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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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면상은 참으로 뜻밖에 찾아든 생활로 하여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그의 앞에 서울이라는 생소한 곳에 와서 신문배달을 시작하면서 이른새벽 대문가에서 만나군 한 처녀, 그 순간 《신문을 가져왔습니다.》, 《고마와요.》가 두사람이 나눈 말의 전부였던 처녀가 서있었다.

겨울이 물러가는 계절이라지만 추위가 여전한데도 홑옷차림인 그의 앞에 여우목도리를 두른 처녀가 눈은 내리깔고 턱은 약간 들어올린채로 미소를 보내고있었다. 무심히 대하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보아온 이름모를 처녀였다.

《여기에서 이렇게 만날줄은 몰랐어요.》

처녀의 맑은 목소리가 나직하나 정을 담아 울렸다. 부드러운 음색이 외모보다 훨씬 마음을 끌었다. 저 좋은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면 듣기가 좋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돌아서버렸다. 그의 마음은 자못 불쾌하였다. 자존심은 이런 장소에서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던것이다. 자리를 빨리 떠야겠다는 생각을 앞세우며 《오늘신문은 그 집 어멈에게 주었는데요.》 하고 서둘러 말하고나니 너무도 왕청같은 소리였다.

《전 밖에서 기다렸답니다.》

리해할수 없는 말이 처녀의 입에서 나오자 리면상의 얼굴은 굳어지였다. 두눈에는 의혹이 짙게 서리였다. 누구를, 나를? 무엇때문에…

덮쳐드는 의문을 안고 대답을 바라지 않기에 단념하며 걸음을 옮겼다. 처녀의 구두가 또각거리며 따라섰다.

《백운남선생의 방으로 들어가는걸 보았어요, 바이올린을 들고 말이예요.》

그제야 리면상은 손에 든 바이올린통을 내려다보았다. 신문배달, 우유배달을 하기보다는 극단에서 음악을 배우는편이 나으리라고 여겨져서 백화극단을 찾아왔고 백운남이라는 사람앞에서 시험까지 치르었던것이다.

《백운남극단이 서울에서 큰소리를 치기에 저도 한번 출연해보자고 왔댔어요. … 정말이예요. …》

자기를 향해 불꽃을 튕기는 눈동자를 본 처녀는 말꼬리를 삼키며 겁에 질린듯 고개를 숙이였다.

이 나라의 음악이란 아직도 봉건의 질곡에서 헤여나지 못하고있으며 가수 역시 광대로 불리우며 천시되고있다. 부자집 딸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찾아다닌다니 믿어지지 않는 말이였다. 그보다는 자기를 조금도 꺼리지 않으며 만나려고 한 처녀의 행동이 놀랍고 의문스럽지만 한편으론 야릇한 흥미도 느끼게 했다.

《제 이름은 옥련이예요, 진옥련.》

처녀의 입김이 대기를 숨결에 맞춰 녹이였다. 리면상의 가슴은 그로서는 처음인 박동과 숨결로 높아졌다. 어떤 충동인가 하면 두려움같기도 한, 하면서도 더이상 무엇을 생각할수 없게 하는 이상한 자제가 머리를 쳐드는것으로 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순간 그는 자기의 행동을 주시하는듯 한 눈길을 느끼였다.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찾아든 일 없는 속박감이 어데서 시작되는지 알수 없었다. 멍멍해나는 귀전으로 파도소리같은 음향이 들려오자 마음의 금선은 애달픈 선률을 그었다. 목메여 부르는듯 한 소리에 화답하는 심중의 노래임을 깨닫자 서글픈 감정이 가슴을 뒤덮는것이였다. 그는 처녀가 제 소개를 먼저 하였는데 응대하지 않는것은 실례여서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리면상이라고 합니다.》

진옥련의 하얀 이발이 꽃잎같은 입술속에서 꽃술처럼 드러났다.

《무슨 생각을 하지요? 이 처녀는 도대체 어데서 나타난 요정인가, 유혹하여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가. 신문배달이나 한다고 업신여기지 않는가. … 그렇지요?》

처녀의 목소리가 소심하게 울리는것은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조심성이 깔려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묻는 말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의미를 담으려고 애쓰는것이 알렸다.

《업심을 당하는건 나의 운명이고 유혹하는건 음악뿐이요. 고독한 인생…》

《리상을 가진 사람의 고독은 명상을 펼치고 명상은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하더군요. 성공하고싶겠지요?》

《그렇소.》

《음악으로요?》

《그렇소.》

《베토벤도 쇼뺑도 음악의 신으로는 되였지만 불행했어요.》

리면상은 걸음을 멈췄다. 놀라게 하는 말이 처녀의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왔기때문이였다.

《리상과 생활에서 다 같은 만족을 바란다는건 욕심에 지나지 않지요.》

《그럴가요? 참, 래일 저도 공연에 참가하려고 해요. 백선생이 자기 극단을 장식해달라더군요. 면상씨가 반주를 해주신다면 제가 한번 잘 불러볼 생각인데 어떤지요?》

진옥련의 결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자기는 극단입직으로 되는 연주이지만 녀가수의 노래를 반주하는것도 흥미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백운남의 극단은 흥행업체나 같아서 예술단으로서는 그 형태를 종잡기 어려운 집단이였다. 기악쟁이, 소리군, 곡마단 재주군, 엉터리만담쟁이에 무당패 비슷한것까지 뒤섞인 무리인데다 그보다도 리면상의 기분을 잡쳐놓은것은 배우들의 무대의상이라고 해야 할 차림새였다. 가수가 기모노를 입었는가 하면 북잡이가 게다를 신은 꼴은 차마 눈뜨고 보기가 역겨운것이였다. 게다가 재주군들의 옷주제는 집시들을 방불케 하였다.

《보세요. 구경온 일본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기막힌 아부예요. 돈만 벌면 된다는거예요.》

무대막뒤에 선 진옥련이 속삭이듯 말했다.

공연은 시작부터 일본노래를 불러댔다. 장고장단에 맞추어 불러대는 노래의 소절이 끊기울 때마다 《요샤? 요샤?》 하며 발을 굴러대는것은 일본사람들이였다. 사무라이본색이 광기로 나타나고있었던것이다.

《옥련씬 무슨 노래를 부르자고 왔소?》

《면상씨가 지정해주는 곡을 부르지요.》

무대에 리면상과 진옥련이 나섰다. 녀가수의 정갈한 소복과 단아한 모습은 관중의 시선을 모았다. 바이올린의 애절한 전주가 울리자 진옥련은 비바람에 몸부림치는 봉선화의 모습그대로 《봉선화》를 불렀다. 애달픈 심사를 모아 꽃잎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뿌려주는 선률의 처절한 파도에 묻혀 흐느끼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어 괴성이 터져나오더니 무대우로 게다짝이 날아오는 란장판이 벌어졌다. 일본사람들이 저들의 흥을 깨뜨렸다는 분풀이는 그에 그치지 않았다.

《금곡령을 내린 노래를 부르는가? 당장 무대에서 내쫓으라!》

《극단주를 끌어내라!》

《경찰을 부르라!》

눅거리무대에서 조선노래 한곡을 불렀다고 만용을 부리는 일본사람들의 불측무도함은 식민지민족을 대하는 배타적인 감정의 폭발이였다. 황황히 달려나온 백운남은 두손을 마주 비비며 비굴한 사죄를 하였다.

리면상은 백화극단을 찾아온것을 뒤늦게야 후회하였다. 민족의 넋에 대해서 론할 여지도 없는 무리속에 들려고 한 자신이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망국으로 당하는 치욕마저 모자라 일본놈들에게 아부까지 한다면 어찌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백운남이 한 말은 더욱 기가 막힌것이였다.

《내가 죽고 네가 백발이 될 때까지 일본은 이 땅의 주인으로 남아있을게다. 세상을 바로 보는게 현자야. 내 임자의 재간이 아까워 받아주니 다시는 오늘같은 일이 없도록 하게.》

《전 극단취직을 하지 않으렵니다.》

《마음대로 하게. 그러나 후회하게 될거야. 자네가 그 깽깽이를 내려놓지 않는 한 우리는 만나게 될지도 몰라.》

백운남은 사람을 흥정물처럼 여기며 저울질하다 아쉬운 욕심을 드러내며 무엇인가를 예언했다.

봄은 왔다지만 겨울이 아직 물러가지 않은 서울거리였다. 황혼은 어두운 그림자에 쫓기우며 한강변으로 자취를 감추고있었다. 서글프고 외로운 넋들을 심야에로 떠미는 시간이다. 둘러보고 둘러봐도 의지할 손길이 보이지 않는 어스름속을 걸으며 리면상은 그지없이 쓸쓸한 심사에 시달렸다.

《면상씨.》

기다리고나 있은듯 진옥련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무대에 함께 나섰던 그 옷차림에 덧저고리를 걸치고있었다.

《백선생을 만났어요?》

그 말의 뜻은 어떤 결심을 내렸는가 하는 물음이였다.

《환멸을 느꼈을뿐이요.》

《음악에 대해서요?》

괴롭히는 말에 무거운 걸음이 멎었다.

《인간도 노래도…》

대답하고나니 후회되였다. 지나친 절망감이 담겼기때문이였다. 진옥련의 모습은 리면상의 눈에 이상하게 비껴들었다. 고개를 약간 수그린채 웃고있는 자태가 그 어떤 만족감을 드러내는것 같기도 했다.

《저 다방에 들렸다 가지 않겠어요?》

진옥련은 약간 갈려나는 소리로 물었다.

《나한테는 격에 어울리지 않소.》

《다시 노래를 부르고싶어요. 저곳에는 일본사람들이 없어요.》

《내가 거리에서 노래를 파는것도 보았소?》

《우리가 부르는 노래를 리해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가요?》

리면상은 대답없이 진옥련을 따라 다방으로 갔다. 언젠가 이 다방에 렴필재와 온 일이 있었다. 서울에서 알게 된 그들은 음악을 사랑한다는 하나의 리유로 이따금 만났다. 일본에 건너가 음악공부를 하고싶어하는 리면상의 한가닥 소망을 들은 렴필재는 진심으로 동정하며 자기의 의사를 비쳤다.

《장가를 가지 않겠나? 도움을 받을만 한 녀자를 만나면 될텐데.》

생각도 못해본 소리지만 렴필재의 권고는 생활을 남다르게 보는 타산적인 말이였다. 동년배들중에 가정을 이룬 남자들이 많았다.

《어느 녀자든 내 바이올린통을 보면 기겁할거야.》

《생각키우는 한 녀자가 있긴 한데…》

《그만하게. 내 아무리 가난해도 녀자 우산밑에서 노래를 부를만큼 마음까지 궁해빠지지는 않았네.》

리면상은 렴필재와 나눈 이야기를 상기하며 다방안을 둘러보았다. 손님들이 식탁마다 빈자리없이 앉았다. 가벼운 담배연기가 떠돌고 축음기에서 외국음악이 울려나왔다. 《두나이강의 물결》선률이 상념에 젖은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인간세상의 시름을 회의와 권태, 비관과 락망, 한탄과 포기의 감정으로 부둥켜안은채 고객들은 자기들나름대로 그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애쓰는것이다.

진옥련이 다방주인과 이야기를 나눌 동안 리면상은 벽면을 채운 산수도앞에 서있었다. 나이보다 일찍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다방주인의 은테안경을 낀 둥실한 얼굴이 초면인데도 호감을 주었다. 주인은 접대부를 시켜 축음기를 끄게 하고나서 다방을 찾아온 가수와 연주가를 소개하였다.

고루한 정서에서 새것을 기다린듯 손님들은 시선을 두사람에게 모으며 박수를 보냈다.

《즉흥적으로 무엇이든 연주하세요. 부르는건 걱정마세요.》

진옥련이 나직하나 재빨리 말하자 리면상의 활이 바이올린의 현을 그었다. 《아리랑》이 울려나오자 객석의 공기는 대번에 부풀어올랐다. 부드럽고 운치가 나는 풍만한 가락이 흘러넘쳤다. 리면상은 진옥련의 민요창법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거센것과 부드러운것이 잘 조화를 이룬 소리색갈도 독특하지만 조선민요의 고유한 장단을 재치있는 롱음기교와 결합시키는 형상기법도 놀라운것이였으며 청중의 심금을 틀어쥐고 음악세계로 빠져들어가게 하는 가수의 관중과의 호흡은 참으로 세련된것이였다. 극장이라고 해야 할 무대에서 모욕을 당한 《봉선화》가 바이올린선률과 어울려 노래로 울리자 사람들은 격정을 이기지 못하며 재청했다.

가수가 세번 불렀을 때 다방주인이 봉선화꽃송이를 안겨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꽃이요. 겨울에도 피우지요.》

흥분으로 설레는 손님들속에서 수수한 양복차림의 준수하게 생긴 중년기의 남자가 가수와 연주가앞으로 오더니 정중히 인사하였다. 진옥련은 그 인사를 받으며 몹시 당황해하였다.

우중충한 구름장속을 헤치며 쪼각달이 흐른다. 나란히 걷던 진옥련이 문득 물었다.

《다방주인이 인상깊지요? 호호호. 얼마나 급했으면… 한때 시재로 알려지기도 했어요. 얼마나 자유분방해요?》

미묘한 색채를 띤 물음이여서 리면상은 다방주인을 상기하였다. 어딘가 행동이 이상하였다. 좀전에 먼저 다방을 나서던 리면상은 처마아래에 선 남녀의 모습을 어둠속에서 보았다. 매우 긴장된 목소리가 재빠르게 오갔다. 무슨 물건을 언제까지 가져오라는 말 같은데는 가려듣기 어려웠다. 다방주인이 녀자와 헤여지려 할 때 어둠속 행길에 어떤 사나이가 불쑥 나타났다. 그 순간 우연한 일치인지 진옥련도 다방에서 나왔다. 밀회자들이라고 해야 할 두사람이 몹시 당황해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선생님, 갑니다.》

진옥련의 인사가 리면상에게는 훼방으로 들렸다. 다방주인인것을 알면서도 찾아 안해도 될말을 하지 않는가. 저으기 바빠난 다방주인은 몇번이고 인사를 거듭하며 다방안으로 사라졌고 그를 은밀히 만났던 녀성도 종적을 감추었다. 그들을 놀래운 사나이도 휘파람을 불며 제 갈길로 가버렸다.

《얼마나 버젓이 감행되는 밀회인가요, 다방안에는 부인이 있는데. 부인 또한 보통녀자가 아니예요.》

《난 가겠소.》

듣고싶지 않아 리면상이 빠른 걸음을 옮기자 진옥련이 따라섰다.

《참, 그분이 누군지 아세요?》

《?…》

《다방주인 말고 우리앞에 와서 인사를 하고 간 점잖은분 말이예요. 아시면 아마 놀라실거예요.》

《다방에서 연주해보기는 처음이요.》

《전 너무 당황해서… 홍란파선생이예요.》

리면상은 놀랐다. 그러니 《봉선화》작곡가앞에서 서툰 활을 그어댄것이 아닌가. 하지만 얼마나 진정에 넘친 인사를 하였던가. 홍란파를 자기가 너무도 우연히 만난 사실앞에서 흥분을 지울수 없었다. 민족음악의 수난을 먼저 체험하고있는 선배였기때문이였다.

《금곡령》이 내려진 자기의 노래를 감상하는 그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리면상은 홍란파의 선량하고 진지한 눈빛이 금시 다가서는것만 같았으며 말없는 인사를 남기고 조용히 물러가던 모습이 아프도록 가슴에 자리잡았다.

《전 선생의 모습에서 느꼈어요.》

《존경이 가오.》

《그래요. 하지만… 우수의 감정… 쓸쓸해났어요.》

진옥련의 심리는 예상할수 없었다. 천성적재능을 가진 가수이지만 음악에 대한 관념은 회의적이였다.

《이걸 받으세요.》

진옥련이 손에 쥐여주는것이 돈이기에 리면상은 멎어섰다.

《이를테면 우리의 공연출연료예요. 꼭같이 나누었어요. 다 드리면 모욕으로 느낄거예요. 이것이 랭정한 생활이예요.》

매일 매 시각 리면상이 겪는 고생과 느낌을 다듬어 표현한것이였다.

리면상은 사람은 먹어야 산다는 말이 어떤것인가를 이 서울바닥에서 똑바로 알게 되였다. 다방출연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은 굶어지내야 할 하루였다. 그러니 어떻든 고맙다고 해야 옳겠지만 그 말만은 나가지 않았다.

진옥련이라는 처녀의 체취는 의혹의 그림자가 되여 끈질기게 같이 걸었다. 어떤 처녀일가. 리면상과 걷고있는 이 처녀의 심리는 단순하였으며 공상에 불과한 오솔길에서 헤매고있었다.

《잘 가오.》

진옥련과 헤여진 리면상은 걸음을 돌려세웠다. 멀어져가는 진옥련의 발걸음소리가 백사장을 쓰다듬으며 쉼없이 속삭이던 파도소리로 바뀌며 들려오는 까닭은 무엇때문인가. 음향의 색갈에 남달리 예민한 청각을 가진 그는 어떤 사람의 음성을 정확히 되살려냈다.

《면상선생, 수업시간을 지켜주세요.》

리면상은 음악교원이였다. 하찮은 과목으로 여기면서도 풍금과 같은 악기를 잘 타며 엉터리가 아닌 교육을 할수 있는 선생을 찾기도 쉽지 않은 때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자기의 음악강의시간뒤에는 처녀교원의 자연과목이 뒤따르는 때가 많았다. 문가에는 처녀교원이 서서 늘 기다리였다. 처음에는 무거운 한숨, 다음은 눈빛으로 전달하는 애원, 마침내는 불만어린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면상선생, 수업시간을 지켜주세요.》

미아리고개를 넘어선 리면상은 돈암동어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언덕우에 자그마한 집 한채가 보인다. 마당가에 선 배나무가지끝에 걸린 눈섭달이 처량한 빛을 안고 조심스럽게 어둠을 살피고있다.

얼마나 무정한 세상인가. 하지만 저 작은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그의 마음을 따뜻이 덥혀주고있었다. 고향을 떠나 방황하는 몸이건만 인정을 부어주는 어머니와 같은분이 기다린다.

지난해 겨울 서울에 내려온 리면상은 하숙집을 잡지 못해 한달이 넘도록 헤매였다. 그사이 원산에서 가지고 올라온 돈도 밑창이 나고 음악공부를 하려던 꿈은 절망으로 이어지고있었다. 하도 급한 나머지 이 마을 길가에서 바이올린을 정신없이 켰다. 저녁은 굶어도 래일아침 한끼는 먹어야 했던것이다.

때마침 귀인을 만났는데 마음씨 고운 어머니였다. 사연을 듣고는 두말없이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의병이던 남편은 두만강을 건너갔고 철부지오누이를 데리고 산다고 했다. 류진은 14살이고 동생 연이는 10살이지만 무척 총명하고 인사성도 밝았다. 그들은 리면상이 메고 나타난 바이올린이 신기하여 첫 대면부터 들려달라고 졸라댔다. 생활은 어려워도 저녁이면 음악에 맞춰 웃는 단란한 가정이 되였다.

마당에 나와 기다렸는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리 늦나? 배고플텐데…》

타향의 밤에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것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인가를 가슴벅차게 느끼며 리면상은 류진과 류연의 손에 끌려 방으로 들어갔다. 저녁을 먹고난 뒤 어린 류연이 여느때없는 소리를 하여 집안을 웃기였다.

《오빠, 나 어제밤 꿈에 오빠 장가가는걸 봤어요. 막 울다가 깨나니…》

《우리 연이 정이 푹 들었구나. 허허…》

《쬐꼬만게 벌써 그런 궁리야!》

고마운 집에 의지하고 타향살이를 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친자식같이 여기는 어머니가 있고 형님, 오빠라고 불러주는 류진과 류연이 있다.

잠자리에 들어 귀뚜라미우는 소리를 들으니 눈앞으로 무시무시한 홍수가 혀를 뽑아들고 덮쳐들었다. 뚝막같은 생존터들을 순간에 삼켜버리며 산을 허물어버릴듯 기승을 부렸다. 하루밤사이에 마을이 떠내려가고 살자고 악을 쓰며 골짜기에 들어가 일구었던 리면상네 땅뙈기들은 간데 없이 사라졌다. 절망에 빠진 아버지는 떠내려간 땅을 찾겠다고 물속으로 뛰여들었다. 일가식솔들이 매달려 말리였다. 누가 하느님이 있다고 했는가. 하느님은 고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굽어볼 눈깔조차 없는 하늘이였다. 탕수를 뒤집어쓴채 한덩어리가 되여 곡성을 터뜨리는 모습은 죽지 못해 사는 땅없는 인간들의 비참한 군상이였다. 그후부터 리면상은 강을 무서워했고 불보다 무서운것이 물이라는 단순한 공포를 안고 성장하였다. 그 모진 가난속에서도 아버지는 온 마을이 칭찬하는 소리군자식을 공부시켰다.

노래를 잘 부른 덕으로 함흥사범학교를 나온 리면상은 원산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다. 그는 방과후이면 학생들과 바다가에 나와서 대자연의 노래를 들으며 노래를 불렀다. 그런 자리에 처녀교원이 찾아나왔다. 단 둘이 만나면 눈길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어려워했다. 별스레 몸이 굳어지는가 하면 절제와 침착성이라는 처녀의 품성에서 구속감을 느꼈던것이다. 같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다지만 생활적인 이야기를 나눈 일이 없는것으로 하여 그들 두사람의 감정은 초면처럼 서먹서먹하였다.

《난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겠습니다.》

적당한 구실을 붙여 피하는것이 상책이라고 여기며 리면상은 서둘러 말하고나서 덤벼치며 갈 궁리만 하였다.

《학생들처럼 친절하게 대할순 없는가요?》

《수업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는데…》

자기도 무슨 생각으로 무슨 대답을 하는지 알수 없는 말이 흘러나오자 어처구니없었다.

《그러니까 전 감정도 없는 교원일뿐이군요. …》

마주보던 한쌍의 맑은 눈동자가 조용히 한옆으로 기울어들자 말허리가 저절로 끊기웠다. 교수안을 꼭 쥔 하얀 손이 곁눈길에 보였다. 백묵가루가 파란 잉크자욱을 가리우려는듯 덮은 손가락이 이상한 충격을 일으키자 뒤이어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은… 보고 느끼는 존재가 아닐가요. 서로 보고 느끼는…》

수학처럼 속셈을 요구하는 질문은 아니여도 처음 들어보는 말이였다. 보고 느낀다는 평범한 표현이지만 대답을 해야 하는 물음이기에 음미하니 단순한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보는 까닭에 느끼며 느낌을 가졌기에 사랑하고 증오하는것이 아닌가. 자기가 남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가는 알수 없는 일이다. 리면상은 처녀교원이 오늘은 별러온 말을 하려고 바다가에 찾아나왔다고 생각하였다. 이 철딱서니없는 음악훈장을 단단히 가르칠 잡도린가, 학교에 한명뿐인 처녀교원이. 하기야 나 같은건 훈장이지…

이런 불만섞인 생각을 하는데 실망에 젖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아예 상대가 안되여 무시하는군요.》

《그럴리야 있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선생의 눈에 비낀 초라한 내 모습을 그려주십시오.》

《선생은 노래도 그렇게 부르세요?》

《그러문요. 난 감정을 지어낼줄 모릅니다.》

처녀교원의 걸음이 멎었다. 수그린채 걷던 머리를 천천히 들더니 바다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마음을 식히고나서 수학공식을 풀 때와 같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제눈으로 본것은 선생의 들뜬 랑만이예요. 학생들은 자연과 사회를 배워야 해요. 시간을 랑비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길 바래요.》

《유감이군요. 선생이 음악을 천시하는 그 관념이…》

《선생의 음악을 리해하지 못할뿐이예요.》

그들 두사람이 한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으면서 나눈 제일 긴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였다. …

리면상은 팔베개를 하고 돌아누웠다. 오늘도 잊혀지지 않는 눈동자… 왜놈들의 만행에 격노한 광주학생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이에 련대하여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나섰던것으로 해서 류치장살이를 하였는데 그 처녀교원이 면회를 왔었다. 놀랐다. 반갑지는 않았다. 그 일로 함께 류치장살이를 같이하는 강무현에게서 속통머리가 좁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리면상은 구류장에서 매일같이 뭇매를 맞았다. 부두로동자들도 시위를 벌렸는데 강무현은 주동분자로 걸려 잡혀 들어왔다. 뼈마디가 억센 장신인데다 넓은 이마, 우뚝한 코마루, 두드러진 광대뼈와 주걱턱으로 해서 10년은 손우사람같이 보였다.

《샌님이 오늘도 만신창이 되였구만. 흣, 허허…》

《고향은 어덴가요?》

《천지는 만물의 려관이요. 세월은 백대의 길손이라? 이 강무현은 보퉁이 베고 누우면 집이네.》

세상에 이렇게 배포유한 방랑객이 있다는것을 그는 처음 보았다. 하늘을 지붕삼아 떠도는 인생, 걸음마다 눈물로 적실 고달픈 운명이건만 태평무사한 성격이 리면상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감옥 다음가는 살벌한 곳에서 리면상은 친구를 사귀였다. 왜놈경찰서 류치장에서 나온 그는 매질을 당한 어혈로 며칠동안 하숙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어느날 학생들이 찾아왔다. 못견디게 그립고 마음속으로 찾게 되던 목소리들이 마당에서 울리자 리면상은 벌떡 일어나 목침을 구석에 밀어던지고 문을 열었다. 남녀학생들과 함께 처녀교원이 서있었다. …

강무현과 이어진 추억과 함께 또다시 찾아드는 처녀교원의 모습이였다. 어떻게 헤여졌던가. 두해가까이 교편을 함께 잡고있었지만 감정과 이어진 말은 리별의 시각에 나누지 않았던가. 그나마 처녀교원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추억으로 남아있지도 않을것이다. 아량을 베푼것은 자기가 아니다. 그때문에 마음속 문을 두드리는 목소리를 조용히 눈을 감고 듣는것이다.

《제 눈에 보인 선생은 대장부가 아니였어요. 그런데… 오늘 결심을 들으니 사람은 보고 느끼기만 해서는 안된다는것을 알게 되는군요.》

담담한 음성이 귀전에서 울리자 리면상은 마음을 진정할수 없어 일어나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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