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8

 

서울이라는 생소한 곳에 와서 희망을 멀리 앞에 둔채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급급하던 리면상에게서 강무현은 새가 창공을 만난것처럼 반가운 존재였다. 생활은 한층 활기를 띠였다. 막벌이로 살아가지만 하루에 한끼를 먹어도 즐겁기만 했다. 일자리가 정해져있지 않은 그들은 날마다 닥쳐드는대로 일을 하였다. 국수배달을 그만둔 리면상은 강무현이 하자는대로 이끌려 서울판을 종횡무진하며 벌이가 좋다는 일은 골고루 다 맛을 들였다.

남새가 잘 팔리면 여의도에 건너다니며 메여날랐고 저자거리에서 조기값이 오르면 어촌에 가서 비린 물이 흐르는 물고기짐을 운반했다. 하루벌이가 끝나면 두사람은 어느 구석을 찾아서라도 막걸리그릇이나마 내고야말았다.

그들은 며칠동안 서울 화물역에서 짐부리는 일을 하였다. 부리는 짐은 갖가지였지만 하나같이 다루기 힘든것들이여서 고역이였다. 강판, 세멘트, 벽돌, 포장한 유리… 등짐으로, 목도로 발판을 타고 오르내리며 진종일 맥을 뽑고나면 말할 기운마저 없었다.

《면상, 오늘이 무슨 날이라고 했던가?》

막로동에 치울대로 치운 강무현은 언제나 근력이 남아돌아갔다.

지칠대로 지친 리면상은 쓸쓸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고역을 치른 뒤에는 이름하기 어려운 우수같은 감정이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던것이다. 이러나저러나 학교교원노릇도 하였고 결단코 음악을 해보겠다고 나섰던 내가 지금은 얼마나 가긍한 꼴인가.

《허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네.》

그 대답속에는 골라골라 고된 일만 찾아하는 강무현에 대한 불만도 섞여있었다.

《깽깽이샌님같은게, 잔뜩 볼이 부어가지구. 제입으로 한 말도 생각나지 않나?》

《내가 어쨌다구…》

《허? 제편에서… 오늘이 어머니생일이 아니던가!》

그제야 리면상은 허리아픔도 다 잊고 강무현을 덥석 안으며 옳다고 소리쳤다. 여러번 집에 찾아왔기에 강무현만 나타나면 어머니도, 류진이와 류연이도 익살군아저씨가 온다고 여간만 반가와하지 않는다. 어머니생일날을 두고 걱정을 했더니 덜퉁한 사람이 잊지 않고있었던것이다. 고마운 일이였다.

두사람은 점포를 찾아가 모시적삼감과 고무신을 샀다.

《사람이라는게 입고 신기에 앞서 구복을 채워야 하는걸세. 배고픈놈 비단옷을 걸치는것보다 꼴불견이 어디 있겠나.》

저고리감과 신발을 리면상에게 들리운 강무현은 저자거리로 아이 끌고 다니듯 하며 돈이 거덜날 때까지 눈에 차는것은 욕심을 부리며 다 사려고 했다. 말눈깔사탕까지 베보퉁이에 꿍지고나서 호기를 부렸다.

《왜 좋은가? 우리 같은 놈 주머니 돈은 검불처럼 아깝지 않아 좋다 이 말이네. 놀라긴… 돈 모아 부자될것 같은가. 흠, 아무리 탁배기사발을 기울여도 부러운게 없어서 좋은 우리가 아닌가. 가자구.》

리면상과 강무현의 출현으로 어머니는 너무 놀랍고 고맙고 기뻐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부엌동자질을 맡아나선 강무현은 아궁에 불을 지피라고 리면상을 몰아댔다. 눈치빠른 류연이가 부엌문앞에서 맴돌며 쌀일고 고기 손질하는 강무현을 들여다보다가 캐드득거렸다. 마른 장작을 안고 온 류진은 강무현의 눈치를 살피면서 자기가 불을 때겠다고 하려다 아궁에 엎드려 입 풀무질을 하다가 고개를 쳐드는 리면상의 얼굴을 보고나서 와? 하고 웃음을 터쳤다.

《형님, 얼굴… 하하하, 만국지도가 됐어요. …》

강무현이 한술 더 뜨며 놀려댔다.

《어머니, 이 량반 꼴을 좀 보시라요. 아들을 둘라면 나만은 해야지요.》

《언제 그런 일을 해봤겠다구. 어서들 올라오게. 내가 하지 않으리.》

토방에 앉았던 어머니까지 일어서자 강무현은 리면상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내몰며 야단을 부렸다.

《여, 깽깽이! 어서 나가 그 알량한 줄이나 훑으라구!》

아궁의 불이나 겨우 지피고 쫓겨난 리면상은 마당에서 대거리를 하였다.

《차라리 우리 연이한테 맡기게. 그 손으로 만진걸 누가 먹겠다구 그러나.》

《모르는 소리, 내 이래뵈두 한다하는 큰 음식점에서 국수분틀을 내리눌렀고 중국사람한테서 만투, 우동만드는 법까지 배웠네. 자네 같은 샌님에게 비길가.》

본때를 보여줄 심산으로 소매를 걷어붙인 강무현이 손을 놀려대는데 하는 품이 보통이 아니여서 어머니가 다 혀를 찼다. 이렇게 그가 만든 생일상을 마당에 멍석자리를 깔고 차리였다.

《원, 세상에… 나 같은게 생일을 다 쇠다니…》

어머니가 저고리고름으로 눈물을 훔쳤다.

잔에 술을 부은 강무현은 리면상이 어쩔새없이 어머니에게 먼저 올리며 말했다.

《이건 제일 큰 아들이 붓는 술입니다.》

《고맙네. …》

강무현은 리면상에게 소리쳤다.

《동생아, 네 차례다.》

동갑나이건만 앉은자리에서 손아래동생이 된 리면상은 천성이 너그러운지라 탓하는 기색이 없이 공손히 시키는대로 했다. 어머니가 기뻐하면 더 바랄것이 없었던것이다. 타향살이 고달프다지만 이 어머니를 만나 고향집에서처럼 살고있지 않는가.

《어머니, 아들이 많으니 좋지요?》

《암, 그렇지 않구. 정말 좋네. 어서들 들라구. 자기들 손으로 만들었는데 눈치볼것도 없지.》

류진은 종이봉투에 든 말눈깔사탕을 세여 동생과 꼭같이 나누다 강무현의 눈길에 걸려들어 목을 옴츠리며 덧이를 보인채 웃었다.

《사내는 쓴걸 좋아해야 해. 우리처럼 이런걸.》

강무현이 술잔을 들어보이자 모두 가슴이 후련하도록 웃었다.

《언제면 우리 이 사람 소원이 풀릴텐가.》

즐거움뒤로 어머니의 시름겨운 소리가 울리자 리면상은 가슴이 얼얼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돈을 번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고학을 결심했다지만 현해탄을 건너갈 려비도 마련하기 힘든 형편이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있던 강무현이 래일은 한강 선창에 나가 쌀을 부리는 가대기군질을 하자고 말했다. 몇푼 더 벌자고 강무현을 따라다니다가는 육신을 건사하지 못할것 같지만 정이 들어선지 헤여지고싶지 않았다. 억대우가 끌어대니 따라서는수밖에 없었다.

삼복이 가까운 계절에 마대고깔을 쓰고 쇠갈구리로 쌀가마니를 꿰여 둘러메고 나른다는것도 여간 베찬노릇이 아니다. 땀은 비오듯 하는데 목덜미에 기여들어 박힌 벼겨가 여린 살가죽을 문질러놓아 피가 내돋았다. 국수배달은 자전거라도 타고 바람을 일구며 다니지만 가대기군들은 렬을 지어 굼벵이같이 움직여 마음대로 서지도 앉지도 못했다.

리면상은 진저리나는 일만 찾아다니며 하는 강무현으로 해서 화가 치밀대로 치밀었다.

《다시 이런 일은 하지 말자구!》

강뚝에 퍼더버리고 앉은 리면상은 저고리를 벗어내치며 울기를 내뱉았다. 온통 땀투성인 얼굴에 쌀겨반죽까지 해놓아 회로 빚어놓은 사람같은 그를 보며 강무현은 박장대소했다.

《흣흣, 하하하… 더 크게 영각을 지르라구. 멋있다니까. 눈까지 부릅뜨니 지옥의 사자를 만난 기분이네.》

한사람은 맥이 나서 악에 받쳐 고함을 지르는데 그앞에서 너스레를 떨어대니 가관이였다.

《내 다시는 쫓아다니지 않겠네.》

《그건 두고볼 일이구. 어서 와서 잔등에 물이나 좀 끼얹게.》

웃동을 벗어든 강무현은 강기슭에 가서 손짓까지 해댔다. 떡판같은 비위살에 견디지 못한 리면상은 제 먼저 와락와락 얼굴에 물을 뿌려던지며 겨투성이 얼굴을 씻고나서 《엎디라구!》 하고 증을 냈다.

황소처럼 네굽을 뻗치고 고개를 박은 강무현은 물벼락을 들쓰며 시원하다고 좋아만 했다. 엎드린채 한정없이 끼얹어주기를 바라는 심보가 고약하여 리면상은 어렸을 때 말타기를 할 때같이 모로 돌아서며 훌쩍 가로타고 앉았다. 그통에 《이크?》 소리를 낸 강무현은 장신을 물속에 처박고말았다.

《맛이 좋지?》

《젠장, 차라리 잘됐다. 통빨래에 옹근 목욕을 하는거야!》

옷을 입은채로 깊은 곳으로 기여들어가며 강무현은 두팔로 첨벙첨벙 물장구를 쳐댔다. 동가슴까지 차오르는 물속에 선 그는 정말 빨래를 하고나서 비틀어짠 옷가지를 널어놓으라고 소리치며 내던졌다. 헤염도 잘 치는지라 옷이 마를 동안 시원한 물속에서 몸을 식히며 그냥 야료를 부렸다.

《면상, 자넨 품을 팔아 돈을 벌기는 글렀어. 샌님 골통에 건달기가 자리잡았거던. 하루 한끼 죽그릇 찾기도 힘들 위인이야. 보라구, 아직도 죽기내기를 하는 저 사람들을 남같이 여기지 말아야 해. 세상은 가난한 놈 등가죽을 벗겨 잘사는 놈 비단옷을 만들어 입히고 우리 같은 놈들의 기름을 짜내여 부자들의 아가리에 처넣고있단 말이네. 세상을 보는 눈조차 못 가지고 노래를 짓겠다구? 흥, 무슨 노래? 권주가? 이 샌님아, 고역이 힘들다고만 여기지 말구 저기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봐야 할게 아닌가. 귀구멍에 길을 닦구 말이야. …》

장바같은 사설인데 절반은 욕설이였다. 자기네가 일찍 일을 그만둬서 그렇지 가대기군들은 아직도 벼가마니에 눌려 개미떼처럼 흘러가고있다. 강무현의 말대로 그 사람들속에서 숨이 차고 늘어지긴 해도 귀를 기울이면 웃음이 터져나오는 노래가락이 울려나오고있었다. 거칠고 숨가쁜 《허구야?》 소리가 선소리를 먹이면 뒤따라 세상에 대고 마른 날에 주먹질해대는 걸직한 욕설과 상소리가 장단을 가진 가락으로 기름지게 흐른다. 고역을 파는 인간들의 위안인가, 자기들의 심신을 그렇게밖에 달랠수 없는 피눈물의 하소가 아니겠는가.

리면상은 자신이 측은해났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불쌍했다. 이렇게 살자고 태여났고 지금같은 고생살이나 하자고 이 세상을 산다는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백성은 두벌 수난을 산다. 가난해서 굴욕, 나라를 빼앗겨서 치욕, 뼈빠지게 일하는 사람들만 피눈물을 흘리는것 아닌가.

철부지같은 투정질을 했다는 생각으로 은근히 부끄러웠다. 인생의 괴로움을 모른다면 어찌 세상을 안다고 하랴. 세상을 모르고서야 무슨 노래를 짓겠는가. 배부른 사람들이 좋아할 노래나 만들어낸다면 노래로 밥벌어 먹으려고 하는 아부밖에 다른것이 아니다. 세상을 안다는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안다는것이요, 그들의 마음을 읽는다는것이다. 여기서 그는 김형숙이 한 말을 자기가 현실로 깨닫고있음을 알수 있었고 그것으로 하여 저으기 놀랐다.

마른 옷을 갈아입고난 강무현은 얼빠진듯 앉아있는 리면상을 두들겨 일으켜세우고나서 떠밀었다. 감상에 잠기기 좋아하는게 탈이라며 제나름대로 력설했다. 감상이 현실을 바로 인식하는데는 일정한 영향을 미치지만 애상으로 넘어가면 생활을 도피하게 되며 도피는 타락이라고 기염을 쏟았다.

리면상은 강무현이 자기보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것을 모르지 않지만 오늘은 새삼스럽게 마음속으로 존경같은 감정을 품게 되였다. 옳은것은 삼척동자에게서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글뒤주나 같던 량반후손이 세파에 뛰여들어 세상리치를 깨닫자니 오죽했겠는가.

《젠장, 가루 팔러 가는 날 바람을 만난다더니. 제길할…》

옆에서 걷던 강무현이 잔뜩 뒤틀린 소리를 내서 무슨 일인가 하여 리면상은 고개를 쳐들었다. 한강변과 이어진 행길이다. 길옆에 선 느티나무 한그루가 보이고 그옆에 마흔고개를 넘겼음직한 중년이 숱진 눈섭을 쭝깃대며 천천히 마주왔다. 조선옷차림인데 연청색조끼앞섶에 드리운 회중시계 은사슬이 눈길을 끌었다. 강무현을 아는 사람이 분명하지만 나이가 우인 사람인데도 주밋거리는 인상이다. 리익이 차례질수 있다면 언제든지 웃음을 지을수 있는 사람같이 보였다.

자리를 피해주려는 리면상의 걸음을 강무현의 목소리가 와락 나꿔챘다.

《면상, 기다리게! 알았나?》

리면상은 돌아보지 않으며 고개만 끄덕여보였다. 등뒤에서 중년의 느긋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임자, 나 좀 보세나.》

《내 엊그제도 말하지 않았소,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구요!》

《이보우, 도련님. 내 나이 몇이라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겠소. 한해전 그때로 말하면 나도 자네가 의심스럽더란 말일세. 더구나 임자 숙부님까지 만났던지라…》

도련님이라고 섬겨 말하는것 같다가도 자네라고 찾으니 무슨 속내인지 아리숭하기만 했다. 짐작이 가는건 언젠가 한마을에서 산 두사람 같다. 그때는 강무현이 량반집 도련님이였을테니까.

《됐수다. 풍운은 지나가고 팔자가 달라진걸 눈으로 보지 않소.》

《너무 비꼬지 마우. 내 집에 발 들여놓았다 가버린 후 여태 속앓이 하오. …》

거친 목소리가 울리자 중년이 무엇이라고 말하지만 가려들을수 없었다.

리면상은 어떤 사연을 안고 사는 두사람이라는것을 느끼면서 엿듣지 않으려고 걸음을 다그쳤다. 서대문쪽으로 가는 길이 바라보이자 길옆에 앉아 숨을 돌렸다. 그냥 훌쩍 가버릴수도 없는노릇이였다.

한참 기다려야 할줄 알았는데 강무현은 꼬리잡이나 할듯 따라섰다. 얼굴엔 언짢아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주걱턱을 쳐들고 흔들며 흥이 나서 말했다.

《가자구. 자네 쭈그러든 얼굴을 인두질해주지.》

《지쳤어. 난 가겠네.》

강무현은 흔들걸음을 하다 리면상의 맥빠진 소리에 고개를 기웃했다.

《무슨 생각을 하나?》

남의 속을 넘겨다보는 눈을 가진 강무현이다.

《어떤 사람인지 알고싶지 않나?》

《난 남의 일엔 상관 안해.》

《잔뜩 속통이 꼬여가지구… 내가 오늘 만난 사람은 광대였네. 아니아니, 지금은 미곡상인데 부자지. 한때는 우리 마을에서 살기도 했구. 그저 그러루한 사이네.》

듣는척도 안하며 내처 걷기만 하는 리면상을 잠시 지켜보던 강무현은 쓰거운 입을 다시고나서 이야기했다.

강무현의 고향은 평안도 성천이여도 집안은 증조부때 당쟁에서 밀려나 서울을 떠난 세도가문이였다. 아버지대에 이르러서는 땅마지기나 가지고 살아갔지만 사대부가문의 문벌기강은 자못 엄엄하여 고을의 사또가 찾아와 례의를 차릴 정도였다.

어느날 한무리 광대패가 마을에 나타났다. 큰 구경거리를 만난 마을은 법석 끓었다. 강무현이 여섯살 나던 해였다. 신기한 구경뒤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노래를 부르던 녀자광대가 피를 토하며 절명하는 참사가 빚어졌던것이다. 어른들조차 너무도 놀랍고 급한 일을 당하여 어쩔줄 모르는데 동네에서 제일 지체있는 강무현의 아버지가 나서서 불쌍한 녀인의 시신을 거두어주는 일을 주관하였다. 녀자광대는 남편과 세살 난 딸까지 데리고 다니며 춤추고 노래를 불러 살아갔던것이다. 숨이 진 엄마를 부르며 슬피 우는 어린것의 정상은 그지없이 처량하였다. 광대무리는 녀인의 죽음을 남겨두고 갈길을 가버렸다. 마을에 남은 아버지와 딸은 강씨집안 땅을 소작하며 살았다.

강무현이 여덟살에 장가를 가는 희귀한 일이 벌어진 해에 그들부녀는 마을을 떠나갔다. 그후 봉건결혼의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 강무현은 탈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을 돌아보니 봉건구습에 매여 허덕이는 사람이 자기 하나가 아니라는것을 알게 되였고 알게 되니 아버지가 리해되기도 하였다. 아버지도 봉건의 노예였던것이다. 수천년 내려온 관습은 집요했다.

정처없이 흘러다니던 그는 자기네 마을에서 살던 광대가 부자된 사실을 목격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막벌이로 살아가는 그였지만 광대앞에 얼굴을 내밀만큼 자존심을 잃지는 않았다.

생활은 그 자존심을 버리고 고개를 수그려야 할 때도 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아들이 집을 나간 후 심화병을 앓던 아버지가 림종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부친의 마지막길이라도 바래워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약 한첩 들고 갈 형편이 못되였다. 사람이 급한 대목에 이르면 못하는짓이 없다고 부자가 된 광대앞에 나설 마음까지 먹었다.

집을 찾아갈 용기는 나지 않아 미곡상이 다니는 길목을 지켰다. 며칠동안 한강나루에 웅크리고 기다리는 꼴이란 궁상스럽기 이를데없었다. 그렇게 만나 열리지 않는 입을 겨우 벌려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처음엔 놀라던 광대의 낯색이 점점 변하며 생면부지처럼 대하는통에 아연해졌다. 이 사람이 장사를 해서 돈을 모으더니 사람마음도 리속을 차려 들여다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울컥 치받쳐오르자 동냥 바란편에서 먼저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미곡상이 된 광대는 벙어리모양으로 입 한번 열지 않았다. 일자리가 변변치 않은 사람에겐 빚도 내지 않겠다는 심사같았다. 어느때엔가 주인으로 섬기며 땅 부쳐먹던 일마저 잊었단 말인가. 신세를 졌으면 갚을줄도 아는게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돈과 재물이 인간에게 후안무치를 생존수단으로 삼게 만들었다.

침을 뱉고 돌아선 그는 자기 몰골이 혐오스러워 가슴을 쳤다. 광대라고 마음속으로 하대하는 사람이 부쳐먹은 땅이 내 땅이였단 말인가. 섬겼다면 그 주인이 나였는가. 아버지가 주인이고 아버지의 땅이였다. 부자간에도 네것내것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광대였던 저 사람이 내가 아버지였다면 오늘같이 모르쇠는 안했을것이다. 인간세상의 흥정이란 이런것이다. …

《들어봤댔자 불효자식 떨구는 눈물같은거네. 내가 불효했는가? 면상, 자넨 그래 효잔가? 망한 나라에 충효란 검불처럼 날아가버렸으니 누구를 욕하고말고 할게 없지. 안 그런가? 내가 아버지령전에 분향을 했는가구? … 갈수 없었네. 아니… 집을 찾았네만 그땐 모든게 끝장난 뒤였어. 세상만물에 시작과 끝이라는것이 있지 않나. 행복이 불행의 전주곡이라는것을 아는 사람이 몇인가. 부러운게 없이 산다면 부러운것이 있다는걸 말하는거네. 량반집 자식인 내가 베보퉁이를 지고 방랑살이를 하는것도 필연이야. 잘살아봤으니 굶어봐야 하고 나라가 망했으니 백성들과 함께 피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엄정한 리치를 세상은 가르치고있거던. 아직도 내가 음풍영월에 묻혀있었다면 자네를 어떻게 만났겠나. 그리고 자네가 나를 알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후회막급했겠나. 세상인연이란 이런걸세. 자네 친구 하나는 잘 만난줄이나 알게…》

어깨를 두드려주는 강무현을 리면상은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웃으며 말하지만 그 얼굴은 침통하였다. 듣기조차 괴로운 사연을 겪어본다는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머리속에 맴도는 의문은 많아도 리면상은 한마디도 물을수 없었다.

《면상… 내라는 인간은 이런 사람일세. 집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갈수 없거던. 칼을 뽑아들었네. 칼집은 버렸어.》

감성적인 리면상은 그의 말을 다는 리해하지 못하지만 사내다운 마음에 이끌려 걸으며 진정을 터놓았다.

《난 무현이가… 좋아. 모르고 살았더라면… 진정 후회했을거야. …》

두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들의 가슴속에서는 고향의 노래가 흐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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