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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주 양만춘
645년 고구려-당전쟁은 또 한사람의 명장을 낳았다. 그가 바로 뛰여난 지략과 림기응변의 전법으로 전략적요충지인 안시성을 끝까지 지켜낸 양만춘이다. 양만춘의 생존년대와 출신에 대해서는 력사기록에 전해지는것이 없다. 다만 그가 영류왕때와 보장왕때 안시성 성주로서 성을 강화하고 침략자를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만이 전해지고있다. 재능이 있고 용맹한 양만춘은 나라에 큰 공적을 쌓았으며 군사예술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시체로 사다리를 쌓으며 투항분자들의 항복을 받아 겨우 개모성, 료동성, 백암성을 함락시킨 당나라의 대군은 다음번 공격목표를 놓고 혼란에 빠졌다. 고구려의 위력한 성방위체계의 위력앞에서 전전긍긍하던 적장들은 명장이 지키는 안시성을 피할것을 바랐다. 당태종 역시 《손자병법》에서 《치지 않을 성이 있다》고 한 문구를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아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그 성주가 재주와 용맹을 갖춘 안시성을 치지 말고 군사가 약하고 군량이 적은 건안성을 먼저 치자고 하였다. 그러나 륙군대장격인 료동도행군대총관 리적(원래 이름 서세적)은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전부 료동에 있으니 안시를 지나서 건안을 치다가 만일 고구려사람들이 우리의 군량수송로를 끊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고 하면서 먼저 안시를 치고 다음에 건안을 치자고 하였다. 당태종은 그의 제의를 접수하고 안시성을 공격목표로 정하였다. 하지만 적들은 오산하였다. 리적이 거느린 선봉부대는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돕기 위하여 파견한 고연수, 고혜진이 인솔한 15만 고구려지원군과 안시성군인들의 협력에 의하여 시작부터 된타격을 받았다. 리적은 뒤미처 당도한 당태종의 후군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승리에 자만도취하여 적을 경시하다가 적들의 기습공격에 의해 패배를 당한 고연수, 고혜진이 당나라군에 투항함으로써 안시성은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홀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연개소문의 전략적구상이 실현되느냐 못되느냐가 안시성을 사수하느냐 못하느냐에 크게 달려있었다. 물론 수많은 고구려성들이 싸움준비를 갖추고 때를 기다리고있었지만 안시성만큼 준비된 성은 없었다. 만약 안시성만 사수한다면 고구려는 더 피해를 입지 않고 최후의 승리를 달성할수 있었다. 양만춘은 온 나라의 기대속에 성안의 군대와 인민을 이끌어 당나라의 《정예대군》과 맞섰다. 삶과 죽음의 계선에서 양만춘은 명장으로서의 군사적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것은 사람들이다. 이것을 깊이 자각하고있던 양만춘은 우리 인민이 예로부터 남달리 조국을 사랑하고 부모처자를 귀중히 여기며 그것을 지켜 한목숨 서슴없이 바치는것을 무한한 영예로 여긴 전통을 적극 살리는데 깊은 주의를 돌렸다. 성을 끝까지 사수하는 길만이 자기 가정을 지키고 나라와 겨레를 지키는 길이며 자기자신을 지켜내는 길이다. 양만춘은 병사대중과 인민들의 가슴마다에 애국의 불길을 지펴주었다. 안시성의 군민들은 분발하여 일떠섰다. 그들은 당나라군의 공격을 걸음마다 짓부셔버렸다. 그들은 당태종의 기발과 일산(양산의 일종)이 나타나면 즉시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고함을 치며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불바다, 피바다로 만든 원쑤들을 저주하며 조소를 퍼부었다. 당태종이 그 욕설을 듣고 화를 내자 리적은 성을 이기는 날 남자들은 다 구뎅이에 묻어버리겠다고 하면서 임금의 비위를 맞추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안사람들은 성을 더욱 굳게 지켰으며 그로 하여 적들은 오래동안 공격하였지만 항복받을수 없었다. 급해맞은 적장들속에서는 비관하면서 안시성공격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분분해졌다. 배신자들인 고연수, 고혜진은 그들의 의견을 대변하여 오골성을 먼저 칠것을 제의하면서 안시사람들이 자기 가족을 생각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싸우고있기때문에 쉽게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것은 양만춘이 벌린 군중동원사업이 성공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모든 적장들이 오골성을 치자고 하였지만 장손무기만이 임금이 직접 원정하였으니 여느 장수들과 달리 요행을 바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먼저 안시를 깨뜨리고 건안을 취하는것이 만전의 계책이라고 하였다. 결국 당나라침략군의 안시성공격은 계속되였다. 하지만 적들은 양만춘이 평소에 잘 꾸려놓은 성과 잘 훈련시킨 군사들앞에서 패배만 거듭하였다. 양만춘은 림기응변의 전법으로 적들의 부단한 공격을 걸음마다 짓부셔버렸다. 당태종이 안시성공격에 적용한 공성전법은 크게 보면 세가지였다. 첫째로, 림이다. 그것은 흙을 쌓아 흙언덕을 만들고 높은데서 아래를 향해 공격하는 전법이다. 안시성공격이 뜻대로 되지 않게 되자 당태종은 강하왕 도종을 시켜 안시성 동남구석에 50만 공수를 들여 60일동안 토산을 쌓게 하였다. 옛 사람들은 《림》(양검)공격에 매달리는 자는 장수로서 졸렬한 자이며 군사를 피로하게 하며 성을 해치는데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이것만 보아도 《명장》이라고 자부하던 당태종이 고구려침략 특히 안시성공격에서는 궁여지책에만 매여달렸음을 알수 있다. 둘째로, 여러가지 공성무기에 의한 공격이다. 당태종은 전쟁준비를 할 때 고구려사람들이 성을 잘 지킨다는데 류의하고 여러가지 공성기재를 만들게 하였으며 제가 직접 선택했다고 한다. 자료에 있는것만 보더라도 리적이 안시성공격때 당차를 벌려놓고 돌을 날려 성다락과 치를 허물었다고 한다. 셋째로, 분번식공격이다. 당태종은 자기 시위군사들까지 내몰아 번을 갈라 교대로 안시성을 공격하게 하여 하루에 6~7차나 교전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자기 병사들을 쉬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단한 공격을 들이대여 성안의 고구려군사들이 피로하고 지치게 하려는 계책이였다. 양만춘은 적들의 이러한 공격에 대처하여 림기응변의 전법으로 위기를 막아내군 하였다. 적들의 《림》(양검)공격에 대하여 양만춘은 높은데서 높은데를 방어하는 전법으로 맞섰다. 그는 적들의 토산이 높아지는데 따라 즉시 성우에 대성(행성이라고도 한다.)을 쌓아올려 적의 공격에 대처하게 하였다. 적들의 토산이 무너지면서 성벽의 일부를 파괴하였을 때 고구려군사들 수백명이 무너진 곳으로 뛰여나가 토산의 적들을 격파하고 그곳을 점령하였다. 토산을 점령한 군사들은 3일간 적들의 공격을 물리치고 토산을 사수하였다. 용맹하며 그 어떤 정황에서도 능동적으로 행동할수 있게 준비되여있던 고구려군사들의 투쟁에 의하여 두달동안 50만 공수를 들여 준비하였던 당태종의 《림》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양만춘은 적들이 각종 공성무기를 동원하여 공격해오면 그에 대응한 수성무기로 즉시 반격을 가하였다. 적들이 당차로 성벽과 다락을 파괴하면 즉시 목책을 세워 막게 하였다. 양만춘은 적들의 《분번》식공격에 대응하여 역시 《분번》방어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성안의 군사들이 충분한 휴식을 배합하면서 적들의 하루에 6~7차나 계속되는 공격을 여유있게 막아낼수 있게 하였다. 양만춘은 이밖에도 놈들의 공격수법을 연구한데 기초하여 미리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적들은 료동성공격때 적용하였던 성밑으로 땅굴을 파서 공격하는 《공동》(땅굴을 파서 성벽을 파괴하는것), 《혈》(땅굴을 파고 성안으로 공격해 들어가는것)과 같은 공성전법들은 전혀 써보지 못하였다. 양만춘은 방어의 적극성을 높이는데 깊은 주의를 돌린 재능있는 군사지휘관이였다. 방어는 소극적방어가 아니라 적극적인 방어로 되여야 한다. 진지에 가만히 앉아서 적이 공격해올것을 기다렸다가 때리려고만 하여서는 안되며 부단한 습격조활동으로 적의 유생력량과 무기, 전투기술기재에 손실을 주며 적들을 피로케 하고 늘 공포에 떨게 하는것이 중요하다. 양만춘은 리적의 선봉부대가 고연수, 고혜진이 거느린 고구려지원군의 공격을 받고 혼란에 빠져있을 때 성문을 열고 제때에 반격으로 이행하여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때때로 야간습격전을 조직하여 적의 진영을 혼란에 빠뜨리고 적을 피로케 하였다. 피동적인 방어가 아니라 적극적인 방어전을 도입한데 바로 양만춘이 군사예술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있는것이다. 양만춘은 특히 평소에 군사들의 사격술을 높이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안시성군사들의 높은 사격술에 적들은 혼쌀이 났다. 안시성공격때 당태종은 양만춘이 쏜 화살에 맞아 애꾸가 되였다고 한다. 양만춘의 능숙한 지휘를 받은 안시성군민들의 완강한 항전에 의해 패배를 거듭하며 앉아뭉개던 적들은 바다길로 적의 배후에 진입하여 퇴로와 보급로를 끊어놓은 연개소문의 적후교란활동으로 더는 견딜수 없어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양만춘은 곧 추격을 조직하여 퇴각하는 적들에게 다시한번 심대한 타격을 안기였다. 옛 중국의 사가들이 인정한바와 같이 《소위 국가가 크고 갑병이 강하며 책략이 풍족함만을 믿고 이길수 있다》고 자부하던 당태종은 《소위 훌륭한 군사는 펴지 못하였다.》(묘한 계책을 내놓고 군대를 잘 지휘하지 못하였음을 이르는 말)고 하였다. 우리 나라 고전인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당태종이 《어질고 명철하여 세상에 드문 임금으로서… 군사를 다루는데 있어서 한없이 기묘한 전술로써 향하는 곳마다 적수가 없었다.》고 과대평가하면서도 《동방을 정벌하는 사업이 안시에서 패하였으니 안시의 성주는 그야말로 비상한 호걸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라고 양만춘의 공적을 정당하게 평가하였다. 후세 우리 나라에서는 안시성군민들의 항전을 성을 끝까지 지켜내는 위훈의 대명사로 많이 이야기하였다. 참으로 양만춘은 군민을 단합시키고 불러일으켜 잘 준비된 위력한 방어수단들에 의거하여 뛰여난 군사적지략과 능숙한 전투지휘로 《명장》 당태종의 대군을 물리침으로써 적들의 속전속결전략을 파탄시키고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한 군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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