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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자를 죽이고 최후결전에 나선 계백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것이 낫다.》, 이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결전에 나섰던 계백장군이 한 말이다. 계백은 나라와 겨레앞에 닥쳐온 위기를 한몸바쳐 막아낼 애국충정의 한마음을 안고 10배나 되는 신라군의 공격을 4차례나 짓부셔버린 명장이다. 계백(?-660년)의 출신과 생애에 대한 자료는 문헌기록에 전하는것이 거의 없다. 다만 660년에 있은 반침략전쟁에서의 공적을 보여주는 자료만이 남아 전한다. 신라대군과의 싸움, 그것은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싸움이자 정치가, 군사가로서 그가 걸어온 인생의 총화였다. 660년 백제와 라당련합군과의 전쟁은 삼국의 인민을 노예화하고 기름진 땅을 빼앗으려고 침을 흘리던 당나라통치배들의 침략야욕과 외세의 힘을 빌어 무너져가는 통치기반을 유지하고 넓은 땅을 차지해보려던 신라통치배들의 령토적욕구에 의하여 강요되였다. 삼국시기에 고구려는 삼국의 통일을 정책으로 내세우고 남방진출을 적극 다그쳐나갔다. 연개소문때에 와서 더욱 맹렬해지는 고구려의 남방진출을 막아낼 힘이 없었던 신라통치배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며 나아가서 자기의 령토를 넓혀보려고 하였다. 신라통치배들은 648년에 왕족인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여 두 나라 군대가 힘을 합쳐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대동강이남은 신라가 차지하고 그 이북은 당나라가 차지한다는 《비밀협약》을 맺게 하였다. 660년 백제에 대한 라당련합군의 침공은 이 《비밀협약》의 범죄적기도를 실현하기 위한 첫단계 작전이였다. 그러므로 당나라와 신라군대를 반대하는 백제인민의 투쟁은 반침략투쟁으로 되였으며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되였다. 이무렵 백제의 의자왕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여 외적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부화방탕하고 안일한 생활에 파묻혀 허송세월하였다. 백제의 국력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지고 국내에서는 정치적혼란이 계속되였다. 바로 이런 속에서 라당련합군이 동서 량쪽에서 백제를 협공하기 시작하였다. 임금의 부화방탕한 생활에 대하여 바른말을 한것으로 하여 《죄》를 짓고 감옥살이를 하던 성충은 이미 656년 죽기 전에 험한 지형에 의거하여 당나라와 신라군을 막을데 대하여 제의하였었다. 역시 임금의 부화방탕한 생활에 대하여 의견을 제기한것으로 하여 정배살이를 하였다고 보이는 대신 흥수도 성충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당나라군은 백강(기벌포라고도 한다, 오늘의 금강)어구에서 막으며 신라군은 탄현(침현이라고도 한다.)에서 막을것을 제의하였다. 그는 이곳들은 백제의 요충으로서 한명의 군사와 한자루의 창을 가지고 막아도 만명이 이를 당하지 못할 곳이니 마땅히 날랜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지키게 하며 성문을 여러겹으로 닫고 든든히 지켜 적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피곤하여질 때를 기다려서 맹렬하게 치면 단연코 이길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계책들은 적아간의 력량관계와 백제가 두 전선에서 공격을 받고있는 형편에서 매우 정당한것이였다. 하지만 여러 대신들은 그의 정당한 제의에 대하여 그가 오래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말을 받아들일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차라리 당나라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을 따라 배가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며 신라군사로 하여금 탄현으로 넘게 하여 소로길에 편대를 짓지 못하게 하고 이러한 때를 타서 군사를 풀어 치게 되면 마치 채롱에 든 닭과 그물에 든 고기를 잡는것과 같은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계책을 내놓았다. 이것은 결국 요충지를 내주고 그의 험고함을 적을 잡는 함정으로 리용하자는것이였다. 그럴듯 한 계책 같았지만 이것은 전혀 자기를 고려하지 않은것이였다. 당시 백제는 터진 채롱, 꿰진 그물이였던것이다. 의자왕은 너무도 취약한 자기의 힘을 헤아려보지 못해 이 계책을 승낙하였다. 한때는 총명과 효성으로 《해동증자》로까지 소문났던 의자왕은 지금 간신들의 요사스러운 말속에 밝은 귀를 잃었고 부화방탕과 안일사치, 궁녀들의 애무와 권주가속에 맑은 눈동자가 흐려있었다. 그에게는 연약한 백제의 국력으로써는 요해지를 지키는 길만이 살길이라는것을 헤아려볼 능력이 없었다. 라당련합군이 요해지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에야 의자왕은 생각되는것이 있는듯 급해맞아 달솔(좌평 다음가는 벼슬등급)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으로 나가서 신라군을 막게 하였다. 계백은 명령을 받고 떠나기에 앞서 심중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한 나라의 군사로서 당나라와 신라의 많은 군사를 대해야 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수 없다. 나의 처자가 사로잡혀 노비로 될가봐 두려우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것은 통쾌하게 죽는것만 못하다.》 이 말은 그가 《지피지기라야 백전불태하다.》 즉 적을 알고 자기를 아는것이 군사에서 매우 중요하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한 나라의 군사로서 당나라와 신라의 많은 군사를 막는것이 불리하다고 한것은 능히 적을 잘 알고있은것이라고 할수 있고 자기 처자를 죽이고 자기도 죽음을 각오하고 출전한것은 자기를 잘 안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당시 당나라와 신라는 잘 훈련된 대군으로 백제를 량익측에서 공격하고있었다. 계백은 적들과 그 대장들에 대해서 깊이 파악하고있었다. 당나라군을 책임진 소정방이나 신라군의 우두머리인 김유신은 다 당대 《명장》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였다. 그러한 적들을 막자면 성충이나 흥수가 제기한대로 요해지를 막고 적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다가 공격하는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였다. 그러나 의자왕은 성충이나 흥수가 다같이 임금을 《원망》하고있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일것이 못된다는 심술궂은 간신들의 말에 넘어가 천연요새지인 백강어구(기벌포)와 탄현(침현)을 내주었으니 이기는것은 바랄수 없는 일이였다. 더우기 신라군은 백제군의 10배나 되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길은 없었다. 죽기내기로 싸워 신라군의 공격을 좌절시키든가 시간을 끄는 길밖에 없었다. 계백은 분연히 처자들을 죽이고 나라와 겨레를 지키기 위한 최후결전에 나섰다.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험한 지형을 먼저 차지하게 하고 결사대를 3개 부대로 나누어 분산배치하였다. 신라군사가 당도하여 싸움에 들어가기 전 계백은 이렇게 웨쳤다. 《옛날에 월왕 구천은 5,000명의 군사로 오나라의 70만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날 우리도 각자가 용기를 내여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월왕 구천은 처음에 오왕 부차에게 패하여 와신상담하며 복수심을 안고 힘을 키웠다. 그리고 한편으로 범려의 계책대로 서시로 미인계를 써서 부차를 타락하게 하였다. 부차는 월나라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명장 오원의 제의를 듣지 않았고 나중에는 그를 자살하도록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월왕 구천은 군사를 일으켜 부차를 공격하였다. 강화담판요구가 거절당하자 부차는 자살하기에 앞서 오원의 말을 듣지 않아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였다고 후회하였다. 계백이 비록 이 고사를 리용하였으나 그자신은 알고있었다. 그때는 강한 5,000명으로 제 나라에 대한 승산없는 공격을 부단히 벌린것으로 하여 지치고 부패해진 70만을 대항하였으니 승리할수 있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던것이다. 다만 계백은 군사들을 분발시키고저 하였을뿐이다. 워낙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결사대원들이였으므로 그의 호소는 즉시에 반응을 나타냈다. 더우기 대오의 맨 앞장에서 말을 달리는 계백의 투신력은 군사들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백제군사들이 한사람이 천사람을 당해내는 용맹으로 싸우자 신라군은 겁에 질려 퇴각하군 하였다. 악전고투하며 네번을 싸우는 과정에 신라의 5만대군은 기가 질리고 백제군의 사기는 더욱 왕성해졌다. 이 싸움은 계백의 군사적재능과 함께 장군으로서의 위엄이 있고 호령이 명백하며 그에 대한 부하들의 복종심도 강했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있다. 후세에 자기 처자들을 죽이고 출전한것은 너무 잔인한 짓이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잔인》한 장수가 아니였다. 신라군의 소년장수 관창이 사로잡혀 백제군 원수인 계백앞으로 끌려왔을 때 계백은 그의 투구를 벗겨보고는 그의 어리고 용감한것을 아깝게 여기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그냥 돌려보냈던것이다. 계백은 의협심도 있고 인정미도 있는 장수였지만 그에 구애되여 대사를 망치게 하는 그런 지휘관이 아니였다. 관창이 다시 백제군에 돌입하여오자 계백은 그를 용서없이 죽이여 군률을 세웠던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계백이 인정미없는 《잔인》한 장수가 아니였음을 보여주는것이다. 그가 처자를 죽인것은 오히려 처자를 노예로 내맡기지 않으려는 대장부의 뜨거운 사랑의 표시라고 볼수 있다. 그는 처자를 죽여 자기의 굳은 의지도 보여주고 군인대중을 격동시켰다. 5,000명의 군사를 분발시켜 10배나 되는 신라군을 네번씩이나 격퇴할수 있은것은 사실상 계백의 그 《잔인》한 행위의 결과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신라군장수들은 저락된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하여 반굴, 관창 같은 어린 장수들을 제물로 바쳤다. 어린 장수들의 죽음을 목격한 신라군은 비분강개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백제군을 공격하여 승리할수 있었던것이다. 계백은 초기의 결심대로 신라군과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힘이 모자라서 전사하였다. 참으로 황산벌싸움은 백제군 장수 계백의 고상한 도덕적풍모와 군사적재능, 훌륭한 지휘능력을 보여준 전투였다. 리조의 14대임금 선조왕(1568-1608년)은 선대의 여러 왕묘들의 보호에 관한 지시를 내리면서 그 왕들과 함께 이름난 신하들의 묘도 단을 쌓고 《금화》(불 피우는것 금지), 《금벌》(채벌금지)할것을 명령하였는데 그중에는 계백장군도 들어있었다. 나라에 닥쳐온 위기를 한몸으로 막아나서 참답게 한생을 마무리한 계백장군의 이름은 후세에 길이 전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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