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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을 찾아간 을지문덕
을지문덕은 31대 영양왕(590-618년)때인 612년에 있은 고구려-수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애국명장이다. 을지문덕은 고구려군대와 인민을 이끌어 전쟁력사에 류례가 없는 수백만의 대군으로 쳐들어온 수양제의 침략군을 물리치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지켜내는데 이바지하였다. 612년 여름 어느 날 금빛찬란한 갑옷을 떨쳐입고 그리 크지 않은 배우에 몸을 실은 름름한 풍채의 한 로장이 있었다. 그가 바로 수나라의 9군 30여만 대군이 새로운 방면에 나타났다는 통보를 받고 강화담판을 위하여 압록수(오렬수, 오늘의 태자하)를 건너 적진을 찾아가는 을지문덕장군이였다. 저 멀리 남쪽하늘가를 바라다보는 그의 웅심깊은 두눈에 고구려의 장수로 성장해오던 잊지 못할 그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비껴가고있었다. 그의 집안래력은 자세하지 않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는 오늘의 평안남도 증산군 석다산기슭의 어느 한 농가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검과 창쓰기에도 능하였으며 용력이 뛰여났다. 그의 이름은 벌써 열대여섯살때 전국에 소문났다. 어느 날 염전에서 일을 마치고 저녁무렵 집으로 돌아오던 그는 길 한복판에 송아지만한 짐승이 나타나 어물거리는것을 발견했다. 그 짐승이 하도 성가시게 구는 바람에 몽둥이로 후려치고 번쩍 들어 땅에 내동댕이쳐 죽였는데 후에 알고보니 호랑이였다는것이다. 지금도 석다산에 올라가면 을지문덕장군이 무술을 닦을 때 쓰던 돌집이 있고 그 집안에 돌로 된 책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석다산 맞은편에 솟은 산을 마우산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장군이 타고다니던 말이 나온 산이라고 전해온다. 성질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혜와 재주가 있었고 글을 지을줄 알았다고 하는 을지문덕장군은 락랑벌사냥에서 뛰여난 무술을 보여주어 임금의 눈에 들고 장수가 되였으며 그후 전투마다에서 세운 공적으로 하여 여러번 승급하였다. 나라의 중신이 된 그는 수나라 300만 대군과의 생사를 판가름하는 결전을 책임진 장군으로 전쟁전반을 지휘통솔하고있었다. 을지문덕의 적수인 수양제는 남방의 진주 숙보를 치고 전국을 통일하는 싸움을 《지휘》한 전적을 가지고있는데 대하여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고있었다. 음모적방법으로 왕좌를 차지한 수양제는 집권초기부터 《몰래 료동(고구려)을 취할 뜻》을 품고있었다. 수양제는 원흥사를 동래해구에 보내여 배만드는것을 감독하게 하는 등 전쟁준비를 미친듯이 벌리였다. 이때 관리들의 혹독한 채찍아래 부역나온 장정들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주야 물속에서 일하였는데 허리아래에 구데기가 쓸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죽은 자는 10명중에 3, 4명이나 되였다고 한다. 수양제는 또한 나라의 부자들에게 군자금을 내게 하여 그것으로 군마 10만필을 조달하고 전국의 장정들을 출동시켰으며 병장기들을 정선하게 하였다. 그리고 산동, 하남에 큰물이 나 40여개 군을 휩쓸고 전염병이 나돌고 흉년까지 겹쳤으나 수양제는 백성들을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전쟁준비에만 내몰았다. 길가에 쓰러져 죽은 사람들이 수다하고 고역을 견딜수 없게 된 사람들은 《료동에 가서 헛된 죽음을 하지 말자》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산속에 들어가 농민폭동군이 되였다. 수양제는 《료동을 쳐서는 안되옵니다. 우리 군사는 반드시 공이 없을것이나이다.》라고 하면서 침략전쟁을 반대한 대신 경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612년 1월 24개 군단 113만 3,800명과 그의 두배나 되는 후방부대, 제가 직접 거느린 6개 군단, 수군 10만을 동원하여 고구려에 침략의 마수를 뻗쳤다. 300만의 침략군이 동원된 이 전쟁은 병력수, 군사기자재의 규모에 있어서 일찌기 있어보지 못한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였다. 그것은 실로 고구려인민과 고구려국가의 생사존망을 판가리하는 심각한 싸움이였다. 고구려를 정복하고 고구려인민을 노예화하려던 적들의 기도는 시작부터 실패를 면치 못하였으며 전선은 료동성군민들의 결사항전으로 하여 료동계선에서 고착되게 되였다. 속이 안달아난 수양제는 정면돌파시도를 계속하는 한편 따로 우중문, 우문술을 우두머리로 하는 9군(9개 군단 30만 5,000명)을 편성하여 우회전술을 써서 고구려군의 전방사령부가 있는 《평양성》(환도성, 봉황성)을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산동반도에서 대기하고있던 수군에게도 9군과 협동작전을 할데 대한 지시를 떨구었다. 고구려의 후방으로 깊이 뚫고들어갈 목적으로 조직했던 부대들인것만큼 사람이나 말은 각각 100일분의 식량, 사료를 가지고가게 되였고 게다가 갑옷, 창, 긴창, 천막, 침구 등을 가지고가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짐의 무게가 한사람당 알곡으로 환산해서 3석이상이나 되였으므로 도저히 등짐으로 운반할수 없었다. 6월말 7월초경에 회원진, 로하진에서 떠난 적 9군은 무거운 짐을 감당해낼수가 없어 군수품이나 식량을 버리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령에도 불구하고 숙영지마다에서 천막아래에 구뎅이를 파고 쌀과 물건들을 매몰해치웠다. 며칠이 못 가서 적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였고 압록수에 가닿기도 전에 량식이 떨어지고말았다. 바로 이러한 때 을지문덕은 적진으로 들어가게 되였던것이다. 그가 적진에 들어가겠다고 할 때 왕은 물론 대신들모두가 깜짝 놀랐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소린가, 한나라의 운명을 두어깨에 걸머지고있는 장수가 그런 모험을 하다니, 더구나 적들은 을지문덕을 잡으려고 발악하고있지 않는가, 그런데 승냥이아구리에 스스로 뛰여든단 말인가. 임금과 신하들모두가 반대하였다. 을지문덕은 차근차근 그들을 설복하였다. 적을 알고 자기를 아는것은 병가에서 제일로 친다. 더우기 우리의 적은 대병이며 장수들은 용장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아닌가. 지금 수임금이 따로 군을 편성하여 우리 후방깊이 들여보냈으니 잘 준비된 적일수 있다. 9군의 준비정도와 사기의 높고낮음을 알아야 그에 맞게 대처할것이 아닌가. 을지문덕은 《강화담판》의 명분으로 가면 적들이 체면상 어쩌지 못할것이라고 하였다. 영양왕은 근심을 가시지 못하며 억지로 승낙하였다. 하여 을지문덕은 적진을 찾아가는 모험을 하게 되였던것이다. 고구려사람들모두가 그때 그의 운명을 두고 가슴 조이고있었다. 적진을 향해 가는 을지문덕만은 안색이 변함없고 거동이 태연하였다. 적지휘부로 가는 도중에 을지문덕은 적정을 손금보듯 알아낼수 있었다. 적들은 분명 굶주리고 지쳐있었다. 을지문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한 기색으로 적들의 지휘부에 나타난 을지문덕을 본 적장들은 아연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을지문덕의 명성은 이미 내외에 널리 알려져있었다. 하기에 수양제는 이미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만약 고원(영양왕의 이름)이나 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밀지》(비밀지시)를 내렸던것이다. 적장들은 을지문덕의 처리문제를 놓고 의견상이가 생겼다. 수양제의 밀지를 함께 받은 우중문과 우문술은 을지문덕을 잡자고 하였다. 하지만 임금의 특별임무를 받고 파견되여왔던 위무사 류사룡은 반대하였다. 그때 그가 어째서 이런 립장을 취하였는지 그에 대해서 전해지는것은 없다. 아마도 류사룡은 을지문덕의 위풍당당한 자세와 태연자약한 태도에 어지간히 위압되였던것 같다. 그리고 강화담판을 위해 온 사신을 잡는다는것은 대국의 체면에 어울리지 않으며 명분이 서지 않는다는 리유로 우중문과 우문술을 굳이 말렸을것이다. 우중문은 그의 말대로 놓아보내였으나 다시 후회하면서 사람을 보내여 배를 타고 돌아가는 을지문덕에게 《더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속이여 데려오게 하였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적들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고있었던지라 쓴 웃음을 지으며 유유히 강을 건너왔다. 참으로 어지간한 담력과 용맹이 아니고서는 생각도 할수 없는 을지문덕의 이러한 모험은 자기의 행동에 대한 자신심과 확신에서부터 단행된것이였다. 그러한 확신은 적장들의 성격와 심리상태, 그들사이의 모순관계를 꿰뚫어보고있었던데서 나온것이다. 당시 적군의 우두머리 우중문은 계교를 잘 쓰고 우문술 역시 지묘가 풍족하다고 하였다. 수양제가 애비를 죽이고 임금의 자리에까지 기여올라간데도 우문술의 《공적》이 크게 깃들어있었다. 그러니 우중문과 우문술은 서로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하면서 서로를 시기하였고 임금의 총애가 두텁다는것을 등대고 서로 자기가 주도적역할을 해보려고 하였다. 류사룡은 그대로 임금이 특별히 파견한 《위무사》로서의 권위를 세워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많은 적장들이 임금이 우중문으로 하여금 여러 군을 지휘하게 한데 대해 《할수없이》 따르는 형편이였고 후에는 모두 죄를 중문에게 밀려고 하였던것이다. 하기에 우중문은 군량이 다 떨어졌으므로 돌아가자고 하는 우문술에게 《중문의 이번 행보가 굳이 공이 없을것이다.》고 하면서 그것은 옛적에 성공한 장수는 군중의 일을 혼자서 모두 결재하였는데 《지금은 사람마다 자기 생각이 있으니 어찌 적을 이길수 있겠는가.》고 울분을 터뜨렸던것이다. 을지문덕은 군사가의 예리한 안목으로 적정을 손금보듯 파악할수 있었다. 적들은 지쳐 있고 적장들은 예견했던대로 서로 질투한다.… 을지문덕은 청야수성전술과 유인전으로 적들을 더 깊숙이 끌어들이고 피로케 하여 소멸할 전술을 세웠다. 더 깊숙이 끌어들이고 더욱 지치게 하여 전투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하는것만이 아군의 손실을 줄이고 최대한 성과를 달성할수 있는 길이였다. 적들을 피로케 한다고 하여 무작정 뒤로 물러서는것은 상책이 아니였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면 유인전을 해야 하였다. 을지문덕의 지시에 따라 고구려군사들은 압록수를 건너 공격해오는 적들과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뒤로 물러났다. 적들은 하루에 7번을 싸워 다 이기게 되였다. 기세가 오른 적들은 어떤 천벌이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주린 창자를 부여잡고 창을 질질 끌면서도 계속 기여들었다. 지모가 풍부하다고 하는 우문술자체도 고구려군의 련속되는 《패배》와 수나라군의 승리에 과신하게 되고 또 계속 전진할것을 주장하는 여러 장수들의 주장에 못 이겨 리성을 잃고 군사를 내몰아 깊숙이 파놓은 함정에로 한걸음 또 한걸음 접어들었다. 적들은 살수를 건너 평양성(북평양-환도성)앞 30리 밖에 이르러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유인전과 청야전술에 지칠대로 지친 적들에게 이제 더 험고한 평양성을 공격할 힘이 없었다. 적장들사이에 의견상이도 커졌다. 여러 장수들과 이전부터 퇴각을 주장하던 우문술은 총 지휘를 맡고있는 우중문이 10만의 군사를 끌고왔다가 성과없이 물러가면 어떻게 임금을 뵈옵겠는가고 하면서 꾹 눌러놓는 바람에 더 말을 못했지만 이제 와서는 더 참을수 없었다. 그는 9군장병들이 이미 지칠대로 지쳐 겨우 몸을 가누고 싸울 능력이 없는데다가 또 평양성이 험고하기때문에 함락시키는것은 힘에 부친 일이라고 하면서 퇴각을 주장하였다. 우중문자신도 할말이 없었다. 이때 고구려진영에서 을지문덕이 지은 시 한수가 전해졌다.
신기한 술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기묘한 타산은 지리를 통했도다 싸움에 이겨 공도 이미 높거니 만족을 알고 그만둠이 어떠하리
마디마디 풍자와 조소로 일관된 을지문덕의 이 유명한 시는 그대로 창검이 되고 비수가 되여 적들의 페부에 파고들었다. 유명한 시 한수에 한껏 조롱을 당한 우중문과 적장들은 한편으로 을지문덕의 재능에 내심 탄복하여마지 않으며 패배를 인정하였다. 아마 그때 제발로 찾아왔던 을지문덕을 잡지 못한것을 두고 후회의 고배를 삼켰는지도 모른다. 적들은 7월 22일, 23일경부터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바야흐로 때가 왔다고 인정한 을지문덕은 고구려군에 추격명령을 내리고 여러곳에 매복진을 폈다. 적들은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치자 방진을 짓고 저항해보려고 하였다. 적들은 간신히 살수(소자하)까지 도착하였다. 장마철이라 물이 상당히 불었다. 적들은 을지문덕이 바로 이 자연의 《함정》에서 적을 섬멸할 계책을 세우고 량쪽기슭에 수많은 고구려군사들을 매복시켜놓고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다. 7월 24일 적 9군이 강을 건느기 시작하여 절반쯤 갔을 때 고구려군은 일제히 공격전을 벌리였다. 력사에 《살수대첩》(살수대승리)으로 기록된 이 전투에서 적들은 우둔위장군 신세움을 비롯하여 수십만의 장졸을 잃었다. 겨우 살아남아 도망치던 적들도 백석산에서 대기하고있던 고구려군의 100여겹이나 되는 포위진에 들어 섬멸적타격을 받았다. 추격전과 배합된 매복전, 포위섬멸전으로 하여 적군가운데 《압록수》(태자하)까지 돌아갈수 있었던 자는 말의 도움을 받은 기병 겨우 2,000여명뿐이였다. 수양제는 너무도 성이 나서 길길이 날뛰다가 우중문, 우문술 등 패전한 장수 100여명을 모조리 처벌하였다. 우중문은 여러 장수들이 모든 죄를 자기에게 들씌우자 고민하다가 병이 나 죽었다. 결국 이 싸움은 적우두머리들까지 포함하여 적 9군 30여만명을 섬멸한 빛나는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였다. 이것은 동서고금의 중세력사에서 보기 드문 승리였다. 한개 전역에서 현대전도 아닌 중세기의 전쟁에서 그리고 장기적인 포위작전도 아니고 단 하루사이에 30여만이라는 많은 무력을 살상하였다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이것은 고구려군사들의 애국심과 용맹을 보여주는것과 함께 명장 을지문덕의 대담성과 용감성, 전략전술의 기묘성과 출중한 지휘통솔력에 대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있다. 이미 수나라군이 출병할 때 좌후위대장군으로 임명받고 남소도로 나오게 되여있던 수군장수 병부상서 단문진은 병을 만나 죽기 며칠전에 수양제에게 글을 올려 이렇게 경계했던적이 있다. 그는 고구려사람들이 《속임수가 많으니 깊이 생각하여 막아야 할것》이라고 하면서 수륙협동작전에 의하여 불의의 곳으로 나아가 평양을 엄습함으로써 왕을 항복시키는 속전속결만이 살길이라는것을 제의하였던것이다. 때늦게나마 깨달은 수양제가 9군을 편성하여 속전속결을 시도해보았지만 그 꿈도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을지문덕의 전법은 일찍부터 강대한 적을 상대로 싸워야 하였던 고구려인민들의 력사적투쟁경험을 총화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일찌기 을두지, 명림답부가 적용하고 발전시켰던 우수한 전법을 을지문덕은 더욱 높은 경지에서 활용하고 세계적인 모범을 마련한것이다. 하기에 《삼국사》의 저자 김부식은 《수양제의 료동전쟁은 군사를 출동시킨 규모에 있어서 전고에 없이 굉장하였지만 고구려는 한모퉁이에 있는 작은 나라로서 그를 막아 자기의 국토를 보전하였을뿐아니라 그 군을 거의다 없애버린것은 문덕 한사람의 힘이다.》라고 평하였다. 물론 과장된감이 없지 않지만 그만큼 전쟁에서 주도적역할을 한 을지문덕의 군사적재능과 우수한 전략전술에 대한 경탄으로부터 나온 말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대담성과 용감성, 민첩성, 뛰여난 전략과 전술로 고구려군을 승리에로 이끌어 거대한 공적을 쌓은 을지문덕의 공적은 그가 적장 우중문에게 보낸 유명한 시와 더불어 후세에 길이 전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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