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숭고한 의리와 뜨거운 동포애를 지니시고

 

《우리가 펴나가는 광폭정치는 만사람을 사랑의 한품에 안아주는 숭고한 인간애의 정치이며 민족의 모든 계급, 계층을 나라와 민족의 공동위업을 위하여 굳게 묶어세우는 가장 폭넓은 애국애족의 정치입니다.》

                                                        김정일

1

애국으로 빛나는 청춘

 

주체49(1960)년 봄 남조선에서 4. 19인민봉기가 일어났을 때에 있은 일이다.

여러 신문, 방송들은 련일 남조선인민들의 4월인민봉기소식을 전하고있었다.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서울 한성녀자중학교 진영숙학생의 유서와 희생에 대한 소식을 실은 신문을 보게 되시였다.

신문에는 이렇게 씌워져있었다.

피의 화요일로 불리운 4월 19일, 그 항쟁의 거리에서 자유와 민주의 꽃봉오리로 쓰러진 진영숙학생은 시위에 나가기 전에 자기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 없는줄 압니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저의 마음은 이미 거리로 나가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해서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건강히 계셔요. …》

진영숙학생은 이 편지를 남기고 시위대오의 선두에서 싸우다가 원쑤들의 총탄에 맞아 붉은 선혈로 항쟁의 마당을 적시며 쓰러졌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이러한 내용의 신문기사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으시였다.

신문을 읽고나신 장군님께서는 훌륭하고 기특한 소녀의 모습을 그려보시며 애절한 마음을 금할수 없으시여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시고 밤잠도 주무시지 못하시였다.

살벌한 땅에서 태여난탓에 조국의 하늘을 밝게 비치는 따사로운 해빛 한번 마음껏 받아보지 못하고 민주와 통일을 목이 타도록 웨치다가 너무도 짧은 한생을 마친 소녀를 생각하니 가슴아프시였던것이다.

이튿날 아침이였다.

일찌기 학교로 나가신 장군님께서는 교직원, 학생들에게 진영숙학생의 투쟁소식과 유서내용에 대하여 알려주시였다.

그러자 교직원, 학생 누구라 할것없이 자주와 민주, 통일을 위한 항쟁의 거리에서 용감히 싸우다 쓰러진 그의 영웅적소행에 감동을 금치 못해하였다.

심지어 어떤 학생들은 나어린 그를 앗아간 원쑤들을 규탄하며 진영숙을 살려내라고 웨치기까지 하였다.

순식간에 온 학교가 남조선파쑈정권을 절규하는 성토장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진영숙을 남산고급중학교(당시)의 명예학생으로 학생명단에 등록할것을 호소하시였다.

피의 광장에 쓰러진 그가 삭막하고 매정한 남녘땅에서 고결한 생의 흔적마저 짓밟히도록 그냥 둘수 없다는 그이의 깊은 뜻이 어린 호소였다.

교직원, 학생들은 크게 감동되여 장군님의 호소에 적극 지지찬동하였다.

그때부터 진영숙학생의 이름은 교내의 일상생활과 여러 행사들에서 산 사람처럼 호명되였고 그때마다 남녘겨레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을 지지성원하는 청년학생들의 가슴은 의로운 련대감으로 높뛰였다.

장군님의 사랑의 품이 있어 참다운 애국으로 청춘을 빛내인 남조선청년학생은 진영숙학생뿐아니다.

장군님께서는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청춘을 바친 서울대학교의 박종철, 박혜정, 한양대학교의 한영현, 연세대학교의 리한렬, 명지대학교의 강경대, 성균관대학교의 김귀정, 동국대학교의 남태현, 전남대학교의 박관현, 고려대학교의 김두황 등의 청년학생들을 공화국의 각 대학들에 명예학생으로 등록하고 명예졸업증도 수여하도록 하시였다.

하여 그들의 이름과 넋은 오늘도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남아 조국통일의 불길을 세차게 지펴주고있다.

2

통일의 날 보게 될 영화

 

주체60(1971)년 여름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 일군으로부터 풍랑으로 조난당하여 북으로 들어온 남조선어민들이 들끓는 대건설현장에 나가 흙 한삽이라도 떴으면 한다는 보고를 받으시였다.

그무렵 수도 평양에서는 천리마거리건설공사가 한창 벌어지고있었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천리마거리건설공사에 참가하여 짧은 시간이나마 북의 벅찬 현실에 발을 잠그었으면 하는 그들의 요구를 헤아려주시고 그들의 작업모습을 기록영화로 찍어두도록 하시였다.

사실 그때 관계부문 일군들은 기록영화촬영문제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따라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있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일군에게 남조선어민들의 작업모습을 찍어두면 지금 당장은 남조선인민들이 볼수 없다 하더라도 통일이 된 후 본인들은 물론 모든 남녘인민들이 뜻깊게 볼수 있을것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고 몸소 기록영화촬영가들을 천리마거리건설장에 보내주시였다.

남조선어민들은 깜짝 놀랐다.

자기들의 소망이 성취된것만도 뜻밖의 일인데 영화촬영까지 한다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한복판에나 나선것처럼 자랑스러웠다.

우리를 보라! 평양에서 거리를 일떠세우는 우리 모습이 얼마나 장한가를 온 세계가 보라!

이렇게 큰소리로 웨치고싶은 심정이였다.

장군님께서 몸소 보내주신 기록영화촬영가들이 촬영을 시작하자 온 건설장이 설레였다.

수많은 건설자들의 관심이 어민들에게 집중된 속에서 유선방송은 북남형제들의 힘찬 건설작업모습을 흥분된 목소리로 보도하였다.

휴식시간이 되면 남조선어민들과 건설자들이 한데 어울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그리고 억제할수 없는 감격에 목이 메여 울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난생처음 사람다운 대우를 받고 꿈에도 생각할수 없는 환영을 받는것만 해도 감개무량한데 기록영화까지 찍게 해주시는 장군님의 사랑에 그들은 감사의 눈물을 흘린것이다.

한 어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선생님께서 사람값에 가지도 못하는 저희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육친의 사랑을 베풀어주실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머리채를 베여 신을 삼은들 이 은혜를 어찌 갚으며 이 몸이 죽어 백골이 된들 이 은덕을 어찌 잊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였다.

《기록영화필림을 없애지 말아주십시오. 통일되면 가족들과 친척들을 데리고 평양에 와서 어버이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이 영화를 꼭 보겠습니다.》

3

금강산과 남녘동포

 

주체62(1973)년 8월 어느날이였다.

강원도안의 여러 부문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날 금강산일대를 돌아보시였다.

장군님을 맞이한 금강산은 수수천년을 내려오면서 다듬고 가꾸어온 자기의 신묘한 자태와 절경을 한껏 자랑하는듯싶었다.

그이께서는 명소와 명폭포 등 이르는 곳마다에서 동행한 일군들에게 금강산은 조선의 명산이라고 하시며 이 좋은 경치를 잘 보존하며 인민의 휴양지로 더 잘 꾸릴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일행이 장군님을 모시고 금강산의 어느 한 마루에 올랐을 때였다.

눈앞에는 천만산악이 끝간데 없이 펼쳐져있었다. 마치도 1만 2천봉우리가 기기묘묘한 제모습을 뽐내려고 키돋움하는듯싶었다.

옛날 아름다운 선녀들이 하늘에서부터 무지개를 타고 내렸다는 팔담도 보이였다.

그리고 저 멀리 분계선너머 남녘땅도 한눈에 안겨왔다.

장군님께서는 자욱한 운무속에 묻혀있는 남녘땅을 바라보시며 일군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오늘 금강산을 돌아보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이 좋은 경치를 저 남녘땅에 살고있는 우리 동포형제들에게 보여줄수 있을가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뜨거운 동포애의 정이 넘치는 말씀이였다.

기쁜 일이 하나 있어도, 좋은것을 하나 보아도 그것을 남녘겨레들과 나누고싶어하시는 그이의 심정을 잘 알고있는 일군들의 가슴은 후더워졌다.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던 장군님께서는 수령님께서 한평생 로고를 기울여오신 조국통일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하시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조국통일문제는 우리 젊은 사람들이 걸머지고 풀어나가야 한다. 나는 환갑을 맞으신 수령님께 조국통일문제는 우리들이 맡아보겠으니 더는 심려하시지 말아달라고 하였다. 조국을 통일하기 전에 편안하게 잘살아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조국과 민족앞에 떳떳할수 없다고 본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든지 량심이 없는 사람이다. …

일군들은 조선이 자랑하는 금강산의 자연풍치앞에서 남녘겨레들을 생각하시는 그이를 뵈오면서 뜨거운것을 삼켰다.

이렇듯 장군님의 심중에는 조선의 명산 금강산과 함께 남녘겨레들과 조국통일이라는 애국애족의 마음이 언제나 간직되여있었다. 하기에 북과 남사이에 화해와 협력의 넓은 길이 열렸을 때 남녘동포들부터 금강산으로 불러주시였다.

4

원산앞바다를 여섯번이나 돌고 간 배

 

주체65(1976)년 8월 중순 미제가 일으킨 판문점사건으로 하여 조선반도의 정세가 전쟁접경으로 치달아가고있을 때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해당 일군들로부터 남조선어선 《신진3》호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였다.

남조선어선 《신진3》호가 풍랑에 밀리여 공화국북반부령해에 들어왔는데 《신진3》호 선원들은 북반부에서 남조선어민들을 따뜻이 돌봐준다는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정세가 복잡한 때라 긴장해있었다.

장군님께서는 판문점사건은 미제와의 문제이고 《신진3》호는 우리의 혈육인 남조선인민들과의 문제라고 하시면서 남조선어민들을 동포애의 정을 가지고 성의를 다해 돌봐주도록 간곡히 이르시였다.

그러시고는 남조선어민들의 건강상태와 생활조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시고나서 그들이 사소한 불편도 없이 지낼수 있도록 은정어린 조치들을 취해주시였다.

일군들은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건강이 좋지 못한 선원들에 대한 치료대책을 세웠다.

선원들은 뜻밖의 사실앞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 하며 눈물을 머금었다.

이렇게 되여 고질병이 있으면서도 치료비가 없어 병고칠 엄두를 못내던 기관장을 비롯한 몇몇 선원들은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고 병을 완전히 털게 되였다.

《신진3》호 선원들은 장군님의 따뜻한 보살피심속에서 공화국북반부의 도시와 농촌, 공장과 학교들을 비롯한 여러곳을 참관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였다.

그 과정에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북반부인민들의 뜨거운 환대를 받았으며 난생처음 별천지와 같은 생활을 목격하였다.

그러는새 어느덧 추석이 가까와왔다.

추석을 앞둔 어느날 장군님께서는 선원들에게 잊지 말고 추석음식을 잘 차려주며 체육과 오락도 조직하여 그들이 민속명절을 유쾌하게 지내도록 해주라고 또다시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신진3》호 선원들은 생각도 못했던 즐거운 추석놀이까지 하게 되였다.

공화국북반부에 머무르는 기간은 그들에게 있어서 실로 꿈같은 나날이였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그들이 돌아가야 할 날이 가까와왔다.

장군님께서는 해당 일군들에게 떠나는 그들이 섭섭해하지 않게 모든 편의를 돌봐주도록 당부하시면서 배우에서 한끼만 먹으면 가닿을 길이건만 물길이니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쌀과 부식물을 풍족히 실어주라고, 가다가 회도 쳐먹을수 있게 식초와 고추장 같은것도 잊지 말고 넣어주라고 이르시였다.

떠나는 날 장군님의 친어버이사랑이 담긴 길량식과 함께 식초병과 고추장단지들을 받아안은 선원들은 그것을 어루만지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한 선원은 감격에 목메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낳은 어머니도 언제 한번 배길을 떠나는 나를 이렇게 살뜰히 보살펴준적이 없습니다. …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과 친애하는 지도자선생님께 우리모두의 감사를 전해주십시오.》

선원들은 한사람같이 두손을 높이 들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 만세!》,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선생님 만세!》를 높이 불렀다.

만세의 웨침이 메아리치는 속에 이윽고 배는 기슭을 떠났다.

《잊지 않겠습니다.》

《통일의 그날 다시 만납시다.》

멀어지는 《신진3》호 갑판우에서 이런 목소리가 끊임없이 메아리쳐왔다.

어느덧 배는 망망한 바다로 멀리 나갔다. 그런데 웬 일인지 《신진3》호는 커다란 원을 그리며 다시 부두쪽으로 되돌아오는것이였다.

부두에 다가와 머뭇거리다가 다시 배머리를 돌리였다. 가야 할 길이지만 남고만싶은 안타까움에 몸부림치듯 《신진3》호는 한동안 먼바다쪽으로 선수를 돌리고 가다가는 다시금 부두로 되돌아왔다.

이러기를 여섯번.

미제는 판문점에서 도끼를 들고 날치였지만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의 품속에서 북과 남에 이어진 혈육의 정은 끊을수 없었다.

5

수시로 알아보신 기상통보

 

주체73(1984)년 어느 봄날에 있은 일이다.

아침일찍 출근하여 일감을 펼쳐놓았던 한 일군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걸어오시는 전화를 받게 되였다.

《어제 밤 기상통보에 의하면 오늘 우리 나라의 전반적지역에서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정말 비가 오는지 확인하여보고 나에게 전화로 알려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때로 말하면 농촌들에서 한창 씨붙임을 하느라 들끓던 시기인데 그해따라 이른 봄철부터 비 한방울 떨어지지 않아 몹시 가물었다.

장군님께서 농사일때문에 몹시 걱정하시는것이라고 짐작한 일군은 곧 기상관측소에 전화를 걸었다.

관측소에서는 예보대로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다.

일군은 장군님께 그에 대해 보고드리였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반가우신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그럼 되였습니다. 시름이 놓입니다. 지금 북반부지역이건 남반부지역이건 비가 내리지 않아 큰 걱정입니다.》

점심때가 지나자 과연 대륙성저기압이 밀려오면서 오래간만에 한소나기 잘 퍼부었다.

그 일군이 창밖을 내다보며 흐뭇해하는데 장군님께서 다시 전화로 찾으시였다.

《한소나기 퍼부으니 합토가 잘되였을것 같습니다. 다락밭들에 씨붙임이 안될가봐 근심하였는데 이제는 마음이 놓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그이께서는 일군에게 다시 이런 과업을 주시였다.

《비가 우리 나라의 전반적지역에 다 오겠다고 예보하였는데 예보가 맞았는지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일군은 다시 기상관측소에 전화도 걸고 여러곳에 알아보았다.

결과 대체로 공화국북반부지역에는 많은 비가 내렸으나 남반부지역에는 적게 내렸는데 밤에 또 한차례의 비가 올것 같다는것이였다.

이제는 장군님께서 더는 걱정을 하시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일군은 그 사실을 보고드리였다.

날이 어두워졌을 때 그 일군은 급히 결론을 받을 일이 생겨 장군님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그가 사업보고를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밖에서 우뢰소리가 울리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비가 쏟아지기 전에 퇴근하셔야 하겠습니다.》

헌데 그이께서는 움직일념을 않으시고 말씀하시였다.

《비가 좀더 와야겠는데 좀더 기다려봅시다.》

일군은 왜 비가 더 오기를 기다려보자고 하시는지 가늠이 잘 가지 않았다.

관개망이 그물처럼 뒤덮인 우리 나라 협동벌에는 가물철에도 산간지대의 다락밭들과 일부 뙈기밭들을 내놓고는 씨붙임이 걱정없었다. 그리고 이날 내린 비량이면 모든 밭들을 충분히 적시고도 남을것이였다.

그런데 왜 그이께서 마음을 놓지 못하고계실가?

일군의 머리속에 피뜩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그것은 장군님께서 아까부터 우리 나라 전반적지역에서 내린 비량에 관심을 두신다는 점이였다.

그때 남조선에서도 가물이 들어 야단법석하였다.

남조선농민들의 애타는 심정을 담아 신문들에는 《아이고 비는 왜 안 오노》라는 기사가 실리는가 하면 농촌아이들까지 《비야 비야 어서 오라 참새둥지에 불났다》는 동요를 불렀다.

장군님께서 거듭 전화로 날씨를 알아보신것이 북반부지역뿐아니라 남반부지역에도 비가 내렸는가를 걱정하시여 그러신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일군은 가슴이 뜨거워올랐다.

잠시후 장군님께서는 송수화기를 드시고 어딘가를 찾으시더니 남반부지역에도 비가 오는가를 알아보라고 하시였다. 벌써 세번째 전화였다.

얼마후 남조선전역에 많은 비가 내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남녘땅에도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오.》

송수화기를 내려놓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군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여났다.

일군은 순간 눈물이 불쑥 솟구쳤다.

얼마나 남녘땅을 잊지 못해하시였으면, 얼마나 남녘동포들을 생각하시였으면 날씨 하나를 두고 그처럼 걱정하기도 하시고 그토록 기뻐하기도 하시는것인가.

장군님께서는 말씀을 이으시였다.

《우리는 남녘동포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쁜 일이 생겼을 때도 그렇고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도 그렇고 늘 남녘동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창밖으로 쏟아져내리는 비를 바라보시면서 비록 남녘땅에 비를 준것은 하늘이지만 바라던 소원이 성취되여 오늘 밤에는 발편잠을 잘것 같다고 하시였다.

만시름을 놓으시고 환하게 웃으시는 장군님을 우러르며 일군은 마음속에서 이런 웨침이 절로 터쳐나오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정녕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이시야말로 천하제일의 애국자이시다!)

6

참된 애국은 어떤것인가

7

제발 비가 멎었으면…

 

주체73(1984)년 8월 31일 밤이였다.

여러날동안 동해안지구와 평안남도일대의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날이 저물어서야 숙소로 돌아오시였다.

그해따라 늦장마가 져서 며칠째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있었다.

비뿌리는 창밖을 바라보시며 장군님께서는 깊은 상념에 잠겨계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근심어린 음성으로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비가 자꾸 내리니 남조선인민들이 걱정됩니다. 이렇게 비가 퍼부으면 남조선에 영낙없이 큰물이 집니다. 큰물이 나면 그들이 또 고통을 당할게 아닙니까.》

일군들은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밤낮으로 쏟아지는 비속을 헤치시며 인민경제 여러 부문 사업을 보살피시던 그이께서 아마 공장과 농촌의 장마철대책문제를 말씀하시리라 짐작하였는데 뜻밖에도 남녘동포들을 걱정하시는것이였다.

왕가물이 들어도, 장마가 져도 언제나 남녘인민들 생각을 하시는 장군님이시였다.

《밤이 깊어가면 그리움이 간절해지는가 봅니다.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생각만 떠오르면 내 마음은 괴롭습니다. 조국의 분렬때문에 겪고있는 남녘동포들의 불행은 나의 마음을 끝없이 괴롭힙니다.》

그이의 음성은 퍽 갈리시였다.

그이께서는 여전히 쏟아지는 폭우를 바라보시며 절절하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행복에 웃는 자식보다 불행에 우는 자식을 먼저 생각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장군님의 말씀은 계속되였다.

《나도 그렇고 동무들도 그렇고 우리모두 남녘동포들을 한시도 잊지 말고 조국통일을 앞당겨야 합니다.

남녘동포들을 순간이나마 잊으면 조국통일을 할수 없습니다. 남조선이 머리에 없는 사람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의 열정을 잃게 됩니다.

분렬된 조국땅에서 사는 참된 애국자는 남녘동포들을 항상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남녘동포들의 고통을 외면한 참된 애국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그러시면서 이제는 제발 폭우가 그쳤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거듭 외우시였다.

그날도 장군님께서는 남녘인민들을 생각하시며 온밤 잠을 이루지 못하시였다.

8

《뭐니뭐니해도 민족이 제일입니다》

 

례년에 없이 많은 비가 쏟아져내리더니 끝내 서울을 비롯한 남조선의 여러 지역에 대홍수가 휩쓸었다. 하여 단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수많은 수재민이 생겨났다.

남조선수재민들이 겪는 참상을 두고 가슴아파하시던 장군님께서는 정중히 송수화기를 드시고 위대한 수령님께 남조선수재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내주었으면 하는 의향을 말씀드리였다.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수재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내주는 조치를 취하자는 장군님의 발기를 적극 지지해주시였다.

즉시에 해당 부문 일군들의 협의회가 열리였다.

협의회에서는 수재민구호대책문제가 토의되였다.

그런데 일부 일군들속에서는 해방직후부터 공화국의 구호제의를 한번도 받아들이지 않은 전례로 보아 남조선당국자들이 이번에도 구호제의를 거부할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신심이 없어하였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어려울 때 형제라고 했는데 남조선인민들이 수해를 당하여 고충을 겪고있는데 우리가 가만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수해를 입은 남조선리재민들에게 뜨거운 혈육의 정이 깃든 구호물자를 보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러시고는 지체없이 인도주의단체의 명의로 남조선의 리재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내줄데 대한 결정을 발표하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주체73(1984)년 9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중앙위원회는 남조선수재민들을 구제할데 대한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 제32호를 채택하여 세상에 발표하였다.

《1. 서울을 비롯한 남조선의 수재지역 리재민들에게 쌀 5만석, 천 50만m, 세멘트 10만t, 기타 의약품을 구호물자로 보내기로 한다.

2. 구호물자를 남조선리재민들에게 시급히 전달하기 위하여 남조선적십자사가 우리의 인도주의적조치에 적극 협력하여줄것을 요청한다.

3. 남조선적십자사측이 우리의 동포애적결정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해당한 구호물자를 우리의 자동차와 배로 직접 실어갈것이다. …》

120여년간의 국제적십자구제운동력사에 최고기록을 남긴 구제금은 바로 한해전인 1983년에 스웨리예가 수해를 입은 인디아에 제공한 75만US$였다. 그런데 북의 구호물자는 그의 24배나 되는 1 800만US$에 해당한것이였다. 이것은 남조선당국이 최종집계하여 발표한 리재민수를 5만명으로 계산하여도 세대당 쌀 250kg, 천은 17m씩 차례지며 세멘트는 60㎡짜리 살림집을 약 3만동이나 지을수 있는 량이였다.

언제나 혈육의 정으로 남녘동포들을 생각하시는 장군님께서는 어느날 일군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남조선수재민들에게 보내는 구호물자가 많기는 많습니다. 그러나 한동포를 구원하는 일인데 구호물자가 아무리 많아도 아까울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저축해두었던것을 남조선동포들을 구제하는데 쓰지 않고 어디에 쓰겠습니까.

뭐니뭐니해도 민족이 제일입니다. 도와줄 사람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공화국의 동포애적조치가 발표되자마자 온 세계가 들끓었고 온 남녘땅이 감격에 설레이였다. 남조선수재민들은 이제야 살길이 생겼다고 하면서 서로 얼싸안고 돌아갔다.

남측이 북의 구호물자를 받아가기로 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남녘동포들을 생각하시는 수령님의 사랑은 나라가 분렬되여 40년만에 처음으로 분계선을 넘어가게 되였다고,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수령님과 우리 당의 사랑의 힘을 분계선도 감히 막을수 없다고 격정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이어 일군들에게 구호물자를 준비하여 보내주기 위한 사업에 대하여 이렇게 당부하시였다.

《남조선수재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내는것은 한피를 나눈 동포애의 마음을 보내는것인데 거기에는 한점의 티도 없어야 합니다. 알알이 고르고 오리오리 다듬어서 보내야 마음을 놓겠습니다.》

장군님의 동포애를 남조선인민들에게 전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겠다는 일군의 대답을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꼭 그래야 한다고, 뭐니뭐니해도 민족이 제일이고 혈육이 제일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하시였다.

민족이 제일이고 혈육이 제일이다!

언제나 민족을 제일로 사랑하시는 장군님의 뜨거운 민족애에 떠받들려 구호물자를 실은 1 400여대의 화물자동차와 14척의 대형짐배들이 고동을 울리며 남녘땅으로 출발하였다.

9

임당수가 전하는 사랑의 전설

 

주체73(1984)년 9월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조선수재민들에게 보내는 구호물자인 세멘트를 실은 마지막배인 《대동강》호가 인천항을 향해 남포항을 출발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였다.

밤낮을 이어가시며 구호물자보장사업을 몸소 지휘하시던 장군님께서는 마음이 놓이시는듯 해당 부문의 일군에게 며칠밤을 새웠는데 좀 쉬라고, 자신께서도 눈을 좀 붙이겠다고 하시였다.

그 일군은 며칠간 밤을 꼬박 밝히였던지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옆방에 가서 휴식을 하였다.

그로부터 몇시간가량 지났을가…

자정이 훨씬 지났을 때 한 일군이 뛰여들어와 다짜고짜로 그를 흔들어깨웠다.

《큰일났습니다. 비상사고입니다.》

《무슨 비상사고요?》

《방금 <대동강>호가 장산곶부근에서 좌초되였습니다.》

《뭐라구? …》

일군은 그만 아연실색해졌다.

장산곶이라면 옛 전설에 나오는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석에 제물로 자기 몸을 던졌다는 임당수부근으로서 물살이 사납고 암초가 많아 배군들이 피해다닌다는 곳이였다.

오죽했으면 배군들속에서 예로부터 동해에서 무수단과 함께 서해의 임당수를 무사히 지나가야 배군으로 인정받았다는 말이 전해오고있겠는가.

나라가 갈라져 40년만에 처음으로 가보는 바다길이다보니 《대동강》호가 뜻하지 않는 사태에 맞다들린것이였다.

(과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너무도 엄청난 비상사고앞에서 일군은 어쩔바를 몰라했다.

장군님께서 그토록 관심하시고 애써 마련하여 보내주시는 구호물자가 중도에서 바다물속에 잠기게 되였으니 이보다 더 큰 사고가 어디에 있겠는가.

일군은 하는수없이 장군님께 이 사실을 보고드리기로 마음먹고 그이께서 계시는 방으로 찾아갔다.

그리고는 장군님께 비상사고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보고드리였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대동강>호에 탄 우리 적십자대표일행을 다른 배에 옮겨태워야 하겠습니다. 세멘트는 다시 실어보내면 됩니다.》

그이께서 엄청난 비상사고앞에서 너무도 쉽게 대책을 세워주시는데 놀란 일군은 사태의 진상을 다시 말씀드렸다.

일군의 설명을 듣고나신 장군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시였다.

시간이 모자란다는것은 결국 불가능하다는것인데 우리에게는 불가능이란 있을수 없다. 이제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 적십자대표들을 《장산》호에 옮겨태우는것은 시간이 걸릴것도 없고 1만 2 000t의 세멘트를 배에 싣는것도 인차 할수 있다. …

일군의 생각은 복잡하였다.

그 많은 세멘트를 이제 남은 몇시간안에 어떻게 다 옮겨실어 보낸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가 무상으로 보내주는 구호물자인데 10만t의 세멘트에서 1만 2 000t쯤은 사정이 그러하여 못 보내주는것이야 어쩔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서있는 그 일군을 바라보시며 장군님께서는 확신에 넘치시여 말씀하시였다.

《당의 결심이라고 하면 우리 인민들이 반드시 해낼것입니다. 나는 우리 인민을 믿습니다. 우리는 약속한대로 남조선수재민들에게 10만t의 세멘트전량을 보내주어야 합니다.》

남녘인민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담겨진 장군님의 말씀을 받아안은 조선인민군 군인들과 인민들은 바다와 륙지에서 긴장한 전투를 벌렸다.

파도사나운 임당수에서는 인민군군인들에 의해서 적십자일군들이 무사히 《장산》호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였다.

한편 륙지에서는 화차들이 세멘트공장으로 질풍같이 달려갔고 세멘트공장 로동자들은 낮과 밤이 따로없이 전투를 벌려 세멘트를 실어보냈다.

남포에서도 역시 항의 모든 로동자, 사무원들이 떨쳐나 실려오는 세멘트들을 두척의 배에 옮겨실었다.

긴장한 전투를 벌린 결과 1만 2 000t의 세멘트를 나누어 실은 《순천》호와 《룡남산》호는 9월 30일 저녁 10시 남포항을 떠나 10월 1일 아침 인천항에 닻을 내리게 되였다.

그리하여 남조선수재민들에게 보내는 공화국의 구호물자전량은 계획된 기간안에 남측에 성과적으로 전달되게 되였다.

하기에 판문점현지에서 구호물자인도인수정형을 직접 목격한 일본의 한 기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남조선수해지역 리재민들에게 보내준 구호물자량이 세계구제력사의 최고기록으로 될수 있은것은 김정일지도자의 품이 대해같이 넓으시고 인민을 위하시는 그 심장이 거대하고 뜨겁기때문이였다.》라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외국인의 반영이 이러할진대 구호물자를 직접 받은 남녘동포들의 감동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10

특대받은 신자

 

주체74(1985)년 9월 공화국의 주동적인 발기와 성의있는 노력에 의하여 민족분렬사에서 처음으로 북과 남사이에 예술단과 고향방문단교환이 이루어졌을 때였다.

그때 북으로 넘어오는 남측의 고향방문단 성원가운데는 한 늙은 신자가 들어있었다.

실무일군들은 그도 방문단의 한 성원인것만큼 여느 성원들과 같은 방에 들도록 호실배치안을 짜놓고있었다.

물론 그 호실도 나무랄데 없이 훌륭한것이였다.

그런데 그들을 태운 렬차가 사리원을 지났을무렵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숙소배치를 다시 고려해야 한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평양에 오는 남측고향방문자들속에는 한 늙은 신자가 있다고 하는데 잘 돌봐주어야 하겠습니다. 고령의 몸으로 고향의 가족, 친척을 찾아오는 그의 생각이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남조선에서 이름있는 그 신자를 고려호텔 1등호실에 들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좋은 호텔을 지었다가 이런데 쓰지 않고 어디에 쓰겠습니까.》

장군님의 뜨거운 동포애가 담긴 말씀은 일군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주었다.

서울에서 온 나이많은 신자는 평양에 도착하여 평양고려호텔의 1등호실로 들어섰다.

그 신자는 국빈들이나 들수 있는 최고급호실을 놀라운 눈으로 휘둘러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민족을 위해 무슨 일을 했다고 북에서 이처럼 나를 최상급에서 환대해주는가.》

그러자 일군은 그에게 장군님의 말씀을 전달하고나서 그이께서는 려관을 하나 지어도 우리 인민들만이 아니라 남녘동포들을 위해서도 짓도록 하신다고, 당신들을 위한 호실인것만큼 제 집처럼 마음놓고 류숙하라고 이야기하였다.

일군의 이야기를 듣고난 신자는 너무도 감격하여 벽쪽으로 돌아서더니 손수건을 꺼내여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면서 이처럼 극진히 환대해주시는 장군님이시야말로 한없이 넓은 도량과 포옹력, 뜨거운 인정미를 지니신 위인이시라고 격정을 터뜨렸다.

남측의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성원들에게 베풀어주신 친어버이의 그 사랑, 진정 거기에는 분렬때문에 남녘동포들에게 돌려주지 못하시는 그 사랑을 방문단성원들에게 뜨겁게 안겨주시려는 장군님의 크나큰 은정이 담겨져있었다.

11

남녘음악가들이 흘린 눈물

 

주체79(1990)년 10월 14일 개성을 출발한 평양행 급행렬차안에는 평양에서 진행될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할 서울음악가들이 타고있었다.

서울에서 오는 음악가들에 대하여 료해하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들이 렬차로 평양까지 오자면 많은 시간이 걸리겠는데 그동안 지루하고 갑갑하지 않게 해야겠다고 은정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렬차안에서 소품공연을 하되 사람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주는 아이들의 공연을 하도록 하시였다.

하여 평양행 렬차안에서는 유치원어린이들의 이채로운 춤과 노래무대가 펼쳐졌다.

민족의상을 곱게 차려입은 어린이가 남녘의 음악가들에게 귀엽게 인사를 했다.

《언제면 오시려나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통일음악회에 오시는 남녘의 음악가 할아버지, 할머니들! 꿈에도 보고싶고 만나고싶었던 우리 꽃봉오리들은 꿈아닌 오늘 이렇게 만나고보니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를 만난것처럼 반가운데 웬 일인지 눈물이 자꾸자꾸 나옵니다.

선생님들! 이제부터 저희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친손자, 친손녀가 되여 평양까지 가시는 동안 춤과 노래로 기쁘게 해드리겠습니다.》

렬차안은 맑고 고운 노래가락, 춤가락들과 그에 대한 환희와 탄성으로 식을줄 몰랐다.

맑은 눈물을 똘랑똘랑 떨구며 목메여 부르는 철부지어린이들의 노래는 남녘음악가들을 울려놓고야말았다.

한피줄을 이은 겨레가 헤여져 살지 않으면 안되는 분렬의 아픔에 울고 어서빨리 하나로 합쳐 한형제로 살고싶은 열화같은 소원의 분출로 울었다.

그 소원을 안고 북남음악가들과 어린이들이 한덩어리가 되여 눈물속에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렬차안에서부터 메아리치던 노래는 북과 남, 해외가 모여 함께 부르는 범민족통일음악회에로 이어져 힘차게 울려퍼졌다.

통일음악회가 끝날무렵이였다.

장군님께서는 해당 부문 일군들을 찾아 페막연회때에 통일잔치상을 차릴데 대하여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연회장 한가운데에 조선지도형태의 연회탁을 만들고 그우에 지방에 따라 특산물과 과일, 청량음료들을 배치한 다음 삼천리강산에 통일의 축포가 터져오르는것을 상징하는 의식을 진행하며 《민요를 따라 삼천리》음악회도 열도록 장군님의 은혜로운 손길은 구석구석에까지 미치였다.

장군님께서는 이제 또다시 헤여져 수천수만리 이국땅과 허리잘린 조국땅에서 분렬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그들에게 다문 하루밤만이라도 통일의 기분을 안겨주고싶으시였던것이다.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과 은정으로 페막연회장소인 평양의 청년중앙회관에는 성대한 통일잔치상이 차려졌다.

《통일잔치상》이라는 꽃글장식을 부각한 조선지도모형으로 된 대연회탁에 출신도별로 앉은 북과 남, 해외동포음악가들은 너무도 희한한 광경을 보며 감탄하였다.

함경북도의 특산물인 회령백살구, 군감자, 감자떡, 함경남도의 사과, 털게, 낙지순대, 량강도의 백두산샘물, 량강술, 들쭉술, 들쭉단물, 평안북도의 노치떡, 녹두지짐, 송편, 설기떡, 자강도의 강계포도술, 인풍술, 과줄, 황해남북도의 찰떡, 오곡밥, 강원도의 금강샘물, 감, 대게, 왕문어회, 경기도의 약밥, 인삼정과, 충청남북도의 깍두기, 경상남북도의 소고기매운탕, 콩나물, 전라남북도의 새끼돼지찜, 제주도의 해삼탕, 고사리, 도라지, 울릉도의 게, 그밖에 개성고려인삼술과 대동강의 유명한 숭어탕 등 수십가지 수산물, 과일, 주류들이 올랐다.

산해진미가 다 오른 잔치상이였다.

음식도 통일이였고 마음도 통일이였다.

혈육의 정, 통일맞이의 기분속에 《민요를 따라 삼천리》공연이 펼쳐졌다.

너도나도 자리를 털고일어나 자기 도의 민요들을 불렀다.

《양산도》, 《풍구타령》, 《까투리타령》, 《경상도아리랑》, 《돈돌라리》, 《노들강변》 등 유구한 민족문화를 자랑하는 민요들을 부르며 춤을 추었다.

서로서로 손을 맞잡고 흥겨운 가락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이는 그 모습들은 7천만 온 겨레가 통일광장에 모여 춤추고 노래하는듯 했다.

참으로 위대한 장군님은 민족분렬의 고통을 겪고있는 우리 겨레의 아픔과 희망을 깊이 헤아리시며 친어버이 심정으로 온갖 은정을 다 베풀어주시는 은혜로운 사랑의 태양이시였다.

12

죽어서도 영광을 받아안은 애국렬사

 

위대한 장군님께서 남달리 아끼시던 일군들가운데는 김병식도 있다.

남해의 다도해기슭에서 태여나 망국민의 설음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갔던 그가 총련중앙상임위원회 책임일군으로, 그후 공화국의 품에 안겨 국가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면서 통일애국위업에 헌신할수 있은것은 그의 운명을 보살펴주고 빛내여주신 장군님의 하해같은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때문이다.

13

첫 상봉

 

총련중앙상임위원회 제1부의장으로 사업하고있던 그가 공화국적십자대표단 자문위원으로 조국에 온것은 주체61(1972)년 여름이였다.

그는 어버이수령님의 접견을 받은데 이어 몸소 숙소에 찾아오신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뵈옵는 뜻밖의 행운을 지니게 되였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자기 앞으로 다가오시는 장군님을 뵈옵는 순간 그는 꼭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사실 일본땅을 떠나기 전부터 이번에 조국에 가면 장군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뵈왔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 그였지만 그이께서 이렇듯 숙소에까지 찾아오실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반갑습니다.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몸은 불편하지 않는가, 식사랑 제대로 하는가, 숙소가 마음에 드는가고 따뜻이 물어주시였다.

《이처럼 훌륭한 숙소에 들게 되여 황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 숙소로 말하면 장군님께서 친히 잡아주신 곳이였다.

얼마전 총련일군대표단의 숙소준비정형에 대하여 알아보시던 그이께서는 일군들에게 이번에 김병식제1부의장이 단장으로 온다고 하시면서 좋은 곳에 숙소를 정해주시였던것이다.

이윽고 그들의 체류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장군님께서는 오늘 저녁 1부의장을 환영하는 연회가 있다고 알려주시면서 인사나 나눌겸 들렸다고 정겹게 말씀하시였다.

《조국에서 기쁜 나날을 보내기를 바랍니다.》

그처럼 뵙고싶었던 장군님과의 상봉은 아쉽게도 잠간사이에 끝났지만 그는 첫 상봉에 벌써 그이께 완전히 매혹되였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속에는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계시는 조국에 남고싶은 생각이 더욱 커갔다.

그러던 어느날 장군님께서는 일군들로부터 하나의 문건을 받으시였다.

평양에 체류하고있는 그가 이번 기회에 아예 조국에 남겠다고 제기했다는것이였다.

그는 총련의 중요직책에서 일하는 일군으로서 일본정계와 남조선 그리고 기타 사회주의나라들에도 널리 알려진 사람이였다. 그런것으로 하여 그는 총련에서 할 일이 많았다.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시급히 사연을 알아보도록 하시였다. 이 과정에 그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것이 하루아침사이에 일어난 마음속충동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되시였다.

백골이 진토가 될 때까지 위대한 두분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강렬한 호소, 아무 일을 해도 좋으니 평양에 남게 해달라는 절절한 부탁 그리고 자기는 원래부터 김형직선생님과 위대한 수령님을 마음속으로부터 흠모해왔다는것, 행로가 바뀌여 그렇지 자기의 넋이 평양에 와있은지는 이미 오랬다는것, 그러니 이제는 응당 육체도 조국에 영주해야 한다는 그의 드놀지 않는 신념은 장군님의 심중을 크게 감동시키였다.

비록 한번밖에 만나지 못하셨지만 장군님께서는 그의 소원을 풀어주고싶으시였다.

그러던 어느날 당중앙위원회 일군이 그가 든 숙소로 찾아왔다.

《기뻐하십시오. 소원이 성취되였습니다.》

《예?!》

이렇게 되여 그는 그리도 소망하던 어머니조국의 품, 수령님과 장군님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

14

《통일옥새》

 

언제인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남녘땅에 한번도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다도해에 가보고싶습니다.》

다도해가 고향인 김병식은 장군님의 그 필생의 념원을 풀어드리기 위한 사업에 모든 정력을 다 쏟아부었다.

그에게는 조국통일이 곧 고향으로 가는 길이였다.

언젠가 그는 해외에 출장갔다가 기자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선생님은 고향이 다도해기슭이라는데 한번 가보고싶지 않은지요?》

《꿈결에도 가보고싶소. 그러나 그것은 통일이 되여야 진정한 나의 고향이요. 지금 나의 고향은 평양이요.》

그는 고령의 몸이지만 수많은 나라들에 나가 우리 인민의 통일의지와 우리 공화국의 자주적인 조국통일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과감하고도 줄기찬 투쟁을 벌렸다.

그에게는 시간이 귀했다.

할 일은 많고많은데 한살두살 나이가 많아지고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것이 한스러웠다.

그의 건강상태는 나빴다. 그의 병은 로환이 겹치면서 치료불응성빈혈이라는 진단으로 결론되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병때문에 여간 걱정하지 않으시였다. 그의 병치료를 위하여 중앙병원의 권위있는 의사들로 강력한 의료진을 무어주신 그이께서는 이 세상에서 좋다는 약은 다 구해 보내주시고 외국에 가서도 치료를 받을수 있도록 온갖 대책을 다 세워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서거로 인한 정신적타격은 그의 병을 걷잡을수 없게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 자기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식하였다.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끝에 장군님께 자기의 마지막충정을 담은 선물을 올리기로 결심하고 선물제작에 달라붙었다.

이렇게 되여 정방형옥돌통안에 갓모양의 옥돌지붕을 씌우고 그안에 옥돌로 된 인장을 넣은 선물 《통일옥새》가 마련되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지성어린 선물에서 7천만 우리 겨레의 념원을 읽으시였고 감사와 함께 친필서한을 보내주시였다.

몇달후 운명의 시각을 예감한 그는 가까스로 펜을 부여잡고 이런 글을 남겼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 정말 뵙고싶습니다.

부디 만년장수하십시오.

                                        김병식 올》

마지막 《림》자는 종시 쓰지 못하게 된 이 편지는 16절지 종이 한장을 꽉 채웠다.

그는 가족들에게 장군님을 고향 다도해에 모시지 못하는 자신의 심정을 안타까이 토로하고 운명하였다.

그가 운명의 시각에 남긴 유언과 편지원문을 몸소 보아주신 장군님께서는 더없이 애석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그는 한생을 정말 충신의 넋으로 살았다고, 이렇게 몇자밖에 안되는 편지를 쓰자니 본인이야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고 하시면서 한밤을 꼬박 새우시며 장례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 세심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리고 며칠후에는 조국통일을 위하여 한생을 바쳐온 그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나라의 자주적통일을 위한 투쟁에 헌신한 통일애국렬사들만이 받아안을수 있는 조국통일상.

김병식은 생을 마치고서도 민족의 어버이이신 우리 장군님의 다함없는 사랑속에 조국통일상수상자라는 영광을 받아안았다.

15

장군님과 통일애국투사들

16

신념과 의지의 화신 리인모

 

주체81(1992)년 11월 12일이였다.

일군들에게 당, 국가, 경제사업에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하여 가르치심을 주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혁명의 년대기에 기록된 잊을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참으로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이날 장군님의 회고는 조선인민군 종군기자였던 비전향장기수 리인모에게로 이어졌다.

《리인모는 신념과 의지의 화신입니다. 세상에 리인모처럼 신념이 확고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그이께서는 그가 전향문 한장만 쓰면 오래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고생하지 않을수도 있었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고, 그가 무슨 힘으로 수십년동안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혁명가의 지조를 꿋꿋이 지켰겠는가고, 그것은 그가 당과 수령이 있는 한 우리 혁명은 승리하고 조국은 반드시 통일된다는것을 믿고있었기때문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장군님께서는 리인모의 수기를 놓고 보아도 신념과 의지는 저절로 생기는것이 아니라 사상적충격과 축적을 통하여 생기고 굳어진다는것을 알수 있다고 하시며 혁명가로서의 그의 경력을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그는 일찌기 김형권선생님이 진행한 파발리경찰관주재소 습격을 목격하였고 항일무장투쟁의 영향을 받았으며 해방후 수령님의 은덕으로 땅을 분여받은 농민들의 행복한 생활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아마 그가 거기에서 큰 사상적충격을 받았던것 같다. …

장군님께서는 우리는 당원들과 근로자들에게 위대한 수령, 위대한 당이 있는 한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깊이 체득시켜 그들이 참다운 혁명가들처럼 어떤 역경속에서도 굴함없이 주체혁명위업, 사회주의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억세게 싸워나가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백두산위인들을 받들어 수십년간의 모진 옥중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위대한 수령을 모시였기에 우리 조국은 반드시 통일된다는 불굴의 신념과 의지를 지니고 혁명가의 지조를 끝까지 지킨 리인모.

위대한 령장의 품속에서 그는 이렇게 재생의 활력을 찾았고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통일운동사에 이름을 빛내이게 되였다.

17

두 운명이 말해주는것

 

주체83(1994)년 2월 28일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을 방문한 총련의 한 책임일군과 신념과 의리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담화를 나누시다가 총련에서 보내여온 새털이불에 대한 이야기에로 화제를 돌리시였다.

나는 지난해에 총련중앙상임위원회에서 나에게 선물한 새털이불을 34년동안이나 차디찬 감방에서 떨면서 고생을 한 리인모동지가 남은 여생이나마 폭신한 새털이불을 덮고 쉬면 나의 아픈 마음이 좀 나을것 같아 그에게 보내주었다. …

《리인모동지에게 주셨단 말씀입니까?》

퍼그나 놀라와하는 총련일군을 바라보시며 장군님께서는 말씀하시였다.

《그렇습니다. 리인모동지가 지난해에 쓴 헌시가 바로 그 새털이불을 받고 쓴것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수십여년간 적후에서 싸우다 승리하고 돌아온 전 조선인민군 종군기자에게 하늘땅이 넘치게 사랑을 부어주시고도 모자라시여 70만재일동포들의 지성이 어린 새털이불마저 그에게 안겨주신것이다.

장군님께서는 리인모동지뿐아니라 남조선에 있는 다른 비전향장기수들도 데려와야 한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는 이 문제를 혁명의 길에서 우리 당을 받들어 싸운 동지들에 대한 혁명적의리로 간주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지난해에 준전시상태가 선포된 매우 긴장하고 복잡한 정황속에서도 리인모동지를 데려올 결단을 내리고 무사히 돌아오도록 한것은 바로 이런 의리심으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고 말씀하시다가 리인모동지에 대한 생각을 할 때면 김일성종합대학시절에 읽은 책이 련상된다고 하시며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였다.

그 책에는 나뽈레옹이 1812년에 로씨야를 점령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들이친 이야기가 씌여져있는데 그때 프랑스병사들이 모스크바전투에서 많이 죽거나 포로되였다. 로씨야사람들은 프랑스포로들을 감옥에 걷어넣었다. 후에 나뽈레옹이 망하여 정배살이를 가고 부르봉왕조가 들어앉았는데 로씨야사람들이 나뽈레옹때 포로한 병사들을 데려가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부르봉왕조는 나뽈레옹때의 포로들은 모르겠다고 하면서 돌려받는것을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포로들은 로씨야감옥에서 근 30년동안이나 지내면서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그중 한 병사가 성새로 된 감옥이 무너진 빈터우에 자기 조국을 그리며 농사를 지으면서 혼자 어렵게 삶을 이어가는 이야기로 엮어져있었다.

조국과 정치가의 버림을 받은 프랑스포로병들의 비극적운명이 눈물겹게 안겨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려주고나신 장군님께서는 말씀을 이으시였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강한 충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프랑스병사들의 처지가 왜 그렇게 되였는가. 어쩌면 같은 제 나라 사람인데 그렇게 내버릴수 있는가. 그때 나는 애국주의와 인간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참으로 많은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그것은 그들이 옳은 령도자와 좋은 제도를 만나지 못한탓이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책에 씌여진 하나의 사실에서도 위대한 철리를 도출해내시는 고귀한 말씀이였다.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떠받들린 통일애국투사의 빛나는 운명과 버림받은 프랑스포로들의 비극적운명이 두 극점으로 갈라져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있었다.

서로 다른 운명이 력사의 조명속에서 말해주는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운명은 나라와 민족을 이끄는 령도자의 사상과 도덕의 높이에 의하여 종당에 광명의 봉우리에 오르기도 하고 암흑의 나락에 떨어지기도 한다는 철리이다.

18

《모두 데려와야 합니다》

 

력사적인 평양상봉이 있은 때로부터 10여일이 지난 주체89(2000)년 6월 28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에게 비전향장기수귀환과 관련하여 또다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우리는 수령님과 당을 믿고 수십년동안 형언할수 없는 악형과 박해속에서도 혁명적지조를 지켜온 비전향장기수들을 모두 데려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입니다.》

혁명적신념과 량심을 지켜 수십년세월 꿋꿋이 옥중생활을 이겨낸 비전향장기수들을 생각하시는듯 장군님의 안광에는 추연한 빛이 어려있었다.

일군들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력사적인 평양상봉때 몸소 비전향장기수귀환문제를 제기하시고 그것을 6. 15북남공동선언의 중요한 조항의 하나로 명문화하도록 하심으로써 오랜 세월 민족의 아픔만을 더해주던 귀환문제에 종지부를 찍으신 장군님. 나라의 천만대소사를 돌보시는 바쁘신 속에서도 비전향장기수귀환문제를 한시도 잊지 않으시고 그후에도 여러차례나 거듭되는 가르치심을 주시고 여러가지 실무적인 조치들도 련이어 취해주시여 이제는 그들의 귀환문제가 기정사실로 되였건만 여직 마음을 놓지 못하시는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의 생각을 읽으신듯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가 말씀을 이으시였다.

인간으로서 최악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30~40년동안 지조를 지킨다는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향하겠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감옥살이를 면할수 있었지만 비전향장기수들은 그 어떤 유혹이나 강압에도 굴하지 않았다. …

이 시각도 장군님의 품에 안길 날만 손꼽아 기다릴 통일애국투사들…

그들에 대한 애정이 그이의 어조에서 후덥게 안겨왔다. 당과 수령을 믿고 수십년세월 혁명적지조를 지켜온 비전향장기수들을 귀환시키는것은 혁명가들의 숭고한 의리임을 뜨겁게 새겨주는 장군님의 곡진한 당부가 일군들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들이 설사 하늘끝에 흩어져있다 해도 기어이 자신의 곁으로 데려오시려는것은 장군님의 확고한 결심이였던것이다.

장군님의 당부의 말씀이 일군들의 생각을 깨우며 다시 울렸다.

비전향장기수들을 한꺼번에 수십명이나 데려오는것은 지금까지의 력사에 있어본적이 없는 일이며 오직 우리 나라에서만 있을수 있는 일이다. 비전향장기수들을 데려오면 최상으로 우대해주며 그들을 높이 내세우고 자랑하여야 한다. …

일군들은 자못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이의 말씀을 새겨안을수록 귀환문제는 결코 비전향장기수들을 조국의 품으로 데려오는가 마는가 하는 실무적사업이 아니라 살아있는 통일애국투사들에 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의리를 지키는 성스러운 투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19

고맙습니다, 장군이시여!

 

수십년세월 당과 수령에 대한 혁명적의리와 신념을 지켜 불사신마냥 싸운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은 열화와도 같고 절대적이다.

주체90(2001)년 6월 6일에도 장군님께서는 비전향장기수들의 생활정형을 보고받으시고 은정깊은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비전향장기수들이 남조선에 있을 때나 당의 품에 안긴 지금이나 언제나 그들을 잊지 않고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비전향장기수들은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이고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들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들!

전사들의 삶을 영광의 절정에 높이 내세워주시는 말씀이였다.

장군님께서는 깊은 회억에 잠기시여 자신께서는 남조선에서 비전향장기수들을 우리 당의 품으로 데려오는것을 령도자가 전사들에게 베풀수 있는 가장 숭고한 동지적사랑으로, 혁명적의리로 간주하고 그들을 데려오도록 온갖 조치를 다 취해왔다고, 그들을 당의 품에 데려왔으니 마음이 놓인다고 조용히 뇌이시는것이였다.

그이의 말씀을 받아안는 일군의 가슴은 후더워났다.

비전향장기수들의 생사여부가 알려진 때로부터 한시바삐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신 장군님.

력사적인 6. 15북남공동선언이 채택된 직후에 벌써 비전향장기수들이 돌아오면 그들이 청춘을 되찾고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도록 해주자고 뜨겁게 말씀하시며 그 준비사업을 잘하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시고 그들이 도착한 이후에는 당의 사랑이 그대로 가닿도록 각별한 관심을 돌려오신 그이이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수십년세월 옥중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고초를 겪은 그들에게 고급살림집과 함께 계절에 따르는 옷과 생활필수품에 이르기까지 일식으로 마련해주시고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그들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시려고 강력한 의료진과 고급약재, 귀중한 보약들을 아낌없이 보내주시였다. 그리고 피흘리며 지켜싸운 조국의 아름다운 산천과 약동하는 현실을 마음껏 보고 즐기도록 눈물겹도록 고마운 조치들을 끊임없이 취해주시였다.

어버이장군님의 그렇듯 극진한 보살피심속에 비전향장기수들은 건강을 회복하고 잃었던 청춘을 되찾았으며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되였다.

하건만 우리 장군님께서는 이 시각도 전사들에게 못다 주신 사랑이 있으신듯 그들의 생활에 각별한 관심을 돌리시는것이였다.

하기에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인 비전향장기수들은 그이의 초상화를 우러러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심장으로 웨쳤다.

-고맙습니다, 김정일장군이시여!

20

축복

 

주체91(2002)년 여름 온 나라에 경사가 났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마련하여주신 사랑의 보금자리에서 한 비전향장기수가정이 꽃같은 딸을 보았던것이다.

그런데 우리 장군님께서 친히 애기의 이름까지 지어주시였으니 이런 경사가 또 어디에 있을것인가.

어버이장군님께서 친히 이름지어주신 옥동녀를 저저마다 안아보며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축하해주는 비전향장기수들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죽음의 지경을 눈물 한점 없이 억세게 걸어온 통일애국투사들이였지만 육친의 정으로 흐르는 령도자의 이 고귀한 은정에는 격정에 못이겨 울고웃었다.

비전향장기수동네뿐이 아니였다.

온 나라가 이 소식에 접하고 흥성이였다.

비전향장기수 리재룡동지는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기여 비로소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난생처음 자식을 보게 되였다.

남쪽의 교형리들은 《빨갱이들은 씨종자까지 말려야 한다.》며 전기고문 등 온갖 악형으로 비전향장기수들의 육체를 파괴하여 인간페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30년세월 인간의 모든것을 감방에서 짓밟히우고 늙은 총각으로 버림받았던 그는 오늘의 현실이 너무도 꿈만 같아 잠을 이룰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장군님에 대한 고마움에 겨워 감격의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남쪽의 감방에서 페인이 되여 출옥하였을 때에는 비전향장기수들의 병구환을 위하여 사랑의 불사약을 보내주시고 은혜로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긴 후에는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도록 최상의 치료대책을 세워주시고 갖가지 보약까지 보내주신 어버이장군님이시였다.

그이의 하늘같은 은덕에 재생하여 자식복까지 받아안았으니 어찌 감사의 정에 사무치지 않으랴.

장군님의 친어버이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들부부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깨끗한 량심과 지조를 바치며 딸자식을 훌륭히 키워 그이의 선군위업을 받들어가는 역군으로 억세게 준비시킬 마음속맹세를 가다듬었다.

행복의 보금자리에서 난생처음 꽃같은 딸을 보게 되였으니 그 이름을 어떻게 달가.

밤하늘의 별천지처럼 많고많은 이름들중 이 세상 제일 아름다운 이름을 고르고 또 고르며 비전향장기수동네는 잠들줄 모르고 설레이였다.

진주보석같은 이름들을 지어놓고 이것을 고를가 저것을 고를가 하며 망설이던 끝에 그들부부는 친어버이마냥 못견디게 그리운 장군님을 우러렀다.

마침내 그들부부는 어버이장군님께 가슴속에 끓어넘치던 감사의 정을 아뢰이면서 딸애의 이름을 지어주시였으면 하는 소청을 담은 편지를 삼가 드리였다.

장군님께서는 선군혁명령도의 그 바쁘신 속에서도 이들이 올린 편지를 보아주시고 은정어린 사랑의 친필을 보내주시였다.

 

《온 나라 인민들의 축복속에 태여난 애기이름을 축복이라고 지어줍시다

김정일

2002. 7. 23》

 

혁명의 령도자가 전사에게, 위대한 스승이 제자에게, 자애로운 어버이가 자식에게 줄수 있는 이보다 더 큰 축복과 사랑이 어디에 또 있으랴.

축복이!

온 나라 방방곡곡에서 그 이름이 사랑스럽게 불리웠다.

한가정에 안겨진 축복만이 아니였다.

태양의 축복을 받은 축복이!

세상이 부러워하는 이름이기도 하였다.

21

겨레의 불행을 두고

 

주체84(1995)년 6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해당 일군으로부터 서울 삼풍백화점이 무너져내려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였다.

그이께서는 뜻밖의 사고로 남조선인민들이 겪고있을 불행이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나라의 전반사업을 돌보시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그 경위와 피해정형에 대해 여러차례 알아보시였다.

파괴된 삼풍백화점으로 말하면 날림식으로 짓다나니 그 안전성이 담보되지 못한 건물이였다.

거기에 사람들이 상점을 제일 많이 리용하는 퇴근시간에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러다보니 물건을 사려고 이 상점을 리용하던 가정주부들이 수백명씩이나 페허속에 묻히게 되였다.

구체적인 사실자료들을 료해하고나신 장군님께서는 해당 일군을 전화로 찾으시여 저녁시간에 물건사러 나왔던 가정부인들이 수백명이나 묻혔다니 이런 큰 변이 어디 있는가고, 숱한 아이들이 어머니를 잃고 울고있을텐데 그애들이 누구보다도 불쌍하게 되였다고, 정말 가슴이 아파 잠을 이룰수가 없어서 전화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일군은 아무 대답도 드릴수가 없었다.

그이께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였으면 그 짧은 새벽잠마저 잊으시였겠는가.

정녕 겨레의 불행을 두고 그리도 마음쓰시는 장군님의 뜨거운 인정미는 그 누구도 따를수 없고 그 어디에도 비길수 없는 한없이 숭고한것이였다.

이렇듯 위대한 장군님께서 남녘인민들이 당하는 불행을 두고 끼니도 건늬시고 잠도 이루지 못하는 밤이 그 얼마인지 모른다.

22

부인과 함께 온 목사

 

위대한 수령님의 서거 1돐을 맞으며 금수산기념궁전 (당시) 개관식에 나오신 어버이장군님께 작은 키에 소복단장을 한 백발의 할머니가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였다.

장군님께서는 무척 기다리신듯 녀인의 손을 꼭 잡아주시였다.

그 녀인은 사선을 헤치고 평양에 들어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김일성주석님은 통일의 구성이시라고, 통일은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이라고 하면서 굴함없이 싸우다 먼저 떠나간 남조선 문익환목사의 부인이였다.

이번에는 그가 수령님의 서거 1돐 추모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남편이 걸었던 길을 따라 온것이였다.

장군님의 품에 안겨 하많은 생각과 이름 못할 격정에 흐느끼던 할머니는 이윽해서야 마음을 다잡으며 옷매무시를 정중히 했다.

그리고 장군님께 말씀드렸다.

《남쪽민중의 심정을 담아 김일성주석님을 조상합니다.》

그이께서는 주름이 가득 얽혀진 녀인의 손을 다시금 뜨겁게 잡아주시며 갈리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나는 녀사께서 수령님의 서거 1돐에 즈음하여 수령님의 령전에 인사를 올리기 위해 신상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평양을 방문하신데 대하여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러시고는 녀사가 이번에 문익환선생이 수령님을 만나뵈올 때 꼈던 안경과 반지를 몸에 소중히 품고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몹시 감동되였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는 녀사가 혼자 온것이 아니라 문익환목사와 함께 왔으며 두분이 위대한 수령님께 올리는 남조선인민들의 인사를 안고 온것으로 생각한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마디마디에 인정이 철철 넘치는 그이의 말씀에 할머니는 어깨를 들먹이였다.

사실 위대한 수령님의 서거 1돐이 가까와오자 남편의 사진앞에 못박혀있던 할머니는 결연히 평양길에 오르면서 남편의 그 유물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장군님께서 먼저 간 남편도 평양으로 함께 간다는 심정에서 그의 유물을 소중히 안고 온 늙은이의 남모르는 속마음까지 깊이 헤아려주시니 할머니는 솟구치는 격정을 묵새길수 없었다.

통일애국의 길에 한몸바친 사람들을 영원히 품에 안아 내세워주는 민족의 해님을 뵈왔다는 환희가 그의 가슴속에서 끓어번졌던것이다.

이날은 주체84(1995)년 7월 8일이였다.

23

살아있는 렬사들

 

주체87(1998)년 9월 19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신미리에 자리잡고있는 애국렬사릉을 찾으시였다.

부르면 금시 땅을 박차고 일어설것만 같은 잊을수 없는 애국렬사들…

그들의 생전의 모습을 방불히 형상한 돌사진들을 차례로 돌아보시던 장군님께서는 《여기에 오니 잊을수 없는 사람들을 다 만나보게 되는구만! 모두가 살아있는것만 같소. 돌사진을 아주 잘 만들었습니다.》라고 하시며 만족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오늘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렬사들의 얼굴을 다 보고 가자고 하시면서 층층으로 이어진 렬사릉의 분묘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시였다.

사회주의조국의 강화발전과 통일을 위해 한생을 바친 애국렬사들과 마음속대화를 나누시는듯 렬사들의 돌사진앞에서 걸음을 멈추시며 오래도록 눈길을 떼지 못하시는 어버이장군님.

당과 혁명에 무한히 충직한 동무들이였다고, 한창 일할 나이들에 너무도 일찌기 우리곁을 떠나간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고 갈리신 음성으로 뇌이시는 그이를 우러르며 동행한 일군들은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장군님께서 그 많은 돌사진들을 빠짐없이 돌아보시는 사이에 어느덧 릉에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장군님께서는 발길을 떼지 못하시였다.

승용차의 전조등불빛을 비쳐가면서까지 나머지 분묘들을 다 돌아보신 장군님께서는 릉을 내려서시다 또다시 걸음을 멈추시고 아쉬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오늘 애국렬사릉을 돌아보니 빠진 사람들이 더러 있는것 같습니다. 당과 수령을 위하여 한생을 값있게 산 렬사들을 모두 애국렬사릉에 안치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시고는 누구누구도 혁명에 끝까지 충직한 일군이였는데 그들을 여기에 다 안치하고 돌사진을 해주자고 하시며 조국의 통일독립과 사회주의건설에서 세운 그들의 위훈을 우리 당과 인민은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렬사릉에서 돌아오신 그날 저녁 장군님께서는 마치 오래동안 헤여졌던 사랑하는 전사들을 만나보고 온 기분이신듯 이번에 애국렬사릉에 렬사들의 돌사진을 새겨붙이니 릉의 면모가 달라졌다고 못내 만족해하시며 일군들에게 물으시였다.

《동무들도 모두 가보았겠지?》

장군님의 다정한 물으심에 일군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저, 사실은 짬을 낼수 없어서…》

그러자 환하던 그이의 안색이 순간에 어두워졌다.

장군님께서는 서운함을 금치 못하시며 애국렬사릉에 돌사진을 새겨붙인것을 알면서도 아직 가보지 않은것을 보니 동무들에게 혁명적의리와 동지애가 부족한것 같다고, 우리는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사들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며 이렇게 타일러주시였다.

조선혁명가들은 혁명적의리를 목숨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참된 인간들이다. 이 숭고한 도덕의리에 기초하여 우리의 일심단결이 이룩되였고 조선혁명의 자랑찬 력사가 창조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마련해주신 혁명적의리의 전통을 빛나게 계승발전시키고있기에 우리 당이 강하고 우리 혁명이 필승불패이다. …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정을 담아 일깨워주시였다.

《다들 애국렬사릉에 가보시오. 동무들이 자주 찾아가면 먼저 간 동지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장군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긴 일군들은 그후 심각한 자책속에 먼저 간 렬사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뜨겁게 부르며 지체없이 렬사릉으로 향하였다.

장군님을 우러러 사열받듯 영생의 언덕우에 대오를 짓고 선 렬사들에게 그 사연을 지체없이 전하고싶어, 영원한 삶을 안겨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의리에 대한 이야기를 밤이 새도록 함께 나누고싶어…

24

칠보산송이버섯전설

 

주체89(2000)년 추석명절때였다.

추석을 계기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평양에 왔다간 남조선의 수뇌상봉일행과 언론사대표단 성원들, 현대그룹 정주영명예회장일행 등 267명에게 1인당 10kg의 칠보산송이버섯을 보내주시였다.

이외에도 그이께서는 평양에 와보지 못한 64명의 각계 인사들에게도 똑같이 칠보산에서 채취한 진귀한 송이버섯선물을 보내주시는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끊임없는 선군혁명령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어느날 인민군군인들이 칠보산에서 첫물송이버섯을 많이 땄다는 보고를 받으시였다.

조선의 명산 칠보산의 송이버섯은 그 맛과 향기가 독특한것으로 하여 예로부터 유명하였다. 하기에 김대중《대통령》의 부인도 력사적인 평양상봉시 국방위원회명의로 차린 오찬석상에 나온 송이버섯료리를 보고 귀한것이라고 부러워하였다.

장군님께서는 그때 평양에 온 모든 남측성원들에게 칠보산에서 나는 첫물송이버섯을 선물로 보내주겠다고 하시였으며 제2차 북남상급회담 대표로 왔던 통일부 장관에게도 추석때 수뇌회담수행원들과 언론사대표들에게 송이버섯을 선물하겠다고 또다시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추석을 맞으며 남조선사람들이 민족의 향취를 느끼게 하고 우리의 마음도 전하게 해야 한다고 하시며 이처럼 송이버섯을 선물로 보내주시였던것이다.

추석을 맞으며 민족의 향취 그윽한 첫물송이버섯을 받아안은 남조선의 각계 인사들은 그 송이버섯마다에 슴배여있는 장군님의 고결한 인정미와 하늘같은 겨레사랑, 민족사랑의 정이 알알하게 닿아와 고마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송이버섯을 전달받은 현대아산 정몽헌회장은 추석이 지난 어느날 금강산지구를 현지지도하시는 장군님을 만나뵙는 자리에서 그이께 추석때 저희들에게 너무 좋은 송이버섯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정몽헌회장이 올리는 감사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주신 장군님께서는 송이버섯이 남쪽에 가는 기간에 선도가 떨어지지 않았는가고 물으시였다.

정몽헌회장과 일행은 그이께 선도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고, 향기가 그대로 있었다고, 송이버섯상자를 보니 역시 칠보산의 송이버섯이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올리였다.

현대의 한 관계자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것이라고 하면서 칠보산송이버섯을 은박지에 싸서 현대아산 직원 100명에게 다 나누어주었다고 말씀드렸다.

이렇게 되여 송이버섯을 전달받은 당사자들은 물론 그 친지들도 장군님의 따뜻한 사랑과 각별한 은정을 가슴쩌릿하게 느낄수 있게 되였다.

그후 남조선의 각지에는 장군님의 크나큰 은정을 전하는 칠보산송이버섯전설이 생겨나 널리 전해졌다.

남조선언론들은 《맛있다. 칠보산송이버섯》 등의 제목으로 송이버섯에 깃든 뜨거운 사연을 대서특필하였다.

남녘동포들은 칠보산송이버섯이야말로 특유의 향과 맛, 섬세한 섬유질을 가진 최고식품으로서 내외에 《가을의 미각》이라고 소개될만큼 명품중의 명품이라는것, 칠보산은 《함북의 금강》으로 불리우는 명산이라는것, 북에서는 이미 1976년에 이 산을 자연보호구로 정하였다는것, 위대한 장군님께서 옛날에는 5대명산을 꼽았지만 로동당시대에는 6대명산을 꼽고 칠보산을 단연 첫자리에 놓아도 손색이 없을것 같다고 높이 평가하시였다는것 등 저저마다 칠보산송이버섯과 칠보산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것은 장군님에 의해 생겨난 칠보산송이버섯전설이였다.

25

《각하》라는 말을 쓰지 않은 평양상봉

 

주체89(2000)년 민족분렬사상 처음으로 진행되는 력사적인 평양상봉을 준비하고있던 때였다.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공화국북반부를 방문한 남측 특사를 몸소 만나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남측 특사에게 평양상봉과 관련한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고나서 돌아가면 《대통령》에게 이번 상봉과 회담에서 서로 《각하》라는 말을 하지 말데 대하여 이야기해달라고 하시면서 나는 《대통령께서》라고 하고 그분은 나보고 《위원장께서》라고 하면 될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남측 특사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각하》라는 말은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에 대한 존칭의 뜻으로 부르는 부름말로서 외교의례상관례로 되여있다.

하지만 이 부름말에는 존경의 뜻을 나타내면서도 격식과 간격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에 비해 《께서》라는 말은 웃사람에게 존경심을 표시할뿐아니라 친근감도 강하게 느끼게 한다.

그이의 말씀속에는 격식을 싫어하시고 김대중《대통령》과 같은 민족, 같은 동포로서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시려는 장군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있었다.

남측 특사는 장군님께서 지니신 한없이 고결한 도덕성과 뜨거운 동포애에 감동을 금치 못해하였다.

이렇듯 말을 한마디 해도 어떻게 하면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에 이바지하게 하겠는가 하고 마음쓰시는 장군님의 의도에 따라 평양상봉에서는 《각하》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게 되였다.

26

한 남녘녀성이 받아안은 영광

 

주체89(2000)년 10월 남조선의 정당, 단체대표들이 조선로동당창건 55돐 경축행사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에 왔을 때였다.

남조선에서 들어온 대표들속에는 비전향장기수송환추진위원회 공동대표로 활동하고있던 비전향장기수 권락기선생의 안해 리옥순녀성도 있었다.

그 녀성은 일찍부터 민주화운동에 나섰고 남조선의 전국련합 대외협력위원장, 《통일을 여는 녀성모임》 회장으로서 자주와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의 길에 자신의 모든것을 바쳐온 녀성운동가였다.

그는 17년간이나 옥살이를 한 비전향장기수인 남편과 감옥에 있는 동지들을 위해 모든 성의를 다했으며 그들의 송환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 투쟁하였다.

그 나날에 페암이라는 불치의 병을 만나 모진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기의 집을 《통일광장》으로 만들어놓고 언제나 밝게 웃으며 비전향장기수들을 극진히 돌봐준 그였다.

이러한 그가 불치의 병으로 앓는 몸상태로 평양을 방문하였던것이다.

그의 시각에 비낀 평양의 모습은 꿈속에서도 그려보지 못한것들이였다.

놀라움과 찬탄의 목소리가 그의 심중에서 자주 울려나왔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측대표들에게 동포애의 정을 한껏 부어주시면서 리옥순녀성의 병상태에 대해 못내 걱정하시며 그에 대한 적극적인 치료대책을 세우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리하여 그는 평양에 있는 훌륭한 병원에서 유능한 의사들로 무어진 의료진에 의해 종합검진을 비롯한 3차에 걸쳐 진단을 받았다.

의료진은 그의 치료를 위해 온갖 지성과 정성을 다하였다.

평양방문일정이 끝나고 이제는 떠날무렵이 되였을 때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고려약재를 비롯한 수많은 고가약들을 선물로 안겨주시였다.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이 담겨진 선물을 받아안은 그는 솟구치는 격정을 억제할수 없었다.

자기에게 안겨지는 사랑이 눈물겹도록 고마웠기때문이였다.

그는 눈시울을 적시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령수님께서 페암을 부정하시고 죽음을 이겨내는 활력을 주시였으니 저는 힘차게 살렵니다.》

그가 진심으로 터친 말은 해빛을 따라 참된 애국의 길을 걸어가리라는 마음다짐의 분출이였다.

장군님의 품에 안겨 만복을 한껏 누리는 통일애국투사들인 비전향장기수들이 서울로 향하는 그를 바래주었다.

떠나는 사람, 바래주는 사람들모두가 통일의 날 다시 만나자고 굳게 약속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 이듬해 병환으로 끝내 사망하게 되였다.

주체90(2001)년 3월초 그가 사망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장군님께서는 그의 사망과 관련하여 조의를 표시할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장군님께서 취해주신 조치에 따라 해당 부문에서는 남조선에 있는 비전향장기수송환추진위원회와 그 공동대표 권락기선생에게 각각 조의문을 보내여 고인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면서 6. 15북남공동선언의 기치밑에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싸우는 남녘의 각계층 인민들을 고무하였다.

이렇듯 장군님의 위대한 태양의 품이 있어 통일을 위해 한몸바친 그의 삶은 어제만이 아니라 오늘에도 영원히 빛나고있는것이 아닌가.

27

재벌이 받아안은 영광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해당 부문의 책임일군으로부터 뜻밖에 불행한 소식을 받으시였다.

인생말년에라도 조국통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겠다고 애쓰던 남조선의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이 로환으로 사망하였다는것이였다.

이 비보에 접하신 장군님께서는 못내 애석해하시며 그 즉시 조의표시를 잘해줄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정주영의 유가족들에게 조전을 보내시였다.

 

정주영선생의 유가족들에게

나는 북남사이의 화해와 협력, 민족대단결과 통일애국사업에 기여한 정주영선생의 사망에 즈음하여 현대그룹과 고인의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김정일

주체90(2001)년 3월 22일 평양

 

슬픔에 잠겼다가 뜻밖에도 장군님의 하해같은 은정에 접한 정주영의 유가족들과 남녘동포들은 놀라움과 함께 솟구치는 격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놀라움과 감동은 후에 더욱 커졌다.

장군님께서는 특별히 조의대표단을 파견하시여 고인의 령전에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까지 보내주시였다.

이 소식을 남조선언론들이 특별긴급뉴스로 세상에 날리였다.

김정일위원장 조화를 보내》, 《분단사상 첫 남북간 조문단파견》 …

남조선전역이 벅적 끓어대고 온 세계가 술렁거렸다.

이렇게 되자 남조선최고위당국자가 화환을 보내고 조의를 표시한다, 여야당이 애도의 뜻을 담은 성명과 론평을 발표한다 하면서 법석하였다.

한편 경제계와 사회 각계의 유명짜한 인물들을 비롯하여 매일 수천명의 조객들이 조의식장에 몰려들었다.

남조선에서 《대통령》도 아닌 재벌이 사망한데 대하여 마치 《국가수반장례》처럼 떠들고 전지역이 애도분위기에 휩싸인적은 일찌기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위대한 장군님과 인연을 맺은것으로 하여 말년에나마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참다운 인생을 꽃피우던 정주영은 고인이 되여서도 만사람이 부러워하는 영광을 받아안았다.

28

한밤중의 특별렬차

 

주체90(2001)년 4월 11일 칠칠야밤의 어둠속을 헤가르며 함흥지구를 향하여 급하게 달리는 특별렬차가 있었다.

거기에는 제19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에 온 남조선가수 김련자일행이 타고있었다.

태여나 처음으로 북녘땅을 밟아보게 되는 김련자의 생각은 깊어만 갔다.

돌이켜보면 가수로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때로부터 늘 평양에서 한번 공연하고싶었던것이 자기의 평생소원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소원을 위대한 장군님께서 풀어주실줄이야 어이 알았으랴!

장군님께서는 한 동포가수의 마음속소원을 헤아려 보시여 그가 평양에 와서 공연할수 있도록 수차례에 걸쳐 은정어린 말씀을 주시고 필요한 조치도 취해주시였던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평양의 무대에 올라선 순간 그는 너무도 감격스럽고 기쁨에 겨운 심정을 노래 《반갑습니다》로 대변하였다. 그리고 북녘동포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마음속대화를 나누고싶어 무대와 관람석을 오고가며 민족적인 정서가 풍만한 노래들을 열정에 넘쳐 불러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다.

그는 노래만을 부른것이 아니였다.

그는 관중들에게 력사적인 평양상봉을 계기로 남조선에서 《김정일열풍》이 불고있다는것, 많은 사람들이 《김정일팬클럽》(응원단)까지 결성하고 장군님을 따르고있다는것, 자기도 그들중의 한사람이라는것 등에 대하여 감격에 넘쳐 이야기하였다.

정작 평양의 무대에 올라선 그의 마음속에는 또 한가지 소원이 있었으니 장군님을 모시고 자기의 소박한 노래를 불러드리는것이였다.

그러나 나라일에 바쁘신 장군님께서 자기와 같은 남조선가수의 공연까지 보아주실 시간이 있으랴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래였다.

그런데 공연 마지막날자를 하루 앞두고 장군님께서 몸소 머나먼 현지지도의 길에서 한 남조선가수의 간절한 소원마저 헤아려 특별렬차까지 보내주실줄이야. …

김련자일행을 불러주신 장군님께서는 그의 공연을 보아주시였을뿐아니라 가까이 불러 기념사진도 찍어주시고 함께 이야기도 나누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여난 그가 음악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하였지만 자체로 노력하여 일본땅에서 이름을 떨치고있다고, 일본에서 음악이나 무용으로 이름을 떨치고있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나 조선사람들이라는 말이 있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조선민족은 재능있는 민족입니다.》

녀가수의 감격은 끝이 없었다.

그에게는 온 겨레를 뜨겁게 안아주시는 민족의 어버이 김정일장군님께서 마치도 오랜 세월 남녘에 있는 자기도 가까이에서 보살펴오신 친정아버님같은 느낌이 강렬히 북받쳤다. 아울러 자기도 세상에서 가장 재능있는 민족의 한 성원이라는 긍지와 환희가 가슴뿌듯이 차올랐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만면에 자애로운 미소를 담으시고 녀가수에게 앞으로 아무때나 다시 평양을 방문하여 공연을 하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 북쪽에도 공연할 장소는 많습니다. 유명한 백두산에 가서도 공연할수 있습니다. 이제는 문이 열렸으니 누구도 그 길을 막지 못할것입니다.》

김련자는 위대하고 자애로운 인품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였다.

일본으로 돌아간 김련자는 장군님을 만나뵈온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열정에 넘쳐 토로하였다.

김정일총비서는 의리가 깊으신분이였다. 정말 환하고 아주 소탈한분이였다. 다양한 이야기를 하셨고 유모아도 대단히 풍부하셨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소식을 TV로 보았었는데 그때 대단한 인상을 받았다. 그때 받은 인상 그대로인분이시였다.》

김련자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들려주신 대해같은 사랑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노래로 통일에 이바지할 결의를 굳게 다지였다.

29

몸소 열어주신 《아리랑》관람길

 

주체94(2005)년 가을 평양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 성황리에 진행되고있을 때였다.

조선로동당창건 60돐과 조국해방 60돐을 맞으며 또다시 개막된 《아리랑》축전은 날이 갈수록 더욱 고조되였다.

수도시민들뿐아니라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아리랑》공연을 보려고 기차와 뻐스, 자동차를 타고 평양으로 달려왔다.

아시아와 유럽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와 지역들에서도 수많은 관람객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왔다.

풍치수려한 대동강의 한복판에 자리잡고있는 5월 1일경기장은 《아리랑》공연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온 세계가 《아리랑열풍》으로 들끓었다.

바로 이러한 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녘동포들도 평양으로 달려와 《아리랑》공연을 관람하도록 하시기 위해 마음쓰고계시였다.

전선시찰의 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던 장군님께서는 어느날 당중앙위원회의 한 책임일군을 전화로 찾으시였다.

너무도 뜻밖에 장군님의 다정하신 음성을 듣게 된 일군은 인사의 말씀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장군님께서 그 일군의 안부부터 물어주시고나서 남녘동포들에게 《아리랑》공연을 보여줄데 대하여 말씀하시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이번에 제16차 북남상급회담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왔던 남측당국대표단 성원들이 《아리랑》공연을 다 보고 갔고 남측 통일부 장관도 《아리랑》공연을 보는것을 허락하겠다고 한것만큼 조직사업을 잘하여 다 데려다 보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그 일군은 커다란 흥분과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6. 15통일시대가 열린 때로부터 적지 않은 남녘동포들이 평양을 다녀갔지만 짧은 기간에 수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인 례는 일찌기 없었다.

더우기 공연관람을 위해 대규모집단이 들어온 일은 일찌기 없었던것이다.

이 민족사적인 사변은 오직 장군님께서만이 구상하실수 있었다.

일군이 이런 생각으로 흥분된 마음을 다잡고있는데 그이께서는 또다시 말씀을 이으시였다.

《그들이 오면 우리가 대우를 잘해주면서 구경을 시켜주고 하루밤 재워서 보내면 다 좋아할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장군님께서는 남녘동포들의 《아리랑》공연관람단을 평양참관단으로 부르도록 해주시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통로와 체류기일, 참관장소도 확정해주시였으며 초청영접안내에서 나서는 크고작은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장군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해당 부문의 일군들은 남녘동포들의 《아리랑》공연관람과 평양의 여러곳을 참관하는 조직사업을 진행하고있었다.

그런데 일군들은 당창건 60돐 경축행사가 가까와오면서 뜻하지 않은 정황에 부닥치게 되였다.

평양참관단성원들을 숙식시키기로 했던 양각도국제호텔에 당창건 60돐 경축행사에 참가하게 될 국내대표들을 들이는 문제가 제기되였던것이다.

일군들은 이런 조건에서 부득불 평양참관단보장사업을 맡아보는 남측의 여러 단체들에 평양참관단일정을 조절해줄것을 통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남측성원들은 당창건 60돐 경축행사기간에 평양에 오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특히 많다고 하면서 복도를 침실로 해서 한개 층에 수십명씩 숙식하거나 5월1일경기장에서 천막을 치고 자도 좋다고 하면서 평양참관을 계속하도록 해달라고 거듭 간청하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장군님께서는 양각도국제호텔에 들기로 예정되였던 조선로동당창건 60돐 경축행사 국내대표들을 모두 다른 려관에 옮기고 양각도국제호텔뿐아니라 보통강호텔도 통채로 남측참관단이 리용하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언제나 남녘겨레들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으시는 그이의 뜨거운 동포애에 우리 일군들은 물론 남녘동포들도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장군님의 세심한 관심과 은정어린 조치에 의해서 각계각층의 광범한 남녘동포들이 평양으로, 5월1일경기장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아리랑》공연이 진행되는 5월1일경기장은 그야말로 뜨거운 동포애와 통일열기로 끓어번졌다.

우리 인민들이 《우리는-》하고 구호를 웨치면 남녘동포들은 《하나다!》라고 화답하고 뒤이어 또다시 《조국-》하면 《통일!》하고 화답해나섰다.

서로 손을 흔들어주고 울며 웃으며 손을 맞잡는 광경은 우리 민족의 통일념원이 얼마나 강렬한가를 온 세상에 과시하는 격동적인 모습들이였다.

공연이 시작되자 남녘동포들은 련속 사진기샤타를 누르는가 하면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거대한 금강석》, 《민족의 저력과 미래에 대한 상징》이라고 감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것은 진정 장군님께서 몸소 열어주신 《아리랑》관람길을 따라 평양에 들어온 참관단성원전체가 아니, 온 남녘겨레가 터치는 심장의 웨침이였다.

30

복받은 옥동녀

 

주체94(2005)년 10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관람하기 위해 남녘동포들이 평양으로 구름처럼 모여들고있던 때였다.

그들속에는 1998년 범청학련 남측본부 《한총련》대표로 평양에 왔던 황선녀성도 있었다.

그는 해산예정일이 이미 지난 상태였지만 위대한 장군님께서 《아리랑》공연관람길을 열어주시였다는 희한한 소식을 듣고 시어머니와 함께 이 길에 나섰던것이다.

황선녀성은 10월 10일 저녁 《아리랑》공연을 관람하던 도중 갑자기 오는 진통으로 하여 평양산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그는 입원한지 1시간도 못되여 귀여운 옥동녀를 순산하였다.

이렇게 그는 세상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평양산원에서 통일동이를 낳게 되였다.

평양산원에서 옥동녀를 낳은 며느리와 보육기안에 있는 손녀를 본 황선녀성의 시어머니는 기뻐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황선녀성의 시어머니를 비롯한 남측성원들은 황선녀성이 현대적인 평양산원에서 해산한것은 북남관계에서 있어보지 못한 사변이라고 기뻐하였다.

황선녀성은 입원해있는 기간 무상치료제혜택으로 산후치료는 물론 종합적인 치료와 함께 모든 산모들과 꼭같이 산꿀과 귀중한 보약제, 영양제들을 공급받았다.

그리하여 산모의 건강상태와 아기의 발육상태는 대단히 좋아졌다.

황선녀성이 건강을 회복하고 퇴원하게 되였을 때였다.

그가 비행기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갓난애기가 비행기동음에 놀랄수도 있고 여러가지로 불편할수 있으므로 판문점을 통해 륙로로 가게 하되 차를 천천히 몰아 산모와 애기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하라고 사려깊은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친부모의 사랑인들 이보다 더 다심할수 있으랴!

그는 이렇게 되여 복받은 옥동녀를 안고 평양산원문을 나섰으며 민족분렬의 상징인 판문점으로 나갔다.

그후 황선부부는 우리 겨레는 하나라는 뜻에서 딸애에게 《윤겨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황선녀성이 평양에서 아기를 낳은 소식은 남조선에서 큰 화제가 되였다.

오죽했으면 남조선의 보수언론들까지도 《평양에서 출산한 최초의 남한녀성》, 《황씨가 통일동이를 낳게 되였다.》고 크게 보도하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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