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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인차 저물었다.

해풍이 사나와지고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소리도 더 높아졌다.

함장에게 등을 떠밀리운 박철호는 집으로 향했다.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임신한 안해가 걱정되여 순간도 마음을 놓을수 없었다.

안해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서인가? 아니, 단지 그래서가 아니였다.

신혼부부는 어서빨리 귀여운 자식이 생기기를 바란다. 이성지합의 열매인 아기가 태여나야 사회의 세포인 가정에 더욱 활기와 즐거움이 넘치게 된다. 신혼살림은 아기를 축으로 재편성된다. 남편은 아버지가 되고 안해는 어머니로 된다. 이것은 인생에서 결혼에 못지 않는 중대사다. 그러기에 신혼부부는 꿈같은 밀월이 지나기 바쁘게 가슴을 울렁이며 앞으로 태여나게 될 아기의 소식에 애틋이 귀를 기울인다. 이 기다림이야말로 신혼생활의 재미다.

그런데… 야속하기 그지없게도 박철호부부는 그런 재미를 맛볼수 없었다. 그것을 바라기는 고사하고 두려워해야 했다.

3년전 봄.

군항에 아카시아꽃이 만발하여 꿈같이 달콤한 향기를 풍기던 날 박철호는 해군대학 단기반을 졸업하고 자기의 해병생활이 시작되고 흘러간 못 잊을 함선인 구잠함 103호에 정치부함장으로 임명되여왔다.

그는 정녕 감개가 무량했다. 눈에 익은 전술번호만 보아도 마음이 정다와지는 구잠함에 어서빨리 오르고싶었다. 그동안 헤여져 그리웠던 전우들을 만나보고싶었다.

그런데 구잠함 103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해상경비근무중이였다. 함은 보름후에야 경비근무를 인계하고 군항에 돌아온다고 했다.

하루나 이틀도 아니고 보름을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박철호는 속이 끓어서 부두가를 거닐다가 전대장을 찾아가 해상경비근무중인 구잠함에 갈수 있게 련락정을 달라고 했다.

해풍과 뙤약볕에 얼굴이 까맣게 탄 최정식은 흰 이발을 드러내며 배포유하게 웃었다.

《거 마침이구만. 그사이에 휴가를 받고 고향에 다녀오게.》

《고향에요?》

최정식은 의미심장하게 눈을 끔쩍거렸다.

《음, 군관이 된 모습을 어머니와 고향사람들에게 보여드리고 색시도 얻어야 할게 아닌가.》

여태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한 박철호는 느닷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런건 뭐… 후에 천천히 하겠습니다.》

최정식은 도리질을 했다.

《아니요, 아무 일이나 미루는건 좋지 않소. 지금처럼 여유가 있을 때 해치워야지 일단 함선생활을 시작하면 처녀를 만나볼 짬을 내기도 힘들어. 가만, 혹시 해군대학에 다닐 때 친한 처녀가 있나?》

박철호는 공연히 얼굴을 붉혔다.

《없습니다. 언제 뭐 그런데 신경을 쓸 겨를이 있습니까.》

《음, 응당 그래야지. 하지만 이젠 군관이 됐으니 가정을 이루어야 해. 그래야 빨리 안착돼서 직책상임무수행도 잘할수 있소. 또 동무가 먼저 장가를 가야 철옥이도 시집을 갈게 아닌가.》

철옥이는 박철호의 녀동생이다.

《고맙지만 전 아직 그런 생각을…》

《아, 내 말을 들으라구. 난 전대장으로서 명령하는게 아니라 년장자로서 동무의 형이나 아버지가 된 심정으로 권고하는거야. 당장 휴가를 받고 고향에 가라구. 동무야 워낙 사내싸게 잘났겠다, 이젠 별까지 달았겠다, 고향에 가면 처녀들이 홀딱 반할거야. 마음에 드는 처녀가 있으면 군대식으로 약혼식과 결혼식을 합쳐서 제꺽 해치우고 안해를 데리고 오게. 마침 군관사택이 하나 비였으니 거기에 살림을 차리라구. 내가 우리 집 세간을 절반 갈라주지. 그러니 색시만 데리고 오게.》

박철호가 신입병사훈련을 받고 구잠함에 배치됐을 때 최정식은 함장이였다. 바로 그 함장이 전쟁시기에 사귄 해병아저씨였기에 박철호는 반갑고 기쁘기 그지없었다.

1951년 여름 어느날.

어대진앞바다에서 요란한 폭음이 련이어 울렸다. 함포사격을 하며 제멋대로 돌아치던 적함 두척이 연기를 토하더니 침몰되였다. 모래불에 나와놀다가 그 통쾌한 장면을 목격한 아이들은 발을 구르며 환성을 올렸다.

집에 돌아온 박철호는 마치도 자기가 적함을 까부시기라도 한듯이 신명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의 집에는 놈들의 함포사격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옆집의 소녀 춘희가 있었다. 춘희는 적함이 침몰되는 통쾌한 그 장면이 보고싶어서 당장 쌍지팽이를 짚고 나가려고 했다. 박철호의 어머니가 겨우 소녀를 만류했다.

《에그, 그 원쑤놈의 배가 이미 물속에 가라앉았다는데 넌 뭘 보겠다는거냐?》

《난 그래도 보고싶어요.》

《지금은 날이 어두웠으니 래일 나가보려무나.》

그제서야 소녀는 주저앉았다.

이튿날 춘희를 등에 업고 모래불에 나간 철호는 와뜰 놀라 굳어졌다.

줄파도가 밀려나오는 모래불에 한 해병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었던것이다. 그가 바로 기뢰부설조원인 최정식이였다.

최정식은 철호네 집에서 며칠간 치료를 받고 몸을 추세운 다음 기지에 돌아갔다.

그때 얼굴이 까무잡잡한 기뢰부설조원의 치료와 건강회복을 위해 철호의 어머니는 물론이고 마을사람들이 수고를 많이 했었다. 누구보다 수고를 한건 춘희였다. 소녀는 적들의 함포탄에 타박상을 입은 후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부상당한 해병을 간호하느라 노상 곁에 붙어앉아 시중을 들어주고 노래도 불러주었다. 소녀에게는 무차별적인 함포사격으로 자기 집을 불태우고 어머니를 잃고 홀로 남은 자기마저 해치려 했던 가증스러운 적함을 까부신 해병이 더없이 고마운 은인이였던것이다.

전대장도 그 생각을 했는지 춘희의 안부를 물었다.

《가만… 춘희가 이젠 시집갈 나이가 됐겠구만.

올해 세는 나이로 스물넷이지? 춘희가 지금 어디에 있나?》

《학원을 졸업하고 군식료공장에 배치받았다고 합니다.》

최정식은 관심을 가지고 캐물었다.

《거기서 무슨 일을 한다오?》

박철호는 그동안 춘희에게 무관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글쎄… 그건 모릅니다.》

《건강은 어떻소? 이젠 제대로 걸어다니는가?》

박철호는 이 물음에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최정식의 철색얼굴에 근심과 련민의 정이 어렸다.

《일두 참… 리녀맹위원장이던 어머니는 놈들에게 학살됐지, 전선에 나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지 정말 불쌍한 처녀요. 춘희도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텐데… 하긴 이미 시집을 갔을수도 있지. 그랬으면 좋으련만…》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가책에 잠겨 덤덤히 서있는 박철호의 눈앞에 쌍태머리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몸매가 초생달처럼 가냘프고 해쓱한 얼굴엔 늘 수심이 어려있는, 그래서인지 보면 볼수록 동정이 가고 무언가 위해주고싶은 소녀였다.

…갑자기 쾅! 폭음이 울리고 눈앞에선 불길과 연기가 솟구치는것 같았다.

한밤중에 바다쪽에서 놈들의 함포탄이 련이어 날아와 터졌다. 마을의 집들은 함포탄에 맞아 풍지박산이 났다. 박철호네 집과 이웃인 춘희네 집도 례외로 될수 없었다. 빈집을 지키며 홀로 잠들었던 소녀는 함포탄이 터질 때 생긴 타격파에 가랑잎처럼 날려 마당에 뿌려졌다. 피투성이가 되여 의식을 잃었던 그 애가 마을사람들의 간호에 나흘만에 정신을 차린것은 기적과도 같은것이였다.

그때부터 춘희는 불탄 자리에 대충 다시 지은 철호네 집에서 살게 되였다. 몇달후 철호네 집에 전사통지서가 왔다. 전선에서 싸우던 철호의 아버지가 전사했던것이다. 춘희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는 철호를 위로해주었다.

울지 말라고, 이제 전쟁이 끝나면 우리 아버지가 돌아온다고, 그러면 나는 아버지에게 너네 집부터 번듯하게 지어달라고 하겠노라고…

전쟁이 끝나기 두달전에 춘희의 아버지도 전사했다는 통지서가 왔다. 춘희는 학원에 갔다. 방학때마다 춘희가 고향에 오면 철호의 어머니는 친딸처럼 맞아주었다.

철호도 반갑고 기뻤다. 그는 녀동생보다 춘희를 더 위해주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철호가 소원대로 해군복을 입고 초소로 떠날 때 춘희는 역구내에 배웅을 나왔다. 몸은 여전히 초생달처럼 가냘팠지만 이젠 제법 처녀꼴이 잡힌 춘희였다. 처녀는 동무들과 어머니와 동생의 떠들썩한 바래움을 받는 철호를 몇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렬차가 기적을 울리며 떠나는 순간에야 용기를 내여 철호에게로 급히 다가왔다.

차창을 들어올리고 밖에 상반신을 내민 철호에게 춘희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준것은 기념으로 마련한 수첩이였다.

《춘희! 고마워, 잘있어!》

춘회는 울먹이며 아무런 말도 못했다.

환송곡이 울리는 역구내를 천천히 빠져나간 렬차는 질풍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바래주는 정다운 모습들은 저 멀리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철호는 그제서야 차창을 내리우고 좌석에 앉아 춘희가 준 수첩을 펼쳐보았다.

첫장에 또박또박 정자로 쓴 눈에 익은 글씨가 안겨왔다.

 

철호오빠.

나도 오빠처럼 해병이 되고싶어요. 내 마음을 합쳐서 어서빨리 용감한 해병으로 자라나 우리 부모님들의 원쑤를 갚아주세요.

 

수첩의 그 글발은 바다초소에 선 철호의 성장과정을 주의깊게 지켜보며 고무해주는 처녀의 눈동자였고 목소리였다. 보람차지만 결코 헐치 않은 군무생활, 함선생활의 나날에 철호는 힘겨울 때마다 그 수첩을 펼쳐보군 했다. 그러면 복수를 부탁하는 처녀의 목소리가 울려왔고 전쟁시기의 못 잊을 나날들이 눈앞에 떠올랐으며 가슴속에선 복수의 불길이 치솟군 했다. 그 불길이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철호는 기한전에 상등병의 군사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때의 기쁨이란 형언키 어려운것이였다. 그는 자랑과 긍지를 안고 고향의 어머니와 중등학원에 있는 춘희에게 첫 편지를 보냈다. 편지봉투엔 상등병의 견장을 달아서인지 입대할 때보다 더 어른스럽고 름름해보이는 철호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어머니와 춘희에게서 거의 동시에 회답이 왔다.

철호는 한해가 지나서 수뢰초소장으로 임명되였고 하사의 군사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어머니와 춘희에게 편지와 사진을 보냈다.

어머니는 기쁨에 넘친 회답을 보내주었는데 웬일인지 춘희는 소식이 없었다. 철호는 학원에 또 편지를 보냈다. 마찬가지였다. 회답이 없는 처녀에게 더이상 편지를 쓰게 되지 않았다. 춘희와의 련계는 이렇게 끊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전대장이 철호에게 그 처녀를 상기시켰다. 그러자 철호의 눈앞에 떠오른 쌍태머리소녀의 가냘픈 모습은 그리움과 련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며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춘희는 여태 꺼지지 않은 불씨로 남아있은것이였다. 언뜻 바람이 불자 불씨는 빨갛게 피여나기 시작했다.

《정말 불쌍한 처녀요. 춘희도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텐데… 하긴 이미 시집을 갔을수도 있지. 그랬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뇌이던 전대장의 목소리가 자꾸만 귀전에 되살아났다.

박철호는 고향으로 달리는 렬차에서도 오로지 춘희만을 생각했다. 고향에 가면 우선 그 처녀의 소식부터 알아보아야 했다. 그러기 전에는 다른 처녀에 대하여 생각할 권리가 자기에게 없는듯이 생각되였다.

헤여져 몇해만인가. 그립던 어머니와 누이동생, 정다운 이웃들은 어엿한 해군군관이 되여 돌아온 철호를 큰 경사가 난듯이 떠들썩한 환영으로 맞이해주었다. 아래웃방이 터져나갈 지경으로 모여들어 이야기꽃을 피우던 동네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누이동생도 잠자리에 들자 철호는 어머니와 조용히 마주앉았다.

《너 이젠 장가를 들어야 하겠구나. 저걸 보렴. 철옥이도 시집갈 나이가 됐단다.》

철호는 얼굴을 붉히였다.

《저… 그러지 않아도 전대장동지로부터 이번 휴가기간에 장가를 들고 색시를 데리고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무작정 색시를 데리고가면 어쩐다는거냐? 집이 있냐?》

《예, 군관사택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제가 살림을 차리면 전대장동지가 자기네 집세간을 절반 갈라주겠다고 하더군요.》

《말만 들어두 고맙구나. 그 어른이야 전쟁때부터 우리와 아는 사이니 그러겠지.》

어머니는 기뻐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그러지 않아도 며느리감으로 인물 곱고 마음씨도 고운 처녀들을 한둘이 아니게 점찍어놓고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려온 어머니는 래일이라도 당장 자기가 점찍어둔 처녀들을 만나보자고 했다.

철호는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어머니, 춘희의 소식을 모르십니까?》

《춘희?!》

어머니는 좀 당황해하는 기색이였다.

《춘희가 어디에 있어요?》

《군식료공장에 다니지. 회계일을 본다는데 바빠서 그러는지, 우리와 정을 떼자고 그러는지 삼년이 지나도록 여기엔 나타나지 않는구나. 듣자니 전쟁때 입은 타박상이 계속 말썽을 부려서 지금도 애를 먹는 모양이더라. 온천치료를 한다던데 몸상태가 좀 나아졌는지…》

초생달처럼 가냘픈 몸매, 수심에 잠긴 해쓱한 얼굴, 늘 눈물에 젖어있는듯 한 눈동자… 전쟁시기 쌍태머리소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자 철호는 가슴이 저리였다. 그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단호히 자기의 결심을 표명했다.

《어머니, 나는 춘희를 데려가겠습니다.》

어머니는 놀랐다.

《그럼 그 애와 살겠다는거냐?》

《예, 꼭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다.》

확고한 결심이 어려있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어머니는 자기가 찬성하지 않아도 일은 그렇게 되고야말리라는걸 알아차렸다.

《너희들은 그런 사이였니? 무슨 약속이라도 했냐 말이다. 어째서 부디 그 애와 살겠다는거냐? 그 애가 군관색시구실을 어떻게 한다고 그러니?》

철호는 자기를 설복하려드는 어머니를 마주보기 딱해서 눈을 내리깔았다.

《난 춘희가 그 구실을 제대로 할수 없기에 우정 우리 집을 멀리하는것 같더구나. 그래서 나도 그 애에게 발길을 하지 않은거다. 마음씨야 비단처럼 고운 애지, 비단처럼.… 그러나…》

어머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박철호는 몹시 딱하고 난처해졌다.

이런 경우엔 어머니의 의사를 따라야 하지 않을가? 하고 마음속에서 동요가 이는데 별안간 웃방으로 통하는 미닫이문이 활짝 열렸다.

《오빠! 난 찬성이예요!》

이렇게 챙챙한 목소리로 웨친건 웃방에서 자는척 하며 귀동냥하던 누이동생이였다.

《춘희언닌 오빠만 생각하고있어요. 난 어제도 읍에 나갔다가 그 언니를 만났는데 반가워하면서 오빠소식부터 묻더군요.》

어머니는 얼결에 주먹을 들고 눈을 흘기며 을러멨다.

《계집애가 뭘 안다고 중대사에 감히 참견이냐? 입을 다물지 못해?》

《피! 엄마는 뭐야? 시집갈 나이가 다된 딸을 계집애라고 부르면서…》

누이동생은 짐짓 토라져서 입술을 비죽이 내밀더니 미닫이를 소리나게 탁 닫았다.

어머니는 어쩔수 없었던지 허거프게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정색해졌다.

《너희들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야… 전대장어른은 어떻게 생각하겠는지 모르겠구나. 우리 집의 중대사인데 그 어른과 의논해야 하지 않겠니.》

한껏 긴장되였던 박철호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어머니, 전대장동지도 춘희를 잊지 않고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기를 바란단 말입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럼 나도 찬성이다. 어서 가서 춘희를 만나보려무나.》

느닷없이 빠져드는 추억에 잠겨 불빛이 반짝이는 사택마을로 천천히 걸어가던 박철호는 인기척에 멈춰섰다.

제멋대로 불어치는 해풍에 싸락눈이 향방없이 날리는데 네댓명의 녀인들이 웃고 떠들며 마주오고있었다. 철호는 그들을 놀래울세라 눈이 쌓인 길옆으로 슬며시 비켜섰다. 무슨 보따리와 바께쯔를 이거나 든 녀인들이 신이 나서 떠들어대며 활기있게 지나갔다.

《우리 방선이 아버지는 돼지비게와 썰어서 말리운 고추를 넣은 감자토장국을 좋아해요.》

《아따, 그래두 생선국이 생선국이지.》

토장국소리를 하는건 콩을 푹 삶아 메주덩이를 빚어서 새끼오리에 주렁주렁 걸어놓았다가 날을 잘 잡아 토장을 맛있게 담그군 하는 엄장석함장의 아주머니요, 생선국소리를 하는건 처녀시절 《녀성》호를 타고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던 기관조장의 안해다. 함장의 안해가 우겨댔다.

《생선국도 채친 무우와 토장을 넣고 끓여야 맛이 있이요.》

《에그, 딱해라.》하고 버릇처럼 혀를 차며 기관조장의 안해가 상대방을 나무랐다. 《방선이네는 바다에 와서도 산속에서 살던 식성을 아직 고치지 못했구려.》

그 말에는 토배기바다사람의 우월감과 함께 산골내기를 숙보며 하찮게 여기는 비난의 색조가 어려있었다.

함장의 안해는 은근히 약이 오른듯 반박했다.

《아무렴 어때요? 토장국을 좋아해도 함장이야 함장이지요.》

《에그, 딱해라!》하고 기관조장의 안해는 또 혀를 찼다. 《우리 령감은 토장국을 좋아하지 않아서 여태 별을 달지 못하고있구만.》

그 말에서 노염이 느껴진듯 함장의 안해는 몹시 당황해서 발명을 했다.

《아유, 난 그래서 한 말이 아닌데…》

다른 녀인이 말참견을 하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포병장의 안해다.

《기관조장아바이야 비록 별은 달지 못했어도 이 군항에서 제일 높은 전대장동지가 늘 동갑이라고 불러주지 않나요.》

기관장의 안해도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누구나 존경하는 전쟁로병인걸요.》

《에그, 딱해라!》

기관조장의 안해가 호방하고 능청스럽게 우정 세번째로 이 말을 곱씹으며 혀를 찼다.

《이거 우리 령감을 너무 춰주니 내 어깨가 다 으쓱 올라가는구려.》

기관조장의 안해가 짐짓 활개까지 쳐보이자 다른 녀인들은 키득키득 소리내여 웃었다.

래일은 새년도 전투정치훈련이 시작되는 날이니 전례대로 군관안해들이 성의껏 준비한 별식을 들고 남편들 못지 않게 자기들도 사랑하는 구잠함을 찾아가고있다.

박철호는 행여나 하고 귀를 강구었지만 웬일인지 안해의 목소리만은 들려오지 않아서 서운했다.

왜 저 아주머니들과 함께 오지 않을가?

하긴 임신을 한 몸이니 집에서 안정하라고 다른 아주머니들이 만류했을수 있다. 아니면 몸이 말째서 그럴수도 있는것이고…

박철호는 구잠함이 계류한 3호부두쪽으로 사라지는 녀인들의 뒤모습을 지켜보다가 길에 들어섰다. 다시금 추억에 이끌려들며 걸어가는데 누군가 마주왔다. 살얼음장을 타고 강을 건느듯이 조심조심 걸어오는 녀인인즉 안해가 분명했다. 미더운 안해에 대한 정다움이 밀물처럼 박철호의 가슴속에 그들먹이 차올랐다.

《여보!》

무슨 생각엔가 골똘히 잠겨 고개를 수굿하고 걸어오던 안해는 와뜰 놀라며 멈춰섰다.

박철호는 안해를 놀래운것이 재미났다.

《놀라긴… 나요.》

꼼짝없이 굳어졌던 춘희는 그제서야 호- 안도의 숨을 나직이 내쉬였다.

《철호동지군요.》

《어허, 제 남편 보고 철호동지가 뭐요?》

춘희는 약간 응석기가 어린 투로 반문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내 이미 말하지 않았소, 여보 혹은 당신이라고 부르라고.…》

《쑥스러워서 어떻게…》

말끝을 흐리는것조차 어질어빠지고 귀여웠다.

안해는 결혼한지 이태가 지난 오늘까지도 처녀티를 벗지 못하고 남편을 몹시 어렵게 대하며 동지라고 깍듯이 존대해 부른다. 그래서인지 대할수록 착하고 볼수록 정이 간다.

비록 건강하지는 못한 녀자이지만 함께 살아보니 실로 보배같은 존재였다.

박철호는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

《어딜 가오?》

《구잠함에요. 첫날 훈련에 모든 해병들이 다 참가할수 있게 우리가 식당근무를 서주기로 했어요.》

안해의 목소리는 소박했지만 긍지가 어려있었다.

《당신두?》

《예, 그런 일에 내가 빠지면 되나요?》

박철호는 근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몸이 일없겠소?》

《의사선생이 적당히 운동을 하는게 좋대요. 그런데… 어딜 가댔어요?》

《집에 가댔지, 당신이 걱정스러워서.…》

안해가 곱게 눈을 흘기는 모습이 어둠속에서도 보이는듯싶었다.

《어머! 오늘같은 날 집에 들어오는 군관이 어디에 있어요?》

박철호는 할말이 없었다.

새년도 전투정치훈련에 진입하는 날을 앞두고는 후방사업을 보는 군관들과 군의들까지도 부대를 떠나지 않고 전사들과 함께 숙식하군 한다. 그러니 안해가 나무랄수밖에…

《최정식대좌동지한테서 전화가 왔소. 난 그저 집에 잠간 들려서 당신에게 그거나 알려주고 돌아서려던 참이요.》

전화내용을 들은 춘희는 부끄러운 어조로 나직이 속살거렸다.

《아이참, 고맙지만 무슨 그런 페까지 끼치겠나요.》

《여보, 대좌동지네 집을 친정집으로 생각하오. 녀자들은 첫아기를 낳을 때 다 친정집으로 간다더군.》

춘희는 머리를 저었다.

《난 바다가 좋아요. 아기에게 파도소리를 들려주고싶어요. 그 애야 해병감이 아니나요. 갈매기는 바다를 떠나 살수 없지요.》

긍지와 자부심에 넘친 목소리였다. 해산을 하다가 잘못될수도 있다는 위구와 불안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가냘프고 연약한 안해가 이 순간엔 거인처럼 느껴졌다.

《어서 함으로 가자요. 어마나, 별이 늘었구만요, 축하해요.》

《고맙소.》

박철호는 안해의 한쪽팔을 다정히 잡고 부두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마을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장에 들어서던 그때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흩날리는 싸락눈이 그날에 뿌려지던 꽃보라처럼 느껴졌다. 불안스레 뒤채이던 파도도 넘실넘실 춤을 추는것 같았다.

불빛이 환한 군항은 명절분위기였다.

구잠함의 해병들도 래일 새 훈련에 진입한다는 흥분에 들떠 갑판의 여기저기서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기타와 손풍금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안해를 취사장으로 보낸 박철호는 함을 한바퀴 돌아보기 시작했다. 먼저 선수갑판으로 간 그는 흠칫 놀라며 멈춰섰다.

자동포와 방사폭뢰발사관이 여러대나 비좁게 들어앉은 어둑시근한 그곳에서 누군가 홀로 격술훈련을 하고있었다. 치고받고 훌쩍 뛰여올랐다가는 떨어지면서 휘둘러발차기를 한다. 어찌도 날파람있게 동작하는지 성난 맹수가 날뛰는것만 같았다.

《누구요?》

박철호의 물음에 상대방은 굳어졌다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홱 돌아섰다.

가까이 가서 보니 줄무늬가 간 해군내의바람인 김형길이다. 날씨는 귀쪽이 얼어떨어질 지경으로 춥고 맵짠데 단김을 헉헉 내뿜는 그에게서는 뜨겁게 달아오른 쇠덩이처럼 열기가 풍겼다. 부릅뜬 두눈은 숯불처럼 이글거린다.

《웬일이요?》

김형길은 급한 숨을 다몰아쉬고나서 멋적은듯 손으로 뒤더수기를 문질렀다.

《그저 좀… 별스레 몸이 근질거리기에…》

《그러니 심심풀이라는건가?》

김형길은 정색해졌다.

《아닙니다. 제가 새 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난 훈련정형을 돌이켜보니 확실히 빈 구석이 있었습니다. 격술훈련을 등한히 했단 말입니다.》

《배를 타는 우리가 그런건 해서 뭘하나.》

《적들의 특공대〉가 우리 함에 올라올수도 있잖습니까. 배를 나포하려고 말입니다. 요즘 인디아양의 섬나라들 수역에선 해적들도 날친다고 합니다.》

《뭐 그런 일이야 있을라구. 춥겠는데 어서 솜옷이나 입소. 감기 들겠소.》

박철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형길이가 갑판에 벗어놓은 솜옷을 집어주었다.

김형길은 솜옷을 받을념도 안하고 자기의 주장을 고집했다.

《난 그런 특수한 정황도 있을수 있다고 예견하고 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해상경비근무를 수행하다가 정체불명의 함선을 발견하면 단속하고 수색하게 될수도 있잖습니까. 그때 반항하면 본때를 보여주겠습니다.》

박철호는 허허 웃었다.

《동문 언제나 적들과 싸울 생각뿐이로구만. 그래 격술훈련은 동무가 책임지고 하겠소?》

《부함장동지가 해야 합니다. 타고난 싸움군입니다.》

부함장 조용순중위는 그런 평가를 받을만 했다.

그는 조국해방전쟁시기 적들의 사단지휘부를 기습하고 작전문건을 탈취해온 이름난 정찰영웅의 아들이다. 아버지처럼 정찰병이 되겠다고 어려서부터 몸단련과 격술훈련을 해온 그는 구잠함에 배치되여오자 해군절에 진행한 체육경기때 권투선수로 나가 1등을 하여 인기를 올렸다.

부함장은 형길이와 동갑이고 입대년한도 같았다.

하지만 형길이는 부함장을 군사규정의 요구대로 깍듯이 례절있게 대하고 존중해주었다.

《형길동무, 오늘 군사칭호수여식을 할 때 좀 섭섭했겠지?》

김형길은 정치부함장이 주는 솜옷을 받더니 보드라운 털을 댄 목깃에 달려있는 상등병령장을 새삼스레 보며 손으로 어루만졌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난 수뢰수가 좋습니다, 상등병이면 뭐랍니까. 언제든지 한번은 전투항해를 하게 되겠지요. 그때 적함에 복수의 불벼락을 안길수 있는 수뢰수가 제일입니다.》

박철호는 가슴이 뭉클했다.

김형길은 이런 해병이였다. 언제나 전투항해길에 자신을 세워놓고 만단의 준비를 갖추며 거기서 삶의 보람과 긍지를 느끼는 진짜배기싸움군이였다.

바로 그 시각 출항한지 한달이 지나서야 드디여 태평양을 건너온 정체불명의 함선이 어둠속을 헤치며 은밀히 일본의 도꾜만으로 접근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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