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없이 넓은 도량으로

 

《우리는 민족적단합과 조국통일의 길에서 변함없이 광폭정치를 실시하여 민족적량심을 가지고 조국통일을 지향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이든 그와 단결하며 조국통일의 한대오에서 손잡고 나갈것입니다.》

                                                      김정일

1

통일축구경기

 

주체79(1990)년 가을 북남사이에 축구경기가 조직될 때에 있은 일이다.

2

새롭게 생겨난 명칭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해당 부문 일군들로부터 한가지 이례적인 사실에 대하여 보고받으시였다.

그것은 북과 남사이의 축구경기와 관련한것인데 이 문제가 장군님께 보고되기까지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그해 중국의 베이징에서는 제11차 아시아경기대회가 진행되였는데 대회가 끝난 후 북의 체육관계부문 일군들은 뜻밖에도 남측으로부터 북과 남사이에 축구경기를 하자는 제의를 받게 되였다.

북측은 이미 제11차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조국통일의 열망으로부터 출발하여 북과 남이 하나의 팀으로 경기대회에 참가하자고 거듭 제의하였고 유일팀구성에서 나서는 문제들에서 대범하고 통이 큰 양보도 하였었는데 남측은 당치않은 구실을 대면서 북측의 제의를 거부하고 끝내 별개의 팀으로 참가하고말았다.

그러던 남측이 돌연히 태도를 바꾸어 북남축구경기를 하자고 들고나왔던것이다.

일군들은 미국과 남조선당국자들의 도발책동으로 하여 북남사이의 정치군사적대결도 해소되지 않고 긴장상태가 계속되고있는 형편에서 어떻게 체육교류부터 하겠는가고 생각하면서 장군님께 보고드리였던것이다.

이 문제를 두고 장군님께서는 생각이 깊어지시였다.

남측은 1950년대부터 하나된 민족을 세상에 시위하기 위하여 국제올림픽경기대회를 비롯한 국제경기때마다 유일팀으로 참가할데 대한 북측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통일을 바라지 않는 분렬주의세력의 책동의 결과였다.

력대적으로 북측이 제기한 체육교류를 그처럼 한사코 반대해오던 남측이 이번 축구경기를 하자고 하는데는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북과 남사이에 접촉과 교류를 마다한다면 그것은 민족분렬의 고통을 강요하는 외세의 책동에만 유리하게 될것이고 조국통일을 열망하는 민족의 한결같은 념원을 외면하는것으로 될것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이번 체육교류도 끊어진 혈맥을 잇고 통일분위기를 마련하는 계기로 되게 할것을 결심하시고 해당 일군에게 이렇게 일깨워주시였다.

… 우리는 축구경기를 통해서 민족적화해와 단합을 도모하고 통일열기를 고조시켜나가는 계기를 조성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경기를 하는것이 좋습니다.

마침내 북과 남의 체육관계자들이 모여앉아 축구경기를 위한 실무적문제들을 토의하게 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 하나의 난문제가 제기되였다.

그것은 축구경기의 명칭을 어떻게 부를것인가 하는것이였다.

남측이 제안한 경기명칭은 《경평축구경기》였다.

일군들은 그 명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신통한 대안이 없어 쌍방사이에 락착을 짓지 못하고있었다.

이 사실을 아신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일제식민지통치때 쓰던 《경평축구경기》란 이름을 그대로 되살려 쓰는것은 오늘의 현실에 맞지 않는것은 물론이거니와 통일지향적인 측면도 없고 북남대결을 조장하는 기운만 강하다고 하시면서 축구경기의 명칭을 북남통일축구경기로 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일군들은 탄복을 금할수 없었다.

통일축구경기, 정말 듣기만 해도 민족의 통일념원을 그대로 담은 명칭이였다.

북남사이의 축구경기를 통일축구경기라는 이름으로 하게 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북의 인민들은 더 말할것도 없고 수많은 남녘동포들도 《통일축구라는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우리 마음에 꼭 드는가. 축구경기도 민족이 하나가 된다는 통일의 뜻으로 한다는데는 정말 심장이 동하고 눈물이 쏟아진다.》고 하면서 눈굽을 적시였다.

이렇게 되여 북과 남사이의 첫 통일축구경기가 성대히 진행되게 되였다.

3

대범한 아량

 

남조선의 체육부 장관이 인솔하는 남측 남녀축구선수단이 평양에 왔을 때의 일이다.

축구경기일정을 토론하면서 남조선체육부 장관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이미 합의된 사항을 뒤집어엎으면서 남자축구만 하고 녀자축구는 못하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예상밖의 일이였다.

해당 일군들은 이미 공동으로 합의한 사항대로 남녀축구선수단이 다같이 왔는데 남자축구만 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들이댔다.

하지만 남측 체육부 장관이 옹고집을 부리며 버티는 바람에 애써 마련된 축구경기가 무산될 형편에 놓이게 되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런 결론을 주시였다.

남조선측에서 녀자축구선수들이 제11차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하여 부상도 당하고 선수들의 실력이 씨원치 못하다고 하면서 녀자축구경기는 그만두자고 한다는데 그들의 요구대로 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이께서는 동무들이 문제를 크게 보아야 한다, 동무들이 녀자축구는 우리가 이길수 있다는데서 위안을 받을 생각을 하는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대범하게 대하는것이 좋다고 일군들의 좁은 생각을 깨우쳐주시였다.

오직 민족적화해와 단합을 위해서는 그들을 너그럽고 대범하게 포섭해야 한다는 장군님의 숭고한 뜻은 일군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북남축구경기와 관련해서는 지금까지 북측이 계속 양보해왔으니 이번만은 물러서지 않을것이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런 생각으로 전전긍긍하던 남조선체육부 장관은 녀자축구경기를 그만둔다는 소식을 전달받고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까지 하였다.

사실 체육부 장관으로 갓 취임하여 축구선수단을 이끌고 왔는데 승산이 없는 녀자축구를 하면 망신만 당할것이고 그렇다고 경기를 그만두고 돌아가면 자기의 체면도 서지 못하게 될것이라는 생각으로 속을 태우고있었던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대범한 아량을 보여주었으니 그로서는 정말 다행스럽고 고맙기가 그지없는 일이였다.

북과 남사이의 체육교류를 승부를 겨루는 경기가 아니라 명실공히 조국통일성업을 이룩하기 위한 중요계기로 보시고 민족적화해와 단합을 위하여 모든것을 복종시키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대범한 아량앞에 남조선체육부 장관은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었다.

4

천도교 교령의 운명전환

 

《산같이 머리들어 떳떳해지고 하늘처럼 가슴열어 마음 든든해지는 저의 이 심정을 무슨 말로 아뢰였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공화국이 위대한 김정일령도자님의 존함과 더불어 영원을 사는 불멸의 나라임을 다시금 깊이 깨닫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공화국의 품에 안겨 운명전환을 한 남조선천도교 중앙본부 전 교령인 오익제선생이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받아안고 그이께 삼가 올린 편지의 한 대목이다.

민족적량심을 지니고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바다와 같은 도량으로 포옹해주시는 장군님께서는 주체86(1997)년 8월 16일 관계부문 일군에게 오익제선생과 관련된 은정어린 말씀을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남조선천도교 중앙본부 전 교령인 오익제선생이 8월 15일 공화국에 영주하기 위하여 우리를 찾아왔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오익제의 나이가 68살이면 정계에 나선 사람치고 그리 나이가 많다고 볼수 없는것만큼 그가 나라의 통일을 위한 사업을 오래동안 할수 있을것입니다.》

크나큰 믿음이 담겨진 말씀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오익제선생이 조국통일위업에 헌신할수 있도록 그에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의 중임을 맡겨주시고 건강상태까지 헤아려 현대적인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수 있게 해주시였을뿐아니라 훌륭한 주택과 승용차도 안겨주시였다.

그리고 그가 공화국북반부의 현실을 직접 보고 느낄수 있도록 참관조직도 해주시였고 선친들의 묘소를 찾고싶어할 때는 직승기도 띄워주시였다.

사랑과 믿음으로 충만된 나날이 흐를수록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하나의 고민거리가 더욱 마음을 괴롭혔다.

그것은 아버지가 일제때 순사노릇을 하였다는 사실이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품속에서 인생전환을 한 그는 그 사실을 더이상 속에 품고만 있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해당 부문 일군에게 그 사실을 솔직히 이야기하였다.

그에 대하여 알게 되신 장군님께서는 지체없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과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런데 결과는 실로 뜻밖이였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이끄신 조선국민회의 군자금모집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는것이였다.

오익제선생은 뜨거운 격정을 삼켰다.

뿌리를 모르고 떠돈 인생이 장군님의 은덕으로 자기의 뿌리를 찾았으니 그 영광을 무슨 말로 다 이야기하랴.

하기에 그는 자신의 생활체험을 통해 절감한 력사적사실들을 가지고 《현세의 한울님》이라는 책을 써내여 장군님의 위인상을 격조높이 칭송하였다.

5

몸소 숙소에까지 찾아오시여

 

주체87(1998)년 10월말 지방현지지도의 길에 계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갑자기 일군들에게 평양으로 빨리 돌아가야겠다고 이르시였다.

일군들은 의아해졌다.

하지만 장군님께서 돌아가시겠다고 한 사연을 알고는 그이의 한없는 덕망에 머리숙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무렵 평양에는 남조선의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일행이 와있었는데 하루이틀내로 환송연회를 한 다음 떠나기로 일정계획이 맞물려져있었다.

그런데 정주영은 경애하는 장군님을 잠간만이라도 만나뵙고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였다.

그가 평양에 오기까지는 여러가지 곡절이 있었다.

정주영을 비롯한 남조선 현대그룹일행이 금강산관광을 비롯한 경제실무적문제들을 협의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오게 해달라고 제기하여왔을 때 해당 부문 일군들은 주저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로 말하면 남조선의 1등재벌로 불리우는 현대그룹의 창업주, 명예회장이며 한때 《대통령》후보로까지 나섰던 사람으로 한생을 자본의 축적과 기업의 확대, 개인의 치부를 위한데 바쳤다고 말할수 있었다.

그러한 대기업가를 받아들인다는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였던것이다.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장군님께서는 과거보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이나마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 이바지하려는 정주영의 결심을 더 소중히 여기시고 대담하게 판문점륙로를 열어주시는 하해같은 은총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렇게 되여 그는 해방후 김구가 수령님의 품을 찾아왔던것처럼 분렬의 장벽을 넘어 장군님의 품을 찾아 북행길에 올랐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몸소 바쁘신 시간을 내시여 정주영일행을 만나시기 위해 10월 30일 그들이 들어있는 숙소를 찾으시였다.

장군님께서 꿈같이 자기들의 숙소에 몸소 찾아오신데 감격한 정주영과 일행은 황황히 밖으로 달려나왔다.

장군님께서는 불편한 다리로 정문까지 마중 나온 그에게 인자하신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 나는 고령에 있는분이 나를 찾아오게 해서야 되겠는가, 내가 가서 만나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현지지도도중에 평양에 오다나니 이렇게 밤이 늦어서 정주영선생을 만나게 되였는데 이에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국방위원장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깊은 밤 숙소를 찾아주신것만도 과분하기 그지없는데 사례의 말씀까지 해주시니 그는 황송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그는 마음속격정을 이렇게 터놓았다.

《장군님을 만나뵈웠으니 이젠 100살을 더 살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주 오겠습니다.》

이날 정주영일행은 위대한 장군님의 인품에 끌리여 자기들의 사업에 대하여 또 생각하고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두서없이 말씀드리기 시작하였다.

금강산관광문제, 경제문화분야에서 협력교류문제 등 이야기범위는 끝이 없을상싶었다.

장군님께서는 무랍없이 올리는 그들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주시며 긍정도 하시고 때로는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주기도 하시며 일일이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기념사진을 찍고싶어하는 그의 소망을 헤아리시여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가 만난것을 기념하여 기념사진이나 찍읍시다. … 나이많은 정주영선생이 가운데 서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가족 전체 성원들과도 기념사진을 찍어주시고 밤늦게야 그들이 든 숙소를 떠나시였다.

그후 판문점을 거쳐 남쪽으로 나간 정주영은 평양방문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장군님께서 언제든지 다시 오라고 하시였으니 언제든지 또 갈 생각이다.》

6

가구선물 333점

 

민족의 어버이이시며 조국통일의 구성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탄생일을 맞으며 남조선의 에이스침대회사 회장 안유수가 그이께 333점의 가구를 선물로 올리였다.

주체88(1999)년 5월 7일 장군님께서는 그가 올린 선물을 친히 보아주시였다.

남조선언론들이 전례없는 특대형선물이라고 벅적 떠든 가구들을 마련한 안유수, 그는 어떤 사람인가.

사리원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전쟁시기 미제의 원자탄위협에 속아 남으로 나간 그는 모진 고생끝에 기업을 크게 성공시켰다. 하지만 돈으로만 살아갈수 없는것이 사람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두고 온 정든 고향산천이 못견디게 그리웠고 나이가 먹어갈수록 혈육들에 대한 생각이 가슴에 사무쳐왔다.

더더욱 그의 마음을 자석처럼 끌어당긴것은 어떤 풍파속에서도 끄떡없는 공화국의 위용이였다. 바로 그 위력의 원천이 장군님의 위인상에 기인된다는것을 페부로 느낀 그는 마침내 그이께 자기의 지성어린 선물을 올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가구제작에 세계적으로 가장 고급한것으로 일러주는 목재들만 골라 리용하였으며 침대 하나만도 30만US$를 들여 50일동안에 만들었다.

보통 가구선물은 한두개가 고작이다. 그런데 그는 전례를 깨뜨리고 333점을 택하였다.

장군님께서 이날 그가 올린 선물을 몸소 보아주신것이였다.

진렬된 가구제품들에는 온갖 지성이 최대로 기울여졌다는것이 대번에 알리였다. 세계적으로 소문난 가구조각가 안또니오가 일생에 가구 28개를 제작하고 죽었는데 생의 마지막 1주일동안에 제작한 28번째 가구도 안유수의 선물에 들어있었다. 거의 모든 가구들에 금물을 올리고 또 은박도 쳐서 품을 많이 들이였다.

장군님께서는 333점의 최고급가구제품에 깃든 안유수의 진심을 헤아려주시며 남조선 재력가가 하나하나 특별히 만들어 이렇게 많은 량의 선물을 마련해온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안유수가 세계기니스기록집에 올라있고 인증서도 받은것과 같은 가구들은 자기네 회사에 계속 둬두면 사실 자기 회사의 연혁면에서 보아도 그렇고 상당히 이름을 올릴수 있는것인데 그것을 다 무시하고 장군님께 선물로 올린것은 사람들의 심금을 크게 울리였다.

선물가구 333점, 여기에는 5천년력사국인 우리 조선을 강성대국으로 일떠세우시는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남녘겨레의 다함없는 존경과 흠모의 마음이 담겨져있었다.

7

6. 15통일일화(1)

 

주체89(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는 경이적인 사변이 일어났다.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뵈오려고 남조선의 김대중《대통령》이 찾아온것이다.

그날의 일화들이다.

8

영원한 순간

 

13일 오전 10시 30분경 갑자기 평양비행장에서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김대중을 마중하기 위해 몸소 비행장에 나오시였다.

한발 먼저 와있던 남측성원들은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이시다!》라는 탄성을 올리며 입을 벌린채 굳어졌다.

영접은 장관급일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경악하였던것은 무리가 아니였다.

그때의 충격을 남조선의 한 《국회》의원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마치 고압전류에 순간적으로 감전된듯 한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머리속이 하얗게 지워지는것 같았다. 아, 김정일국방위원장! 나는 내 눈을 의심하였다.》

그러니 김대중본인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는 장군님을 뵈옵자 황황히 승강대를 내려 그이의 두손을 부여잡았다.

장군님께서도 환한 미소를 지으신채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정답게 말씀하시였다.

《김대통령께서 어렵고 두려운 길을 용케 오셨습니다.》

《국방위원장님께서 이렇게 공항에까지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시각 서울의 롯데호텔 2층에 꾸려진 기자쎈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력사적인 평양상봉을 취재하기 위해 남조선의 110여개 언론사와 외국의 170여개 언론사 1 270여명의 기자들이 이른새벽부터 전광판앞에서 붐비고있었다.

드디여 평양비행장 현지실황이 전광판에 중계되기 시작하였다.

남측 방송원은 보나마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나온줄 알고 《지금 비행장에는 김영남상임위원장이…》라고 하고는 두눈을 크게 뜨고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다가 황급히 마이크를 다잡고서 《아! 김정일국방위원장께서 나오십니다. …》라고 웨치고는 격정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말이 끊어졌는가?》

본사의 추궁을 받은 방송원은 다시 방송을 했지만 얼마 안 가서 또 말이 끊어졌다.

폭풍같은 환호성때문에…

전광화면을 꽉 채우며 해빛같이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위풍당당히 걸어나오시는 위대한 장군님.

기자들은 일시에 박수를 쳤다. 어떤 기자들은 눈물까지 흘리였다.

남조선의 언론들이 전했듯이 《박수에 린색하기로 소문난 기자들속에서 환호와 눈물 그리고 박수가 누가 먼저랄것 없이》 터져나왔다.

그 열광의 순간은 우리 장군님께서 태양의 빛과 열과 인력으로 마련하신 순간이였다.

9

기자의 행운

 

이날 남조선의 《대한매일》의 한 기자가 력사적인 평양상봉을 취재하기 위한 남측 기자단성원으로 김대중과 함께 평양비행장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비행장에서 위대한 장군님의 모습을 뵙게 되자 가장 력사적인 순간을 취재하게 되였다는 흥분으로 하여 심장이 터져나갈것만 같았다.

그는 기자의 사명감과 책임감을 다해 쉴새없이 펜을 달리였다.

우러르면 우러를수록 위인의 풍모가 확 안겨오는 장군님이시였다.

기자는 절세의 위인을 몸가까이에서 직접 만나뵙고 인사를 올려야 하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기자라는것을 다 잊은채 수원들을 헤치고 장군님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장군님께 정중히 자기소개를 하였다.

장군님께서는 기자의 돌발적인 행위도 나무람하지 않으시고 반갑다고 하시면서 스스럼없이 그에게 손을 내미시여 악수를 청하시였다.

그때를 회상하여 기자는 《취재현장에서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김정일국방위원장과 악수를 나누는 행운을 얻었다. 기자로서 정말 행운이구나 하는 벅찬 감회에 빠져들었다.》라고 회고하였다.

그는 서울로 돌아간 후 신문에 장군님을 취재한 소감을 피력하면서 《김정일위원장은 유일한 중심이였고 결심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것이 곧 의전이고 격식이며 관행이 되는듯 했다.》라고 장군님을 높이 칭송하였다.

10

하늘같은 도량

 

비행장영접행사가 끝나자 다시한번 예상밖의 일이 벌어졌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김대중을 데리고 백화원영빈관으로 곧장 직행하시는것이였다.

남측성원들은 다시금 아연해졌다. 《대통령》이 국빈의 례를 받는다기보다 마치 오래동안 헤여졌던 혈육을 만나 함께 그의 집으로 가는 다정한 모습 같았던것이다.

한 나라의 국가수반이 다른 나라에 가는 경우 먼저 그 나라 국가수반을 의례방문하는것이 국제적관례이다.

그런데…

어느덧 승용차는 숙소인 백화원영빈관에 도착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숙소에서 평양상봉기념으로 김대중일행과 기념촬영을 하시였다.

그런데 촬영이 끝났을 때였다.

장군님께서는 문득 사진을 다시 한장 찍어야겠다고 하시면서 김대중을 가운데자리에 세우시는것이였다.

사실 처음 사진은 장군님을 가운데자리에 모시고 그들부부가 량옆에 서서 찍은것이였다. 장군님에 대한 존경심에서 그들부부가 스스로 정한 촬영위치였다.

장군님께서 김대중을 가운데자리에 세우고 다시 사진을 찍도록 관심을 돌려주시니 그들은 그이의 숭고한 도덕과 례의앞에 절로 머리가 숙어지는것이였다.

그들에게는 불쑥 비행장에서 그이께서 김대중을 만나셨을 때 장관들도 동참해서 어렵고 두려운 길을 왔다고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과시 희세의 위인이시구나! …)

김대중도 수원들도 그이의 하늘같이 넓은 도량과 다심한 인정미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11

파격

 

남조선과 서방의 언론들은 김대중의 평양도착보도를 전하면서 한결같이 기자들이 썼던 예측기사를 여지없이 뒤엎는 파격이였다고 대서특필하였다.

그러한 파격은 회담시에도 일어났다.

위대한 장군님과 김대중사이의 첫 회담은 백화원영빈관에서 상봉을 겸해 이례적으로 진행되였다. 그런데 난생처음 북녘땅을 밟게 된 감개무량함과 예상치 못했던 환대에 일행은 다소 굳어진듯싶었다.

장군님께서는 그런 긴장한 분위기를 풀어주시려는듯 김대통령이 오늘 아침식사를 콩나물국에 반숙한 닭알 반쪽만으로 했다는 보도를 들었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대통령이 평양에 와서 점심을 많이 잡수시려고 아침식사를 적게 한것이 아닌가고 생각했습니다.》

순간 장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여났다.

사실 그날 아침 김대중은 평양을 방문한다는 흥분과 자기를 어떻게 대해줄것인가 하는 번거로움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였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재치있는 유모아로 일행의 굳어진 마음뿐아니라 긴장된 분위기를 한순간에 풀어주신것이였다.

그이께서는 긴장된 분위기가 풀리자 이번에 김대중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데 대해 우리 인민모두가 진심으로 기뻐하고있다고 하시면서 전번에 남쪽에서 특사가 왔을 때 우리가 김대통령이 평양에 오시면 섭섭치 않게 해드리겠다고 말한적이 있다고, 우리는 이번에 말보다 실천으로 어려운 길을 걸어온 김대통령께 섭섭치 않게 해드리겠다고 친절히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장군님께서는 지금 세계가 우리를 주목하고있다고, 김대통령이 왜 평양에 오려고 했고 내가 왜 평양방문을 승낙했는지에 대해 의문부호를 가지고있다고, 우리 격식없는 대화를 해서 2박3일동안에 세계의 이 물음에 대답을 주자고 말씀하시였다.

《그 말씀에 감동되는바가 큽니다.》

김대중은 진정을 토로했다.

사실 그는 통일에 대한 제나름의 일가견을 가지고있는 사람이였다.

게다가 먼저 평양을 찾아온 몸이였다. 한것만큼 온 민족과 세계의 조명을 받으며 걸음을 한 이상 이번 방문에서 무슨 결실이든지 보아야 체면이 서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이께서 자기의 그런 복잡한 심리를 통속적인 언어로 시원하게 풀어주시니 고맙기 이를데 없었던것이다.

그후 회담이 순풍에 돛을 단것처럼 진행되여 단숨에 대화의 중핵적인 문제들이 합의된것은 세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장군님의 용단과 도량에 의해 온 세계가 확신하지 못하고있던 회담의 결실이 이루어져 세상을 놀래운 사실은 실로 파격, 예상치 못했던 파격이였다.

12

6. 15통일일화(2)

 

평양에서의 북남수뇌상봉 이틀째 되는 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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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끼리

 

주체89(2000)년 6월 14일 평양에서는 북남수뇌분들의 두번째 회담이 진행되였다.

전날 회담분위기가 매우 좋았고 두번째 회담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계시는 곳에 가서 하게 되여있었던것만큼 김대중일행은 아침부터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뜻밖의 련락을 받게 되였다.

장군님께서 두번째 회담도 전날과 같이 그들의 숙소에서 하기 위해 영빈관으로 나오신다는것이였다.

남측성원일행은 황송하여 몸둘바를 몰라했다.

이윽고 장군님께서 도착하시였다.

김대중은 그이께로 다가가 감격한 어조로 말씀드렸다.

《제가 찾아가려고 하였는데… 여기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장군님께서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더니 괜찮다고, 몸도 불편한데 젊은 사람이 찾아오는게 도리라고 하시고는 지난밤 잠자리는 편안했는가고 물으시였다.

회담이라기보다 한집안의 일을 의논하듯 따뜻한 정을 안고 대해주시는 그이의 사려깊은 말씀에 김대중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명하였다.

외세의 간섭과 분렬책동을 물리치고 우리 민족의 일은 우리 민족끼리 해결하시려는 그이의 원칙적립장과 넓으신 도량, 열렬한 조국애, 민족애로 하여 이날 회담은 처음부터 성과적으로 진척되여나갔다.

북남공동선언문작성에서 무엇이 핵으로 되여야 하는가 하는것이 중요한 문제로 나섰을 때였다.

김대중은 군사직통전화설치, 경제공동위원회를 내오는 문제 등 구체적인 안을 담은 문건을 만들자고 요청해나섰다.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지난 시기 북과 남사이에 이미 합의한 좋은 문건들이 많다는것과 문제는 그것을 제대로 리행하지 못하고있는데 있다는것을 명백히 하시고 이번에 내놓는 문건은 2000년대에 들어선것만큼 7천만겨레에게 통일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락관을 주는것으로 되여야 한다고, 우리가 이번에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지난 시기의 유물을 털어버리고 원칙은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선언적이고 지향적이며 희망적인 문건들을 내놓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러니 이번에는 구시대의 유물은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2000년대에 우리 민족끼리를 공동의 리념으로 하여 나라의 통일을 민족자주적으로 실현한다고 천명하자는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우리 민족끼리, 너무나 통속적이면서도 뜻이 깊고 누구나 접수할수 있는 장군님의 말씀에 김대중은 전적으로 찬성하였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자는 이 사상이야말로 그 누구도 부정할수 없는 당연한 리치였고 절세의 애국자, 민족의 어버이께서만이 내놓으실수 있는 새로운 통일리념이였던것이다.

6. 15북남공동선언의 중핵인 우리 민족끼리의 리념은 이렇게 제시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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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기》사건

 

《인공기》사건이란 남조선의 반통일보수세력이 북남수뇌분들의 상봉을 축하하여 우리 공화국기발을 게양한 학생들을 사법처리하겠다고 들고나온 사건을 말한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김대중과 단독회담을 진행할 때였다.

회담이 시작되자 장군님께서는 김대중에게 먼저 발언할것을 권하시였다. 그러나 그는 존경의 표시로 장군님께서 먼저 발언하시기를 정중히 요청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온화한 표정으로 말씀을 시작하시였으나 일단 《인공기》사건을 화제에 올리시면서는 근엄한 표정으로 어조를 바꾸시였다.

그이께서는 김대중에게 북남상봉이 진행되고있는 이 순간에 남조선에서 불쾌한 사건이 일어난데 대해 지적하시고 한쪽에서 상봉하면서 다른쪽에서 탄압하는것은 우리를 불쾌하게 한다, 어제 평양비행장에서 보니 이번에 대통령과 함께 온 남측성원들이 가슴에 태극기를 달았던데 이것은 우리 공화국북반부에 태극기를 내다건것이나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아무런 시비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 한복판에서는 대학생들이 공화국기를 드리운것을 가지고 《보안법》에 걸어 사법처리하겠다고 하고있다, 반정부적색채도 띠지 않고 단순히 공화국기를 내건것도 감수하지 못하는 《정부》와 이제 마주앉아 회담을 해야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하는것을 대통령에게 묻고싶다고 준절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남측 당국자에게 우리가 례의를 차려 비행장에까지 나가 맞이해주었고 평양시민들이 환영도 잘해주었으니 우리가 할 도리를 다했다고 본다고, 환영을 받고 환송속에 돌아가면 편안하지 않겠는가고, 우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의 의례방문으로 평양방문일정을 마치고 그것으로 헤여지는것이 어떻겠는가고, 남측의 처사는 북남수뇌회담을 하지 말자는 신호를 주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사리정연하게 립장을 표명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앞으로도 남측이 《인공기》사건과 같은 식으로 나오면 우리는 영원히 상종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언명하시였다.

장군님께서 《인공기》사건을 평양상봉을 대하는 남측의 근본립장과 직결된 중대사건으로 보시고 되게 문제시하신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김대중은 잘못했다고 사죄의 말씀을 올렸다.

대방의 심정을 꿰뚫어보신 장군님께서는 남측에서 잘못을 깨닫고 반성해나오는 조건에서 기본문제토의에 들어가 김대중에게 다시 발언권을 넘겨주는 아량을 보여주시였다.

례의는 례의대로 지키시면서도 민족의 근본리익과 조국통일의 대명제앞에서는 사소한것일지라도 타협과 양보를 모르시는 그이의 원칙적인 립장은 그후 남조선의 언론인들과 인민들속에 유명하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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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산가족》

 

이날 저녁 목란관에서 김대중이 답례연회를 차리였다.

연회가 금방 시작되였을 때였다.

참가자들의 열광적인 환호에 답례를 보내시고 자리에 앉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먼저 사려깊은 눈길로 연회장을 일별하시며 그 누군가를 찾으시였다.

그이께서 김대중의 부인을 찾으신다는것을 알아차린 남측 장관이 부인은 아래탁에 가서 앉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놀라시는듯 한 표정으로 그러고보면 이 연회가 김대통령내외를 《리산가족》으로 만드는 연회로 될번 했다고 하시며 이렇게 물으시였다.

《리산가족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면서 또 리산가족을 만들자는것입니까?》

김대중과 남측성원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들에게 장군님께서는 말씀하시였다.

대통령내외를 한식탁에 앉게 해야지 억지로 갈라놓을 멋이야 없지 않는가. 서로 떨어져 식사를 하라고 하면 밥맛이 날턱이 있는가. 대통령내외까지 리산가족으로 만들면 정말 세상에 소문이 나겠다. …

일시에 폭소가 터져올랐다.

웃음발을 타고 화제의 주인공인 부인이 장군님가까이로 떠밀려왔다.

장군님께서는 웃음지으시며 그를 김대중의 곁에 앉혀주시였다.

부인은 국방위원장님께서 너무도 자상한 배려를 베푸시니 어찌할바를 모르겠다고, 이제는 자기네 가정문제가 해결된셈이라고 하면서 몸은 비록 령감곁에 왔어도 마음은 줄곧 국방위원장님께 가있다고 감동에 겨워 말씀올렸다.

장군님께서는 그러면 안된다고, 몸도 마음도 다 령감곁에 가있어야 한다고, 그러다가 큰일난다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그 말씀에 또다시 웃음폭포가 쏟아졌다.

부인은 손벽을 치며 참, 국방위원장님은 어쩌면 자기들의 마음을 그처럼 즐겁게 해주시는가고, 너무 이야기를 재미나게 하셔서 지금 온 좌중의 시선이 장군님께 집중되고있다고 무랍없이 말씀올렸다.

명쾌한 유모아로 연회장의 흐름을 주도해나가시는 장군님의 모습은 조국통일성업의 중심에 거연히 서계시는 민족의 어버이의 모습으로 온 민족, 온 겨레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16

출연료

 

동포애의 뜨거운 정이 무르녹는 속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였다.

이때 한 일군이 남측과 협의정리한 북남공동선언문초안을 위대한 장군님께 올리였다.

공동선언문초안을 받아드신 장군님께서는 문건이 잘되였다고 하시며 상대측에 넘겨주어 김대중대통령에게 보이도록 하라고 이르시였다.

문건을 받은 김대중은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씀드렸다.

《공동선언문초안에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리고 공동선언이 합의되였다는것을 이 자리에서 선포하였으면 한다고 자기의 의향을 내비쳤다.

장군님께서는 그럼 좋다고 하시며 그와 함께 연탁으로 나가시여 김대중의 손을 잡아 높이 쳐드시였다.

그이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장내에 울렸다.

《력사적인 북남공동선언이 합의되였음을 알립니다.》

순간 연회장에는 폭풍같은 환호와 박수가 터져올랐다.

모두의 얼굴에 감격과 환희가 넘치였다.

그런데 남측 기자들만은 사정이 달랐다. 뜻밖의 정황으로 장군님께서 김대중과 손을 맞잡아올리신 뜻깊은 장면을 촬영기에 담지 못하였기때문이였다.

울상이 된 그들은 저들의 공보수석비서관을 쑤시기 시작하였다.

담이 커진 비서관이 장군님께 청을 드렸다.

《두분께서 손을 드신 장면을 기자들이 찍지 못해 야단입니다.》

그이께서는 배우역을 해달란 말이지, 나는 그 요청을 들어줄수 있는데 김대통령의 승낙을 받으시오라고 말씀하시였다.

《국방위원장님께서 승인하셨으면 저는 그에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웃으시며 김대중에게 《그러면 우리 배우노릇을 한번 더 해봅시다.》라고 하시며 흔연히 연탁앞으로 나가시여 처음대로 그의 손을 잡고 높이 쳐드시였다.

사진기들에서는 연방 섬광들이 터져나왔다.

촬영이 끝나자 장군님께서는 우리가 배우노릇을 하였으니 이제는 출연료를 받아야 하겠다고 하시여 연회장에 웃음의 파도를 일구시였다.

력사적인 장면은 남조선과 세계의 보도계에 거대한 해일을 불러일으켰다.

17

해사진

 

북남공동선언의 합의가 선포되자 연회참가자들은 금방 통일을 맞이한 심경에 휩싸였다.

이때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연회장의 주탁 맞은켠에 있는 해사진을 가리키시며 남측수행원들에게 저기 전광사진의 노을이 아침노을 같은가, 저녁노을 같은가고 물으시였다.

모두의 눈길이 사진으로 쏠렸다.

거의나 한벽을 차지하다싶이 한 사진은 해무리진 바다가의 정경을 기막히게 선택하여 찍은 예술작품으로서 아침노을인지 저녁노을인지 얼핏 분간하기가 어려운, 말하자면 수수께끼같은 장면이였다.

질문을 받은 남측수행원들은 사진을 바라보며 머리를 쥐여짜기 시작했다. 장군님께서 문득 던지는 물으심 같애도 거기에는 그 어떤 깊은 의미가 있을것이라는것을 예감했던것이다.

허나 모지름을 써도 신통한 답을 찾을수가 없었다.

장군님께서는 다시금 재촉하시였다.

《장관나리들, 누가 대답해보시오.》

장관들은 아직 답을 찾지도 못했는데 장군님께서 자기를 지명하시면 어쩌랴 하는 생각에 목들을 움츠렸다.

그래도 그런 문제는 자기의 몫이라고 생각했던지 문화관광부 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방위원장님, 해뜨는 사진입니다. 민족의 미래를 밝히기 위한 해가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말씀올린 그는 제딴에 대답이 썩 잘되였다고 생각했던지 벙싯 웃으며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장군님께서는 머리를 가볍게 저으며 다르게 말씀하시였다.

저 노을은 아침에 해뜰 때 들어와 보아도 저 장면이고 저녁에 해질 때 들어와 보아도 저 장면이라고…

단순하면서도 신통한 말씀이여서 모두가 놀라움속에 웃지 않을수 없었다. 하면서도 그들은 장군님의 말씀을 유모아로 그저 웃어넘기기에는 그 의미가 매우 심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사물은 보기탓, 생각하기탓이라는 그이의 말씀에 그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탓이라는 의미가 더 짙게 깔려있었던것이다.

온 겨레가 공동선언의 기치아래 마음과 마음들을 합쳐 힘차게 싸워나간다면 우리 민족의 앞길은 해솟는 아침과 같이 밝을것이요, 7. 4북남공동성명때 남조선위정자들이 한것처럼 선언은 선언대로 발표해놓고는 돌아앉아서 그것을 빈종이장으로 만든다면 조국통일의 전망은 해떨어진 저녁과 같이 점점 더 암담하게 될것이 아닌가.

실로 장군님의 유모아는 가장 적절한 기회에, 가장 적중한 표현으로 되는 명담중의 명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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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5통일일화(3)

 

주체89(2000)년 6월 15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국방위원회명의로 김대중과 그의 일행을 위해 환송오찬을 마련하시였다.

그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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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한가족

 

전날 저녁에 김대중《대통령》을 보고 남측에서 우리를 위해 연회를 차렸는데 우리도 래일 오찬을 차리려 한다고 하시면서 남조선에 상호주의를 하자는 말도 있는데 우리도 좀 호상주의를 해보자는것이라고 해학적인 말씀을 하시여 남측성원들을 웃음속에 가슴뜨끔하게 만드신 장군님께서 오찬좌석에 나오시자 김대중대통령은 이렇게 말씀올렸다.

《국방위원장님, 마지막까지 저희들을 환대해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오찬도중 그는 장군님께 불쑥 국방위원장님은 어디 김씨인가고 무랍없는 물음을 올렸다.

장군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자신께서는 전주김씨라고 말씀하시였다.

《나는 김해김씨인데 위원장님께서는 진짜 전라도사람이시구만요.》

김대중은 장군님과 성은 같지만 본이 달라 몹시 아쉬워했다.

그때였다.

곁에서 잠자코 듣던 김대중의 부인 리희호가 손벽을 치며 말했다.

《나도 전주리씨예요.》

그리고는 장군님과 본이 같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어린애처럼 좋아하였다.

《그러니 우리가 진짜 한가족이구만. 이제야 우리 일가가 만났소.》

장군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진짜 한가족, 이제야 만났소!

유모아이지만 참으로 뜻이 깊었다.

모두가 어리둥절해진 김대중을 바라보며 박장대소했다.

하지만 그들도 7천만 온 겨레가 한지붕밑에서 한가족처럼 화목하게 살게 될 날을 끝없이 바라시는 장군님의 뜨거운 동포애가 유모아에 담겨져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20

민족애특강

 

환송오찬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계속되였다.

그사이 위대한 장군님께 완전히 매혹된 남측성원들은 그이의 주위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그들에게 여러가지 말씀을 해주시던 장군님께서는 북남간의 신뢰와 단합을 도모하고 조국의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호상 비방중상과 상대를 자극하는 일체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제 열흘 있으면 6. 25인데 남쪽에서도 북을 적대시하는 6. 25관련행사들을 그만두며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장관들에게 김대통령과 자신의 체면을 조절해줄수 있는 사람은 당신들이라고 하시며 말씀하시였다.

《그것을 제대로 조종하지 못하면 장관자리를 다 내놓게 하고 내가 직접 서울에 나가 장관을 겸임하겠습니다.》

유쾌한 폭소가 터졌다.

장관들은 아픈데를 면바로 찔리운듯 장군님앞에 머리숙이며 공동선언이 잘 리행되도록 있는 힘을 다하겠다고 결의다졌다.

김대중도 장군님께 《그렇게 안돼야죠. 너무 념려 마십시오.》라고 몇번이나 말씀드렸다.

오찬이 마감시간을 가까이 하자 장관들은 아쉬움이 더욱 커져 아예 장군님의 주위를 에워쌌다.

장군님께서는 그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시였다.

이번에 김대통령과 남쪽의 정치인들이 평양에 와서 대단한 일을 하였다. 북남공동선언을 리행하여야 할 민족사적임무가 우리에게 짊어져있다. 너무 서두르거나 조급하게 하지 말고 하나하나 착실하게 해나가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민족문제를 우선시해야 한다. 우리는 남쪽당국이 다른 나라들과 공조하는것을 무턱대고 반대하는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민족끼리 화해하고 단합하는 조건에서 다른 나라들과 공조해야 한다. 자기 민족을 반대하는 국제공조란 있을수 없다. 우리는 우리 민족을 위한 공조를 하여야 한다. …

열광적인 박수갈채가 터져올랐다.

뜻깊은 오찬회석상에서 김대중과 남측 장관들을 대상으로 하신 장군님의 말씀은 민족애에 관한 특강이였다.

21

통일사에 길이 남을 인터뷰

 

력사적인 6. 15북남공동선언이 발표된 후 남조선의 언론사대표단이 공화국북반부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코대가 높기로 유명한 남조선언론계의 거두들이였다.

주체89(2000)년 8월 12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대표단을 만나주시였는데 한번 접견에 그 거두들이 그이께 완전히 매혹되여 깊이 머리숙이였다.

후에 그들이 《충격적인 인터뷰》라고 대서특필한 그 접견과정에 있은 이야기들이다.

22

일심단결과 군력

 

위대한 장군님을 뵙는 첫 순간에 벌써 그이께서 지니신 뜨거운 동포애와 민족적인 자존심, 넓은 도량에 심취된 대표단성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고싶은 심정을 누를수 없었다.

이야기도중에 장군님께서는 가까이에 있는 한 언론사사장을 부르시였다.

머리희슥한 사장이 정중히 일어서서 몸가짐을 바로하였다.

장군님께서 그에게 물으시였다.

《언론기관에서 일한지 몇년이나 되였습니까?》

물으시는 뜻을 알수 없었던 그는 머뭇거리다가 《예, 수십년이 되였습니다.》라고 말씀올렸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뜻밖에도 《그러면 그동안 한 80~90%는 반공기사를 썼겠구만.》라고 말씀하시였다.

폭소가 터졌다.

직업적인 타성으로 장군님의 질문에 물음표를 달고 잔뜩 신경을 도사리고있던 언론사사장들은 그이의 통속적인 말씀에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분위기가 일시에 달라지자 그들은 알고싶은, 묻고싶은 충동이 불같아져 불쑥불쑥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상밖의 인터뷰가 진행되게 되였다.

한 언론사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국방위원장님, 사회주의를 굳건히 고수하시는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장군님께서는 즉석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내 힘은 군력에서 나온다. 내 힘의 원천으로는 두가지가 있는데 첫번째가 일심단결이고 두번째가 군력이다. 군력이 있어야 외국과의 관계를 자주적립장에서 풀어나갈수 있다. 다른 나라와 친하자고 해도 튼튼한 군력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리조 말엽의 대원군이나 민비신세가 될수 있다. …

남측성원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하였다.

군력이 약했던탓에 우리 민족이 당한 치욕의 력사가 생각나서뿐이 아니였다.

장군님께서 펼치시는 선군정치, 정녕 그 위대한 정치가 없었더라면 대국들의 짬에 끼운 우리 조선은 과연 어떻게 되였겠는가. 국권은 고사하고 다른 나라들의 각축전장이 되여 인민들은 란리에 시달리고 나라는 페허가 되였을것이다.

그러니 선군정치는 분명 공화국북반부인민들만이 아니라 남녘동포들, 7천만 온 겨레의 운명을 지켜주는 백전백승의 보검인것이다.

한다하는 언론거두들은 선군정치가 어찌 보면 정치리념이기 전에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고수의 위력한 무기라는 점에 더 가깝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23

뿔난 사람이 없으니 와서 보게 하시오

 

이날 남측언론사 사장들과 식사를 함께 나누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남조선의 일부 언론들이 북남관계문제가 터지면 금시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러저러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께서 보기에는 그 사람들이 북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공화국의 현실을 외곡한 책들만 보고 딴소리를 하고있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북에 뿔난 사람들이 없으니 와서 보게 그런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꼭 데려와서 그들이 북조선의 실상을 제눈으로 보게 해야 한다고 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우리는 같은 민족이다, 이제 언론은 통일이라는 큰 위업에 서서 인민들을 위해 선구자역할을 해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사실 남조선의 일부 보수적인 언론들은 편견과 외곡으로 공화국에 대하여 나쁜 소리들을 많이 하고 민족내부에 대결의식을 조장해왔으며 북에 대해 객관적으로 소개한다고 하면서도 과거 랭전시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장군님의 말씀에 자극을 받은 남조선언론사 사장들은 저저마다 자기들의 지난 시기 보도자세를 돌이켜보면서 자책어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24

합작도 우리 민족끼리

 

언론사대표들은 점점 더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무랍없이 올리는 질문들에 위대한 장군님께서 해박한 식견과 철의 론리, 예리한 판단과 해학적인 설명으로 명쾌한 대답을 주시는데 신명이 났던것이다.

어느 한 언론사대표가 남에게 뒤질세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방위원장님, 북의 만화영화제작과 콤퓨터쏘프트웨어의 수준이 세계적입니다. 그러니 이 분야에서 다른 나라와 합작하여 해외에 진출하면 돈을 많이 벌수 있을것 같습니다.》

평양의 여러곳을 참관하는 과정에 공화국의 발전된 모습 특히 만화영화제작과 콤퓨터기술분야의 비약적인 성과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인차 말씀을 안하시고 한바탕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말씀을 올린 대표는 물론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과 의문이 실리였다.

(북은 외부와의 관계문제에서 심중하다는데 혹시 외람된 말씀을 올리지 않았는지?! …)

이어 웃음을 그치신 그이께서는 대표들을 둘러보시면서 말씀하시였다.

북과 남이 이 분야에서 합작하면 우리가 50을 가지고 남이 50을 가지는것으로 돈이 다 우리 땅에 떨어지게 되겠는데 무엇때문에 다른 나라와 합작하겠는가. …

순간 모두의 가슴이 후두둑 높뛰였다.

더 생각해볼 여지가 없이 너무도 명백한 장군님의 말씀, 그 말씀 한마디에서 모든것을 민족리익의 견지에서 보고 대하며 민족을 우선시하시는 그이의 숭고한 뜻이 거대한 바다가 되여 파도쳐온것이였다.

그들의 뇌리에는 일시에 6. 15공동선언에 명기된 그 유명한 표현이 떠올랐다.

우리 민족끼리!

어려운 조건에서도 만난을 이겨내며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고 겨레를 위하시는 장군님의 뜨거운 민족애가 여섯자로 응축되여있는 우리 민족끼리야말로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가 통일의 그날까지 높이 들고나가야 할 투쟁의 기치임을 그들은 절감하였다.

장군님께서는 한마디의 명답으로 우리 민족끼리의 구호가 빈말이 아님을 천명하시였고 분렬의 비극을 끝장내자면 7천만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통일의 대명제를 다시한번 강조하시였던것이다.

25

통일은 언제?

 

어느덧 시간은 많이도 흘렀다.

남측언론사대표들은 위대한 장군님을 한자리에 모신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시간의 흐름도 아랑곳않고 알고싶던 문제들을 말씀올리기에 바빴다. 그러다나니 자연히 질문의 폭이 넓어져 조국통일문제에로까지 이어졌다.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있던 한 언론사대표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국방위원장님, 통일의 시기가 언제쯤 될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대표들은 모두 흠칫 놀랐다.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 즉석에서 예언을 바라는것과도 같은 일종의 무례라고 생각되였기때문이였다.

사실 반세기이상 우여곡절을 겪고있는 조국의 통일이 언제 된다고 그 누가 즉시 꼭 찍어서 결론할수 있겠는가.

곱지 않은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자 그는 얼굴을 슬며시 붉혔다. 장군님을 직접 뵙고 온넋이 심취되여 그이의 고견을 받고저 올린 질문이였는데 그만 좌중의 눈총을 받게 되니 당황해졌던것이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그 질문도 흔쾌히 받아들이시였다. 그이께서는 우선우선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시더니 명백히 말씀하시였다.

통일시기는 북과 남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우리가 어떻게 결심하고 우리 민족끼리 어떻게 힘을 합치는가에 따라서 통일은 이제 당장이라도 실현될수 있다. …

박수갈채가 터져올랐다.

장군님께서 어떤 대답을 주실가 하고 마음을 조이던 남측대표들의 얼굴마다에는 경탄의 빛이 일었다.

장군님의 말씀의 뜻도 깊은것이지만 그처럼 미묘하고 까다로운 질문에 어쩌면 그리도 명쾌한 대답을 즉석에서 주실가 하는 신비스러움이 온넋을 꽉 틀어잡은것이였다.

6. 15공동선언의 기치밑에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치고 민족대단결을 실현한다면 그것이 곧 통일이다.

알고보면 진리는 언제나 단순하다 하거늘 어렵고 복잡하게만 생각했던 통일의 시기를 한마디로 천명해주셨으니 그들이 어찌 장군님의 비범함에 탄복하지 않을수 있었겠는가.

26

마음 같아서는…

 

화기애애한 동포애의 정이 넘치는 대화가 기탄없이 흐르는 가운데 한 언론사사장이 일어나 위대한 장군님께 말씀올렸다.

《얼마전에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9월에 진행되는 시드니올림픽경기대회에 국방위원장님과 김대중대통령을 초청하였는데 위원장님의 의향은 어떠하십니까?》

일순 좌중은 침묵에 잠겼다.

시사성과 정치성을 띤 매우 까다로운 질문이였다.

잠간 사이를 두신 장군님께서는 시간을 내지 못하여 제 민족이 사는 가까운 서울에도 가지 못하고있는 때에 남의 나라인 먼 시드니에까지 어떻게 가겠는가고 반문하시고는 나직이 말씀을 이으시였다.

《사실 서울을 방문하여 남녘에 있는 우리 동포들과도 아직 인사를 나누지 못하였는데 먼 시드니에까지 가서 <배우>노릇을 할 멋이야 없지 않습니까.》

롱담속에 절절한 동포애를 담으신 장군님의 말씀에 언론사대표들의 눈가에 뜨거운것이 고이였다.

사전에 제출된 서면질문도 아닌 즉석질문에 대한 대답치고는 문장문장, 자자구구 참으로 웅심깊고 신비스러운 명답들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림기응변의 기지에서 흘러나온 명답이 아니였다. 늘 소중히 품고계시는 우리 장군님의 열화와 같은 조국애, 민족애의 분출이였다.

언론사대표들은 신비와 감동의 세계에 잠겨 오찬회관례에 어긋난다는것도 감감 잊고 그이의 말씀을 한자라도 흘릴세라 수첩에 부지런히 적어나갔다.

그후 남조선의 신문들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남조선언론사대표들을 위한 오찬석상에서 하신 말씀전문을 일제히 실었다.

실로 조국통일사에 길이 전해질 인터뷰였다.

27

상상도 못한 생일상

 

남조선언론사대표단이 위대한 장군님의 배려로 혁명의 성산 백두산을 참관하고있던 때인 주체89(2000)년 8월 10일이였다.

그들의 숙소로 우리의 한 일군이 찾아와 다급히 물었다.

《<중앙일보> 사장선생이 누굽니까?》

《예, 제가 <중앙일보> 사장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오늘이 선생의 생일이지요?》

《예-에?! …》

두눈이 휘둥그래졌던 사장이 속구구를 해보더니 얼굴색이 밝아졌다.

《아, 맞습니다. 오늘이 바로 내 생일입니다.》

백두산참관에 흥분되여 생일도 감감 잊고있던 사장, 그는 오히려 그게 즐거워 소리내여 웃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럽니까?》

우리 일군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오늘이 선생의 생일이니 가서 축하를 해주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김정일국방위원장님께서요?! …》

사장은 깜짝 놀라 선자리에 말뚝처럼 굳어졌다.

《장군님의 배려로 생일상을 차렸으니 어서 갑시다.》

그리하여 이날 백두산밀영고향집이 자리잡은 소백수기슭에서 사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베풀어졌다.

당사자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던것은 말할것도 없고 함께 온 남조선언론사대표들도 장군님께서 본인도 잊고있던 생일까지 헤아려 축하연까지 베풀어주신데 대해 감동을 금치 못했다.

사장은 남조선에 돌아가자마자 장군님의 뜨거운 동포애적사랑이 깃든 그 사연을 출판물에 실어 온 세상에 전하였다.

28

조선땅이 찌그러질수 있다

 

주체91(2002)년 4월 4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평양을 방문한 남측 특사를 동포애의 정으로 따뜻이 맞아주시였다.

한없이 인자하신 장군님의 위인적풍모에 감동을 금할수 없었던 특사는 이날 그이께 여러가지 문제들을 제기하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았다.

북남철도와 도로련결문제가 상정되였을 때였다.

특사는 신의주-서울사이의 철도와 개성-문산사이의 도로련결문제에 대하여 말씀올리였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너그럽게 웃으시면서 신의주-서울사이의 철도만 련결할것이 아니라 동해선철도도 련결하여야 한다고, 신의주-서울철도만 련결하면 조선땅이 찌그러질수 있다고 지적하시였다.

참으로 생동한 비유였다.

장군님의 유모아적인 말씀에 특사는 얼굴이 벌개지고 좌중의 사람들은 웃음을 금치 못하였다.

한마디의 비유속에 백마디의 의미가 담겨진 그이의 말씀.

정녕 그러했다. 동서의 철도를 다 련결하여야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실질적으로 이바지할수 있고 실리도 크며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도 앞당겨 실현할수 있는것이다.

7천만 온 겨레의 민족적리익과 통일조국의 먼 미래까지도 내다보시고 하신 장군님의 말씀.

-조선땅이 찌그러질수 있다!

그이의 의미심장하면서도 신통한 비유는 그후 여러갈래의 북남대화장들에서 하나의 이야기거리로 되여 상대방들을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29

재벌이 받은 재부

 

위대한 장군님께서 6. 15공동선언을 발표하시여 민족앞에 통일의 리정표를 세워주신 직후였다.

평양을 방문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그의 아들인 정몽헌회장을 만나주시는 장군님의 안광에는 시종 따뜻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그들의 건강상태며 기업형편을 하나하나 료해하시고 개성공업지구건설과 금강산관광사업을 비롯한 경제협력사업에서 제기되는 문제들도 모두 풀어주시고나서 정주영일행에게 참으로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명예회장선생은 민족이 화해하는 길을 열어놓은 개척자나 다름없다. 명예회장선생의 공적은 앞으로 력사에 큰 장을 차지하게 될것이다. …

순간 좌중에는 뜨거운 격정이 차넘쳤다.

민족이 화해하는 길을 열어놓은 개척자!

력사에 큰 장을 차지하게 될 공적!

《고맙습니다, 국방위원장님!》

젖어든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그이를 우러르는 80고령의 명예회장.

일생을 리기적인 치부를 위해 정신없이 뛰여다닌 불미스러운 과거사가 돌이켜지는듯 그의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맺혀있었다.

《기업으로 민족의 자부심을 높이 세우겠다.》는 제나름의 신조를 안고 살아왔으나 진정한 애국의 길을 몰랐던탓에 갈길 몰라 방황해온 수십년세월, 한때는 정계에도 진출하여 《대통령》후보로도 나서보았던 남조선의 손꼽히는 재벌로서의 그의 극적인 인생전환은 장군님의 넓으신 도량과 포옹력에 의하여 마련되였다.

여생이나마 후회없이 조국과 인민을 위한 길에 살려는 그의 심정을 헤아려주시고 장군님께서는 그를 북남경제협력의 길, 민족화해의 길로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그가 걸어온 기나긴 과거가 어둠이였다면 장군님의 품에 안겨 애국의 길을 걸어온 길지 않은 생은 광명이였다.

그런데 오늘 민족의 령수, 겨레의 어버이께서 또다시 그렇듯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는것이다.

그 믿음, 그것은 인간의 재부중의 재부였다.

그는 진짜 재벌이 된셈이였다.

장군님께서는 한생 개인적인 재부를 위해 뛰여다닌 메마른 그의 삶에 민족적인 향취를 부어주어 조국사에 길이 빛내주신것이다.

정주영이 자기의 한생에, 아니 우리 민족사에 북남경제협력의 개척자라는 영예로운 이름으로 남게 된 뜻깊은 이날은 주체89(2000)년 6월 29일이였다.

30

북남관계의 첫사랑-현대

 

주체94(2005)년 7월 16일, 한폭의 그림을 방불케 하는 금강산의 경치는 정말 아름다웠다.

푸른 숲 우거진 산, 지저귀는 온갖 새들, 맑은 물 흘러내리는 시내가…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금강산에 와있는 정몽헌회장의 미망인 현대그룹 회장과 그의 딸 그리고 현대아산 부회장을 만나시였다.

그들을 따뜻이 맞아주신 장군님께서는 정몽헌선생은 정말 아까운분이였다고 추억하시면서 그만 불상사가 생기여 가슴이 아픈 그 심정을 이루 다 말할수 없다고 못내 애석해하시였다.

현대그룹 회장일행은 솟구쳐오르는 격정을 금할수 없었다.

사실 정몽헌회장의 사망은 《한나라당》이 불법으로 꾸며낸 《특검》의 칼에 의해 빚어진 명백한 정치적타살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철면피하게 저들의 죄행을 가리우고 그 책임을 남에게 넘겨씌워보려고 온갖 비렬한 권모술수를 다 꾸미였다.

그때 공화국에서는 《한나라당》의 이 후안무치한 행위를 전민족의 이름으로 단호히 규탄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민족화해협력의 개척자의 한사람인 정몽헌회장이 뜻밖에 사망한데 대해 못내 애석해하시면서 심심한 조의를 표시하도록 하시였으며 그후에는 현대와 그의 유가족들에게 크나큰 사랑과 믿음을 거듭 안겨주시였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따뜻한 미소를 담으시고 현대그룹 회장에게 이런 말씀을 주시였다.

사람에게 있어서 첫사랑이 중요하다. 우리는 북남관계에서 당국보다 훨씬 앞서 현대와 첫사랑을 시작하였다. …

그러시고는 정주영명예회장과 정몽헌회장이 열어놓은 북남관계를 가문은 대를 이어가면서 잘해나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나는 북남관계에서 현대가 그 어느 기업보다 모범이 되리라고 믿습니다.》라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정몽헌회장의 미망인과 남측성원들은 부풀어오르는 감정을 누를길 없었다.

첫사랑!

무릇 사람들에게 있어서 첫사랑이라고 하면 일생토록 잊혀지지 않는 아름답고 고상하고 귀중한것으로 일러왔다.

헌데 장군님께서 현대와의 관계를 첫사랑이라고 불러주시지 않는가.

북남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단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귀중한 시간을 바쳐주시고 북남관계의 첫사랑으로까지 민족앞에 내세워주시는 장군님의 넓으신 도량과 믿음앞에 일행은 우리 민족끼리의 숭고한 리념을 다시한번 깨닫게 되였다.

31

10월상봉의 나날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96(2007)년 10월 2일부터 10월 4일까지 평양에서 남측의 로무현《대통령》을 만나시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아래 조국을 통일할데 대한 6. 15공동선언의 실천강령인 10.4선언을 채택하시였다.

그 나날에 있은 일이다.

32

군사분계선을 넘어 륙로로

 

10월상봉의 첫 파격은 다름아닌 땅길이였다.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고저 김구, 김규식선생과 최동오를 비롯한 민족주의인사들이 통일애국의 뜻을 품고 결연히 38°선을 넘었던 그 땅길! 분렬 62년만에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남조선《대통령》이 걸어서 넘어오는 파격적인 현실이 펼쳐졌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수뇌상봉을 앞두고 민족의 통일을 위한 일인데 우리가 그 어떤 형식과 틀에 매달리면 안된다고 하시며 38°선의 륙로를 따라 들어오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뿐만아니라 먼곳에서 오는 친혈육을 동구밖입구에까지 나가 반갑게 맞아들이던 조상들의 옛 풍습그대로 우리 일군들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서는 남측일행을 현지에 나가 맞아들이도록 동포애의 뜨거운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세계의 각광속에 로무현과 뜨겁게 상봉하시던 력사의 그날 장군님께서는 김대중《대통령》은 하늘로 오셨는데 로《대통령》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륙로로 오셔서 정말 큰 의미가 있다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민족의 통일을 위함이라면 천하도 통채로 열어주시는 장군님의 넓으신 도량과 포옹력에 매혹된 남측대표들은 저저마다김정일국방위원장님은 참으로 인정이 많으시고 대담하시고 통이 큰 지도자이시다.》, 《분단력사에 처음 있은 이번 륙로정상회담의 길을 마련해주신 국방위원장님께 인사를 드린다.》 《로무현대통령은 임기말기에 행운을 받아안았다.》고 감격을 금치 못해하였다.

33

정례적이냐 수시로이냐

 

력사적인 첫 회담이 진행될 때였다.

회담과정에 문득 로무현이 위대한 장군님께 《정상회담》의 정례화를 제안해올리였다.

뜻밖의 제의에 회담장안의 분위기는 한순간 긴장되였다.

바로 이때 장군님께서는 즉석에서 친척집에 갈 때 정례적으로 가는가? 수시로 놀러가는것이다, 국가간의 관계라면 정례적이라는 말이 맞지만 북남관계에서는 맞지 않다, 수시로 만난다고 해야 맞지 않겠는가고 하시며 북남관계는 언제든지 편하게 래왕할수 있는 관계라는 내용의 명쾌한 대답을 주시였다.

순간 크나큰 충격과 감동이 온 회담장에 차넘쳤다.

북과 남의 수뇌상봉이 국가와 국가간의 만남이 아니라 민족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수시로 만날수 있는 한민족, 한혈육의 만남이라는 너무도 명철하고 동포애적인 그이의 말씀에 남측대표모두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회담전날 4. 25문화회관광장에서 환영행사때 벌써 따뜻한 환대와 파격적영접을 베푸신 장군님의 사려깊은 모습에서 멀리 떨어져 지낸 혈육을 맞이하는듯 한 친근감에 피는 역시 물보다 진함을 온몸으로 절감했던 그들이였다.

남측의 한 대표는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은 남북관계를 국가적관계로 보는것이 아니라 집안끼리 모인다는 관점이 강하셨다.》고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34

《무료로 오셔도 됩니다》

 

가깝고도 멀게만 여겨왔던 평양, 두렵고도 생소한 첫 평양길에서 로무현은 과연 무엇을 안고 갔던가.

그것은 한마디로 자기들을 외국의 국빈이 아니라 한민족의 귀빈으로 따뜻이 대해주시는 위인의 숭고한 민족애, 뜨거운 인간애였다.

상봉 전기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잠자리는 편했습니까, 점심을 잘 드셨습니까, 옥류관국수를 드셨다는데 평양국수와 서울국수중 어느것이 더 맛있었습니까, 수시로 만나자고 했으니 또 많이 만납시다 등 대통령내외와 수행원들의 생활을 가족처럼, 친지처럼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더우기 그이께서 10월 3일 오후 회담을 앞두고 로무현《대통령》이 무리하게 여러차례나 영빈관현관까지 나오게 하지 말고 자신께서 회담장복도를 따라 걸어들어오면 문앞에서만 영접하도록 해주신 사려깊은 조치는 《대통령》내외는 물론 남측일행모두를 크게 감동시켰다.

하기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단 한번의 상봉을 통해 장군님의 숭고한 민족애와 풍모에 크게 감복한 로무현은 옥류관연회때 《북에 막상 와보니 음식도 같고 잠자리도 같고 통역도 필요없는 한식구라는 정말 포근한 감을 느꼈다.》고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터놓았다.

그가 회담일정을 성과적으로 마치고 돌아가기에 앞서 장군님께 퇴임후 다시한번 평양을 방문하고싶다고 심중의 말씀을 스스럼없이 올렸다.

장군님께서는 환히 웃으시며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무료로 오셔도 됩니다.》라고 로무현의 청을 쾌히 승낙해주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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