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박철호의 지휘에 따라 전투장구류를 갖춘 여섯명의 수색조원들이 중갑판에 정렬하였다.

《나는 형길동무와 지휘소를 장악하겠소. 기관조장과 갑판장은 기관실을, 수뢰분조장과 해남동문 병실을, 공급분대장은 창고를 장악할것.》

전투분담을 하는데 감시소에서 감시병의 보고소리가 청높이 울렸다.

《지휘소! 미국기발이 오른다!》

모두의 눈길이 감시병이 손짓으로 가리키는 외국선박의 선미마스트에 화살처럼 날아가박혔다.

마스트에 오른 기발은 분명 성조기였다. 침략과 략탈의 력사가 줄들과 별들로 얼룩진 기발을 보니 모두들 눈에서 불이 황 일었다.

박철호는 주먹을 추켜들며 목청껏 웨쳤다.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쑤인 미제침략자들을 소멸하라!》

습격조원들도, 모든 초소에서도 구호의 마감을 복창했다.

너무도 귀에 익고 입에 오른 구호였다. 전투함정들의 사령탑옆에 새긴 구호, 땅크와 대포, 장갑차들에도 새긴 구호였다. 그 구호를 미국함선을 코앞에 바라보며 부르니 바로 결전의 이 시각을 위해 훈련의 나날 구슬땀을 흘리며 다지고다져온 원한과 증오와 복수심이 일격에 치솟아 몸이 그대로 폭뢰가 되여 터져나가는것만 같았다.

구잠함이 배머리를 돌리고 빠져나가는 적함을 계속 추격하는데 어뢰정이 속도를 죽이며 따라와 함의 좌현에 접근하였다.

지휘소에서 김철진전대장이 구령을 쳤다.

《수색조! 어뢰정에로!》

파도가 사나운 날바다에서 고속함선들사이를 뛰여넘는다는건 웬간한 담력과 육체적준비가 없으면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훈련의 나날에 펄펄 나는 싸움군으로 자란 수색조원들은 주저없이 몸을 날려 구잠함의 곁을 지나가는 어뢰정의 선수갑판에 건너뛰였다. 얼음이 져서 미끄러운 어뢰정갑판에 발이 닿는 순간 보호삭을 잡고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어찌도 동작이 민활한지 교예사들을 방불케 했다.

따다다닥!

총성이 울려왔다.

적함의 선미상갑판에서 한놈이 어뢰정을 향하여 기관총을 갈겨댔다.

수색조가 진동이 심한 갑판에 엎드려 사격준비를 하는데 구잠함의 사령탑에 설치한 확성기에서 엄장석함장의 구령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선수포초소! 고사총초소! 적함의 사령탑과 기관총수를 향하여 련발로 쐇!》

선수포와 4신고사총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시뻘건 불줄기들이 적함을 향하여 탄도를 그리며 날아갔다. 감히 선불질을 하던 적기관총수는 고사총탄에 얻어맞은 가슴을 부여잡고 폭풍에 밀려나듯 뒤걸음치다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두발의 포탄이 사령탑에 명중했다.

바싹 긴장해있던 부처는 시몬이 먼저 총질을 할 때 함장의자에서 날쌔게 굴러떨어져 지휘탁밑에 몸을 웅크렸다. 그 꼴을 보고 조타수가 킥! 웃는데 지휘소뒤벽을 뚫고 시뻘건 불줄기가 휙 지나갔다.

짱!- 하고 앞창에 두개의 구멍이 생기고 거미줄모양으로 금이 갔다.

부처는 숨이 꺽 막혔다.

체면이고 뭐고 날쌔게 몸을 피했으니망정이지 그냥 함장의자에 앉아서 거들먹거렸더라면 포탄에 뒤잔등과 뒤통수를 얻어맞고 만신창이 될번 했다.

상상해보기조차 끔찍한 일이였다.

풍을 만난듯 전신이 와들와들 떨렸다.

이거 사정이 없구나. 어쩌면 좋다?

그가 바닥에 웅크리고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는데 곁에서 뭔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건 조타수였다.

안경이 벗겨져서 바닥에 나딩굴었지만 조타수는 그걸 집을념도 못하고 멍청해있었다. 쩍하면 레스링을 한답시고 힘자랑을 하던 녀석이 포탄세례에 얼혼이 쑥 나간것 같았다. 슈마커는 탐지기를 꽉 부여잡은채 덜덜 떨고있었다. 오른쪽현창에 바싹 붙어서있는 머피도 낯이 창백해졌는데 자기의 조언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다가 사태를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함장을 원망과 질시의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함장인 내가 이렇게 주저앉아있으면 안된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써서 사태를 역전시켜야 한다.

부처는 일어나려고 량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모지름을 쓰다가 돌맹이같은게 손끝에 마치자 눈을 치뜨며 굽어보았다.

그것은 자기가 호신부처럼, 수호신처럼 여겨온 《자유의 녀신》상인데 포탄이 지휘소를 관통해나갈 때 바닥에 떨어져 모가지와 손목이 부러진 상태였다. 부처는 무심중 주검에라도 손을 댄듯 소스라치며 화다닥 뛰쳐일어났다.

《망할 자식! 저리 비켜!》

부처는 조타수의 궁둥이를 발로 걷어차고 보란듯이 자기가 직접 타를 잡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번쩍 들며 천정에 매달린 전송관에 대고 명령했다.

《해리슨대위! 분견대는 빨리 무장을 갖추고 갑판으로 나가라! 놈들이 우리 함에 한놈도 오르게 하면 안된다.

기관실! 레이시준위! 이 등신같은 놈아!

속도를 더 올리라! 어서!》

함장이 아무리 목이 터져라 고아대도 이미 고속으로 달리고있는 함의 속도가 더 올라갈리 만무였다.

머피가 오른쪽현창밖을 턱으로 가리키며 급한 소리를 질러댔다.

《키 좌로! 키 좌로!》

부처는 다급히 타륜을 왼쪽으로 돌리며 꽥 소리쳤다.

《왜 그래?》

《저거! 구잠함이 우리를 거의 따라잡았소!》

《뭐라구?!》

부처는 오른쪽현창밖을 바라보았다.

방사폭뢰가 여러기나 설치되여있는 구잠함의 배머리가 나타났다. 뒤이어 이쪽에 포신을 겨눈 자동포가 눈을 찔렀다. 구잠함과의 거리는 불과 60메터정도… 이제는 포탄이 뒤가 아니라 옆에서 날아들 아슬아슬한 판이였다. 저쪽에서 확성기로 뭐라고 웨치는 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들려왔다. 분명 함을 멈춰세우라는 소리일것이다.

별안간 눈앞이 번쩍하더니 포성과 총성이 련발로 요란하게 울렸다.

부처는 타륜을 놓고 날쌔게 주저앉았다.

포탄은 강철선체를 뚫고들어가 무기고에 명중했다. 무장을 갖추노라 복작거리던 분견대원들은 꽝! 꽝! 하고 포탄이 련이어 터지고 고사총탄이 우박치듯 날아들자 쫙 흩어졌다. 무기고앞에 어푸러진 대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태질을 했다. 피방울과 살점이 뿌려져 무기고와 격벽에 달라붙었다.

분견대를 지휘하던 해리슨은 너무도 처참하고 끔찍한 광경에 경악하여 굳어졌다.

무기고앞의 비좁은 통로엔 화약내와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쓰러진 대원들이 어찌도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는지 귀청이 터질것 같았다. 해리슨은 두손으로 사채기를 부여잡은채 새우처럼 몸을 잔뜩 꼬부리고 대굴대굴 굴면서 숨넘어가는 소리를 치는 부상병을 응급처치하려고 억지로 바로눕히고 피에 젖은 바지와 속내의를 벗기였다.

그런데 이게 뭔가?

총탄이 묘하게도 그것을 명중해서 부상병은 거세당한 수돼지신세가 되였다. 설사 목숨은 건진다 해도 사내구실을 하긴 굴러먹었으니 차라리 숨이 꺼지라고 내버려두는게 나을것 같았다. 보다 급한건 자신의 안전이였다. 또다시 총포탄이 날아들면 자기도 그 신세가 될수 있었다.

해리슨은 피가 질벅하게 묻은 손으로 곁에 있는 함장실의 수밀문을 밀고 뛰여들어가 격벽에 걸려있는 내부통화기를 벗겨들었다.

《지휘소! 무기고가 집중사격을 받았다. 소방병 호지스는 다리가 절단되고 내장이 파렬됨, 분견대원 치카와 두 대원도 부상을 당했다.》

지휘소에선 웬일인지 아무런 응대도 없었다.

《함장님! 함장님!》

해리슨은 완전히 절망에 잠겨 꺼이꺼이 울면서 애걸했다.

《함장님, 부탁입니다. 함을 멈춰세웁시다. 이러다간 모두 죽습니다.》

내부통화기에서 울려나오는 그 소리를 들으며 부처는 두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쥐였다.

아! 《자유의 녀신》이여! 굽어살피소서. 이를 어쩌면 좋나이까? 구원의 손길을 뻗쳐주사이다.

이미 대가리와 손목이 잘라져 바닥에 딩굴고있는 《녀신》이 무슨 도움을 줄수 있으랴.

부처가 함을 멈춰세울 지령을 주려고 전령기의 손잡이를 잡는데 이게 뭔가?! 남쪽상공에서 비행기의 동음이 울려왔다.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쭈그리고앉아있던 머피가 후다닥 뛰쳐일어나더니 활기를 띠며 소리쳤다.

《비행기다! 함재기들이 날아온다!》

지휘소의 저조한 분위기가 확 돌변했다.

멀미에 포로된 놈처럼 나른해서 앉아있던 조타수가 얼른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끼면서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슈마커도 엉거주춤 일어나며 고개를 길게 빼들었다.

그러면 그럴테지! 벌써 함재기들이 날아오는구나. 이젠 됐다. 용기를 내자! 사태를 역전시켜 주도권을 쥐자!

얼른 전령기의 손잡이를 놓고 일어난 부처는 위험도 아랑곳없이 수밀문을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남쪽상공을 바라보았다. 비행기 넉대가 두대씩 짝을 지어 곧장 이쪽으로 날아오고있었다.

비행기들은 일제히 기수를 숙이더니 구잠함이 아니라 《푸에블로》호를 향하여 급강하했다. 물고기를 노리는 갈매기처럼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내리꽂히는 비행기의 모습이 각일각 확대되여 확 안겨들며 폭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짜앙!-

짜앙!-

어찌도 요란한지 지휘소천정이 산산쪼각나는것 같았다. 부처는 아연실색해서 입을 항 벌리고 굳어졌다. 머피는 학질을 만난듯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용기를 내서 일어나던 슈마커와 조타수는 다시 기겁을 하며 구석짬에 대갈통을 틀어박았다.

비행기들이 초저공으로 일으킨 세찬 바람에 《푸에블로》호는 태질을 당한듯 몸부림을 쳤다.

부처는 천둥같이 화를 내며 머피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이 개자식아! 눈깔이 썩었나? 저건 우리 비행기가 아니야!》

머피는 무엇에 홀렸는지 반대켠 현창쪽으로 재빨리 달려가더니 또다시 기겁을 했다.

《저… 저기에 어뢰정이 나타났소!》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야?

부처는 그쪽으로 달려가 현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씬하게 생긴 어뢰정 한척이 칼날같은 배머리로 파도를 가르며 좌현선미방향에서 전속으로 달려오고있었다.

급해맞은 부처는 무전실문을 열고 독촉했다.

《긴급무전은 보냈겠지? 그런데 왜 소식이 없어?》

한창 답전을 받는중인 무전수는 함장을 돌아보지도 않고 왼손을 흔들며 조용하라는 신호를 했다. 속이 달아서 무전실에 뛰여든 부처는 부랴부랴 교신을 끝내고 일어나는 무전수의 손에서 무전문을 나꿔챘다.

 

될수록 시간을 끌라. 윁남으로 가는 항공모함을 돌려세워 조선동해에 급파하겠다. 주한 미공군에 명령하여 폭격기들도 보내겠다. 행운을 바람.

 

부처는 노발대발해서 애꿎은 무전수에게 행패질을 했다.

《뭐 말라빠진 행운이야? 이새끼야! 멍청해서 나만 쳐다보지 말고 또 무전을 보내라. 구잠함과 어뢰정, 비행기들이 우리 함을 포위했다고 하란 말이야.》

무전수가 급히 전건을 두드리니 즉시 답전이 날아왔다.

 

알겠다. 긴급대책을 취하고있으니 기다리라. 절대로 나포되여서는 안된다. 만약의 경우엔 최후수단을 쓰라.

 

부처는 악에 받쳐서 무전문을 갈기갈기 찢어 내동댕이쳤다.

흥, 최후수단을 쓰라구?! 나더러 《푸에블로》호와 함께 6천마일이나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여기 조선동해에 가라앉아 물귀신이 되라는거야?

우리 함은 《셔먼》호나 《볼티모》호가 아니다. 난 그렇게 죽고싶지 않다! 80명이 넘는 승조원들을 물고기밥으로 만들수 없단 말이다. 우리가 죽으면 수많은 과부들과 아버지없는 불쌍한 아이들이 생겨난단 말이다. 그걸 누가 먹여살린다는거냐? 죤슨제독이? 아니면 죤슨대통령? 천만의 말씀이다.

부처는 발을 구르며 노성을 질렀다.

《뭘 멍청히 서있어? 빨리 해군제독에게 또 무전을 날리라! 함재기들을 빨리 보내달라고 하란 말이야!》

《저… 항공모함은 윁남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이틀전에 출항했다고 합니다. 아마 지금쯤 중국남해에서 항해하고있을텐데…》

《이놈아! 7함대엔 엔터프라이즈호밖에 없다더냐? 순양함이고 구축함이고 빨리 보내라고 하라!》

무전수가 레시바를 끼고앉아 전건을 다급히 두드리는데 머피가 끼여들었다.

《함장님, 차라리 우리가 직접 주한 미군사령부에 지원을 요청합시다. 그게 빠를것 같습니다.》

무전수가 전건을 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한국정세는 우리를 돌볼 형편이 못됩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장유격대가 서울 한복판에까지 나타나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급해맞은 박정희는 전국에 긴급동원령을 내리고…》

부처는 때에 어울리지 않게 《한국》의 정세를 운운하는 무전수의 귀뺨을 후려갈겼다.

《자식! 넌 주절대지 말고 빨리 무전이나 치라!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면 우린 다 물에 빠져죽어야 해. 난 네놈을 제일먼저 바다에 처넣을테다!》

뒤에서 슈마커가 죽는소리를 쳤다.

《함장님! 구… 구잠함이 우리 앞을 막아섰습니다. 방사폭뢰발사준비를 합니다.》

부처는 무전실문을 쾅 닫고 돌아섰다. 정면으로 앞을 막아선 구잠함의 모습이 시창을 통하여 확 안겨들었다. 선수갑판에 설치된 방사폭뢰발사관들에서는 금시 시뻘건 불줄기가 뿜어나올것만 같았다. 과연 아짜아짜했다.

머피가 자포자기한듯 맥없이 중얼거렸다.

《탈출하긴 코집이 글렀구나.》

부처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함을 멈춰세우고 수단과 방법을 다해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는 전령기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기관정지!》

레이시는 속도를 떨구며 내부통화기로 물었다.

《어째서 기관을 정지시키라고 하는가? 날이 차서 기관을 끄면 다시 시동하기 힘들다.》

동음이 요란한 기관실에 박혀있는 레이시는 눈뜬 장님에 귀머거리신세라 총포성이 울리고 비행기가 날아들고 구잠함이 항로를 차단한걸 모르고있었다. 부처는 모지름을 쓰며 침착하게 지시를 주었다.

《레이시준위, 우린 포위되였다. 빨리 기관을 끄라! 놈들이 우리 함에 올라와 기관을 돌리지 못하게 전기시동장치를 파괴하라. 기회를 타서 수동으로 기관을 돌릴수 있으면 된다.》

레이시는 함장의 명령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제 손으로 전기시동장치를 파괴할수 없었다. 그걸 파괴하면 수동으로 기관을 시동시켜야 하는데 그게 여간만 힘들고 시끄러운게 아니였다.

《전기시동장치를 파괴하면 안됩니다. 설마 놈들이 우리 기관실에까지 들어오겠나요. 그러면 망치로 골통을 까부셔야지요.》

부처는 입이 쓰거웠다.

레이시는 사태의 엄중성을 제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제법 으시댄다.

과연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는 격이였다.

《안되겠군. 머피대위! 빨리 기관실에 내려가라. 당신이 기관을 끄고 전기시동장치를 직접 까부시라.》

머피는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뭐라고 두덜거리더니 엉금엉금 기여서 지휘소에서 나갔다.

부처는 내부통화기로 정보실을 찾았다.

《해리슨대위! 일체 정보자료들과 무전암호들을 소각하라. 심문을 받는 경우 해양관측중이였다고 하라.》

해리슨은 기가 푹 죽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태가 그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요?》

《그렇소. 해양연구사들을 앞에 내세우시오. 당신들은 될수록 입을 다물고 사복쟁이들이 말을 하게 하라.》

《함장님, 나는 방금전에 해군제독각하가 함장님에게 보내는 무전을 도청했는데… 만약의 경우엔 최후수단을 쓰라더군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더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정보실선저에 검은상자를 설치했소. 그걸 폭파시키는 단추를 누르라는거요.》

《뭐? 뭐라구요?!》

해리슨은 덴겁을 하며 펄펄 뛰였다.

《거야 자폭하라는게 아닙니까. 그래선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무엇때문에 우리가 다 죽어야 합니까? 난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있지요. 안해와 자식들도 있구요. 지금 그들은…》

해리슨의 목소리는 점차 낮아지더니 흐느낌으로 변했다.

《그들은 내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있을텐데…》

부처도 코마루가 찡하고 눈앞이 흐려졌다.

뿌연 안개속에 안해와 두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순풍에 돛을 올리고 달리던 요트, 그날따라 더 아름답고 매혹적이던 안해의 모습, 그까짓 군복을 벗어던지고 그림이나 그리라고 권고하던 안해의 친절한 목소리

후회가 막심했다.

비록 성공하여 이름은 날리지 못할지라도 그저 평범한 미술애호가로, 무던한 남편으로 살아갈걸 그랬다. 그럼 지금쯤 벽난로에 불을 지핀 훈훈한 방안에서 안해를 모델로 앉혀놓고 화판에 붓질이나 하고있을걸…

해리슨은 더 절절히 말했다.

《함장님, 우리가 뭐 바보같은 가미가제특공대입니까? 그 무슨 대의명분을 위해서 자폭하는 어리석은짓은 하지 맙시다. 나는 바로 이런 경우를 념두에 두고 해군제독의 안전담보를 받게 한겁니다.

투항합시다. 심문을 하면 모든 책임을 정부와 해군제독에게 밀면 그만이지요. 그러면 목숨은 건질수 있습니다.》

부처는 공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 미국의 령해법에 준하면 우리 함은 지금 공해상에 있다. 해군제독이 북조선해안에서 3마일까지 접근해도 된다는 담보를 주었다. 그러니 우리가 당신네 법을 어겼다면 그 책임은 해군제독과 정부에 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달라, 우린 당신들의 관대정책에 대하여 잘 알고있다.

이렇게 빌붙어야 한다는건가?

이건 수치다. 모욕이다! 미합중국의 해군중좌가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이 순간 부처는 함장실 탁상빼람안에 장탄을 한 권총이 두자루나 있다는걸 다시금 상기했다. 그걸 량손에 틀어쥐고 결사전을 해야 마땅했지만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권총을 휴대하면 투항하는 경우 불리할뿐이다. 사실 그래서 령해에 들어올 때 권총에 탄창을 끼우고도 탁상빼람에 넣어두었던것이다.

기관실에 내려가려고 지휘소에서 나간 머피는 기겁을 하며 뒤걸음쳐 들어왔다.

《어뢰정이 선미에 붙었소, 무장을 한 군인들이 우리 함에 오르려고 하오.》

부처는 눈앞이 캄캄했다.

모든것이 끝장이라는 생각뿐이였다.

지휘능력을 상실하고 자포자기에 빠진 함장을 실망과 질시의 눈초리로 흘겨보던 머피는 다시금 지휘소밖으로 뛰쳐나갔다. 생사가 경각에 이른 이 순간 사령탑에 있는게 제일 위험하다는 생각이 펀뜻 들었기때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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