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34

 

서울에서 내려온 김형숙은 앓는다는 말조차 모르던 사람같지 않게 맥을 놓고 자리에 누웠다. 열흘 남짓한 사이에 한생을 살아도 몰랐을것을 체험하였다. 그것은 고화였고 리면상이였다. 사람을 읽는다는 말을 얼마나 쉽게 하였는가.

종로에서 백운남이라는 인간을 만나고 돌아오니 진옥련이 기다리고있었다. 서울에 와있으면서도 왜 알리지 않았는가고 나무리며 청계천기슭으로 데리고 나갔다. 자기가 알고있는 녀자가 아니였다. 고개를 숙이고 백운남에게 끌려가던 모습은 찾아볼수 없었다.

그 녀자는 자기가 목격한 생활의 평범한 사실을 펼쳐보이였다.

비내리는 날이였다. 작은 우산밑에 어깨들을 들여민 세 녀자가 료정의 처마아래로 뛰여들었다. 동작이 날렵한 왕성실이 냉큼 문을 열고 들여다보고나서 진옥련과 오일선에게 두손을 내저었다.

《우리 같은건 들여밀 자리도 없어.》

나이가 제일 어린 오일선이 국수를 먹고싶다기에 비오는것도 무릅썼는데 손님들이 많다니 랑패여서 진옥련이 유리창너머로 들여다보았다. 여느때없이 사람들이 많았다. 식탁마다 빈자리를 남길세라 빼곡이 들어앉아 담배연기를 뿜어대는게 식사나 하자고 온 모양들이 아니였다. 하나같이 낯익은 얼굴들이여서 놀라게 하였다. 한다하는 작곡가, 가수들은 다 모여든것 같았다. 그 사람들속에는 레코드회사 사장들도 있었다.

진옥련의 곁에 온 오일선도 그 광경을 보고나서 호기심을 가지고 소곤거렸다.

《언니, 무슨 모임을 하는게 아닌가요?》

《글쎄…》

료정안에서는 각이한 음색을 가진 목소리들이 울려나왔다.

《저길 보라구, 면상이 오랜만에 보이는걸.》

《재간둥이지. 선률마다 민족장단이 흘러나오거던.》

홍란파가 앉은 곳에서 한사람이 일어섰다.

《정숙을 지켜주기 바랍니다. 홍란파선생이 생각되는바를 한가지 내놓겠다니 들어봅시다.》

자기들이 만들어낸 화제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무슨 들을 소리가 나오길 바라며 시선을 모았다.

간단히 자기나름대로 시국을 론하고나서 음악창작의 실태를 이야기한 홍란파는 시종 밝은 웃음을 짓고 음악의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송충이 몇마리가 청산의 빛을 흐리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노래들이 있고 민족의 얼과 정서를 고이 담은 선률들이 나오고있습니다. 최근에 애창되고있는 리면상의 <꽃을 잡고>가 대표작임을 나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노래를 민요로만 보아야 옳겠는가. 민요에 바탕을 둔것은 사실이지만 민요를 발전시켰다는 점도 우리는 응당하게 평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신민요로 부르자는걸 제기합니다.》

기분이 환기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옳다고 호응해나섰다.

홍란파는 자기의 의사를 지지해주는 좌중에 인사를 보내며 손을 들어 리면상을 소개하였다. 리면상이 일어섰다. 그도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신민요 개척자의 한사람이 된다는것은 행운이며 작곡가에게 있어서 차례지기 쉽지 않은 일이였다.

문밖에 선 세 녀자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리면상을 바라보았다.

《신민요라는 말을 들으니 이 가슴도 막 설렙니다. 우리의 노래가 짓밟히는 속에도 봄순마냥 대지를 헤치고 솟구쳐오르는 환희로 울고만싶습니다. …》

오일선이 두손으로 입을 막으며 흐느낌소리를 냈다. 진옥련도 왕성실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다.

《여러분, 저는 오늘의 희망을 안겨준 홍선생님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감히 저의 소견을 말하려고 합니다. 신민요의 시작을 어느 노래로 보겠는가. 우리 민족음악사의 구획을 긋는 일인만큼 심중합니다. 신민요는 <꽃을 잡고>보다 먼저 불리워오는 <노들강변>이 첫 노래로 되여야 한다는것을 말하고싶습니다.》

흥분한 리면상은 홍란파에게 량해를 구하였다.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음악앞에 진실한 한 작곡가의 모습이 사람들의 가슴을 후덥게 달구어주고있었다. 홍란파의 공감을 얻은 리면상이 신불출과 문호월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쳐들어올렸다.

《두 선생은 신민요를 개척한 첫 시인이고 작곡가입니다!》

흥분의 열파를 타고 박수소리가 높이 울렸다.

《신민요는 어떤 노래로 되여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감히 몇마디 하려고 합니다. 민족음악의 명줄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민족장단을 지켜내야 합니다. 망국으로 수난을 당하고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고 살수 있는 밝은 선률, 웃으며 고생을 이겨갈수 있는 노래를 지어야 한다고 말하고싶습니다.》

인간을 보고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이 리면상의 음악리상에 공감하며 격정을 터뜨리였다. 오일선과 왕성실은 진옥련의 손을 잡고 목메여 흐느꼈다. …

진옥련은 간곡하게 말했다.

《만나세요. 그러지요? 난 느끼고있어요. 우린 같은 녀자가 아닌가요.》

김형숙은 머리를 저었다. 고맙지만 리면상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자기같이 경박한 녀자를 만나 한생의 후회라도 남긴다면 차라리 모르고 사는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서울을 떠났다.

집안사람들은 딸이 서울바람을 맞고 와서 병들었다며 야단을 부리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한숨을 그치지 않으니 방에 앉은 아버지의 대통두드리는 소리가 잦아만 간다. 남들은 스무살소리를 내기 전에 머리를 얹는데 서른이 눈앞인 딸을 두었으니 기막힌 일이 아닐수 없었다.

《청승맞게 굴지 말고 일어나지 못하겠니! 동네 볼낯이 없어서 물 길러도 못 간다.》

《앓는 애를 두고 무슨 지청구가 그리 많은고!》

《옛날부터 엄부라고 했는데 딸자식 신칙을 잘도 했수다.》

《저런 말버릇 봤나. 되는대로 내뱉아대니 원.》

《어이구, 어느 홀아비라도 업어갈노릇이지.》

어머니의 상심은 앙금이 앉아 아무 말이나 가리지 않았다. 참기 어려워난 아버지가 《홀아비자리에 보낼바엔 평생 골방에 살게 하는게 나아!》 하고 털어놓기 어려운 마음을 쏟고나서 집을 나가버렸다.

남들은 손자, 손녀를 안겨주는 나이에 부모속을 태우고있으니 자신이 부끄럽고 저주로와 일어난 김형숙은 집이 빈 틈에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여름하늘에서 쏟아지는 해볕에 눈이 부시고 머리가 휘둘러대여 휘청걸음으로 대중없이 걸었다. 우거진 나무들마다에서 매미울음이 소란스럽고 숲속에 부는 바람은 몹시도 기승을 부렸다. 내가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김형숙은 흰 바위우에 앉아서 맑은 물에 비낀 자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인생풍파가 어떤것인가를 눈으로 보고나서 잔뜩 겁이 났다. 고화언니 같은 녀자가 되기는 케가 글렀다. 크건작건 자기 생활을 갖추자면 몇살은 더 먹어야 할것 같다. 그러느라면 지금 꼴로 꼬바기 늙게 될는지도 모른다. 남들은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생활을 나는 왜 이다지도 어렵게 찾아가는지 모를노릇이다. 무엇을 기다렸는가. 목적하고 기다린것도 없다. 맹목적으로 살았단 말인가. 인생의 허무가 어데서 오는것인지 어렴풋이 알수 있었다. 찾아들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은 자기 생활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제라도 바른 결심을 해야 해. 태줄을 묻은 고장인 북청에 갈가. 후치령밑의 험한 산골이니 교원이 필요할거야. 그곳에서 모든걸 새로 시작하면 어떨는지. 아니면 먼 친척들이 이주해간 만주로 들어갈가. 착잡한 상념은 곬이 없이 흘러갔다.

《선생님.》

곁에서 찾는 소리에 흠칠 놀란 김형숙은 고개를 돌리였다. 생모시적삼을 입은 녀인이 어줍게 인사한다. 이게 누군가. 리면상이 이곳에서 교편을 잡고있을 때 하숙한 집의 딸이다. 《쌍가매》라는 아명을 가졌던 녀학생, 세월은 빨리도 흘러 어느 사이 머리를 얹은 내인으로 만들었다. 배워준 선생은 처녀신세를 면하지 못했는데도.

《아, 참 오래간만이야. 어떻게?》

《선생님 보기가 부끄러워 피해다녔습니다. 너무 일찍…》

《별소릴, 부모님들은 편안하시겠지?》

고개만 끄덕댄 녀인이 조심히 말했다.

《우리 학교에 리면상선생님이 오셨답니다. 엊저녁차로…》

믿기 어려운 소식을 전하는 그를 김형숙은 물끄러미 마주보기만 하였다. 처음에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고 리면상이 고화언니의 신상이 걱정되여 올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가슴이 금시 활랑거려 두손으로 눌렀다.

《누구라구? …》

《우리 학교 음악선생을 지낸…》

《쉽지 않아, 교편을 잠시 잡았던 학교인데…》

자기 감정을 드러낼가봐 김형숙은 놀란 표정을 지어내보이며 말했다.

《동창들이 선생님을 한자리에 모시자고… 선생님이 배워준 노래를 부르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가슴이 뭉클해난 김형숙은 눈시울을 슴벅이였다. 세월은 흘렀어도 사제간의 정은 얼마나 진정에 넘친것인가.

《좋은 일이예요. 참 잘 생각했군요.》

그와 헤여진 김형숙은 학교에 나가볼 생각으로 서둘러 집에 들어갔다. 옷이라도 갈아입어야지 지금 꼴로는 나설 형편이 못되였다. 리면상이라는 이름이 홀지에 병을 날라간다는 생각이 들자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너 어델 가자고 그러냐?》

집을 비웠던 어머니가 무슨 눈치나 챈듯 나타나 벼락같이 물었다.

《학교에 나가보려구요.》

《최최한 그 모양으로 학교엘 가? 그놈의 학교에 귀신이 붙었다. 훈장똥은 개도 안 먹는다더라. 계집이 뭘 안다구 훈시질부터 배우더니 고 모양, 고 꼴이지. 당장 학교를 그만둬라. 며칠 몸조리하구 천내에서 선보러 오면 군소리말구 받아들일 궁리나 해라.》

드디여 시작되는구나 생각한 김형숙은 귀구멍에 신작로가 생길만큼 들어온 소리여서 입귀를 찡그리며 웃었다. 이 며칠 동분서주하더니 사위감을 찾아낸 모양이다. 이젠 무슨 말을 해도 통할리 없는 어머니다.

《홀아비나요?》

《저년 속이 살아서 아직 주둥이질이냐! 화만 잔뜩 돋구면서.》

《홀아비한테 시집갈 팔잔데 물어야 못 보겠어요?》

《입방아질은 그만해. 이번엔 코뚜레를 만들어서래도 가마에 올려 앉힐테니 어디 두고봐라.》

《말씀도 너무 모질게 하시니 어디 듣겠어요?》

《모질다 모질다 너 같은 년도 있다더냐?》

《학교에 갔다오겠어요.》

《래일부턴 그만둔다고 알려라.》

어머니 오라에서 다행히 풀려났다고 안도의 숨을 내쉰 김형숙은 비석고개 지름길로 들어섰다. 여름 한철 사람들이 즐겨 찾는 송도원이 바라보인다. 오늘은 바람이 세차선지 백사장에 나온 사람들이 많지 않다. 우산모양의 작은 천막들이 허공으로 부풀어오른다. 파도가 너무 높아 물에 들어가기 힘든 날이다.

교직원들의 눈을 피하여 뒤마당으로 들어간 김형숙은 걸음소리를 죽여가며 교사로 다가갔다. 풍금소리가 들려왔다. 리면상이 간 후로 음악교원은 여러번 바뀌여 지금은 력사를 배워주는 나이든 녀선생이 겸임을 하고있다. 그러다보니 음악시간은 아는 노래나 다시 불러보는 형편이다. 학교에는 풍금을 바로 타는 교원들이 없다. 그중 력사교원이 나은편이여서 이따금 풍금으로 발성련습을 시키는게 고작이다. 김형숙은 노래소리가 울려나오는 교실쪽으로 이끌린듯 걸어갔다. 학생들이 교가를 부르고있다. 7년전 리면상이 다듬어 완성한 노래이다. 열려진 창문가에 살며시 다가간 김형숙은 교실안을 들여다보다 흐느낌같은것이 터져나와 두손으로 입을 덮어버렸다.

리면상이 풍금을 타며 학생들과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풍금소리나 낼줄 아는 들뜬 풋내기훈장이라는 조소도 받던 사람이 이름난 작곡가가 되여 교편을 잡았던 학교를 잊지 않고 찾아와 그 시절처럼 학생들에게 민족의 향기를 찾아주고있었다. 다른 사연을 다 밀어치우고도 그지없이 고맙기만 한 모습이다. 동심과 어울려 한껏 밝게 웃는 저 얼굴, 목소리를 합쳐 부르는 노래소리, 인간이 참되고 아름다움을 알게 해주고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리면상은 흑판앞에 다가가 새 노래가사를 쓰고나서 배워주기 시작했다. 교실 뒤자리에 앉은 력사교원이 자기가 지금은 음악을 배워주고있다는것도 다 잊은 모양인지 학생들과 열심히 따라부른다. 학생들은 리면상의 지휘에 따라 맑고 챙챙한 높은 소리로 앞날을 그려보며 작은 가슴들에 깨끗한 환희를 터뜨린다.

들어보지 못한 저 노래는 두고 갔던 교단에 드리는 노래가 아닐가. 그럴거야, 새로 지어가지고 왔을거야. 김형숙은 리면상을 똑바로 읽으며 자신있게 생각했다. 방과후여서 교정은 조용했다. 교장을 만나 며칠 더 치료를 받고 나오라는 당부를 받은 김형숙은 교원실로 갔다. 오랜만에 만나 그와 인사를 나눈 교원들이 조금씩 이야기치레를 하고는 구실을 대며 먼저 자리들을 떴다.

비여버린 방에 홀로 앉아 그는 리면상을 생각하였다. 어제 왔다니 고화언니의 집은 찾았을것이다. 부모들만 사실을 알뿐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리면상은 어차피 의혹이 커질것이고 자기를 만나려 할것은 뻔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속으로 그리운 사람이지만 고화언니의 사연을 말할수는 없었다. 모르는편이 나을 때도 있는것이다. 하지만 어떤 오해를 살가봐 두려워났다.

《형숙선생, 언제 나왔어요? 좀 나아요?》

교실에서 학생들과 노래를 부르던 녀교원이 들어와 반가워했다. 나이가 우인데다 녀교원이래야 둘이 전부이니 각별한 사이다. 부르튼 입술을 만져까지 보며 걱정해주었다.

《많이 나았어요. 피곤했던가봐요.》

《그렇지 않구, 서울길을 다녀온다는게 어디 쉬워? 나 같은건 꿈도 못 꾸겠어.》

위로의 말을 골라하던 녀교원이 김형숙의 눈치를 살펴가며 물었다.

《이 학교에 있었던 리면상선생을 알지?》

김형숙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 선생이 온걸 모르겠지? 방금전까지 음악수업을 했어. 좋은 노래를 많이 지은 작곡가가 달라. 얼마나 잘 가르치겠니. 이 촌뜨긴 입을 하? 벌리고 호호호… 얼이 쳐서 노래를 배웠어.》

기쁨에 넘친 동업자가 부러웠다. 자기에게는 쉽게 차례지지 않을 기회처럼 생각되였다. 쓸쓸한 웃음을 짓는 김형숙의 곁에 재빨리 다가와 앉은 녀교원이 귀를 간지럽히며 입김을 불어넣었다.

《나한테 부탁하더구나. 형숙선생을 만나고싶대. 그전에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던 바다가기슭에서라면 안다고 했어. 저녁에 나오라는거야, 기다리겠대.》

바다가날씨는 변덕스럽다. 아침부터 불어대던 바람은 마식령골짜기로 자취를 감추었고 성칼스럽게 굴어대던 파도마저 고개를 수그리며 석양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순풍에 돛을 올린 배들이 포구의 여기저기서 고기잡이하러 나타났다.

김형숙은 리면상이 만나자고 한 장소로 나가고있다. 교원실에서 지루한 시간을 기다리며 수십번도 더 생각한 질문이 머리속에서 지꿎게 맴돌았다. 네가 지금 옳은 걸음을 하는가. 고분고분해진 너의 속마음에 무엇이 자리잡고있느냐. 철부지같은 유희를 할 나이가 아니라는걸 알고있겠지. 불안한 심리는 동요를 일으켰다. 전혀 바라지 않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어떻게 하는가. 무엇을 약속할 준비가 되여있지 않다는것을 느끼게 될수록 걸음은 더디여만졌다. 공연히 가슴만 들뛰는게 진정할수 없고 막상 마주선대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침내 김형숙의 사색은 무엇때문에 만나자는것일가 하는 단순한 물음에 멎었다.

모래불가운데 피여난 해당화꽃덤불을 바라보던 김형숙은 걸음을 멈추었다. 온몸이 금시 백사장에 잦아들것만 같았다. 리면상이 벌써 나와있었다. 젊은이들과 앉아서 웃음꽃을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있다. 그가 마주한 사람들은 이 백사장우로 뛰여다니며 노래를 부른 어제날의 학생들이다. 10년가까이 만나보지 못한 그들은 저저마다 묻고 대답했다.

이야기는 리면상이 많이 하는것 같다. 서울이며 일본의 거리들과 유적들, 문화와 력사에 대한 상식토막들이 화제에 오르니 흥미를 끌기마련이였다. 그는 귀국하여 지은 첫 노래인 《들국화》가 금곡처분을 받은탓에 제자들에게 인사가 늦었다고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형숙도 고화에게 들어서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때의 심정을 작곡가처럼 느낀다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리면상의 주위에 모여앉은 제자들은 스승이 겪은 고행으로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오늘 내가에서 만났던 녀인이 자기들이 이렇게 찾아온것은 오늘밤에 선생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이야기도 나누고 노래도 부르고싶어서였다고 말했다.

그들과 조금 떨어지긴 했어도 김형숙은 자리에 앉아서 사제간이 나누는 아름다운 감정의 뉴대를 느끼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기도 배워준, 하지만 어른이 된 끌끌한 어제날 학생들이 어렵게까지 생각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고맙게 여겨졌다. 이들이 아니였다면 리면상의 모습을 바라보기조차 두려웠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많은 감정을 함축하면서 가까이 해주었기에 마음은 여기로 올 때보다 안정되였고 오늘 해야 할 이야기가 륜곽적으로 떠오르기까지 했다. 그것이 빈곤하고 메마른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욕심은 부릴 자신이 없었다. 다만 자기의 오해를 리해하여주면 된다고 생각할뿐이였다.

그때까지도 제자들의 청을 수락하지 않고 대답을 찾던 리면상이 말하였다.

《내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다들 여기에 찾아오십시오. 얼마나 좋은 곳이요. 밤하늘의 둥근달, 잠들지 못하는 바다와 파도소리, 해당화 핀 백사장, 자연의 3화음속에 앉아서 이야기도 나누고 노래도 부르는것이 말입니다.》

젊은이들은 청춘의 피처럼 뜨거운 공감을 안고 박수를 보냈다. 그 순간 어찌된 영문인지 일시에 김형숙에게 눈길이 돌려졌다. 이어 《선생님!》 하는 낮으나 벅찬 격정이 그에게로 파도처럼 몰려왔다. 순간 리면상의 밝은 눈빛과 정겨운 미소가 온몸을 휩싸안는것이였다. 김형숙은 금시 가슴속에서 터져나올것 같은 기쁨을 가까스로 누르며 함뿍 웃어보였다. 감정의 토로는 이렇게 비약되기도 하는것이다. 그의 심장은 리면상과 인사를 나누었으며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빨리 갔다오자면서 제자들이 손을 잡고 일어서자 리면상은 여기서 기다릴테니 모두 데리고 오라고 당부하였다. 젊은이들속에 끼운 녀인이 제일 보채며 동무들을 데리고 갔다. 마치도 조용한 자리를 스승들에게 마련해주려는듯…

두사람만 남자 김형숙은 갑자기 적막감에 빠져든 심정을 안고 파도소리만 들리는 주위를 둘러보다 리면상의 시선과 부딪쳤다.

《나와줘서 고맙소.》

《오히려 제가… 잊지 않고 학교를 찾아주어…》

자리에서 일어난 리면상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의미심장하게 말하였다.

《진정 그립고 보고싶었던 바다고 백사장이요.》

김형숙은 리면상을 따라 걸으며 한손으로 눈굽을 성급히 훔쳤다. 괴롭힌 남자의 대범함과 말속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있었기때문이였다. 석양빛에 물든 파도가 환희에 넘쳐 기슭을 향해 쉼없이 밀려들었다. 깨끗한 손으로 모래불을 정성을 다해 쓸고 또 쓸어대는것이다.

바다바람에 실려 리면상의 이야기가 김형숙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었다. 고화에 대한 견해였다. 우리 세상에 기상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자기의 주견을 가지고 자기의 의지로 살아가는 사람은 몇인가. 숙명이 체념으로, 만족으로 되여버렸으며 게으른 자족이 인생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고화에게는 속세의 사람들과 다른 피가 흘렀다. 불의를 참지 못했으며 옳은것을 지향했고 목숨처럼 귀하게 여겼다. 그랬기에 진옥련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도와나섰고 그가 새 생활을 찾았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였다. 옥련, 울지 말라! 눈을 바로 뜨고 세상을 보라, 가정이라는 울안에서 뛰쳐나오라고 절절하게 웨쳤다. 그날 얼마나 흥분하였던가. 그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 숭엄하였다. 고화가 한 말을 두고 홍란파가 녀성선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생을 자기의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의미깊은 이야기를 하였다. 만약 고화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다시 나타나지 않을 녀자라면 마땅히 슬퍼해야 한다. 그와 같은 인간은 쉽게 만나볼수 없기때문이다. 리면상은 자기가 고화의 신병여부를 알고싶어왔다며 집을 찾았다는 말은 아직 하지 않았다.

김형숙은 이따금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며 따라 걸었다. 진실을 숨기는것은 잘못이지만 그 진실을 말할수 없는 때도 있다는것을 알고있었기때문이다. 여기 바다가도시를 찾은 리면상의 목적이 고화때문이라는것을 의심치 않았다. 자기가 교편을 잡았던 학교와 제자들도 만나고싶었을것이다. 그 다음은 이렇게 자기와 만나 서로의 리해에서 불편하였던 일들을 풀자고도 했을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심중한 화제는 필요로 하지 않지 않는가. 마음의 긴장은 풀리는것 같지만 위안이 될 대신 허전한감이 가슴을 적시며 흘러갔다.

리면상은 만나본 고화의 부친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사람도 씨앗이라는걸 알았소. 고화선생의 아버님은 무척 상대하기 두렵더군요. 고루한것 같지만 도도했고 례의를 엄하게 지키면서도 자기의 마음속은 내비치지 않았소. 〈내 딸은 중병이여서 이승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보내여 고치자고 하오. 아마 살려내지 못할가보오. 어찌겠소. 세상을 잘못 만나면 내 딸보다 더 귀한 목숨들도 꺼지는걸.〉 이렇게 말하고는 눈길조차 들지 않았소. 보기 힘든 녀성이니 인생자취도 범속한 눈에는 비껴들지 않으려는가보오.》

한 남자가 자기가 존경해온 녀성을 찾아 먼길을 왔다. 쉽지 않은 일이다. 녀자라면 천시를 관념으로 한 남자세계에서는 결코 흔한 사람이 아니다. 김형숙은 자기가 리면상을 보고 느꼈으며 읽기 시작했다는것을 감수하고있지만 고화의 진실만은 밝힐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작정없는 침묵으로 대답할수도 없는노릇이여서 속은 바질바질 탔다. 최소한 자기 심중의 한 귀퉁이라도 펼쳐보이고싶지만 적당한 말을 골라낼수 없어 안타까웠다.

《언니는 한마디로 리해하기 어려웠어요. 아저씨를 불만스러워했는데… 돌아가신 뒤에는 전혀 달랐어요. 사랑했다기보나 숭배했다고 할 정도로…》

말꼬리를 흐리는 김형숙의 표현이 지금의 화제에 적중한것이 아니라는감을 느끼면서도 리면상은 왜서인지 듣고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억측한 그들의 부부관계였다. 홍란파까지도 의심했으며 의혹을 품었던것이다.

《다방주인은 내 인상에도 남아있소. 다는 몰라도 좋은 사람이라는것만은 인정하고싶소.》

《선량함은 인간의 품성에서 보석이나 같지요.》

《참 좋은 말이요. 좋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오.》

김형숙은 자기의 온넋이 리면상의 가슴속으로 빨려들어가는것을 멈춰세우려고 애쓰며 말하였다.

《제가 뭘 아는게 있겠어요. 다만… 고화언니에 대한 자그마한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조건을 필요로 해요. 이를테면 절대적인 믿음이예요.》

후회가 뒤따르는 말을 한 김형숙은 가슴을 조이였다. 리면상은 예상하고있은듯 어렵지 않게 반응했다.

《옳소. 충분히 리해하오. 사랑은 절대적인 리해이며 믿음이요. 우린 그 조건을 만족하게 이룰수 있다고 보오.》

김형숙은 그 자리에 무춤 서버렸다. 믿음이 사랑으로 비약하는듯 한감을 느꼈다. 조건이란 무슨 뜻이고 만족시킬수 있다는 표현은 어떤 의미인가. 금시 우둔이 든듯 머리는 단순한 뜻풀이도 할수 없었다. 그는 리면상의 말에서 《우린》이라는 단어에 겁이 나기까지 했다. 조심성을 잃은 물음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너무 쉽게 말하는게 아니예요?》

《아주 간단하오. 그 조건은 두사람이 하나가 되는거요!》

귀전을 들부시는 격랑같은 소리에 놀란 김형숙은 중심을 잃으며 휘청거렸다. 이것이 자기가 기다린 고백인가. 이렇듯 쉽게, 이렇듯 대담하게 말할수 있는가. 마음은 전혀 준비된것 같지 않은데 조금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사랑에 지쳐버렸기때문일가. 지금까지 나눈 화제가 이르는 귀결이 옳은가. 내가 너무 속단하는것인지도 모른다. 김형숙은 숨결을 가누느라 한손으로 가슴을 누른채 서있었다. 리면상의 걸음도 멎었다.

《그건… 어떤 공식인가요?》

얼결에 생각없이 물었는데 대답이 즉시 날아왔다.

《사랑의 공식이요!》

모든것을 결심하였는지 리면상은 그전처럼 주저하며 소심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난 래일 떠나오. 바래움을 더는 받지 못하겠소. 더이상 헤여져서 살수 없소!》

《놀랍군요. …》

《일생 단 한번 발휘하는 용감성인지도 모르겠소!》

하늘에 비낀 노을을 바라보던 김형숙의 눈길이 서서히 기울어들더니 걸어온 백사장우에 떨어졌다. 어찌된 일인가. 놀라움에 젖은 눈동자가 발자국을 찾았다. 두사람이 남긴 자취가 아니던가. 그런데 두줄기가 아니다. 내 발자국은 어데로 갔는가. 무릎을 꺾으며 앉은 그는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사나이의 발자국안에 담겨있는 자기의 신발자리를 찾아본 그는 형언할수 없는 심정에 휩싸였다. 달리될수 없는 사랑의 언약은 이미 백사장에 새겨놓지 않았는가.

그들 두사람은 이 순간 《선생님!》 하고 찾는 소리를 들었다. 이어 파도와 합세한 소리가 웅장한 울림으로 메아리쳐왔다.

《선생님?》

그것은 행복에 잠긴 인간들의 착각이였다. 아니, 모래불을 차며 나어린 학생들이 달려오는것이 보이였다, 세월의 저편 기슭에서. 김형숙도 그쪽으로 한걸음 옮기다 멎어섰다. 두사람은 동시에 환영처럼 우줄우줄 다가오는 제자들을 보았다.

《축하합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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