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46

 

렴필재는 책상우에 놓은 려행용가방과 솜저고리를 무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참으로 다심한 부인이요. 위병이 걱정되여 든든히 갖춰보내니 말이요.》

《부상동문 백두산에 올라보았소? 8월에도 눈이 내리군 하오. 시시각각 천변만화한단 말이요.》

리면상은 창문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이 찾아온 용무를 말하려 하지 않기에 벽시계를 바라보고나서 공연히 서랍도 열어보고 무엇을 거두기도 하며 부산을 피웠다. 병원에 들렸다 역으로 나가야 했다. 김옥성이 입원해있다. 진단결과를 보면 병을 키울대로 키웠다는데 걱정을 안할수가 없었다. 혁명전통주제의 교성곡 수정작업을 하다가 쓰러졌다. 한편한편의 작품을 고심어린 노력으로 창작하는 사람이다.

《위원장동무, 백두산답사를 뒤로 미루면 안되겠소?》

리면상은 피우던 담배를 성급하게 꺼버렸다.

《아니, 안되네. 오래동안 생각해온 노래를 이번에는 완성해야겠네.》

《모를 소리군. 노래 한편쯤이야 하루밤에 만들어내는 위원장동무가 아니요. 백두산까지 찾아가야 한다니 리해가 안되오.》

《노래마다 다르다는걸 알지 않소.》

와이샤쯔단추를 한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렴필재는 리면상을 전에 없이 유심히 바라보았다.

《난 위원장동무도 중요한 결론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되기때문이요.》

자기의 의사를 무게있게 표현하느라고 애쓰는 렴필재의 거동이 어덴가 이전과는 다른데가 있다는것을 리면상은 느꼈다. 언제나 자신심을 가지고 동작 하나하나를 확연하게 해보이던 사람이 우물거리는감이 났던것이다. 무슨 말을 하자는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눈귀를 도사리고 사는 사람일진대 음악가동맹 위원장이 예술부문실태를 보고드렸다는것을 모를리 있겠는가.

《그 문제라면 물론 중요하지만 창작을 중단할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지나치게 여유작작한게 아니요? 위원장동무 사업정형이 심중하게 론의되고있다는것쯤은 알고있을텐데.》

길떠날 사람은 시간이 촉박한데 비꼬며 조여대는 말투에 리면상은 화가 치밀었다.

《나는 이미 나라는 인간을 고스란히 내놓았소. 내가 이제 부상동무와 같은 리론을 갖출수야 없지 않소. 지도능력과 사업방법이야 더 말할것도 없지 않은가 말이요. 내 늘 말하지만 난 작곡가로서 창작만 하면 바랄게 없는 사람이요. 이걸 리해하기가 그렇게도 힘이 드오?》

《힘들수밖에. 책임진다는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때문이요.》

렴필재의 눈빛이 번쩍거렸다.

《부상동무, 어떤 책임이든 백두산에 갔다와서 지면 안되겠소?》

《좋소. 무사히 다녀오오.》

《고맙소.》

렴필재와 헤여진 리면상이 걸음을 다그쳐 김옥성의 입원실에 들어서니 그곳에는 조령출이 먼저 와있었다. 침대의 머리맡에 놓인 악보를 일별한 리면상은 한숨부터 지었다.

《제 몸 돌볼 생각은 전혀 안하니 걱정일세.》

병색이 짙은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김옥성이 말했다.

《음악을 떠나서는 못살겠는걸 어떻게 합니까. 많이 나았습니다. 조령출선생이 병과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주던중입니다.》

리면상은 대뜸 조령출을 곱지 않게 흘겨보았다.

《그런 엉터리비방은 듣지도 말게. 우둔한 소리밖에 나올게 없다네.》

《허? 저는 한뉘 위병을 술로 치료하더군. 그것도 비방이라고 하겠지?》

《에끼, 위원장체면을 깎아도 분수가 있지… 허허.》

《이런 놈의 말버릇이라구야. 경우가 없거던.》

두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김옥성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리면상은 침대에 앉으며 김옥성의 손을 잡았다.

《난 백두산에 갔다오려네.》

《들었습니다. 이번기가 좋더군요. 인민군대 지휘성원들의 답사니 항일투사들과 만나게 될겁니다.》

《그래서 제기했더니 승인했소.》

조령출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렴부상이 가라 할가?》

《날 만난걸 벌써 아나?》

《아무렴, 그 사람 방울 단 고양이라는걸 모르나. 위원장동무 사무실에 10분전 9시에는 들어섰을거네.》

《과시, 명암일세그려. 추리인가?》

《정확한 통보네. 꽤 오래 담화를 했구만.》

이상한 표정을 짓고 웃는 조명암을 바라보며 리면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내용도 다 알고있을텐데 물을거나 있나.》

《도청은 하지 않았어도 대화의 전말을 추정할수는 있네. 답사를 미루라고 했겠지.》

《가지 말라고 하지 않구?》

《천만에, 그건 렴필재의 성격파탄이나 같은 대사네. 정치적고려가 없이 말할 사람인가. 위원장은 시간은 바쁘겠다, 병원에도 와야 하니 등이 달아 전에없이 화를 냈을거네. 안 그런가?》

조령출이 자기의 추리를 확신하며 히물히물 웃자 리면상은 머리를 흔들어댔다.

《작가란 인간들을 조심해야 돼. 정상적인 사고가 아니거던. 항상 남의 속에 들어앉아 제 궁리를 한단 말이네. 인간성격의 창조자들이 돼서 그런가. 거짓말을 사실같이 만들어내는 명수들이라는걸 다시 알게 되는구만. 기가 막혀서…》

그러거나말거나 조령출은 김옥성과 눈짓으로 무언을 나누며 빈정거렸다.

《틀리면 말하구려.》

《정확하네. 내가 한 말도 들려주게나.》

《허허, 그것도 어렵지 않지. 내 대본엔 이렇게 씌여있네. 여보시오, 부상동무! 책임이구 뭐구 난 가야겠소. 백두산에 갔다와서 보잔 말이요. 망할 놈의 콩나물장사군들의 책임자는 왜 돼가지고 이 고생인지 모르겠단 말이요! 하하하, 좀 과장되는것 같다.》

조령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면상은 두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 모양에 김옥성은 털썩 드러누우며 웃음을 터뜨리였다. 롱담을 해도 예술의 재사들답게 진지하고 너무나 방불했던것이다. 방금전에 조령출이 렴필재가 나타나서 리면상이 늦어진다며 그 리유를 추측했는데 신통히도 맞혔기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나 역시 위원장이 흥분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네.》

너무 높이 쳐든 두손을 잡아서 내린 조령출이 말했다. 어조는 진중해졌다.

《답사를 고려하라는건가?》

《글쎄, 뭐라고 할지. 후지무라 요꼬와 진옥련의 방문일정이 끝나가고있지 않나.》

《념려말게. 한주일후엔 강선에 가자고 약속했네.》

고개를 주억댄 조령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노래를 명곡으로 뽑아가지고 오기를 바라네.》

만류하는데도 김옥성이 병동앞까지 따라나왔다. 리면상은 그의 손을 잡으며 《옥성동무,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오.》 하고 갈린 소리로 당부했다.

《새로운 기분으로 백두산에 오르십시오. 백두산의 언어는 헤아릴수 없더군요. 우리 음악의 뿌리가 내린 성산이여서 그런가 봅니다.》

진정어린 그 말을 음미하며 리면상은 《그래, 명심하겠네.》 하고는 사랑하는 음악의 벗에게 한손을 쳐들어보였다.

백두산으로 가는 렬차에는 장백의 험산준령들과 눈보라속을 헤쳐온 백전로장들이라고 해야 할 항일투사들의 즐거운 웃음이 차넘쳤다. 자기들의 옛 전구를 찾아가는 감회가 얼굴마다에 력력히 어려있었다. 혁명무력의 골간들인 그들에게 있어서 오늘의 자리는 전우들을 오래간만에 만나보는 상봉의 자리이기도 했다. 오늘도 그들은 자기들의 전투초소에서 무장으로 조국을 보위하고있었다. 최전연부대의 군단장들과 함대의 지휘관들, 공군장령들이 전우들을 옛시절처럼 무랍없이 부르며 익살을 부리는가 하면 담배 한대를 가지고 나누어 피우며 추억의 갈피도 번지였다.

《내가 누구를 붙들어왔는가를 보우. 이 량반이 우리와 함께 가면서도 축에 끼우지 않고 다른 자리에 가있더라이.》

리면상을 데리고 나타난 회상기 《한홉의 미시가루》의 필자인 장령이 말했다.

《이게 누구요? <문경고개>가 아닌가? 우리 군단에 왔다간게 57년 2. 8절날이였겠다. 정말 반갑소.》

《위원장선생, 여기 앉으시오. 백두산에 노래를 지으러 간다는 말을 들었소. 어서 좋은 노래를 지어주시오. 우리 군인들에게 있어서 노래는 생활이요.》

《고맙습니다.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십시오.》

저마다 손을 내밀고 잡아끌어 자리를 잡지 못하는데 회상기 《고난의 40일》을 쓴 녀투사가 조금도 양보없이 리면상을 자기들의 곁에 앉히고는 기세를 올리며 말했다.

《이젠 큰 별을 달았다구 누나도 몰라보다니. 취사장에 찾아와 가마치를 달래 먹던 때는 다 잊었어. 손을 씻지 않아 얼어터서 퉁퉁 부은걸 고쳐준게 누군데… 이젠 왕별을 달았다는 재샌가.》

그와 나란히 앉은 녀성투사들이 기회를 만난듯 웃고 떠들었다.

《여기선 직무가 아니라 유격대 입대순서를 따져야 해요.》

《그렇지 않구. 저것 보라니, <가마치아바이> 어이없다오.》

《가마치! 으하하… 이 친구 나보다는 별 하나를 먼저 달았어도 가마치대장이 옳았어, 하하하.》

《군률은 엄하거니, 볼기를 칠테다, 부사령관!》

《쳐라, 쳐!》

좌중은 렬차의 률동에 맞춰 떠들썩해났다.

간고한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쳐온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리면상의 가슴을 숙연한 감정에로 이끌어갔다. 빙설천지에서 눈을 움켜삼키며 인간의 육체적인 극한점을 정신력으로 이겨낸 사람들이다. 눈은 차겁지만 눈을 이불로 삼고 그 눈을 불굴의 심장으로 녹여낸 초인간적의지의 소유자들이였다. 무엇을 바래서, 무엇을 위하여 스스로가 험난한 그 길을 택했던가.

리면상은 강무현의 봉분이 눈앞으로 다가오는것을 보았다. 고향의 작은 언덕에 진옥련이 안고 온 유해가 안치되였다. 소년단원들이 무덤가에 꽃송이들을 놓아주고 경례를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뿌리를 달군다. 눈부신 해빛속에서 기폭처럼 나붓기던 붉은 넥타이들,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며 흐느낌을 터치던 진옥련…

리면상은 천진무구한 세계가 안아다주는 격정에 잠겨 서있었다. 방금전 친구의 묘소앞에 선 자기의 심정은 어떠했던가. 추억의 상념이였고 누구나 가는 길을 인간답게 간다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숭엄한 사색이였으며 애국에 산 인간을 찾아 품어주는 조국에 대한 고마움이였다.

넥타이를 불길처럼 날리며 선렬의 무덤앞에 선 저 동심들에 자리잡고있는것은 무엇인가. 순진하고 아름다운 공감이 아닐가. 무엇을 옳다고 사람들이 따르게 되는 그 감정이 저 어린 가슴들에 새겨지고있는것이리라. 후대들의 공감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으며 색조가 있었다. 리면상은 그것을 보고 듣고 느끼였다.

《위원장동무, 떠날 시간이 된가보오.》

조령출이 다가서며 말해서야 리면상은 명상에서 깨여났다.

먼저 뻐스에 오른 진옥련이 한손으로 턱을 고인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 보였다. 그의 옆에 앉은 왕성실과 요꼬의 표정도 자못 엄숙했다.

《저 아이들을 보게. 참으로 생각을 깊이하게 하거던. 전통과 계승에 대한 확인일세. 민족의 생명이라고 해야 할거네. 민족의 모체를 정신, 사상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나. 왜? 뜬소리같이 들리는거구만. 난 그렇게 생각하네. 저애들이 무엇을 생각할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이 이룩해놓은 위업을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를 새긴다고 생각되지 않나? 선대와 후대가 이어가는 혈맥은 사상이라고 봐야 하네. 선렬들은 오늘의 조국을 안아왔고 후대들앞에 책임을 졌네. 그들은 오늘도 자기들의 애국적인 과거에 대하여 전하고있으며 량심으로 책임을 지고있거던. 바로 그걸세. 저애들도 그것을 자각하고있으며 청년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이 자기들보다 젊은 나이에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것을 잊지 않을거란 말이네. 민족이란 이렇듯 자기의 전통을 형성하며 대대손손 물려주는것이지. 인류가 존재하는 날까지 참다운 전통과 계승을 가진 민족은 당당하게 존엄을 떨칠수 있네.》

조령출은 리면상의 세계에 뜨겁게 공감하였다.

《민족을 알고 민족을 위해 산 사람은 죽지 않네. 저 아이들과 그들이 남기게 될 후대들과 함께 오래오래 살거네.》

《그렇네. 내가 찾았고 완성이라고 여긴 선률은 이 자리에서 부정됐네. 백두산에 다시 올라야겠어. 나의 감정은 깊이가 없거던. 역시 사색의 빈곤일세.》

상념에 잠겼던 리면상은 곁에서 조용히 울리는 노래소리에 깨여났다. 누가 먼저 뗐는지 투사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합쳐 부르는것이였다.

 

문경고개는 얼마나 높던고

오르면서 칠십리

내리면서 칠십리

 

《조기천… 아까운 시인을 잃었어.》

감회에 젖은 목소리가 축축히 마음들을 적시였다.

《전쟁때 좋은 노래들이 많이 나왔소. 난 아직도 차에 앉으면 <자동차운전사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분다네. 그러면 마음은 화선으로 달리거던.》

《노래가 있어야 해. 한번 멋지게 불러대면 싸움 한판은 제끼는거니까.》

곁에 앉은 녀투사가 리면상에게 물었다.

《위원장선생, 이번엔 어떤 노래를 지으려나요?》

리면상은 두손을 마주잡으며 고심을 드러냈다.

《예, 백두산의 눈을 노래하자고 하는데 잘되지 않아 그럽니다.》

앞에 앉은 공군장령이 주먹을 쳐들며 말했다.

《좋구나! 백두산의 눈이라. 가슴을 두드려주는게 있다.》

《면바로 잡았소, 그 상을 말이요.》

《제가 뭘 안다구, 허허… 상이라는건 작곡가들이 생각해내는게야. 땅크모는 재간으로 제법…》

《여보, 내 이래뵈두 류경수사령관의 지시로 시인, 작곡가들과 <김일성원수께 드리는 노래>창작의 공동작업에 참가했댔소. 셈판을 모른다니.》

《그건 죄다 사실이요. 고치느라구 사령관한테 무던히 닥달을 당했지, 허허…》

《한홉의 미시가루》 회상자인 투사가 리면상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내 위원장에게 백두산에 올라서 해줄 이야기가 있소.》

9월의 백두산은 맑게 개여있었다. 천지를 성벽으로 둘러막은 령봉들은 선명한 자태를 드러냈다. 바람소리조차 유정하였다. 답사책임자인 민족보위성의 부총참모장이 사진부터 찍으라고 지시했다. 백두산의 일기변화를 잘 알기에 조치를 취하는것이다.

《남기는건 사진이다. 사진사동무, 내 독사진부터 먼저!》

《저 버릇 고치지 못하는구만. 욕심쟁이같으니.》

《그러거나말거나 철컥! 찍었다니.》

《하하하.》

백두산에 올라 기분이 둥 뜬 덩지큰 사람들이 어깨싸움으로 군모까지 굴리며 사진을 찍는데 열을 올렸다. 아닐세라 하늘이 갑자기 낮아지는게 알렸다. 장군봉쪽에서 검은구름이 소리없이 나타나더니 천지호반을 뒤흔드는 괴성을 울리며 밀려오는것이다. 사위는 금시 어둠속에 잠기기 시작했다. 광풍이 한번 날개를 번뜩이자 솨 하는 무시무시한 음향을 타고 사나운 기류가 회오리치며 밀려오고 덮쳐들며 부딪치자 하늘복판을 쭉 가르며 번개의 섬광이 달문쪽으로 룡꼬리를 날렸다.

《이게 백두산이요!》

《우리가 왔다는걸 알아보는거야. 인사가 그럴듯하지 않은가.》

투사들은 한덩어리가 되여 어깨를 겯고 소리를 높였다.

《눈이 온다! …》

《백두산에 눈이 내린다! …》

뜨거운 웨침을 타고 주먹같은 눈송이들이 와와 소리를 치며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어둡던 사위가 차츰 밝아지며 눈앞에는 백설의 파도가 펼쳐졌다.

눈이 내린다! … 리면상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가사의 첫 소절을 읊었다. 한생을 살며 얼마나 많이도 맞았던 눈인가. 그는 눈의 속삭임소리를 듣고싶었다. 눈의 의미를 새롭게 감수하며 자기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싶었다.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가장 열렬한 사색을 안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였다.

《이보오, 위원장동무! 뭐가 떠오르오?》

팔을 끼고 선 항일투사가 물었다.

《한시에 너무 많은것이 생각나서 종잡지 못하겠습니다.》

《허허… 그럴게요. 백두산의 눈이 아니요. 겨울이 오면 이 산, 저 산에 내리는 눈이 아니거던. 나는 말이요. 이 눈을 헤치며 고난이란 무엇인가를 알았고 신념이라는게 뭔가 하는걸 배웠소. 눈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단 말이요. 이 눈을 몰랐더라면 한홉의 미시가루이야길 후대들에게 하지 못했을게 아니요. 우린 말이요. 밀영의 밤 우등불가에서 이 눈을 맞으며 두고 온 고향을 생각했고 해방될 조국의 앞날을 그려보았다오. 실로 잊을수 없는 사연을 담아 내리는 백두산의 눈이요.》

들려주겠다던 이야기는 짧았다. 그것은 투사의 진실한 감정이였다. 하여 뜨겁게 공감되는것이였다.

리면상은 이 순간 자기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베잠뱅이를 걸치고 눈에 쫓기워 추위에 떨며 깡충깡충 뛰던 가난했던 농사군의 자식이였다. 긴긴 겨울밤 윤두소 여물을 썰다가 조는 바람에 작두를 헛밟아 꾸지람을 받던 일, 날밝기 전부터 그 소를 앞세우고 밭으로 나가던 아버지는 농사일에 일찌기 등이 굽었었다. 배고픔을 달래려고 저무는 내가의 버들방천에 앉아 풀피리를 불었다. 땅에 엎드려 영영 가난의 허리를 펴지 못할것 같던 사람들이 그 땅의 주인이 되여 전야마다에서 구성진 노래를 부르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이삭을 거두고있다. 두주먹을 높이 쳐든 로억만반장이 전기로앞에서 조선로동계급의 기상을 떨치고있다. 서해바다가의 갈매기를 사랑하는 처녀도 아름다운 노래로 백두의 흰눈을 시에 담으리라.

눈은 고요히 내리고있다. 쉼없이 무엇인가를 전하고있다.

리면상은 눈이 내리는 이 나라의 밤을 그려보았다. 협동조합 문화주택들의 창문가에도 수도의 고층살림집들의 창가에도 눈이 내린다. 로동의 하루를 보낸 집집에서 울려나오는 행복의 웃음소리, 사람들은 그저 잠들지 않는다. 따스한 보금자리마다에서는 도란도란 이야기들이 울려나온다. 오늘을 안아온 빨찌산들의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그것은 혁명선렬들에 대한 티없이 깨끗한 추억이다.

눈은 사색에 잠겨 내리고있다. 민족의 력사를 거슬러오르며 숭엄한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망국의 수난이란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새긴 이 나라 사람들이기에 잠들지 못한다. 과거를 잊지 못하기에 자식들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행복이 차넘치는 집집의 창문들을 열어제낀다. 혁명선렬들이 피로써 찾아준 조국과 그 념원 꽃핀 땅에서 천만년 무궁번영할 조국의 래일을 그려보며 흰눈을 함께 맞고있으리라. 백두산의 이 축복을! …

리면상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백두의 입김인양 가벼운 바람이 불자 탐스러운 눈송이들이 환호하듯 그의 가슴에 뽀얗게 달려와 안긴다.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심장속에 쌓이는듯 한 그 눈송이들을 두손에 소중히 받아보았다.

그것은 눈이 아니라 리면상자신이 걸어온 인생이였고 앞으로 백두의 대지에서 새롭게 울려퍼질 가장 힘있고 아름다운 이 나라의 선률에 새기는 리듬과 박자들이였다.

선률과 함께 살아온 반백의 음악가, 그의 한생을 축복하듯 백두의 흰눈은 내리고 내린다.

그것은 리면상이 생이 다할 때까지, 아니 민족의 대를 이어 영원히 불러야 할 애국의 노래, 전통의 노래, 바치여 아낌없을 생명의 노래였다.

《눈이 내린다 흰눈이 내린다…》

리면상은 심장의 선률을 터치였다.

《동무들! 우리 작곡가선생이 노래를 부르오! …》

그 순간 리면상은 자기의 온몸이 투사들의 손에 떠받들려 눈속으로 솟아오르는것을 느꼈다. 가슴속에서는 선률이 격정의 파도를 일으키고있었다. 백두의 험산준령들과 눈보라를 헤쳐온 사람들이 어깨를 겯고 한덩어리가 되여 노래를 불렀다.

 

눈이 내린다 흰눈이 내린다

이 나라 빨찌산들의 그 념원 꽃핀 강산에

이밤이 지새도록 흰눈이 내린다

 

리면상의 얼굴에 내려앉는 눈이 뜨거운 눈물이 되여 흘러내렸다. 한생 선률로 산 인간이 백두산에 감사의 인사를 노래에 담아 드리고있었다. 대대손손 이 땅에 나서자라날 사람들의 마음을 합쳐 가장 소박하고 열렬한 감정을 터뜨리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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