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33

 

렬차는 이른아침에 도착하였다. 역홈은 사람들로 붐빈다. 밤새 차칸에서 시달린 사람들이 선하품을 하며 갈길을 재촉하고 이고 진채 마주오는 인파가 북행렬차를 타려 덤벼쳐 여간만 혼잡을 이루지 않았다.

자그마한 트렁크를 든 김형숙은 마주쳐오는 해살에 눈을 쪼프린채 걸었다. 고화의 독촉이 불같아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다. 성미가 한번 마음먹으면 해내고야마는 녀자여서 처음에는 편지로 점잖게 말하다 이가 들지 않자 나중에는 위협에 가까운 글발을 날려보냈다.

… 네 나이 몇인지 아느냐. 롱담할 시간이 없다. 네가 마음속에 둔 사람이 없다면 처녀로 서른이 가깝도록 남아있으니 수상한 일이 아니고 뭐냐. 너의 심장속에 숨어서 사는 사람을 나는 안다. 철부지아이들처럼 숨박곡질을 그만하고 이제는 얼굴을 내밀라! …

서울에서 이같이 엄한 훈시질이라면 집은 집대로 어느 한시 들볶지 않는 날이 없다.

부딪치고 밀리우며 걷던 김형숙은 이상한 육감으로 멎어섰다. 어데서 본듯 한 사람이 눈기슭으로 흘러가는 잔영을 붙들려고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주위에는 무심한 표정을 한 얼굴들만 지나가고있었다. 분명 어떤 남자의 눈길과 한순간 부딪쳤다. 뇌리의 복판에서 의혹이 불꽃을 튕기지만 종시 기억을 살려내지 못했다.

이상한데… 분명 그쪽에서 나를 알아보았어. 자기의 판단력을 믿는 김형숙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선자리에서 걸음을 떼지 못했다. 신문파는 소년의 청높은 사구려소리가 그의 생각을 날려버렸다.

신문 한장을 사든 김형숙은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서대문앞 대통로로 걸음을 옮기던 그는 저도 모르게 멎어서서 역쪽을 바라보았다. 환차작업을 마친 견인기가 증기를 뿜어대며 멎어있는 렬차에 미끄러져가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련결고리를 물어댄다.

서울에 도착하니 의문스러운 일만 꼬리를 물었다. 역홈에서 자기는 알수 없으나 자기를 아는 어떤 인물이 사라졌다면 기다려야 할 사람인 고화는 자기를 불러놓고 집을 비웠던것이다. 집을 지키던 고화의 친척되는 할머니가 맞아주었다. 오늘 아침에 며칠 다녀올데가 있으니 돌아올 동안 함께 있으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난 김형숙은 역전에서 자기를 피한것이 고화가 아닐가 하는 괴상하다고 해야 할 의혹까지 품게 되였다. 한편 자기의 억측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감각한 대상은 어떤 남자가 분명한데 고화를 의심하니 신경과민이라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 고화가 떠오른것도 무심할수 없다고 여기게 되였다. 무슨 바쁜 일이 있어서 변이나 난것처럼 사람을 불러놓고는 마치 숨어버리기나 하듯 자취를 감추는것인가. 자기에 대한 고화의 처신에 불만이 솟지만 상대가 없으니 하늘에 대고 주먹질하는셈이나 같았다.

주인을 대신한 할머니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대충 먹고난 김형숙은 려로에 밀린 피곤을 풀려고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아 역에서 산 신문을 펼쳐들었다. 별로 신통한 새 소식이 없어 밀어놓으려다 눈길을 잡아당기는 활자에 끌려갔다. 《일본음악을 긍정한 예술의 재사》라는 기사의 제목을 붙든 김형숙은 몇줄을 읽다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냈다. 금시 전신이 얼어붙는것 같았고 오한이 밀려들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을 신문은 랭담한 언어로 엮어댔다. 가요 《물결따라》, 《동백꽃 필 때》, 《사랑가》의 작곡으로 명성이 높은 리면상이 일본류학시 동창이며 이름난 피아노연주가인 후지무라 요꼬의 공연을 보고 했다는 말이 인용되여있었다. 조선민족음악의 후진성을 분석하였는가 하면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는 론조로 일본의 현대음악을 섭취하여야 할 필요성을 력설하였다. 상품광고만 한 지면에 담긴 글이지만 리면상의 이름을 본것으로 하여 김형숙의 심중은 자못 무거웠다. 조선민족음악을 위해 작곡가가 되려 한다고 한 리상은 어데다 버렸는가. 인간이 지조를 꺾는다면 남을것이 무엇인가. 망국의 수난속에서도 자기 민족의 노래를 사랑하기에 기대를 가졌는데 실망감을 지울수 없었다.

사흘이 지나갔지만 고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초에 품었던 의혹은 사라지고 마음속에서 불안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레코드회사에서 송달되여오는 음판들이 늘어나자 김형숙은 하는수없이 매장에 나섰다. 찾아드는 고객들이 상점에 젊은 판매원이 왔다며 의미 담긴 웃음을 보내는통에 어처구니없는 인사까지 하게 되였다.

어느날 조령출과 작가 신불출이 작곡가 몇명과 함께 매점을 찾아왔다. 그들은 고화의 행처를 전혀 알지 못하는지라 매대를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동안 나누었다.

《고화선생은 언제쯤 돌아오는지요?》

《인츰 돌아선다고 했다는데…》

《녀걸의 행차이니 궁금해서 그럽니다.》

《신문에라도 내야 하지 않을가.》

《말을 타고 장검을 휘두르는 사진을 받쳐서 소개하면 멋이 있을거야.》

《우리 음악쟁이들이 부끄러운 족속들이요. 면상의 추태로 납작해지는 신세가 됐으니 말일세.》

《그 일본 피아니스트가 련인이라는 말이 돌더군.》

《그건 억측이네.》

귀에 담기가 거북해난 조령출이 고개를 내둘렀다.

그때까지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신불출이 일부러 거센소리를 냈다. 쐑쐑대는게 절로 웃음을 불러왔다.

《나라는 사람은 신문나발을 애당초 믿지 않는고로 그것들이 입 모아 짖어대는 풍설, 랑설, 위설, 악설, 독설에 진절머리 떠는지라 온전한 종자도 하루아침에 발가벗기우고 나앉기 식은 죽 먹기로되 면상을 만나 덜미를 비틀었더니 풍각쟁이소리라는게 여기 밟히고 저기 채워 잔명부지 간신인데 신문모기한테 물어뜯겨 뼈만 남는다구 하더라니 이눔아, 이실직고해라, 왜인계집 차고 놀아댔다는게 사실인고 했더니 턱 떨어져가는 눔 마지막 말하듯 하는 소리란 불출형, 종로에 내세우고 벗겨보우. 이놈이 구실은 못해도 조선종자외다. 하? 오죽한 대답인가.》

웃겨서 눅잦히자 하는 놀음이지만 듣는 사람들은 여전히 도리머리였다.

《어쨌던지 처신은 바로 못했거던. 수치네, 일본음악을 숭상하면서 조선노래를 지어낸다는 그 량면성이 말이네.》

《본인도 반론조차 못하며 머리를 숙이고 다니자니 괴로울걸세.》

조령출과 신불출이 작곡가들과 가버리자 김형숙은 자기도 모르게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마치도 자기가 저지른 일처럼 여겨졌던것이다.

이럭저럭 주인없는 집을 열흘째 지킨 한밤중에 할머니가 웬 낯선 사나이를 맞아들였다. 김형숙은 이상한 예감으로 겁이 덜컥 났다. 중절모를 눌러쓴 사나이의 경계하는 눈빛은 자못 날카로왔다. 옷차림은 신사풍이지만 마주 쥔 두손은 거친 로동에 다슬린것이 여실히 알렸다.

고화의 소식을 알리자고왔다는 첫마디부터가 귀전에서 바람소리를 일으켰다. 올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난데없는 기별이 들이닥친것이다.

고개를 수그린채 바위처럼 앉아있던 사나이가 드디여 입을 열었다.

《고화선생은 다시 오지 못합니다. …》

《예?! …》

김형숙은 마주앉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득히 먼곳에서 들려오는것 같은 착각을 느끼였다. 말뜻은 더우기 알수가 없었다. 방바닥에 내놓은 신문을 내려다보던 그는 떨리는 눈길을 겨우 쳐들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나이는 어서 읽어볼것을 무언으로 요구하였다.

국경도시에서 빚어진 사건이 간략소개된 기사를 손에 든 김형숙은 황황히 글줄을 더듬어나갔다. 정확한 날자와 시간을 밝히면서 일본경찰의 단속에 불응한 두사람이 렬차에서 도주를 시도하다가 위급해나자 녀성이 불의에 권총으로 사격을 가하였다. 렬차안은 순식간에 혼잡을 이루었고 경찰들이 증가되여 위기에 들자 녀성은 달리는 기차에서 뛰여내려 목숨을 끊었다. 사건현장에서 료해하였으나 녀성의 신분을 확인할만 한 아무런 근거도 잡지 못하여 수사가 곤난한 형편에 처하였다는것과 도주한 다른 한명은 남자로서 추적중이라고 부언하였다.

철길을 배경으로 쓰러진 녀자의 사진도 제시하고있지만 고화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보다는 자기가 알고있는 고화가 총까지 쏘아가며 일본놈들과 맞섰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은 고화의 방으로 안내해달라고 하였다. 김형숙이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자 할머니가 일어났다. 시간이 퍼그나 걸린 뒤 내려온 사람의 손에는 상점장부나 같은 책과 여러장의 사진이 들려있었다. 처음과 같이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은 장부책을 한장한장 뒤져가며 깐깐히 훑어보며 고개만 주억댔다. 이윽해서 화로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는 장부책과 사진들을 불태워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화선생은 고향에 내려가다 사고로 다쳐서 올라올 형편이 못된다고 하십시오. 수일내로 전보가 올겁니다. 상점은 팔아넘겨야 합니다. 그의 신상에서 있은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됩니다.》

한밤중의 불청객은 바람같이 사라져버렸다. 두 녀인만 남은 방안에는 화로의 연기가 감돌뿐이였다. 믿기 어려운 사실을 받아안은 김형숙은 얼어붙은듯 앉아서 움직일줄 몰랐다. 늙은이가 눈물을 흘리며 무슨 말을 혼자서 중얼대면서 고화의 방을 거두는 소리가 들려오자 김형숙은 천근같아진 몸을 겨우 일으켰다. 믿을래야 믿을수 없는 참변이 꽉 들어찬 머리속은 어느것 하나 사리를 따져볼 생각을 못하였다.

휘청거리는 걸음을 옮기다 문설주를 잡고 선 그는 벽에 걸린 고화의 사진에 놀란 눈길을 멈추었다. 시원한 두눈동자가 밝은 웃음을 보내지만 고인이 되였다는 의미가 부각되면서 어두운 그늘이 진것으로 보였다. 고화의 사진을 전부 불태운것이 아니였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자 한 녀성의 죽음에서 거대한 의미가 서서히 다가왔다.

고화는 어떤 녀인이였는가. 봉건구습을 박차고 학문의 길에 나선 녀성, 녀성의 몽매를 수치로 감수하며 자유를 갈망하여 항거한 녀성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상상을 초월한 행위, 총으로 일본경찰을 사살하고 자결을 단행한 고화였다. 언니라고 부르며 살았지만 너무도 모른 인간이 사진속에서 무엇인가를 말하고있는것이다. 젊으나젊은 나이에 남다른 뜻을 지녔기에 누구나 가는 인생의 마지막길을 편안히 누워서가 아니라 죽음을 향하여 날아가버렸다.

중국본토는 가장 야만적인 나라가 일으킨 전쟁의 불도가니속에 들고야말았다. 지구의 서쪽에서는 파쑈도이췰란드가 전대미문의 전쟁광풍을 일으키며 동쪽으로 검은구름을 몰아오고있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세계대전은 바야흐로 땅크의 무한궤도처럼, 폭격기의 날개와 같이 수많은 민족들과 나라들앞으로 해일마냥 밀려들지만 그것을 예측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고화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싶은 충동을 안고 레코드상점을 찾았던 리면상은 뜻밖에도 김형숙을 만났다.

《언니는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다 사고로 다쳐서 올라오지 못해요.》

어덴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생면부지의 사람 대하듯 하는 랭담한 대답이였다.

고화의 신상에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러고보니 만나본지도 퍼그나 오랬다. 곁에 있을 때는 모르지만 없으면 의지였다는것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있다. 고화가 그런 녀성이였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뒤늦게 알았어도 편지로나마 위로하리라 생각하고 고향주소를 물으니 김형숙은 웬 일인지 서둘러 피하려 하였다.

《어데서 치료를 받는지 나도 모릅니다.》

대답이라기보다 알려고 하지 말아달라는 거절이나 같은 말이였다.

《형숙선생!》

《언니의 이 상점도 오늘 주인이 바뀌여요, 매각했으니까요.》

엄청난 사실을 옮기는 김형숙의 어조에는 리면상에게 어서 가보세요 하는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나고있었다. 마치 그 말을 증명하듯 웬 낯선 남자가 매장으로 나왔다.

겨울밤 역홈에서 헤여질 때의 김형숙보다 더 차거워진 모습을 다시 보았다. 두사람사이에는 도저히 건널수 없는 강이 막아서서 흐르고있었다. 진옥련으로 하여 생긴 오해라고만 여길수 없는 경원을 느끼며 리면상은 무거운 걸음을 돌려세웠다. 가까이 하고싶을수록 멀어만지는 사람이 김형숙이였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서로 보고 느끼고 읽는 존재라고. 나를 어떻게 느끼며 읽는것인가. 무엇이 혐오스럽게 만드는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한 녀자의 마음속에 비쳐진 자기의 모습을 상상할수 없었다. 시름도 체념으로 자리잡는것 같았다. 볼대로 보고 읽고싶은대로 읽으라는 무관심까지 생겨났다. 허나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름은 고화였다. 김형숙의 말을 믿자니 너무도 의문스러운것이 많았다. 그 녀자가 없는 레코드상점은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음악을 사랑했기에 음악을 떠날수 없어 상점을 차려놓고 고객들과 담론하는것을 기쁨으로 여긴 고화였으리라. 수난당하는 이 나라 작곡가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헤아려준 녀성이 아니였던가.

리면상은 고독이 안아오는 울적감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오선지에 음부를 그려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언제 작곡이라는걸 했던가싶게 머리와 가슴에서 한 소절의 선률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며 몇시간 딩굴고난 그는 답답한 가슴을 달래려고 다시 나섰지만 정한 걸음도 아닌지라 대중없이 발을 옮겼다. 무엇인가 귀중한것을 잃어버린 허전하고 고적한 심정을 안고 걷다가 길을 막는 사람으로 하여 멎어섰다.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는 백운남이였다. 조령출이 신문에 낸 기사의 집필자를 찾아냈는데 바로 이 인간이 날조된 자료를 넘겨주었던것이다.

《어델 가시오, 면상?》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도태되여가는 인간의 기질이 후안무치였다.

《가고있지요, 어데론가.》

《그 대답 과시 노래같소, 흐흐…》

두손으로 퍼올리는 흉내를 피우고나서 흐억흐억 웃어댄다.

《할 말이 없으니 가겠소.》

《할 말이 있으니 같이 걸읍시다요, 헤?》

감겨도는품이 그냥 물러날 잡도리가 아니다. 리면상은 머리속이 지긋지긋하고 불쾌감이 가슴에서 치받쳐올라 화가 났다.

《사람을 그만 괴롭혀야 하지 않소. 뭘 취재하시려우?》

《흐흐… 난 좋은 일만 하오. 절반은 사실이고 절반이 위조인데 총독부가 면상을 새로이 보게 했은즉, 히히… 이런 재주는 <손자병법>을 알아야 하는데… 예로부터 례의를 숭상하여 임금 다음 자리에 스승을 놓았단 말이지, 음. 낳아준 아비를 그 뒤자리에 놓는 까닭은 사람이 세상리치를 알도록 깨우쳐주는것이 무엇보다 큰일이기때문이야. 하? 알턱이 있나. 세상이라는게 뭔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다 그 말이거던. 실사구시라는게 별다른게 아니야. 세상 살아가는데서 제 몸을 바로 건사하는 묘리를 말하는거지, 아무렴?》

구질구질한 입에서 막 배우고 얻어들은 소리가 되는대로 거침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불륜을 도락으로 여기고 배신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망한 나라의 옛 도읍을 밟으며 누구를 가르치려 드니 기막힌노릇이다. 멀지 않아 조선만이 아니라 동아가 일본의 패권속에 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지껄이면서 대세를 바로 보고 비를 피하려면 자기가 선 처마에 들어서라는것이다.

《여보시오! 비에도 젖고 눈도 맞으며 나라는 사람은 제갈길로 갈테니 걱정마시오.》

《임자 저를 배워준 스승을 모르거던. 철이 없지. 가네다가 조선을 떠났다고 그림자까지 걷어간게 아니라는걸 알아야지. 어리석다!》

《당신이 그림자겠소?》

《노래는 잘 짓는데 눈으론 한치앞도 보지 못하니 장님 소궁둥이 쓸어만지는 격이지, 하아?》

《비키시오! 길가는 사람 붙들지 말구.》

《걱정이 돼서 그런다. 네 재주가 아까와서 길을 가리켜주자는게야.》

리면상은 눈을 감은채 멎어섰다.

《보살같은 경륜을 지녔으면 알려주구려.》

《가네다가 나한테 부탁했다. 면상을 아껴 데리고있으라구. 어차피 노래라는걸 짓자면 싫은대로 기모노를 걸쳐야 해. 게다를 끌면서 일본 샤미센도 긁고 조선노래도 짓는다 이 말이지. 이런걸 두고 저팔계 재주라고 한다는것쯤이야 알아야지, 암.》

《그러니 나더러 개의 자식이 되라는 소리요?》

《무슨 말인가?!》

《아비없는 자식으로 살라는게 아니란 말이요?》

《흐흐, 네나 내나 애비가 어데 있느냐? 경복궁에 대고 소리쳐 불러보려무나, 이 우둔한 놈아!》

게거품을 문 얼굴과 허옇게 뒤집힌 눈알을 노려보던 리면상은 혼신을 모아 숨을 쉬면서 마디마디를 씹었다.

《천벌을 받을 때가 온다! 조상을 욕되게 한 그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

기가 살아난 백운남은 리면상의 등에 대고 고함을 지르려다 마주쳐오는 녀자의 눈동자에 얼이 나간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이런걸 두고 바다에서 목숨을 건지니 산불을 만나 피할 길이 없구나 하는 말이 생겨난게 아닌가. 진옥련을 내세우고 캬바레에 가자고 수작질을 했다가 당한 면박이 금시 귀전을 두드렸다.

《세번째 거절도 준비되였으니 계속하세요.》

하, 얼마나 통쾌한 대답이였던가. 들리는 소문엔 리면상이 속앓이를 하는 녀자라니 빗본것이 아니다. 차림은 수수해도 얼마나 도고한 눈빛인가.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방금전에 혀바닥을 되는대로 놀려 한 말을 저 처녀가 다 들었다는 예감이 들자 종로 한복판에서 망신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임의의 순간에도 비굴해질수 있는 준비가 되여있는 그였기에 금시 초면인듯 가죽을 쓰고 입을 열었는데 자기도 걷잡기 어려운 기막힌 수작이였다.

《아가씨, 우리 극단에 오지 않으시려우? 백화가 만발한 도원을 찾으시우.》

마주보는 눈에서 혐오가 끓고있었다.

《이렇게 또 보게 되는군요. 어서 집으로 가세요. 부모들도 있겠는데 말하는 법부터 배우는게 좋지 않을가요. 큰길에 나서지 말아요, 조상들을 욕보이면서 말이예요.》

얼마나 곡진한 타이름인가. 서당개도 이런 구정물은 쓰지 않을것이다. 집으로 가라니 제가 기여나온 굴속으로 되들어가라는 훈시렷다. 하? 내 나이 몇이라구, 이년이! 백운남은 가슴이 부글거려대지만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젊은 녀자를 상대로 화풀이를 하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던것이다.

김형숙이였다. 그는 멀어져가는 리면상의 모습을 바라보며 움직일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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