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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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 결성된 카프는 1933년 일제의 야수적인 1차 탄압을 당했다. 수많은 작가, 예술인들이 감옥으로 끌려갔으며 삼엄한 감시와 검열통제로 하여 언론은 철창속에 갇히우는 참혹한 형편에 이르렀다. 식민지지배체계를 구축한 일제는 친일주구들을 길들여 앞장에 내세우는 한편 카프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며 폭압력을 총동원하여 빠른 기간내에 붕괴시키려고 날뛰고있었다.

정신적인 의지를 잃은 문예인들의 방황의식은 천차만별이였다. 애수와 영탄, 허무와 좌절, 울분과 반항…

홍란파는 리면상의 《들국화》가 가혹한 세례를 받은 참상앞에서 통탄했다. 마주앉은 리면상과 조령출을 바라보며 그는 자기의 노래 《봉선화》의 운명이 이어지는 비참한 현실을 보고있었다. 일제의 탄압은 야수적이지만 고화와 같은 사람들은 짓밟힌 한편의 노래에서 민족의 넋을 부르고있지 않는가.

고화의 남편은 자유분방한 시인으로서 반항문학가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붓을 던지고 다방에 들어앉아 사람들을 놀래웠다. 자기의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시인은 시를 쓰는것이 아니라 불러오는 사람이라고, 생활을 안고 사랑으로 몸부림치며 넋으로 읊는것이 시라고 하였건만 언제 시를 써보았던가 할 정도로 변하였던것이다. 한때 음악계에서 녀성평론가로 독특한 인기를 모았던 고화도 남다른데가 있는 녀성이였다. 불달기 쉬운 마른나무가 아니라 석탄같았다. 일단 지피면 무섭게 타번지는 석탄처럼 그 녀자는 좀체로 사람을 믿지 않다가도 자기가 어떤 매력을 느끼면 있는 힘껏 사랑을 퍼붓는 형이였다. 이 녀자 역시 까닭모르게 음악을 떠나 오늘은 레코드매점이라는 바리케드로 후퇴하였다. 그들부부사이가 눈에 뜨이게 랭각되여 흉흉한 소문들이 나돌았지만 그것은 거의나 증거없는 험구였다. 그무렵 남편은 병사했다. 장례에는 홍란파와 조령출이 참가했었다.

고화는 향불대신 원고지를 태웠다. 일찌기 붓을 꺾고 다방을 경영한 남편이 세상에 내놓지 않고 간 유고들이였다. 조객들이 고인의 유물인데 아깝지 않느냐고 말렸지만 마지막 한장까지 다 태워버리고나서 연기로 사라져가는 령혼을 바래며 말했다.

《세상에 나서 안해에게조차 하고픈 말을 다 할수 없었으니 저승에 가서 지옥에 든 이 땅을 굽어보며 말씀하세요. 산 사람도 부끄럽지 않게 살거예요.》

시인의 유고를 태울 때는 녀자가 밉기까지 했으나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너무도 깊은 뜻을 담고있어 홍란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친우인 고화의 남편은 해마다 감옥살이를 하다싶이 한 시인이였다. 망국에 대한 반항이 운명을 그렇게 이끌었는데 종시는 일제의 고문으로 망친 육체가 죽음을 이겨내지 못했던것이다.

홍란파는 무거운 시름을 퍼올리며 지우의 모습을 더듬었다. 맨주먹을 쳐든 시인의 항거는 선혈에 젖었고 육신을 만신창으로 만들었다. 형무소마당에 던져진 시체나 다름없는 사람을 안아 살려낸것이 고화였다. 생명의 자리길을 다시 찾은 그 사람은 이상하게 변하여 친구들을 놀래웠다. 안해와 함께 다방을 경영하며 문객들과 의사소통을 한다지만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여러가지였다.

시재가 붓은 꺾어버리고 자기를 위해 사는 녀자인 안해의 사랑마저 배신하며 딴장을 본다니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람이 됐던것이다.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홍란파이지만 참을수 없어 만나보았지만 동문서답같은 대답인데 아직도 붓끝자랑을 하는 사람들이 시세에 따라 아부하며 살아간다면서 《이보우, 란파형! 시도 노래도 망국을 당한 백성들을 옳은 길로 선도해야 하지 않소.》 하고 물어 아연하게 하였다. 얼이 빠져 난봉길에서 헤매는 친구를 타이르자고 했다가 반격을 당한 처지에 놓인 홍란파는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내기까지 하였다. 붓은 붓이고 노래는 노래다, 혀끝으로 자기의 위선적인 행위를 감싸지 말라, 진리를 찾자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말공부질로 가르치려 든다면 사람이 사는 세상은 얼마나 가난해지겠느냐. 그의 목소리가 하도 준절하니 친구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자기는 가르치려는것이 아니라는것, 자신을 깡그리 태우고만싶다는 말을 낮은 소리로 반복하였다.

오늘은 고인이 된 친구의 모습을 되살리며 홍란파는 자기가 그를 다 알지 못하고 살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찌 보면 아리숭했던 친구처럼 변해가는것 같은 고화라는 륙감을 받아안고 저도 모르게 말하였다.

《생시에는 불만이던 남편을 사후에 그 안해가 리해하였거던. 인간이 사는 세상에 모를 일이 어디 한두가진가, 허허…》

알아들을수없이 혼자말을 하며 웃는 홍란파였다. 그때 방안으로 렴필재가 들어왔다.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필재군인가. 앉게.》

자리를 잡고 앉은 렴필재는 리면상의 무거운 안색을 살피고나서 말하였다.

《오늘의 상심이 래일은 절망에로 우리를 데려갈거네. 이 저녁에도 여러명이 붙들려갔지. 카프의 주창자들은 감옥으로 직행하는 형편입니다. 선생님, 이렇게 모여앉는것도 조심해야지…》

눈길을 접어내린 홍란파는 고개만 끄덕이며 반문하였다.

《자넨 일없겠나? 모난 글들을 많이 썼는데 그냥 둘가?》

렴필재를 걱정하는 말이였다. 최근에 와서 카프가 주관하여 내는 출판물들에 여러편의 문예평론을 발표한 렴필재였다. 그 글들이 론조가 날카로와 이목을 집중시키였는데 제기하는 문제들은 고루한 감상에서 벗어나 민중을 참답게 이끌수 있는 문학과 예술을 창작하자는 호소로 일관되여있었다.

《불안하지 않은것도 아닙니다.》

리면상은 렴필재가 자기의 신상문제를 놓고 홍란파와 조용히 만나자고 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조령출만이 약간 입귀를 찡그리고 듣기만 했다.

《차라리 부친의 집에서 두문불출해보게나.》

홍란파의 권고에 렴필재는 머리를 저었다.

《오늘 우리 부자는 의절을 선포했습니다.》

그 소리에 조령출까지 놀랐다. 믿어지지 않는 눈길로 바라보는 홍란파의 얼굴에서는 침중한 기색이 흘렀다. 렴필재의 설명은 그의 성미처럼 메마른것으로서 간단했다. 처와 어린 자식은 아버지 집에 맡기고 자기는 떠돌이살이로 왜놈들의 눈을 피해보려고 마음먹은 그가 찾아가니 부친의 태도는 일본에서 돌아온 때보다 더 완고했다는것이다. 애비의 뜻을 거역한 너를 키우는데 돈을 얼마나 썼는지 아느냐, 오늘은 처자마저 건사하지 못해 밥먹여달라니 뻔뻔스럽다,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소리쳐서 마침내 부자간에는 다시 만나지 않을 결심을 서로 확인했다는것이다.

《숨막히는 이 세상을 살게 해준것이 아버지가 나에게 베푼 은혜라면 버리지 못할것도 없지요. 삼강오륜을 거역한 이 불효를 저의 죄라고만 할수는 없습니다.》

좌중을 같이한 사람들은 다같이 암울한 심사에 빠져있었다. 리면상은 렴필재를 너무 모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였고 조령출은 이 일은 더 일찌기 빚어질수 있었다고 여겼으며 홍란파만이 웃사람으로서 부자간의 의리마저 깨여져나가는 세상을 말없이 한탄했다.

《그러니 어찌할 생각인가?》

홍란파가 막막한 물음을 던졌다.

《처는 친정에 보내고 나도 그곳에 몸을 둘가 합니다.》

《그러니 은둔한다는 소리군.》

조령출이 눈감은 얼굴을 쳐들며 말했다. 저으기 불만스러워하는게 알렸다. 숨어버린다고 왜놈들이 그냥 둘텐가. 차라리 붓을 들고 걸어가다 오라면 오라, 감옥이면 감옥, 떳떳이 맞아들이는것이 옳으리라.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있었다.

《명암은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건데 나도 타산을 해보았네. 처와 자식이 급하거던. 사람은 사람마다 제 걱정이 있는게 아닌가.》

《아무렴, 자네 타산이 빗나간건 부친을 찾아간 그 일뿐이네.》

조령출의 말이 비위를 건드렸지만 렴필재는 홍란파에게 서둘러 말했다.

《선생님, 전 이길로 떠나자고왔습니다.》

《결심을 했다니 어서 떠나게.》

자리에서 일어선 렴필재는 리면상에게 눈인사를 하고나서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며 사라졌다.

렴필재가 남기고 간 그늘은 어두웠다. 리면상은 떠나간 사람이 측은하게 여겨졌다. 문우들속에 살지만 뿌리를 가지지 못한 나무같은 렴필재였다. 주장은 독선적이고 생활에서는 무정이 외로운 존재로 만들어왔던것이다.

그의 상념을 흔들며 홍란파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랑은 의리라는 나무의 뿌리일세. 사랑없는 눈으로 보면 꽃도 하늘도 죽은것이지만 사랑을 담아 쓸어보면 돌도 생명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잃지 말아야 할거네. 불쌍한 내 민족, 내 겨레를, 바쳐야 할 사랑을…》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였다. 진정 민족을 사랑한다면 수난의 가시밭을 맨발로 천리를 간대도 그 얼이고 그 넋인 노래를 부르고 불러야 하리라.

리면상은 홍란파의 말을 새겨보며 자기의 결심을 말하였다.

《선생님, 검은구름이 밀려든대도 새 꽃을 피우렵니다.》

《그러리라 믿네. 수난을 당한 민족을 잊지 말자구.》

《선생님, 오늘 텅 빈 가슴을 안고왔다가 좋은 말을 안고 갑니다.》

리면상이 일어서자 홍란파는 손을 저으며 따라나왔다. 함께 갈 차비를 하기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깨진 레코드판을 붙여서 오빠 노래를 간수하겠다는 처녀애가 보고싶구만.》

얼마나 다감하고 인정깊은 작곡가인가. 아마도 그래서 고향의 처녀였던 봉선이를 위로하여 《봉선화》를 지었으리라. 사람의 감정은 이렇게 이어지며 노래로 불리워지는것이 아니겠는가. 자기 민족을 사랑한다

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새삼스럽게 새기게 되는 리면상이였다.

마가을 하늘로 기러기떼들이 끼르륵? 끼르륵? 소리내여 울며 흘러가고있다. 작별의 노래로 서글퍼지는 그 하늘아래에 겨울을 기다리는 산과 골짜기들이 여윈 모양을 펼쳐보인다.

미아리고개를 넘을 때까지 세사람은 별로 이야기도 나누지 않으며 제나름의 생각에 잠겨 걸었다.

《저 집입니다.》

리면상이 등성이우의 작은 집을 가리키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 멎어섰다.

소슬바람에 락엽이 구우는 소리가 귀전을 스치며 지나갔다. 지붕우에 말라버린 호박줄기가 얼기설기 뒤엉켜있는 집, 처마에 매단 무우, 호박오가리가 저녁바람에 그네 뛰듯 하는 풍경은 이상할만큼 친근감을 불러왔다.

《들어보오. 노래가 들려오는구만.》

고개를 옆으로 수그린 홍란파가 조심스럽게 한걸음씩 움직이자 두사람도 따라섰다. 어데서 울려오는 풍경소리인가. 조령출이 자기의 귀를 의심하며 리면상을 바라보자 바람속의 음악은 한층 선명하게 들려왔다.

《들국화가 노래를 부르오.》

벅차오르는 가슴을 누르며 홍란파가 말하자 리면상은 걸음을 뚝 멈추며 고개를 꺾어버렸다. 자기의 노래였다. 류진의 바이올린반주에 맞춰 연이가 부르고있었다. 음반에 취입된 가수의 노래가 아니지만 이다지도 가슴을 두드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사랑을 담아 부르는 심장의 웨침이다. 침략자들이 아무리 짓밟아도 민족은 불러주리라는 뜨거운 약속을 보내는것이였다.

《노래는 생명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세월을 넘어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아서 전해지는것이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조령출의 흥분된 목소리를 듣는 리면상의 볼을 타고 한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옥련은 때없이 역전으로 나오군 한다. 바랠 사람도, 맞아들일이도 없건만 무슨 까닭에 이곳에 나와 하염없이 서있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겪고있는 암담한 구속에서 벗어나 어데론가 먼곳으로 도망이라도 쳐버리고싶지만 나약한 의지는 그와 같은 결심을 이룰수 없게 하였다.

꺼질듯 한숨을 내쉬며 역사를 나오는 한무리 사람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던 그는 미간을 모았다. 시야에 얇은 곤색솜저고리를 입은 처녀의 모습을 포착했던것이다.

버선발에 고무신을 신었을망정 온몸에서는 깨끗한 젊음이 약동했다. 소곳이 고개를 숙인채 자기가 선 앞으로 걸어왔다. 한걸음 또 한걸음 가까이 다가오자 진옥련은 웬 일인지 가슴이 높뛰는것을 느꼈고 입술이 말라들기까지 했다.

《저… 이봐요. …》

지나치려는 순간 힘겹게 찾고야말았다. 시골처녀들은 도회지에 오면 주눅이 들지만 걸음을 멈춘 상대는 오히려 가늠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를 찾았는가요?》

침착한 물음앞에서 진옥련이 면구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를 모르겠어요?》

두사람의 눈동자가 마주 뜯어보며 부딪쳤다. 기대를 안고 섰던 진옥련은 처녀의 입김이 가벼운 놀라움으로 흘러나오는것을 보았다. 알아보았구나 하는 의식이 머리를 쳐드는 순간 가슴복판으로 이상야릇한 바람이 흘러갔다.

《알아보겠어요. 몇해전 다방에서…》

김형숙이였다. 그는 뜻밖에 만난 진옥련이 반가운 사람으로 여겨졌다. 오래전에 잠시 보았던 얼굴이지만 인상이 깊어서였던지 첫눈에 알아볼수 있었던것이다.

《참말 다행이예요. 몰라볼가봐 걱정했어요.》

진옥련은 애써 웃어보였다.

어덴가 쓸쓸한 감정이 풍겨오는 진옥련의 체취를 느끼며 김형숙은 걸음을 맞춰 조용히 움직였다. 그는 자기가 이 녀자를 만난것이 반가운 까닭을 생각해보았다. 단 한가지, 리면상의 소식을 들을수 있다는 기대가 앞섰으나 서뿔리 먼저 말을 뗄수 없었다.

《원산에서 살지요?》

《그래요.》

《아직 교원생활을 하는가요?》

《예, 겨울방학기간이여서 교구비품을 구입하자고 와요.》

《면상씨 소식을 알고있어요?》

기다린 말이지만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진옥련의 눈길을 외면한 김형숙은 살며시 고개만 저었다.

《일본에 건너가있겠지요?》

《돌아왔어요, 지난해.》

《그랬군요. 반가왔겠어요.》

전차길을 가로질러 건너간 진옥련이 걸음을 멈추고 무엇을 찾는지 두리번거렸다.

《그전엔 다방에서 만났댔지만 오늘은 저기에 가는게 어때요?》

진옥련은 크게 간판을 내건 식당을 가리켰다. 서울에서 이름있는 식당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가본 일은 없어 김형숙은 단마디로 거절하였다.

《난 걸음이 바빠요. 언니가 기다릴테니까요.》

《고화선생은 나도 면식이 있어요. 보통녀자가 아니지요. 기차시간을 따져가며 늦었다고 나무리지는 않을테니 걱정마세요.》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울리자 두 녀자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러문요. 녀걸이라 일컫는 고화부인이 아닌가요.》

례절도 없이 녀자들의 이야기를 훔쳐듣고 끼워드는 남자를 김형숙은 불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윈 얼굴이지만 잘 차려 입어놔서 기름이 철철 흐른다. 수달피모자며 겨울해볕에 번쩍거리는 은테안경과 곰가죽을 뒤집어쓴듯 한 외투차림이 첫눈에도 돈냥이나 있다고 거들먹대는것같이 보였다. 인상은 신통히도 도박군같이 느껴졌다.

바라지 않은 사람이 나타난것으로 당황해난것은 진옥련이였다. 조용한 자리에서 이야기나 나눌가 했는데 훼방군이 나타난것이다.

《면상선생과 원산에서 교편을 잡았던 선생이예요. 이분은… 백운남이라고…》

《나로 말하면 면상군과 동업자라고 해얍지요. 음악을 사랑하지요. 음악보다 고상한것이 어데 있겠습니까. 우리의 진옥련아가씨로 말하면 서울일판이 다 아는 캬바레의 이름난 가수이지요. 우리 함께 춤이나 추러 갈가요?》

실눈을 지은 김형숙은 나이도 적지 않은 남자가 백주에 큰길에서 녀자들을 세워놓고 부리는 추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진옥련이라고 했지. 그런데 캬바레가수라는건 무슨 말인가. 유흥가에서 노래나 팔 녀자였던가. 의문이 머리를 쳐들더니 짙은 의혹으로 번져갔다.

진옥련의 얼굴은 창백하였다. 빚진 종이라는 말이 있다. 구속이라는 올가미를 썼으니 굴욕을 참아야 하였다.

《시골에서 살지만 서울이라는 넓은 땅에 선생처럼 친절한분도 있다는것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나 호의를 받아들일수 없는것이 유감이예요.》

야유가 섞인 차거운 거절인데도 백운남은 김형숙에게 눈그루를 박고 자기나름대로 지껄여댔다.

《녀성들이란 그래야지요. 참으로 생신한 맛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 첫마디로 응했더라면 지금같은 쾌감은 가질수가 없지요. 면상선생을 찾아오는 길인가요? 아, 얼굴에 다 씌여있습니다. 짧은 인생을 외롭게 살아서야 안되지요, 아무렴요. 사랑은 인간의 가장 묘한 감정입니다. 음악이란 바로 사랑을 마술같이 만드는 재주랍니다. 우리 진아가씨도 한때는 면상군을 마음에 두었지요. 허나 지금은 캬바레에서 노래를 부른답니다. 가슴속에서 흐르는것이 무엇일가요? 사랑일가요? 녀자의 사랑은 가냘픈 눈물이지요. 예, 바로 그래서 우리의 진아가씨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서 다시 안아줄 사람에게 자기의 마음을 보내려는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내 말의 뜻을 알면 두번째 거절은 안하시겠지요?》

참으로 역겨운 인간의 구역질나는 말치레를 끝까지 들은 김형숙은 침착한 자세로 《세번째 거절도 준비되였으니 계속하세요.》 하며 친절한 웃음까지 보내고나서 진옥련에게 얼굴을 돌리고 아니기를 바라며 물었다.

《어떻게 된거예요? 믿기 어렵군요.》

너무도 뜻밖의 정황에서 백운남의 마구 늘어놓는 장황설로 정신을 잃을 지경에 이른 진옥련은 자기의 처지가 수치스러워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고개를 숙였다. 어느것이 아니고 어느것을 옳다고 대답할수도 없는 그였다. 사람은 이렇게 나약해질 때도 있는것이다. 그는 지금 분별을 잃은 사람처럼 고개만 끄덕대고있었다. 본의아닌 그 행동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였다. 한 녀자의 불행한 모습을 이윽히 바라보던 김형숙은 천천히 돌아섰다. 가슴에 차오르는 동정심우에 이름할수 없는 불만이 덧쌓이고있었다.

《가지 마세요! …》

등뒤에서 녀자의 애절한 목소리가 찾았다. 이어 장단이나 치듯 하는 백운남의 말이 들려왔다.

《리면상을 만나면 이야기하구려. 이 백운남은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외다. 그러문요, 허.》

백운남은 아무 생각없이 너불대고있는것이 아니였다. 김형숙을 만나는 순간 두뇌가 간교한 생각을 해낸것이였다. 무엇보다 진옥련을 여지없이 짓밟아 자기에게 돌려세우려는 마음을 먹었다. 또한 원산처녀의 마음속에 리면상이라는 인간이 혐오스러운 존재로 자리잡게 하고싶은 충동이 북받쳐올랐던것이다. 그래야 속이 편할것 같았다. 고학을 하고 돌아와 코대를 세우는 리면상에게 어떤 시름이라도 안겨주어야 시원하겠는데 신통한 계교가 떠오르지 않아 속앓이를 하던차였다. 진옥련이 리면상을 마음에 두었다는것은 순전히 거짓말이지만 말을 뱉아놓고보니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위선이란 듣는 사람에게 있어서 허황하기 짝이 없어야 의심을 품게 하며 마침내는 믿게 된다는것을 도박을 하면서 배웠다. 속지 않는다는 도박군들이지만 왕왕 어처구니없는 거짓수에는 넘어가는것이다. 이렇든저렇든 리면상이 저 맵짜기 고추같은 년에게서 무슨 말이든 들어야 할텐데. 그런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아니고 뭔가. 내가 손해볼것이란 한푼도 없으니까, 흐흐. 백운남은 마음이 흡족해났다.

잠시 걷던 김형숙은 고개를 돌렸다. 길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백운남이 뿌리치는 진옥련의 팔을 억지로 끼더니 끌어가다싶이 하며 가는것이였다. 강박속에 살아가는 한 녀자의 모습을 보는 그의 마음은 괴로웠다. 어이하여 이 나라의 녀인들은 나서부터 땅에 묻히는 날까지 짓눌려 살아야만 하는가. 어머니로 존경을 받으며 살지는 못할망정 사랑의 버림을 받고 고통으로 시달려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오랜만에 찾아온 고화의 집이건만 진옥련의 모습이 가슴에 걸린탓으로 마음은 무겁고 괴로웠다. 짐을 풀고나서 인사를 나누고 저녁을 먹은 뒤 김형숙은 피곤하다는 구실로 일찌기 자리를 펴고 누웠다. 고화가 고향소식을 이것저것 묻지만 내키지 않아 건성 대답할뿐이다.

《형숙아, 무슨 일이 있었니?》

《언니, 진옥련을 알지요?》

《응? … 너 그를 만났댔니?》

《그 녀자가 캬바레에서 노래를 부른다지요?》

《시집을 잘못 가서 그렇게 됐단다.》

《시집을 갔댔나요?》

김형숙은 진옥련의 불행이 생각보다 더 크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지상의 행복이라고 해야 할 가정까지 파괴당한 녀자가 아닌가.

고화는 김형숙의 심리를 녀성고유의 눈으로 읽고있었다. 진옥련을 통해 리면상을 생각하는것이 아닐가. 진옥련이 다방에 왔댔어. 리면상이 일본으로 떠나간 뒤였지… 그때 사랑이란 무엇인가고 수심에 잠겨 묻던 모습이 생각났다.

《책을 많이 봤겠는데 샤를로테를 알아?》

진옥련은 물끄러미 마주보며 고개만 저었다.

《도이췰란드 바이에른출신의 녀성, 미인이였던가봐. 그가 리스트에게 <사랑>이란 시를 써서 보냈어. 이런 구절이 생각나. <사랑이란 어떤것인지 나에게 숨기지 말아주세요 사랑은 넋의 숨결입니다…>, 그 시에 리스트가 곡을 붙여서 대답했어. 나도 같은 심정이라는 말밖에는 하지 못하겠구나.》

《그들은 사랑을 이루었는가요?》

《아니.》

진옥련은 흰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이루지 못했어도 이야기는 남기지 않았어요. 나에게 남은것은 허무와 고독뿐이예요. 가버렸어요. 다시는 만나지 못할거예요. 미련조차 남기지 않았어요. 잊어야 해요. 그래요. 잊겠어요. …》

진옥련이 남기고 간 말이 지금도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남자는 느껴보지도 못한 사랑일수도 있다. 그런 녀자도 있을가. 진옥련과 같은 감상적인 처녀들에게는 바라지 않지만 차례지기 쉽다고 그때는 생각했었다. 자기가 오늘 불행하다고 하여 아무 잘못도 없는 남자를 원망한다면 참으로 천박한 감정이다. 세상에 그런 녀자들이 없다고 할수 있는가.

《형숙아, 너 무엇을 생각하지?》

김형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속에서 맴도는것은 리면상이였다. 얼마나 무정한 남자인가. 일본에서 돌아와 소식조차 알리지 않았다. 작곡가가 되였으니 시골의 제자들과 나 같은건 얼마든지 무시할수 있으리라. 그렇게도 노래를 기다렸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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