는것을 깨달았을 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대조영의 신기한 계책으로 적 《토벌》군은 천문령에서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고말았다. 력사에 《천문령전투》라고 전해진 이 싸움에서 고구려유민폭동군은 적 중랑장 색구를 포함하여 전군을 몰살시켰다. 대장 리해고만이 겨우 목숨을 건져가지고 도망쳤다. 천문령전투의 승리소식에 접하여 수많은 고구려유민들이 대조영의 휘하로 계속 모여들었다. 일정한 지역을 차지하고 활동하던 고구려항전세력들도 대조영을 찾아왔다. 대조영은 넓은 령토와 많은 인구를 가진 강대한 국가를 창건할수 있는 든든한 토대를 가지게 되였다. 대조영은 태백산일대에 세워졌던 소국-진국을 발전시켜 동모산에 수도를 정하고 발해대왕국의 건립을 선포하였으며 자신은 대왕이 되였다. 발해국의 창립은 30년간에 걸친 고구려유민들의 줄기찬 국토수복투쟁의 자랑찬 결실로써 고구려와 같은 강대국을 다시 일떠세우려던 그들의 념원은 비로소 실현되게 되였다. 대조영은 그후 발해국을 강화발전시키고 해동성국의 기초를 마련하는데서도 큰 공을 세웠다. 이처럼 대조영은 강한 의지와 뛰여난 재능으로 고구려의 계승국 발해를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