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편

제 1 장

8

 

그 방에 들번 한 사람은 다름아닌 박송봉이였다.

일도 공교롭게 되여서 그가 오는 날에 리정도 다시 나타났다.

리정의 뒤로 김책공대의 교원, 연구사까지 두셋이 묻어왔는데 합숙책임자가 마련한 박송봉의 방이 바로 리정의 옆방이여서 그들은 벽 하나를 사이두고 공장합숙에 나란히 거처하게 되였다.

리정은 돌아오자바람에 고장난 설비들을 수리하는데 달라붙었고 박송봉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장안을 팽이처럼 돌아갔다.

워낙 체소하고 말이 없는데다가 후렁후렁한 작업복까지 걸치고 공장구내를 도는 박송봉은 아무리 보아야 무슨 료해사업을 하러온 사람같지 않았다. 갓 입직한 경비원이 공장정문에 나타난 그를 세워놓고 한참 닥달을 한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새벽이면 박송봉이 먼저 일어나 옆방문을 두드리군 하였다.

《공대, 아직 자오?》

《공대! 식사 가기요.》

이따금 합숙관리원이 식당밥을 받아서 리정의 방에 올려다주군 했다.

저녁때 박송봉이 또 운반식사를 받아가는 합숙관리원에게 그가 어디 앓는가고 물었더니 《앓긴요, 끼때가 지나는줄도 모르고 후대교육사업에 전념한답니다.》 하고 걱정절반, 롱담절반 섞인 대답을 하였다. 호기심이 동한 박송봉은 식사가 끝났겠다고 생각될쯤에 리정의 방에 찾아갔다. 그때까지도 도면말이를 씌워놓은 다반을 한쪽구석에 밀어놓은채 리정은 웬 낯모를 청년에게 《베이씨크》니 《알고리듬》이니 하면서 프로그람기초지식을 가르치고있었다.

방에 사람이 들어온것도 몰랐다.

박송봉은 때로 자기가 당일군이 아니라 교원이 되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가 하고 생각해보군 하였다. 거리를 지나다가 아이들의 글읽는 소리를 듣거나 뻐스줄과 공원의자에 앉아 책을 번져가는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저절로 즐거워지는것이였다.

(역시 괜찮아.) 하고 박송봉은 생각했다.

좋은 노래를 감상할 때처럼 마음이 흥그러워진 그는 자기 방에 돌아가 콩사탕을 몇봉지 집어들고 다시 옆방으로 건너갔다.

《다른 선생들은 어데 갔소?》

불쑥 나타난 박송봉을 리정은 놀라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수요일이 학습반날이여서…》

그랬다가 표현이 좀 어색했던지 《정림이가 공부하러 오는 날이여서 저만 남기고 모두 현장에 나갔습니다.》 하고 애티를 채 벗지 못한 청년을 가리켜보였다. 그 얼굴이 몹시 낯익어보였다.

《온실장의 아들입니다.》

(옳아, 그때 조립직장에서 봤댔지.)

공장에 내려온지 이틀째되던 날 혼자 현장을 돌아보던 박송봉은 조립직장으로 들어가는 문입구에서 최윤동이 웬 색안경을 낀 청년을 세워놓고 큰소리로 닥달질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이놈, 어른들이 다 생각이 있어서 편의사업소에 보낸건데 착실히 기술을 익힐 생각은 하지 않구 어딜 싸다니는거냐, 엉?》

큰소리를 한번 치고는 쿨럭쿨럭 기침을 깇었다.

《도장을 새기는 일만은 정 못하겠는걸 어쩌겠어요. 난 진짜기술을 배우고싶단 말이예요.》

《뭐? 그래 네가 말하는 진짜기술이라는게 대체 뭐냐?》

이때 문가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만두십시오, 지배인동지. 그깟 녀석 될대로 되라지.》

그 소리에 최윤동은 펄쩍 뛰며 《여보, 그게 기껏 아버지가 한다는 소리요?》 하고 성을 냈었다.

뭔가 사정이 있는 청년이구나 했댔는데 리정의 방에서 다시 보게 된것이였다. 온덕수에게 눈을 상한 아들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작 만나게 되니 저 애 어머니도 속이 상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에 젖어왔다. 다른 집 애들은 모두 군대요, 대학이요. 나름대로 깃을 치며 날아갔겠는데 몸성치 못한 아들을 곁에 끼고 동구밖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쓰리고 아팠겠는가.

리정이 그를 가르치고있는것이 고마왔다.

박송봉도 역시 자식을 가진 아버지였던것이다.

《콩사탕인데… 이거 좀 들면서 하오.》

박송봉이 방에서 나가자 정림이가 물었다.

《못 보던 아바인데?! 형님, 누구예요?》

《당중앙위원회에서 료해사업을 하러온분이야.》

《당중앙에서요?》 정림이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야, 형님 정말 쎈데요.》

《내가?》

《그럼요. 하여간 형님때문에 공장이 막 끓고있지 않나요.》

《허허!…》 리정은 웃고말았다.

사실 박송봉이 공장에 내려왔을 때 리정은 옆방에 《포도대장》이라도 모신 사람처럼 몸가짐이 편안치 않았었다. 료해사업은 역시 료해사업인것만큼 리정은 언제인가는 반드시 《입궐》하라는 분부가 내려질것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하지만 박송봉은 그를 전혀 념두에 두고있는것 같지 않았다. 국우에 뜬 기름방울이며 고추가루까지도 리정의것과 꼭같이 발린 식찬들을 맛있게 들고는 랭수로 입가심을 하기 바쁘게 어디론가 사라지군 하였다. 박송봉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일이 없이 직접 찾아다니면서 보고 들었다.

리정의 방에서 돌아온 박송봉이 그날 료해한 자료들을 종합하고있는데 손기척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공장사람들속에서 《멱반장》이라고 불리우는 직장장이 찾아왔다. 쉰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옷에 가리운 어깨가 불룩볼룩하고 어느 모로 보나 혈기가 방장했다.

그가 자기소개로 《1가공에 장현국이라구…》 했을 때 벌써 박송봉은 《예, <멱반장>을 모르면야 봉화기계에 왔던 사람이 아니지요.》 하고 반색을 하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장현국이 《멱반장》으로 불리우기 시작한것은 칠팔년전부터였다.

그때 공장에서는 빠듯한 년간계획을 맞추느라고 직장별 사회주의경쟁을 걸었었다. 우승기는 지배인의 방에서, 얼룩돼지 두마리는 합숙뒤울안에서 목욕까지 해가며 시상의 날을 기다리고있었다.

무슨 일에서나 뒤자리에서 어물거리는것을 질색하던 장현국이 더욱 안절부절하게 된것은 경쟁때마다 늘 승벽을 다투군 하던 조립직장의 《불머리》반장한테 뒤떨어진것이였다.

다른 직장에는 다 져주더라도 《불머리》한테만은 이겨야겠다고 작심을 했던 때에 그만 화가 번져질 일이 터졌다.

앞선 단위들을 적극 내세워 본보기를 창조한다면서 공장기동예술선동대가 방송선전차까지 끌고가 조립직장이 떠나가게 사기를 돋구어준것이였다. 마침 생산부기사장의 꽁무니를 좇아다니다가 그 광경을 목격한 장현국은 얼굴이 활딱 붉어져가지고 직장에 돌아왔다.

한동안 골을 싸쥐고있던 그가 무슨 생각이 났던지 입심이 센 젊은 녀석들을 서넛 골라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조립직장에서 선동을 마치고 돌아가던 방송선전차가 이들에게 걸려들었다.

기동예술선동대공연이 시도 때도 없이 아무데서나 벌려놓는 오락회인줄 아는가고 야단하는 기동예술선동대장에게 공연까지는 필요없으니 나팔통만이라도 빌려쓰자고 사정하며 얼리며 해서 방송선전차를 직장에 끌고왔다. 성미가 덜렁덜렁한 장현국의 집사람이 돼지뒤다리에 끈을 잡아매고 나타난것도 그때쯤이였다.

아수한 눈빛으로 손등을 박박 긁으며 서있는 집사람에게 장현국은 살지면 죽는것이 돼지의 리치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는 방송마이크를 돼지주둥이에 들이대고 백정노릇을 벌려놓았다.

죽는다고 요동치는 백다섯키로짜리 돼지의 고함소리가 증폭기를 거쳐 공장을 들었다놓았다. 우린 우리대로의 사기를 올린다 그 배짱이였다. 공장일군들이 헐레벌떡 달려왔을 때 장현국나름의 《선동》은 깨끗하게 막을 내린 뒤였다. 그 일로 장현국은 물론 운전사와 기동예술선동대장까지도 눈이 쑥 나오게 비판을 받았다.

그때부터 장현국은 《멱반장》으로 불리웠다.

드세찬 성격과 일욕심이 만들어낸 흔치 않은 일화였다.

《실은 꽁무니에 곡주병을 꽂아넣었다가 푼수에 당치않는것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대신 이런건 어떨는지…》 하며 장현국이 신문지만 한 방수천에 먹선을 그어 만든 장기판을 펼쳐놓았다.

졸을 대신하는 사이다병뚜껑이 두개나 있었다.

《오, 그러지 않아도 갑갑하던 때 마침 잘 왔소.》

박송봉은 장기수가 그리 신통한 축은 못되였으나 소매를 걷어붙이고 접어들었다. 풋장기에 소리만 크다고 장이야, 멍이야 둬판을 돌리자 드디여 장현국이 말주머니를 열기 시작했다.

《제 본시 물을 마시기는 저 문암천에 맛을 들였던 황해도사람이지요. 지금은 청단물길이요, 연백물길이요. 간데마다 치마주름같이 쭉쭉 뻗어나간것이 물길입니다만 내가 코훌쩍이 소리를 듣던 때만 해도 한우물에 세동네가 매여살았다는 옛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뭐 그 소릴 하자는건 아니고…》

담배를 한꼬치 뽑아 박송봉이 그어주는 성냥불에 첫모금을 길게 삼키고나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황해도우물에 사는 곤두벌레얘기를 하자는거지요. 그 미물이 아는 짓이란 그저 죽을지살지 모르고 우로만 기여오르는것인데 몸뚱이를 꼬부렸다폈다하면서 참 힘들게도 기여오르지요. 한데 앞선 놈의 뒤에는 항상 매달리는 놈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한놈인가요. 두놈, 세놈씩 매달려서 버둥거리다가는 몽땅 우물에 처박히고만답니다. 글쎄 뒤에선 받쳐주고 앞에서 당겨주고 하느라면 같이 오를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소리쳤지요. 야, 이 미물아, 너들은 그래서 당대 그렇게 살아 하구요.》

장현국이 한담처럼 늘어놓는 말을 들으면서 박송봉은 일부 사람들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리정의 연구사업을 진심으로 돕고싶어하는 공장로동자들의 따뜻한 감정을 읽을수 있었다.

《그 참 뜻이 깊은 이야기요.》

《뜻이야 무슨…》 하면서도 장현국은 은근히 박송봉을 살피는 기색이였다. 박송봉은 륙감적으로 이 한밤중의 방문자에게 아직도 하고싶은 말이 남아있다는것을 느끼였다. 아니나다를가 자리가 편치 않은듯 끙끙거리던 장현국이 갑자기 《제가 사실은 죽을 죄를 고하자고 왔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죄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도둑질을 했지요.》

박송봉은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두석처럼 굳어졌다.

《며칠전에 당비서가 우리 집에 찾아왔었지요.》

장현국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금시 자리에 누우려던 장현국이 내의바람으로 달려나갔을 때 김경조는 낡은 끌신들이 놓여있는 토방돌우에 걸터앉아있었다.

《밤중에 안됐네, 동갑이.》

《별소릴, 어서 들어갑시다.》

《됐소, 집사람이랑 자리에 누웠는가본데…》

《그 사람은 없수다. 그저 돼지에 미쳤지요. 무슨 새 품종이 퍼졌다면서 그걸 얻으러 평원 제 동생네 집에 간걸요.》

《그래?!》

김경조는 반색을 했다.

이 당비서가 남의 녀편네 나들이간것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이다지 좋아한담 하고 머리를 기웃거리는데 김경조는 당장 집에 들어가 공구들을 걷어가지고 나오라고 호령했다. 금시까지 동갑이요, 뭐요 살갑게 굴더니 버릇이 또 살아나는 모양이였다.

《이거 저승길이라도 알고 갑시다그려.》

끌려가면서도 장현국인지라 할말은 했다.

김경조는 소처럼 씩 옷더니 《배짱이 맞는 동업자가 필요해서 그래. 오늘 동갑이구실을 좀 해주게나.》 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제 옆구리에 그의 팔을 단단히 잡아꼈다.

이렇게 되여 장현국이 따라가본즉은 법에서 곧 압수를 한다, 어쩐다 말이 많은 리정이네 그 개발조건물이였다.

《아니, 여기는 왜?》

《임자 콤퓨터라는걸 본적이 있나?》

《차, 뚱딴지같이 콤퓨터는 또 뭔가?》

《쉿! 그게 값이 간단치 않은데 이안에 두대나 있어.》

《그래서?!》 하고 장현국이 눈이 뎅그래서 물었다.

《이 사람이 정말 바보가 아닌가? 우리가 해치우잔 말이야.》

장현국은 기절초풍을 하였다. 주인없는 집에 들어만 가래도 놀랐겠는데 하물며 여기야 법이 굽어살피는 곳이 아닌가.

《정신나갔소? 당비서라는 사람이 수하 당원까지 거느리고 제 공장 재산을 턴단 말이요? 이거 정말 누굴 놀리자는건가?》

장현국은 우멍스러운 당비서가 자기를 놀려보는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경조가 손바닥만 한 수첩을 꺼내주었을 때 생각이 달라졌다.

그것은 리정이 쓰던 수첩이였는데 얼핏 보아서는 주소수첩이나 사업수첩 같기도 했다. 거기에는 자그마한 3극소자에 이르기까지 리정이 구입해들인 일체 전자요소와 부분품들이 적혀져있었다. 어느날에 콤퓨터를 구입했다는 글줄밑에는 《만세!》라는 글이 크게 씌여있었다. 그 콤퓨터를 구입하느라고 별 험한 소리를 다 들으면서 동서남북 안 가본데 없이 뛰여다닌 리정이였다. 그렇게 밟은 주소와 이름들이 깨알같이 적힌 수첩을 보자 속이 뭉클해왔다. 리정의 완강하고 꾸준한 노력이 엿보였다.

《이보라구, 동갑이.》 김경조는 말했다. 《나같은 사람은 어데나 흔하지만 리정이같은 인재는 다시 얻기 힘들어. 나도 당일군체면이 귀한줄은 아네만 저 물건이 있어야 혹 김경조의 목이 떨어진 후에라도 그가 새 기계를 만들어낼게 아닌가.》

《그러니 롱담이 아니라는거요?》

《난 이 길을 그저 한번 가보자고 떠난게 아닐세. 죽기내기를 하고 떠났어. 그러지 않고서야 해낼수 있나. 날 도와주지? 응?》

그러지 않아도 장현국은 새 기계개발을 적극 지지하던터이라 김경조의 진심어린 말까지 듣고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내 목은 뭐 수수대라니!》…

여기까지 말한 장현국은 거멓게 되여가는 박송봉의 낯빛을 보고 기가 질렸던지 양말목을 추켜올리며 일어서려고 하였다.

《당비서가 틀려먹었소.》

박송봉이 소리치자 장현국은 눈이 왕사발만 해졌다.

잠시 쭈밋거리던 그는 《집안에 비가 샐 때 말입니다, 지붕꼭대기에서 내려다봐서는 잘 알리지 않지만 밑에 앉아 올려다보면 짬새가 제꺽 눈에 띄지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가 사라지자 박송봉은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김경조, 역시 기질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드센 의기와 배짱이 있는 대신 무슨 일이나 앞뒤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내미는 나쁜 버릇도 있었다. 그러면 리정은 어떠한가? 실력이 있고 뭔가 한번 해보겠다는 의욕이 가득찬 야심만만한 지식인청년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무엇인가 부족한것이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딱히 짚어말하기 힘들었다.

박송봉은 기름냄새가 배인 작업복을 찾아입고 합숙을 나섰다. 지붕우로 주런이 뻗어나간 환기창들은 현장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물들어 충혈진듯 벌기우리했다. 그가 사고난 설비를 옮겨다가 수리를 하고있는 공무동력직장에 들어섰을 때 거기서는 뉘집의 기특한 소행인지 겨우내 움속에서 잠을 재운 고구마를 한소랭이 구워다놓고 풋절이김치까지 곁들여 새참을 벌려놓고있었다.

무슨 이야기판을 벌려놓았는지 웃음소리가 높았다.

방금 헤여진 장현국도 와있었고 그와 늘 승벽을 다툰다던 《불머리》반장도 보였다. 박송봉이 나타나자 머리 희슥한 김책공업종합대학 윤춘교수가 자리를 틔우며 맞아주었다. 박송봉은 군고구마냄새에 끌려 찾아왔노라고 푸접좋게 한자리 끼여앉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 공장 인심이 괜찮구만.》

《당비서동지네 집에서 내온겁니다.》

박송봉은 한쪽이 가뭇하게 탄 고구마의 껍질을 허리쯤까지 벗기고 입에 듬쑥 베여물었다. 그리고 두세개 꽂혀있는 숟가락을 옆사람들과 돌려가며 새금한 풋절이김치국을 후룩후룩 들이켰다.

《한데 방금 무슨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댔습니까?》

《우리끼리 리정연구사의 애이름을 지어보댔습니다.》 과연 머리칼이 이상할 정도로 자색을 띠고있는 반장이 대답했다.

《그래 지었소?》

《지을게 뭡니까? 나와 이 사람이(그는 장현국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같이 있는 자리에선 아무것도 합의가 되지 않지요.》

《흥, 말은 좋다. 리수재가 뭐야? 리수재가…》

《그게 어째? 아버지를 닮아서 수재가 되라는건데.》

《이보시오, 이름이란 그 뜻이 세글자속에 깊이 가리워져있어야 하는거요. 한데 당신이 지었다는 이름은 원체 그 뜻이 심오하지 못한것마저 망측스럽게 홀라당 벗고 나왔단 말이야.》

장현국의 반박에 웃음이 터졌다.

《그럼 직장장동무는 뭐라고 지었으면 좋겠소?》

박송봉이 장현국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금시까지 청산류수이던 장현국이 어줍게 웃으며 속살거린다.

《난 성공이라고 지었으면 해서요. 수재가 되라는것도 궁극은 실패와 우여곡절을 모르고 늘 성공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성공이라…》

그도 별로 신통한것은 아니였지만 새 기계의 개발을 둘러싸고 공장안에 흐르는 분위기와 로동계급의 지향이 비껴있는것 같아 함부로 평하기가 어려웠고 듣는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자정이 깊어 이만 일손을 거두기로 한 박송봉은 가까운 수도칸에 들어가는 윤춘교수의 뒤를 좇아갔다. 얼굴에 한창 비누거품을 일구고있던 윤춘교수가 곁에서 나는 물소리에 돌아다보았다.

《교수선생.》 박송봉이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기계를 살릴수 있겠습니까?》

《몇가지 전자요소만 교체하면 될것 같습니다.》

《그… 줄방전가공반연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교수는 수도꼭지를 천천히 막고 허리를 폈다.

《전 리정동무를 가르친 스승으로서 그의 창조적능력과 시야, 기질을 믿습니다. 그의 특질이 어떤지 아십니까? 어느것이 어려우냐? 그것을 바로 이 리정이가 한다 이런겁니다.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약점이라면 또 약점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자세에서 첨단과학의 목표를 바라보는것이 때로는 필요하지 않을가요?》

질문은 박송봉에게 돌아오는듯 했다. 박송봉이 김책공대손님들과 어울려 합숙울타리를 가까이했을 때 주변에서 심상치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2층창문에서 누군가 《여기도 없습니다.》 하고 소리치자 현관채양밑에 목을 길게 빼들고 서있던 김경조가 《이거 야단났구만.》 하며 황급히 자리를 뜨고있었다.

《날 찾는게 아니요?》 박송봉이 소리치며 나타났다.

하마트면 그와 부딪칠번 한 김경조는 《아! 평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빨리 받으랍니다.》 하고 웨쳤다.

박송봉은 뛰면서 물었다.

《어디요?》

《당위원횝니다.》

말 못할 예감으로 심장이 쿵쿵 높뛰였다. 그가 당위원회에 들어선것은 시간이 어지간히 지나서였다. 송수화기를 들면서도 그새 혹시 끊어지지나 않았겠는지 마음이 떨리였다.

《박송봉이 전화받습니다.》

김정일입니다.》

(아, 들고계셨구나! 지금껏 기다리고계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박송봉의 몸으로는 전류와 같은 짜릿한 환희가 지나갔다.

짤막한 인사말이 오간 뒤 김정일동지께서 물으시였다.

《그 연구사동무는 지금 어떻소?》

《설비사고를 낸것때문에 고충을 좀 겪습니다.》

《사고때문에?》 그이의 음성은 진동판을 몹시 울렸다.

《쬐쬐하구만. 첨단을 겨냥한 사람이 그쯤한데 기가 죽어서야 되겠소? 그한테 전하시오. 한대를 고장내면 두대를 보내주고 두대를 고장 내면 열대를 보내주겠다고 말이요. 말그대로 초행길인데 그쯤한 일이야 왜 없겠소.》

《알겠습니다, 장군님. 그리고 보다 심중한 문제가 있습니다.》

박송봉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결정관철을 놓고 확신을 못 가지고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보고드렸다. 몇번이나 생각던 끝에 그이께 보고를 드리고 가르치심을 받기로 결심했던것이다.

《그 문제는 돌아온 다음에 보기요. 내가 전화를 하는건 이제 며칠 있으면 5. 1절인데 명절을 어떻게 쇠는가 해서요.》

장군님, 마침 저한테 명절물자공급명세표가 있습니다.》

박송봉은 기다렸던듯이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이의 빠른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잠간만, 내 좀 적어야겠소.》

박송봉이 명세표를 부르고 그이께서는 되받으시였다.

《…돼지고기 3키로그람, 기름 2병, 당과류에다가… 오, 랭동청어도 있소? 제법 요란하오. 송봉동무도 한몫 타는가?》

넌지시 물으시는 말씀에 웃음이 풍겨왔다.

《글쎄, 저야 뭘…》

《거기 후방부지배인이 꼭자인게지? 그러게 내 방도를 하나 대주겠소. 뭔가 하면 5. 1절날에 체육경기를 조직하고 동무도 한종목 출전해서 상을 받으란 말이요.》 하시며 그이께서는 《5. 1절에 어디 추봉산을 한번 깨보시오!》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알겠습니다, 장군님. 추봉산을 깨겠습니다.》

《좋소, 그럼 내 전화를 바꾸겠소.》

뒤이어 연형묵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북남고위급회담때문에 가르치심을 받으러왔댔소. 이보 송봉동무, 거기 큰 인재가 숨어있다지?》

갑자기 무슨 말인지 박송봉은 얼떠름해졌다.

《아, 그…》 하던 연형묵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손으로 송화기를 가리운것 같았다.

《하여간… 그렇다는거요. 알겠소?》

하여간 그렇다? 뭐가 그렇다는건가? 은근히 불만스러워진 박송봉은 송화기에다 대고 당신이 아무리 총리이고 또 바쁜 대목이기로서니 베등거리바람에 혁명학원문턱을 같이 넘은 정을 생각해서 《은어》 같은 거라도 좀 써주면 안되는가고 소리치고싶었다.

한편 짐작되는바가 없지는 않았다.

《에익, 곰같은 사람…》

《뭐라구?》

《됐소, 여기 일은 걱정말고 큰일에 정신을 다잡소.》

송수화기를 내려놓자 최윤동과 김경조, 장현국을 비롯하여 낯익은 사람들의 확확 단 눈빛들이 그를 둘러싸며 다가들었다.

《옳소, 그이이시오.》

박송봉은 연방 옳소를 붙이였다.

《옳소, 체육경기를 본때있게 준비하기요. 그이께서 5. 1절에 저 추봉산을 한번 깨보라시오! 하하하!》

그날 체육대회가 정말 볼만 하였다.

소리로 산을 깨려는듯 아낙네들까지 청팀, 홍팀으로 응원패를 갈라가지고 북을 두드리고 꽹과리를 치며 사방에서 밀려왔다. 그날 경기마감에 만사람을 울리는 광경이 펼쳐졌다.

벽돌밟고달리기에 출전한 리정이 하필이면 자기 짝패로 정림이를 골라잡았던것이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멀찌감치 구경을 나와있던 정림이가 리정에게 끌려 정신없이 경기장에 나왔다.

주석단에 앉아있던 박송봉도 김경조도 용수철에 튕기듯 벌떡벌떡 일어섰다. 어느 종목에도 선수로는 뽑히지 못하고 응원대말석에 앉아있던 온덕수는 응원대장 장현국이 호각에 맞춰 그냥 흔들기만 하라던 마분지고깔을 툴렁 발밑에 떨구었다.

(무슨 일을 치자구? 무슨 망신을 시키자구?!…)

아니나다를가 다섯개 조가 모두 결승선을 통과하도록 그들만은 중간선을 헤매고있었다. 이미 경기를 끝낸 선수들은 저기서는 왜 저러는가하는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고있었다.

텅 빈 경기장에 그들만 정신없이 돌아가고있었다.

차라리 기권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기어이 꼴등을 하겠다고 나아가고있었다. 관중들속에서 우! 하는 바람소리 같은것이 울려나오더니 곧 침묵이 덮쳐들었다. 귀환점에 이르자 위치가 바뀌여 이번에는 정림이가 올라서고 리정이 벽돌장을 고였다.

주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주석단에서 누군가 겉옷을 벗어던지며 달려가는 사람이 있었다. 박송봉이였다. 침묵은 드디여 격렬한 환호성으로 뒤바뀌였다. 와와!- 함성소리에 정말 추봉산이 깨져나갈것 같았다. 이미 경기를 끝낸 선수들도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리정은 더는 벽돌장을 옮겨놓을 필요가 없게 되였다.

삽시에 결승선까지 곧은길이 펼쳐졌던것이다.

그 길로 리정은 정림이의 손을 잡고 그냥 걸어갔다.

정림이는 울고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는것조차 싫어서 밤길을 즐기던 그가 온 공장, 온 마을사람들이 지켜보는 속에 머리를 쳐들고 떳떳이 울면서 걸어갔다. 박송봉이 그의 한손을 잡고있었다.

(정림아!…) 온덕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웃음이… 눈물이… 막…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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