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대한 포부를 지니고 강토를 넓힌 광개토왕
 

 

웅대한 포부를 지니고 강토를 넓힌 광개토왕

  

강대하였던 고구려의 위용을 시위하는듯 1,5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거연히 서있는 광개토왕릉비,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에 있는 릉비는 높이가 6.34m로써 지금까지 동방에서 알려진 비석들가운데서는 가장 큰 축에 속한다. 비석은 고구려의 령토개척에서 특출한 공적을 세운 광개토왕의 업적에 어울리는 기념물이다.

고구려의 24대임금인 광개토왕은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벌려 북쪽과 남쪽으로 령토를 확장하고 삼국통일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여놓았으며 외래침략세력을 물리치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지켜내는데 이바지하였다.

광개토왕(생존년대 374-412년, 재위 391-412년)의 정확한 시호는 국강상광개토지(경)평안호태(성)왕이며 이름은 담덕이다. 그의 시호가 보여주듯이 그는 18살밖에 안되는 애젊은 나이에 왕좌에 올랐으나 천성적으로 육체적준비가 좋고 출중한 무예와 뛰여난 지략을 소유하고있었다. 더우기 그는 어려서부터 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천하에 우뚝 내세울 큰뜻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391년에 즉위하여서부터 20여년의 통치기간에 수십차례의 군사작전을 조직하거나 직접 지휘하여 승리만을 기록한 불패의 군사통수로서의 명성을 남겼다.

광개토왕은 집권하여 나라의 정치적안정과 경제적발전을 이룩하는것을 첫 정책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그가 정치와 경제가 군사력강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광개토왕때에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들이 은성하게 살았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잘되였다.》고 기록되여있다. 이것은 다소 과장된감이 없지 않지만 이 시기 경제발전이 적극 추진되여 나라의 물질적토대가 현저히 강화되였던 사실을 일정하게 반영하고있다고 할수 있다.

정치적안정과 튼튼한 경제적토대는 나라의 군사력을 더욱 강화할수 있게 하였다.

광개토왕은 강화된 국력에 의거하여 삼국통일과 령토완정을 위한 적극적인 군사활동에 나섰다.

그의 군사활동은 주로 령토개척을 위한 군사작전으로 특징지을수 있다. 하기에 비문에서는 위엄과 군사적공적이 사해를 덮었다고 전하고있는것이다.

광개토왕이 적대세력을 정벌하고 령토를 넓힌것을 보면 북쪽에서는 비려, 후연, 식신, 동부여를 정벌한것이고 남쪽에서는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고 백제, 가라(가야), 왜를 친것이다.

광개토왕의 총적인 전략은 《선남후북》 즉 먼저 남방정세를 안정시킨 후 북쪽으로 진공방향을 돌리는것이였다. 당시의 조건에서 이것은 매우 정확하며 또 가능한것이였다.

남방에는 겨레의 나라들인 백제, 신라, 가야가 있었다. 그가운데서 가장 강한 국력으로 고구려의 남진을 막아나선 나라는 백제였다. 더우기 백제는 광개토왕이전시기의 여러 군사작전들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였고 21대 고국원왕(331-371년)은 백제군과의 싸움을 직접 지휘하다가 전사하였다.

따라서 남방에서 백제의 세력을 꺾어놓느냐 못 놓느냐 하는 문제는 국토통일성업을 이룩하는데서 초미의 과제로 나섰다. 게다가 391년에 이르러 백제는 고구려와 맞서기 위하여 손아래동맹자인 북규슈의 왜무력을 끌어들여 무장시키고 그들을 선봉대로 내세울 계략을 꾸미였다. 이것은 고구려에 있어서 간과할수 없는 사태발전이였다. 하기에 광개토왕은 통치 20여년간에 백제를 주요한 공격대상으로 정하고 즉위초부터 거의 해마다 백제를 공격하였다.

광개토왕이 백제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데 힘을 넣은것은 또한 배후에 백제와 같은 세력이 강한 적수를 그대로 둬두면 고구려가 북방의 강적들과 대전할 때 백제가 그 틈을 노려 위험을 조성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광개토왕은 자기의 전략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전술적조치들도 강구하였다.

광개토왕이 중시한것은 백제의 동쪽에 있던 신라를 끌어당기는것이였다.

360년대에 백제는 가야, 왜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기는것과 함께 신라도 손아래동맹자로 만들었었다. 그러나 신라는 원래 가야, 왜의 소국들가운데서 많은 세력들과는 리해관계의 불일치로 하여 관계가 좋지 못하였다. 게다가 고구려가 료동지방에서 고조선의 옛땅을 되찾고 유주에까지 진출하는 큰 성과를 거두고 370년대중엽이후로는 강한 힘으로 남하하자 백제와의 동맹관계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걸지 않게 되였다.

신라통치배들은 조성된 새로운 정세속에서 강대한 고구려에 붙는것이 더 유리할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광개토왕은 신라의 동향을 꿰뚫어본데 기초하여 그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인입하는 정책을 세우게 되였다. 그는 백제, 가야, 왜의 련합세력을 견제하는데서 신라가 차지하는 군사지리적위치를 중시하고 392년 봄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민》(속국으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삼았다. 그리고 신라를 정치, 군사적으로 각방으로 비호하고 원조해주었다. 400년에는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비밀계책》도 대주고 보병과 기병 5만명을 파견하여 백제, 가야, 왜련합세력을 격파하였다.

그때 광개토왕이 대주었다는 《비밀계책》은 영원히 흑막속에 묻혀있지만 당시의 정세와 후의 사실로 보아 그 내용의 하나는 언제 어디로 고구려군이 진출하겠으니 신라군은 대기하고있다가 함께 협격하여 물리치자는것일수 있었다.

광개토왕이 그때 신라에 군사를 파견하는 문제를 비밀에 붙이지 않을수 없은것은 북방정세와도 관련되였다. 그해 2월에 후연통치배들은 고구려가 《거만하다》고 하여 쳐들어와 적지 않은 지역을 점령하였던것이다. 이러한 형편에서도 광개토왕은 남방정세를 안정시키는데서 신라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군사를 파견할 결단을 내렸던것이다. 북방정세가 복잡한 형편에서 많은 지원군의 파견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야 할것이였다.

이렇게 남방진출을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마련한데 기초하여 광개토왕은 백제에 대한 부단한 공격작전을 벌려 392~395년사이에 백제북방의 요충지인 석현성, 관미성 등 10여개 성을 점령하였고 396년에는 수륙 두 방면으로 백제를 쳐서 그 수도에 육박함으로써 백제왕의 항복을 받고 58개 성 700개 촌을 차지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나날에 뛰여난 지략과 통솔력을 지닌 군사통수로서의 군사적재능이 남김없이 발휘되였다.

광개토왕은 무엇보다도 백제의 전략적요충지를 장악하는데 주력하였다. 392년 10월 광개토왕이 지휘한 백제의 관미성공격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관미성은 백제 서북쪽의 요새로서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둘러막혀있었다. 이 성을 차지하느냐 못하느냐 하는데 따라 오늘날의 례성강방면으로의 백제군의 진출을 봉쇄하고 림진강하류지역을 제압하며 장차 한강을 건너설수 있는 요긴한 길목을 틀어쥐느냐 못쥐느냐 하는것이 결정되였다.

때문에 광개토왕은 7개 방향으로 군사를 나누어 20일동안이나 쉼없는 공격을 들이대여 기어이 성을 함락시키고야말았다.

관미성이 고구려의 수중에 장악되자 백제 아신왕(392-405년)은 393년 8월에 외삼촌이며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었다고 하는 진무에게 《관미성은 우리 나라 북쪽변경의 옷깃(관문)과 같은 요충지이다. 이제 그것이 고구려의 소유로 되였으니 이는 내가 뼈아프게 여기고 아깝게 생각하는바이다. 그대는 마땅히 애를 써서 수치를 씻어야 할것이다.》라고 하면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회복하게 하였다.

광개토왕의 군사적재능은 395년 8월 백제군을 거느리고 온 《명장》 진무와의 대결에서 남김없이 과시되였다.

그때 광개토왕이 거느린 군사는 7,000명밖에 안되였으며 백제군은 수만명이나 되였다.

광개토왕은 패수를 등지고 배수진을 치게 하였다. 이것은 군사들이 마음을 굳게 가지도록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고구려군사들은 광개토왕의 지휘밑에 하나가 열, 백을 당하는 기세로 용감하게 싸웠다. 그리하여 진무가 거느린 백제군은 크게 격파당하고 8,000명의 전사자를 내게 되였다.

배수진이 강한 적을 상대로 하는데서 좋은 전법이기는 하지만 어느 때나 성공을 가져다주는것이 아니라는것은 력사가 증명해주고있다.

광개토왕은 재능있는 군사가의 안목으로 적아의 사기, 훈련정도, 지휘관의 능력 등 준비상태를 꿰뚫어보고 배수진을 치게 하였으므로 승리할수 있었던것이다.

광개토왕은 강력한 수군함대를 건설하고 자기의 전략적목적실현에 능숙하게 써먹을줄 안 군사통수였다.

물론 이전에도 수군은 있었다. 허나 수군의 역할을 중시하고 그것을 여러가지 목적에 능동적으로 리용하였다는데 우리 나라 수군사발전에 기여한 광개토왕의 공적이 있는것이다.

수전병법에 매우 밝은 광개토왕은 항상 수군에 의한 적의 배후공격작전에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였다.

396년에 그는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고구려군은 먼저 륙지로 오늘의 림진강을 건너 백제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켰으나 백제의 서북변에 총총히 배치된 요새들로 이루어진 성곽방위체계를 돌파한다는것이 쉬운 일은 아니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수군함대를 출동시켜 오늘의 한강 이북의 백제전연의 후방을 들이치는 동시에 한강이남의 백제성들을 공격하였다. 하여 55~56개 성들을 함락시켰으나 백제는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광개토왕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아리수(한강)도하작전을 지휘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남한성)으로 육박하여 승리를 달성하였다.

396년 전역에서 고구려가 큰 승리를 이룩하는데서 수군함대는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광개토왕은 404년에는 강력한 수군무력을 파견하여 멀리 2,000리길(료동반도에서 출발한다고 하면)을 돌아가 연군(당시의 연군은 오늘의 산해관 이서의 하북성 동북부)을 들이치고 후연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것은 그때까지의 전쟁력사에서는 보기 드문 정규수군에 의한 대규모의 해상원정, 해상기동작전이였다.

광개토왕은 동해에서도 여러차례의 해상원정으로 백제, 가야, 왜세력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해주었다.

광개토왕은 수군무력을 강화하고 여러가지 병법을 활용하여 적함대를 요격하거나 조우전, 추격전을 조직하여 상대방의 수군을 격파하였다.

4세기말부터 5세기초까지의 고구려수군의 전투활동은 력사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우리 나라에서의 해상공격작전으로서 력사적의의가 크다. 고구려의 수군은 발해와 서해(북부) 및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후연의 침략책동을 저지시키고 백제, 가야와 그의 조종을 받는 왜의 수군이 마음대로 날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해상방위무력으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일단 남방정세를 안정시킨 광개토왕은 북방정벌에로 나아갔다.

395년에 광개토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변경을 계속 침범하던 거란의 필혈부(비려부)를 정벌하여 세 부락 600~700명을 격파하고 많은 소, 말, 양을 로획하였으며 남녀 500여명을 포로하고 그전에 랍치되였던 고구려사람 1만여명을 되찾아가지고 돌아오는 군사적전과를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광개토왕은 《출기불의》 즉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기습진출하여 격파하는 전법을 썼다. 광개토왕은 이때 군사를 거느리고 에돌아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동쪽으로부터 불의의 기습을 단행하였던것이다.

북방정벌에서 광개토왕이 노린것은 싸움은 적게 하고 전과는 많이 거두는것이였다.

옛 병법에도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적군을 굴복시키나 싸우지 않으며 적의 성을 탈취하나 공격하지 않으며 적국을 멸망시키나 오래 끌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의 책략은 옳은것이였다고 할수 있다.

광개토왕은 동부여정벌에서 군사작전과 정치공세를 적절히 배합하였다.

동부여는 286년에 모용외의 기습으로 일단 망한 부여(후부여, B. C. 2세기초-346년)의 왕족의 일부가 북옥저로 피난해 가서 세운 나라였다. 그들은 처음 고구려에 사대조공하였으나 점차 국력이 강해지자 모반하여 조공하지 않고 고구려에서 떨어져나가려고 하였다.

광개토왕은 410년에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였는데 동부여의 수도성(여성-위치는 알수 없음)을 향하여 진군하면서 도중에 있는 많은 성들을 함락시켰다. 비문에서는 이때의 상황에 대하여 《부여는 …(온)나라가 놀라서 복속하였다. … 왕의 은혜가 (부여땅에) 널리 퍼지였다. 이에 개선하여 귀환하였다. 또 그 나라에서 왕의 은덕을 사모하여…》라고 전하고있다. 이것은 광개토왕이 동부여를 정벌함에 있어서 군사적조치와 함께 《덕으로 다스리》는 유화책을 같이 썼다는것을 보여준다.

광개토왕은 이렇게 함으로써 적수를 적게 만들어 동부여정벌을 손쉽게 결속한것이다.

이처럼 광개토왕은 삼국통일위업을 추진시키고 고구려의 령역을 두배이상으로 확대하며 령토완정을 이룩함으로써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광개토왕은 비록 봉건국왕이기는 하지만 젊은 가슴에 웅대한 포부를 지닌 유능한 정치가, 군사가로서 그 시호에 맞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강대한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고구려전성기의 시초를 열어놓았다.

길지 않은 한생을 강대한 고구려를 위한 웅대한 포부를 실현하는 군사활동에 바친 광개토왕의 생애를 전해주며 그의 릉비는 오늘도 서있으며 래일도 강국 고구려의 증견자로 거연히 솟아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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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아래 - - 2016-07-09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서 이해하기 좋습니다. 제가 원하던 국사책이네요. 감사히 잘 보겠습니다.

근데 어째 이미지는 안보이네요. 당시 영토가 표시된 지도그림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관리자 - - - - 2016-07-09
이미지문제가 해결되였습니다.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다음편은 언제 올리나요.
강남 - 강남 - 강남 - 2018-07-23
력사이야기들을 많이 올려주세요. 명인전, 무술명인전, 감사합니다.
감 상 글 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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