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30

 

캬바레가 영업을 하지 않는 날이여서 진옥련은 집에 있었다. 무슨 일이든 손에 잡아보자고 했지만 내키는것이 하나도 없었다. 침대에 누워 책이라도 보자고 펼쳐들면 읽는것이 아니라 눈으로만 더듬다 밀어놓고말았다. 그전엔 잠도 많았건만 눈을 감으면 밀려드는 적막감이 넋을 움켜쥐고 심연으로 몰아넣었다. 울긋불긋 장식한 원추형모자를 쓴 사람들의 괴상한 춤가락과 노래소리, 무서운 음향을 날리는 북장단, 탈바가지를 쓴 무리들, 바람결에 목메여 흐느끼는 가야금, 눈같이 하얀 천우에서 락수물처럼 튕겨나던 빨간 피방울, 비명과 아우성소리… 망각속에 잠들었던 무서운 환영들이 덮쳐들 때면 소스라쳐 놀란다. 꿈도 환상도 아닌 그 모든것을 안고 가슴을 떨어댄다. 마음이 진정되면 이어 행복으로 여겨온 돌이키고싶지 않은 생활의 토막들이 얼씬얼씬 눈기슭으로 다가들며 잊으려고 하는 과거의 세부들이 끝없이 괴롭혔다. 머리는 마냥 무겁고 정신이 개이는 날이 없다. 시름에 더 큰 시름이 동아줄처럼 칭칭 온몸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멈이 저자보러 나가겠노라고 해서야 머리를 비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진옥련은 넋잃은 사람처럼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멈이 집을 나가겠다는걸 붙들다싶이 해서 눌러앉혔다. 의지가지없는 늙은이이기도 하지만 빈집이나 같은데서 혼자서 살 생각을 하니 겁이 났던것이다.

오늘 아침에 눈이 내렸다. 밖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머리를 대충 손질하고 수건을 쓴 진옥련은 대문을 열다 놀란 소리를 내며 굳어지였다.

문밖에 선 사나이로 하여 온몸이 한줌같이 졸아들었다. 강무현이였다. 길가에서 보는 사람들은 영낙없이 보부상으로 알 차림새다. 무거운 짐을 지고 황황 타는 눈길을 보낸채 사정이나 하듯 중얼거렸다.

《다시는 안 온다던 집이였는데 찾지 않을수 없었소. 일구이언했으니 사내대장부라 말하기 어렵구려.》

오른손으로 입을 반쯤 가린 진옥련은 말귀를 가려듣지도 못하는 귀머거리같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들어오세요. …》

뒤걸음쳐 비켜선 그는 남자의 거동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내가 온건 짐을 좀 맡겨둘수 없을가 해서… 수일내로 찾아가겠소.》

힘들게 간청하는 소리에 진옥련은 무작정 대답했다.

《그러세요.》

《집에 누가 없소?》

《어멈은 저자보러 나갔어요.》

부엌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강무현은 주춤 멎어섰다. 젊은 녀자 혼자 있는 집에 온것이 례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게 알리는 거동이였다. 반쯤 돌아서 바라보며 대문밖에서 첫말을 하던것처럼 사정조로 말했다.

《막부득이해서니 그리 알아주오. 인차 가겠소.》

《오지 못할 집이니 그래야죠.》

창고에 넣어 보관해달라기에 짐을 받아 뒤뜰에 있는 움속에 넣고 돌아서 나오니 강무현은 마루에 앉아있었다. 들어가자고 할수도 없고 추운 날 밖에 그냥 둘수도 없어 진옥련은 한숨만 내쉬였다.

《숭늉 한그릇 주겠소?》

강무현은 숭늉 한대접을 받아 후후 불며 마셔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꺼낼듯말듯 갑자르는게 알렸다. 무엇인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하는것이 분명했다. 사나이의 속저울질에 시간은 지겹게 흘렀다.

두만강연안의 온성을 떠나서 먼길을 꼬박 걸어서 온 강무현이였다. 자기가 지금 옳게 행동하고있는가를 마음속으로 묻고있는 강무현이다. 가져온 물건은 왜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안된다. 그에게는 서울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더 있었다.

진옥련의 집을 선택한것은 이 녀자가 거절하지도, 무엇을 알자고 하지도 않을 대상이고 혼자 살기에 교제가 적고 캬바레가수여서 왜놈경찰기관의 감시가 덜 미칠수 있다고 판단하였기때문이다. 보다 중요하게는 진창속에 허덕이는 옥련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고싶은 강무현의 애모쁜 마음에서였다.

숭늉 한그릇을 식을 때까지 마시면서 골몰하는 강무현을 지켜보며 진옥련은 무슨 말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대답을 안해도 탓하지 않겠소. 백운남에게 진 빚을 왜 당신이 걸머져야 하고 갚아야 하오?》

진옥련은 왈칵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짐은 잘 볼테니 다른건 묻지 말아요. 남은게 없는 녀자예요.》

고개를 끄덕이며 강무현은 일어섰다.

《짐이라야 행상의 눅거리물건이요. 늦으면 래일저녁엔 가져가겠소. 사람이 먹어야 살지 않소.》

《금덩이라도 상관없고 다치지 않을테니 마음놓으세요.》

들어설 때보다 힘있는 걸음으로 대문을 나서는 강무현을 바라보던 진옥련의 눈빛은 애절하게 떨려났다. 그 어떤 구원을 바라는 심정이 가슴속에서 솟구쳐올랐지만 받아줄리 없는 사나이였다.

이 순간 그는 어제저녁에 만났던 김형숙을 생각하였다. 얼마나 동정심이 많았으면 찾아와 당하는 고통을 함께 나누어주기까지 하였으랴. 서울에 왔던 일은 다 보았기에 인츰 내려간다고 하였다.

강무현은 눈길을 밟으며 긴 다리를 부지런히 놀리였다. 안국동 네거리에 이른 그는 마주보이는 레코드상점간판을 확인하고나서 사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상점안은 한적했다. 구석진 곳에 녀학생 둘이 사든 레코드판을 놓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털깃을 댄 외투를 입은 잘 생긴 녀자가 강무현을 바라보며 어서 오십시오 하는 눈빛을 보냈다.

진렬해놓은 레코드판들을 흥심없이 둘러본 강무현은 녀학생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지나치는 말같이 물었다.

《하루밤 묵어갈 손님도 받는다던데요.》

《잘못 오셨군요. 려인숙이 아닌걸요.》

《좋은 흥정도 할수 있을텐데 그럽니다.》

《서예품이면 사겠어요.》

녀학생들의 인사를 받고난 고화가 긴장한 눈빛을 풀며 미소를 지었다.

《방으로 들어갑시다.》

고화는 강무현을 안내하여 초물자리를 깐 방에 들이였다. 정갈하고 아늑했다. 기다리고있은 고화는 차후행동에 대해 설명하였다. 대구로 내려가는 차편은 준비되였고 일본상회의 상품운반통로여서 안전은 담보할수 있다, 짐은 상품과 꼭같이 포장하여 실어야 한다, 한가지 임무가 더 있다, 그것은 내려가는 기회에 등사기를 가져가야 하는데 뚝섬마을에 있기때문에 오늘중으로 날라와야 한다는것이였다.

심중한 낯색을 짓고 듣고있던 강무현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남아 돌아가는 기운과 긴 다리는 어데 쓰겠습니까. 이제 곧 떠나겠습니다.》

《성미가 마음에 들어요.》

시원명쾌한 말을 들으며 그는 녀자를 다시 보았다. 어덴가 도전적인 인상을 주지만 담담한 눈동자에 지성이 넘쳐 흘렀다. 강무현은 자기의 기분이 이상하게 충만되는감을 받았다.

《왜 다방에서 레코드매점으로 자리를 옮겼는가요?》

《주인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다방이 필요했겠지만 나에겐 지금처럼 한적한 곳이 요구되거던요. 레코드판매는 돈벌이가 안돼요.》

《사실 난 몇해전부터 주인님을 만나고싶지만 그렇게 할수 없었지요. 접선은 반드시 한 녀성을 통해서만 할수 있었거던요. 우린 오래동안 무모한 일로 아까운 정력을 소모했습니다. 그것을 간파한분이 주인님이였지요. 옳은 투쟁방략이 없었으니 우왕좌왕하면서 서로 주장만 내세웠고 피눈물을 삼켜야 하는 실패는 얼마인지 모릅니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늦게야 남편의 뜻을 따랐고 투쟁이란 곧 조직이라는걸 알게 됐어요. 새별회는 맹활약을 시작하겠지요?》

《아직은 준비단계입니다. 지난 시기 테로와 같은 싸움이 되여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겨울이 지난 다음 내가 만주에 갔다오자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던 고화가 방문을 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차반을 든 김형숙이 들어와 가볍게 인사를 하였다.

《내 고향에서 온 처녀예요. 친동생이나 다름없어요. 어렸을 땐 나한테서 글도 배웠거던요.》

《그렇게 보니 생김새까지도 친동생같이…》

김형숙을 바라보며 무심한 인사말을 하던 강무현은 입을 하 벌린채 눈을 감았다 떴다. 이게 누군가, 원산처녀. 바다처럼 시원한 눈동자, 리지적인 조용한 얼굴, 미소가 어린 입모양을 보며 그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올렸다.

《아, 원산… 날 모르겠소?!》

그 소리에 고화도 김형숙도 놀랐다. 고화의 눈길이 마주 오자 김형숙의쪽에서 도리머리를 저었다.

《하? 나야 모를수 있겠지만 면상군이야 함께 교편을 잡았댔으니 잊을리 없겠지요?》

리면상의 이름이 튀여나오는 바람에 김형숙은 앉은 사람을 면바로 보았다. 분명 자기를 아는 남자인데 조금도 생각나지 않으니 당황하기까지 했다. 강무현이 원산시절을 안아다 놓아서야 놀라며 가느다란 경탄을 터뜨리였다. 일본경찰서 류치장에서 얼핏 보았을 자기를 기억한다니 탄복하게 했다.

주걱턱을 쳐들어올린 강무현은 무릎을 치고나서 대틀스러운 소리로 말하며 껄껄거렸다.

《고화선생, 이런걸 보고 기봉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고화의 얼굴에도 즐거운 웃음이 어렸다. 마주앉은 사나이가 리면상과 친구지간이라니 며칠동안 김형숙을 타이르느라 애먹은 생각이 나 무등 기뻤다. 사람을 알려면 그의 동무들을 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녀성으로서 고화의 눈에 자리잡은 강무현은 흠할데 없는 사나이였다.

《우리 형숙인 기묘한 처녀예요. 제딴의 뜻을 가진 지조와 봉건이 물려준 정조가 결합되여있어요. 어느 사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거예요.》

《언니…》

고화의 등뒤로 비켜앉은 김형숙이 급한 소리를 냈다.

《수집어하는게 녀자의 자기 전달방식이 아니야. 도전을 해야 한다. 아무래도 내줄 령토인데 값을 부르며 맞받아나가야 해. 사내라는 어중이떠중이들을 무찌르면서 말이다.》

환경에 자유자재로 적응하는 고화의 림기응변에 내심 감탄을 하며 강무현은 호탕하게 웃고나서 김형숙에게 물었다.

《면상군은 만났는지요?》

강무현은 궁금증을 참을수 없어 물었다.

속으로 제발 묻지 말았으면 하고 빌고빈 질문을 끝내 받자 김형숙은 저고리고름을 안타깝게 말아올리기만 하였다. 진옥련을 만나고부터 리면상을 더는 생각하고싶지 않았다. 그것은 애초 떠나올 때 먹은 마음이 아니였다.

《대답하렴!》

고화가 안타깝다는 어조로 재촉했다.

세운 무릎우에 턱을 고인 김형숙은 까딱 움직이지 않더니 한숨을 내뿜으며 한다는 말이 어이없었다.

《전 오늘 밤차로 내려갑니다.》

그러니 만나지조차 않았다는 소리다. 더우기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고있다. 강무현은 마음이 허전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세상사는 억지로 되지 않는다. 앞에 앉은 처녀같이 배운게 있는 녀자는 자기의 상대를 소홀히 볼수 없을것이다.

고화와 헤여진 강무현은 갈길이 바쁘지만 리면상을 찾아가 만났다.

그는 포리톨레코드회사의 전속작곡가였다. 김형숙이 서울에 내려와있으며 오늘 저녁차로 올라간다는 소식을 들은 리면상은 자기의 생각과 귀국후 처신이 후회되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되여 편지로라도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리지 못했는지 자기도 알수 없었다. 한시바삐 노래를 지어 기쁘게 하리라 마음먹었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였다.

《들국화》처럼 짓밟힌다면 자기의 노래는 뜻대로 세상빛을 보지 못할것이고 흐르는 시간속에서 기다리던 사람의 감정은 오해로 번져갈것이다. 그런것은 알려고 하지 않았으니 오늘과 같은 일이 생겨나기마련이다. 참으로 난처한 일을 저질렀다. 용기를 내여 만나기는 하겠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리면상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역전에 나갔다. 자정이 지나서인지 려객들이 드나드는것도 뜸해가고있었다. 아마 추우니 역사문밖에 나서기 싫은 모양이다.

철통으로 만든 화독이 열을 뿜지만 넓은 대합실을 덥히지 못했고 추위속을 뚫고 먼길을 가야 하는 사람들은 미리 수면보충을 위해 꼬부리고 나무의자에 기댄채 잠들을 청하고있었다. 역홈쪽은 훤히 밝히는 불빛으로 출발을 준비하며 정비중인 기관차가 이밤에 떠나야 하는 화풀이인지 이따금 씩씩거리며 증기를 토하기도 하고 꿱? 꿱? 소리를 내지르기도 한다.

일본에서부터 입기 시작한 낡은 코트의 깃을 세우고 주머니에 손을 지른 리면상은 대합실안을 둘러보다 어렵지 않게 김형숙을 찾아냈다. 망막에도 깊이 새겨져있는 연분홍머리수건에 얼굴을 묻은채 앉아서 책을 보고있다. 침착하고 단정한 자세, 책장을 번지고는 손이 시린지 입김으로 불며 글줄에 잠겨있다. 무정한 사내에게 보내는 랭담한 모습같이 느껴져 저절로 어깨가 우로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책에 옴해있던 처녀가 재빨리 눈길을 쳐들어올리더니 마치 기다리기나 한듯, 그런 까닭에 자신을 걷잡지 못해하는듯 얼굴에 놀라움을 실었다.

《어마?! …》

죄책에 시달린 인사와 공교로와하는 감정이 부딪쳤다. 허공에서 마주 엉킨 눈동자들은 한편에선 용서를 빌었고 다른쪽에서는 이렇게 만나는것은 무의미하다는 야릇한 거절의 뜻을 보내였다. 때마침 개찰을 알리는 소리가 확성기에서 울려나왔다.

김형숙은 서둘러 짐을 찾아들며 《미안해요. 고생스럽게 나오지 않아도 될텐데… 고마와요.》라고 얼버무리는 말을 두서없이 하면서 서둘렀다. 아직은 시간이 넉넉하지만 그 녀자의 심리는 지금과 같은 자리를 바라지 않았다. 리면상이 짐을 들고 말없이 개찰구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김형숙은 선자리에서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밤이 되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눈보라가 일어 역홈은 한층 어수선하였다.

《사실 난 첫 노래를 내놓은 다음…》

리면상의 입에서 량해를 구하는 말이 나오자 김형숙은 화제가 두사람사이의 이야기로 되게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진옥련과 그가 겪는 불행을 빚어낸 인간들을 증오하며 말하였다.

《봉건의 구속에서 울며 헤매는 이 나라 녀인들은 참말 가엾어요. 그런 녀자들에게 눈물을 더해준다면… 그것보다… 무정한… 아니, 이것도 정확한 표현이 못되는가봐요. … 안녕히 계세요. …》

리면상은 성에낀 유리창안에 앉아있는 김형숙을 보았다. 기적소리가 울린다. 리별을 알리는 메아리는 밤하늘가에서 오래동안 배회하였다.

김형숙과 헤여진 그밤에 리면상의 가슴은 텅 비여버리였다. 그것이 잃어서는 안될 상실이라는 뒤늦은 깨달음이여서 고충은 더 컸다. 그는 레코드회사의 작은 방에서 밤마다 미친 사람처럼 바이올린 활을 그어댔다. 무엇인가를 잊으려고 몸부림치지만 방안을 채우며 끝없이 울리는 선률의 간절한 하소에 잠겨 밤이 가고 새날이 오는것도 몰랐다.

눈만 감으면 식어가는 뇌리의 한복판으로 흘러간 생활의 단편적인 토막들이 언뜩언뜩 바람에 쫓긴 구름처럼 흘러갔다. 항구도시의 역사, 영원히 사귀지 못할 평행선을 이룬 두줄기 철길, 단층교사의 처마에서 울리던 종소리, 련두산의 무지개, 김형숙과 함께 올랐던 남산… 어느것 하나도 마음속에 깃을 두려 하지 않으며 주마등같이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그의 곁에서 돌봐주던 오일선과 왕성실은 겁을 먹고 식사하라는 말조차 하기 저어하였다. 인기척도 내지 않고 들어와 숟가락을 대지 않은 밥그릇을 치우면서 한숨만 쉬며 어쩔바를 몰랐다. 가수생활을 시작한 그들은 자기들이 선배로 따르는 사람이 창작에 몰두해서 그런다고만 여기였다.

오일선이 울먹이며 《선생님, 밥을 잡수세요. …》 하는 목소리를 듣고야 리면상은 바이올린 활을 다시 잡았다. 조용히 눈을 감으니 환각이 덮쳐들었다. 눈부신 백사장으로 온몸이 훨훨 날아갔다. 학생들이 먼곳에서 교가를 부르며 가는데 바라보면서도 자기에게는 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경원하는듯 한 그들의 모습에 쫓기우며 걸음을 옮기다 해당화꽃덤불을 만나니 울적하던 가슴이 금시 개여났다. 한송이를 꺾어들려는데 다치지 말라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녀자인데 얼굴을 알수 없었다. 오른손 가운데손가락 끝마디에 새겨진 잊을수 없는 표식을 보았다. 백묵가루가 묻은 잉크자욱이 력력한 손, 그 손으로 꽃송이를 꺾어들더니 말없이 돌아서서 걸어갔다. 있는 힘껏 소리쳐 불렀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바다바람에 치마자락을 날리며 가버리는것이다.

리면상의 가슴속으로는 상심이 안아온 상처의 흐느낌이 흐르고있었다. 영원히 되돌려올수 없는 사랑을 느꼈던것이다. 고백도 해보지 못한 사랑, 작은 리상이나마 리해해주었던 고마운 처녀, 그가 만든 바이올린 활주머니만 남아있다. 잃고보니 자기 가슴에 소중히 간직된 첫사랑이였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성공할 때까지 걷고 또 걸으라고 진정에 넘쳐 당부하던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수 없게 된것이다. 외로운 마음이 의지하게 되는것은 바이올린뿐이다. 눈을 감은채 활을 그으니 쓸쓸한 마음의 하늘로 선률의 새들이 노래를 부르며 날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아름다움이 깃을 치는 속으로 신기루마냥 김형숙의 자태가 솟아올랐다. 심장은 자기가 아는 유일한 최상의 녀인에게 무엇인가 열렬한 고백을 보내였다.

끝없는 애상에 잠긴 바이올린선률이 마침내 절절한 환희의 경지를 찾아냈다. 그것은 한 인간의 고독이 아닌 음악의 령감이 그려주는 세계였다. 리면상은 뇌수에서 작렬하는 음부들을 정리하여 오선지에 옮기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노래를 불러보는 그의 눈귀로 이슬이 맺히여 소리없이 구울러내렸다.

오일선과 왕성실은 그가 새로 지은 노래를 불러보고는 너무 기뻐 손을 마주잡고 콩당콩당 뛰기까지 하였다. 선생님이 며칠밤을 새우더니 좋은 노래를 지었다는것이다.

민요곡조의 가요 《꽃을 잡고》는 홍란파를 비롯한 작곡가들에게서 호평을 받고 오일선이 음반에 취입하였다.

리면상은 오늘은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에 들어가보리라 마음먹고 고화의 상점을 찾아 회사를 나섰다. 새로 지은 노래의 레코드판을 가지고 가면 연이가 얼마나 좋아하랴. 어머니도 시름을 덜고 류진은 바이올린연주를 할것이다.

《면상선생!》

고화였다. 솜저고리며 치마가 진눈에 젖고 찬바람에 얼어든것을 보면 어덴가 먼길을 갔다오는 행색이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어려돌았다.

《안녕하십니까?》

《나를 찾아가는게 아니예요?》

《기막히게 점을 치는군요. 어떻게 남의 마음을 첫눈에 알아맞힙니까?》

《과부가 아닌가요. 나 같은 녀자는 귀신과 이웃하고 살거던요.》

《지나친 과장인데요.》

리면상은 이 녀성도 미지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김형숙의 모습이 가슴에 자리잡는것으로 하여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들국화>는 무참하게 짓밟혔어도 새 꽃을 피웠더군요.》

《그 노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선생에게 찾아가던 길입니다.》

《새 노래음판을 가지고싶겠지요?》

《제가 무엇때문에 찾아가는가를 알고있었군요.》

고화는 긴 한숨을 내쉬였다.

《가요, 우리 집으로. 선생의 괴로움이 덜릴지 알겠어요?》

리면상은 미리 준비라도 한듯 한 레코드판을 받아들며 의아한 눈길을 보내자 고화는 앉으라고 손짓하고나서 말없는 미소만을 보냈다. 정성을 들여 포장까지 한 음판을 든 그는 이것이 자기를 기다린 무엇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축하해요.》

진지한 표정, 가식없는 행동, 절절함은 고화라는 녀성만이 풍길수 있는 향기였다. 이 자리에서 리면상은 그렇게 감수하고있었다.

《고맙습니다. 전 선생의 충고를 바랍니다. 왕년의 그 시절처럼 우리에게 잘되고 못된것을 가르쳐주기를 바랍니다.》

《호? 누가 무슨 말을 했군요. 홍선생이 말씀하시던가요? 그분은 재사예요. 세월을 잘못 만났어요. 불우하다고 하는 말을 새겨듣기를 바래요.》

고화는 속세의 한 녀성으로 묻혀버렸을 자기를 돌이켜보고있었다. 오늘을 가져다준 한 녀성과 지금도 가슴속에서 대화를 나누고있었다. 조객으로 찾아왔던 녀자! 남편을 잃은 불행한 녀성이 자기가 시기한 녀자와 마주서야 했다.

《이런 날까지 괴롭힐 생각인가요?!》

《고인에 대하여 이야기해드리고싶습니다.》

녀자로서 끝없이 미웠던 녀자, 남편의 곁에서 맴돌던 녀성, 마주앉으니 손아래지만 언니벌처럼 두렵기까지 했다. 진실과 진리만이 유일한 인간의 정신적의지로 되여야 한다고 확신하는 비상한 품격에 제노라 했건만 놀랐다.

《가줘요. 그이의 시신은 식지 않았어요.》

마음은 웨치지만 목소리는 자기도 놀랄만큼 맥이 없었다.

《어차피 묻힐게 아닙니까. 그러나 소중한 넋은 부인이 넘겨받아야 할 정신적유산입니다. 선생은 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오해할수 있는 행동들에 대하여 반드시 이야기해드리라고 했습니다. 거절하시는가요?》

《꼭 지금같은 형편에서 내가 들어야 하는가요?》

《저는 부인이 알고있는 그런 녀자가 아니며 선생이 운명전에 주신 과업이 있어서 이밤에 떠나야 합니다. 다시 못 올수도 있는 길로 간답니다.》

《?!…》

저속하다고 비웃은 상대들이 고상했다. 사랑과 가정을 떠난 그의 정신에는 모든것을 초월한 비범성이 깃들어있었다.

남편이 운명한 그밤에 사랑을 배신했다고 여기며 시기와 랭담으로 저주하고 원망하던 그 안해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여났다.그밤에 시작된 자기의 새로운 생활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말할수 없다.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하는 비밀이다. …

고화는 리면상을 주시하며 물었다.

《저를 믿으세요. 누군가를 생각하고있지요? 그때문에 괴롭지요?》

리면상은 자기앞에 앉은 녀성이 지체를 갖춘 인간이고 존경이 가기에 마음속에 안고 산 고뇌를 이야기하였다. 진옥련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옥련이의 운명을 외면하면 안돼요. 형숙이가 그 말을 나한텐 왜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백운남은 도박의 왕초가 분명해요. 옥련의 이전 서방과 밀려다닌다니 도박현장에서 붙들어야 해요.》

말없이 긍정하는 리면상을 바라보던 고화는 도박군들은 자기들의 놀음장소를 철저히 비밀로 지키기때문에 어느날, 어느 시간에 모여드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나서 이 일은 자기가 사람들을 내세워 알아낼테니 다음은 책임지라고 그루를 박았다. 리면상은 난감한 표정을 지은채 대답을 못하였다.

고화는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명암을 만나 의논해보세요. 사랑은 아름다운 희망이예요. 간직하세요. 그리고 형숙은 결코 속이 비좁은 처녀가 아니라는것도 알아둬요.》

며칠후 리면상은 홍란파를 만난 자리에서 고화와 나눈 이야기를 꺼냈다. 조령출도 같이한 좌석이였다. 주의깊게 듣고난 홍란파는 백운남의 더러운 정체를 발가놓을수 있는 기회라면서 조령출을 바라보며 의견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다혈질인 조령출은 거침없이 즉흥적인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도박장소에 백운남이네 패거리가 모여든다는 정확한 자료만 쥔다면 다음 일은 어렵지 않게 할수 있다는것이다. 자기가 아는 일본인형사에 대한 간단한 경력까지 소개하였다. 사상범을 취급하는자여서 기세가 등등한데다 탐욕이 하늘에 닿은 놈인지라 도박군들의 큰돈을 털어내는 일이라면 순사들은 뒤발차기를 하며 달려갈것이고 일단 잡아들이면 감옥살이를 시키고야만다고 장담하였다. 치안유지에 한몫하여 경찰서장자리도 넘겨다볼수 있어 입김만 불어넣으면 될 일이지만 장소와 시간이 정확하여야 한다며 우려하였다.

홍란파는 고화가 나서면 알아낼것이다, 이번 일은 친일주구가 제 상전에게 걸려 올가미를 쓰게 하는 놀음이여서 흥미가 있다며 담담한 웃음을 지었다.

고화의 수완은 놀라왔다. 불과 며칠사이에 서울바닥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도박패가 모이는 장소와 시간을 알아냈다. 조령출의 신고를 받은 일본인형사는 인왕산기슭 어느 한 부호의 집에서 백운남과 그의 패거리를 잡아들이였다. 형사가 어찌나 지독한 놈인지 그들을 비밀가옥에 억류하고 자기가 직접 취조하여 현행범죄를 시인시킨 다음 예심문건까지 만들어 경찰서에 제출하였다. 감히 누구도 끼워들수 없게 한 수법인것이다. 백운남은 어쩔 도리가 없어 구류장에서 재판받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였다.

리면상은 조령출과 함께 캬바레에서 진옥련을 데려내왔다. 캬바레주인은 그의 아버지와 가깝게 지낸 사람인데다 그에게 진 빚은 없었던것이다.

자기 운명을 두고 걱정해온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진옥련은 목놓아울었다. 나약한 인생을 살며 세상을 원망만 해온 그였다. 무정한 세상살이라고 여겨왔지만 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남의 불행을 도와나서는 사람들도 있다는것을 알았던것이다.

그들 세사람이 고화의 집을 찾았을 때 그곳에는 홍란파도 와있었다. 진옥련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누구보다 활기에 넘친것은 고화였다. 왕년의 녀류음악평론가는 거침없는 언변으로 음악작품분석을 하는가 하면 풍금을 타며 노래까지 불렀다. 자유를 갈망하는 한마리의 새가 되여 창공을 한껏 날아예는것이였다.

방안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그 모습에 매혹되여버렸다. 한 녀성의 행복을 축원하는 음악회는 규모가 작을뿐 사랑을 안고 열렬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고있었다. 그것이 너무 고마와 진옥련은 자주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떨었다.

《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세요?》

좌중을 둘러보는 고화의 눈빛이 번쩍이였다. 단순히 흥분하여 내보이는 표정이 아니기에 홍란파가 넌지시 반문하였다.

《옛시절의 모습으로 돌아오고싶지 않소?》

《그보다도 이 나라의 나 같은 녀자들이 눈물없이 살았으면 해요.》

소박한 언어로 크나큰 의미를 담은 표현이 울리자 진옥련은 참아가며 소리를 죽였던 격정을 왈칵 쏟고야말았다.

《그 눈물을 어인 일로 흘리는건가요? 아직도 서리찬 봉건의 구속, 아니면 사내들의 매정? 아니예요! 이 나라 녀인들은 결코 나약하기만 한것이 아니예요.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너무도 통분하고 절통한 망국이 가져다준 피눈물이예요! 난 옥련에게 말하고싶어요. 울지 말라!

허리를 펴고 세상을 똑바로 쳐다보며 살라! 녀자가 하늘에 대고 하소하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작은 사랑, 가정이라는 담장안에서 뛰쳐나오라! 내 말을 명심해요!》

흥분을 터뜨려놓던 고화가 말꼬리를 뚝 자르며 더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다.

물결치던 진옥련의 어깨가 굳어지였다. 음악이 흐르던 방안에 숙연한 감정이 휩쓸었다.

《녀성선언이요! 역시 고화란 말이지.》

홍란파가 감탄을 쏟자 조령출이 말하였다.

《우리도 녀성들을 새로운 눈으로 볼 때가 왔습니다.》

다시 풍금에 마주앉은 고화가 《진혼곡》을 탔다. 초연한 모습으로 넋을 부르는 소리, 이 하늘아래, 이 땅의 방방곡곡에 원한을 품고 떠도는 령혼은 그 얼마인가. 나라잃은 한을 안고 민족을 위해 구국의 제단에 한몸바친 넋들을 찾아 두견새가 밤을 밀어내며 울고 운다. 마침내 암흑을 밀어내고 동쪽하늘에 밝은 해가 솟아오를 때 밤에만 울던 새도 청천백일에 환희의 노래를 부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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