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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날이 가까와오자 가뜩이나 진정을 모르고 뒤설레던 바다는 피냄새를 맡은 맹수처럼 더 사납게 날뛰였다. 꿈틀거리는 수평선으로부터 허연 거품을 일으키며 파도가 줄지어 밀려들었다. 파도머리를 타고 불어치는 삭풍이 어찌도 차거운지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얼음바늘들이 날아와 뼈속깊이 들이박히는것만 같았다.

스무날전에도 날씨가 갑자기 차지더니 바람이 터지자 해마다 이맘때면 그러하듯이 도루메기떼가 다투어 밀려들었다. 하얗고 매끈매끈한 배때기에 좀닭알만 한 알을 찬 살진 도루메기들이 구름처럼 밀려다니다가 부두벽이나 함정들의 선체에 부딪치고 덤장안에 들어가 갈팡질팡하다가 급해맞은 나머지 그물에 다닥다닥 알을 쓸었다.

주변의 수산사업소는 물론이요, 군항의 부업선들도 덤장이 터질듯 들어찬 도루메기를 퍼내노라 신바람이 났었다. 알이 잔뜩 붙은 그물을 꺼내서 바다기슭의 모래불이나 부두에 펴놓으면 아주머니들이 모여들어 도루메기알을 떼내노라 잽싸게 일손을 놀린다. 덤장에서 떼낸 도루메기알이 여기저기에 더미를 이루었다.

도루메기바람이 좀 즘즉해지면서 날씨가 풀리는 기미를 보이더니 웬걸, 또 기온이 쑥 내려가면서 찬바람이 터진것이다. 줄파도를 타고 연안으로 밀려드는 동태떼를 가리켜 동지받이라고 부른다. 이 동지받이가 동해안은 물론이요, 자강도나 량강도의 산지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 방방곡곡에 물고기비린내를 물씬물씬 풍기며 집집의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흥하는 나라엔 이처럼 물고기떼도 다투어 밀려드는 법이다.

문자그대로 팔뚝시같은 동태를 선창에 넘치게 실어서 배머리가 위태로울 지경으로 푹 잠긴 운반선이 만선기를 펄펄 날리며 군항에 곧장 들어왔다. 즉시 군항에는 물고기비린내가 풍겼다. 각 구분대의 식당들에 첫물동태가 공급되였다. 구잠함 103호의 취사장에서도 동태국을 끓이는 달짝지근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풍겨나왔다.

《정치부함장동무, 오래간만에 동태국을 끓이는데 식사를 하고 집에 들어가오.》

그날 밤 당직근무를 서게 된 함장이 이렇게 권했지만 박철호는 사양했다.

《집에 가서 먹지요.》

《하긴 가족들에게도 동태를 공급했으니까 집에서도 동태국을 끓였겠지. 아주머니와 오붓이 마주앉아 따겁고 얼벌벌한 동태국을 퍼먹으면 얼었던 몸이 활 녹으면서 기운이 부쩍 날거요. 그럴 때 거사도 하는거지.》

《원… 함장동무두…》

눈앞에 그 광경이 얼른거리자 박철호는 그저 례사로운 하루에 불과한 오늘이 명절날처럼 여겨져서 마음이 흥겨웠다.

새 훈련이 시작되여 어느새 보름이 지나갔다. 래일은 휴식날이다. 그러니 오늘은 집에 들어가 하루밤 자고 래일은 세대주구실을 해야 했다. 그것은 동태덕대를 세우는 일이다.

이름난 어장을 낀 이 고장에서는 동태철을 앞두고 집집마다 앞뜨락이나 뒤울안에 동태덕대를 맨다. 동태잡이가 시작되면 거기에 칡넝쿨을 코를 꿴 묵직하고 미끈거리는 동태두름을 주런이 걸어놓는다. 그것이 밤이면 꽛꽛하게 얼고 낮이면 해볕에 녹고 하면서 해풍에 주근주근 마른다. 양력설이 지나면 꽁지는 다 말라서 장작개비처럼 꼿꼿해지고 살이 많고 기름기가 있는 몸통과 대가리는 채 마르지 않아서 꾸둑꾸둑해진다. 이런걸 벗겨서 구워먹으면 별맛이다.

3월초에 이르러 봄바람을 쏘이면 동태는 바싹 말라서 건태로 된다. 이것을 두름채로 벗겨서 함선의 식품창고에 쌓아두었다가 해상경비근무에 나가면 간식으로 먹는다. 건태를 나무망치로 두들겨서 부근부근해지면 찢어먹는다. 달짝지근하면서도 고소하고 비린내가 약간 풍기는 건태쪼박을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으면 멀미도 나지 않는다. 뭐니뭐니해도 파도사나운 항해길에서는 건태보다 좋은 간식이 없다.

이 계절에 동태를 많이 말리워서 항해용간식으로 함선에 보내주는것은 군관가족들이 즐겨 맡아서 해내는 일이다. 그래서 안해는 겨울철이 다가오자 김치를 담그려고 독을 가시고 양념감을 준비하면서 남편에게 동태덕대를 세워달라고 부탁했던것이다. 박철호는 대체로 구잠함에 나와서 해병들과 함께 지내다나니 아직 안해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이렇게 동태바람이 부니 더는 미룰수가 없었다.

박철호가 건늠다리를 타고 어둠에 잠긴 부두에 내려서는데 코앞에서 난데없이 돼지가 꽥꽥 소리를 질렀다.

《두! 두! 이놈아! 어서 건늠다리에 올라서지 못해?》

체통이 우람진 갑판장이 형길이와 함께 큰 돼지를 건늠다리쪽으로 몰아가려고 애를 쓰는중이였다. 어둠속에서도 알아볼수 있을 정도로 피둥피둥 살이 진 돼지는 련속 후려치는 회초리에 얻어맞으면서도 도망치려고 이쪽저쪽으로 방향을 꺾기도 하고 고함을 지르며 뻗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불쑥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방금 건늠다리에서 내려선 박철호의 앞으로 고분고분 다가왔다.

죽음을 예감했는지 필사적으로 발악하는 돼지를 몰고오느라 어지간히 맥을 뽑은 갑판장과 형길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히야! 그놈이 주인을 알아보는군요.》

《거 정말 명물인데요.》

박철호는 자기앞에 다가와 반갑다고 꼬리를 저으며 주둥이로 바지가랭이를 툭툭 건드리는 돼지의 실한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주었다. 뜨물이 얼어붙어 바늘같은 털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안해가 불편한 몸으로 기를 쓰고 기르던 얼룩돼지가 분명했다. 지난봄에 강아지만 한 새끼를 가져왔는데 정성다해 기르니 이젠 송아지만 해졌다.

살이 얼마나 졌는지 잔등이 함에서 방현재로 쓰는 고무바퀴처럼 두껍고 탄력이 있어서 뼈가 잡히지 않았다.

구경거리가 생겼는지라 여기저기서 해병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렸다.

《여! 그놈이 정말 크구만.》

《어느 집 돼지요?》

수뢰초소장 김중복의 호기심이 어린 물음에 형길이가 씩 웃으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정치부함장동지의 아주머니가 기른겁니다.》

선미갑판에 서있던 엄장석함장이 움쩍 놀랐다.

《뭐?! 그 돼지가 벌써 이렇게 컸는가?》

그가 놀랄만도 했다. 봄에 부대목장에 가서 한배에 낳은 새끼를 여러마리 가져다가 함의 군관사택들에 나누어주었다. 헌데 눈짐작을 해도 이 돼지는 자기 집 돼지보다 더 크고 살이 졌다.

《이게 몇키로요?》

갑판장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백키로가 넘을겁니다.》

《가져올 때 무게를 달구지 않았소?》

《달아보나마나지요. 내 눈은 저울눈입니다.》

갑판장이 이렇게 장담할만도 했다.

그는 열흘이 멀다하게 군관사택마을이나 주변농장과 어촌에 나가서 개나 돼지를 접수하여 끌어온다. 그러다나니 미립이 터서 개나 돼지를 구태여 저울에 달지 않고도 무게가 얼마쯤 나간다는걸 불과 한두키로그람 차이로 알아맞히군 했다.

엄장석은 갑판장의 자존심이 상할세라 넌지시 권고했다.

《이거야 정치부함장동무의 아주머니가 불편한 몸으로 힘들게 기른 돼지인데 그렇게 눈짐작을 하고 잡아먹으면 되나. 이제라도 저울로 정확히 달아보기요.》

갑판장은 약간 볼이 부어서 고집을 썼다.

《아, 글쎄 백키로가 조금 넘는다는데두요.》

《계산은 정확히 해야지. 군관가족들이 경쟁을 걸었거던. 누구네가 돼지를 제일 크게 기르는가 하고 말이요.》

갑판장은 그제서야 함에 올라가 막대기저울과 목도채를 들고왔다. 그리고는 날랜 솜씨로 돼지를 자빠뜨리고 노끈으로 발목을 묶은 다음 저울갈구리를 걸었다.

《자! 어서 들어올리게.》

함에서 제일 키가 큰 김중복이 형길이와 목도채를 저울손잡이에 꿰서 어깨에 메고 용을 쓰며 들어올렸다. 얼룩돼지는 죽는 소리를 쳤다.

엄장석은 전지불로 저울눈금을 비쳐보며 추를 움직였다.

정확히 103키로그람이였다.

엄장석은 눈을 번쩍 뜨더니 경사라도 난듯이 떠들어댔다.

《어랍쇼! 이게 뭔가? 103키로그람이요. 우리 함의 전술번호와 신통히도 같구만. 하, 글쎄 신통하다니까.》

모두들 기뻐하며 환성을 올렸다.

박철호는 흡족했다. 해병들을 기쁘게 해준 안해가 고마왔고 사랑스러웠다.

갑판장이 큰소리를 쳤다.

《자, 어떻습니까? 내 눈이 정말로 저울눈이지요?》

엄장석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래그래, 동문 타고난 갑판장이지. 헌데 이 돼지를 어쩐다?! 이젠 날이 어두워졌으니 부두에 비끄러매놓았다가 래일 잡아야 하겠군.》

《래일로 미룰게 있습니까. 저녁식사를 하고나서 제꺽 잡아 손질해야지요. 래일 아침엔 비게가 둥둥 뜬 돼지고기국에 순대랑 듬뿍 먹고 어뢰정편대와 축구경기를 하자는겁니다.》

《좋소, 그런데 말이요.》

엄장석은 남들이 듣지 못하게 갑판장을 몇걸음 끌고가서 나직이 말했다.

《거 돼지를 잡을 때 발쪽을 잘 손질해서 얼구어두라구. 정치부함장동무의 아주머니가 래년 2월초에 아이를 낳을텐데 산모에겐 돼지발쪽이 좋다는거요.》

갑판장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다 생각이 있습니다. 뭐 발쪽뿐입니까. 돼지를 낸 집이니 한쟁기 뚝 떼서 보내야지요.》

그 말을 엿들은 박철호는 우정 덴겁을 했다.

《그러지 마오. 우리 집사람은 네발가진 짐승의 고기를 먹지 못하는 체질이요.》

《그럼 아주머니대신에 세대주가 잡수면 될게 아닙니까.》

거짓말을 해도 통하지 않으니 정말 난사다.

《내가 집에 들어가는 날이 한달에 며칠이나 되나. 절대로 그러지 마오. 래일 아침엔 함에 나와서 식사하겠소. 축구경기를 한다는데 이 중앙공격수가 집구석에 박혀있을수 없지.》

《꼭 나오십시오. 정치부함장동지가 경기에 나가야 승산이 있습니다.》

《응, 수고하오.》

래일 아침에 나올바에야 무엇때문에 집에 들어가겠는가. 그만둘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친 걸음이여서 박철호는 부두를 떠났다.

래일 오전에 축구경기를 한다니 동태덕대를 째는 일은 오후에 해야 했다. 혼자서 그 일을 어둡기 전에 해낼수 있겠는지는 모르겠지만…

군항에서 얼마간 떨어진 도래굽이에 군관사택마을이 오붓이 자리잡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마음이 따스해지고 즐거워지는 불빛이 창문마다 흘러나온다. 1동 2세대로 아담하게 지은 문화주택들이다.

박철호는 집마당에 들어가자 버릇처럼 돼지우리부터 들여다보았다.

한주일에 한두번 집에 들어오면 먼저 돼지우리에 다가가 그새 돼지가 얼마나 컸나 보는것도 하나의 재미였다. 그때마다 얼룩돼지가 꿀꿀대며 반기였는데 오늘은 빈 돼지우리를 보니 좀 서운한감이 들었다. 그는 동태덕대를 맬 자리를 보려고 뒤울안에 돌아갔다. 뭔가 이마에 부딪쳤다.

이크! 이게 뭐야?

어둠속에 손더듬을 하니 가로질러놓은 줄당콩대가 잡혔다. 눈정기를 모아 자세히 보니 동태덕대였다. 굵은 통나무로 네귀에 기둥을 세우고 줄당콩대를 사이사이 가로대고 새끼줄로 단단히 묶었다. 그는 두손으로 덕대를 쥐고 흔들어보았다. 움쩍도 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동태를 적어도 200코는 걸수 있겠다. 한코에 스무마리를 꿰니 예닐곱키로는 잘 나간다. 덕대의 크기가 이만하면 동태를 한톤반이나 걸어 말리울수 있다.

흐뭇한 속에 미안한감도 든다.

몸이 불편한 안해가 덕대를 혼자 세웠을리 만무다. 누구의 도움을 받았을가? 모름지기 돼지접수를 왔던 갑판장과 형길이가 도맡아해주었을테지. 이거 오래간만에 세대주구실을 해보려다가 선코를 떼웠는걸…

방안에 있는 안해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창가로 다가와 밖에 대고 다정히 몰었다.

《철호동지나요?》

《응.》

박철호는 얼른 대답하며 뜨락으로 나갔다.

안해가 서둘러 부엌으로 달려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그 동작에 말로는 표현하지 않는 반가움이 어렸다. 더운 김과 함께 구수하고 달짝지근하면서도 매울사 한 동태국냄새가 확 풍겼다.

박철호는 방으로 들어갈수 있게 부엌 한쪽에 깐 널마루에 올라서며 기분이 좋아서 코를 흠흠거렸다.

안해가 찬기운이 씽 풍기는 남편의 모자와 외투를 받아들며 정찬 어조로 나무랬다.

《오셨으면 인차 들어오실게지 뒤울안엔 왜 갔댔어요?》

《동태덕대를 구경했지.》

《그걸 구경하자고 오셨나요?》

《실은 그걸 매주려고 왔지. 그런데 구경이나 했으니 이거 미안하구만.》

방안에 들어간 박철호는 안해에게 군복까지 벗어주고나서 따스한 아래목에 앉아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길은 뜨개질감이 담긴 자그마한 바구니에 머물렀다. 거기엔 뜨개질을 방금 마감한 손수건만 한 내의가 있었다. 인형에게나 입힐 정도로 작은것이다. 그밑엔 쬐꼬만 아래내의와 양말도 있었다. 이제 태여날 아기에게 입힐 옷가지들이다.

박철호는 가슴이 찡해서 눈을 감았다.

전쟁때 입은 타박상후유증으로 안해가 무사히 아기를 낳을수 없다는것이 산원의사들의 견해이다.

달리 말하면 이제라도 어머니가 될 생각을 그만두라는거다. 하지만 안해는 아기의 옷가지를 준비하고있다. 제 목숨은 끊어져도 아기는 낳겠다는 결심이 그 옷가지에 어려있었다.

함장의 말이 생각났다.

《꼭 무사할거요. 의지가 강한 녀성이니까.》

그래, 내 안해는 이미 결심을 했고 각오도 했지. 이제 와서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만약… 아니, 아니다! 그런 불상사는 절대로 생기지 않을것이다.

그는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해가 김이 문문 피여오르는 자그마한 둥글밥상을 들고 방안에 들어왔다.

흰쌀밥에 기름진 동태국과 보기 좋게 썰어놓은 통김치, 단출하면서도 푸짐한 상이다. 밖에서는 여전히 세찬 바람소리와 파도소리… 그래서인지 방안은 더 따스하고 아늑하게 느껴진다.

《어서 드세요.》

안해가 권했다.

그러나 박철호는 여전히 불안한 심경에 싸인채 굳어져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예요? 국이 식겠네.》

박철호는 그제서야 수저를 들었다.

《아! 이거 동태국이구만. 오래간만이요. 냄새가 기막힌걸, 당신도 함께 들기요.》

그는 자기의 불안한 심정을 안해가 알아차릴세라 수선을 떨었다.

《우리 함에서도 동태국을 끓였소. 함장동무가 나더러 식사를 하고 집에 들어가라는걸 뿌리쳤지. 당신이 끓여준 동태국을 먹고싶더군.》

《그러게 어서 드세요.》

박철호는 기름이 동동 뜬 걸죽한 국물을 한술 떠서 후후 불며 조금씩, 조금씩 마시였다.

삶은 고지와 애를 탕쳐서 만든 기름진 양념장을 친 뜨끈한것이 목구멍을 따갑게 지지며 넘어갔다. 얼었던 몸에 더운 기운이 확 퍼진다. 계속하여 하얗고 만문한 동태 한토막을 국물과 함께 먹었다.

불안하던 마음이 안정되고 흥이 났다.

《동태국을 참 맛있게 끓였구만. 거 손맛이란게 있긴 있는 모양이다.》

남편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기쁘고 즐거운지 안해는 방긋이 웃으며 물었다.

《그건 무슨 말이나요?》

《당신이 만든건 아무거나 다 맛있으니 하는 소리지. 우리 동무들도 당신이 담근 김치가 각별히 맛이 좋다더군.》

춘희는 의아해서 눈을 약간 치떴다.

《저를 비행기에 태우는 리유가 뭔가요?》

령리하고 세심한 안해앞에서 박철호는 머쓱해졌다.

《거야 뭐… 미안해서 그러는거지.》

춘희는 정색해서 따지고들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나요?》

《당신이 힘들게 돼지를 기르게 하고 동태덕대까지 매게 했으니 남편이란 사람이 미안하지 않을수가 있소.》

《그런 말씀 마세요. 돼지는 군관 안해라면 응당 길러야 하는거고 동태덕대는 갑판장과 형길동무가 매준겁니다. 참, 그들이 끌고간 우리 얼룩이를 보셨나요?》

박철호는 부지런히 밥과 국을 퍼먹으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응, 그놈이 살이 졌더군.》

《갑판장동문 100키로가 넘을것 같다더군요.》

《갑판장이 저울눈이요. 저울에 달아보니 정확히 103키로그람이더군. 신통히도 우리 함 전술번호와 같다고 모두 환성을 올렸소.》

춘희는 너무 기뻐서 손벽을 쳤다.

《야! 정말 신통하군요.》

환성을 올리는 해병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것만 같다. 돼지를 기르노라 수개월이나 뜨물을 끓이며 역사질을 한 수고가 보람으로 여겨지고 덧쌓인 피로는 봄눈처럼 녹아버린다. 해병들을 위해서라면 그런 수고를 더하고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철호동지, 래년 봄엔 돼지새끼를 두마리 가져오자요.》

《꽤 기를수 있을가?》

《예, 두마리를 각각 100키로가 넘게, 꼭 103키로가 나가게 기르겠어요. 이젠 경험이 생겼으니 문제없어요.》

이렇게 장담한 춘희는 아직도 상등병견장을 달고다니는 김형길이 생각나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형길동문 이번에도 군사칭호가 올라가지 못했더군요.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들어요.》

박철호도 그때문에 어지간히 속을 쓰는터이나 짐짓 대수롭지 않은듯 말했다.

《뭐라오. 편제가 그런걸 어쩌겠소.》

춘희는 야속해서 남편을 흘겨보았다.

《그렇다면 직무를 바꿔주면 될게 아니나요.》

《나도 그럴 생각이였는데 본인은 수뢰수가 제일 마음에 든다는구만. 참, 그 동무의 누나를 찾는 일은 어떻게 돼가오? 그새 무슨 소식이 왔소?》

《편지가 몇장 오긴 했는데…》

춘희는 웃방에 올라가 편지봉투들을 들고 내려왔다.

김형길의 누나의 행처를 알아보려고 지난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놈들이 집단적인 학살만행을 감행한 마을들에 편지를 보냈더니 회답이 온것이다.

박철호는 얼른 수저를 놓고 편지를 보았다.

그것은 그저 회답편지가 아니라 미제야수들과 그 앞잡이들인 괴뢰군놈들, 악질적인 《치안대》놈들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들에 대한 고발장이였다. 놈들은 인간이 아니였다. 문자그대로 두발가진 승냥이들이였다. 무고한 인민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하여 쏘아죽이고 때려죽이고 불태워죽이고 생매장을 하거나 산채로 강과 호수에 처넣어죽이고…

상상만 해보아도 끔찍하고 치떨리는 처참한 광경이였다.

동태국냄새가 떠돌던 오붓하고 아늑한 방안에 갑자기 화약내와 함께 피비린내가 역하게 풍기는것만 같았다.

 

…놈들은 우리 마을에서도 피비린내가 나는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칠순나이로인이나 철부지들까지도 가리지 않고 죽였습니다. 재진격을 할 때 우리 빨찌산부대가 마을을 해방하니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손을 꼽을 정도에 불과했지요. 우리는 뼈와 살이 탄 냄새가 풍기는 생매장터와 불에 그슬린 방공호, 식량창고와 저수지에서 수많은 시신과 유해를 찾아냈습니다.

밤나무골의 생매장터에서는 두어살나는 어린애를 등에 업은채 숨진 열두살정도의 소녀가 나타났습니다. 그 모습이란… 기가 차더군요. 원한과 증오심으로 빚은 조각상이랄지…

혹시 그 소녀와 아이가 거기서 찾는 대상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행방불명이 된 사람들도 있는데…

 

박철호는 편지를 쥔 손이 후들후들 떨려서 도무지 마저 읽을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거친 숨을 톺으며 그는 성급히 창가에 다가갔다.

창문을 두드리는 사나운 해풍, 끊임없이 울려오는 거친 파도소리… 그것은 울부짖음인가 복수를 부탁하는 소리인가, 무참히 학살당한 무고한 인민들의 혼이 오늘도 잠들지 못하고있는것이다.

춘희는 밥상을 거두고 설겆이를 하고서 방에 들어갔다. 남편은 어둠에 잠긴 창밖을 지켜보고있었다. 춘희는 방바닥에 널린 편지들을 치우고 이불장을 열고 이불을 내리웠다. 시어머니가 햇솜을 두툼히 넣고 비단으로 거죽을 씌워준 이불이다.

시어머니는 통베개의 량쪽모에 《행복》이라는 글자까지 금실로 수놓아주었다.

춘희는 이부자리를 펴고나서 남편의 뒤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피곤하실텐데… 주무시지 않겠어요?》

박철호는 선뜻 응할수가 없었다.

원한을 품고 쓰러진 령혼들이 오늘도 복수를 부르짖는다. 그런데 군관인 내가 따스한 아래목에서 비단이불을 덮고 《행복》이라는 글자가 수놓아진 베개를 베고 누워있어야 한단 말인가.

여느 사람들에게는 례사롭고 평범한 그것이 이 순간 박철호는 막 죄스럽게 여겨져 숨조차 가빠났다.

그렇다, 전쟁의 험한 상처는 오늘까지도 아물지 않고 독을 쓰면서 행복한 새 가정에도 심리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아픔을 주고있었다. 그 진통속에 새삼스레 깨달아지는것이 있다.

그것은 승냥이 미제원쑤놈들과 피의 결산을 하고 조국을 통일하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누구에게도 완전한 의미에서의 행복이란 있을수 없다는것이였다.

춘희는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저도 모르게 속생각을 입밖에 냈다.

《형길동무가 오늘도 누나와 헤여지던 눈물겨운 이야기를 하더군요. 누나를 몹시 그리워해요. 편지나 해가지고는 안될것 같애요.》

박철호는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상념에서 채 깨여나지 못한채 의문이 어린 눈길로 안해를 바라보았다.

《저… 아무래도 제가 놈들이 대학살만행을 저지른 마을들에 직접 가보아야 형길동무 누나의 행처를 알아볼 실마리를 잡을수 있을것 같은데…》

그제서야 안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박철호는 펄쩍 뛰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요? 그건 안돼! 엄동설한에 그 몸으로 어딜 간다고그래.》

춘희는 입을 꼭 다물고 눈길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에는 남편이 아무리 만류해도 자기의 결심대로 하려는 고집이 어려있었다.

《당신은 형길동무 문제에 더 신경을 쓰지 마오. 첫달훈련을 끝내고 해상경비근무에 나갔다오면 여유가 생길테니 내가 가보겠소. 당신은 해산을 앞둔 몸이라는걸 잊지 말란 말이요. 그러지 않아도 난 당신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하고있소. 자, 어서 잠이나 자기요.》

박철호가 안해를 잠자리에 끌어들이는데 군항에서 배고동소리가 울려왔다.

아아앙!-

박철호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야말로 울부짖는듯 한 배고동소리.

그것은 구잠함 103호가 비상정황이 발생했을 때 승무원들을 다급히 부르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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