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잡기까지


   

총을 잡기까지

 

박  경  숙               

 

나는 16살에 총을 잡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이끄시는 항일무장투쟁의 길에 나섰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지주놈들의 야수적탄압과 착취가 어린 나로 하여금 손에 총을 잡고 항일을 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던것이다.

나는 9살때부터 3년동안 지주집 아이보개를 하였다.

하루종일 지주놈의 본처와 첩년의 아이들을 보고나면 온몸은 지쳐서 솜같이 나른하여졌다. 그러나 더 고통스러운것은 그들에게서 받는 참을수 없는 구박과 멸시였으며 모진 매질과 굶주림이였다.

업은 아이가 어찌다 울기만 해도 지주놈의 본처와 첩년들은 승냥이떼처럼 달려들어 나를 꼬집고 나의 머리채를 쥐여뜯군 하였다. 그런 날이면 의례히 밥을 주지 않아 나는 주린 창자를 그러안고 찬이슬이 내리는 한지에서 밤을 새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느날 저녁이였다.

이날도 나는 온종일 지주놈의 본처와 첩년의 아이놈들을 업고안고 하면서 달래고있었다.

그런데 이날따라 원래 울기를 잘하는 본처의 아이는 그냥 울기만 하였다.

이때 지주놈의 본처는 자기 아이를 울린다고 다짜고짜로 굵은 창문받침대를 들고 달려들더니 나의 아래도리를 마구 후려갈겨대는것이였다.

나는 그만 비칠거리며 땅우에 쓰러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등에 업힌 첩년의 아이가 질겁하여 또 울음을 터뜨리고말았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사랑채에서 첩년이 달려나와 신바닥을 누비던 돗바늘로 나의 등이며 팔다리를 마구 찔렀다.

그때마다 온몸은 경련을 일으켰고 정신은 아찔아찔해졌다. 참을수 없는 아픔과 설음이 북받쳐올라와 나는 기둥을 부여안고 흐느껴울며 생각하였다.

(왜 나는 집도 없고 땅도 없고 돈도 없어 이렇게 천대를 받는가.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아이보개를 계속해야 하는가.)

나어린 소견에도 아무죄없이 얻어맞고 천대받는것이 원통하였다.

온몸에서는 피가 흘러내렸고 전신은 송곳으로 쑤시는것 같이 아팠다.

이날밤 어머니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여 집에 돌아온 나를 그러안고 흐느껴울면서 《너는 세상에 태여날 때부터 지주놈의 업심을 받더니 이렇게 자라서까지도 그놈들의 학대를 받는구나.》하면서 피눈물나던 지나간 일들을 옛말처럼 말하였다.

소작살이를 하던 아버지가 일제와 지주놈들에게 땅을 떼우고 고향을 떠나 북만 요하현 태평산을 거쳐 소재하란 두메산골로 이주해간것은 1918년경이였다.

나의 부모는 이곳에서 얼마간의 땅을 소작으로 얻어부치였다.

내가 태여나기 바로 한해전이였다. 온 집안식구가 모두 달라붙어 땀흘려 일한 보람이 있어 이해에는 지주놈에게 빚을 물고도 낟알 몇섬은 착실히 남을수 있었다.

그런데 가을이 되자 지주놈이 타작마당에서 온갖 잡세를 곡식으로 앗아냈기때문에 남기는 고사하고 빚조차 물수 없게 되였다.

악착하고 탐욕스러운 지주놈은 다시 꾸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그해 빚은 그해에 다 물어야 한다고 하면서 심지어 입던 옷가지마저 몽땅 빼앗아갔다.

이리하여 내가 태여나자 어머니는 나에게 입히고 덮어줄것이 없어 알몸에 다 해진 아버지의 저고리를 가리워주는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워낙 허약한 어머니는 산후에 풀죽으로 끼니를 에우다나니 얼굴이 퉁퉁 부어 눈을 뜰수 없게 되였다.

그래도 지주놈은 이런 사정을 털끝만치도 알아주지 않았으며 산후병으로 앓고있는 어머니에게 일하지 않고 누워있을 작정이면 당장 땅을 떼겠다고 매일과 같이 을러대였다.

할수없이 어머니는 산후 한주일도 못되여 밭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막상 일을 나가려니 나를 싸업을것이 없었다. 어머니는 생각다못하여 마대를 뜯어 나를 싸업었다.

그날밤,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깔깔한 마대에 긁히여 피부가 온통 피빛이 된 나를 그러안고 울었다고 한다.

《그래도 옛말을 할 때가 오겠지 하고 살아왔는데 무슨 팔자가 이렇게도 기구하단 말이냐.》하고 어머니는 말을 끝내면서 가슴이 꺼지는듯 한 긴 한숨을 쉬는것이였다.

날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생활은 더욱 쪼들려만 갔다.

그후 내가 11살나던 해 봄에 우리 가족은 행여나 하고 요가라는 지주놈의 묵은 논을 얻어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년동안 온 식구가 뼈빠지게 일한 보람이 있어 8섬의 소출을 내였다.

그러나 탈곡이 끝난날 저녁무렵, 마당에 나타난 지주놈은 《아-니, 그 논이 어떤 논인데 소출이 요거야 응? 그 논은 이 근처에서도 드문 상답이야 상답, 못나도 12섬은 나는 논이란 말이야.》하면서 불호령을 쳤다.

어느 누구도 부치지 않아 내여버린 묵은 땅이 상답이 될리가 만무하였고 더우기 12섬이 난다는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악착하기 그지없는 지주놈은 셈도 따질것이 없다고 하면서 8섬의 쌀을 몽땅 빼앗아갔다.

어머니는 마당 한쪽에 쌓여있던 북데기를 그러안고 목놓아울었으며 아버지도 넋잃은 사람처럼 토방에 걸터앉아 애꿎은 담배만 피우고있었다.

우리는 이듬해도, 그 다음해도 지어놓은 곡식을 이렇게 빼앗겼다.

날을 따라 살림은 더욱 쪼들렸고 지주놈의 착취와 행패는 심해만 갔다.

내가 14살나던 해 가을이였다. 어머니는 나를 낳은 이후부터 산후병을 앓기 시작한것이 1년전부터 더욱 심해져 그만 병석에 눕게 되였다.

풀죽으로 끼니를 잇다보니 어머니의 병은 날을 따라 심해만 갔다. 하다못해 흰쌀로 죽이라도 한번 쑤어들릴 생각으로 나는 어느날 밤 누구도 모르게 가위를 들고 논으로 나갔다.

나는 벼이삭 한줌을 잘라가지고 들어와 쌀을 내여 그것으로 어머니에게 죽을 쑤어드렸다.

어머니는 내가 쒀드린 흰쌀죽을 달게 드는것이였다.

이것을 보는 나의 마음은 매우 기뻤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집에 불행을 가져다주는 화근으로 될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다음날 아침, 지주놈은 마름을 앞세우고 우리 집에 달려들었다.

논판을 돌아보던 마름놈이 잘린 벼포기를 발견하고 지주놈에게 고발하였던것이다.

《가을도 하기 전에 벼를 잘라다 처먹어.》하고 요가놈은 신발을 신은채 방안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아버지의 아침밥상을 구두발로 차서 뒤엎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로 달려들어 지팽이로 아버지와 오빠, 어머니 할것없이 마구 후려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지주놈이 후려치는 지팽이를 한손에 틀어잡은채 《그래 앓는 사람에게 죽 한그릇을 쒀먹인것이 무슨 큰 죄가 되여서 이리 야단이요. 땅은 당신의것이지만 농사는 우리가 지었소. 가을에 가서 그만큼 갚음을 하면 될것이 아니요.》하면서 대들었다.

이렇게 되자 악에 받친 지주놈은 언제나 몰고다니던 두마리의 개까지 추겨 아버지와 오빠를 물어뜯게 하였다.

사람을 물어뜯는데 이골이 난 개들은 아버지와 오빠에게 달려들어 사정없이 물어뜯기 시작하였다.

삽시간에 아버지와 오빠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였다. 어머니도 자리에 쓰러진채 운신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여 집안은 온통 피로 물들었으며 깨여지고 흩어진 물건들로 하여 수라장이 되였다.

지주놈은 마름과 머슴을 시켜 부엌에 걸린 가마와 그릇들이며 하나밖에 없었던 이불과 헌 옷가지들이 들어있던 궤짝도 가져갔으며 심지어 지게와 지붕밑에 간수하여 두었던 도리깨마저 빼앗아갔다.

이렇게 지주놈은 한그릇의 죽을 미끼로 하여 하루아침에 우리에게서 모든것을 빼앗아갔다.

이리하여 알몸밖에 남지 않은 우리는 이해(1935년) 9월에 류랑의 길을 떠나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의란으로 갔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둥지를 틀고있고 지주와 자본가놈들이 있는 한 어디를 가나 고난은 매한가지였다.

어떻게든지 땅을 얻어 농사를 지으려고 안타깝게 헤맸으나 알몸만을 가진 우리들에게 그 누구도 땅을 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할수없이 우리는 그날그날 품팔이로 목숨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착취와 탐욕, 암해와 패덕으로 뒤덮인 제국주의사회에서는 인간의 리성이란 찾아볼수 없었고 암담한 속에서 서로 물고뜯기만 하였다.

북만의 초겨울 추위는 헐벗고 굶주린 우리들의 사정을 알아줄리 만무하였다. 방 한칸도 없이 겨울을 난다는것은 참으로 막막한 일이였다. 거처할 곳이 없어 온 가족은 실바람도 막을길 없는 다리밑에서 그리고 랭랭한 절간에서 설한풍 휘몰아치는 밤을 지새우군 하였다. 요행 세방을 얻을 때면 남의 웃방에서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기도 했으나 그것도 며칠 못가서 방세를 물지 못하여 쫓겨나는것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집없이 떠도는 나날은 계속되였다. 이러한 가운데 아버지는 지주에게서 맞은 어혈과 개에게 물린 독으로 하여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굶주림은 우리의 생활을 더욱더 위협했다.

어느날 집주인은 불과 두달도 못되여 방세를 낼 가망이 없으면 당장 나가라고 을러댔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이런 속에서 나는 점차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되였다.

(왜 우리에게는 집도 없고 땅도 차례지지 않는가. 어찌하여 우리는 이렇듯 버림만을 받아야 한단말인가.)

나의 이런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만 갔다.

이때 이 집에 자주 드나들던 한 사람이 《선심》을 써서 자기 돈으로 방세를 물어주었다.

그후부터 이 사람은 이 집에 올 때마다 우리한테 들리였고 때로는 쌀말도 가져다주었다.

이리하여 어머니는 세상에 마음씨 좋은 사람도 있다고 하며 그 사람을 생명의 은인으로 존경도 하였고 말끝마다 칭찬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생각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순박하였다.

한달도 못가서 이자의 본색이 드러났다. 어느날 저녁 어머니한테 찾아온 이놈은 이렇게 고생하지 말고 딸을 파는것이 어떤가고 어머니를 꾀이기 시작했다.

《딸을 팔다니.》

어머니는 뜻밖의 말에 놀랐다. 그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사람이 굶어죽으면 죽었지 어떻게 돈을 받고 딸을 팔겠소.》

어머니는 단마디로 거절해버렸다. 이렇게 되자 그놈은 어머니에게 그동안 먹은 쌀값과 자기가 대신 물어준 두달분 집세를 당장 내놓으라고 위협하며 덤벼들었다.

이때에야 어머니는 이놈이 《선심》을 써놓고 한몫 보자는 야심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알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놈은 일제의 주구였다.

이날밤 어머니는 나를 그러안고 밤새껏 흐느껴울었다.

그러나 하는수 없이 나는 다음날 그놈에게 모진 매를 맞아 온통 멍이 진 몸으로 두달분 집세와 쌀 두말값에 강제로 끌리여 표하촌이란 곳으로 갔다.

이때 그놈은 이곳에서 자기가 아는 집에 나를 맡겨두고 나를 팔아넘기려고 어디엔가 흥정하러 다녔다.

나는 이때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으나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는 돈과 권세가 없고 권세와 돈이 있는놈들은 나에게 욕설과 매질로써 대하였다.

사기와 협잡을 일삼는 착취제도의 전면모는 이러하다.

바로 이러한 때 혁명조직이 나를 구원하여주었다.

내가 그곳에 끌리여간지 며칠만에 조직에서는 나의 억울한 사정을 알고 깜쪽같이 그놈을 체포하여 처단하여버렸다.

이때로부터 나는 비로소 삶의 보람을 느꼈고 자기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였다.

원쑤놈들앞에서는 그 무엇도 바랄것이 없으며 오직 우리에게 부닥친 불행의 화근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총을 잡고 원쑤들과 싸워 이 썩어빠진 낡은 사회를 뒤집어버리고 착취와 억압이 없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것을 똑똑히 알았다.

이리하여 나는 1936년 7월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여 총을 잡고 원쑤들과 싸우는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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