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해외동포들을 통일애국의 한길로
《해외교포문제는 민족문제의 일환이며 민족문제에서 핵을 이루는것은 민족의 자주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민족의 자주성은 민족의 생명이며 자주성을 떠나서는 민족의 존재와 발전에 대하여 생각할수 없습니다.》
김정일
조국의 운명이자 해외동포들의 운명
주체54(1965)년 정초 어느날이였다.
이날 해당 부문의 한 일군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계시는 집무실로 찾아갔다.
그런데 그때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중요한 가르치심을 주고계시였다.
일군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있는데 뜻밖에 그이께서 나오시더니 동무가 찾아왔다기에 나왔다고 하시며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고 그의 손을 다정히 잡아 이끄시였다.
방에 들어서신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찾아온 사연이 무엇인지 어서 말하라고 이르시였다.
일군의 보고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지난해 총련과 재일동포들이 잘 싸웠다고 하시면서 재일동포들의 투쟁성과를 두고 만족을 표시하시였다.
이어 장군님께서는 그렇지만 미제와 일본군국주의자들, 남조선집권자는 저들의 침략적야망과 장기집권야욕으로부터 한사코 남조선과 일본반동들사이의 협정을 성사시키려고 또다시 조급하게 서두르고있다고 하시며 준절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한일회담》이란 사실상 《을사조약》의 현대판이며 굴욕외교의 극치입니다.
계속하여 장군님께서는 을사5적의 매국배족행위로 하여 근 반세기나 일제의 식민지노예살이를 강요당해온 우리 인민은 누구나 일본군국주의의 남조선재침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것이며 자기 조국의 절반땅이 미일침략자들의 2중식민지로 전락되는것을 보고만 있지 않을것이라고 하시며 말씀을 이어가시였다.
조국의 운명이자 해외동포들의 운명입니다. 자기 조국이 있고 자기 민족이 자주권을 가져야 해외동포들도 존엄있고 행복하게 살수 있습니다.
지난날 재일동포들이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고 이역땅에 끌려가서도 인간이하의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된것은 무엇때문이였습니까.
그것은 일제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주권을 유린당하였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본에 있는 모든 동포들은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강점과 일본군국주의의 재침을 반대하여 하나로 굳게 뭉쳐 싸워야 합니다.
단결은 곧 힘이며 승리입니다.
그이의 말씀은 일군의 가슴속에 천만근의 무게로 안겨왔다.
조국의 운명이자 해외동포들의 운명이라고 하시며 애국애족의 숭고한 리념으로 온 겨레를 묶어세우시기 위해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시는 그이의 모습을 우러르며 그 일군은 우리 민족모두가 안겨살 위대한 품은 진정 장군님의 품이라는 철석의 진리를 더욱 깊이 새기게 되였다.
귀중한것
7. 4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에 있은 일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밝히신 조국통일3대원칙이 구현된 7. 4북남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북과 남의 인민들은 물론 해외동포들도 환희의 도가니로 들끓었다.
국토의 분렬로 하여 그리운 고향산천도 제대로 오갈수 없었던 재일동포들은 이제 통일의 날이 오래지 않았다고 기뻐 어쩔줄 몰라하면서 모두가 북남공동성명에 전적인 지지와 찬동의 뜻을 표시하였다.
총련에서는 동포들의 이러한 의사를 대변하여 즉시에 북남공동성명을 전폭적으로 지지찬동하는 성명과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북남공동성명을 지지실현하기 위한 운동을 공동으로 벌릴것을 민단에 제의하는 한편 민단동포들속에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폭넓은 북남협상방침과 조국통일3대원칙을 널리 해설선전하는 사업을 힘있게 밀고나갔다.
결과 민단동포들속에서는 우리의 조국통일방침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울려나오게 되였고 분렬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투쟁에서 총련산하 동포들과 함께 손잡고 나갈 의향이 날로 높아가고있었다.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해당 부문의 일군으로부터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보고받으시였다.
일군의 이야기를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총련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밝히신 조국통일3대원칙과 7. 4북남공동성명을 지지실현하기 위하여 민단동포들과 공동의 보조를 맞춰나가려고 하는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입니다.
조상대대로 한혈통을 이어온 겨레가 둘로 갈라져 서로 반목하고 질시해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타향에서 고향사람들을 만나도 친척과 같다고 하는데 어찌 이역땅에서 한겨레가 장벽을 쌓고 살수 있겠습니까.
국토분렬로 겪는 민족의 이 불행을 너무도 뼈저리게 느끼고 더는 참을수 없다고 생각해왔기때문에 이번에 남북공동성명이 나오자 총련과 민단동포들은 서로 힘을 합쳐 통일성전에 나서려고 한것입니다.
이것은 귀중한것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계속하여 민족적단합을 이룩해야 한다고, 혈육의 정은 끊어질수 없는 법이라고, 민족의 뉴대는 어차피 이어지기마련이라고, 앞으로 총련에서는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위업수행에서 민족단합운동을 강화하는데 큰 힘을 넣는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날에 장군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든 해외교포조직들과 해외동포들이 분렬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투쟁에서 튼튼히 틀어쥐고나가야 할 고귀한 지침이였다.
그 이후 민단동포들과의 민족적단합을 이룩하기 위한 사업에서는 커다란 성과가 이룩되였다.
도꾜도 오다지역에서는 총련동포들과 민단동포들 2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북남공동성명을 지지하는 공동모임이 성대히 진행되였다.
공동모임에서는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오르는 가운데 북남공동성명이 엄숙히 전달된 다음 총련과 민단, 조청과 《한청》대표들이 서로 엇바꿔 연단에 올라가 북남공동성명을 지지하는 연설들을 진행하였다.
공동모임장은 그야말로 두텁게 쌓였던 인공적장벽을 허물고 조국통일을 이룩하려는 열망으로 불도가니마냥 끓어번졌다.
이날 공동모임광경을 목격한 일본의 한 기자는 《매우 감동적인 모임이다. 조선말을 잘 모르나 조국통일을 갈망하는 재일조선인들의 열정은 뜨겁게 안겨왔다.》고 말하였다.
도꾜도 오다지역 동포들의 공동모임을 계기로 일본땅 그 어데나 동포들이 사는 곳에서는 북남공동성명을 지지하는 공동모임이 련이어 진행되였다. 그것은 분회나 지부범위를 벗어나 지방본부 또는 중앙적인 규모로 확대발전되였다.
이외에도 도꾜에서는 조청과 《한청》의 공동주최로 북남공동성명을 지지하는 재일동포청년학생들의 중앙대회가 열리였는데 여기에만도 무려 8 700여명의 동포청년학생들이 참가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동포들사이의 민족적뉴대는 강화되고 통일의 거세찬 흐름이 일본의 이르는 곳마다에 굽이쳐흘렀다.
행복속에 다진 맹세
위대한 수령님과 어버이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에 떠받들려 여한없이 살아온 총련중앙상임위원회 리계백부의장이 자기의 영광넘친 한생을 총화지으며 죽어서도 잊을수 없다고 늘 외우군 하던 하루가 있었다.
장군님을 모시고 무한한 행복속에 휴식의 하루를 보낸 주체70(1981)년 9월 23일이다.
유람선을 타고
리계백부의장이 위대한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 허둥지둥 그이께서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을 때였다.
서둘러 마주 걸어오시여 그의 손을 잡아주신 장군님께서는 이게 얼마만인가고,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고, 이렇게 만나니 참으로 반갑다고 하시고나서 그의 병세부터 물어주시였다.
《지도자동지 덕분에…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찾아… 왔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로환때문에 통풍이 온다고 하는데 오래 고생하셨겠다고 하시며 그를 굳이 앞세우시고 안으로 향하시였다.
잠시후 응접실에 이르신 그이께서는 부의장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여기까지 오시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하시며 이리로 언제 떠났는가고 물으시였다.
부의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중히 대답을 드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앉아서 이야기하라고 하시며 거듭 그에게 자리를 권하시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세를 바로하고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담은 축원의 인사를 드리였다.
장군님께서는 과분한 말씀을 하신다고, 감사하다고 하시면서 정치담화는 그만두고 하루 같이 휴식하자고 하시며 그를 호수가로 이끄시였다.
부의장은 장군님의 부축을 받으며 유람선에 올랐다.
유람선이 움직이자 호수가의 풍경은 마치 영화의 화면처럼 흘러갔다.
《어떻습니까. 풍치가 마음에 드십니까?》
《주변산천이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는 그 어데를 가나 이런 경치들을 볼수 있다고 하시며 부의장동지와 함께 이렇게 배를 타고 즐기니 경치도 더없이 좋아보이고 기분도 더없이 상쾌하다고 그의 마음을 돋구어주시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곁에 앉아 이렇게 한때를 보내니 저도 더없이 즐겁습니다. 죽어도 원이 없겠습니다.》
정말 죽어도 원이 없을 순간이였다.
얼마후 배가 경치좋은 작은 섬에 도착하자 장군님께서는 점심때가 되였는데 우선 식사나 하자고 하시며 부의장을 앞세우고 천막안으로 들어서시였다.
야전용식탁우에는 여러가지 회들이며 어죽, 불고기 등 음식들이 풍성하게 차려져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앉으시여 오늘은 부의장동지를 위하여 차린것인데 많이 드셔야 한다고 하시며 잔이 넘치도록 술을 부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조국의 향취가 풍기는 갖가지 음식들을 그의 접시에 덜어주시며 사양말고 많이 들라고 정을 담아 권하시였다.
부의장은 뜨거운것을 머금었다.
장군님께서는 그러는 그에게 근심어린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일본의 물가가 계속 올라간다는데 해외에서 생활하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의장동지를 비롯해서 모두들 수고합니다. 특히 부의장동지는 참으로 고생이 큽니다.》
부의장은 자기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베푸시는 혜택을 받으며 걱정없이 살아가고있다고 말씀드렸다.
이렇게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느라니 처음에 그저 송구스럽기만 하던 부의장의 마음도 다 풀리였다.
무한한 행복감에 휩싸여 죽어도 원이 없을 하루의 휴식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울며 웃던 오락회
점심식사가 끝나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오늘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마음껏 휴식하자고 이르시였다.
오락회가 시작되였다.
노래돌림으로 차례가 된 일군들이 하나둘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어느덧 부의장의 차례가 왔다.
자못 난처한 기색을 지으며 어쩔줄 몰라하는 그를 정답게 바라보시며 장군님께서 선참 박수를 쳐주시였다.
하지만 장군님앞에서 노래까지 부른다는것이 어쩐지 무엄하게만 생각되여 바재이던 끝에 그는 자기는 노래를 잘 부를줄 모른다고 사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장군님께서는 그 마음을 대뜸 헤아리시고 말씀하시였다.
《노래야 누구나 다 부르는것인데 부의장동지라고 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겠습니까. 어서 사양마시고 노래를 부르십시오.》
어쩔수없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장군님을 우러러 모란봉에 대한 민요를 부르겠다고 정중히 말씀올렸다.
장군님께서는 어서 그러라고 찬성해주시였다.
이윽하여 건드러진 노래선률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장군님께서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고 선률에 맞추어 박수장단까지 쳐주시자 그는 더욱 흥에 겨워 제법 어깨춤까지 추며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곁의 일군들도 덩달아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삽시에 오락회장은 흥겨운 춤판으로 변하였다.
그 한복판에서 노래인지, 감격의 흐느낌인지 알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부의장.
행복에 겨워 울며 웃으며 만시름 다 잊고 노래하고 춤추는 그를 한없이 정다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마냥 기쁨을 금치 못하시는 장군님.
시들어가는 고목에 기쁨의 웃음꽃을 활짝 피워주신 은정깊은 그 사랑을 어찌 한시인들 잊을수 있을손가.
인생말년에 환희와 행복, 희망과 열정의 청춘기를 되찾은 부의장은 장군님의 그 사랑이 하도 고마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참으로 울며 웃으며 흘러가는 뜻깊은 오락회, 한생토록 잊을수 없는 기쁨과 감격의 오락회였다.
두 낚시에 물린 물고기
흥겨운 오락회가 끝난 후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부의장을 부축해주시며 유람선에 오르시였다.
부의장은 그이앞에서 노래부르고 춤을 추던 방금전의 일이 민망스럽게 여겨져 이 늙은것이 로망을 부렸는가 본다고 정중히 아뢰였다.
《아닙니다. 부의장동지가 즐거워하시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만난김에 함께 고기나 낚아보자고, 부의장동지야 이국땅에서 언제 한번 마음놓고 낚시질을 해봤겠는가고 하시며 그를 데리고 배전으로 가시였다.
거기에는 두개의 낚시대가 놓여있었다. 그이께서는 낚시대를 드시고 부의장에게 자신의 옆에서 낚시질을 하라고 이르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의 낚시에 손수 미끼도 끼워주시고 사용법도 가르쳐주시였다.
부의장은 그이곁에 앉아 호수가에 낚시줄을 던졌다.
얼마후 부의장의 낚시줄이 가볍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분명 웬 고기가 낚시를 문것이였지만 그는 그저 행복스럽기만 한 자기 생각에 잠겨 그런줄도 모르고있었다.
《빨리 줄을 당기십시오.》
즐거움어린 장군님의 음성이 다급하게 울렸다.
벌떡 놀란 부의장은 얼른 낚시대를 추켜올리였다.
그러자 팔뚝같은 고기 한마리가 펄떡거리며 물려올라왔다.
《에끼, 되게 큰 놈이군.》
부의장은 제김에 환성을 지르며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가미에 자기 낚시만이 아닌 또 다른 낚시가 물려있으니…
물고기는 분명 장군님께서 던지신 낚시까지 함께 물고있는것이였다.
너무도 뜻밖이고 처음 당하는 일이여서 부의장은 입을 하 벌린채 어쩔줄 몰라하고있었다.
펄펄 뛰는 물고기의 아가미에서 두개의 낚시를 조심스럽게 끄집어내신 장군님께서는 호방하면서도 청청한 소리로 즐겁게 웃으시며 롱짙은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이거 야단났습니다. 임자가 둘이 나섰으니 부득불 두동강으로 자를수밖에 없게 되였군요. 머리부분이 요구되는지, 꼬리부분이 필요한지, 자, 어서 이야기하십시오. 소원대로 해드리겠습니다.》
그이께서는 펄펄 뛰는 고기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가시며 고기를 정말 자를 기세를 보이시였다.
그러자 부의장은 펄쩍 놀라는 기색을 지으며 얼결에 그 고기를 두손으로 싸쥐였다. 그것이 롱이신줄 알면서도 그 뜻깊은 고기를 뭉청 자르시기라도 하면 어쩔가 싶어지는 마음에서였다.
그 광경에 흐물거리던 주위일군들의 웃음꾸레미가 일시에 터지고말았다.
와 하고 웃음보를 터치며 배를 그러안고 돌아가는 일군들과 함께 호탕하게 웃으시던 장군님께서는 여전히 웃음어린 어조로 병을 만나 고생하다가 온 손님에게 양보할수밖에 없다고 하시며 펄펄 뛰는 고기를 들어 그앞에 척 놓아주시였다.
두 낚시대로 한마리의 고기를 낚은 이야기.
주시는 사랑, 따르는 흠모의 마음이 하나로 융합되여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혈연적뉴대로 이어지는 숭고한 동포애의 상징이랄가, 되새길수록 깊은 의미와 감동을 자아내는 가슴뜨거운 이야기였다.
굳게 다진 통일맹세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낚시줄을 드리우시고 이야기를 계속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을 다도해의 낚시터에 모셨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하시며 통일을 앞당겨오실 절절한 뜻을 피력하시던 그이께서는 느닷없이 물으시였다.
《고향이 어디십니까?》
《제주도입니다.》
《아, 제주도입니까?》
장군님께서는 나직하나 흥분된 어조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제주도는 경치가 아름다운 섬이라고 한다. 나는 제주도를 지도와 사진에서 보았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아직도 아름다운 제주도에 가보시지 못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지구를 몇십바퀴 돌고도 남을 기나긴 현지지도의 길을 걸으시였어도 조국의 남해가에는 이르시지 못하시였다. …
언제나 수령님을 모시는 충정의 궤도우에서 분렬된 조국의 상처를 헤아리시는 그이이시였다.
즐거워도 수령님의 기쁨으로 하여 즐거우시고 괴로워도 수령님의 심려때문에 괴로우신 장군님이시여서 음성은 절절히 울리였다.
나는 남녘땅에 한번도 가보지 못하였다.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다도해에 가보고싶다. 다도해기슭에 정자를 지어놓고 년세가 높으신 수령님을 모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수령님께서 다도해를 유람하시며 한평생에 쌓이신 로고를 푸신다면 나는 백날이라도 밝히고싶다. 다도해와 제주도는 우리가 수령님을 모시고 빨리 가닿아야 할 조국의 마지막 지점들이다. 통일의 아침은 반드시 밝아온다. 그 통일의 새 아침을 이끌어갈 원동력은 우리의 지혜와 의지이며 힘이다. 의지가 강한 사람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 미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가능만이 있다. 무엇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조선말이 아니다. …
장군님께서는 절절하면서도 힘있는 어조로 우리모두 일을 잘하여 기어이 조국을 통일하자고 말씀하시였다.
《알겠습니다.》
들을수록 고귀한 그 가르치심은 통일의 앞길을 밝혀주는 휘황한 홰불이며 불멸의 기치였다.
장군님의 말씀대로 통일위업에 한몸을 고스란히 바칠 그날의 그 맹세로 한생을 변함없이 충실하게 산 총련부의장이였다.
동포작곡가의 행복
주체72(1983)년 5월 어느날 풍치 아름다운 모란봉기슭에 자리잡은 모란봉극장에서는 윤이상음악회의 첫막이 열렸다.
음악회무대에는 국립교향악단과 함께 내외에 널리 알려진 이름있는 가수들이 출현하였다.
윤이상선생이 작곡한 가요들은 청중의 심금을 흔들었다.
가요 《민주련합가》의 노래소리는 청중의 가슴속에서 우리 조국을 영원히 둘로 갈라놓으려는 내외분렬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의 불길이 세차게 타번지게 하였으며 나라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 조국통일에 대한 열망이 더욱 끓어번지게 하였다.
련이어 무대에는 가요 《락동강》, 《달무리》 등이 올랐다.
노래들에서는 지난날 일제의 식민지기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의 한숨소리만이 아니라 해방자의 탈을 쓰고 우리 조국의 절반땅을 강점한 미제의 피묻은 구두발밑에서 신음하는 남녘인민들의 원한의 목소리와 함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억세게 싸우고있는 겨레의 웨침소리가 절절히 울렸다.
청중은 노래를 들으면서 비록 멀리 해외에 있지만 나라의 분렬로 인한 민족의 불행과 고통을 가슴사무치게 안고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고무하는데 자기의 음악적탐구와 창작적열정을 바치는 윤이상선생의 사상감정을 더 잘 알게 되였다.
특히 청중은 이 음악회를 통하여 해외에 있는 한 애국적인 작곡가에게 깊은 은정을 베푸시며 조국통일의 길에서 그의 음악활동을 끝없이 빛내여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고결한 사랑에 가슴뜨거움을 금치 못했다.
한해전 여름 어느날 장군님께서는 친히 윤이상선생이 작곡한 교향곡 《광주여 영원히》를 록음으로 들으시였다.
그러시고는 그 교향곡에는 남조선사회의 민주화와 나라의 통일을 열렬히 바라는 작곡가의 사상감정이 잘 반영되였다고 하시면서 이 교향곡연주회를 조직하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그해 가을 평양에서는 조국통일을 념원하는 우리 인민들과 수많은 음악애호가들의 깊은 관심속에 교향곡 《광주여 영원히》에 대한 연주회가 진행되였다.
연주회는 청중들의 가슴마다에 광주인민들의 영웅적투쟁위훈을 다시금 새겨주었으며 그와 동시에 살인마들에 대한 끝없는 증오의 불길이 타번지게 하였다.
그후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지난 시기 윤이상선생이 작곡한 노래들을 소개선전하는 사업을 벌리도록 가르쳐주시였다.
그리하여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윤이상선생이 음악활동초기에 작곡한 《편지》, 《나그네》, 《달무리》를 비롯한 좋은 노래들이 속속 발굴되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장군님께서는 본인의 기억에서도 사라져가던 작품들이 소생의 빛을 안고 다시 세상에 태여난것을 못내 기뻐하시며 몸소 그 가요들을 들어주시고 발굴된 가요들을 가지고 그의 음악회를 진행하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리고 음악회에 출연할 배우들과 반주악단까지 선정해주시였다.
이렇게 시작된 윤이상음악회는 주체89(2000)년까지 무려 19회에 걸쳐 진행되였다.
윤이상선생에 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과 은정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가 부인과 함께 조국을 방문한 기회에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은 석상에서 평양에 민족음악연구소를 내왔으면 하는 의향을 표시하자 수령님께서는 그의 소청을 쾌히 승낙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새로 내오는 음악연구소를 윤이상음악연구소로 부르도록 하시고 평양에 윤이상음악연구소청사와 윤이상음악당까지 건설하여 나라의 음악예술발전과 조국통일위업에 적극 기여하는 통일음악교류기지로 튼튼히 꾸려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거듭 베풀어주시였다.
하여 윤이상선생은 장군님의 품속에서 조국통일상 수상자로 통일애국의 길에 삶의 자욱을 뚜렷이 남기게 되였다.
빛나는 삶
조국통일상수상자들가운데는 조국통일범민족련합(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을 하던 림창영선생도 있다.
재미교포 림창영선생으로 말하면 해방후 미군정청의 비서관으로, 유엔주재 남조선대표로도 있었으며 미국의 학계, 언론계, 종교계에도 관여하였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잘못 살아온 지난날을 뉘우치고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운동에 뛰여들었으나 그의 과거경력으로 해서 그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로 해서 림창영선생의 심중은 복잡하였다.
이러한 때 조국에서는 평양에서 나라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한 론의를 허심탄회하게 가지자는것을 제의하고 해외의 여러 교포인사들과 함께 그도 초청하였다.
이렇게 되여 림창영선생이 주체81(1992)년 4월 조국을 방문하게 되였다.
어느날 그는 뜻밖에도 그토록 그리며 흠모하여마지 않던 민족의 태양 김일성주석과 함께 위대한 장군님을 한날한시에 처음으로 만나뵙는 최상최고의 행운을 지니게 되였다.
장군님께서는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그에게로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다가가시였다.
그이께서는 년로한 몸으로 먼곳에서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겠다고, 선생님과 같은분들이야말로 해외조국통일운동의 원로이고 선각자라고 하시며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그는 끓어오르는 흠모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며 이렇게 말씀올렸다.
《온 겨레가 운명과 미래를 맡기고 사는 어버이장군님께서 분초가 새로운 국사를 미루시고 무상의 영광을 베풀어주시니 송구한 마음을 달랠길 없습니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조국통일보다 더한 국사가 어디에 있겠는가고 하시며 7천만겨레의 최대의 숙원인 조국통일위업앞에서는 모두가 심신을 바칠줄 아는 전사가 되여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통일성업의 길에서 함께 손잡고 나가자고 하시며 그의 손을 다시금 굳게 잡아주시였다.
림창영선생은 흥분과 감격에 휩싸여 그이를 우러러 보았다.
환하신 모습, 자애로운 미소, 다정하신 음성…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온 그는 온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국통일보다 더한 국사가 어디에 있겠는가고, 조국통일위업앞에서는 모두가 심신을 바칠줄 아는 전사가 되여야 한다고 하시던 장군님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가슴을 파고들었기때문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조국방문기간 그에게 성대한 환영연회도 조직해주시고 가족친척들과 만나 즐겁게 지낼수 있도록 해주시였으며 그의 건강을 념려하여 유능한 의료진의 치료를 받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림창영선생은 장군님의 믿음과 은정속에 인생고목에 꽃을 피운 자신을 새롭게 느끼며 참된 인생의 좌표와 신심을 갖게 되였다.
새로운 희망과 각오를 안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교포들속에서 자주적인 조국통일방침을 널리 선전하고 민족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한 사업에 정력을 기울였다.
주체84(1995)년 11월 28일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으로 선출된 림창영선생은 교포들속에 들어가 민족대단결로 통일성업을 이룩해나가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고령의 몸으로 통일을 위해 정력적으로 일하던 림창영선생은 주체85(1996)년 1월 25일 급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눈을 감기 전에 장례를 교회에서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르며 유해는 화장하여 조국이 통일된 후 평양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해외조국통일운동의 원로들이 떠나가는것이 못내 가슴아프다고 하시면서 림선생은 가족장만으로는 안된다고, 조국에서 추도회를 크게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화환까지 몸소 보내주시였다.
림창영선생의 생애는 위대한 장군님의 품이야말로 조국통일위업에 한몸바친 애국자들의 삶을 영원히 빛내준 태양의 품이라는 고귀한 진리를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깊이깊이 새겨주었다.
《나는 동무를 잘 압니다》
주체81(1992)년 4월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80돐경축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재일조선인예술단이 평양에 왔을 때였다.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재일조선인예술단의 공연을 보아주시려고 만수대예술극장에 나오시였다.
그이께서 극장에 들어서시는 순간 폭풍같은 만세소리와 박수갈채가 온 극장안을 들었다놓았다.
얼마후 공연이 시작되였다.
예술공연은 사상예술성과 형식에서 총련예술에 맞게 특색을 살려 높은 수준에서 진행되였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우렁찬 박수갈채속에 공연의 막이 내렸다.
장군님께서는 좌석에서 일어서시여 제일먼저 크게 박수를 쳐주시며 사랑의 미소로 출연자들의 공연성과를 축하해주시였다.
순간 홍령월단장의 얼굴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두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총련예술단이 공연을 아주 잘하였다고, 모든 예술작품들이 다 사상예술성이 높고 형식도 총련의 특성을 잘 살렸다고 하시면서 노래뿐아니라 무용작품도 다 좋다, 특히 비둘기춤을 잘 형상하였다, 조국통일을 주제로 한 종목도 형상을 아주 잘하였다고 일일이 종목을 들어가시며 과분한 치하를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총련예술공연을 보고 매우 만족하다고, 만점짜리 공연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값높고 영광넘치는 평가가 어디 있으랴.
그날 저녁 장군님께서는 목란관에서 성대한 축하연을 마련하시고 몸소 자리를 같이해주시였다.
기쁨과 환희에 넘쳐 설레이는 연회참가자들을 미소어린 눈길로 둘러보시며 그이께서는 오늘 저녁의 이 연회는 총련예술단의 공연성과를 축하하여 마련한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번에 총련예술단은 조국을 방문하여 탄생 80돐을 맞으시는 위대한 수령님께 기쁨을 드렸고 조국인민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고 다시금 축하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친어버이의 심정으로 연회참가자들에게 일일이 축배잔을 찧어주시였다.
이윽고 홍령월단장의 차례가 되였을 때였다.
그는 가슴이 활랑거리고 눈앞이 흐려져 깊이 머리숙여 인사드렸을뿐 아무 말씀도 올릴수 없었다.
장군님께서는 정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시면서 따뜻이 손을 잡아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동무를 잘 압니다.》
짤막하지만 크나큰 사랑과 신임이 어린 말씀이였다.
단장은 흐느낌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장군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였다.
《조국을 위해 일을 잘합시다.》
그이의 유정한 음성과 함께 축배잔이 단장의 잔에 닿았다.
잔과 잔이 부딪치는 가벼운 음향이 울리는 순간 여직껏 체험해보지 못한 격동과 행복감이 홍령월단장의 온몸에 전류처럼 퍼져갔다.
조국과 민족, 인류의 운명을 책임지신 장군님께서 안중에 두고 기억하셔야 할 사람들도 많고많으시련만 한갖 해외동포예술인에 불과한 자기를 잘 알고계신다니 이 얼마나 분에 겨웁도록 행복한 일인가.
《나는 동무를 잘 압니다.》
이 뜻깊은 말씀에는 파란곡절에 부대끼며 향방없이 헤매이던 한 이름없는 동포예술인의 삶을 애국의 길에 세워주시고 영광과 행복을 꽃펴주신 장군님의 크나큰 은총이 그대로 담겨져있었다.
사실 축복받은 그의 인생갈피에는 장군님의 한없이 고마운 사랑이 력력히 어려있었다.
조국에 자주 불러 여러번 수령님앞에 내세워주시여 수령님으로부터 노래를 잘 부른다는 최상의 평가를 받을수 있도록 하여주신분도, 영예의 김일성상과 인민배우칭호를 안겨주도록 하신분도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된 독창회까지 성대히 마련해주신분도 바로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그 사랑, 그 은정을 다시금 되새기며 홍령월단장은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재일동포들을 조국을 위한 길, 통일애국의 길로 불러일으키는 예술활동을 더욱 힘있게 벌려나가리라 심장의 맹세를 다지고 또 다지였다.
위로연
위대한 수령님과 영결한 후 총련조의대표단 성원들과 재일동포들은 뜻밖에도 목란관의 연회석상에 앉게 되였다.
(피눈물을 흘리며 방금 어버이수령님과 영결하였는데 연회라니?! …)
한 일군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젖은 목소리로 오늘의 연회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마련해주신 위로연이라고 알려주었다.
순간 장내에는 격정의 파도가 일었다.
(위로를 받으셔야 할 장군님께서 도리여 우리 해외동포들을 위로하시다니?! …)
며칠전인 주체83(1994)년 7월 16일이였다.
총련에서 또다시 백수십명의 조의대표단이 온다는 보고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한 일군을 부르시여 총련에서 어버이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하러 또 온다고 하는데 늦어 평양에 도착한 동포들이 개별적으로 조의를 표시할수 있도록 조직사업을 잘하라고, 상공인들도 이번 《만경봉-92》호 배편에 저마다 오겠다고 한다는데 다 올수 있도록 하라고, 그들이 오면 자신께서 만나주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수령님의 령구를 바래우는 영결식행사가 끝난 다음 조의방문하러 온 총련동포들을 위해 목란관에서 연회를 잘 차려주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이르시였다.
일군은 그만 가슴이 뭉클해났다.
지금 그 누구보다 가슴저미는 아픔을 당하신 그이께서 오히려 슬퍼하는 해외동포들 일로 해서 마음쓰시니 너무도 충격이 컸던것이다.
일군의 그러한 심정을 헤아리신 장군님께서는 그들이 어버이수령님의 령전에 조의를 표시하고 자신께 위문의 인사를 하겠다고 온것만큼 그들을 잘 대해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19일에 총련에서 온 성원들을 위한 연회를 차려주고 추도대회가 끝난 20일 저녁에는 다른 지역에서 온 해외교포조직대표들과 인사들을 위한 연회도 차려주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총련조의대표단 성원들과 재일동포들은 장군님의 따뜻한 위로의 정이 담긴 연회상앞에 앉게 되였던것이다.
연회상을 마주하고 그들모두는 울고 또 울었다.
조국통일의 일념을 안으시고 전민족의 대단합을 위하여 불철주야의 날과 날을 보내시던 수령님이 그리워 울고 수령님 그대로이신 장군님의 대해같은 은정이 고마워서 울었다.
이날의 위로연은 위대한 장군님따라 조국통일의 성업을 반드시 이룩하고야말 해외동포들의 맹세연으로 화하였다.
구원의 빛발
위문전문
주체84(1995)년 1월 17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뜻밖의 가슴아픈 소식을 접하게 되시였다.
《5시 46분 일본의 한신, 아와지지역에서 대규모의 지진 발생》
순간 장군님의 마음은 즉각 일본에 사는 동포들에게로 쏠리시였다.
그이께서는 급히 전화로 해당 일군을 찾으시였다.
지진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지진이! 우리 동포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가 빨리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다급히 지시를 주시고서도 그이께서는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시였다.
뜻밖의 자연재해를 당하고 절망과 고통속에 헤매일 동포들의 비참한 정상이 눈앞에 어려오시는듯 일손을 잡지 못하시던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이제부터 시간에 관계없이 동포들의 피해정형을 즉시즉시 보고해야겠다고 이르시였다.
제기되는 자료에 의하면 사태는 점점 더 험악해지고있었다.
5 500여명의 사망자와 2만 5 000여명의 부상자, 34만여명의 피난민과 5만세대의 살림집, 도로, 철도, 항구시설의 파괴, 10조¥이 넘는 피해액을 낳은 대규모의 지진피해.
재일동포들이 입은 재난도 말할수 없이 컸다.
새벽에 들이닥친 자연의 광란으로 120여명의 동포들이 희생되였고 1 500여명의 동포들이 부상당했으며 2 225호의 동포주택과 점포들이 완전히 불타거나 파괴되고 4 200여명의 동포들이 엄동설한에 피난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장군님께서는 피해정형을 수시로 알아보시며 한밤을 꼬박 지새우시였다.
지진피해가 있은 다음날 이른아침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총련에 몸소 위문전문을 보내주시였다.
《나는 일본의 효고현을 비롯한 깅끼지방에서 대규모의 지진이 일어나 그곳 총련조직들과 동포들이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는 뜻하지 않은 소식에 접하였습니다.
나는 이 불행한 소식에 접하여 한덕수의장동지를 비롯한 총련중앙상임위원회와 피해지역 동포들과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문과 애도의 뜻을 표하는바입니다.
나는 총련의 모든 조직들과 동포들이 더욱 굳게 단합하여 지진피해를 하루빨리 가시고 안착된 생활을 이룩하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피해지역 동포들이 하루빨리 불행을 딛고 일어나 안착된 생활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장군님의 불같은 사랑이 천만의 열도로 차넘치는 위문전문이였다.
위문전문을 전달하는 모임이 히가시고베 조선회관에서 열리였다.
장내는 삽시에 감격의 눈물바다로 변하였다.
전달자도 청중들도 운명의 구세주이신 장군님의 넓은 품에 안긴듯 솟구치는 격정을 터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그러며 동포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위대한 장군님, 고맙습니다.
장군님의 위문전문은 막심한 자연피해를 입고 암담해하던 우리들의 가슴에 소생의 숨결을 부어주고 분발의 새 힘을 돋구어준 구원의 빛줄기입니다.)
위문금
하루아침에 혈육들과 가산을 다 잃고 페허우에 나앉게 된 우리 동포들이였지만 그들은 인차 슬픔을 털어버리고 피해복구사업에 떨쳐나섰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뜨거운 위문전문이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힘과 용기를 분발시켰던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제일로 부러워한것은 민단계와 무소속동포들이였다.
어려울 땐 종이장도 맞들면 가볍다는데 자기들에겐 동정해주고 마음의 기둥이 되여줄 위인이 왜 없는가고 한탄의 눈물을 머금는 그들이였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꿈속에서처럼 따뜻한 해빛이 비쳐졌다. 총련일군들을 통해 총련동포들과 꼭같이 그들에게도 위문금이 가슴 한가득 차례진것이였다.
눈을 비비고 귀를 의심하며 그들이 들은 사연은 눈물겨웠다.
위문전문을 보내주신 며칠후인 1월 22일이였다.
해당 부문 일군들을 부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지진피해지역에서 일어난 피해상황을 알려주시면서 말씀하시였다.
《해외에 살고있는 총련일군들과 동포들이 불행과 슬픔을 겪고있는데 우리가 가만있을수 없습니다.
… 이번에 지진피해를 입은 총련동포들에게 돈을 보내주기 위한 대책을 연구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위문금을 보낸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위문금말입니다.》
순간 일군들의 가슴은 불덩어리를 안은듯 불시에 달아올랐다.
사실 나라의 형편이 어려운 조건에서 위문금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하였던것이다.
(하건만 어버이장군님께서는…)
일군들은 동포애의 정이 뜨겁게 흘러넘치는 그 말씀에 감동을 금치 못하며 얼마간의 위문금을 보내줄것을 계획하였다.
이 사실을 아시게 된 장군님께서는 안타까운 어조로 재일동포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을 덜어주는 일인데 아까울것이 없다고, 설사 우리가 죽을 먹고 굶는 한이 있더라도 위문금을 많이 보내주자고, 위문금을 보내여 총련동포들뿐아니라 민단계와 무소속동포들에게까지 골고루 나누어주도록 하라고 특별히 력점을 찍어 강조하시였다. …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난 동포들은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리념이요, 소속이요 하면서 총련에 등을 돌려대고있던 그들이였다. 또 당시 조국이 얼마나 큰 경제적시련을 겪고있는가를 너무도 잘 아는 그들이였다.
그런데도 한민족, 한피줄이라는 그 하나의 생각으로 지난날의 허물도, 나라의 어려운 경제형편도 불문하고 자기들을 총련동포들과 차별없이 돌보아주시니 장군님의 하늘같은 그 사랑에 무슨 말로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할지 모를 심정이였다.
실로 장군님의 무한한 동포애는 재일동포들의 불행도 가셔주고 불신과 대립의 랭기도 다 녹여줌으로써 그들을 조국통일을 위한 민족대단합의 길로 이끌어준 위대한 사랑이였다.
사랑도 그대로, 영광도 그대로
주체84(1995)년 10월 11일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당창건 50돐 경축행사에 참가한 총련축하단, 대표단과 기념촬영을 하시기 위해 금수산기념궁전(당시)으로 나오시였다.
장군님을 우러러 만세의 환호를 터치는 축하단, 대표단성원들에게 답례를 보내시며 촬영대앞으로 걸어오신 그이께서는 총련간부들과 함께 서있는 리진규제1부의장의 부인을 보시고 걸음을 멈추시였다.
반가운 미소를 지으시고 부인을 다정스럽게 꽉 껴안으신 장군님께서는 그의 귀전에 대고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너무 서러워마십시오. 우리가 있지 않습니까. 마음을 굳게 먹고 힘을 내야 합니다.》
어버이의 뜨거운 정이 어린 장군님의 말씀에 부인은 격정이 북받쳐올라 눈굽을 적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리진규제1부의장으로 말하면 수령님과 당에 무한히 충실하여온 가식없는 일군이라고 하시며 남다른 사랑과 믿음으로 내세워주시였다.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주실수 있는 사랑과 믿음을 다 주시고 조국에 올 때마다 몸가까이 부르시여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신 장군님께서는 제1부의장이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그리도 비통해하시며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을 보내주시였으며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대해같은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총련의 원로에게 한량없이 베풀어주시던 그 사랑을 그대로 안으시고 이렇듯 그의 부인을 따뜻이 위로해주시는것이였다.
부인은 장군님의 다심한 보살피심에 눈물을 금치 못하며 《알겠습니다. 장군님, 우리 주인은 장군님을 무척 그리워하다가 갔습니다.》라고 말씀드리였다.
《나도 알고있습니다.》
그이의 음성은 갈리시였다.
《장군님, 부디 건강하십시오.》
장군님께서는 부인에게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며 그처럼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행사장에서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부인과 뜻깊은 말씀을 나누시였다.
그로부터 며칠후였다.
조선로동당창건 50돐에 즈음하여 성대한 연회가 진행될 때에도 그를 총련간부들과 함께 주탁에 앉도록 하여주시고 손수 술을 부어주시면서 이 잔을 들고 기운을 내십시오, 건강을 돌보셔야 합니다라고 다시금 위로의 말씀을 하여주시였다.
부인은 격정으로 하여 눈앞이 흐려지는것을 어쩌지 못하며 《고맙습니다. 장군님의 은혜를 평생토록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올리였다.
장군님께서는 눈물을 훔치는 부인을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어서 드십시오. 리진규제1부의장동지가 바랐고 또 그것을 위하여 한생을 바친 조국통일을 위하여 우리 함께 손잡고 힘껏 싸워나갑시다.》
《장군님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부인은 잠겨드는 소리로 겨우 말씀올리였다.
그후에도 장군님께서는 부인을 조국의 이름난 온천에서 충분히 휴식하게 하시고 은정넘친 생일 80돐상까지 보내주시였다.
리진규제1부의장 부인은 남편에게 주시던 그 사랑, 그 믿음을 자기에게 그대로 돌려주시는 장군님의 한없이 크나큰 은덕에 보답하고저 총련사업과 통일애국위업에 한몸 다 바쳤다.
총련의장의 생일
주체86(1997)년 1월 어느날 총련의 한덕수의장은 조국에 사는 아들, 딸, 손자, 손녀 10명이 모두 함께 도꾜에 나타난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희들이 어떻게? …》
《위대한 장군님께서 아버지의 생일 90돐을 잘 쇠여드리라고 저희들을 보내시였습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이렇게 아이들까지…)
한덕수의장은 목이 꽉 메였다.
원래 그의 생일은 2월 18일이였는데 위대한 장군님의 탄생일을 맞는 2월에 자기의 생일을 쇠는것을 한사코 반대하여왔다. 하여 3월에 가서 자기의 생일을 간단히 쇠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오히려 그의 건강을 념려하시면서 자기 날자보다 앞당겨 1월말에 쇠되 총련중앙회관에서 축하연을 성대히 진행하도록 해주시였던것이다.
그로부터 며칠후 한덕수의장은 김일성훈장과 함께 사회정치학 명예원사의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장군님께서 별도로 보내주신 진귀한 선물도 전달받았다.
그에게는 장군님께서 평양에 사는 자식모두를 보내주시고 높은 급의 훈장과 명예칭호, 선물을 안겨주신것만으로도 너무나 과분했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이에 그치지 않으시고 그에게 생일축전까지 보내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생일축전에서 한덕수의장은 총련조직을 건설하였으며 사회주의조국의 륭성번영과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재일조선인운동의 강화발전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쳐온 귀중한 원로이며 해외교포운동의 명망높은 활동가, 참다운 애국충신이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리고 그에게 어버이수령님의 유훈대로 로당익장하여 총련애국위업을 계속 정력적으로 이끌어나가기 바란다고 하시면서 건강과 행복을 축원한다는 사랑과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자신에 대한 이런 값높은 평가를 축전의 구절구절에서 읽으며 한덕수의장은 정녕 목이 메고 눈물이 쏟아지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그것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민족의 넋을 지키고 애국의 한마음을 바치며 파란만장의 인생길을 걸어온 한덕수의장에게 베푸신 최상의 평가, 최대의 믿음과 영광이였다.
후날 총련일군들을 통해 한덕수의장이 올리는 감사의 인사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우리가 한덕수의장의 생일을 크게 차려준것은 우리 당이 생전에 한덕수의장을 아끼고 사랑하시던 어버이수령님의 마음을 그대로 표시해준것이라고, 그가 총련의 지도중심으로 대오의 일심단결을 위해 한생을 바치였기때문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동무들이 한덕수의장동지의 건강을 잘 돌봐주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과 같은 정세하에서 한덕수의장동지가 건강하여 앉아있기만 해도 좋습니다.》
그이의 사랑은 정녕 끝이 없었다.
한 해외동포음악가에 대한 높은 평가
7천만겨레를 한품에 안아 민족대단결과 통일위업실현에 걸음걸음 이끌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과 은정은 한 해외동포음악가에게도 어리여있다.
주체89(2000)년 3월 18일이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당중앙위원회의 한 책임일군에게 2000년 2월의 명절에 즈음하여 재미교포음악지휘자가 교향곡연주회를 진행하였는데 세계명곡들과 함께 우리 나라 노래 《조선의 장군》,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아리랑》 등을 성대히 연주하였다고 하시면서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에는 조국과 멀리 떨어진 이역땅에서도 민족의 넋을 간직하고 애국적음악활동을 벌려가는 한 해외동포음악가에 대한 최상의 평가가 어려있었다.
일군의 머리속에서는 재미교포음악지휘자가 미국땅 한복판에서 장군님을 칭송한 노래 《조선의 장군》을 힘있게 지휘하는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사실 미국이라고 하면 공화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이다.
이런 곳에서 정치적의의가 있는 노래를 그것도 계기에 맞추어 연주한다는것은 사실 간단한것이 아니였다.
하지만 그는 위대한 장군님의 탄생기념일을 맞으며 태양찬가를 높이 울려야 한다는 신념을 안고 지휘봉을 힘있게 휘둘렀다.
교향곡연주회 무대우에서 노래 《조선의 장군》의 선률이 울려나왔다.
백두의 장검을 높이 들고 붉은기 지켜선 령장
무비의 담력을 떨치시며 폭풍도 가셔버린다
이 세상 누구도 범접 못한다
그 어떤 대적도 범접 못한다
천출명장 김정일장군 조선의 장군
…
장중하면서도 힘있는 음악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음악으로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지켜주시고 온 겨레를 통일위업수행에로 이끌어주시는 장군님의 위인상과 민족의 넋을 만천하에 과시하려는 그의 모습이 일군의 눈앞에 안겨왔다.
이렇듯 장군님께서는 해외에서 오래전부터 애국적음악활동을 벌려온 재미교포음악지휘자의 소행을 높이 평가하시고 그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최대의 믿음을 안겨주시였던것이다.
녀기자를 위해 바치신 시간
력사적인 평양상봉을 취재하고도 얼마간 조국에 머물러있던 재미교포녀류기자 문명자는 주체89(2000)년 6월 30일 위대한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특유의 잠바옷차림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고 현관앞에까지 마중 나오신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오래간만에 만나게 되는데 건강이 어떻습니까? … 오늘은 조선옷차림을 하여 그런지 퍽 젊어보입니다.》
녀기자의 기쁨은 끝이 없었다.
온 세상이 무적의 장군으로 칭송하는 담대하신분, 하지만 자기에게는 가장 뜨거운 인간으로 간주되는분, 그분과 탁을 마주하고 앉으니 친혈육이상의 정이 고패쳤다.
앞에는 성천담배와 재털이가 놓여있었다.
그는 자기에 대한 장군님의 다심한 념려를 느끼며 스스럼없이 말씀드렸다.
《의사들이 혈압이 높다고 담배를 끊으라고 하지만 담배만은 죽을 때까지 포기 못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따뜻이 웃으시며 고혈압에는 소금온천과 류황온천이 좋다고, 그곳에서 료양하면 혈압이 내려가니 이다음에 오면 한번 가보라고 그의 건강을 극진히 위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문명자가 진심으로 올리는 감사의 인사에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김일성주석님께서 서거하시였을 때 녀사를 만나 악수를 한 기억이 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시간을 낼수 없어 편지를 써보낸적이 있다. 그 편지에서 앞으로 조국을 다시 방문하는 기회에 꼭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썼는데 나는 늘 그 약속을 잊지 않고있었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주 녀사에 대한 말씀을 하시였다. …
이어 장군님께서는 내가 다른 외신기자들은 모두 사절해도 문선생만은 부르라고 했다고, 우리 민족으로서 화해와 통일을 위해 정력적인 기자활동을 하고있는데 마땅히 초청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시며 6. 15북남수뇌상봉을 비롯하여 그가 알고싶어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유모아를 섞어 납득이 잘되게 오랜 시간 말씀하시였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자 장군님께서는 그를 오찬회장으로 이끄시였다.
식탁우에는 감자만두튀기, 김치무우장, 잣죽, 녹두묵 등 민족료리들이 올랐다.
장군님께서는 녀기자에게 먼저 녹두묵을 간장에 찍어서 들고 식사하라고, 녹두묵은 몸안의 독성물질을 해독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따뜻이 이르시였다.
그이의 권유대로 수저를 들던 녀기자는 문득 콩나물김치의 맛을 보고 《콩나물인데 김치맛이 납니다. 어떻게 만들었을가요?》라고 스스럼없는 질문도 드렸다.
장군님께서는 자신도 좋아하는 찬이라고 하시며 콩나물을 슬쩍 데친 후에 마늘, 생강, 고추를 넣어 김치처럼 익히면 이런 맛이 난다고 그 방법까지도 친절히 알려주시였다.
오찬회석상에서는 종교와 로인병치료, 민족음식과 건강 등 여러면의 화제가 올랐는데 그러느라니 결국 장군님께서는 그날 녀기자를 위하여 무려 여섯시간 가까이나 바치시였다. 뜨거운 동포애속에 언제 흘러간지 모른 시간이였다.
그리고 그와 헤여질 때는 다리가 불편한 녀기자의 손을 몸소 잡으시고 승용차에 편히 오르도록 보살펴주기까지 하시였다.
녀기자는 달리는 승용차에서 생각했다. 그리고 후날 이렇게 썼다.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은 강하면서도 소탈한분이시였고 지난 1992년과 1993년 두차례에 걸쳐 접견해주시였던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참인생의 자양분
주체83(1994)년 7월 민족의 어버이이신 김일성주석께서 뜻밖에 서거하신것으로 하여 온 강토가 비애에 잠겨있을 때였다.
조의대표단성원으로 평양에 온 최정렬교포는 어버이수령님의 서거에 애도의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조의식장으로 갔다.
비통한 마음을 안고 조의를 표시하는 그를 만나주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아주시며 위로의 말씀을 해주시였다.
자신의 슬픔은 묻어두시고 오히려 해외교포들의 슬픈 마음을 먼저 생각하시는 그이의 앞에서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을 추모하는 중앙추도대회가 진행된 그날 저녁에도 해외동포조객들을 위한 위로연을 마련해주시고 최정렬교포를 불러주시였다.
목란관에서 진행되는 위로연에 참석한 그의 마음은 뜨거움으로 달아올랐다.
위로를 받으셔야 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오히려 조객들을 위로해주신 이런 이야기를 그는 아직 알지 못했던것이다.
음식상을 마주한 최정렬교포의 머리속에는 그이를 처음 만나뵙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최정렬교포가 그토록 그리던 조국을 방문하여 경애하는 장군님을 처음 뵈온것은 주체81(1992)년 4월 탄생 80돐을 맞으시는 어버이수령님께 축하의 인사를 올리러 갔을 때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인사를 올리자 《고맙습니다.》라고 하시며 미소어린 눈길로 바라보시였다.
순간 그는 그리워마지 않던 친어버이앞에 서있는듯 한감을 느꼈다.
(어쩌면 김일성주석과 그리도 꼭같으실가.)
그는 한순간에 그이의 위인상에 매혹되였다.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 크고작은것이 따로 없으며 누구에게나 정에 정을 더해 주는것이 그이의 천품이다.
한없이 인자하신 그이를 만나뵙고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고있던 그에게 또다시 격동의 순간이 차례졌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에게 80돐생일상을 보내주신것이였다.
관계부문 일군들과 해외교포들이 참가한 가운데 축하를 받으며 생일상앞에 마주앉은 그는 뜨거운것이 솟구쳐올랐다.
인생의 첫발을 잘못 디딘탓에 수십년세월 노없는 쪽배처럼 방황하였고 애국의 길에 들어서서도 민족을 위해 떳떳이 자부할만 한 일을 해놓은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였다.
이런 그였기에 생일상을 마주하고 오래동안 눈물을 거둘줄 몰랐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야 눈물을 거둔 그는 갖가지 진귀한 음식들이 가득 놓인 생일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자기앞에 놓인 생일상이 단순한 생일상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한 인간의 재생을 축하해주시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에서 여생을 계속 꽃피워나가기를 바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따뜻한 사랑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최정렬교포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가까스로 누르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뇌이였다.
(령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이제 남은 여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깡그리 다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그는 참인생의 자양분을 부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에 보답하리라 마음속결의를 다지였다.
최정렬교포는 그때 일을 회고하며 자신보다 먼저 해외교포들을 생각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하해같은 은정을 다시금 느끼게 되였다.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마련해주신 뜻깊은 위로연앞에서 어버이수령님 그대로이신 김정일장군님을 모시여 우리 민족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래일도 빛을 뿌릴것이라는 자부심으로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꾸었다.
그후 그는 년로한 몸으로 거리를 행진하면서 《조국통일》, 《조선은 하나다!》라는 구호를 웨치며 조국통일을 위해 힘찬 투쟁을 벌리였다.
최정렬교포가 인생의 황혼기에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게 된것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부어주신 삶의 자양분에 원천을 두고있기때문이였다.
소원을 성취한 목사
주체90(2001)년 11월 11일 조국에 체류중이던 재미동포 홍동근목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재미동포전국련합회 고문, 그리스도교 목사인 그는 일찍부터 깨끗한 애국애족의 마음을 간직하고 민족의 단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한 애국자였다. 특히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홍동근목사의 흠모심은 남달리 강하였다.
이미 도서 《김일성주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와 《백두산의 노래》를 집필한데 이어 당시 목사는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 90돐을 맞으며 《김일성주석 덕성일화 100》을 쓰고있었다.
그런데 그 도서의 마무리작업을 위하여 조국에 왔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된것이였다.
비보를 받으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몹시 마음이 쓰리시였다.
7년전 자신을 만났을 때 책을 쓰겠다고 하던 목사의 모습이 삼삼히 떠오르시였다.
일군들은 목사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서둘렀다.
그런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을 조용히 밀막으시며 미국에서 그의 가족이 조국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례를 치르어주자고 이르시였다.
일군들은 뜨거운 동포애로 세상에 없는 관례까지 만드시는 그이를 우러르며 눈굽을 적셨다.
그리하여 목사의 장례식은 근 1주일간이나 미루어지게 되였다.
조국에 도착하여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목사의 부인은 남편의 유해가 애국렬사릉에 이르자 북받치는 격정을 더는 참을길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돌려주신 사랑에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홍목사는 늘 말하기를 자기가 죽으면 조국땅에 묻어달라고 하였는데 그 소원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풀어주시였습니다. 저의 주인은 <래세의 천당>이 아니라 현세의 천당인 장군님의 품에서 영생하게 되였습니다.》
이렇듯 이국에서 파란만장의 세파를 겪지 않으면 안되였던 홍동근목사도 조국의 품에서 생을 마쳤다.
인생의 마무리
주체91(2002)년 1월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건의 심상치 않은 보고를 받으시였다.
국제태권도련맹 총재인 최홍희선생이 그만 불치의 병에 걸려 조국에 와서 치료를 받고싶어한다는것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어쩐지 그가 단지 병치료만을 념두에 둔것 같지 않으시였다.
불우한 타향살이에서 지친 생을 마감에라도 조국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편안히 맺고싶은 마음에서 그런 청을 했으리라고 생각되시였다.
어언 나이 84살, 고향을 하직한지 근 60년이 된 총재였던것이다.
그이께서는 즉시 선생이 조국에 오도록 대책을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그는 부인과 함께 조국에 도착하여 검진을 받은 다음 전문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
3월 16일 그의 병상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장군님께서는 자신의 인사와 함께 여러가지 신선한 과일을 보내시여 그가 신심을 가지고 병치료를 해나갈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주시였다.
그는 큰 수술을 받기도 하였지만 로년에 맞다든 병이여서인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그는 얼마후 불편한 몸으로 외국에 나가 태권도와 관련한 문제를 성과적으로 처리하고 조국에 다시 돌아와 1개월만에 끝내 세상을 떠났다.
최홍희선생이 사망했다는 비보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비통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최홍희총재는 우리 수령님께와 당에 태권도를 가지고 조국통일에 이바지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고 수십년동안 해외에서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 태권도활동을 열정적으로 해오다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것을 알고는 조국의 품에 안겨 생을 마쳤습니다.
최홍희총재는 결국 인생의 마무리를 잘한셈입니다.》
그의 장례가 진행될 때 사람들은 생각했다.
조국의 품속에서 파란많은 인생의 끝을 맺은 최홍희 총재, 그 인생의 마무리는 모든 해외동포들의 한결같은 념원이 아니겠는가고.
훌륭한 애국자들
주체94(2005)년 11월 9일이였다.
선군혁명령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날 해당 일군들로부터 재일조선상공인대표단 성원들이 조국에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자본주의일본땅에 살면서도 조국과 총련을 위하여 애국의 한마음을 바쳐온 총련상공인들의 지난날을 추억깊이 돌이켜보시면서 일군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지난 기간 총련상공인들은 내외정세가 복잡하고 일본의 장기적인 경제불황으로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총련조직을 지키고 강화발전시키며 사회주의조국의 강성대국건설과 조국통일위업을 앞당기기 위한 사업에 많이 이바지하였습니다.
나는 조국땅 가는 곳마다에서 재일동포상공인들의 소중한 애국지성이 깃들어있는 <애국>공장들과 설비들, 기념비적창조물들을 볼 때마다 총련상공인들이야말로 조국과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는 훌륭한 애국자들이라고 생각하군 합니다.》
총련상공인들에 대한 더없는 믿음의 말씀이였다.
일군들은 조국과 총련을 위해 기여한 총련상공인들의 애국지성에 대해 돌이켜보았다.
총련의 애국적인 동포상공인들은 지난 기간 내외반동들의 온갖 책동과 모진 풍파속에서도 총련과 조국의 통일번영을 위하여 물심량면으로 커다란 기여를 하여왔다.
안상택거리, 김만유병원, 금강원동기공장, 경련애국사이다공장…
조국땅에 솟아오른 기념비적건축물들과 창조물들마다에도 총련상공인들을 비롯한 재일동포들의 뜨거운 애국심이 소중히 깃들어있었다.
수령님과 장군님께서는 총련의 애국적상공인들이 조국과 총련을 위하여 발휘하는 애국의 마음을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것으로 여기시며 그들의 이름과 업적이 대를 이어 후세에 길이 전해지도록 하시고 국가수훈도 안겨주시는 은정을 아낌없이 돌려주시였다.
이 뜨거운 믿음과 사랑은 총련상공인들에게 있어서 개인의 치부나 향락보다 조국과 총련조직을 위해 헌신하게 한 애국충정의 원천으로 되였던것이다.
일군들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장군님께서는 재일조선상공회조직들과 동포상공인들은 서로 돕고 이끄는 조선민족고유의 고상한 민족정신과 전통을 적극 살려 민족적단합을 이룩하고 동포사회가 언제나 민족적슬기와 분위기로 들끓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에는 총련상공인들이 앞으로도 애국의 한마음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사회주의조국과 조국통일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나가도록 하시려는 높은 뜻이 어려있었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일군들에게 재일본조선상공인련합회와 동포상공인들이 총련애국사업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강화발전시키며 조국의 통일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성스러운 위업수행에서 한몫 단단히 맡아하리라고 믿는다는것을 총련상공인대표단 성원들에게 전달하라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들에게 못다 주신 사랑이 있으신듯 내각총리가 재일동포상공인대표단 성원들을 만나주고 그들을 위한 연회도 잘 차려주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후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은정깊은 사랑을 받아안은 대표단성원들은 솟구치는 감격을 금치 못해하며 사회주의조국의 륭성번영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치겠다고 결의를 다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