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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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일본의 정책작성자들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체계를 완비하며 대륙침략의 병참기지, 전초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20세기 20년대의 마지막해가 다가왔다. 1930년, 이해에 조선반도와 그 주변에서는 어떤 사변이 일어날것인지 아직은 예측할수 없었다. 중국 동북지방의 요충지들인 단동, 심양, 천진일대에서 대본영의 검은 그림자인 일본첩보기관들이 괴이한 사건을 빚어내지만 신문지상에 흔적을 어렴풋이 올릴뿐 주목이 돌려지지 않고있었다. 압록강국경일대에 배치되는 병력이 늘어나고 사무라이들의 군가소리가 높아가는것은 새로운 전쟁을 알리는 서곡이였다. 중국의 동북땅을 빼앗기 위한 일제의 야망은 바야흐로 실현단계에 들어서고있었다.

일본륙군대장만이 차지할수 있는 조선총독자리에 새로운 놈이 들어앉을수록 야수적인 민족말살정책은 더욱 악랄하게 추진되였다. 망국 삼천리는 이리떼에게 물어뜯기워 암흑천지로 변하여갔다. 무자비한 략탈의 대상으로 전락된 땅에서는 가혹한 노예로동이 강요되였고 농토를 떠난 실향민들의 걸음은 북으로, 남의 나라 지경으로 이어졌다.

한강변엔 봄빛이 완연하지만 두주먹을 부르쥔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엄동을 헤치기와 다를바없었다. 종로 한복판으로 늘어빠진 종소리를 절렁절렁 울리며 전차가 뱀처럼 기여가고 인파속을 헤치며 인력거와 자전거가 겨끔내기를 해댄다.

자전거를 타고 국수배달을 하는 일도 해보니 재주를 가진 로동이다. 한손으로 자전거를 몰며 다른 손으로 국수목판을 수평으로 들고 주문세대를 찾아간다는것이 쉬운 일인가. 국수물을 조금도 흘리지 말아야 한다. 한번에 몇그릇 나르는가 하는것은 힘과 요령을 요구했다.

리면상은 지금 충무로3가를 지나 장충단쪽으로 자전거를 몰아가고있다. 전차가 다니는 종로보다 이 길로 국수집에 가는편이 안전했다. 점심참에 맞춰 국수를 날라다 주었으니 몇푼은 번데다 음식점에서 한끼는 먹여준다. 그것도 손님들에게 냈다가 크게 다치지 않은것을 모았다가 주는 선심인데 턱찌끼나 한가지이다.

며칠전 리면상은 습작품인 노래를 렴필재에게 보였다. 몇번 불러보고난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홍란파에게로 데리고 갔다. 그들사이는 사제간처럼 가까웠다. 홍란파는 리면상을 반갑게 맞아주며 다방에서 인사를 바로하지 못한걸 량해하라고 하여 몸둘바를 모르게 하였다. 무심할수도 있는 일조차 기억하고있었으며 쩌릿한 선률로 가슴을 울려주는 선배의 모습이 대번에 존경심을 품게 하였다.

홍란파는 진중한 어조로 말하였다.

《창작가가 되자면 비평의 소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오. 크건 작건 제손으로 자기 모양을 갖춘 선률의 집을 짓는게 작곡가이기때문이요. 새로운 진리는 탄생할 때 이단의 운명을 지니게 된다는 말이 있소. 창작도 다를바없소.》

옆에 앉은 렴필재가 말했다.

《뭔가 새것을 찾자고 애쓴 흔적은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장단맛이 나자면…》

홍란파가 조용히 웃었다.

《필재군은 노래터에 지금도 나가나? 옥련이까지 끌어들여 짝을 뭇고 부른다는 소리가 들리더군.》

《선생님, 울적한 심사를 무엇으로 달래겠습니까. 왜인들까지 모여드는 자리에서 한바탕 부르고나면 속이 좀 풀립니다.》

《허허, 망국에 우는 이 하늘아래에서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지.》

가슴을 짓누르는 통탄을 들으며 리면상은 렴필재를 새롭게 리해할수 있었다.

《나는 면상군이 불행한 이 민족의 좋은 노래를 지으리라고 믿고싶소.》

《고맙습니다. 제 기어이…》

《면상군의 결심을 알게 되니 내가 더 기쁘고 고맙소. 민족음악에 뜻을 둔 우리는 고생꾸러기들일수 있소. 허나 지켜내야만 하는 내 민족의 노래가 아니겠소. 함께 부르자구. 면상군에겐 천성적인 재능, 뛰여난 음감이 있소. 알아둘건 가창법은 기교의 숙련으로 해결할수도 있지만 작곡은 기초수업을 해야 한다는거요.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부르는 노래지만 노래마다 서로 다른 구조식이 있다는거야 알지 않소. 그것은 작곡가에 의하여 발견되며 독특한 감정전달로 되게 하는것이 바로 창작이기때문이요. 긴말을 한걸 나무라지 마오. 하도 음악친지가 그립다나니… 허허.》

암야의 등불처럼 보이는 홍란파를 통하여 배워야 한다는것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작곡가는 수수께끼나 같은 언어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때문에 그 언어가 이야기할수 있는것이 되자면 전문적인 수련이 필요한것이다.

《필재군, 일본으로 공부하러 간다는 말이 떠돌던데 음악공부를 하려고 그러는건 아니겠지?》

《선생님, 저의 부친을 알지 않습니까. 아들이라는걸 키워놓고는 돈벌 재목이 되는가만을 저울질합니다. 온 집안 족속들은 로동벌이 되여버렸습니다. 벌어들일 재간이 없으면 왕벌은 추호도 용서가 없으니까요.》

《자식이 부모타발하면 삼강오륜을 그르치네.》

그날 렴필재는 리면상에게 헤여지며 이렇게 말했다.

《이놈은 부친의 의사를 거역하지 못할가보네. 인차 떠날지도 몰라. 아들은 썩은 이발을 뽑고 아버지되는분은 돈을 모으고… 얼마나 타산적인 부자간의 도리인가. 참, 내 일전에 말했지만 장가라는걸 가보지 않겠나. 사람이 급하면 남의 돈도 꾸려니 눈을 꾹 감고 처가집 신세를 좀 지는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고르는 녀자는 괜찮네. 생각해보라구.》

홍란파를 만나 기어이 음악을 하겠다는 맹세를 한지라 리면상은 렴필재의 말을 새겨듣지 않으며 웃음으로 스쳐버렸다.

국수목판을 뒤자리에 끈으로 동여맨 리면상은 두서없는 생각을 이어가며 자전거발판을 밟아댔다.

을지로는 여느때없이 사람들로 붐비였다. 연방 종을 울리며 몰자니 곱절이나 힘들었다. 아침밥을 설친데다 점심을 찾아가는지라 허기져서 눈앞이 아물거렸다. 함지를 이고 지축지축 걸어가는 녀인을 피하면 행상짐을 진 사나이가 앞을 막아서고 그 사람을 에도니 구척장신이 백주에 술을 마셨는지 갈지자걸음을 쳐대는통에 자전거는 종시 전주대를 들이받고야말았다.

《종소리를 듣고 피해주면 안되오?!》

길가에 나딩군 리면상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면서도 자전거부터 살폈다. 고장이 나면 하루벌이는 고사하고 수리비로 며칠일지 모를 음식점 공짜일을 해주어야 한다. 국수도 자전거도 다 국수집것이니 알량한 목판조차 못쓰게 만들면 큰일이다. 길가던 사람들은 다치지 않았는가고 걱정이라도 해주는데 구척장신은 돌아보지도 않으며 코방귀다.

《사람 보고 다니구려!》

자전거가 고장난데 없어 다행이라고 여기는데 대답이 부아를 돋구었다. 남을 탓해본 일 없는 그였지만 너무도 밉살스러운 행인이여서 아무 욕이나 하려고 고개를 쳐들다 마주치는 눈길에 입만 벌린채 굳어지였다. 하필 이런 때 저 처녀와 만나게 되다니. 진옥련이 놀란 얼굴을 하고도 얼어붙었는지 옴짝 안했다. 꼭 마술에 걸린 사람같다.

《넘어진 사람 돌아라도 보면 못쓰우?》

누구에게 화를 내는 소린지 제가 지르고도 알수 없었다. 인사불성의 사나이가 불쑥 고개를 돌리자 두사람은 거의나 동시에 놀란 소리를 내며 손부터 내밀었다.

《면상이 아닌가?!》

《무현군!》

강무현이 황황히 달려와 주저앉은채로인 리면상을 안아일으켰다. 너무도 반가워 두사람은 어깨를 쥐고 흔들며 두드려대기만 하였다. 류치장에서 헤여질 때 같아선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가 했는데 운명은 이렇게 마주세워주었다. 그래서 세상에 인연이라는 말이 생겨났는가.

《내가 받기울번 하길 잘했어. 허허허, 자전거덕이구만!》

《아마 그런가보구만.》

《서울바닥에 나타날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

《어디 보자구. 여전하구만.》

《자전거를 다 타고 다니구. 팔자 고쳤나?》

《국수배달부신세가 됐네.》

《흣, 허허. 세상은 우리를 부려먹을줄만 알거던. 다치진 않았나?》

《일없네.》

들썩하게 떠들어대는 두사람을 오가는 사람들이 주빗이 보고는 제풀에들 좋아하기에 씁쓸하게 웃으며 가버린다. 오도가도 못하고 선 사람은 진옥련뿐이다.

그의 얼굴은 의혹과 고뇌가 어려 형용 못할 표정이였다. 하늘색브라우스에 연갈색치마를 입은 모습이 숨쉬며 서있는것이 아니라 그려놓은 사람같았다.

리면상은 강무현의 어깨너머에 서있는 진옥련을 그제야 다시 보고나서 들뜬 기분으로 소리쳤다.

《옥련씨, 내 친구요. 무현군!》

리면상은 진옥련이 자기를 무심한 얼굴로 보고있지만 눈길은 강무현에게 가있다는것을 느꼈다. 강무현의 낯색과 거동도 어딘가 이상했다. 무엇인가를 애써 부정하려는 표정, 베보퉁이를 휘둘러메는 동작, 거칠게 뿜어나오는 숨결… 이어 짓누른 거센소리가 울려나왔다.

《가자구, 어서!》

리면상은 돌발적인 감정의 뒤바뀜에 어리둥절했다. 진옥련의 자세가 폭염속의 나무잎처럼 후줄근해나며 금시 넘어질듯 휘청거렸다.

《얼빠진 사람같이 서서 화를 돋굴텐가?!》

강무현은 억센 손으로 무작정 끌어댔다.

《아, 자전거…》

리면상은 영문모를 궁지에서 허둥거리며 따라섰다.

끌고 끌리우며 걸음을 옮기는 두사람앞을 진옥련이 막았다. 감정을 수습한 처녀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힘겹게 지어낸 한줄기 웃음이 간신히 흘렀다. 흐려진 눈빛이 강무현을 바라보는데 애절한 하소를 담고있었다.

《너무하지 않아요. 지나친 무시와 외면이군요!》

진옥련은 정확히 그러나 듣고서는 알수 없는 감정을 전달하고있었다. 틀림없이 이들 두사람은 이미전부터 잘 아는 사이다. 어떤 사연을 안고있는것이 분명하다. 리면상은 공교로운 자리에 자기가 서있다는것을 깨닫게 되자 서둘러 말했다.

《이야기들을 하지. 난 먼저 가겠네.》

강무현의 얼굴은 비웃듯 하지만 눈은 모욕을 당한 때처럼 떨고있었다.

《난 이 녀자를 모르네. 사람 잘못 봤겠지.》

어찌 보면 모욕을 당하고있는 진옥련이지만 그는 자신을 다잡고 평시모습으로 돌아왔다. 조용히 한숨을 내긋고나서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우린 한마을에서 몇해를 살았어요. 그래요. 서울에서는 오늘까지 두번째 만나요. 운명이겠지요. 인생에는 회개라는 말도 있더군요. 너무 가혹하게 굴거야 없지 않아요.》

《하느님한테나 회개하구려. 귀구멍 넓은 하느님이시니까.》

모른다는 사람들사이가 드디여 화제를 이어놓았다.

《녀동생을 찾자고 그러지요? 은현이 말이예요.》

녀자의 입에서 나오는 몇마디가 사나이의 거친 가슴을 조용히 눌러댔다. 놀란 눈을 치켜뜬 강무현은 잠시 처녀를 노려보다 뱉아대듯 말했다.

《광대패들이 무당춤만 잘 추는가 했더니 점치는 재간도 가졌소?》

《점은 틀려도 제 말은 맞을거예요.》

《다시는 마주서지 않겠다고 결심한 나요!》

《운명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마 우린 일생 오늘처럼 만날지도 몰라요.》

《내 동생에게 자선이라도 했소? 빚진게 있으면 내가 갚지. 어데 있소, 내 동생이…》

《거기선 부산에서 올라오는 길이겠지요? 전 길가에서 우연히 은현이를 알게 됐어요. 오빠의 이름을 부르며 인천으로 가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고 물었어요. 마침 갈 일이 있어서 그곳에 함께 내려갔지만 없더군요. 부산으로 갔다고 해서… 동생은 그리로 갔어요.》

리면상은 강무현의 큰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꺼져내리는것을 보았고 무거운 숨결을 들었다.

《패가한 집안의 남매간인데 죽지 않으면 만나게 되겠지. 면상, 가세!》

《난 음식점에 가야 하네. 자전거를 가져다줘야 하니까.》

《자네 가는델 가잔 말이네. 우리 같은 사람한텐 배가 없다나.》

난감해진 리면상이였다. 강무현이 서울에 나타난것은 제 동생 행처를 찾자는것이 분명했다. 바쁘다면 그보다 더한 일이 어데 있는가.

강무현은 리면상의 등을 떠밀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걷는다기보다 자전거에 의지하여 끌려가다싶이 하며 리면상은 자기가 그 어떤 무정한 일에 말려드는것 같아 은근히 속이 아파났다. 패가란 무슨 말이며 녀동생은 몇살인데 오빠를 찾아다니는가. 서로 아는 사이라 이야기를 나누면 좋으련만 매정하게 구는 까닭은 무엇인가. 삼거웃처럼 엉킨 생각이 걸음을 무겁게 하였다.

점심참에 국수배달을 한 리면상은 설렁탕집에서 대충 한끼를 굼때고 회포나 나누자는 강무현의 말에 끌려 공원에 들어섰다.

강무현의 기분은 평소의 태평무사한 성격으로 돌아왔다. 진옥련과 있었던 일도 동생의 신상도 관심하지 않으며 풀밭에 비스듬히 앉아서 이것저것 물으며 한담같은것을 펼치려 하였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내가 알아서는 안되는거라면 묻진 않겠네만 동생걱정은 해야 할것 같구만.》

《서울에는 왜 왔나?》

리면상은 할수없이 알고싶고 권고하려던 말을 더이상 꺼내지 못하고 자기 얘기부터 했다. 일본이라는델 가자니 돈이 있어야 하고 서울에서 그 돈을 벌자고 헤매는게 이 꼴이라는 말을 하자 강무현은 베보퉁이를 헤치더니 신문을 한장 꺼내들었다. 방랑객의 짐에 책이 들어있기에 리면상은 저으기 놀랐다. 현해탄을 건너가 맨주먹으로 공부하고있는 조선청년들의 생활상을 소개한 일본신문 기사내용을 읽어준 강무현은 유표한 거센소리를 냈다.

《물론 배워야지. 자네가 결심을 했다니 막지는 않겠지만 왜놈의 굴속에 찾아들자면 정신을 바로 차려야 할걸세. 무식한것보다 더 무서운게 얼빤하게 알아가지고 세상을 재는 놀음이거던. 내 친구들도 몇이 고학을 하고있는데 오는 편지라는걸 보면 신통치 못해서 하는 말이네. <자아수양>이라는 주장이 나돌아 눈귀가 거기에 미치네만 실력배양을 뭘 배워서 하겠다는게 이 나라의 현실에는 동떨어진 또 하나의 음풍영월로 들린단 말이네.》

리면상은 강무현의 보퉁이에서 삐죽이 모서리를 내민 책의 제목을 일별하였다.

《<자본론>을 보나?》

《난 닥치는대로 보는 사람일세. 수천년을 살면서 인간이 이루어놓은 력사에 성인은 얼마고 위인이라고 일컫는 사람은 또 좀 많은가. 저마다 제가 안다면서 가르치려들었고 언변이 좋아 말을 휘두르고 문장이 뛰여나 글줄을 자랑한게 책으로 남아있지 않나. 읽고 배우려는 사람이 똑똑해야 한다 그 말이네. 글쓴 사람을 배우자는게 아니라 자기를 위해 배우는게거던. 이런 놈의… 또 입을 열고 쥐꼬리만큼도 모르면서 세상을 저울질하려 든다니까. 흣, 허허.》

두릿두릿 무엇인가 찾을듯 둘러보며 말하던 강무현이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서더니 《잠간 기다리게.》 하고 낮은 소리로 말하고나서 긴 다리를 놀리며 겅정겅정 걸어갔다. 알길없는 친구의 뒤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면상은 재미있는 사람이야 하며 웃다가 눈길을 뚝 멈추었다.

두그루의 자귀나무사이로 한 녀성의 뒤모습이 보였다. 돌의자에 앉아있었다. 오른손에 양산을 들고 재주나 부리듯 돌려대며 누구를 기다리는것 같았다. 강무현이 그 녀자의 곁으로 주저없이 걸어가더니 인사를 하고 옆자리에 어렵지 않게 앉는다.

리면상의 눈은 금시 커졌다. 저 녀자를 만나자고 나를 여기에 데리고 온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몇마디 나누지도 않고 양산을 든 녀인은 사내와 눈인사를 하고 가버린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그들의 만남이 싱겁게 끝나는 바람에 어처구니없어 멍청히 보기만 하였다.

돌아온 친구의 얼굴은 달라진게 하나도 없었다. 아무 일도 생긴게 없었다는 천연스런 거동에 리면상은 자기가 방금전에 본것이 착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였다.

《자네 <보라매>라는 다방을 아나?》

리면상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씰댔다. 그곳에 진옥련과 함께 가지 않았던가. 그곳에서 렴필재는 어떤 녀자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마치도 자기와 진옥련의 관계를 묻는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어떤가? 내 이 몰골로 그런 집엘 찾아든다면, 어울리지 않겠지?》

《별소릴, 잘 입어야만 찾아다닌다던가. 박식한 사람들은 다들 그런데 앉아서 시세를 론하더군.》

《하? 면상이 날 춰올린다. … 그건 그렇구, 말 좀 하게. 안고 사는 사랑이 뭐지?》

화제가 상대의 마음먹은대로 번져가는통에 피동적인 리면상은 의아한 눈으로 마주보기만 하였다. 가늠하기 어려운 친구였다. 량반가문의 후예로서 지식은 잘산 덕에 갖춘것이겠지만 세파에 부대낀 모습과 말투는 너무도 대조되였다. 웬 젊은 녀자를 만나고나서는 왕청같은걸 물어댄다.

《세상엔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은게 많고많거던. 그중에서 무엇을 제일 사랑하나… 목적한 사랑말이네?》

《글쎄… 사랑한다면… 음악이겠지.》

한때 교단에도 섰던 사람이 얼마나 얼빤한 소리를 내는것인가. 리면상은 자기가 강무현의 앞에서 학생이 된 기분이지만 그조차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것이 이상했다.

《음악, 얼마나 좋은 리상인가. 하지만 망국을 당한 이 하늘아래서는 오래동안 수난의 노래가 울릴거네.》

강무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침통한 말마디들이 리면상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였다. 침략자들에게 짓밟히고있는 민족의 피눈물이 강산을 적시고있지 않는가.

《하지만 사랑하라구. 민족에게는 노래가 있어야 하네. 때문에 노래를 짓는 사람도 필요한거지.》

친구의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진정에 눈시울이 더워난 리면상은 말했다.

《나한테 더 옳은 길을 가르쳐줄수도 있지 않나.》

강무현은 리면상의 손을 잡았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길을 걸으면서 누굴 가르치려 든다면 그건 유혹일세.》

때없이 울리는 자기의 목소리에 화가 난 강무현은 주걱턱을 흔들며 주먹을 틀어쥐였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자기가 속한 비밀결사에 배신자가 생겨난것이다. 사람이 한입으로 구국을 맹약하고 투항을 서약할수도 있는가. 《보라매》다방주인이 방금전에 접선한 녀인을 통하여 비상신호를 보내왔다. 배신자는 죽여 없애야 한다. 비겁한 놈의 숨통은 끊어놓을수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오리무중에 빠진 심리에서 헤여나오려고 길게 한숨을 내뿜으며 말했다.

《면상, 우리 민족이 당하는 망국의 치욕을 잊지 말자구.》

리면상은 이 순간 자기와 강무현은 포부가 서로 다르다는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단순한 리상의 차이가 아니였다.

《자, 가자구. 우리 어데 가서 한잔 마시지 않겠나?》

베보퉁이를 둘러멘 강무현이 일어서며 하는 말에 리면상은 덴겁하여 손을 내흔들었다.

《난… 술을 못 마시네… 술을 어떻게…》

《하? 내 이런 사내아닌 사내와 친교를 가졌던가. 한세상 사는 대장부 술에 놀라면 무슨 구실을 할텐가. 어서 걷게. 내 오늘 남자세상문턱을 어떻게 넘어야 하는가를 배워주지.》

강무현에게 떠밀리워 걸으며 리면상은 사정을 했다.

《이러지 말라구. 술 마셔야 남잔가 뭐.》

《가만, 원산 처녀선생생각이 나누만. 잘 있나? 어떻게 리별했지? 약속은 했을게구…》

원산소리에 더욱 바빠난 리면상은 한손을 내둘렀다.

《약속은 또 뭔가. 나 같은게 무슨 약속을 하겠다구 그러나.》

듣기가 못마땅한지 강무현은 발까지 굴러댔다.

《내 눈은 못 속여. 이실직고하게!》

리면상은 김형숙을 생각하니 이상야릇한 향수가 가슴을 휩쓰는것을 맛보았다. 바다바람에 날리던 저고리고름이 보이는듯싶었다. 흰 저고리 고름은 그에게 있어서 향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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