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제 3 장

2

 

언제인가 리정도 쉬여간적이 있는 아카시아나무숲속에서 련하기계의 탄생을 축복하여 소박한 《축배잔》들이 오가고있을 때 그는 인민대학습당 과학기술자료열람실에 앉아있었다. 거기서 오전시간을 다 보내고 점심은 대학에 와서 먹었다.

옛 분대원이였던 황창일이 언제부터 기숙사를 방문해달라던것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은 꼭 찾아가보기로 마음먹었던것이다.

창일은 《할아버지기숙사》(하도 오래된 건물이여서 그렇게 불렀다.)에서 재미나는 동갑친구와 동숙하고있었다.

역시 제대군인인 그의 이름은 권춘호였다. 고향은 안흥, 거기서 태여났고 거기서 학교를 다녔으며 거기서 군대에 나왔고 거기로 돌아가리라는 향토위주의 통성만으로도 창일은 자기의 동숙생에게 반하게 되였다. 군사복무의 마지막나날들을 안흥에서 보낸 창일에게 있어서 그곳은 마음속에 안고있는 또 하나의 《고향》이기도 했던것이다. 하여 그들사이에는 고향과 《고향》이라는 특이한 친분관계가 맺어졌다. 춘호는 새것이라면 오금을 못쓰는 사람이였다.

학급이 무어지던 날 권춘호는 동무들을 찾아다니며 물었다.

《대학기간 목표가 뭐요?》

묻고는 제가 대답했다.

《난 말이요, 일체 새것은 다 보고 다 배우는것, 이거요.》

정말 그랬다. 책이든 유희든 노래든 기술이든 관계없이 전에 없던것이라면 죽자고 따라다녔다. 전기공학부 《새춘호》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황창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고박한 그를 두고 춘호는 《공병처럼 살라는 지휘관들의 당부를 성실히 지켜가는 창일동무》라고 빨래줄처럼 긴 우스개소리를 하군 하였다.

언제봐야 분주살스러운 권춘호였지만 학업에서는 단연 첫자리를 내놓지 았다. 그는 확실히 머리가 좋았다.

창일은 학습도 역시 공병일처럼 힘들게 했다.

《아버지가 부지배인을 한다더니 머리도 유전인게지.》 하고 창일이 말했을 때 춘호는 시틋해서 《그렇지 않아.》라고 하였다.

지난 겨울 평양에 출장왔던 춘호의 아버지가 기숙사에 찾아왔었다. 부자간의 상봉이 얼마나 서먹했던지 곁에서 지켜보던 창일이 따분할 정도였다. 얼마전에는 안흥에서 수자조종공작기계분공장이 조업하고 춘호의 아버지가 그 지배인으로 임명되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지만 그때도 춘호는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였다.

《춘호, 아버지가 분공장지배인이 됐다는데 기쁘지 않아?》

《기쁘지, 오래간만에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으니까.》

춘호의 대답은 이상했다.

그는 뭔가 더 말할듯 하다가 입을 다물어버렸었다.

요즘은 실습기간이였다. 오전에 실습보고서를 정리해놓고 대동강기슭에 일떠서는 새 교사 건설장으로 지원을 나갔던 그들은 일체 학생지원자들은 받지 않는다는 건설지휘부의 지시에 떠밀리워 호실로 돌아왔다. 일거리를 잃은 《공병》은 몹시 안절부절했다. 춘호가 제꺽 일거리를 만들어주었다. 호실출입문의 낡은 접철을 갈아다는것이였다. 그마저 제꺽 해치우고 두루 빨래까지 비비고나니 할일이 없어졌다. 리정은 바로 이런 때 호실에 나타났다.

《<볼따>의 신봉자, 잘있었소?》

《분대장동지! 이렇게 불쑥 찾아올줄은 몰랐는데요.》

《자료작업을 하러 시내에 나왔댔소.》

리정의 몸에서는 땀내가 물씬 풍기였다.

《가만, 우선 몸부터 좀 씻고보기요.》

창일이 들려주는 수건을 걸치고 공동세면장으로 갔던 리정은 잠시후 땀발을 가시고 돌아와 《한데 안흥친구는 어데 갔나?》 하고 물었다. 아직 만나본적은 없지만 리정은 창일이 늘 따뜻한 애정을 담아 묘사하던 동숙생 권춘호를 구면지기처럼 느끼고있었다.

《중학교때 한학급에서 공부한 친구가 오늘 선을 보는데 방자노릇을 하러 간다던지. 이젠 돌아올 때쯤 됐습니다.》

흐드러진 꽃송이들을 한가득 피워올린 제라늄화분이 한쪽모서리를 누르고있는 편수책상우에 군복입은 시절의 리정과 창일이 약간 멋을 부리며 찍은 사진이 놓여있었다.

《나무액틀이 어떻습니까? 내 손으로 만든건데…》

《이 사진을 여태 건사하고있소?》

리정은 군복입은 옛 모습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보다가 《참, 나도 보여줄게 있소.》 하며 품안에서 아들의 사진을 꺼냈다.

《내 아들이야. 두달전에 돌잔치를 했지.》

《야, 요거 눈매는 꼭 아버지를 닮았는데요. 이름이 뭡니까?》

《지성이, 리지성이요.》

화제는 점차 대학과정안에 새로 생겨난 과목들과 얼마전에 있은 외국어실력판정 그리고 실습총화보고서에로 넘어갔다.

창일은 리정에게 실습총화보고서를 봐달라고 하였다.

리정은 갓 입대한 창일에게 군사규정학습을 시키던 때처럼 질의응답을 해가며 그의 실습보고서를 깐깐스레 검토해보았다.

보고서는 잘 정리되여있었다. 긴 설명대신 그림을 그려넣은것도 있었다. 어렸을 때 미술소조에 다닌적도 있는 창일은 그때부터 고스란히 그림공부를 했더라면 지금쯤 화가가 되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도중에 뛰쳐나오고말았다.

그림공부가 싫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관여가 짜증나서였다.

어머니는 그를 수학소조에도 얼마, 물리소조에도 얼마 이런 식으로 숱한 소조에 끌고다녔다. 넣고 뽑고는 다 어머니결심이였다.

창일은 자신이 《어머니》라는 《덕》을 따라 예속적으로 뻗어가는 넉줄처럼 생각되였다. 그래서 철이 들자 자기의 《불우한》 운명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미술소조를 뛰쳐나오는데 이르렀다. 긴긴 겨울밤처럼 지루한 욕설이 시작됐다.

하지만 미술소조를 나온 창일이 스스로 공작기계소조에 들어갔다는것을 알고 어머니는 욕을 뚝 그쳤다. 후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도 그를 공작기계소조로 옮길 잡도리를 하고있었다. 하고보면 창일은 역시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팔자인것 같았다.

제대를 앞두고 표창휴가를 갔을 때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아들의 일에 관여하였다. 대학에 갈수 있다면 꼭 기계공부를 하라는것이였다. 그날에야 창일의 어머니는 가슴깊이 안고살아온 소중한 추억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 모표를 내놓으며 말했다.

《기계를 배우거라. 그래서 내대신 너라도 공장에 돌아가다오. 내가 선생님들과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너를 이 소조, 저 소조로 끌고다닌것도 그때문이였다. 기계를 배우자면 수학, 물리를 알아야 한다. 그림공부를 한것도 도움이 될거구…》

동무 선보는데 따라갔다던 권춘호가 희색이 되여 돌아온것은 이때였다. 붕어무늬장식을 한 빨간 비닐장통을 손에 들고 《자, 소문난 영광거리식당의 남비탕이요!》 하고 소리치며 들어서던 그는 호실에 손님이 와있는것을 보고 멈칫했다.

《춘호, 내가 늘 이야기하던 우리 분대장동지야.》

《춘호동무, 반갑소. 리정이요.》

《아, 전 이미 사진으로 구면이 됐습니다.》

그가 들어서자 호실안이 갑자기 부산스러워지는것 같았다.

춘호는 귀한 손님은 발도 길게 찾아온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힘들게 받아왔다는 남비탕을 책상우에 털썩 올려놓은 춘호는 손닿는대로 책꽃이에서 학습장을 한권 뽑아들고 활활 부채질을 해댔다.

《난 확실히 똑똑한것 같애. 남비탕을 세그릇 받아왔거던.》

《허허,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어떻게 되긴, 내 몫이야 잘했지.》

춘호는 선을 본다는게 어떤건가 했더니 참 싱겁기 그지없더라는것, 생면부지의 처녀총각이 만나서는 무슨 말들을 그렇게 많이 하는지… 그래도 방자구실은 착실히 했노라고 하였다.

《그 친구 누이가 영광거리식당에서 일하더구만. 내가 기숙사생활을 한다니까 남비탕을 세그릇이나 받아주더군. 한데 말이야.》 춘호가 머리를 기웃거리며 방바닥에 내려앉았다. 《처녀쪽에서 날 한번 더 만나봤으면 한다누만. 이게 좀 별나지 않아?》

《자넬 통해 상대를 더 파악해보자는거겠지.》

창일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분대장동지.》

《글쎄, 난 사랑의 방정식만은 풀줄 모르지 않나.》

《에라, 아무튼 이 권춘호는 고향에 돌아갈 사람이니 도시처녀는 바라보지 않는다.》 하고 타령조로 읊조린 춘호는 남비탕이나 맛보자며 사물함에서 나무손잡이가 달린 쟁개비를 꺼내놓았다.

새것은 아닌데 얼마나 꼼꼼스레 잘 닦아두었던지 금시 도금을 한것처럼 반짝반짝했다. 그것을 보자 리정은 자기도 한때 맛보았던 합숙생활이 떠오르면서 절로 웃음이 피여났다.

명절이면 납작하고 윤기나는 늄밥곽에 송편떡을 담아들고 로총각의 합숙에 찾아오군 하던 처녀시절의 채이숙의 모습이 떠오르는가 하면 해저무는 바다가에 치렁한 치마폭을 감아쥐고 달려나와 《정이야, 아버지 오셨다. 밥먹자!》 하고 부르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젖은 바지를 머리우에 빙빙 휘두르며 속옷바람에 달려가 안기면 따뜻한 어머니의 품에서 풍겨오던 솔가리불냄새…

스르르 눈을 감고있던 리정은 또깍또깍하는 칼질소리에 눈을 떴다. 책상빼람을 뽑아 뒤집어놓은 창일이 어데서 났는지 시퍼렇게 독이 오른 고추꼬투리들을 손칼로 썰고있었다.

《이건 기숙사생활준칙에 어긋나는것 같은데…》

리정이 짐짓 정색해서 말했다.

《아, 걱정마십시오. 이건 우리 대학 총장선생님이 비준해준 남비인데요.》 하고 춘호가 한절반은 지어낸것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전번학기 시험공부를 할 때였습니다. 몰래 두부장국을 끓이다가 이 새벽까지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누구인가 해서 찾아온 총장선생님한테 딱 걸려들지 않았겠습니까. 엄하게 물었지요.

<동무들은 지금 뭘하고있는거요?>

그래서 전 이 쟁개비를 가리키면서 <예, 경금속재료의 열전도실험을 하던중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총장선생님은 껄껄 웃으면서 <네녀석들, 펼쳐놓은 책만 아니라면 종아리가 따끔하게 해주는건데.> 하고는 돌아갔습니다. 한데 그 이튿날 속빵을 한꾸레미나 사들고 다시 찾아와서 <새벽엔 출출하지? 허튼짓들을 하지 말고 궁금할 때 이걸 먹어라.> 하시더구만요.》

《허허, 그게 어디 비준된거요?》

《헤헤, 이게 정말 마지막입니다.》

리정의 핀잔에 춘호는 짓적게 웃어보였다.

쉴새없이 입을 놀리면서도 춘호는 받아온 음식을 쟁개비에 퍼넘기고 나서 《그럼 시작해볼가?》 하고 창일에게 눈짓을 했다.

창일이 침대밑에 머리를 쑥 들이밀고 큼직한 나무트렁크를 끄집어내더니 그안에서 남포등처럼 생긴 배불뚝이유리그릇을 꺼내놓았다. 뚜껑을 열자 술냄새가 확 풍겨왔다.

《그게 술이 아니요?》 리정의 눈이 꼿꼿해졌다.

《이건 CH30H(메틸알콜)입니다.》

《이 사람들이 아예 주방을 차려놨군. 좋지 않습니다, 제대군인대학생동무들.》 리정은 지시손가락을 내흔들며 《워닝!(warning-콤퓨터 기술용어:경고, 주의)》 하고 껄껄껄 웃었다.

쟁개비뚜껑이 댕강댕강 춤을 추었다.

춘호와 창일은 런닝샤쯔바람에 땀을 흘리면서 음식을 들었다.

리정은 숭어토막을 몇번 뜨는척 하다가 인차 숟가락을 놓았다.

《왜 들지 않습니까?》

《내 입엔 좀 짜구만.》

《짜다구요?! 물이 쫄아서 그러나?》

《괜찮소. 배가 부르구만.》

창일은 쟁개비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나서야 숟가락을 쭉 빨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실 음식이 짜다는것은 지어낸 말이였다.

리정은 여기서 배를 다 불리고싶지 않았다.

그는 안해가 해주는 음식을 먹고싶었다.

《시장하시지요? 조금만 참으세요.》 하고 분주히 칼장단을 울리며 달래는 안해의 목소리를 듣고싶었다. 서두르는 안해의 손에서 유리그릇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못 견디게 그리웠다.

이때 창일은 춘호의 사물함안에서 지난 겨울에 대학에 찾아왔던 춘호의 아버지가 깜빡 잊어버리고간 곰털모자를 찾아냈다. 눈두덩을 푹 덮어버린 털모자가 머리우에서 회전기구처럼 빙글빙글 돌아가자 창일은 《역시…》 하고 혀를 쯧쯧 찼다.

《역시 지배인동지의 머리둘레가 크긴 크단 말이야.》

그러자 닁큼 일어선 춘호가 《크니 어쨌단 말인가.》 하며 창일의 머리에서 모자를 훌렁 벗겨 사물함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어! 이 친구, 아버지보구 그렇게 말해두 돼?》

괜히 지금껏 좋던 분위기만 어성버성해졌다. 리정이 기숙사를 떠날 때 춘호와 창일이 뻐스정류소까지 바래워주겠다고 따라나섰다. 운동장에서는 송구꼴문주위에 책가방을 둘러놓은 대학생들이 해가 기울해진 틈을 리용하여 《소축구》를 벌려놓고있었다.

자기쪽으로 굴러오는 공을 꽝 내찬 춘호가 문득 리정에게 아까는 참 미안하게 됐다고 두서없는 소리를 하였다

《뭘 말이요?》

《절 도덕없는 놈이라고 욕하실줄은 압니다만…》 하고 춘호는 남방샤쯔에 받쳐맨 넥타이를 추슬러놓았다. 《전 어릴 때 숙제장에 아버지의 수표를 받아보는게 소원이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늘 한모양으로 바쁘기만 했습니다. 한번은 방학숙제장에 수표를 받으려고 공장에 찾아갔더니 접수에 대고 네 엄마한테 보이려무나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더구만요. 그런데 그때 어머니는 몹시 앓고있었습니다. 얼마나 서럽던지… 난 그만 주저앉아 울었지요. 마침 한유준이라고 공장설계사업소에서 일하던분이 지나가다가 너 부지배인네 아들이구나 하면서 무슨 일인가고 묻지 않겠습니까. 제 말을 다 듣고는 아버지를 나쁘게 생각지 말아라, 대신 내가 숙제장을 봐주지 하고 수표를 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은 내 숙제장에 <한유준이 보았습니다>라고 쓴 수표가 있는것을 보자 내건 보지 않아도 되겠다고 하더구만요. 아바이는 누구나 알고있는 실력가였으니까요.》

경기가 끝나고 학생들이 흩어졌다. 운동장옆 포석길우에 구경군들처렴 서있던 그들도 정문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최우등성적증을 받아안자 아바이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더구만요. 한달음에 공장으로 달려갔더니 아바이는 며칠동안 도로공사장에 동원을 나갔다는게 아니겠습니까. 그 조직자는 다름아닌 우리 아버지였습니다. 난생처음 아버지한테 대들었지요. 왜 하필 기술자인 한아바이를 동원로력으로 내보내나요 하니까 순서가 그렇다나요. 그럼 아버지순서는 언제냐고 했더니 버르장머리없는 녀석 하고 뺨을 치더구만요. 내가 군대에 갈 때도 아버지는 역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후에 어머니의 편지를 받아보니 렬차가 떠난 다음 아버지가 왔다고 설명하셨더라만…》

부자간의 화해를 바라는 어머니의 심정이 짚여와서인지 춘호는 말끝에 여지를 남기고 입을 다물었다. 갓 깃을 펴는 새처럼 분주하고 랑만적이던 생활은 겉뿐이고 춘호의 마음속에 이 저물녘처럼 기다란 그늘이 드리워져있다는것을 리정과 창일은 처음 알게 되였다. 늘 유쾌하게만 보이던 춘호의 모습이 실은 금이 간 담벽에 회칠을 한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리정선생! 거 리정선생이 아니요?》

로보트공학연구소 소장이 손을 저으며 소리치고있었다.

《맞구만. 공장에서… 급한 전화요!》

아마 연구소로 걸려온듯 했다. 리정은 접수실에 놓인 전화로 교환을 찾아 자기에게 온 전화를 돌려달라고 하였다.

김경조의 거센 목소리가 진동판을 울렸다.

《리동무요?… 집에 가던 길이라구?… 안되오, 당장 돌아서오. 이제 곧 내 차를 보내겠으니 거기서 움쩍 말고 기다리오.》

무슨 일인가고 물어보려는데 벌써 전화가 끊어졌다.

집에도 들리지 말고 그냥 돌아서라고 하는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것 같았다. 춘호와 창일이를 기숙사로 돌려보내고 반시간쯤 기다리느라니 지배인의 차가 나타났다.

《어떻게 이 차가?》

《이게 더 빠를거라면서 보내더구만요.》

《공장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니, 아직 모르고있습니까? 장군님께서 우리 지배인동지랑 당비서동지를 만나주셨답니다. 온실장도 같이 갔댔는데 딴사람이 돼서 돌아왔지요. 장군님께서 연구사동무도 찾으시였다는데…》

그들이 공장을 가까이 했을 때 구내에 지펴올린 우등불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있었다. 책상을 맞붙여놓은 주석단앞에는 기동예술선동대가 정렬해있었고 군중들속에서도 홰불이 타오르고있었다.

종업원궐기모임을 준비하는것이였다.

차를 세워달라고 한 리정은 선뜻 공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들의 눈이 덜 미치는 곳에 주저앉았다. 품속에 딱딱하게 마쳐오는것이 있었다. 박송봉이 준 수첩이였다. 그 갈피에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친필글쪽지가 소중히 간직되여있다.

《리정동무! 알고지냅시다. 앞으로 꼭 만나게 될것입니다.》

(그날이 문득 지나가버린게 아닌가?!)

영광의 순간은 흔치 않게 찾아온다는것을 리정은 알고있었다.

그것을 아프게 체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후회와 아픔이 또다시 찾아들리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던 그였다. 기동예술선동대의 나팔소리가 멎고 방송선전차에서 자리를 정돈하라는 최수광의 목소리가 울릴 때 리정은 터벅터벅 공장으로 걸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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