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28

 

서울 길가의 일본료정들뿐만아니라 유럽식캬바레들은 저녁이 오면 요염한 추파를 던지며 사람들을 유혹했다. 밤이 오기만을 기다린듯 한 유흥가의 고객들은 벌써부터 점잔을 부리며 붐벼댄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대고 접대부들에게 이상한 손동작과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리면상은 마주앉은 강무현의 술마시는 거동을 묵묵히 지켜보고있었다. 억지에 못 견디고 이 자리에 끌려왔던것이다. 일어나려면 눌러앉히며 말 한마디 없이 잔만 기울이고있는것이다.

검푸르게 보이는 천정에는 무아경에 빠져들게 하는 갖가지 불꽃이 락화처럼 흩날리고 어둠속에 도사리고 앉은 악사들은 쉼없이 불고 두드려댄다. 색스폰이 슬픈 소리를 뿜으며 흐느낀다. 인생의 허무함을 담은 곡조가 절정을 이루자 참지 못한 신사숙녀들이 손을 마주잡으며 염세의 가락을 몸으로 그려내기 시작한다. 스스로가 불러들이는 애달픔을 안은채 더 큰 애달픔에 잠기며 안개속에 빠져드는 명상, 수평선 멀리로 작은 배와 함께 가버린 인생의 추억, 동굴속의 박쥐떼처럼 밀려드는 번민과 우수, 장미빛무지개같은 환영을 불러오면서 권태에 시달리는 마음들은 선률과 률동에서 위안을 찾고있는것이다. 음악이 고조되면서 광기어린 음향의 폭발적인 웨침과 함께 박수소리가 울리자 붉고 푸른 불빛이 명멸하는 속으로 숲의 요정같은 가수가 흰 가슴을 드러낸채 장발을 날리며 나타났다. 노래를 부른다. 이 저녁 부드러운 선률의 손으로 외로워하는 마음들을 쓰다듬어주는것이다.

《잘 보라구.》

강무현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가 알려주기 전에 음감이 뛰여난 리면상은 소리의 주인을 알아맞히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옥련이다. 불과 몇번 들은 노래였지만 생생히 기억되였다. 어찌된 일인가. 노래와 담을 쌓을것 같던 녀자가 아닌가. 진정 광대의 딸이여서 다시 노래를 파는 길에 나섰단 말인가. 믿을수 없지만 엄연한 사실이였다.

애절한 선률에 맞춰 서로 부둥켜안은 사람들이 고요히 물결친다. 환락에 지친 이 사람들은 숨조차 쉬지 않으며 그 어떤 목마름을 안고 움직인다. 고뇌의 몸부림만 차넘치는듯 한 캬바레안은 진공속에 들어선것처럼 느껴졌다. 마시고 사는 공기가 여기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것이 알렸다. 악사들도 가수도 신사숙녀들도 숨이 차하기 시작하였다.

리면상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난 며칠전 우연히 봤네. 도저히 믿을수가 없더란 말이네.》

《어떤 불행을 당했을가?》

《사람의 운명이란 예견 못하는것이니까.》

《왜선지 남같이 여겨지지 않아.》

《면상, 난 그 녀자를 만나자고 하네. 알고싶구만.》

《동정인가?》

《글쎄,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걸.》

리면상은 강무현이 자기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둔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튿날 그들은 진옥련을 만났다. 일본으로 간 사람들이 불쑥 나타난것으로 해서 저으기 놀란 그 녀자는 당황하여 인사도 바로 못하였다. 강무현의 표정을 가려본 진옥련은 자기와 관련된 심상치 않은 일을 예감하며 길옆 조용한 곳에 들어섰다. 그 녀자는 자기앞에 선 두 남자가 동정심을 품고 무엇인가 알려 한다는것을 판단하자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터뜨렸다. 그것은 놀라운 성격의 변화였지만 그보다 더 놀라게 하는것은 결혼한 녀성이였던것이다. 자기에 대해 알려고 하지 말며 서푼짜리 동정은 바라지도 않는다고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던 녀자가 난데없이 나타난 백운남에게는 금시 순해지는것이였다.

《내가 어인 일로 왔는고 하는건데 허허… 자, 보시오. 난 우리의 공주님을 찾아왔소. 당신들은 욕심을 부리지 마오.》

백운남은 진옥련의 어깨를 싸안으며 이건 내 녀자요 하는 눈길을 자랑스럽게 보냈다. 그와 같은 행동에 대해 진옥련이 조금도 탓하지 않으며 몸을 내맡기고 서있었다.

리면상은 인간세상에 이런 기묘한 인간관계도 있는가 하는 생각을 안은채 강무현과 함께 돌아섰다.

《저 사람은 누군가?》

《극단주네, 백화극단.》

《이상한걸. 왜 극단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지 않고 하필이면 캬바레에 자기 녀자를 밀어넣었을가?》

종로에 나선 두사람은 의문을 안은채 제 생각에 잠겨 걷기만 하였다.

《면상군!》

그들앞에 홍란파가 조용한 웃음을 지은채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는 렴필재가 서있었다. 조국에 돌아온 후 여러번 만났으며 작품을 놓고 의견도 나눈 홍란파였다.

《선생님… 어떻게 여기에…》

《허허, 선률을 찾는 사람은 류다른 촉기를 가지고있다오. 추적했소. 누구를 만나겠다면서 나갔다더군. 누군가는 추리했소. 그래 로정을 알았고 필재군과 함께 길목을 지켰소. 어떻소, 홈스 같은 글도 써낼것 같지 않소?》

홍란파의 유쾌한 언변에 따라웃던 리면상은 그제야 강무현을 생각했다.

《저의 친구입니다. 인사드리게. 홍란파선생이시네.》

소개를 기다리고있던 강무현은 두손을 모아잡으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선생님은 고향을 알게 해주신분입니다. 고향은 조국입니다. 저의 성씨는 강가이고 이름은 무현이라 합니다.》

허리굽힌 사람의 긴 인사말을 재미있게 듣던 홍란파가 활기있게 받았다.

《반갑소. 내 노래를 알아주는것만으로도 고맙기 이를데없는데 큰 인사를 받는구만.》

홍란파는 길옆의 음식점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방안은 초물자리를 깔아 포근한감을 주었다. 자개박이 빈상이 놓여있었다.

《우리 집사람이 이 음식점주인과 자매간처럼 지낸다오.》

홍란파가 설명을 더 하려는데 부인이 들어왔다. 중년의 아담한 체취에는 친근감이 흘렀다. 정갈한 머리가꿈과 은비녀가 유난히 눈을 끌었다.

《면상선생, 이런 곳에 모셨다고 나무람일랑 마세요. 우리 집이라는건 주인 손님으로 하루한시 비는 날이 없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대접하자면 잔치를 차려야 하는데 내 힘이 당하나요. 그래서 숨은거예요. 여보, 면상선생이 고학길에서 돌아왔는데 밥 한끼 대접 못하는구려 하는 한숨은 이젠 쉬지 않겠지요?》

성격이 활달한 부인은 긴말같지만 어떤 자린가를 생활적으로 짧게 표현하였다.

홍란파는 웃음을 지은채 세사람에게 옹색해하지 말라고 손짓을 해보였다.

리면상은 스승같은분이 기울여주는 사랑에 가슴이 후더워났다. 음악가로서 리지적인 침착성을 지닌 홍란파는 지우들사이의 정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였다. 남다른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나라잃고 음악창작이라는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들에 대한 우애였다.

리면상과 같은 작곡가들과 자리를 같이하는데 습관된 부인은 음식들이 차려지자 그 어떤 구속도 없이 잔에 술을 부었고 손아래 남동생들에게 권하듯 음식접시도 밀어놓아주었다. 나이로 봐도 훨씬 웃사람인 홍란파는 선후배를 가리지 않으며 소탈하게 웃고 진지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오늘은 무현군도 앉았는데 음악이야기는 그만하고 우리가 살고있는 이 숨막히는 세상을 두루 살펴보는게 어떻소?》

《선생님, 숨이 막히는 이 세상을 그대로 둘수는 없습니다.》

강무현은 초면이지만 마음을 풀어놓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고있소. 천추를 두고 이어질 망국의 한이요.》

홍란파가 긴 한숨을 내쉬자 부인이 옆에서 충고했다.

《여긴 집이 아니예요. 밥상을 두드리며 곡성을 해도 되는 자리가 아니거던요.》

홍란파를 바라보는 눈동자들이 말없이 떨렸다. 이름있는 작곡가가 자기의 말처럼 민족의 수난을 어떻게 감수하며 사는가를 알수 있었던것이다.

강무현은 무거워진 공기를 가셔내려고 말했다.

《최근 일본신문들에 공비라는 말이 자주 나타납니다. 총독놈과 조선주둔군 사령관이라는 놈의 국경순시가 잦은걸 보면 국경지역에 신경이 예민해졌다는걸 알수 있지요.》

고개를 끄덕인 홍란파가 물었다.

《그게 의병의 남은 세력이 아닐가?》

《제가 두루 들은 소린데 분명 손에 무장을 잡은 새로운 력량이 나타났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쉽게 물러날 조선민족입니까.》

렴필재가 강무현의 말에 자기의 의사를 보충했다.

《공산당이라는 말들이 돕니다. 엠엘은 아니라더군요.》

《그런가. 누구든 조선사람의 얼을 잃지 않고 구국의 기치를 들었다면 장하지.》

홍란파는 자리에 안해가 앉아있기에 화제를 돌리였다.

《그대들이 만난 녀자가 누군가?》

잘 알며 묻는 말이여서 리면상은 대답을 피할수도 없었다.

《저희들이 좀 아는 녀성인데… 재간있는 가수여서…》

《노래를 부르고있지 않소.》

홍란파의 흐려난 소리가 입안에서 잦아들었다.

《설마 그 녀자가 캬바레에서 노래를 팔줄은 몰랐습니다. 너무도 수치스러워서…》

돌미륵처럼 앉은 강무현은 리면상의 말을 들으며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여보, 당신이 좀 말해주구려.》

홍란파 부인의 말을 통하여 그들은 진옥련의 신상에 차례진 사연을 알수 있었다. 그 녀자는 아버지의 요구에 못이겨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서울바닥에서 소문난 도박군이였다. 숱한 빚을 진 패덕한은 1년도 못되는 사이에 한집안을 망하게 했다. 아버지는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홀로 남은 진옥련의 앞으로 이번에는 백운남이라는 괴물이 나타났다. 남편이 진 빚은 다 그에게 갚아야 할 돈이였다. 이렇게 진옥련은 집까지 차압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으며 캬바레에 몸을 내맡겼던것이다.

《이것은 생활에서 볼수 있는 현상이지 본질은 아니요. 백운남과 도박군녀석의 관계가 미묘하거던. 불량배의 행처는 누구도 모르오. 어데서든 못된짓을 그냥 하고있을거란 말이요.》

사리에 맞게 이야기하던 홍란파가 자기 안해를 바라보았다.

《그 망할 놈은 서울바닥에 있어요. 음식점들에는 내가 잘 아는 동무들이 많아요. 그녀석은 백운남이라는 량반과 밀려다녀요. 본 사람들이 말해주더군요.》

《나도 옥련은 잘 아오. 사람의 운명이란 알수 없지요. 도전하지 않으면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길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렴필재는 동정을 표시하면서도 랭담한 립장이였다.

음식점, 술집은 도박군들이 누리는 장소이다. 빚진 놈이 빚받이군과 술놀이를 함께 한다면 공모자들이라고 봐야 하지 않는가. 진옥련이 얼마나 불행한 녀자인가.

홍란파와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음식점을 나선 리면상은 대구로 내려가는 강무현을 바랬다. 그는 귀국후 대구운송회사에서 일하고있었다.

미아리고개를 넘는 리면상의 발걸음은 진옥련으로 하여 무거웠다. 류진과 연이, 그의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고있었다. 대문가에 들어서니 연이가 반겨주었다.

올해에 13살인 연이는 벌써 처녀꼴이 완연히 잡혔는데 얼굴은 물오르기 시작한 복숭아처럼 홍조가 비껴 청신하고 아릿다왔다.

《오빠, 들국화가 꽃을 피웠어요. 자, 보세요. 곱지요?》

울바자모퉁이를 따라 듬성듬성 포기를 이룬 들국화가 자기의 계절이 온것을 아는지 망울을 짓고 꽃을 피웠다. 뭇꽃들처럼 뛰여난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했고 향기도 류다른데가 없는 소박하고 순수한 꽃이다. 찬서리가 내린 후에도 피는 꽃, 따스한 계절은 양보하고 초목이 시들어 한숨을 지을 때 남보지 않는 외진 곳을 찾아 소리없이 웃는 꽃… 리면상은 들국화를 보며 명상에 잠기였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애틋한 사랑이 감성의 금선을 은은히 튕기고있었다. 단풍은 가지마다 락엽으로 지지만 들국화의 저 웃음은 가을의 노래가 아닌가. 아, 맑고 푸른 하늘이 너의 넋이 아니냐. 너처럼 산다면 이 나라 강산에도 웃음꽃이 덮이리라.

연이는 리면상의 곁에 앉아 하얀 꽃잎을 쓸어만졌다. 꽃처럼 고운 손길을 보는 순간 리면상의 뇌리에서 선률이 한줄기 바람이 되여 불고있었다. 환상의 광야에 락엽이 날린다. 바람이 분다. 찬서리를 이겨내며 꽃을 피운 들국화, 눈덮일 땅에 마지막 웃음을 남기는 꽃, 아름다움이 아니라 넋을 남기는것 아니랴. 꽃도 넋이 있으매 꽃을 사랑하는 사람의 넋은 꽃보다 고결해야 하리라. 령감이 심장으로 육박해오자 선률이 환희를 터쳤다.

《연이야, 어서 바이올린을 내다 주렴.》

리면상은 뇌수의 바구니안에 든 음부들을 쏟칠가봐 말조차 조심스럽게 하였다. 눈치빠른 연이가 냉큼 일어서더니 발걸음소리도 내지 않고 달려가 바이올린을 내왔다.

《오빠…》

연이가 주는 바이올린을 받아든 리면상은 흥분으로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활을 그었다. 심혼을 기울여 찾아낸 첫 음정이 울리자 이어 벽계수마냥 선률이 흘러나왔다.

어머니와 류진이까지 퇴마루에 나와앉아서 듣는다.

나무마다 잎이 지여 산들은 여위여가고 곡식을 걷어들인 벌은 끝없이 황량한데 하늘을 나는 새들은 보금자리를 걱정하며 구슬픈 노래를 부른다. 천지의 모습은 막막하지만 활과 현이 터뜨리는 격정은 소중한 희망을 안아오고있었다.

봄맞은 내물의 조잘거림처럼 도원의 그윽한 꽃향기마냥 환희에 넘친 격조는 그 무엇인가를 예언한다. 바이올린선률이 한집안사람들의 가슴속으로 따뜻이 스며들자 연이가 제일먼저 손벽을 치며 너무 좋아 선자리에서 콩콩 뛰였다. 어머니의 시름많던 얼굴에는 웃음이 피여나고 류진은 어른스럽게 바이올린을 받아들며 《선률이 부르기 쉬워 좋아요.》 하고 제법 평가했다.

《연이가 오라비 노래는 언제 나오는가구 기다리더니 소원을 푸는가 보네. 어서 들어가 저녁을 먹자구.》

《오빠, 오늘 나한테 먼저 배워줘야 해요.》

《그래, 네가 튕겨준 노래니 네 의견대로 고치마.》

류진은 바이올린을 어깨우에 올려놓더니 활을 긋기 시작했다. 리면상이 찾아낸 음들을 되찾느라 이따금 끊기워도 선률은 틀리지 않게 옮기고있었다.

리면상은 류진의 재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음악교육이라는 말도 모르는데 한번 들은 선률을 재현하고있지 않는가.

《형님, 노래가 밝고 흥취가 나서 좋아요. 장식음을 쓸수는 없나요?》

《응?! … 너 어데서 그런 말까지 배웠니?》

《배워주는 사람이 있어요. 혼자 형님책을 본게 전부예요.》

음감이 뛰여난 사람의 두뇌가 명석하다고 말한다. 류진의 총명을 본것이 기쁘지만 마음속으로 음악을 배우지 말기를 바라게 되는 리면상이였다. 이상한 심리이여서 자신도 리해가 되지 않았다.

가요 《들국화》가 음반에 취입된지 며칠 되지 않아 리면상은 총독부 학무국의 호출을 받았다.

조선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문화통치》는 본질에 있어서 무단통치의 계속이였으며 방법과 수단에 있어서는 보다 교활무쌍해진 식민지정책으로 한 민족의 정신과 언어와 문화, 력사를 여지없이 말살하기 위한 전대미문의 폭압정치였다. 총독부의 검열제도는 제놈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 어떤 표현에 대해서도 잔인한 징계처분을 적용하였다.

리면상이 만난 검열관은 미이라를 방불케 하듯 바짝 마른 대신 눈길은 어둠속에서 몸서리치게 하는 야수의 그것과 꼭같았다. 령장없는 군복에 피빛이 도는 장화를 신어서인지 금시 칼부림이라도 할것 같은데다 목소리가 배고동소리같이 높아 첫마디부터 귀가 멍멍해났다.

《당신이 리면상인가?》

《그렇소.》

온통 뼈마디뿐인 손을 마주잡은 검열관은 찌를듯이 노려보았다.

《대답해보라. <백일홍은 피였다 시들었는데 들국화야/ 너의 웃음 맑기도 해라… 맑고 푸른 하늘이 너의 넋이냐/ 락엽지는 산과 들에 웃음 덮어라>, 무엇을 암시하려고 했는가?》

총독부에 들어앉아 공밥살이를 하는 놈이 아니였다. 생겨먹은것도 지금같이 신경을 도사리고 살자니 강말랐는지도 모른다. 정통을 찔러대는 물음에 리면상은 태연하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자연풍경을 담았을뿐인데요.》

살기띤 눈알이 번들거리며 다가들었다.

《들국화의 넋이 하늘인가. 락엽지는 산과 들에 웃음이 언제 덮이는가. 가사에는 분명 바라는것이 있다. 누가 가사를 썼는가?》

《내가 썼소.》

《작곡가가 가사까지 쓰는가. 알아두라! 이 시각부터 당신은 동향감시를 받을것이다. <들국화>에 금곡처분을 내렸다. 알았는가? 내가 당신을 특별히 만나는것은 주목되는 인물이기때문이며 대일본제국에 충실한 선인으로 노래를 지을것을 요구하기 위해서이다.》

처녀작에 대한 《금곡령》은 리면상으로 하여금 형언할수 없는 상실감과 함께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을 받으며 걸어야 할 창작의 앞날을 두고 불안과 위구를 지울수 없게 하였다. 식민지민족의 언어까지 연구하는 일본놈들이다. 오늘은 가사를 놓고 시비하지만 래일은 노래의 장단과 색갈까지 걸고들것은 뻔한노릇이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리면상은 지금 안국동 네거리에 자리잡은 레코드상점을 찾아가고있다. 험악한 세상이 부를수 없게 한 노래지만 레코드판이라도 한개 건사하고싶은 이루지 못할 미련을 안고 상점앞에 이른 그는 선뜻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채 잠시 망설이였다.

상점안에서 주인인듯 한 중년녀인이 내다보다 그쪽에서 먼저 아는체하면서 마주 나오기까지 했다. 초면이여서 리면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면상선생이지요? 경찰이 여기에도 왔다가 갔어요.》

하도 친절한 녀인이여서 고개만 끄덕인 리면상은 대중없이 중얼거렸다.

《행여나 해서… 한장이라도 남은게 있으면…》

측은할만큼 떨려나는 그 소리에 녀인은 면상을 뒤마당으로 데리고갔다. 레코드판을 무더기로 내다놓고 짓뭉갠 음악의 죽음터가 펼쳐져있었다. 갈가리 찢긴 레코드판들이 시체마냥 나딩군다. 리면상을 놀라게 한것은 깨여진 쪼각들을 주으며 소리없이 울고있는 류연의 모습이였다. 저애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는가. 비참한 광경을 보이는것 자체가 더 큰 고통이였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희망을 안고 기쁨에 넘쳐있었건만 오늘은 절망으로 울어야 하는 현실이다.

리면상은 찢어지는 아픔을 누르며 연이를 안아 일으켰다.

《연이야, 여기엔 왜 왔니?! …》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이가 울음소리를 터뜨리며 리면상의 가슴에 안기였다. 오빠가 자기는 축음기를 빌려오겠으니 레코드판을 사오라고 독촉하여 나왔다는것이다. 한가정이 행복으로 기다리는 노래가 이렇듯 참혹하게 짓밟힐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상점주인도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오빠, 집에 가자요. 내가 오늘 밤 깨진걸 다 붙여놓겠어요. …》

《그렇게 붙여선 쓰지 못한다. …》

《소리는 못 들어도 간수할래요. … 오빠의 노래가 아니예요. …》

《연이야, 어머니한텐 말하지 말아. 약속하지? … 어서 집으로 가거라. 오빠보고는 내가 가져온다고 하렴.》

버리라는데도 연이는 말을 듣지 않고 깨여진 레코드판을 싸서 품에 안고 갔다.

적막한 심정을 안고 선 리면상은 움직일줄 몰랐다.

《면상선생, 너무 괴로워말아요.》

노래를 잘못 만나 상점이 몰풍경이 되고 장사로는 크게 손해를 봤다고 해야 할 녀인이 대범하게 말하지 않는가. 리면상은 급기야 찾아드는 미안스러움으로 깊은 생각없이 말했다.

《나라는 사람은 이름도 없는 작곡가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너무도 커서…》

《이름이 없다니요. 지금쯤은 소문이 날개를 펴고 알려줄거예요.》

장사군들이 득실거리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듣는 말이여서 리면상은 주인녀자를 다시 보았다. 리속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이 이상하게 생각될 지경이였다.

《선생은 초면이 아니예요.》

친근한 웃음을 담은 말이 더욱 놀라게 하였다.

《예?! …》

《보라매다방을 잊지야 않았겠지요?》

짓밟힌 노래를 두고 가슴아파하는 이 녀인이 자기와 어떤 인연이 있을것 같은 예감이 들자 외롭고 울적하던 마음이 가셔지면서 짜릿한 추억이 등불처럼 마주왔다. 그 불빛속에서 푸른 하늘과 바다를 이고진 처녀가 그윽한 미소를 보낸다. 김형숙이였다. 백묵가루가 묻은 잉크자욱이 찍힌 손가락이 의식속에서 회오리치자 뒤이어 죄스러운 감정이 따랐다. 그제야 한시도 잊지 않고 산 처녀임을 느꼈고 그리워지는 마음은 절절한 선률을 더듬었다.

리면상의 앞에는 보라매다방 녀주인이였던 고화가 서있었다. 오늘까지 의문을 자아내는 능청스럽던 바깥주인은 감옥에서 만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몇번 만났지만 인상깊은 이야기를 나눈 일이 없는데도 고인이 된 사람조차 선명하게 뇌리에 자리잡고있는것이 놀라왔다. 이들부부는 어떤 사람인가. 김형숙과는 어떤 관계이고 다방과 레코드매점이라는 어덴가 음악으로 일맥상통하는 간판을 내걸고 장사하는 사람들 같지 않게 사는 까닭은 무엇인가.

《들어가요.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싶었어요.》

그때 조령출이 오일선과 함께 마당에 들어섰다. 조령출은 고화에게 인사를 하였다.

《사모님, 그간 안녕하십니까?》

좀해서는 고개를 숙이는 일이 없는 조령출이 사모님이라고 찾는것을 보면 작고한 다방주인이 문학의 스승이였을수 있다고 리면상은 생각했다. 한때는 시재로 이름이 있었다고 한 진옥련의 말이 떠올랐던것이다.

오일선은 리면상의 곁에 서서 고개를 숙인채 짓밟히운 레코드판을 보며 어깨를 옹송그렸다.

《일선이, 우리의 첫 노래가 가혹한 세례를 받았소. …》

목갈린 리면상의 소리를 듣기가 괴로운지 조령출이 녀주인에게 물었다.

《사모님, 경찰들이 이런 만용을 부렸다는게 사실입니까? 아, 왜놈의 종자들! 인간의 문명마저 짓밟는 야수들! …》

조령출의 격분한 웨침을 듣고있던 고화의 시선이 레코드판 잔해를 노려보는데 눈빛이 칼날처럼 번쩍거렸다.

《시인아, 묻거니 대답을 하려무나. 노래마저 죽어가야 하는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너무도 가냘픈 소리만을 울리는구나. 얼마나 고운 꽃을 피웠더냐. 밤도와 불러본 가락이였건만 하루낮동안 불어친 모진 광풍에 스러져버리였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느냐고 부르짖은 사람도 있다. 누구든 배달의 넋을 지녔다면 눈물로만 이 땅을 적시지 말아야 하리로다.》

고화의 목소리는 비분으로 떨고있었다. 조령출을 불러 하는 말이지만 결코 한사람과 나누는 토로가 아니였다. 작곡가의 처녀작이 당한 비참한 현실을 보며 하는 그 말속에는 지성이 넘쳐 흘렀고 놀라게 하는 뜻이 담겨있었다. 리면상은 초면인 고화가 어떤 녀성인지 모르지만 고마웠다. 짓밟힌 노래를 두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것은 참으로 큰 의지였다. 자기의 감정을 이기기 힘들었던지 고화는 찾아온 사람들을 남겨둔채 문을 열고 사라졌다.

오일선은 고화의 행동에 겁을 먹으며 《선생님, 전 가겠어요.》 하고 말을 하고서도 어떻게 할지 몰라 두사람을 번갈아 보기만 하였다.

《사모님은 참지 못하는 성미요. 얼마나 분했으면…》

방안에서 고화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면상선생, 어서 들어오세요.》

조령출이 리면상에게 들어가라고 눈짓을 해보이자 고화가 다시 찾았다.

《명암은 어린 종달새가 놀라지 않게 해요.》

조령출이 오일선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우리도 들어오라누만.》

《전…》

오일선이 아직도 겁먹은 얼굴로 말하자 리면상은 그의 손을 잡았다.

《일선이,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아. 좋은분이니 걱정말아.》

세사람이 방안에 들어가니 고화는 밖에서와는 달리 밝아진 얼굴로 맞아주었다.

《우리의 노래 <들국화>가 세상에 태여난것을 축하해요.》

고화는 자기가 따로 건사해두었던 레코드판을 리면상에게 주었다.

《부인님, 고맙습니다! …》

리면상의 갈린 소리를 들으며 고화는 오일선의 손을 잡아 자기곁에 앉히였다.

《면상선생의 음악관이 마음에 들어요. 울지 않고 희망에 넘쳐있는것이 좋아요. 일본놈들의 눈과 귀에 거슬린게 바로 그거예요. 우리 젊은 가수가 노래의 곡상을 참 잘 살려 불렀어요. 기뻐요. 다시한번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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